부제 : 흑백의 도시
편하게 스페인으로 넘어갈 수 있었지만 택시를 타고 국경까지 가기로 했어요. 여행 전에 제가 '국경을 한 번 보고 싶다'고 했더니 모로코를 잘 아시는 일행분께서 저를 위해 특별히 코스로 집어넣으신 것이었어요.
가격 흥정을 한 후, 두 대를 잡아서 저는 일행 3명과 타게 되었어요. 모로코를 잘 아시는 일행분과는 다른 택시였어요. 저는 뒷좌석 가운데에 앉았어요. 양쪽은 다른 일행의 자리. 조그마한 택시의 뒷자리에 남자 셋이 탔으니 당연히 좁고 창밖은 보이지도 않았어요. 창밖을 보려고 했으나 사방이 사람들로 가려져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어차피 창밖도 보지 못하는 것 잠이나 자야겠다' 생각하고 잠을 잤어요.
드디어 택시가 국경에 도착했어요.
"국경 잘 봤니? 나무들 싹 베어놓고 초소 세워놓은 거 봤어?"
"아니요. 그냥 잤어요."
"너 국경 보고 싶다고 해서 일부러 택시 타고 온 건데 거기서 자냐!"
그 일행분께서 기분이 많이 상하셨어요. 하지만 '다른 일행분들이 창밖 풍경 보시고 사진 찍으시겠다고 다 창에 달라붙어서 창밖이 안 보였어요'라고 말할 수도 없었어요. 봤다고 거짓말 할 수도 있었지만 일단 뭘 봤어야 거짓말이라도 하죠. 진짜 제 양쪽에서 양쪽 창문에 찰싹 달라붙어서 사진 찍고 풍경 보시는 바람에 저는 창밖을 전혀 볼 수 없었어요. 뭐가 어떻게 생긴지 대충이라도 알아야 둘러대기라도 하죠.
출국심사대로 가는데 갑자기 비가 퍼붓기 시작했어요. 쏴아아 퍼부어서 우산을 펼치고 줄을 섰어요. 출국카드를 작성하고 한참을 기다리니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되었어요. 출국심사를 받는데 갑자기 일행에게 들어와보라고 했어요.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냥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어요.
한참 기다렸어요. 안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 출국심사대에서 우리 여권을 가져갔는데 줄 생각은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 출국심사부터 먼저 해주고 있었어요. 비는 계속 내렸어요.
"무슨 일이지?"
가장 먼저 출국심사를 받던 일행이 웃으면서 출국심사대 직원에게 인사를 하고 뭐라 인사말 몇 마디 주고 받더니 안으로 끌려 들어갔어요. 한참 후에야 그 일행분이 나왔어요. 출국심사대 직원이 그 일행을 끌고 들어간 이유는 그 일행이 뭔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중국인 몇 명이 도난신고된 한국 여권을 가지고 국경을 넘다가 출국심사대에서 잡혔는데 이놈들이 한국인인지 중국인인지 구분해 달라고 하기 위한 것이었어요. 일행분은 '그놈들 중국인이야. 한국어 아는 거라고는 '나는 한국인입니다' 밖에 없어'라고 하셨어요. 저도 그렇고 일행 모두 화가 제대로 났어요. 이 망할 중국인 밀입국자 놈들 때문에 출국심사만 1시간 걸렸어요. 중국인들이 유럽에서 한국 여권이나 일본 여권 사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는데 그것은 실제였어요.
모로코에서 며칠 머물렀더라...얼마 머무르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모로코를 잘 아시는 분께서 특히 주의 주신 것 - 소매치기 조심, 강도 조심, 도둑 조심 - 중 절도와 관련된 건 거의 다 보았어요. 망할 중국인 밀입국자 놈들의 여권은 보나마나 소매치기나 도둑질로 턴 것. 강도는 못 보았어요. 으슥한 길은 절대 들어가지 않았고, 항상 최소 2인 이상으로 돌아다녔거든요. 마라케시에서 저 혼자 남았던 경우 빼구요. 모로코 여행에서의 교훈은 경험자의 말은 일단 듣고 봐야한다는 것이었네요.
이제 스페인 입국심사. 정말 별 거 없었어요. 우리 여권에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받은 입국도장이 찍혀 있었기 때문에 바로 통과되었어요.
택시를 타고 세우타로 갔어요. 오늘의 최종 목적지는 알헤시라스. 세우타에서 배를 타고 스페인 본토에 있는 알헤시라스로 들어가면 오늘 일정이 끝나요.
택시를 타자마자 여기가 스페인이라는 것이 느껴졌어요. 일단 택시 기사가 틀어놓은 라디오 방송이 스페인어 방송. 불어도 안 통하고 아랍어도 안 통했어요. 처음 넘은 국경이다보니 이런 갑작스러운 문화의 변화가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고작 국경 하나 걸어서 넘어왔을 뿐인데 이렇게 말과 문화가 확 달라져 버리다니!
드디어 세우타 시내. 대항해시대2를 해 본 사람이라면 당연히 알게 되는 항구. 하늘에는 구름이 자욱했고 해가 질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어요. 상점은 모두 문을 닫았고, 거리에는 달리는 차도 사람도 거의 보이지 않았어요. 왜?
오늘 토요일.
여기는 스페인. 철저하게 시에스타를 지키는 스페인. 토요일날 늦게까지 모든 상점이 열심히 일할 거라는 생각 자체가 큰 오산인 동네. 여기는 토, 일요일이 쉬는 날.
세우타 바닷가.
세우타의 거리. 여기도 비가 꽤 내렸었나 봐요.
세우타를 돌아다니는데 무언가 물이 빠진 느낌이었어요. 사진을 분명 컬러로 찍었는데 얼핏 보면 흑백. 이제 불어와 아랍어가 통하지 않는 지역에 왔다는 것 때문에 갑갑했어요. 여행이 끝나간다는 사실도 느껴졌어요. 이제 스페인에서의 주요 일정은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 세비야의 히랄다탑과 대성당, 마드리드였는데 전부 오전 관광, 오후 이동. 한 곳에 진득하게 머무르는 일정은 없어요. 여행이 끝나간다는 것 때문에 기분이 우울해지려는데 거리엔 사람 하나도 없고 하늘은 우중충하니 기분이 좋을래야 좋을 수 없었어요.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이제 식사를 해도 될 만큼 나았다는 것이었어요. 다 비워내서 나은 것인지 드디어 물에 적응해서 나은 것인지 어떻게 해서 나은 지는 몰라요. 하여간 폭식을 하지 않고 단식을 하자 다시 식사를 해도 될 정도로 자연 치유가 되었어요.
"너는 유럽 체질인가 보다. 얘가 유럽 넘어오니까 싹 나아버리네?"
일행분이 저를 보며 놀리셨어요. 이분께서는 처음 튀니지에 도착해서 제가 처음 먹는 박하차를 너무 좋아하자 '너는 아랍이 체질인가 보구나'라고 말씀하신 분.
축 늘어지고 울적하게 만드는 거리의 한산함.
흑백의 거리.
뭔지는 모르지만 왠지 뭔가 있는 곳 같아서 찍은 사진.
아무리 봐도 흑백의 도시. 적당히 돌아다니다 알헤시라스로 가는 배에 올라탔어요.
배에서 바라본 세우타 항구.
배에 올라타자마자 잠들었어요. 일행분들은 커피를 한 잔씩 드시는 것 같았어요. 잠결에 얼핏 들은 이야기. '쟤 정말 잘 자네.' 제가 운송수단에서 잠자는 건 정말 잘 해요.
드디어 도착한 알헤시라스. 여기는 탕헤르에서도 배로 올 수 있대요. 인상적인 것은 모로코 돈도 환전해준다는 것.
여관에 들어갔어요. 여관 벽에 의자가 있었어요.
의자를 당겨서 앉으려고 했는데
음...아이디어 좋네요.
짐을 풀고 쉬려는데 전부 모이라고 했어요. 다음날 일정을 논의하기 위해서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