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다닐 때 세계사 과목을 매우 좋아했어요. 수능 선택 과목도 세계사였고, 세계사는 고3 시작하자마자 혼자서 다 끝내서 세계사 시간때에는 적당히 편히 듣고 놀아도 되었어요. 고3때 담임 선생님이 세계사였는데 담임 선생님께서도 제가 세계사를 고3 시작했을 때 다 끝내었다는 것을 알고 계셔서 너무 떠들지만 않으면 저는 그냥 놔두셨거든요.
어려서부터 세계사를 좋아했는데 항상 드는 생각이 왜 동양은 서양보다 못한가였어요. 역사가 승자 위주의 역사이다보니 실제 접하는 역사 대부분은 유럽 - 그 중에서도 영국, 프랑스의 역사였죠.
과거 동양이 서양보다 더 앞서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대학교 와서였어요. 산업혁명을 통해 서양이 동양을 앞지르게 되었죠. 그리고 산업혁명의 토대가 된 것은 신대륙 및 신항로 개척과 그로 인한 가격혁명이었구요. 하지만 여기서 또 질문이 생겼어요. 그렇다면 왜 동양은 망했는가? 아프리카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가나 왕국이니 말리 왕국이니 송하이 왕국이니 하는데 어느 순간 세계사에서 싹 사라졌다가 제국주의 시대에 서구 열강의 식민지라고 잠깐 등장하고 1960년대에 대거 우루루 독립했다는 것 - 이렇게 딱 두 번 나오니까요. 그러면 아프리카는 애초에 사람들이 멍청해서 역사고 나발이고 없었고, 동양은 한심해서 시간을 거슬러 기어올라가 유럽에게 역전당해 식민지로 전락했을까요?
이런 질문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 먼저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동양사라고 하면 세계사에서 중국사, (일본사조차 제대로 배우지 않았어요. 제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일본사는 나라 시대, 헤이안 시대, 무로마치 막부, 가라쿠라 막부, 에도 막부, 임진왜란이라는 단어만 알면 끝이었어요) 그리고 국사 시간에 배우는 한국사가 전부였어요. 국사야 그렇다 치는데 나머지 아시아 지역에서 뭐가 어떻게 돌아갔는지 그 당시에는 알 수가 없었어요.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하고 인터넷에서 쉽게 자료를 찾을 수 있는 시절도 아니었으니까요. 게다가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유교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는 말이 많이 돌아다닐 때였어요. 지금이야 우리 고유의 전통도 중요하고 지역의 문화들도 중요하다고 하지만 제가 학교다닐 때만 해도 무조건 서양 - 특히 미국이 최고이고 사투리는 철저히 배척하던 때였어요. 먼 이야기 같지만 1990년대 이야기랍니다. 근대화 이론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때죠.
더 재미있는 것은 그러면 왜 서양이 그렇게 빠르게 발전했는지에 대한 설명도 제대로 없었다는 것. 서양사에 대해 중점적으로 다루는데 서양의 발전 과정조차 왜 그렇게 어느 순간 빠른 성장을 이루어내었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 주어진 자료만 놓고 보면 서양은 어느 날 갑자기 머리가 트여서 엄청난 성장을 하고 동양은 어느 날 갑자기 멍청해져서 시간을 거슬러간 것.
그러던 차에 우연히 신문의 책 소개로 알게 된 책이 바로 '설탕 커피 그리고 폭력'이었어요.
이 책을 읽고서야 어떤 과정을 통해 서양이 급격히 발전하고 동양과 아프리카가 몰락해갔는지 대충 알 수 있게 되었어요.
이 책은 여러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반드시 꼭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어요. 그냥 흥미로워보이는 것부터 골라 읽어도 큰 문제 없어요. '유럽이 아메리카 대륙과 신항로를 개척했고, 그 후에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정도만 알면 전혀 무리 없이 볼 수 있어요.
이 책에서 중요한 내용이라면 '유럽이 아메리카에서 황금과 은만 유럽에 가져간 것이 아니다'라는 거에요. 라틴 아메리카가 엄청난 원료의 보급지가 되면서 유럽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급격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기존 무역로 - 즉 실크로드의 중요성이 떨어지고 아시아 국가들의 무역망이 파괴되면서 아시아가 몰락해가구요.
학교에서 접할 수 없는 세계사의 연결고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리고 책이 전혀 어렵지 않고 반드시 긴 시간을 잡아 처음부터 끝까지 통독해야만 하는 책이 아니라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높은 점수를 주는 책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