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두 개의 장벽 (2012)

두 개의 장벽 - 17 투르크메니스탄 아슈하바트

좀좀이 2012. 8. 26. 05:15
728x90

교과서를 못 구했다.


잠 못 드는 밤은 아니었어요. 잠은 아주 실컷 잘 잤어요. 꽤 깊게 잘 자서 아침에 개운하게 일어났어요.


오늘은 아슈하바트를 떠나는 날. 저녁 기차를 타고 투르크멘바쉬로 이동하는 날이에요. 저녁까지는 시간이 있었어요. 전날 대충 세수비누로 빨아놓은 옷은 모두 잘 말라 있었어요. 짐을 하나하나 꾸리며 오늘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했어요.


심란한 아침이다.


마음이 편할 리 없었어요. 포기하면 쉬워. 그냥 포기해버려. 이렇게 생각을 하며 세뇌를 시키려 했지만 되지 않았어요.





제가 묵었던 다이한 호텔 방이에요. TV를 틀어 보았는데 나오는 채널도 없고, 어떻게 조작해야 하는지도 잘 몰라서 딱 한 번 틀어보고 말았어요. 가장 열심히 사용한 건 에어컨과 냉장고.


호텔 카운터에 혹시 짐 좀 맡기고 이따 4시쯤에 찾으러 올 수 있냐고 물어보자 그러라고 허락해 주셨어요. 그래서 호텔 카운터 안쪽에 짐을 가져다 놓고 밖으로 나왔어요.


하나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땀이 쫙!


"푸하하하하하하!"


나와서 딱 열 걸음 걷자마자 땀이 비오듯 쏟아지기 시작했어요. 아슈하바트는 오늘도 덥고 습하구나! 그냥 웃음만 나왔어요. 잠깐 웃고 나서 다시 고민. 교과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포기? 하지만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어요. 포기하기는 일러! 포기를 안 한다면 어떻게? 서점 다 뒤져보았는데 안 팔았잖아. 사람들 잡고 물어보았는데 다 한결같이 모르겠다고 하거나 안 판다고 했잖아.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못 구한 것을 어떻게 구해?


끝 없는 고민. 과연 어찌 해야 한단 말인가?



구했어요. 어떻게 구했는지는 공개하지 않겠습니다. 하여간 구했어요. 사진에서 보이시나요? Satuwa degişli däl...비매품. 일반인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쥐어짜고 고민해서 겨우 구했어요. 물론 덕분에 오후 2시가 넘도록 아무 것도 못 먹고 쉬지 않고 거리를 걸어다녀야 했지만요. '역시 근성이 최고다!' 였어요. 거기에 운까지 따라주었어요. 이걸 구한 건 정말 대박 로또 당첨 행운이 따라주었다는 것 외에는 마땅히 표현할 방법이 없었어요. 국경에서 100달러 액땜으로 날렸다 생각한 게 정말로 적중한 것 같았어요. 대사관도 현지인들도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는데 1권과 6권을 제외하고 2,3,4,5,7,8,9권과 교사용 지도서를 구했으니까요.



맨 마지막 장을 보면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교과서를 주었다가 다시 걷어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책을 사용한 학생 이름, 그리고 몇 년도에 사용했는지, 그 해 언제부터 언제까지 사용했는지를 기입하게 되어 있어요. 아마 3년 물려 쓰고 폐기하나 봐요.


교과서를 구하고 다시 돌아다니기 시작했어요. 멀리 가는 건 귀찮고, 어제 어차피 거의 다 보았기 때문에 모스크나 가 보기로 했어요.



공원을 지나서 한참 걸어가자 모스크가 나타났어요.



모스크 이름은 에르투룰 가지 모스크 Ertuğrul Gazi Camii 였어요. 표지판에 이렇게 적혀 있었는데, 터키어로 적혀 있었기 때문에 투르크멘 사람들이 이 모스크를 무엇이라고 부르는지는 잘 몰라요. 이 모스크는 터키가 지어준 모스크였어요.




안으로 들어가자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괜찮아 보였어요. 친구는 들어가기 귀찮다고 하며 그늘로 기어들어갔어요.


"이거 완전 이스탄불 예니 자미잖아."


친구는 이 말을 하고 그늘에 들어가 햇볕을 피하며 자기는 모스크라면 신물이 나므로 안으로 절대 안 들어가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저 혼자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어요. 안에서는 예배가 진행되고 있었어요.



예배가 진행중인 걸 보고 나왔다가 사람들이 예배가 끝나고 나가자 다시 들어갔어요.



투르크메나바트에서 본 모스크보다 크거나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이 모스크 역시 내부는 볼 만 했어요. 알록달록하고 작은 것이 참 예쁘고 마음에 들었어요. 크지는 않았지만 터키가 이 나라에 모스크를 지어주며 대충 무성의하게 지어주었을 리는 없었을 테니까요.



바닥에 깔려 있는 카페트를 보면 투르크메니스탄 국기에 그려진 카페트 문양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어요.


모스크를 다 보고 나와서 친구에게 안을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어요.


"이거 내부는 이스탄불 블루 모스크잖아. 그거 그대로 베껴 왔네."

"지금 사람 없어. 이왕 온 김에 후다닥 보고 나와."


친구는 제가 찍어온 사진을 보더니 안으로 들어가 대충 보고 밖으로 나왔어요.



모스크에서 나와 이왕 온 김에 시장들이나 마지막으로 구경하고 가자고 했어요. 그래서 먼저 루스키 바자르로 갔어요.



루스키 바자르를 돌아다니는데 과일 장수가 우리들에게 멜론을 사 가라고 했어요.


"투르크메니스탄 멜론이 최고야!"


부하라에서 국경까지 타고 간 택시의 운전 기사가 한 말이 떠올랐어요. 여기 와서 지금 아니면 멜론 먹을 기회가 없을 거 같은데? 멜론을 구경하고 있는데 아저씨께서 시식해 보라고 한 조각 주셨어요.


"이거 완전 달아!"


사고는 싶은데 어떻게 먹을 방법이 없었어요. 그래서 아저씨께 칼이 없어서 우리가 못 먹는다고 하자



멜론을 봉지에 넣은 후 칼로 그 자리에서 쓱쓱 잘라 주셨어요.


"사진 찍어도 되나요?"

"찍어."



뭐 별 거냐고 찍으라고 하시고는 제가 뭘 찍는지 신경도 안 쓰셨어요. 그래서 찍었어요. 저 길다랗고 커다란 멜론! 일단 시식했을 때 엄청나게 달았기 때문에 더욱 기대가 높아졌어요.


멜론을 사서 호텔 근처 공원으로 갔어요.



벤치에 앉아서 멜론을 한 입 베어 물었어요.


"어으...달아!"


초콜렛, 설탕, 꿀 이런 것보다 멜론이 훨씬 더 달았어요. 과일이 단 맛 덩어리보다 더 달 수도 있다는 사실에 충격 그 자체였어요. 계속 먹는데 목이 타고 혀 끝이 아렸어요.


"여기 멜론 안 먹었으면 큰일날 뻔 했다."


투르크메니스탄 멜론이 좋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좋을 줄은 몰랐어요. 둘이서 남김 없이 싹싹 다 갉아먹고 멜론 껍질은 쓰레기통에 잘 버렸어요. 손을 씻기 위해 주위에 손 씻을 곳이 있나 둘러보니 화장실이 있었어요. 화장실 이용 요금은 공짜. 손을 씻고 세수를 하고 그늘진 벤치에 앉았어요. 눈을 뜨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눈이 너무 피곤해서 눈을 감고 있었어요.


얼마쯤 잤을까? 그늘이 사라지고 햇볕이 몸으로 쏟아지기 시작해 일어났어요. 옆을 보니 친구는 그늘을 따라 다른 벤치로 자리를 옮겼어요. 하지만 너무 뜨거웠어요. 그래서 후딱 테케 바자르만 보고 호텔로 돌아가기로 했어요.


테케 바자르에 갔는데 볼 것이 아무 것도 없었어요. 역시나 평범한 중앙아시아 시장. 한 가지 중요한 발견이라면 여기서 백주대낮에 담배를 태우는 사람들과 경찰을 발견했다는 것이었어요. 시장 안에는 없었고, 시장 근처에서 담배를 태우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경찰도 와서 태우고 갔어요. 거리에서 담배를 태우는 경찰도 있었어요. 대놓고 태우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당히 담배를 태우고 있었어요. 물론, 외국인이 모르고 담배 뻑뻑 태우면 바로 벌금 20달러.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만의 태우는 방법이 있었어요. 이것 역시 나름 큰 수확이었어요. 테케 바자르는 볼 것이 없었지만, 이 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담배를 태우는지 확실히 보았기 때문에 거기 간 소득은 아주 컸어요.


"이제 호텔 가자."


호텔에 돌아가 짐을 찾고 로비에 앉아서 짐을 다시 쌌어요. 서적 반출이 금지되어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절대 긴장을 늦출 수 없었어요. 여기서 방법이란 오직 하나. 가장 소중한 교과서들을 가방 가장 안쪽에 넣고, 그 위에 옷, 양말, 속옷을 잔뜩 쌓아서 뒤지고 싶지 않게 만들기. 짐을 다시 정리한 후 조금 쉬다가 다시 나왔어요.



안녕, 다이한 호텔. 안녕, 아슈하바트.


책 때문에 짐이 무거워서 택시를 타고 아슈하바트 역으로 갔어요.



아슈하바트 역에 도착해서 생각해보니


어제부터 오늘까지 먹은 것이라고는 음료수, 과자 부스러기, 멜론 반 통이 전부.


기차를 타고 가는데 내일 일정이 어떻게 될 지 모르므로 반드시 무언가 먹어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기차역에 있는 케밥집으로 갔어요.



정신 없이 팔리는 케밥집. 현지인들도 매우 많이 와서 케밥을 사 먹고 있었어요. 우리도 가서 케밥을 사왔어요.


"진작에 여기 와서 케밥 사 먹을걸!"


후회가 밀려올 정도로 맛있었어요. 이 집 케밥의 특징은 마요네즈를 듬뿍 쳐준다는 것. 역 앞에서 케밥을 다 먹고 느긋하게 대합실로 들어갔어요.



대합실 안은 시원했어요. TV에서는 단조롭고 지루한 투르크메니스탄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어요.


주목할 것은 전광판. 오후 6시 40분인데 섭씨 38도. 지금은 기온이 떨어지고 있는 중인데 38도면 아까 낮에는 대체 얼마나 더웠던 것이지? 그래서 그 지극 정성에 사람들도 감동한 건가? 그냥 더운 게 아니었어요. 정말로 더웠던 거였어요.


아침부터 제일 더울 때까지 계속 밖에서 돌아다녔더니 잠이 몰려왔어요. 그래서 카메라 가방을 품에 껴안고 잠깐 눈을 붙였어요. 기차가 오려면 한참 기다려야 했거든요. 우리가 타고 가는 기차는 가장 마지막에 출발하는 기차. 다른 기차가 다 가고 나서야 우리가 갈 기차가 출발할 것이었어요. 대합실 사람들이 하나 둘 줄어들고, 가게도 문을 닫고, 대합실 문을 닫기 위해 청소부 아주머니들께서 대합실 바닥을 물걸레로 닦기 시작하셨어요.


대합실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어요. 보통 여행을 다니다 이렇게 쉬게 되면 앞의 일정들이 하나하나 새록새록 떠올라요. 그런데 이번에는 새록새록 떠오르는 게 아니라 초고속 돌려보기를 보는 기분이었어요. 이제 부하라행 기차에서 내린 것 같은데 지금 아슈하바트를 떠나려고 했어요.


국경심사받고차타고내리고차타고내리고국경심사받고사고나고택시타고투르크메나바트가서기차표못사고택시타고아슈하바트와서방없어돌아다니다호텔가자다나와돌아다니고책사고구경하고돌아와잠깐쉬다돌아다니고쉬고다시나가야경보고들어와자고일어나땡볕아래돌아다녀겨우교과서구하고모스크갔다시장갔다멜론먹고시장갔다호텔가짐챙겨기차역왔다.


어느 장면을 떠올리려고 해도 화화확 지나가는 장면들. 나는 과연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가? 우즈베키스탄에서 벗어난 것이 맞기는 한 것일까?


드디어 대합실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어요. 우리도 그들을 따라 밖으로 나갔어요.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