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복습의 시간 (2016)

복습의 시간 - 56 중국 여행 - 암울한 란저우의 밤과 란저우 라면 兰州拉面

좀좀이 2016. 11. 22.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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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에서 내리니 정말 피곤했어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피로에 절어 있었어요. 군대 다시 다녀온 기분이었어요. 정말 시간이 너무 안 가서 괴로움의 극치였어요. 친구와 더 나눌 이야기도 없었어요. 모든 이야기거리를 다 써먹어서 이제는 재탕에 삼탕 수준이었거든요. 그나마 이 고통을 이겨낸 것은 친구와 사이좋게 란저우 라면 노래를 부르며 그 맛있는 것을 먹겠다는 희망 때문이었어요.


'이제 야시장 가서 맛있는 란저우 라면 먹고 야시장 구경한 후, 황하 가서 텐트 치고 푹 자야지.'


이렇게 내가 고통받은 것은 란저우 라면을 더욱 맛있게 먹기 위한 추진력을 얻기 위해서다! 란저우 라면은 정확히는 란저우 우육면 兰州牛肉面 이에요. '란저우 뉴러미엔' 이라고 해요. 하지만 보통 그냥 '란저우 라미엔'이라고 해요. 친구가 그렇게 맛있다고 해서 직접 그 본고장에까지 와서 먹어보고 싶다고 하니 그 맛은 얼마나 맛있을까! 면이 용솟음쳐서 콧구멍으로 나오는 거 아니야? 혀의 미뢰 하나하나에 푸르른 들판에 소가 풀 뜯어먹는 감동을 주는 것 아닐까?


그렇다. 오늘은 야시장 가서 란저우 라면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 양꼬치도 하나 질겅질겅 뜯어준 후, 배를 두드리며 황하 강변에서 푹 자는 것이다!


"그런데 너무 기대는 하지 마. 내 입맛에는 맛있었는데 너 입맛에 안 맞을 수도 있어."


입맛에 안 맞아도 좋다. 이것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란저우 라면 아닌가! 입맛에 안 맞아서 맛없는 거라면 참을 수 있다. 이것은 문화 상대주의적 입장에서 받아들여야 하는 드넓은 세계의 감동. 지금껏 나의 식견이 부족했음을 가르쳐주는 맛이라 하더라도 좋다.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감동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내가 모르던 새로운 맛이라면 그것으로 또 좋은 것 아닌가!


육체를 란저우 라면을 향한 집념이 지배하고 있었어요. 온몸에서 나사가 한 개씩 다 풀린 것처럼 앞뒤로 멘 가방에 몸이 무너져내릴 것 같았어요. 그래도 참았어요. 이 역을 최대한 빨리 빠져나가서 내일 모레 시안 가는 기차표 발권받고 야시장을 향해 달려가야 했어요. 친구와 개선장군처럼 힘차게 성큼성큼 걸어서 기차역을 빠져나왔어요. 이제 내일 기차표 발권을 받을 시간.


"어? 핸드폰 배터리 다 떨어졌다!"

"뭐?"


순간 머리 위에 커다란 바위 덩어리가 쿵 떨어진 기분이 들었어요.


"매표소 안에 들어가서 핸드폰 충전 부탁해볼께. 핸드폰 없으면 기차표 발권 못 받는데..."


친구가 당황해하며 매표소 안으로 들어갔어요. 잠시 후. 친구가 화난 얼굴로 매표소에서 나왔어요.


"아, 진짜 거지같네! 그거 조금 충전해주는 것도 안 된다고 하나?"

"야! 내가 아까 핸드폰 끄라고 했지!"


화가 나서 친구에게 소리를 버럭 질렀어요. 친구가 움찔했어요.


진짜로 화났어요. 기차에서 친구에게 핸드폰 끄라고 몇 번을 이야기했어요. 그때마다 자기 아이폰은 배터리 용량이 많기 때문에 괜찮다고 했어요. 단순히 켜놓은 것이 아니라 채팅하면서 놀고 있었어요. 제 보조배터리도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충전할 방법이 아예 없었어요. 친구의 스마트폰 배터리가 떨어졌다는 것은 단순히 지금 기차표를 발권받지 못한다는 것으로 끝이 아니었어요.


역에서 나와서 쭉 걸어가면 황하가 나오고, 황하 근처 어딘가에 야시장이 있다. 그리고 란저우는 황하 근처에 볼 것이 몰려 있는데, 주요 볼거리로는 백탑사가 있다.


제가 둔황에서 인터넷을 뒤져보며 찾은 이 정보가 끝이었어요. 아까 친구가 채팅할 때 란저우 여행에 관한 것이라도 좀 찾아보라고 했지만 친구는 둔황 숙소에서 잠깐 이야기를 나눈 거기 갔다온 한국인들이 란저우는 볼 것이 황하 근처에 다 있다고 말했다고만 하고는 여행 정보에 대해 아무 것도 찾아보지 않았어요. 란저우 여행 정보라고는 결국 제가 둔황에서 인터넷을 뒤져서 찾은 저것, 그리고 친구가 맛있다고 하는 란저우 라면이 전부였어요.


이것이 얼마나 암담한 상황이냐하면, 제가 인터넷을 보고 눈으로 익혔던 그 약도에 대한 기억만 가지고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란저우 라면이야 다음날 먹는다 쳐도 당장 저녁을 먹어야 했어요. 하루 종일 아무 것도 안 먹었거든요. 까짓거 하루 굶는다고 쳐도, 더 시급한 문제가 있었어요. 텐트를 치고 잘 곳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이미 23시 40분을 넘겼어요. 란저우 라면도 포기하고, 야시장도 포기하고 다 좋은데, 잠을 잘 곳을 찾아야 하는 문제는 정말 시급한 문제였어요. 새벽에 텐트 치고 잤는데 추워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고, 기차에서도 자세가 상당히 불편해서 선잠만 잤고, 내일 밤은 또 야간 기차 이동. 오늘은 어떻게든 잠을 좀 자야 했어요. 내일 밤 기차에서 또 고통받으며 잠을 제대로 못 잘 것이 뻔했으니까요.


반드시 오늘밤 잠을 꼭 잘 자야한다는 생각은 거의 강박관념에 가까웠어요. 하지만 그럴 수 밖에 없었어요. 모레 중국 시안으로 오기로 한 B는 진짜 우리들 때문에 중국 오는 것이었거든요. 저와 친구와 같이 놀려고 휴가 내고 중국으로 오는 것이었어요. B가 없다면 시안 일정이 어짜피 기니까 첫날은 낮잠 푹 자고 밥이나 먹는 일정으로 때운다고 생각했을 거에요. 그러나 우리랑 같이 외국에서 논다는 기대에 한껏 부풀은 B에게 '우리 지금 며칠째 잠 못 자서 피곤하니 오늘은 그냥 숙소에서 놀자'고 할 수는 없었어요.


란저우에 대체 뭐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1분 1초라도 더 빨리 잠을 청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이미 쿠차에서 한 번 겪어보았기 때문에 낮에 드러누워서 쉴 수 있을지 확신을 전혀 할 수 없었어요. 게다가 여기는 도둑의 도시 란저우. 둘이 사이좋게 잠자다가 눈 떴더니 가방과 카메라가 없어져 있을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 어디가 어디인지조차 제대로 알 수 없었어요.


기차에서 상상했던 장밋빛 상상은 처참하게 부서졌어요. 이제 당장 빨리 텐트를 치고 잠을 청할 수 있는 곳을 찾아야만 했어요. 빨리 걸어가면 어떻게 야시장에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이 있기는 했지만 이것은 그저 자기 최면에 불과했어요.


란저우 기차역


암흑의 도둑과 라면의 도시 란저우. 기차역 앞에서는 삐끼들이 바글거렸어요. 지나가는 사람들 팔을 잡고 자기들 숙소 오라고 외쳐대었어요. 저와 친구는 숙소에서 잘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비록 고생이기는 하지만, 오늘 하루만 더 텐트에서 자면 저와 친구가 예상한 경비에 지출을 거의 맞출 수 있었거든요. B와 같이 시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하는 순간 당연히 이 경비보다 훨씬 많은 돈을 쓰게 되겠지만요. 그 예외적 상황을 제외하면 오늘 하룻밤만 더 고생하면 저와 친구가 책정한 하루 경비보다도 더 조금 돈을 쓰는 것이었어요.


호객꾼들에게 황하 방향을 물어보자 인상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역 맞은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어요.


"여기에서 막 멀지 않겠지?"

"몰라. 일단 저녁부터 먹어야지. 우리 오늘 아무 것도 안 먹었잖아."


무거운 짐을 메고 어두운 밤거리를 계속 걸었어요. 지금 걷고 있는 이 거리가 절대 작은 골목이 아닌데 으슥한 분위기가 났어요. 빠르게 지나가는 차량. 그리고 거리에 간혹 보이는 술 취한 사람들. '도둑의 도시'라는 선입견 없이 보아도 절대 좋은 인상이 아니었어요. 어두침침한 주황색 가로등 불빛 아래를 걸어가는데 분위기가 영 안 좋았어요. 누군가 갑자기 시비를 걸어온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분위기였어요.


"여기 왜 이렇게 분위기 안 좋냐?"


시계를 보았어요. 자정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어요. 과연 오늘 야시장을 갈 수 있을까? 이제 희망은 거의 사라졌어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희망이었지만, 이제는 희망이 아니라 절망이 뜨거운 국물 속 면발처럼 팅팅 불어나고 있었어요. 1분가 흐를 때마다 절망이 1cm씩 불어갔어요.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어요. 야시장 가는 것은 글렀어요. 야시장이 어디인지조차 제대로 모르는 상황인데 이제 조금 후면 자정이었어요.


"아무 데나 식당 보이면 저녁 먹자."


절망적인 상황에서 파국은 막아야 했어요. 거리에는 그 흔한 편의점도 보이지 않았어요. 친구는 배고프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언제 말이 변할지 알 수 없는 상황. 계속 배고프지 않다고 하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배고프다고 노래를 불러대는 것을 한두 번 겪어본 것이 아니었어요. 지금 제 상황은 피로와 분노가 극에 달해 있는 상태. 멀쩡한 상태에서도 친구가 배고프고 힘들다고 노래부르기 시작하면 짜증이 나는데, 이 밤에 징징대기 시작한다면 정말 폭발할 것 같았어요. 보통은 그냥 같이 운이 없었다고 웃어넘기는 상황이겠지만, 지금 이 상황은 충분히 예견해서 피하자고 계속 알려주었는데 친구가 제 말을 무시했다가 일어난 결과. 진짜 웃음이 나올 수가 없었어요.


식당이 보였어요. 친구와 식당으로 갔어요.


"란저우 라면 팔아요?"

"그것은 아침에 팔아요."


다시 한 번 제 머리에서 뚜껑이 덜그럭 덜그럭. 친구는 란저우 라면을 먹고 싶다고만 했을 뿐, 그 어떤 것도 알아보지 않았어요. 란저우 라면이 뭔지조차 알아보지 않았어요. 저는 친구가 란저우 라면을 먹어보았는데 매우 맛있었다고 해서 친구가 란저우 라면에 대해 잘 알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 음식이 원래 아침에 파는 음식인지, 저녁까지 파는 음식인지조차 친구는 모르고 있었어요. 친구가 중국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 믿고 있었는데 완벽히 예상을 벗어나 버렸어요.


식당은 슬슬 문 닫는 분위기. 있는 것이라고는 볶음면 밖에 없다고 했어요. 식당을 보니 맛있어 보이지 않아서 다른 식당이 나오면 거기에서 밥을 먹기로 하고 다시 걸었어요. 길을 걸어가다보니 식당이 또 나왔어요. 식당 앞에 서서 고민했어요. 여기에서 밥을 먹어? 여기에서 밥을 먹는 순간 야시장은 포기. 그런데 과연 야시장을 지금 갈 수 있을까? 시계를 보니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어요. 야시장이 가까운 지 먼 지는 둘째치고 당장 어디에 야시장이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 일단 황하로 가야 하는데 황하는 고사하고 황하 비슷하게 생긴 시궁창조차 보이지 않았어요.


"어떻게 할까?"

"여기서 먹자. 야시장 가기 글렀다. 이미 자정 넘었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지금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야시장에 모든 것을 걸고 계속 걸어갈 수는 없었어요. 거리 분위기를 보아서는 이 식당이 오늘밤 마지막 식당일 수도 있었어요. 모두가 외면한 밤거리 같은 분위기였거든요. 거리에 차조차 별로 없었어요. 그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게다가 자정이 넘었기 때문에 이제는 빨리 잠을 자는 것이 중요해졌어요.


란저우 물가


란저우 메뉴


친구는 면요리를 시켰고, 저는 볶음밥을 시켰어요.


"양꼬치도 10개 시켜."

"양꼬치? 나는 별로인데."

"오늘밤에 너 배고프다고 징징대면 진짜 폭발할 거 같거든? 그러니까 그냥 시켜."


음식을 주문하고 식당에 스마트폰 충전을 부탁했어요. 이 충전은 매우 중요했어요. 다음날 아침 기차역 가서 기차표를 발권받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배터리 전력이었거든요.


중국 란저우 면요리


중국 란저우 볶음밥


중국 란저우 양꼬치


양꼬치는 맛이 없었고, 면요리는 그냥저냥 먹을만했어요. 볶음밥은 특별한 것은 없었지만, 기본적으로 맛이 있는 중국의 볶음밥이었기 때문에 맛있었어요.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친구 스마트폰을 아주 조금 충전했기 때문에 다음날 아침 기차역 가서 기차표 발권은 받을 수 있게 되었어요.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어요. 충전이 많이 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지금 황하를 찾기 위해 스마트폰을 켜서 지도를 실행시킬 수 없었어요. 어차피 야시장은 안 가기로 했으니 그렇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어요. 이제 황하 가서 텐트치고 드러누워 자는 일만 남았거든요. 황하 가는 길은 지금까지 걸어온 방향대로 쭉 걸어가면 되었구요.


길을 걸어가는데 길 앞이 건물로 막혀 있었어요. 야시장이 우리가 걷는 길 왼편 어딘가로 가면 있다는 것이 생각나서 방향을 왼쪽으로 꺾었어요. 왼쪽으로 꺾어서 가다가 길이 나오면 오른쪽으로 꺾어서 가면 되었어요. 황하는 강이니까 방향만 맞다면 어떻게든 황하로 갈 수 있어요. 정확히 백탑사를 가든가 하는 것이 아니었거든요. 그저 황하 강변에 가는 것이 목표였어요.


건물을 따라 걸어가는데 오른쪽으로 꺾을 수 있는 길이 나오지 않았어요. 한참을 걸어가서야 오른쪽으로 꺾을 수 있는 길이 나왔어요.


"이거 우리 동포 꽃게들 아니야?"


수족관 안에서 꽃게들이 기어다니고 있었어요. 이것은 우리나라 서해 바다에서 중국 불법 조업 어선들에게 납치당한 우리의 동포 꽃게들 아닌가! 중국도 꽃게를 잡기는 하지만 중국쪽 바다는 중국인들이 하도 몰지각하고 몰상식하게 잡아대서 해산물 씨가 말라버렸다고 해요. 그래서 우리나라 서해 바다에 와서 횡포를 부리고 있지요. 이 꽃게들에 대해 원산지 추적을 해본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바다에서 잡힌 꽃게일 것 같았어요.


중국인들이 식당 안에서 해산물을 쪽쪽 빨아먹으며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이 간간이 보였어요. 어두침침한 가로등불 아래에서는 중국인들이 술과 안주를 먹고 있었구요. 이 풍경 모두 활기찬 밤거리와는 아주 거리가 멀었어요. 오히려 괜히 취객과 시비 붙을까봐 몸을 더욱 사리게 만드는 풍경이었어요. 거리에서 취객들이 술병을 깨트리며 싸우고 있어도 당연하다고 생각될 분위기였어요.


"황하 도대체 언제 나오는 거야?"


꽤 많이 걸었는데도 황하가 나타나지 않았어요. 조금 전 먹은 볶음밥과 양꼬치의 힘으로 버티고 있었어요. 만약 아까 그렇게 먹지 않았다면 길바닥에 주저앉아 대충 자자고 했을 거에요. 방향은 맞는데 황하 비스무리한 것조차 보일 생각을 안 하니 슬슬 애가 타기 시작했어요. 밥 먹은 것은 빠르게 꺼져가고 있었고 어깨와 허리가 아팠어요. 이제는 좋은 잠자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잘 수 있는 곳을 찾는 문제로 바뀌었어요.


"공원이다!"


아파트 옆에 작은 공원이 있었어요. 팔각정 비슷한 건물이 있었고, 나무가 듬성듬성 있었어요. 지금은 밤. 나무 아래에 텐트를 치면 잘 보이지 않을 듯 했어요. 동이 트면 텐트가 훤히 보이기는 하겠지만, 차도에서 아주 잘 보이지는 않을 것이었어요. 동네 주민들이 나와서 쳐다보기는 하겠지만 괜찮아요. 여기는 중국이니까요. 게다가 한족들이 사는 곳이구요. 아침 일찍 일어나서 란저우 라면도 먹고 기차역 가서 기차표 발권도 받아야했기 때문에 밤에 너무 대놓고 보이지만 않으면 되었어요.


그래도 혹시 다른 더 좋은 곳이 없을까 하고 일단 조금 더 가보기로 했어요. 화물차가 거칠게 지나가는 다리가 나왔어요. 황하였어요. 너무 어두워서 어디로 내려갈 수 있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어요. 보이는 것이라고는 무섭게 내달리는 화물차 뿐. 이제 해탈했어요. 안빈낙도의 삶을 깨우쳤어요. 더 욕심을 낸다고 더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었어요. 오히려 지금 주어진 이 행복에 만족할 때 행복할 수 있었어요.


"공원에서 자자."


이미 너무 늦어버렸기 때문에 빨리 텐트를 치고 자는 것이 중요했어요. 저도 깜깜해서 잘 보이지 않는데 눈이 나쁜 친구는 저보다 앞을 더 못 보고 있었어요. 지금 믿어야하는 것은 오직 제 두 눈 뿐. 다리 아래로 흐르는 시커먼 강물만 보였어요. 강가로 내려가는 길도, 강가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보이지 않았어요. 저도 어둠 속에서 바로 옆을 스쳐지나가는 화물차 때문에 정신이 사나운데 여기에서 친구까지 챙겨가며 잠자리를 찾아 더 걷는 것은 무리였어요.


공원 나무 아래에 텐트를 쳤어요.


"창문 열어놔."

"어제 추워서 못 잤어. 창문 닫고 자도 돼."

"창문 닫으면 질식해서 죽을 수 있어."

"뭔 소리야?"


이것은 선풍기가 호흡해서 선풍기 앞에서 자면 질식해 죽는다는 선풍기 호흡설에 이은 텐트 호흡설인가? 이 텐트의 창문을 닫고 있는다고 해서 질식해 죽을 확률은 전혀 없었어요. 그렇게 아주 꽉 밀폐된 공간이 아니었거든요. 비닐하우스 비닐로 만들어진 텐트가 아니라 공기는 천 사이로 들락날락 거리고 있었어요. 창문을 닫아놓는다고 해도 밀폐되는 것이 아니었어요.


창문을 닫고 누웠어요. 친구에게 이 텐트는 창문을 닫는다고 해서 비닐봉지처럼 밀폐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질식할 걱정 전혀 안 해도 된다고 설명해 주었어요. 친구가 계속 그래도 혹시 모르니 창문을 열고 자자고 했지만 그러면 추워서 도저히 잘 수 없고 분명히 아침에 감기 걸려 있을 거라 대답했어요. 이것이 과장된 것이 아닌 게, 정말로 밤이 되니 쌀쌀했어요. 창문 열고 잤다가는 둘 다 감기걸리게 생긴 날씨였어요. 창문을 열지 않고 텐트 문을 다 닫은 후 자세를 잡고 바로 잠들었어요.


아침 6시. 또 추워서 깨어났어요. 그래도 확실히 창문을 닫고 자니 전날 둔황의 밤보다 텐트 안이 훨씬 따뜻했어요.



텐트 밖으로 나와보니 2016년 6월 10일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어요.



몸을 풀면서 텐트 주위를 돌아다녀보았어요. 길 건너에 라면집이 보였어요.


"저거 그렇게 맛있다는 란저우 라면집이잖아!"


전날밤 어두워서 아무 것도 보지 못했는데, 운 좋게도 저와 친구가 텐트를 친 곳 근처에 란저우 라면집이 있었어요. 게다가 문도 열려 있었어요.


"너 어디 갔다 왔어?"

"추워서 일어났어. 야, 길 건너에 란저우 라면집 있더라!"

"진짜?"

"응! 란저우 라면집 있어!"

"란저우 라면!"


친구와 잠자리를 정리하고 란저우 라면집으로 달려갔어요.


중국 란저우 라면 가게


란저우 라면은 아침에 먹는 음식이라고 했고, 지금이 바로 이른 아침. 정확히 란저우 라면을 먹을 때였어요. 전날 그렇게 먹고 싶었지만 못 먹어서 좌절했던 그 란저우 라면이 바로 눈 앞까지 다가왔어요. 식당 안으로 들어가자 중국 음식 특유의 냄새가 풍겨져 나왔어요.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이제 내 미뢰 위에 몇 마리의 소가 춤출 수 있을 것인가! 내 미뢰 위에 몇 포기의 밀이 자라날 수 있을 것인가! 친구도 입이 귀에 걸렸어요.


스마트폰 충전을 맡기고 자리에 앉았어요. 메뉴는 오직 란저우 라면. 란저우 라면 가게였거든요. 저와 친구가 시킬 음식은 처음부터 정해졌어요. 란저우 라면!


兰州 拉面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무슬림을 의미하는 모자를 쓰고 있었어요. 모두 중국어로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이들은 회족이었어요.



청진식품!


란저우에서 파는 진짜 란저우 라면은 무슬림인 회족들이 만든 라면이에요. 清真 이라고 적힌 곳을 찾아가면 중국 이슬람 식당이에요. 번체로는 淸眞 '청진'이에요. 중국어로는 칭전 qīngzhēn 이라고 해요. 清真 이라는 단어 뜻이 바로 '이슬람의' 라는 뜻인데, 음식에 붙으면 한국어로 번역할 때 '할랄'이라고 번역하면 되요. 중국의 이슬람식 요리를 칭전요리 (청진요리, 清真菜, Chinese Islamic cuisine) 라고 해요. 이 칭전 요리는 중국 이슬람 음식에 대한 총칭인데, 이 중 무슬림들인 회족들은 한족의 음식 문화를 이슬람 율법에 맞게 변화시킨 것이 특징이에요. 란저우 뉴러미엔 (란저우 라면)은 회족들의 대표적인 칭전요리 중 하나구요. 즉 란저우 라면집에 이슬람을 뜻하는 저 '청진'이 없으면 그냥 실격이라는 말이에요.


하지만 이 당시에는 이 사실을 몰랐어요. 그래서 회족들이 라면을 만드는 것이 매우 신기했어요. 저도 란저우 라면이 란저우 우육면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거든요.


중국 회족


이른 아침이라 손님이 없을 줄 알았지만 사람들이 와서 라면을 사먹고 있었어요.


蘭州 拉麺


란저우 라면이 나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어요. 어서 빨리 먹고 싶었어요.


나왔다!


란저우 라면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이 라면을 먹기 위해 저는 기차에서 14시간 앉아 있었고, 차가운 밤공기을 쐬어가며 텐트 안에서 벌벌 떨며 잤어요. 이제 그 고생을 보상받을 시간이었어요. 나는 음식점 앞에서 1시간 기다려본 적도 없었다. 내가 이 라면을 먹기 위해 무려 꼬박 하루를 고통받았다. 과연 나는 음식을 먹기 위해 하루를 쏟아부은 적이 있던가? 흥분을 안 할 수가 없다!


심장은 명치에서 목젖까지 껑충껑충 뛰어오르고 있었어요. 란저우 라면의 생김새는 단순하고 평범했어요. 그래도 몰라요. 오히려 이런 것에서 극강의 맛이 솟구쳐오를 수 있으니까요. 오직 한 가지 절대적인 맛을 극대화하기 위해 쓸 데 없는 장식 따위는 제거해버린 것일지도 몰라요. 이렇게 수수한 외관이기 때문에 맛이 더욱 궁금해졌어요. 대체 얼마나 맛있길래 란저우 라면이 유명한 것일까!


친구는 벌써부터 "어, 맛있어, 이거 진짜 맛있네!" 감탄하면서 후루룩 쩝쩝 먹고 있었어요.


드디어 한 입 먹어보았어요.


우와!


다시 한 입 먹었어요.


으아!


또 한 입 먹었어요.


아으!


척추가 두개골을 뚫고 날아가버리는 기분.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라면을 먹었어요.


"아, 진짜 맛있어, 이거 졸라 맛있네! 야, 맛있지?"

"어."


건성으로 대답했는데 친구가 또 라면을 쩝쩝 먹어가며 물어보았어요.


"우와, 진짜 란저우 라면 맛있네. 와, 쩔어. 이거 진짜 맛있지?"


아무 말 없이 친구를 노려보았어요.


차라리 맛이 토할 정도로 없었다면 화가 나지 않았을 거에요. 진짜 열받는 것은 이 라면맛이 너무나 별로였다는 것이었어요. 진짜로 라면맛은 엄청나게 실망이었어요. 이것을 먹으러 여기까지 올 가치가 있는가 과연 의문이었어요. 이것은 맛이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니었어요. 맛이 없더라도 정말 특이한 맛이라면 '내가 아직 세상을 잘 모르는구나'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어요. 14억 중국 인구의 혓바닥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웃어버릴 수 있어요. 이것이 척추가 두개골 정수리 뚫고 날아가버릴 정도로 열받게 만든 이유는 바로 진짜 흔해빠진 맛이라는 것이었어요.


이 라면 맛은 전과목 성적이 '미'인 성적표였어요. 좋게 말하면 여러가지 맛이 튀는 놈 없이 다 고만고만하게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고, 있는 대로 말하자면 몰개성적인 맛이었어요. 전과목 성적이 '미'인 성적표를 보고 좋게 말해서 '공부를 가리지 않고 열심히 하는구나'라고 할 수도 있지만, 솔직한 심정으로 '너는 성적이 참 골고루 다 별로구나'라고 할 수도 있는 것처럼요. 차라리 수도 있고 가도 있으면 이것은 취향에 따라 평이 극단적으로 갈릴 수 있겠다고 하고 넘어갈 수 있는데, 이것은 그렇지 않았어요.


그래요. 이건 참을 수 있어요. 모든 맛이 고만고만해서 튀는 맛이 없다는 것 자체도 어찌 보면 독특한 맛이라 할 수 있으니까요. 진짜 제가 열받은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어요.


나 이거랑 똑같은 맛 라면 창신시장에서 천원 주고 사먹어봤어.


바로 이것 때문에 분노한 것이었어요. 서울 동대문 근처에 있는 창신시장에 중국 식품을 파는 가게가 몇 곳 있어요. 저도 동대문을 갈 일이 있으면 창신시장을 가끔 들려서 외국 라면을 몇 개 사와서 맛보곤 해요. 그렇게 창신시장에서 1000원 주고 구입해서 먹은 중국 봉지 라면 중 이 란저우 라면과 똑같은 라면이 있었어요. 정확히 어떤 제품인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인스턴트 라면 맛과 똑같았어요.


먹으면서 한숨이 푹 나왔어요. 이것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라면 3개 끓여먹는 기분. 그 이상의 무엇도 없었어요. 창신시장은 내 자취방에서 지하철로 1시간이면 가는데! 내가 왜 미쳤다고 이 고생을 해서 창신시장에서 천원 주고 구입한 인스턴트 라면과 똑같은 라면을 먹어야 해! 그것도 아침부터! 아무리 내가 맨날 라면 끓여먹는다 해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라면 끓여먹지는 않는데!


100번 양보하고 좋게 보아주자면, 이 라면은 한국인들이 그럭저럭 먹을만한 맛이기는 했어요.


이건 맛도 감동도 없었어요. 오직 분노와 허탈함만 있었어요. 서울 지하철 7호선 대림역 12번 출구에 있는 차이나타운에 있는 아무 중국 식당 들어가서 눈 감고 메뉴 찍어서 먹는 것조차보다도 특이한 점도 감동도 없었어요. 대체 얘가 왜 나한테 란저우 라면을 맛있다고 강력히 추천했지?


하필 양은 또 엄청 많았어요. 진짜 꾸역꾸역 다 먹었어요. 맛이 역하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어떻게 국물까지 깔끔하게 다 먹어치우기는 했어요. 먹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차마 가게 안에서 라면 맛 진짜 별로였다고 내색하지 않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어요. 이 라면의 장점은 딱 하나였어요. 가격이 6위안. 그런데 양은 진짜 많았어요. 라면 3개 끓여먹은 기분이었거든요. 재수없게도 그게 아침 눈뜨자마자였구요. 한국에서 자취방에서 하도 라면만 먹어대었기 때문에 여행중에는 어지간하면 라면을 안 먹으려 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당해버렸어요. 아침에 눈뜨자마자 인스턴트 라면 3개 끓여먹은 기분. 한국에서도 절대 안 하는 짓을 여기 와서 해버린 기분이었어요. 여행의 흥이 산산조각나고 이번달 생활비 얼마 남았는지 보면서 오늘은 어떤 라면을 끓여먹어야 하나 고민하는 일상으로 되돌아온 느낌이었어요.


둔황에서 란저우 여행 정보를 찾아볼 때 란저우 라면과 관련된 글도 읽어보았어요. 친구가 란저우에 라면 먹으러 간다고 했는데, 그것은 친구만 그런 것은 아니더라구요. 란저우 라면이 나름 꽤 유명해서 란저우 가면 란저우 라면을 먹어야한다는 것이 무슨 공식처럼 되어 있었어요. 그것을 보면서 맛을 먹는 게 아니라 스토리를 먹는 것 아닐까 하는 불길한 예감이 살짝 들었어요. 특히 요즘 들어 이런 현상이 상당히 심해졌어요. '힐링', '감성' 이런 것이 강조되면서 음식 맛 자체보다는 음식에 담긴 스토리를 맛보려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어요. 이런 스토리를 먹는 사람들은 쉽게 SNS 허세질로 이어지고, 이 SNS 허세질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또 맛이 아니라 스토리를 먹게 해요. 란저우 라면 글을 보면서 이런 느낌을 조금 받아서 뭔가 조금 불길했는데 친구가 맛있다고 하니 친구 말이 맞겠지 하고 믿고 있었어요. 그러나 그 불길한 예감이 딱 맞아버렸어요.


중국 봉지 라면이 란저우 라면을 제대로 구현해낸 것인지, 아니면 란저우 라면이 원래 중국 봉지 라면과 비슷한 것인지 의문이었어요.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어요. 어쨌든 지하철 타고 1시간이면 가는 창신시장에서 천원 주고 사서 들고와 방구석에서 끓여먹었던 중국 봉지 라면과 맛이 똑같았다는 것은 변치 않는 사실이었어요. 제 자취방은 의정부라서 창신시장까지 지하철도 무려 '앉아서 편하게' 가는데요. 이 라면이 그 봉지 라면보다 나은 점이라고는 양이 더럽게 많다는 것 뿐인데, 양이 많다는 것을 감안해도 이 라면을 위해 고생하며 란저우로 기어온 것을 생각하면 분노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지금까지 중국에서 먹은 음식들은 맛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일단 우리나라에서 먹던 것과 확실한 차이가 있었어요. 맛이 없고 역하다 하더라도 일단 우리나라에서 먹던 것과는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먹는 재미가 있었어요. 먹고서 맛없다고 욕할 지언정 웃을 수는 있었어요. 그런데 이건 아니었어요. 창신시장에서 중국 봉지 라면을 파는 것이 이상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제 자취방에서 끓여먹은 라면맛과 똑같았거든요.


라면 가게에서 나와 라면 가게에서 멀어지자 친구에게 말했어요.


"맛 더럽게 없네."


친구는 자기는 맛있게 먹었다면서 란저우 라면이 제 입맛에 안 맞아서 그런 거라고 말했어요.


"아니! 나 저거랑 똑같은 봉지라면 먹어봤어! 그래서 진짜 최악으로 맛없네! 아침부터 라면 3개 끓여먹은 기분이다."


친구가 당황했어요.


"저거랑 똑같은 맛 나는 중국 봉지 라면 창신시장에서 천원에 팔아. 너랑 서울 대림역 가서 먹었던 마라탕이 백배 더 특이하고 맛있다."

"저기가 조금 별로이기는 하더라..."


아침부터 배가 참 기분나쁘게 불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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