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 알람 소리를 듣고 눈을 뜬 것은 새벽 6시.
못 일어나겠다.
알람을 듣고 정신은 돌아왔어요. 기분좋게 2015년 6월 4일 목요일 아침을 맞이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희망사항이었어요. 양쪽 어깨와 허리가 너무 아파서 도저히 일어날 수 없었어요. 원래 계획은 아침 일찍 준비하고 날이 뜨거워지기 전에 왕궁인 크라톤과 따만 사리를 구경하고 숙소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쉬다가 프람바난 사원으로 가는 것. 지금 일어나서 슬슬 준비를 해야 했어요. 그러나 양쪽 어깨와 허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심해서 일어날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하도 아파서 그냥 침대 위에 엎드렸어요.
'별로 잠을 자지 못해서 그런가?'
전날 방콕에서 머무를 숙소를 검색하고, 인도네시아어 교재를 보다 보니 새벽 2시 넘어서 잤어요. 실상 4시간 조금 못 되게 잔 셈이었어요. 이렇게 조금 자서 긴장만 풀리고 피로는 하나도 안 풀린 것 아닌가 싶었어요. 가끔 정말 피곤한 상태에서 어정쩡하게 자고 일어나면 긴장만 풀리고 피로는 풀리지 않아서 오히려 몸이 더 아픈 경우가 있거든요. 이번도 그런 것 아닌가 싶었어요.
'조금 더 자면 나아지겠지.'
그렇게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눈을 뜨니 7시 반. 이제는 진짜로 슬슬 씻고 나가야 했어요. 계속 어깨와 허리가 아프다고 침대에 누워있다가는 오전 중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될 것 같았어요. 다음날 밤 기차로 자카르타로 이동할 것이었기 때문에 한 번의 오전이 더 남아있기는 했어요. 오늘 크라톤을 못 보면 내일 봐도 되기는 했어요.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적인 이야기. 다음날은 당장 숙소에서 체크아웃을 해야 했어요. 반면, 크라톤은 오후에 문을 닫아버리기 때문에 무조건 오전에 가야 했어요. 즉, 오늘 프람바난 사원을 포기하고 다음날 프람바난 사원을 보는 것은 가능한 일이었지만, 오늘 크라톤을 포기하고 다음날 크라톤을 본다는 것은 무리가 따르는 일이었어요. 물론 내일 눈을 뜨자마자 체크아웃부터 빨리 하고 짐을 맡긴 후 돌아다니는 방법도 있기는 했지만, 야간이동이 있는 날 아침부터 그렇게 열심히 돌아다니고 싶지는 않았어요. 조금 무리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 볼 것을 다 끝내겠다는 생각만큼은 변함이 없었어요. 그렇게 요그야카르타 구경을 마치고, 내일은 체크아웃 시간까지 숙소에서 누워서 쉬다가 체크아웃하고 적당히 차나 마시며 시간을 보내다 야간이동을 할 생각이었어요.
씻고 방정리를 하고 나갈 준비를 했어요.
'오늘 스콜 내리면 그냥 맞고 만다.'
옆으로 메는 가방을 아예 안 들고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어요. 절대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 두 개 있었어요. 노트북과 핸드폰. 이것 두 개 만큼은 절대 없어져서는 안 되는 것. 이것들은 제 기억, 시간, 노력과 관련된 것들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잃어버려서는 안 되었어요. 예전 여행중 호텔방이 털리는 것도 보았고, 자물쇠가 잘리는 것도 보았기 때문에 이것들은 무조건 들고 나갈 생각이었어요.
옆으로 메는 가방에서 이 두 가지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빼버렸어요. 지금까지 계속 돌아다니는데 스콜이 내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우산을 들고 다녔어요. 그러나 지금 어깨와 허리 상황으로 보았을 때, 비 오면 건물 아래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게 나았어요. 조금이라도 무게를 줄여서 부담을 줄여야 했어요. 이렇게 조금이라도 불필요해 보이는 것은 죄다 가방에서 빼었어요. 하지만 전날 위에 걸치고 다니던 외투를 세탁맡겨버렸고, 외투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지갑과 핸드폰 등이 가방 안으로 새로이 들어가게 되었어요. 무게가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가방이 여전히 무겁게 느껴졌어요.
나갈 준비를 마친 후 아침 식사를 먹으러 갔어요. 아침을 먹으러 가는 도중에도 몸은 계속 쑤셨고, 머리는 멍했어요. 입맛이 없었지만 밥은 먹어야 했어요. 인도네시아는 식당에서 밥을 사먹을 때 음식을 많이 주는 편이 아니었거든요. 여행 경비를 절약하려면 아침밥을 많이 든든하게 먹어야 했어요. 밥을 먹는데도 계속 몸이 아프고 정신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어요.
'걸으면 조금 괜찮아지지 않을까?'
방에 돌아와 양치를 하며 오늘은 무엇을 해야 하나 곰곰이 생각해 보았어요. 오늘 일정은 걸어서 크라톤까지 간 후, 빠르게 크라톤 keraton 을 보고 숙소로 돌아와 샤워하고 파쿠알라만 크라톤 pakualam keraton 을 본 후, 프람바난 사원 prambanan temple 을 보는 것. 이것은 목표였고, 여차하면 keraton에서 prambanan 사원으로 바로 갈 참이었어요. 참고로 prambanan 은 3600 루피아 내고 1A 버스 타면 되요. 어느 방향인지 모르겠으면 말리오보로 거리에 버스 정거장이 2개 있으니 거기에서 타면 되요. 아니면 '프람바난!'이라고 외치든가요.
버스를 타고 크라톤으로 가면 크라톤까지 금방 갈 수 있었지만, 사이단 다리 saydan bridge를 보고 사진을 찍기 위해 크라톤까지 걸어가기로 했어요.
인도네시아의 인력거인 베짝 becak 옆을 지나 쭈욱 걸어갔어요.
거리에는 오늘도 오토바이가 많이 보였어요.
인도네시아답게 여기저기 모스크가 보였어요.
노점 주유소도 있었어요. 저 2리터쯤 되어 보이는 병에 들어 있는 것은 전부 휘발유. 자동차도 저 노점 주유소에서 기름을 사서 이용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자동차에 넣는다면 한 병으로 될 것 같지는 않은데요. 아무래도 저것은 오토바이 운전자를 위한 주유소 같았어요. 인도네시아인들이 오토바이를 많이 이용하거든요. 오토바이 그 자체를 몰고 다니는 경우도 많고, 베짝의 동력 부분을 오토바이를 연결해 운행하는 경우도 많아요.
드디어 사이단 다리 sayidan bridge 가 나왔어요.
이 다리는 사실 그렇게까지 유명하거나 중요한 다리는 아니었어요. 단지 말리오보로 거리에서 파쿠알라만 지역으로 갈 때 지나가는 다리일 뿐이었어요. 만약 말리오보로 거리에서 버스를 타고 파쿠알라만 크라톤으로 갈 거라면, 이 다리를 건너자마자 나오는 버스 정거장에서 내리면 되요. 그렇게 가는 길을 알아내기 위해 필요한 다리일 뿐, 반드시 가서 보아야하는 명물까지는 아니에요. 제가 이 다리를 굳이 걸어서 온 이유는 이 다리보다 이 다리에서 보는 풍경이 괜찮았기 때문이었어요.
사이단 다리에서 쪼데 강 Kali Code 과 그 주변에 형성된 마을 풍경은 볼 만 했어요.
강에서는 사람들이 작업을 하고 있었어요.
멀리 정자처럼 생긴 지붕이 보였어요.
다리 위에서 쪼데 강과 그 주변 사진을 찍다가 다리를 건너 따만 삔따르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어요.
'이제 좀 정신이 돌아오네.'
사이단 다리까지 와서 사진을 찍고 쪼데 강을 구경하고 나서 따만 삔따르를 향해 다시 걸어갈 즈음에야 머리가 맑아졌어요. 그 전까지는 그냥 걸으니까 걷는 것이었지, 머리 속이 멍한 상태였어요. 여기까지 걸어오니 어깨와 허리의 통증도 많이 가라앉았어요.
따만 삔따르 Taman Pintar 에 도착했을 때, 인도네시아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우루루 따만 삔따르를 향해 길을 건너더니 단체 사진을 촬영하기 시작했어요.
'얘들은 현장학습 나왔나?'
자카르타 므르데까 광장에서는 어린이들이 이른 아침에 놀고 있었고, 여기는 아침부터 놀이 동산 비슷한 곳인 따만 삔따르로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방문하고 있었어요. 따만 삔따르가 놀기 좋은 곳이기는 하지만 아침부터 이렇게 학생들이 몰려올 만한 곳인가 궁금했어요. 다른 지역에서 여기로 수학여행 온 건가? 그러고보면 저도 수학여행때 아침부터 에버랜드 가서 노는 일정이 하루는 꼭 있었어요. 얘네들도 그런 것 아닌가 싶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아침에 므르데까 광장에서 교복 입고 놀고 있던 학생들은 어떻게 그 시각에 놀고 있을 수 있는지 의문.
9시가 거의 다 되어갈 즈음, 족자카르타 중앙우체국에 도착했어요.
"저기 들어가서 조금 쉬었다 가야겠다."
숙소에서 얼추 30분 정도 걸으니 벌써 중앙우체국까지 왔어요. 중앙우체국에서 조금만 더 가면 크라톤도 있고, 말리오보로 거리도 있었어요. 도보로 30분 걸렸으니 생각만큼 먼 거리는 아니었어요. 전혀 힘들지도 않았구요. 오히려 이 정도 걸어주니 정신도 맑아지고 어깨와 허리의 통증도 많이 가라앉았어요. 하지만 시각이 시각인 만큼, 급격히 날이 뜨거워지고 있었어요. 하늘에는 구름이 한 점도 없었고, 햇볕은 무섭게 쏟아지고 있었어요. 이제 몸이 풀리는 단계를 넘어서서 몸이 열받기 시작하고 있었어요. 천천히 쉬엄쉬엄 걸어왔지만 이마로 땀이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었어요.
'우표를 꼭 자카르타 가서 구입할 필요는 없잖아?'
여행을 다니며 우표를 몇 장 구입하는 것이 취미였기 때문에 인도네시아에서도 우표를 구입할까 고민하고 있었어요. 인도네시아 우표는 이미 갖고 있었기 때문에 제가 모으지 못한 나라를 채우기 위해 꼭 구입할 필요는 없었어요. 그랬기 때문에 디자인이 마음에 드는 우표가 있다면 구입하고, 그렇지 않다면 그냥 구입하지 않을 생각이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우표는 민속과 관련된 디자인. 특히 전통 의상 및 음식과 관련된 우표들이에요. 인도네시아 우표가 몇 장 있기는 했지만 전통 의상 및 음식과 관련된 우표는 한 장도 없었어요.
우체국 안으로 들어갔어요.
"여기는 왜 이렇게 깜깜하게 해놓고 있지?"
내부는 어두침침했어요. 우리나라의 환한 우체국 내부와는 많이 달랐어요. 자연 채광을 이용하는 경우, 실내가 조금 어두운 경우가 종종 있어요. 그런데 여기는 자연 채광을 이용하는 것 같기는 한데, 정도가 심할 정도로 어두웠어요. 여기에서 계속 책을 보면 왠지 눈을 다 버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어요. 실내에는 선풍기가 있었고, 에어컨은 가동되지 않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러나 햇볕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것만으로도 밖보다는 시원했어요.
입구로 들어가서 왼쪽에는 우표를 판매하는 부스가 있었어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우표 사고 싶어요."
여기까지는 인도네시아어로 할 수 있었어요. '원하다'는 'mau', '구입하다'는 'membeli', '우표'는 'perangko'에요. 하지만 제 인도네시아어는 딱 여기까지. 어떤 우표를 구입하고 싶은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무리였어요. 다행히 직원이 영어를 할 줄 알아서 그 다음부터는 영어로 대화했어요. 전통 의상이나 음식과 관련된 우표가 없냐고 물어보자 그런 우표는 없다고 대답했어요. 그래서 우표 구입을 그냥 하지 말까 하고 생각할 때.
순간 전날 악기를 연주했던 것이 떠올랐어요.
"악기 우표 있어요?"
"있어요."
직원은 악기 우표를 꺼내서 보여주었어요.
"다른 것은 없나요?"
"없어요."
악기 우표를 구입한다면 말리오보로 거리에서 보았던 그 악기들이 그려진 우표를 구입하고 싶었어요. 특히 앙클룽과 짤룽이 그려진 우표가 있다면 반드시 구입하려고 했어요. 그러나 3년에 걸쳐 나온 악기 우표 33장 가운데 앙클룽도 짤룽도 없었어요. 이 우표들은 다양한 지역 악기들이 도안으로 사용되었어요. 그런데 인도네시아는 엄청나게 많은 지역이 존재해요. 제가 아는 섬이라고는 자바섬, 수마트라섬, 보르네오섬, 발리섬, 술라웨시섬, 서티모르, 이리안자야가 전부. 1만개가 넘는 섬들 중 아는 게 이 정도이고, 그나마 실상 저게 제가 아는 지역의 전부였어요. 자바섬에 있는 도시들 몇 곳 제외하면 인도네시아에 어떤 도시가 있는지조차 몰랐어요.
우표 중 짤룽이 있기는 했는데, 술라웨시의 짤룽이었어요. 그나마 2015년에 발행된 우표 중 족자카르타 전통 북인 끈당 kendang 이 있어서 다행이었어요. 만약 이조차 없었다면 제가 아는 악기는 전혀 없는 시리즈였을 거에요. 참고로 자바섬 동부는 Jawa Timur, 자와섬 중부는 Jawa Tengah, 자와섬 서부는 Jawa Barat 라고 한답니다.
돈을 지불하자 이렇게 생긴 봉투에 우표를 담아주었어요.
우표를 가방에 집어넣은 후 밖으로 나왔어요.
"벌써 9시 10분 넘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