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시간을 뒤섞어 (2014)

시간을 뒤섞어 - 02 출국하러 김포공항 가기

좀좀이 2014. 3. 17.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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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갈 날짜는 다가오는데 모든 것을 대책없이 손 놓고 있었어요. 아는 중국어라고는 '니하오'와 '소토소토경경도' 뿐. 거창하게 중국어를 조금 공부하고 가겠다고 마음을 먹은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단념해버렸기 때문에 당연히 아는 것이 없었어요.


'설마 내가 중국어를 사용해야할 일이 있겠어?'


이것이 만약 배낭여행이었다면 오기로 어떻게 해보려고 노력했을 거에요. 하지만 이것은 패키지 여행. 기껏해야 숙소 들어온 후 편의점이나 갈 텐데, 편의점 가서 기계에 나온 숫자 보고 돈 꺼내서 주면 굳이 말을 할 필요도 없을 것이었어요. 이도 저도 안 되겠다 하면 대충 아무 돈이나 내면 끝. 많으면 거슬러줄테고, 적으면 더 달라고 손을 내밀며 저를 쳐다볼테니까요.


얼마나 대책없이 여행 준비를 하지 않고 있었냐 하면, 타이완에서 쓰는 돈이 '위안'인데, 이게 환율이 얼마이고, 동전과 지폐가 얼마 짜리들이 있는지조차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내가 왜 중국어 교재를 샀을까 후회가 되었지만, 그냥 중국어 문법을 보며 혼자 쉽다는 착각에 빠져 깔깔대었으니 영화 한 편 본 셈 치자고 생각했어요. 그나마 다행이라면 타이완은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고 쉽게 정보를 접할 수 있는 나라라서 아무 것도 안 알아보고 준비하지 않아도 상식으로 알고 있는 것이 조금 있다는 것. 세계사 시간 때 배운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패배하며 타이완으로 건너갔다든지, 타이완의 주요 도시로는 타이베이, 가오슝, 타이중 등이 있다든지, 한자는 우리가 쓰는 한자와 똑같은 것을 쓴다든지 하는 것이요. 이게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예전 여행을 다녔던 나라들에 비해서는 확실히 많이 아는 것이었어요. 이렇게 어렸을 적부터 간접적으로 접해 상식으로 알고 있는 타이완에 대한 정보가 은근히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와 같은 한자를 쓴다는 것도 더욱 준비를 하나도 하지 않게 만든 원인 중 하나였어요.


더욱이 타이완은 그럭저럭 안전하고 여행하기 좋은 나라인데다 공업이 발달한 국가. 게다가 시차는 고작 우리나라와 1시간. 지금껏 여행했던 국가들에 비해서 여행하기 너무 쉬운 나라인 것은 사실이었어요. 비자를 받을 필요도 없고, 시차가 큰 것도 아니고, 음식 걱정을 해야할 나라도 아니었구요. 게다가 지금은 겨울. 아무리 타이완이 우리보다 남쪽에 있어서 훨씬 따뜻하다고 하지만 여름이 아니니 특별히 기후 때문에 걱정할 것 또한 없었어요. 긴장을 해야할 만한 것이 마땅히 떠오르지도 않았어요.


오히려 고민은 엉뚱한 곳에 가 있었어요.


'그날 일어날 수 있을까?'


봄방학이 시작되어 학원 수업은 아침 9시 반부터 시작이었어요. 그래서 잠을 충분히 깨고 샤워를 하고 학원에 가기 위해서 8시 반에 일어나는 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문제는 출발일에 김포공항 국제선 청사로 8시 반까지 도착해야 한다는 것. 잠에 약한 제게 평소 일어나는 시각에 김포공항 국제선 청사에 도착해야 한다는 것은 매우 부담스러웠어요.


늦으면 안 되기 때문에 의정부역에 새벽 6시에는 도착할 필요가 있었어요. 공항철도나 버스를 이용해 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이런 새벽에 사용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버스로 의정부에서 김포공항까지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일단 버스는 제외. 공항철도는 이른 아침에 타야 하는데 왠지 미덥잖았어요. 그래서 출발할 때는 제일 잘 아는 지하철 노선인 1호선과 5호선을 이용해 가고, 돌아올 때에 버스를 타고 돌아와 보기로 했어요.


의정부에서 김포공항까지 1호선과 5호선을 이용해서 간다면 어림짐작으로 약 2시간. 새벽에 지하철 배차시간이 길다는 점을 고려하면 의정부역에 6시에 도착하는 게 좋다고 결론을 내렸어요. 의정부역에 6시에 도착한다면 아무리 환승과 배차시간이 엉망이 되고, 김포공항에서 가족들 못 찾아 돌아다닌다 해도 8시 반 전까지는 정해진 장소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었어요.


이제 문제는 새벽 5시에 눈을 뜨는 것.


'새벽 5시에 일어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이야.'


답은 간단했어요. 목요일 오후에 잠들어서 새벽 3시 즈음 깨어나는 것. 그때 일어나서 김연아 선수가 출전하는 피겨 경기 보고, 그거 끝난 후 씻고 밥 사먹고 역으로 가면 되었어요. 이러면 첫날 일정이 그렇게 강행군으로 느껴지지 않을 듯 했어요.


그래서 세운 계획은 수요일에 밤을 새고 목요일 오전 학원 갔다가 돌아와서 짐 싸고 빨래 돌리고 바로 잠을 청하는 것.


수요일. 보지도 않던 동계올림픽을 챙겨 보고 잠깐 눈을 붙인 후 학원에 갔다 돌아왔어요.


여행 가기 전날은 대청소하는 날.


말 그대로에요. 여행 가기 전날은 대청소하기 딱 좋은 날. 이불 빨래도 해서 바닥에 널어놓고, 정리할 것도 싹 정리하고, 청소도 하면서 방을 싹 정리하기에 딱 좋아요. 그래서 짐을 싸고 빨래 돌리고 청소하고 빨래가 끝나자 바로 보일러 빵빵하게 틀고 잠을 청했어요.


2014년 2월 21일 금요일.


제 계획에 따르면 이 시각에 일어나야 했어요. 하지만 눈을 뜬 것은 20일 오후 9시. 아무리 잠을 다시 청하려 해도 잠이 오지 않았어요.


"어쩌지?"


계속 잠을 청하려고 몸을 뒤척였지만 확실히 깨어버린 잠은 더 이상 오지 않았어요. 결국 동계올림픽을 보기 시작했어요. 피겨 스케이트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았어요. 도중에 잠이 오면 잠깐 눈을 붙이려 했지만 잠은 전혀 오지 않았어요. 오히려 시간이 흐를 수록 정신만 맑아지고 있었어요. 결국 더 이상 자는 것은 포기하고 불을 켠 후, 잘 앉아서 동계올림픽을 보았어요.


'갑자기 김밥에 돈까스가 왜 이렇게 먹고 싶지?'


빨리 씻고 나가서 돈까스를 사먹고 돌아와? 아니면 나가는 길에 돈까스를 사먹고 전철을 타? 김포공항 국제선에는 먹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돈까스에 김밥을 먹고 올지, 가는 길에 먹고 갈지 고민되었어요. 하지만 밖은 추웠고, 그 추위를 무릅쓰고 기어나가기는 또 싫었어요.


'아...귀찮아. 그냥 가는 길에 먹어야지.'


하지만 한 번 게으름을 피우기 시작하니 끝이 없었어요. 원래 계획은 4시에 씻고 5시 조금 넘어서 나가서 후딱 돈까스에 김밥 먹고 전철타는 것이었지만, 캐리어를 끌고 김밥천국 가서 밥 먹고 가기 매우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고, 방에서 하는 것 없이 뒹굴거리다가 5시부터 씻기 시작했어요. 뜨거운 물로 몸을 따뜻하게 달군 후 방을 마지막으로 정리하고 나오니 5시 50분 조금 넘었어요.




지하철 1호선 의정부역에 도착하니 6시. 마침 인천행 지하철이 들어오고 있었어요.


어둠 속을 달리는 전철. 전철 안에는 의외로 사람들이 많이 있었어요. 역시 1호선이야. 1호선이 텅 비어 있는 것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를 못했네. 제가 내릴 곳은 지하철 1호선 신길역. 모처럼 신길역에서 5호선으로 환승해 김포공항을 갈 생각이었어요.


'타이완은 대체 어떤 나라일까?'

'이렇게 아무 준비하지 않고 가도 되기는 하는 걸까?'


아주아주 어렸을 적. 제가 보던 세계지도에는 '자유중국'과 '중공'이 있었어요. 간자체니 번자체니 하는 것조차 제대로 모르던 때라 中国 은 '중공' 이라고 읽어야하는 줄 알았어요. 어렴풋 기억나는 것이라면 우리나라가 중공과 수교하던 날, 방송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실시간 중계로 명동에 있던 자유중국 대사관 앞에서 통곡하는 화교들 모습을 비추어주었다는 것이었어요. 그 후 시간이 흐른 후, 사회과부도와 신문에는 중공이 중국으로 나오기 시작했고, 자유중국은 대만, 타이완이라고 나오기 시작했어요.


고향땅에 중국인들이 여행을 오기 시작하면서 이상하게 생긴 한자들이 적힌 간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그 즈음에서야 그것이 과거 '중공'이라 불리던 중국에서 사용하는 간자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타이완은 싸구려 장난감이나 컴퓨터 부품들에서 접할 수 있었구요.


예전 낡고 허름했던 명동에 있는 중국 대사관의 모습은 이제 잘 기억나지 않아요. 그리고 중국의 국어 교과서를 구하러 돌아다니던 중에 마침 명동 중국 대사관 앞을 지나가게 되었어요.





이 희안한 디자인. 정말 제 머리 속 중국스러운 모습. 고풍스럽지도 않고 무언가 '어린이 놀이동산 중국관'에 어울릴 듯한 모습.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누나, 지금 어디야?"

"우리 아직 버스로 올라가고 있어."


이러다 나 혼자 공항에서 멍하니 앉아서 한참 기다리는 것 아니야?


저는 예상보다 빠르게 공항을 향해 가고 있었어요. 그리고 가족들은 예상보다 느리게 공항을 향해 가고 있었어요.


이렇게 된 이상, 가는 길을 바꾼다!


일부러 신길역을 지나치고 영등포역을 지나 신도림역에서 내렸어요.




"아놔, 환승하기 왜 이렇게 안 좋아?"


신도림역은 공사중이었어요. 그래서 환승하기 불편하게 되어 있었어요. 아무리 텅텅 빈 캐리어라지만 그것을 들고 계단을 올라갔다 내려가는 것은 짜증나는 일. 하지만 툴툴댄다고 바뀌는 것도 다른 선택지도 없었기 때문에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올라갔어요.




신도림에서 까치산역행 2호선을 탔어요. 이번에도 역시나 전철이 바로 이어졌어요. 이상할 정도로 지하철 운은 계속 좋았어요.


'그 에스컬레이터 여전할건가?'


까치산역 에스컬레이터도 우리나라 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 중 나름 유명한 에스컬레이터. 이 에스컬레이터는 길어서 유명한 것이 아니라 '위험해서' 유명한 에스컬레이터였어요. '지하철 에스컬레이터 사고' 라고 하면 꼭 언급되는 에스컬레이터이기도 하지요. 까치산역에 갔던 적은 대학교 1,2학년 시절 뿐이었어요. 그때 기억에 까치산역 에스컬레이터는 참 사고나기 좋겠다고 생각을 했었었어요. 경사도 급하고, 난간이 살짝 기울어졌다는 느낌을 주었으며, 천장도 낮았거든요. 단순히 가파른 경사보다 낮은 천장이 주는 시각적 효과가 참 인상적이었던 에스컬레이터였어요. 물론 과거 공산국가들의 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는 까치산역보다 더 심한 것들도 많지만요.







"여전하구나!"


까치산역 에스컬레이터는 올라가는 것이나 내려가는 것이나 저를 실망시키지 않았어요. 천장이 낮은 것은 여전했어요. 경사가 급한 것도 여전했구요.


까치산역에서 5호선으로 갈아탔어요. 예전에 거의 매일 들리던 발산역, 만들어놓기만 하고 개통하지 않아 지나갈 때마다 그냥 기분이 나빴던 마곡역을 지나 드디어 김포공항에 도착했어요.




2014년 2월 21일 아침 7시 56분. 1년 채 되지 않아 다시 온 지하철 5호선 김포공항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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