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시간을 뒤섞어 (2014)

시간을 뒤섞어 - 01 여행 준비?

좀좀이 2014. 2. 26.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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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결정되었어요. 당연히 으례 그랬듯 이것 저것 궁금해졌고, 이 여행 전체를 계획한 누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어요.


응? 이 분위기는 뭐지?


분위기가 묘하게 돌아가는 것을 느꼈어요. 내가 뭔가 크게 잘못하고 있나?


"이거 패키지 여행이야. 너는 계속 지금껏 네가 해왔던 여행을 생각하고 있나보구나."


당연히 저는 패키지 여행 경험 전무. 중학교와 고등학교 수학여행을 다녀온 적은 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버스에 학생들 태우고 장소에 도착하면 풀어놓고 몇 시까지 오라고 하고 시간 되면 선생님들이 애들을 버스에 몰아태우는 것으로 끝. 그 외의 여행은 제 마음대로 하는 여행이었어요. 그래서 패키지 여행이 어떤 것인지 솔직히 잘 알지는 못했어요. 그냥 가이드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여행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어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다른 팀들한테까지 피해 끼쳐."


음...음...


가족들 말이 틀리지 않았어요. 프로그램은 정해져 있는데 저 혼자 하고 싶은 대로 마구 하다가 시간 자꾸 어기면 전체 일정을 어그러뜨려서 민폐덩어리가 될 수 있었어요. 더욱이 예전 여행갔다가 지갑 잃어버린 것을 주민등록증 재발급 받는 과정에서 집에 들킨 전적이 있어서 패키지 여행에서 걸어다니는 폭탄덩어리가 되는 거서 아닌가 하는 가족들의 걱정어린 눈빛을 읽을 수 있었어요. 이것은 분명 패키지 여행. 정해진 프로그램 잘 따르며 그 안에서 즐겁게 노는 게 최고였어요.


이거 재미있겠는데?


무제한 자유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갑갑해하거나 패키지 여행이라고 폄하할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어요. 오히려 더욱 신나고 흥미가 생겼어요. 그 흥미란 바로...


패키지 여행 그 자체가 너무 궁금해!


저는 이미 혼자 나와서 산 지 10년이 넘었어요. 그래서 여행을 통해 무한한 자유를 느끼는 것에 대한 환상은 별로 없어요. 간단히 말해서 매일매일이 배낭여행같은 나날이고 내일도, 모레도 배낭여행같은 나날이에요. 밥 먹기 귀찮아서 굶는다고 뭐라 할 사람 없고, 밤을 새고 일하러 간다고 해서 뭐라 할 사람도 없어요. 오늘은 뭐 먹지? 오늘은 빨래를 해야 하나? 청소를 할까? 장은 그냥 내일 볼까? 보일러 온도는 몇 도로 해놓아야할까? 오늘은 환기 좀 시켜도 될 건가? 등등 끝없는 자유와 맞물려 일어나는 끝없는 선택지들. 그래요. 까짓거 죄다 싹 다 마음껏 미루어버려도 되요. 그냥 그걸 제가 책임지면 되니까요.


나도 좀 쉬자!


여행을 많이 한 것도 아니고, 여행을 잘 하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할 뿐이에요. 여행 준비 그 자체가 재미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피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에요. 오히려 제게는 여행 준비가 여행 가는 것보다 더 피곤한 일. 여행 짐 싸는 것은 이제 10분이면 충분해요. 짐 싸는 것은 10분, 그 뒤에 정리하는 것은 30분. 역시나 자취생이므로 정리하는 것을 과감히 제껴놓으면 지금이라도 바로 여행 짐 싸서 뛰쳐나갈 수도 있어요. 캐리어 하나에 화장실 가서 세면도구 가지고 나와서 챙겨 넣고, 하루에 하나, 그리고 일주일부터는 그냥 7일로 계산해서 양말, 속옷을 여행 기간에 맞추어 집어넣고 카메라와 충전기, 배터리 챙겨 넣고, 맥가이버칼 하나 넣고, 계절에 따라 겉옷 한 두 벌 더 넣고 혹시 모르니 비닐봉지 두어 장 집어넣고 휴대용 티슈 두 개 쯤 챙기면 끝. 그 다음에 여권 사본 2장을 한 장은 캐리어에, 하나는 카메라 가방에 집어넣고 여권 챙기면 출발. 진짜 피곤하게 하는 것은 바로 여행 가기 전에 하는 공부에요.


배낭 여행을 가면 결국 자기 스스로 자신에게 가이드 노릇도 해야 해요. 말도 해야 하고, 보는 것에 대한 판단과 설명도 다 해야 하죠. 그냥 단순히 '좋다, 나쁘다'로 느끼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큰 가치가 있지만, 비슷한 것을 자꾸 보다보면 '좋다, 나쁘다'를 느끼는 것 자체가 어려워져요. 여기에 더욱 문제는 말이 안 통하면 그만큼 심히 불편해진다는 것. 그래서 여행을 위해 이런 저런 공부를 하다보면 피곤한 것 또한 사실이에요. 이렇게 준비한다고 해서 당연히 막상 가서 속시원히 다 잘 보이는 것도 아닐 뿐더러 공부 과정에서 잘 알지도 못하는 영어를 봐야해서 찾아오는 짜증과 두통에 시달려야 한다는 것은 덤.


하지만 패키지 여행은 가이드가 대동하므로 이렇게 별도로 열심히 준비할 필요가 없었어요. 타이완 자체에 큰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구요. 정말 이번에는 아무 준비도 하지 않고 머리 싹 비우고 편하게 가이드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패키지 여행은 과연 어떤 것인지 느껴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여행기를 쓸 생각도 없었구요. 모든 것을 싹 비우고 편하게 여행을 해보며 패키지 관광은 어떤 것이고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기 때문에 여행기 쓸 생각은 시작부터 접어버렸어요.


"그래도 중국어 몇 마디는 알아야 하지 않을 건가?"


지금까지의 경험에 의하면, 현지 언어를 한 마디라도 아는 것은 일종의 여행자 보험 같은 것이었어요. 영어가 통하면 영어로 하면 되기는 하지만, 세상에는 영어가 안 통하는 사람들이 무지무지 많기 때문에 알아두면 좋아요. 간단히 말해서, 말이 안 통해 손짓 발짓 눈치로 어떻게 간신히 대화를 하는 것은 한 두 번일 때에야 추억이지만, 이게 자꾸 이어지면 짜증은 짜증대로 쌓이고, 소중한 시간은 시간대로 날아가요.


문제는 중국어는 성조가 있는 언어라는 것. 이 성조 때문에 친구가 공부하던 책을 펼쳐 보았다가 바로 덮어버렸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어요.


일단 의정부에서 중량천을 따라가서 청계광장까지 갈 수 있다고 알려준 동생에게 중어 공부 금방 할 수 있냐고 물어보았어요. 그러자 동생은 책 하나를 소개해주었어요.




그리고 친한 형이 알려준 중국 원서를 파는 서점에 가서 중국 소학교 1학년 1학기 교과서도 구입했어요.




"자, 몇 마디만이라도 공부하자!"


먼저 '완전기초 혼자 배우는 중국어' 책을 펼쳤어요.


"이거 왜 이렇게 쉬워!"


문법 부분만 주욱 읽어보는데 당연히 쉬울 수 밖에 없었어요.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었어요.


첫 번째. 가장 기초적인 단계였기 때문에 특별히 어려운 문법이 있을 리 만무했어요. 성조와 발음부터 다루는 교재인데 당연히 처음에 나오는 문법이 쉬울 수 밖에요.


두 번째, 중국어는 고립어에요. 단어의 위치가 문법적 역할을 결정해요. 당연히 동사변화, 명사와 형용사의 격변화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어요.


마지막으로 세 번째, 우리가 알게 모르게 기초 중국어 문법은 학교에서 배웠어요. 한문 및 한자숙어 공부를 통해서요.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주마간산 (走馬看山)이 있어요. 직역하면 '달리는 말을 타고 산을 본다'이지요.


문법만 주욱 읽으니 순간적으로 천재가 된 듯 했어요. 이 정도라면 3일이면 모두 마스터할 줄 알았어요. 머리 속에서는 타이완 가서 자유롭게 현지인들과 중국어로 대화하는 장면이 떠오르고 있었어요.


여기서 정말 정말 중요한 것이 있어요. 혹시나 제가 어학의 천재니 어학에 소질이 있다느니 하는 오해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착각을 왜 했는지 조금 더 자세히 다루고 넘어갈게요. '완전기초 혼자 배우는 중국어' 교재는 총 25과인데, 제가 읽은 것은 9과까지였고, 9과까지 다루는 문법들은 극히 기초적인 문법들이었어요. 是 가 영어의 be 동사에 해당한다든지, 了를 쓰면 과거 시제가 된다든지 정도의 내용들이었어요. 즉, 9과까지 해 봐야 그냥 한자 몇 개 - 們, 是, 不, 没, 了 이 정도 나오는 수준이었다는 것이지요.


이번에는 친한 형의 도움을 받아 중국 소학교 1학년 1학기 교과서를 펼쳤어요.


小兎小兎輕輕跳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뒷 장부터 바로 막혔음. 예, 그래요. 바로 뒷 장 지문 시작하자마자 막혔어요.


两棵小树十个杈


이게 뭔 말이지?


친한 형에게, 친한 동생에게 물어보았지만 모두 모르겠다고 했어요. 결국 딱 한 쪽 읽고 끝. 저 말은 아직도 무슨 말인지 해석을 못하고 있어요. 당연히 뒷문장도 해석을 못 했구요.


교과서에서 좌절 맛보고 다시 혼자 배우는 중국어 교재로 돌아갔는데...


성조를 무시하면 안 된단다.


무턱대고 한자를 외우는 것이라면 그래도 해 볼만 해요. 국민학교 아침 자습시간부터 한자를 강제로 익혀야했기 때문에 한자 외우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어요. 문제는 성조. 그냥 글자 하나를 읽으라면 어떻게 흉내라도 내보는데, 이게 문장으로 나오기 시작하면 당최 감을 잡을 수 없었어요. 게다가 이 책은 표지에 무려 '카세트 별매'가 당당히 적혀 있는 책. 친한 동생이 자신에게 카세트 테이프 있으니 빌려주겠다고 했지만 당연히 제게 카세트 테이프를 들을 수 있는 라디오가 있을 리 없었어요. 네이버 사전 및 글로벌 회화에서 들어보아도 감이 안 잡히는 건 똑같았어요.


"대만 일본어 잘 통한대. 그러니 남은 시간 일본 애니나 열심히 보고 일본어로 이야기해."


친한 형이 나름 진지하게 조언을 해 주었어요. 타이완은 일본과의 교류가 워낙 많기 때문에 일본어 아는 사람이 많다는 것. 그러므로 며칠 한다고 될 중국어도 아니니 차라리 일본어나 조금 듣고 가서 일본어로 이야기하라는 것이었어요.


중국어 교재를 구입한지 이틀 만에 교재는 책더미 속에 던져졌고, 머리 속에 남은 것이라고는 '소토소토경경도' 뿐.


이제부터 '얼마에요'도 '소토소토경경도'이고, '안녕하세요'도 '소토소토경경도'이고, '안녕히계세요'도 '소토소토경경도'다!


소토소토경경도를 대체 어디에 써!


그래도 하나 건졌어요. 小 를 '샤오' 라고 읽는다는 것이요.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게 패키지 여행이라는 것. 그래서 그냥 전부 손을 놓아버렸어요. 여행 준비고 뭐고 하나도 하지 않았어요. '소토소토경경도' 하나 외운 후 정말 시간이 갈 수록 여행이 가까워지며 마음은 설레는데 준비는 더욱 더 안 해 버리는 해괴한 상황이 심해지고 있었어요.


한편, 학원에서는 원장님께서 학생들과 함께 대만 여행을 다녀오실 계획을 세우고 계셨어요. 그러던 차에 제가 대만 여행을 간다고 말씀드리자 제 여행 이야기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셨어요.


누나가 계획한 여행이니 모든 걸 누나에게 맡기기로 하고 손을 놓아버린 상황에서 학원에서 제 여행에 대한 기대감은 높아지는 상황. 하지만 소토소토경경도에서 포기해버렸기 때문에 저는 당연히 예전처럼 열심히 준비를 해서 여행을 간 후, 자세한 여행기를 쓰겠다는 생각 따위는 이미 책더미 속에 중국어 교재를 던져버릴 때 같이 던져버렸어요. 그래서 여행에서 하고 싶은 것 또한 '편의점 가서 이것저것 사먹어보자'로 바뀌었어요. 얌전히 가이드 뒤를 따라다니며 설명 잘 듣고 시간 나면 편의점 가서 간식들 사먹는 것이 이번 여행 목표. 편의점이야 얼마인지 기계에 가격이 나오므로 말을 할 필요도 없을테니 중국어 공부를 하지 않아도 충분히 잘 이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더욱이 타이완은 공업국가. 공업국가이므로 편의점 탐방도 나름대로 즐겁지 않을까 혼자 상상했어요.


이렇게 대책없이 여행 준비는 하나도 하지 않았고, 여행을 출발할 날짜는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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