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여행기/미분류

이제 와서 후회되는 것

좀좀이 2012. 12. 23.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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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웬만해서는 후회를 잘 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예전에 했던 일이 모두 좋았고, 잘했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그때로 되돌아간다면 결국 그 행동을 또 반복할 것이기 때문에 후회하지 않으려 할 뿐이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그 당시에는 그게 내가 가장 원하던 선택들이었다. 지금도 가끔 과거로 돌아가 선택의 기로에 선다면 어떤 결정을 했을지 가끔 생각해본다. 그런데 돌아간다면 또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선택의 기로에서 내가 내렸던 결정을 후회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와서 후회되는 게 하나 생겼다.




왜 예전에는 다양한 나라의 국어 교과서를 모으고, 그것을 읽으려는 생각을 하지 못했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여기 와서부터였다. 여기 와서까지 처음에는 학교에서 사용하는 국어 교과서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교과서를 구할 방법이 너무 쉬운 것도 있었고, 교과서보다는 이 나라의 사회, 문화와 관련된 책을 읽고 싶었다. 그래도 조금씩 모으기는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목적은 단 하나였다. 만약 한국에 돌아가서 우즈벡어를 가르칠 일이 생겼는데, 내가 배운 학원 교재만 가지고 가르치는 상황만은 피해야했기 때문이었다.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지만, 기회가 왔는데 준비부족으로 날려먹으면 안 되기 때문에 그냥 미래에 대비한 보험 하나 든다는 셈치고 국어 교과서를 모았다.


한동안 구입만 해 놓고 집 구석에 던져놓았다. 큰 흥미가 없었기도 했고, 학원 교재를 다 끝내지 않은 상태라 다른 부교재를 마구 늘릴 이유가 없는 상태이기도 했으며, 결정적으로 이 시기에 나는 투르크메니스탄 경유 비자 받느라 내 정신이 아니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자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비록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즈스탄은 가 보지 못했지만, 원래 한국에서 계획했던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은 다녀왔다. 그리고 그 나라에서 교과서도 구입했다. 이때도 교과서를 구입한 이유는 여기에서 우즈벡어 교과서를 모은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워낙 제대로 된 어학 교재들이 없다보니 교과서로 문제를 해결해보자는 생각에 구한 것이었다.


학원 교재도 끝나서 다른 책을 읽을 여유가 생기자 여기 와서 그동안 모아온 교과서들을 들추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나는 교과서에 담겨 있는 심오한 의미들을 깨달았다.


먼저 국어 교과서에는 '체계'가 있다.


당연히 국어 교과서에는 한 나라의 '국어'를 가르치는 체계가 있다. 물론 모든 교과서에서 이 체계가 잘 되어 있다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나 역시 진지하게 글을 쓰기 위해서는 국어교육학과 제1외국어 교육학을 따로 제대로 읽어보아야 하므로 크게 언급하지는 않겠다. 한 언어를 습득하는 방법에는 크게 아이들이 모국어 익히듯 자연스럽게 말을 따라하고 이를 교정해가는 방법이 있고, 단계적으로 문법과 어휘를 늘려가는 방법이 있다. 어떤 방법을 사용할지는 언어 상황에 맞추어 택하며, 반드시 한 방법만 선택하는 게 아니라 두 방법을 적당히 섞어서 학습시킬 수 있다.


국어 교과서로 외국어 공부를 시작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많은 경우에서, 이미 말을 할 줄 아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국어 교과서를 제작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다행인 것은, 아주 기초적인 교재를 보고 나서 교과서를 보면 교과서 속 체계를 따라갈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국어 교과서의 체계는 얼마나 사람들의 학습 능력이 높은가를 가늠해볼 수 있고, 나와 같은 외국어 학습자에게는 기초 단계를 끝낸 후 애매한 단계에서 교재로 삼기 좋다는 점이 있다. 그리고 중앙아시아에서는 자국어 (카자흐어, 우즈베크어, 키르기즈어, 타지크어, 투르크멘어, 아제리어)의 보급이 얼마나 원활히 되어가는지, 그리고 향후 미래에 언어 사회가 어떻게 변해갈지 짐작해볼 수 있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이 교과서의 체계에 문제가 있다면 당연히 애들이 국어 과목을 매우 싫어하고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제시하는 미래를 볼 수 있다.


당연히 교과서에 지문으로 아무 것이나 집어넣지 않는다. 당연히 교과서에서는 '모범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며, '모범적인 인간'이란 정부가 제시하는 미래를 구성하는 구성원의 모습이다. 이 모습은 단지 '착한 인간'으로만 나오지 않는다. 예를 들어 우즈베키스탄 국어 교과서에서는 꾸준히 '우즈베키스탄에서 살고 있는 전 민족의 화합과 단결'을 강조한다. 아제르바이잔 교과서에서는 1학년 교과서에서부터 아르메니아인들이 일으킨 호잘리 학살에 대해 언급되고,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을 반드시 수복해야 할 영토라고 나와 있다. 이 외에도 이런 저런 모습들이 나와 있다.


사실 이런 것은 통신사나 신문 기사 몇 번 보면 금방 파악할 수 있는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어떤 식으로, 어떤 이야기들을 통해 정부가 제시하는 미래에 맞는 인간을 만들어가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지는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게다가 말은 잊혀지고 바꿀 수 있지만, 교과서는 최소 1년이다.


한 나라의 사회, 문화 및 잡다한 것들을 볼 수 있다.


교과서에는 문화와 관련된 지문이 많다. 단적으로 '예의 바른 인간'이라 할 때, 이것도 크게 보면 비슷하지만, 조금만 들어가보면 문화마다 제각각이다. 전래동화, 명절, 풍습에 관련된 내용들도 있고, 그 외 사소한 것들도 있다. 예를 들면 우즈베키스탄은 지하철이 있음을 그렇게 자랑스러워한다. 이제는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지하철이 개통되었다고 하니 어떻게 해야할지 궁금하다. 아마 한동안은 타슈켄트에는 지하철이 무려 3호선이나 있다고 자랑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카자흐스탄도 지하철 노선을 늘리면 그때는 '우리가 중앙아시아 최초! 역사와 전통!' 이러지 않을까 싶다. 무슨 교과서마다 지하철 역사가 나오는지...


Toshkent metrosi 1973-yilda qurila boshlangan.

타슈켄트 지하철은 1973년에 건설되기 시작했습니다.

Chilonzor yo'nalishining birinchi qismi (S.Rahimov bekatidan hozirgi Amir Temur bekatigacha 9 ta bekat) 1977-yil 6-noyabrda qurib bitkazildi.

칠론조르 노선의 첫 번째 부분 (소비르 라히모프 역부터 현재 아미르 테무르 역까지 9개 역)은 1977년 11월 6일 완공되었습니다.

Uning uzunligi 12,2 km.

그것의 길이는 12.2km입니다.

Bu yo'nalishning 3 bekatdan iborat ikkinchi qismi (Amir Temur bekatidan hozirgi Buyuk Ipak Yo'li bekatigacha) 1980-yil 18-avgustda ishga tushdi.

이 노선의 3개 역으로 구성된 두 번째 부분 (아미르 테무르역에서부터 현재 부육 이팍 욜르 (비단길) 역까지)은 1980년 8월 18일에 완공되었습니다.

Bu qismning uzunligi 4,6km.

이 부분의 길이는 4.6km입니다.

Shunday qilib, birinchi yo'nalish 12 ta bekatdan iborat bo'ldi.

그렇게 해서, 1호선은 12개 역으로 구성되었습니다.

1981-yilda ikkinchi - O'zbekiston yo'nalishining qurilishi boshlandi.

1981년에 2호선 - 우즈베키스탄 노선의 건설이 시작되었습니다.

Unda Chkalov bekatidan Beruniy bekatigacha bo'lgan masofada 11 ta bekat qurib ishga tushirildi.

그것에서 츠칼로프 역에서부터 베루니 역까지의 거리로 11개 역이 건설되었습니다.

Mustaqillik yillarida metroning uchinchi - Yunusobod yo'nalishining birinchi qismida Mingo'rikdan Habib Abdullayev bekatigacha bo'lgan masofada 6 ta bekat qurilib ishga tushirildi.

독립 후에 지하철의 세 번째 - 유누소보드 노선의 첫 번째 부분으로 밍오릭부터 하비브 압둘라예브 역까지의 거리로 6개 역이 건설되었습니다.

Bu yo'nalishning ikkinchi qismi bo'yicha hozirgi kunda qurilish ishlari olib borilmoqda.

이 노선의 두 번째 부분에 대해 현재 건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지문은 우즈베키스탄에 사는 우즈벡인이 아닌 다른 민족들이 국어를 배우는 교과서인 O'zbek tili 7권에 실제 수록된 지문이다. 이런 지문이 매 권 있다...참고로 3호선은 2001년 독립 10주년을 기념해 개통했다고 O'zbek tili 8권에 나온다. 이러다 고교 교과서 가면 지하철 역 전부 외울 기세다...그러고보니 이것만 모아놓아도 웃긴 게시물이 되겠구나!


어쨌든 결론적으로 외국어를 배울 때 국어 교과서를 보는 건 매우 많은 장점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취향에 따라 극히 지루해하는 경우도 있고, 어린 애들 보는 것을 어찌 감히 어른이 보냐고 거부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가장 애매한 단계인 중급 단계에서 가장 효과적인 교재가 교과서이다.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교과서는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교과서다. 카자흐스탄 교과서는 티스토리 안에서 돌아다니다 알게 된 한 블로거님의 도움을 통해 입수했다. 카자흐스탄 교과서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ㅠㅠ


그러면 이제 와서 후회되는 것은?


여기 오기 전까지만 해도 여행을 다니며 국어 교과서를 살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때 내가 수집하는 것이라면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를 내가 간  나라 언어로 된 것을 모으는 것이었다. 파울로 코엘료 소설 중 연금술사만 좋아하고, 그런다고 그 소설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이런 해괴한(?) 취미를 가지게 된 이유는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끝까지 다 읽은 영어 원서가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였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사전 뒤적거리며 읽느라 군대에서 말년에 시간을 잘 보냈다. 그 후, 다른 나라 말로 번역된 연금술사도 읽어보고 싶었다. 영어판의 경우, 그렇게 어렵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나라 말로 번역된 연금술사도 쉽게 읽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게다가 연금술사는 가장 많은 나라 말로 번역된 소설 중 하나다. 국어로 지정된 언어들로는 웬만해서는 거의 다 번역되었다. 그래서 언젠가 여러 외국어를 공부하고, 이것들을 다 읽겠다고 결심했고 모으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도쿄에서 경유할 때 딱 오전에만 잠깐 시간이 있었을 때 서점 가서 샀다. 이 일은 아직도 기억난다. 서점을 겨우 찾아서 들어갔는데 당최 연금술사를 찾을 수 없었다. 한때 일본어를 공부했었지만 서점에 들어가서 찾아보려고 하니 글자들이 눈에 확확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점원에게 렌킨슛샤였나 뭐였나...하여간 아마 '렌킨슛샤 아리마스카?'라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점원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어쨌든 못 알아듣자 설마 없을까 하는 마음에 대충 찍어서 '파우로 코에료노 쇼세키, 아루케미스토 아리마스카?'라고 물어보자 바로 찾아주었다. 대충 영어로 알케미스트이니까 일본어 시늉내서 '아루케미스토'라고 찍어서 말했는데 진짜 번역판 제목이 그거였다...게다가 '렌킨슛샤'라고 하면 못 알아들을 법도 한 것이 애니 '강철의 연금술사'가 엄청나게 유명했다는 것.


본론으로 돌아가서, 7박 35일 일정으로 발칸유럽을 돌아다닐 때에는 교과서를 살 수가 없었다. 일단 말이 안 통했다. 영어를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더욱이 비수기였다. 그러니 교과서를 구입하기는 고사하고 연금술사를 각 나라 국어 번역본으로 전부 구해온 것 자체가 그때는 기적이었다. 게다가 교과서를 다 구했다면 그걸 들고다닐 방법도 없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아랍어 교과서는 모로코에서 구할 수 있었다. 충분히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나 역시 외국의 교과서를 지금처럼 제대로 읽어나간 적이 없었기 때문에 구하지 않았다.


그 다음은 프랑스 교과서. 이것도 내가 왜 안 구했을까...그런데 이건 지금 생각해보아도 약간 납득이 간다. 이 말 한 마디로 간단히 설명할 수 있다. '유로는 무섭더라.'


마지막으로 아르메니아 교과서. 조지아 (그루지야) 교과서는 어디서 파는지 당최 알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트빌리시에서 제대로 책을 파는 곳을 못 찾았다. 하지만 아르메니아 예레반에서는 제대로 책을 파는 곳을 찾았다. 여기에서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 아르메니아어판 복사본을 겨우 구했다. 만약 예레반에서 책을 구하려 한다면 그냥 거기로 가면 되었고, 거기에 실제로 교과서도 있었다. 내가 그곳을 발견한 이후 거의 매일 가서 책을 뒤지고 사가니까 나중에 선물이라고 교과서 한 권을 주었다. 그때 왜 교과서를 전부 살 생각을 못했지? 마음만 먹었다면 충분히 살 수 있었다. 언어의 장벽은 호스텔 직원에게 '학교에서 사용하는 아르메니아어 과목 교과서' 라고 아르메니아어로 적어달라고 하면 충분히 제거되는 문제였으니 말이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여행갔던 모든 나라의 국어 교과서를 구하고 싶지만 이건 아마 불가능할 거다. 만약 딱 하나만 된다면, 국가와 상관 없이 학교에서 사용하는 아랍어 교과서를 모두 모아서 읽고 싶다. 그게 이집트가 되었든, 요르단이 되었든, 모로코가 되었든 아랍어를 국어로 사용하는 나라의 아랍어 교과서를 모두 모아서 쭉 읽어보고 싶다. 한때 아랍어를 열심히 공부했었기 때문에 아랍어 교과서를 쭈욱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요즘 교과서들을 읽으며 계속 들고 있다. 그런데 아랍 국가의 아랍어 교과서는 부탁할 곳이 없구나...아랍은 내가 다시는 가지 않을 거 같은데...


진작에 국어 교과서의 중요성을 깨우쳐야 했다. 그리고 모로코와 튀니지에 갔을 때 반드시 아랍어 교과서를 무슨 일이 있었더라도 모두 사왔어야 했다.


이것만은 이제 와서 정말 뼈저리게 후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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