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여행기/미분류

나와 남이 내게 보내는 편지 - 유치우편

좀좀이 2012. 11. 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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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슬슬 연말이 다가온다. 여기에서 연말을 맞이해 엽서라도 한 통 부쳐주려면 11월 중순에는 부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보통 엽서를 보내면 한 달 걸리니 말이다.


그러고보면 나도 편지를 못 받아본지 참 오래되었다. 마지막으로 받았던 게 아는 동생이 군대에서 부친 편지였다. 그때 동생이 병장 즈음 되어서 차일피일 답장을 미루다보니 결국 동생이 전역해 버렸다.


옛날에 내가 일기처럼 썼던 글을 보니 재미있는 기록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유치우편.


사전을 뒤져보면 이렇게 나온다.


유치우편 [留置郵便]

<통신> 발신인의 청구에 의하여 그의 지정 우체국에 유치하여 두었다가 수취인이 직접 받아 가는 우편 제도.


대학교 4학년 때였다. 인터넷 서핑을 하며 시간을 흘려보내던 어느 가을날. 우표수집 카페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글을 보았다. 몇몇 사람들이 유치우편을 보내고 반송되는 편지에 찍힌 소인을 모은다는 것이었다.


방법은 이런 식이었다.

1. 엉터리로 이름을 적고, 주소는 아래에 적은 정해진 양식으로 기입한다.


To. Mr. 000 (엉터리 수취인)

Tripoli Post office

c/o Poste Restante (여기는 유치우편 보내는 주소. 도시명만 바꾸어쓰면 된다)

LIBYA (보내는 나라를 적는다)


2. 그 편지는 우체국에 유치되어 있다가 특정 소인이 찍혀서 돌아온다.


재미있는 것은 내가 나한테 보내는 편지인데 이게 운도 따라주어야 한다는 것. 반송하는 것이 의무가 아니다보니 그냥 편지를 버려도 상관없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주로 선진국에 유치우편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한 번 따라해 보기로 했다.


내가 보내기로 한 곳은 사하라 이남의 검은 아프리카. 이쪽은 모두가 매우 어려울 거라 전망하는 곳이었다. 게다가 국가는 또 왜 그리 많은지...


가나, 가봉, 감비아, 기니, 기니비사우, 나이지리아, 니제르, 라이베리아, 르완다, 마다가스카르, 말라위, 말리, 모리셔스, 모리타니, 베넹, 부룬디, 부르키나파소, 상투메프린시페, 세네갈, 세이셸, 소말리아, 수단, 시에라리온, 알제리, 에리트레아, 에티오피아, 적도기니,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지부티, 차드, 카메룬, 카보베르데, 코모로, 코트디부아르, 콩고공화국, 콩고민주공화국, 토고


이 나라들에 보내려고 하니 우편 요금이 장난 아니었다. 그래서 머리를 굴린 것이 바로 항공서간!


지금은 요금이 얼마인지 모르겠으나, 내가 보낼 때에는 1장당 400원이었다. 이게 한 장 보내는 것이면 별로 비싸지 않은데 저 나라들에 다 보내려고 하니 요금이 장난 아니었다. 우편료를 줄이기 위해 머리를 굴린 것이 그때 항공서간이었던 것.


유치우편유치우편


당시 사진. 당연히 희망은 100% 생존해 돌아오는 것이었지만, 현실적으로 반만 돌아와도 성공.


그리고 아래는 이 유치우편과 관련된 나의 옛날 일기.

===

작년 9월 , 유치우편을 만들기 위해 항공서간으로 아프리카 몇몇 국가에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그 편지 아래에 각국 국어로 '만약 주소가 없으면 원래 주소로 반송해 주세요'라고 적었다.

 

그리고나서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에서 편지가 돌아왔다.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는 선진국인 거다!

 

어제 회식이 있어서 집에 새벽 4시에 들어와서 잤다.

 

오후 1시.  어머니가 깨우시더니 내게 편지 한 통을 건네주셨다.  나한테 반송된 편지가 있다는 것이었다.

 

보니 세네갈에서 온 편지였다.

 

물론 당연히 내가 보낸 것이었다.  내가 세네갈에 아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

 

그런데 도장은 찍지 않았고, 붉은 볼펜으로 도저히 글자라고 알아볼 수 없는 알파벳 필기체로 몇 글자 적혀 있고, 내가 반송해달라는 메시지에 붉은 밑줄을 쫙 그어서 보낸사람 주소에 화살표로 쭉 그어놓았다.

 

비록 원하는 도장은 얻지 못했지만, 그 정성에 정말 고마웠다.

 

세네갈도 선진국인 거다!

===

어렴풋이 기억하기로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는 돌아오는데에 3달 정도 걸렸다. 그리고 알 수는 없지만 예쁜 글자들이 적힌 도장이 쾅 찍혀 있었다. (참고로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에서 사용하는 문자는 비슷하게 생겼다) 그리고 세네갈은 10개월 정도 걸렸다.


1년이 넘어서 모리타니에 보낸 것도 돌아온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귀환자는 4명.


이것이 재미있는 것이 보내놓고 아예 까맣게 잊어버릴 때 즈음 한 통, 두 통 돌아왔다는 것. 솔직히 세네갈, 모리타니에 보낸 것은 아예 돌아올 거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이것은 나름 보내주는 쪽의 정성도 필요하다는 것과 운도 따라주어야 한다는 것이 매력이었다. 버려도 되는 편지를 일정 기간 우체국에 묵혀 두었다가 반송 도장 쾅 찍어서 다시 돌려보내야하기 때문이다. 즉 내가 보낸 편지를 내가 받는 것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누군가 내게 보내주어야만 내가 다시 그것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아마 나머지 것들은 그냥 쓰레기통에 들어가 사망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있다. 아니면 정말 휴지가 되었거나...


한국 돌아가면 서랍을 뒤져 돌아온 유치우편들 사진을 찍어놓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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