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여행기/미분류

한국어 '사귀었다'에 대한 추억

좀좀이 2012. 10. 13.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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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에는 단모음이 10개 있어요. 쉽게 외우는 방법은 '아야어여오요우유으이'에서 하나씩 건너뛰며 '아, 어, 오, 우, 으, 이'를 쓰고 '아' 부터 '우'까지 전부 'ㅣ'를 그어서 '애, 에, 외, 위'를 만드는 것. 이러면 한국어 단모음 10개가 딱 나와요.


그런데 '외', '위'는 대부분 이중모음으로 발음되요. 그래서 들을 때 '외, 왜, 웨'는 구분을 잘 하지 않고, '위'도 'wi'라고 발음하는 경우가 대부분. 그렇지만 아직까지도 확실히 '외', '위'를 단모음으로 발음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뵙다'와 '사귀다'에요.


'사귀다'의 과거형은 '사귀었다'. '사귀었다'라고 또박또박 발음하기도 하지만 '위'가 다시 반모음이 되어서 축약되어 발음되는 경우도 종종 있어요.



고등학교 2학년때였어요. 학교 미술 시간이었어요. 미술 시간은 많은 학생들이 좋아하는 시간. 그 이유는 음악 시간과 달리 가벼운 잡담을 하며 즐길 수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 그래서 그림을 못 그리는 저도 친구들과 재미있게 대화하며 잘 참여하는 시간이었어요. 약간 시끄럽기는 했지만 그림을 그리며 가볍게 이야기하는 정도는 허용되었기 때문에 모두 그림을 그리며 수다를 즐기는 시간.


여느 날 처럼 친구들과 잡담을 하며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고 있었어요. 선생님 몰래 조용히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내던 친구가 대화를 끊었어요.


"야, '사귀었어' 어떻게 적냐?"


모두가 그 친구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어요. 연합고사 합격해서 인문계 들어온 녀석이 고작 '사귀었다' 하나 못 써서 친구들에게 질문하고 있어?


그래서 모두 그것 하나 못 쓰냐고 하며 이렇게 쓰라고 알려주려고 하는데...


'어? 어떻게 써야 하지?'


모두가 고민에 빠졌어요. 한 명이 '사귀었어'라고 쓰면 되지 않겠냐고 말했어요.


"야, 내가 그걸 몰라서 묻냐?"


당연히 우리 모두 '사귀었어'는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저렇게 적어도 틀리지는 않지만 '봤어' 처럼 축약이 일어난 형태가 아니었으니까요. 게다가 친구가 물어본 '사귀었어'와 우리가 생각한 '사귀었어' 모두 또박또박 읽은 '사귀었어'가 아니었어요. '위' 모음이 반모음화되어 발음된 '사귀었어'였어요.


"'사겼어'라고 쓰는 거 아니야?"

"야, 그게 발음이 같냐? 너는 귀 어디에 두고 사냐?"


당연히 '사겼어'는 표준어도 아니고 발음도 완벽히 틀린 말. '사귀었어'는 뭐 표준어이니 발음과 달라도 별 수 없이 그렇게 쓴다 하지만 '사겼어'는 발음도 아예 다르고 표준어도 아니었어요.


"야, 그거 '위'에 '여' 아니냐?"


참 그럴듯한 가설. 그러나 당연히 그렇게 생긴 글자를 본 적이 없었어요. '사궜어' 역시 전혀 틀린 말이었기 때문에 그나마 비슷하게 써 보려면 '위'에 '여'를 쓰는 수밖에 없었어요.


그 말을 들은 친구는 핸드폰으로 꾹꾹 찍어보더니


"그 따위 글자 없어. 핸드폰으로 안 찍히잖아."


핸드폰으로 찍어보니 당연히 '사구ㅕㅆ어'라고 나왔어요. 이것도 어쨌든 틀린 셈.


이도 저도 안 되어서 결국 우리가 내린 결론은 하나. '그냥 '사귀었어'로 써라'.


나중에 알고 보니 '사귀었어'는 그냥 사귀었다고 써야 하더군요. 그때는 스마트폰이 없어서 그 자리에서 인터넷으로 물어볼 방법도 없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지요. 지금도 '사귀었어'라는 말을 할 때 가끔 이때 이 일이 떠오른답니다.


- 여러분은 이런 적 없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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