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기적과 저주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3장 20화

좀좀이 2020. 7. 11.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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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3장 20화


 "왜 왔어?"

 "너 보려구. 같이 공부도 하고."

 "거짓말하지 마!"


 아다비아에게 인사를 하자마자 아다비아는 내게 다짜고짜 왜 왔냐고 물어보았다. 당연히 너 보려고 왔지. 너랑 공부도 하고. 그런데 이 반응은 뭐야? 웃으며 반겨준 적은 없지만 이렇게 소리지르는 건 또 뭐지? 이건 단순히 기분이 별로라 소리치는 게 아니잖아. 아다비아한테 잘못한 거 전혀 없다. 무슨 막 며칠이고 계속 안 오다 안 온 것도 아니구. 잠이 덜 깨었나?


 "너, 요즘 다른 년 만나지?"

 "뭐? 다른 년?"

 "켈라자야한테 다 들었어."

 "뭘?"


 켈라자야한테 들었다고? 내가 다른 여자 만나고 다닌다는 말을? 설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내가 너네 몰래 다른 여자와 히히덕거리면 네 귀에 들어가기 전에 켈라자야가 퍽이나 가만히 있겠다. 켈라자야는 아까 나한테 잘 다녀오라고 웃으면서 손도 흔들어줬다. 그런데 뭘 다른 년과 만난다는 거야?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게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거 알 수 있잖아. 그 전에 켈라자야는 아다비아한테 뭔 소리를 한 거야? 켈라자야가 얘한테 뭘 어떻게 말했는지 궁금하네. 켈라자야가 아다비아와 나 사이를 멀어지게 하려고 거짓말했을 거 같지는 않은데...설령 거짓말을 해도 그런 말을 지어내서 하지는 않겠지.


 "너 요즘 다른 년이랑 아주 좋아 죽으려 한다며!"

 "뭔 다른 년? 누구?"

 "차라클라야!"

 "아...걔?"

 "왜? 이름만 들어도 너무 좋아?"

 "아니야!"


 차라클라야 이름을 듣는 순간 황당해서 헛웃음이 나왔다. 켈라자야는 뭘 어떻게 이야기한 거야? 내가 차라클라야와 놀아난 거면 켈라자야는 뭔데? 걔도 차라클라야한테 부드러운 표정 지으며 대하는데. 얘 혼자 막 이상한 생각한 거 아니야? 차라클라야는 켈라자야와도 잘 지내고 있는데 무슨 다른 년이랑 놀아단다는 소리야. 얘는 켈라자야랑 친하게 지내면서 여태 켈라자야를 모르는 거야?


 "너 걔만 보면 아주 좋아 죽으려고 한다면서?"

 "켈라자야가 그래?"

 "그래!"

 "진짜야?"

 "그래!"

 "너 진짜 켈라자야한테 물어본다?"

 "물어봐!"


 얘가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이렇게 나오지? 이따 서점으로 돌아가면 켈라자야 있을 건데. 아무리 봐도 이건 혼자 이상한 상상하다가 열받은 거야. 켈라자야가 일부러 없는 거 지어내고 살을 붙여서 이상한 소리를 했을 리 없어. 걔가 그런 게 된다면 차라리 걱정이나 안 하지. 켈라자야가 아다비아한테 자기가 나와 같이 차라클라야한테 공부 알려준다고 말하기는 했을 거다. 그리고 그게 너무 즐겁다고 말했겠지. 하지만 거기에서 더 나가서 없는 말 지어내지는 않았을 거다. 켈라자야가 아다비아한테 내가 차라클라야와 히히덕거린다고 말했다고? 그럴 일 절대 없다. 켈라자야가 그렇게 느꼈다면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았을 거니까.


 "너가 오해하는 거야. 차라클라야와는 네가 상상하는 그런 관계 아니야."

 "내가 앞 안 보인다고 이런 것까지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해? 내가 우스워 보여?"

 "아니라니까! 아다비아, 내가 진짜 그랬으면 켈라자야가 가만히 있었겠어?"

 "켈라자야는 같이 노니까!"

 "아니야. 그냥 공부 알려주는 거 뿐이야."


 아다비아가 앉아 있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아다비아 손을 잡았다. 아다비아가 내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아다비아 손을 다시 잡았다. 아다비아는 또 손을 거칠게 뿌리치려고 한다. 손을 꽉 잡았다.


 "아다비아, 네가 오해하는 거야. 차라클라야와는 그런 사이 아냐."

 "거짓말! 나 같은 병신보다 걔가 훨씬 더 좋지? 걔는 깨끗하잖아!"

 "아니야. 정말이라구!"


 아다비아를 꼭 껴았았다. 아다비아가 손톱을 세워 내 등을 세게 할퀸다.


 "진짜야. 그냥 걔 가르치는 게 재미있을 뿐이야. 나 진짜 너 좋아해!"

 "그런데 다른 년한테 알짱거려?"

 "무슨 꼬리를 쳐? 나는 진짜 너랑 켈라자야 뿐이야."

 "꺼져!"


 아다비아가 손바닥으로 내 등을 내리쳤다. 이건 안 아파. 할퀴는 것에 비하면 이건 쓰다듬어주는 수준이다.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거든. 아다비아를 더욱 세게 껴안았다. 아다비아는 이를 꽉 다물고 내 등을 손바닥으로 계속 때린다. 뭐가 그렇게 불안한 거야? 예전 네 모습은 어디로 갔어? 아다비아가 내 등을 때리는 힘이 점점 약해져 간다. 말 없이 계속 아다비아를 껴안는다.


 "걔랑 같이 공부하니까 좋니? 아주 좋아?"

 "아냐."


 사실 많이 좋다. 내가 누군가를 가르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해. 물론 그것만은 아니야. 차라클라야와 같이 있으면 차라클라야의 밝은 기운이 내게 전해져와. 그 누구도 그 어떤 답도 없이 그저 살아 있으니까 죽임을 당하지만 않기를 빌며 살아가는 하루하루. 그런데 차라클라야는 달라. 어떻게든 스스로 길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해. 그 노력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뭐든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렇게 바닥에 널부러져 있다가 몸을 일으키고 두 다리로 벌떡 일어나게 돼. 그래서 많이 좋아. 하지만 많이 좋다고 이야기하면 아다비아가 노발대발하겠지.


 아다비아가 나를 꼭 껴안았다. 한 손으로 아다비아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아다비아는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켈라자야한테 들었어. 걔 정말 좋은 애라구. 켈라자야도 걔는 괜찮은 거 같다고 했어."

 "꿈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니까."

 "부럽다."

 "왜?"

 "켈라자야는 걔 가르치면서 행복해하잖아. 너도 그렇구. 나만..."

 "너는 나를 가르쳐주잖아."

 "그게 같아?"


 아다비아를 다시 힘주어 꽉 껴안았다.


 "너 정말 많이 좋아해. 그리고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어."

 "뭘?"

 "네가 나 낙제 막아준 거."

 "어차피 학교는 폐교되었잖아."

 "그래도...나한테는 정말 고마워."

 "거짓말!"


 아다비아가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내 말이 싫지는 않은가 보다. 나를 억지로 밀어내려고 하지는 않으니까. 아다비아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아다비아는 가만히 있는다. 숨소리도 거칠지 않다. 어떻게 내가 그걸 잊겠어? 그 은혜를 잊어버리면 사람 새끼가 아니지. 거의 매일 서점에 찾아와 내 공부를 도와주어서 나를 낙제에서 구원해주었잖아. 만약 그때 낙제를 했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지금이 전혀 안 힘들 수도 있다. 아예 자포자기한 상태였을 거니까. 희망이 없는데 힘들 게 뭐가 있어.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아다비아가 나를 낙제에서 구출해주었기 때문에 실낱 같은 꿈이라도 꾸어볼 수 있다. 언젠가는 다시 학교가 열릴 거고, 그때부터 또 시작하면 된다는 희망.


 "나도 같이 알려주고 싶다."

 "너?"

 "너보다는 훨씬 잘 알려줄 수 있으니까."

 "다음에는 너도 같이 할래?"

 "싫어."

 "왜?"


 아다비아가 차라클라야를 가르쳐준다면 상태가 더 나아지지 않을까? 앞이 안 보여도 무언가 할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잖아.


 "나는 흉측하니까..."

 "아냐, 네가 왜 흉측해?"

 "싫어. 무서워.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 지 안단 말이야..."


 아다비아 머리를 다시 쓰다듬어주었다.


 "언제든지 마음 바뀌면 말해. 너 남 가르치는 거 잘 하잖아."


 그 말에 아다비아가 미소를 지었다.


 "그건 맞아. 너 같은 돌대가리도 낙제를 면하게 해줬으니까."


 웃음이 나왔다. 틀린 말은 아니지. 정말 오랜만에 듣는 아다비아다운 말. 이래야 아다비아지. 좋은 일 하고도 꼭 욕 먹을 소리를 골라서 해서 도움 받은 상대 속 뒤집어지게 하는 말만 골라서 해야 아다비아답다. 그것 때문에 예쁜 얼굴과 좋은 머리를 갖고도 학교에 친구가 라키사 뿐이었다. 라키사는 아다비아에게 도움받을 게 없어서 친하게 지냈던 것일 수도 있어. 아다비아한테 도움받을 일이 없으니 아다비아 특유의 그 속 긁는 말을 들은 적도 없겠지. 라키사도 이런 아다비아 특유의 신경 긁는 소리를 직접 들었다면 아다비아와 친하게 지낼 생각 못 했을 거야.


 책을 펼치고 소리내서 읽고 내가 해석한 것을 이야기했다. 아다비아는 가만히 들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해석한 것이 맞다는 신호다. 단어 찾은 것을 읽고 철자를 한 글자씩 말하고 뜻을 말해주었다. 아다비아는 가볍게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음 것 읽어'라고 말했다. 또 한 문장 읽고 해석한 것을 이야기했다. 이 문장은 쉬운 문장이라 딱히 단어를 찾고 할 것이 없다. 그 다음 문장도 마찬가지다. 내가 사전 없이 그냥 읽을 수 있는 문장이 10문장 계속 이어졌다.


 "너 잘 하네?"

 "응."

 "그년한테 잘 보이려고 열심히 한 거야?"

 "뭐?"

 "맞잖아! 그년 앞에서 아드라스어 잘 하는 척 하려구!"

 "아냐. 아직까지 이 정도도 모르면 진짜 죽어야지. 이건 어려울 게 전혀 없잖아."

 "거짓말."

 "진짜야!"


 아다비아가 고개를 홱 돌렸다. 아다비아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다. 차라클라야 공부를 도와주면서 이 책을 볼 의욕이 아주 약간 늘어났다. 차라클라야와 이 책을 같이 볼 일이야 없겠지만 최소한 차라클라야한테 아드라스어 실력이 따라잡히는 참사는 피해야 할 거 아냐. 차라클라야는 이제 글자 외우고 있으니 당분간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겠지만, 차라클라야 공부를 도와주려면 나도 아드라스어를 계속 공부해야 한다. 그래서 예전보다 아주 조금 더 신경써서 보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과 상관없이 이 문장들은 원래부터 나 혼자 읽고 무리없이 해석할 수 있는 것들이다. 여태 이것도 못 읽고 있으면 정말 죽어야지. 아니면 감비르 따라 저주술이나 연습하거나.


 "너 정말 나 버리면 안 돼?"

 "안 버려. 내가 너를 왜 버려?"

 "전혀 믿음이 안 가."

 "진짜야! 너 버릴 일 죽어도 없어!"


 아다비아는 영 떨떠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계속 읽으라고 시켰다. 이제부터 어려운 문장들이 다시 나오기 시작한다. 내가 버벅거리고 잘못 해석한 것들이 우루루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아다비아 표정을 살펴보았다. 입꼬리가 아주 살짝 위로 올라갔다. 꾹 다문 두 입술이 실룩실룩거린다. 지금 막 깔깔 웃고 싶은 거 꾹 참고 있구나. 내가 못 하는 거 보니까 안심이라도 된 건가? 아다비아가 손을 뻗어 더듬어 내 머리를 찾더니 내 이마를 검지 손가락으로 가볍게 톡 쳤다.


 "에휴...네가 그러면 그렇지. 이 돌대가리야."


 전 같았으면 마구 성질내었을 건데 오늘은 활짝 웃는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아다비아의 두 눈은 붕대로 덮여 있어 볼 수 없지만 확실히 활짝 웃는 표정 맞다. 저 붕대 너머로 계속 웃고 있겠지.



 루즈카 집에서 나와 서점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을 흔들며 인사한다. 차라클라야! 오늘 쉬는 날인가? 켈라자야도 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이 같이 공부하고 있었구나. 이고는 계산대 뒤에서 고개를 들고 내게 '왔냐?'라고 말하고는 다시 고개를 숙여 서류를 바라본다. 호즈라는 자리에 앉은 상태로 손을 흔들며 인사한다. 먼저 계산대로 갔다. 이고한테 지금 할 일 뭐 있냐고 물어봐야 한다.


 "지금 할 일 뭐 있어?"

 "지금? 없어. 너 할 거 있으면 해."


 켈라자야와 차라클라야 옆으로 갔다. 차라클라야 앞에 놓인 종이를 바라보았다. '인간의 신체는 피부, 근육, 뼈, 피, 기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라는 문장이 아드라스어로 적혀 있다.


 "이 문장 뭐야?"

 "차라클라야 이제 글자 다 외웠어."

 "아, 진짜? 차라클라야, 축하해요!"

 "고마워요."


 차라클라야가 활짝 웃는다. 드디어 아드라스어 글자 다 외웠구나. 이제 무슨 말인지 몰라도 책 보고 글자를 소리내서 읽을 수 있겠지. 제대로 완벽히 소리내서 읽으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만 글자를 안다는 것이 어디야. 이 거리에 글자 모르는 사람들도 수두룩한데. 이제 최소한 자기 생각을 글자로 써서 기록할 수 있다는 거잖아. 마딜어 글자는 아직 모를테니 아드라스어 문자로 적겠지만 다른 말 문자로라도 적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거다.


 "켈라자야, 이 문장 뭐야?"

 "이거?"

 "응."

 "아드라스어."

 "그걸 몰라서 물어? 이걸 왜 알려줘?"

 "얘 공부하고 싶다고 해서."

 "그래도 처음에는 인사 같은 것부터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니야?"

 "그딴 거 필요해?"


 야, 처음에는 당연히 인사부터 배워야지! '인간의 신체는 피부, 근육, 뼈, 피, 기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같은 문장을 어디에 써먹는다고 이걸 알려주고 있는 거야? 어려운 문장은 아니지만 이런 말은 평소에 쓸 일이 없잖아. 조금 공부하다 보면 곧 공부할 말이기는 하지만 처음에는 인사부터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니야? 그때 이고가 눈에 들어왔다. 이고가 아드라스어를 말할 때라고는 같은 아드라스인인 블랑쉬블르와 대화할 때 정도다. 그 외에 이고가 아드라스어로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거의 없다. 가끔 혼잣말 중얼거릴 때 정도? 그러고보니 나도 에드자 와서 아드라스어로 말한 적이 없다. 여기에 아드라스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과 엮일 일이 없었다. 나와 대화를 나누는 아드라스인이라고는 이고, 블랑쉬블르 정도인데 이 둘은 나한테 마딜어로 말한다. 그러고보니 아드라스어 인삿말은 의외로 쓸 일이 없구나. 그래도 인사도 모르는 애가 이런 문장을 외우는 것은 이상하다.


 "켈라자야가 알려주는 방식도 나쁘지 않다고 봐."


 호즈라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필요한 것부터 배우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니까."

 "그런가?"

 "켈라자야가 왜 저런 문장을 선택했는지는 모르겠어. 그렇지만 체계적으로만 알려준다면 괜찮을 거야."


 켈라자야를 바라보았다. 켈라자야는 뭐가 문제냐는 듯 두 눈을 살짝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본다. 잘못된 것은 없어. 왜 하필 지금 그런 문장을 알려주냐는 것 뿐이다. 이게 이상하다는 것을 켈라자야는 전혀 못 느끼나보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외국어를 이제 배우기 시작한 사람에게 글자 떼자마자 '인간의 신체는 피부, 근육, 뼈, 피, 기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라는 문장을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지 바로 느낄 수 있는데...잘못된 것은 아니니까 괜찮겠지. 만약 감비르였다면 아주 잘못된 것을 알려주고 있었을 거야.


 라키사라면 어땠을까? 지금 라키사가 차라클라야에게 아드라스어를 알려주고 있다면 무엇을 알려주고 있었을까? 라키사도 이상한 애는 아니니까 일단 인사 같은 것을 알려주고 있었겠지. 하지만 진도가 나갈 수록 점점 이상한 것을 알려줬을 거야. 자기가 보는 책에 있는 이상하고 백해무익한 내용을 갖고 차라클라야에게 아드라스어 공부라는 명분으로 외우라고 했을 거야. 그랬다면 차라클라야도 그 잘못된 생각에 오염되어 갔겠지. 차라리 처음부터 이상한 말 알려주더라도 켈라자야가 차라클라야 공부를 봐주는 것이 훨씬 나아. 켈라자야가 아드라스어 배울 때 무엇으로 배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이상한 것은 안 알려줄 거다.


 "차라클라야, 다시 소리내어서 읽어봐."


 차라클라야가 소리내서 '인간의 신체는 피부, 근육, 뼈, 피, 기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라는 문장을 읽었다.


 "차라클라야, 발음을 보다 또박또박, 천천히 발음해봐요. 지금은 빨리 읽으려 하지 말아요."

 "예."


 호즈라가 차라클라야에게 천천히 또박또박 읽으라고 조언했다. 켈라자야는 호즈라를 쳐다보았다. 호즈라는 켈라자야를 보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켈라자야도 미소를 지어보였다. 서로 서로 잘 지낸다. 켈라자야가 미소를 지어보인 건 진짜 미소다. 켈라자야는 가식적인 표정을 잘 못 지어서 거짓 미소를 지으면 바로 티나거든. 호즈라는 다시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이고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고는 말없이 계속 서류를 보며 무언가 적고 있다. 차라클라야가 공부하고 모두가 차라클라야 공부를 도와주는 것에 별 반응 없다. 그냥 말없이 자기 할 것 하고 있다. 최소한 우리들이 이고 신경을 긁고 있는 건 아니란 거겠지. 이고가 자리에서 일어나 서점 밖으로 나갔다. 담배 태우러 나가는구나. 나도 같이 따라나갔다. 이고는 입에 담배를 물고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그리고 불 붙은 자기 담배를 내게 건네었다. 이고 담배를 받아서 내 담배에 불을 붙이고 다시 담배를 돌려주었다.


 "쟤 열심히 공부하는데?"

 "응. 공부가 정말 하고 싶대."

 "라키사보다 훨씬 낫네."

 "아..."


 지금 라키사 모습을 보면 차라클라야가 확실히 훨씬 더 낫다. 진심으로 제대로 된 것을 공부하고 싶어하잖아. 열심히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구. 방향이 잘못된 것도 아니다. 방향도 정확하다. 라키사는 대체 왜 그렇게 변해버린 걸까? 순간 혀뿌리쪽 침이 유독 쓰게 느껴졌다. 순전히 담배맛 때문은 아닐 거다. 라키사도 예전으로 돌아오면 좋겠지만 아마 많이 어렵겠지. 잘못된 방향으로 쉬지 않고 빠르게 쭉 나아가고 있으니까.


 "그런데 전부 발음 엉망이네."


 이고가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면서 큭큭 웃었다.


 "어?"

 "켈라자야는 그렇다 치고 호즈라도 발음 엄청 웃긴다. 호즈라는 발음 대체 왜 저러냐?"

 "그렇게 이상해?"

 "응! 진짜 내가 발음 교정해줄 수도 없구."

 "왜? 정 이상하면 네가 교정해주면 되잖아."

 "야, 그러면 이 분위기 깨질 거 아냐. 너네들 아는 아드라스어 다 합쳐봐야 나한테 안 될 건데."


 이고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 그렇게 이상하면 자기가 알려주면 될 거 아니야? 이고는 남아드라스 공화국에서 넘어온 아드라스인이니 아드라스어는 매우 유창하게 하겠지. 그때였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말구요."


 고개를 돌려서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블랑쉬블르였다.


 "뭐? 내 발음이 어때서?"


 이고가 블랑쉬블르를 보며 발끈하며 따졌다.


 "너 발음도 엉망이거든? 어디서 사투리 잔뜩 섞인 발음 갖고 자랑이야?"

 "이고 발음 이상해요?"

 "몰랐어? 이고 사투리 발음 엄청 심해. 억지로 좋게 발음하려고 하는 거 들으면 얼마나 재미있다구."

 "내 발음이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너 사투리도 잘 섞어서 말하잖아."


 이고가 사투리를 섞어서 말한다고? 이건 전혀 몰랐다. 블랑쉬블르와 이고가 아드라스어로 대화하는 것을 많이 들어보지는 못했다. 그 전에 내가 아드라스어를 잘 몰라서 둘이 말하는 아드라스어에 차이가 있는 줄도 몰랐다. 아, 이고는 방언 꽤 섞어서 이야기하나보구나.


 "너는?"

 "나야 당연히 깨끗하고 좋은 말만 쓰지. 어디 너 같은 시골 촌구석 사람 말하고 비교하니?"

 "어휴..."

 "어쨌든 나는 일이 있어서 갈께. 타슈갈, 이고한테 아드라스어 배울 거면 나한테 배워. 내가 정확한 아드라스어 알려줄께. 쟤한테 배우면 이상한 깡촌 아드라스어 배우게 돼."

 "예."


 블랑쉬블르가 나와 이고에게 손을 흔들고 갈 길을 다시 가기 시작했다. 이고는 담배 연기를 있는 힘껏 쪽 빨아들였다. 나중에 블랑쉬블르한테 이고가 어떤 사투리 쓰는지 물어볼까? 설명 들어도 잘 모르겠지만 알아두면 나중에 이고가 아드라스어로 말할 때 무슨 말 하는지 조금 더 잘 알아들을 수 있겠지. 이고한테 사투리 쓰지 말라고 놀릴 수도 있을 거구.


 "잘 알려줘. 괜히 좋은 분위기 깨지 말구."

 "응. 너도 같이 알려주면 좋을 텐데..."

 "이 분위기 깨기 싫다니까. 너네들끼리 잘 놀고 있는데 내가 끼어들어서 뭐해? 너네들 모두 나한테 아드라스어 배우게?"


 이고가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남은 담배를 다 태운 후 안으로 들어갔다. 켈라자야가 차라클라야에게 계속 아드라스어를 알려주고 있다. 호즈라는 자기 할 일 하면서 가끔씩 차라클라야가 공부하는 것을 도와준다. 나도 아드라스어를 잘 알면 차라클라야 공부하는 것을 많이 도와줄텐데...진짜 열심히 공부해야겠다. 아까 아다비아는 내가 아드라스어를 못해서 좋아했지만 내가 아드라스어를 잘 해도 좋아할 거다. 내가 아드라스어를 잘 해야 나중에 아다비아 먹여살릴 방법을 찾지.


 차라클라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즈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둘이 집에 돌아갈 시간이다. 둘이 서점을 나가는 것이 아쉽다. 분위기 즐겁고 좋았는데. 이 분위기가 계속 이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다비아까지 같이 해서 말이야. 이런 분위기라면 아다비아도 잘 어울릴 수 있을 텐데. 켈라자야는 차라클라야에게 공부를 알려주면서 표정이 꽤 많이 밝아졌다. 아다비아도 그럴 거야. 아다비아한테 여기 오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아쉽다. 앞이 안 보여도 누군가를 가르칠 방법을 찾아낸다면 아다비아도 스스로 일도 하고 돈도 벌 수 있을텐데.



 또 다시 날이 어두워졌다. 오늘도 켈라자야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벽에 기대어 앉아 천장을 바라본다. 천장에 윗층으로 올라가는 문이 있다. 저 문을 열어본 적이 한 번도 없네? 왜 지금까지 2층에 올라가볼 생각을 한 번도 안 했을까? 2층으로 올라가는 문은 방에만 있다. 밖에서 2층으로 가는 방법은 없지.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아예 없으니까. 2층도 사용한다면 켈라자야가 여기에서 편히 잘 수 있지 않을까? 가끔 너무 늦은 시각에 호즈라가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면 2층에서 자라고 해도 되구. 2층 공간도 꽤 넓을 거야. 밖에서 보면 2층 면적도 1층과 똑같다. 그러니까 2층까지 사용한다면 상당히 넓은 공간을 사용할 수 있어.


 지금까지 서점 2층에 뭐가 있는지 단 한 번도 신경 안 썼다. 처음 여기에 짐을 풀었던 날, 이고에게 2층은 뭐하는 곳이냐고 물어봤었지. 그때 이고는 2층은 난방도 엉망이고 여름에는 습기가 많이 차고 뜨거워서 도저히 써먹을 수 없는 공간이라 방치해놓고 있다고 말했어. 그 이후 단 한 번도 2층에 올라가볼 생각을 안 했다. 항상 저기는 버려진 공간이라고만 여겼다. 그런데 2층을 사용할 수 있다면 켈라자야와 호즈라를 2층에서 재울 수도 있잖아. 어쩌면 아다비아가 안정을 찾은 후 아다비아를 저 2층에서 머물며 지내게 할 수도 있어. 라키사는...라키사도 여기에서 지내면 생각이 다시 바뀌지 않을까? 여기에서 모두가 모여서 지낼 수도 있잖아. 2층만 사람이 살 수 있게 개조한다면 말이야.


 문이 열렸다. 이고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자기 자리로 가서 드러눕는다.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이고한테 2층 올라가봐도 되냐고 물어봐야겠다. 2층을 사용할 수 있으면 2층도 사용하자고 해야지. 겨울에는 이고 말대로 추워서 사용 못 할 수도 있어. 여름에는 너무 뜨거워서 거기 있기 힘들 수도 있구. 그렇지만 봄, 가을에는 최소한 이용할 수 있을 거 아니야.


 "이고, 2층 올라가봐도 돼?"

 "2층? 저기?"

 "응."


 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고개만 돌려 나를 쳐다본다. 2층을 저렇게 그냥 방치하고 있는 것이 더 이상하잖아. 그 이전에 나는 여기 와서 2층을 단 한 번도 못 가봤다구. 서점에서 살면서 일한지 1년이 넘었는데 여기 2층을 한 번도 안 가본 것이 더 이상하잖아.


 "저기 아무 것도 없어."

 "그래도. 궁금해서."

 "진짜 별 거 없다니까?"

 "그래도 보고 싶어. 여기 온 지 1년이 넘었는데도 한 번도 안 가봤단 말이야."

 "에휴..."


 이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올라가보자. 진짜 아무 것도 없다니까."


 이고는 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사다리 앞에 있는 짐을 치우기 시작했다. 나도 가서 짐을 치웠다.


 "사다리 설치하고 치우는 거 진짜 귀찮은데..."


 이고는 툴툴대며 짐을 치우고 사다리를 들었다. 나도 같이 들었다. 이거 사다리 꽤 무거운데? 보기보다 사다리 무게가 훨씬 더 많이 나간다. 이고와 같이 사다리를 세워서 2층으로 가는 문을 쳐서 올리고 사다리를 세웠다.


 "이거 원래 고정하는 거 있는데 귀찮으니까 그냥 올라가자."

 "응?"

 "원래 이거 딱 고정하는 거 있어. 그런데 지금 귀찮으니까 그냥 올라갔다 오자구."

 "이거 원래는 고정되어 있던 거야?"

 "그거까지는 아니구, 계단 대신 사용할 수 있게 되어 있는 거야. 그래서 어떻게 고정시키는 방법이 있어. 그런데 귀찮아서 내가 다 빼버렸어."


 사다리를 항상 고정시켜놓을 방법이 있어야 맞지. 안 그러면 2층을 만들어놓은 이유가 없으니까. 이고가 먼저 사다리를 올라갔다. 머리로 문을 밀치며 위로 올라가서 문을 활짝 열었다. 이제 내가 올라갈 차례다. 등잔을 들고 사다리를 기어올라간다. 사다리가 의외로 거의 안 흔들린다. 아주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는 기분이야. 항상 여기 있어야하는 사다리니까 당연한 거겠지. 이고에게 등잔을 건네준 후 2층으로 들어갔다.


 "어흑! 여기 왜 이래?"

 "내가 말했잖아. 여기 최악이라니까!"


 뜨겁고 텁텁한 공기가 온몸을 덮친다. 여기를 청소했을 리 없지. 이고가 혼자 2층 올라가는 걸 단 한 번도 못 봤으니까. 여기 쌓인 먼지들은 최소 1년 반은 꾸준히 쌓인 것들이란 거잖아. 그리고 여기 왜 이렇게 뜨거워? 아래층과 비교도 안 되게 뜨겁다. 아직 한여름도 아닌데 너무 뜨겁다. 뜨겁고 답답해서 어지러울 정도다. 등불에 의지해서 주변을 둘러본다. 아무 것도 없다. 보이는 게 없다. 창문조차 꽉 닫혀 있으니 보이는 게 없지. 그냥 휑하다. 구석 1층 화장실이 있는 자리에 조그만 방 같은 게 있다.


 "저 방 같은 건 뭐야?"

 "화장실."

 "화장실 있어?"

 "그냥 관이 1층 화장실 구덩이랑 연결되어 있어. 볼 일 보면 1층 화장실 구덩이로 떨어지는 구조야."


 구석에 화장실이 있다는 것은 여기도 사람이 거주할 수 있게 만들어놓기는 했다는 거구나. 이놈의 먼지와 더위만 어떻게 하면 모두 모여서 살 수도 있겠는데?


 "여기 치우고 켈라자야보고 여기에서 자라고 하는 거 어때?"

 "여기를? 야, 걔 더워서 미치는 꼴 보고 싶냐?"

 "아다비아도 여기로 데려올 수 있잖아."

 "앞도 못 보는 애가 뭔 수로 사다리를 오르락내리락하냐? 2층에서 떨어져서 목뼈 부러져 죽는 꼴 보고 싶어?"


 그것도 그렇네. 이렇게 벌써 뜨거우면 여름에는 아주 설설 끓겠지. 그래도 창문 열고 환기 잘 시키면 이것보다는 훨씬 덜 덥지 않을까? 다른 건물에서는 2층에 사람들이 살잖아. 여기도 2층을 조금 손대면 사람들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여기 어떻게 이용할 방법 없을까?"

 "내가 그거 생각 안 해 봤겠어?"

 "그러면 왜 2층 놀리면서 2층 건물 이용해?"

 "내가 아냐? 서점 주인 건물이니까 그냥 쓰는 거지."

 "원래는 2층도 이용할 생각이 있었던 거 아닐까?"

 "아마 에드자가 이따위로 될 줄 몰랐겠지. 서점이 엄청 커져서 2층까지 써야할 거라 생각했거나."


 이고와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 사다리를 다시 치우고 자리에 드러누웠다.


 "2층까지 사용해서 모두 모이는 공간으로 이용하면 좋을텐데..."

 "글쎄..."

 "왜?"


 이고는 드러누운 채 2층으로 가는 입구를 바라보고 있다. 2층이 너무 덥고 공기가 탁하기는 했지만 공간은 무지 넓었다. 저 공간이라면 아다비아, 켈라자야는 물론이고 호즈라, 차라클라야에 블랑쉬블르, 루즈카까지 다 모여서 살 수도 있을 공간이다. 가능하다면 라키사도. 사는 것은 어렵더라도 최소한 어느 날 하루 전부 모여 잘 수는 있겠지. 작년 에드자에서 대규모 충돌이 일어날 뻔했던 그때 같은 상황이라면 말이야. 그거 아니라도 가끔 다 같이 모여서 밤새 이야기하고 이것저것 먹으며 노는 것도 좋잖아.


 이런 게 핑계일 수 있어. 사실은 항상 아다비아와 켈라자야가 걱정되서 그런다. 나머지는 다 핑계다. 나도 알아. 좋은 집에서 지내고 있는 블랑쉬블르와 루즈카가 왜 이런 데에서 하룻밤 자겠어. 어둠 속을 헤메고 있는 켈라자야와 또 다른 어둠 속에서 발버둥치는 아다비아. 그냥 항상 매일밤 여기에 있었으면 좋겠다. 내 상상보다 훨씬 괴로울 수 있어. 그래도 좋아. 켈라자야가 위험한 어둠 속을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2층에서 자다가 화나서 1층으로 뛰쳐내려와 나한테 성질 내는 것이 나아. 매일 찾아가볼 수 없는 아다비아를 매일 볼 수 있는 것도 좋구. 얼떨결에 아다비아, 켈라자야 둘과 동시에 사귀게 되었지만 진심으로 걔네 둘이 다 너무 좋단 말이야. 둘과 함께 할 미래를 생각하면 암담하기 그지 없어서 도망치고 싶을 때도 많지만...


 "저기 못 쓴다니까."

 "그래도..."

 "돈 없어. 저거 주인한테 말한다고 들어줄까..."

 "아...여기 너꺼 아니었지?"

 "계단도 설치하고 칸막이도 만들고 하려면 돈 꽤 들 거야."


 아, 여기 이고 것 아니었지! 얼굴을 단 한 번도 내보이지 않은 서점 사장. 그리고 이 건물 주인. 항상 서점 일을 이고가 책임지고 하고 있어서 이고가 여기 주인이라고 착각하곤 한다. 그럴 만도 하지. 서점 사장 코빼기도 못 봤는데. 가끔 이고가 사장 만나러 간다고 말할 때 아니면 여기 서점 사장 자체를 떠올릴 일 자체가 없다. 건물 주인 이야기는 아예 없었던 것 같구.


 "여기 사장이랑 건물 주인 같아?"

 "응. 그러니 이런 자리에 서점 차려놨지."

 "돈 많은가 보네."

 "몰라."


 보나마나 돈이 엄청나게 많겠지. 안 그러면 이런 건물을 어떻게 갖고 있어. 게다가 서점도 자기 것인데 한 번도 오지 않고 있을 수 있고. 커다란 상점이나 여관을 세울 자리는 아마 아닐 거다. 그런 건 아무래도 내성 근처나 수레 정거장 근처에 있어야겠지. 그래도 이런 서점보다는 다른 가게를 운영하는 것이 돈 꽤 남는 장사일텐데. 설마 에드자 대학교 바라보고 세운 거야? 여기는 에드자 대학교랑 거리가 미묘하게 조금 있는 곳인데. 어쨋든 돈이 많으니 여기가 어떻게 되는지 신경도 안 쓰고 있는 것일 거다. 장부를 보면 이고가 어떻게든 돈을 벌어오고 있는 거 같기는 하지만...


 "서점 주인은 돈 어디에서 그렇게 많이 벌어왔을까?"

 "글쎄..."

 "아마 마딜 공화국 말고 다른 나라에서 벌어왔겠지?"

 "몰라."


 모르기는 뭘 몰라. 보나마나 다른 나라에서 돈 많이 벌어왔겠지. 여기에서 돈 벌 수 있는 게 뭐 있다구. 그래도 폭동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일자리가 조금 있었다. 각자 자기 입에 풀칠할 정도는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러나 폭동 이후, 모든 게 암담해졌다. 성 밖에는 사방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바글바글하고 성 안쪽에서는 물가가 엄청나게 올랐다. 일자리? 그딴 거 없다. 진짜 나도 여기에서 일하고 있지 않았다면 돈 없어서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야 했을 거야. 라키사도 마찬가지였겠지. 중요한 건 그게 아냐. 과거부터 지금까지 여기는 뭐 벌어먹고 살 것도 충분하지 않았던 곳이야. 그런데 이런 건물을 갖고 있고 여기에 한 번도 안 온다? 그 정도 돈을 벌어올 방법은 하나 뿐이야. 다른 나라 가서 돈을 벌어오는 거. 여기에서 무슨 돈을 벌고 언제 돈을 모아서 이런 건물을 지어올려.


 "남아드라스 공화국은 여기보다 잘 살겠지?"

 "아마도."

 "여기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글쎄..."


 이고는 확실히 대답해주지 않았다. 아주 흐릿한 기억. 딱 한 번 남아드라스 공화국에 가봤던 기억. 그 기억 속 남아드라스 공화국은 여기보다 훨씬 더 나았다. 그냥 그랬던 거 같아. 건물도 높고 길도 깨끗하고 잘 포장되어 있었다. 가게에 물건도 많았구. 이고 눈에 여기는 어떻게 보일까? 여기가 진짜 살만한 곳으로 보이지는 않겠지? 2년 전이라면 모르겠지만 최소한 지금 여기 모습은 이고 눈에도 엉망진창으로 보이겠지?


 저주술. 마딜인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저주술. 상상하면 현실의 힘이 된다. 그런데 왜 이런 거지 같은 상황은 저주술로 해결하지 못할까. 마딜인들 모두 이런 상황을 즐기고 있지는 않을텐데. 모두가 지금 이 상황이 끝나기만 바라고 있잖아. 매일 밤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현실. 언제 어디에서 기겁할 저주술의 희생자가 될 지 모른다는 공포에 질려 살아야 하는 현재. 이런 게 모두가 원하는 건 아니잖아. 그런데 왜? 대체 저주술이 뭐길래 마딜인들은 저주술에 그렇게 열광하면서 저주술로 아무 것도 해결 못 할까?



 모처럼 서점에 나 혼자 있다. 이고는 켈라자야와 호드라를 데리고 루즈카 집으로 갔다. 이고는 오늘은 늦게 돌아올 거니 먼저 저녁 먹고 서점 문 닫고 쉬라고 했다. 아다비아한테 무슨 일 있나? 별 일 없겠지. 아다비아한테 무슨 일이 있었다면 나도 데려갔을 거야. 나한테는 서점 지키라고 하고 켈라자야와 호드라만 데려간 것으로 봐서 아다비아와 관련된 일은 아닐 거다. 그래, 차라리 나를 안 데려가는 게 나아. 별 거 아니니까 나한테는 서점 지키고 있으라고 했겠지. 나와는 상관없는 무슨 일이 있나보다.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은 일이겠지만 말이야. 아까 이고 표정이 어둡지 않았다. 어쩌면 루즈카 집으로 놀러간 거일 수도 있어. 좋게 생각하자. 나쁘게 생각해봐야 뭐해.


 "낮잠이나 잘까?"


 지금 서점에 누가 오겠어. 서점에 손님 오는 꼴을 못 봤다. 한때 많이 왔었지. 여기가 이렇게 엉망이 되기 전까지는 말이야. 에드자가 엉망이 된 이후로 서점에 오는 사람을 거의 못 봤다. 이런 때에 누가 한가하게 책 보면서 시간 때우겠어. 여기는 도둑도 안 들어올 거야. 책 같은 거 털어가봐야 뭐 해. 어차피 책 보는 사람들이야 다 뻔한 사람들인데. 훔쳐갈 때 무겁기만 하고 훔친 거 처분하지도 못 할 거다. 책 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된다고 몰래 책을 팔아치워. 훔친 책을 팔아치우려고 하는 순간 바로 잡힐 건데. 원하는 사람이 많아야 팔리기도 잘 팔리지, 책 같은 건 비싸기만 하지 원하는 사람도 없을 거다.


 지금 서점 문을 닫으면 이고한테 분명히 한 소리 듣겠지? 그런데 솔직히 서점 문을 지금 닫으나 이따 밤에 닫으나 별 상관 없잖아. 누가 와. 와봐야 불청객이나 오겠지. 감비르, 게첸 같은 놈들이 아예 못 들어오게 문을 잠가버리는 게 나을 수도 있어. 모두 루즈카 집으로 갔으니 루즈카가 올 것도 아니구. 블랑쉬블르? 블랑쉬블르라면 모르겠다. 그런데 오늘은 블랑쉬블르도 딱히 올 거 같지 않은데...블랑쉬블르도 루즈카 집으로 가지 않았을까? 설령 거기 안 갔다고 하더라도 며칠 전에 여기 왔었으니 오늘 또 올 리는 없을 거야. 그러면 기껏해봐야 그나마 올 확률 있는 사람은 차라클라야 정도인데...걔도 오늘은 아마 안 올 거다. 오늘은 식당에서 일해야지. 거기는 그래도 항상 손님이 있는 식당이니까. 지금은 설거지하고 있으려나?


 "일단 드러누워야겠다."


 낮잠은 안 자더라도 조금 누워있어야겠다. 계산대 뒤에 드러누웠다. 바닥이 시원하다. 사람들 떠드는 소리, 수레 지나가는 소리가 활짝 열린 창문을 넘어 서점 안으로 들어온다. 어제와 같은 오늘, 그저께와 같은 어제, 그그저께와 같은 그저께, 그러니까 그그저께와 같은 오늘. 그그저께도 오늘과 같았을 거야. 그그저께 무슨 일이 있었지? 곰곰히 생각해봤다. 특별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 그때는 서점에 이고, 켈라자야, 호즈라가 있었지. 지금은 없구. 그 정도 차이인가? 아무 것도 특별할 것 없는 초여름 낮시간. 누군가에게는 정말 특별한 시간일 수 있어. 그렇지만 이게 특별한 시간인지 모르겠다. 지금도 어디에선가는 누군가 죽겠지. 그 사람에게는 너무나 특별한 순간일 거야. 상관없어. 우리들만 아니면 돼. 누가 죽든가 말든가...그건 일상이잖아. 에드자에서는 언제나 사람들이 죽었어. 과거보다 조금 더 많이, 조금 더 다르게 죽을 뿐이야. 그게 우리들 일만 아니라면 아무 상관없어. 그건 과거부터 지금까지 에드자에서 이어져온 일상에 불과해.


 별 거 아니야. 그냥 다 일상이야. 언젠가는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게 가볍게 여기면 돼. 저주술. 상상을 하면 현실이 되는 것. 간절히 원하면 그것이 이뤄진다는 능력. 마딜인들의 저주술. 그러면 모두가 이 지긋지긋한 긴장과 위험이 끝나기를 간절히 원하면 그렇게 된다는 거 아냐? 지금 이런 거지같은 상황을 원하는 사람이 누가 있어. 남이 죽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상. 그러나 내가 그 죽을 사람 중 하나라는 것은 엄청난 공포. 그러니까 모두가 다 간절히 원하고 현실이 될 거라 믿는 거야. 이 망할 상황이 바로 내일 끝난다고 말이야. 그러면 이뤄지지 않을까? 여기는 저주술을 사용하는 마딜인의 땅이니까.


 '어떤 놈들은 이걸 안 원하나봐. 어쩌면 그런 사람이 더 많은 거 아니야?'


 문득 떠올랐다. 저주술의 논리대로라면 모두가 평화롭고 행복해지기를 원하니까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아니잖아. 모두가 평화를 바라고 행복한 일상이 항상 지속되기를 바라고 있어. 현실은 정반대야. 평화는 얼어죽을 평화. 오늘도 도박장에서는 에드자에서 사람이 몇 명 죽었는지를 놓고 돈을 걸고 있겠지. 그 죽은 사람 숫자에 자신이 포함되지 않기를 바라고만 있어. 전혀 행복하지 않아. 미친 저주술사 손에 죽임을 당할지 걱정하고, 굶어죽을지 걱정하고 있어. 모두가! 이런 거지같은 상황이 내일도 당연히 이어질 거잖아.


 모두가 원한다면 그렇게 흘러가야 해. 그게 마딜인들이 말하는 저주술.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어. 상황이 좋아지고 있을까? 천만에. 전혀 안 좋아지고 있다. 누가 봐도 상황은 하나도 안 좋아졌다. 뭐가 좋아졌다는 거야. 좋아진 것이 아니라 이 거지 같은 현실이 일상이 되어서 덤덤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 뿐이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미친 저주술사들은 계속 날뛰어왔고 날뛸 거니까.


 "나만 아니면 돼. 아니, 우리들만 아니면 돼."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누가 죽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내가 아끼는 주변 사람들만 멀쩡하면 누가 죽든 내 알 바 아니다. 나랑 상관 없잖아. 수레 정거장과 성벽 주변에는 거지들이 득시글거려. 그 거지들 다 죽는다고 나랑 상관있어? 거기에서 백 명이 죽든 천 명이 죽든 나한테 미칠 영향은 전혀 없어. 블랑쉬블르와 루즈카가 바빠지려나? 그건 블랑쉬블르와 루즈카 일이구. 거지들이 안 죽는다고 해서 일 없어서 놀고만 있을 거 아니잖아. 게첸 같은 놈은 오히려 좀 죽어줬으면 좋겠어. 그러면 신경 긁을 일 하나 사라지는 거니까. 나만 아니면 돼. 우리들만 아니면 돼. 그러면 전부 상관없는 일이야.


 어서 학교나 빨리 다시 개교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가서 공부하고 졸업해서 일자리를 찾든가 하지. 언제까지 계속 이 서점에서 이렇게 점원으로 일하고 있을 수는 없잖아. 지금은 이 일자리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여기 아니었다면 나도 길거리에 나앉아야했겠지. 아니면 에드자를 떠나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을 거야. 에드자에서 버틸 수 있는 건 지금 서점에서 일하기 때문이야. 그렇지만 이렇게 서점에서 평생 일하는 것은...언제 돈 모을 거야? 아다비아와 켈라자야는 어떻게 할 거야? 이대로면 아다비아와 켈라자야 둘 모두는 고사하고 하나도 책임질 수 없어. 쟤네들은 결국 내가 먹여살려야 하잖아. 어쨌든 내 애인이니까. 솔직히 나도 걔네와 사귀는 것이 좋으니까. 헤어지기 싫으니까...


 기적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갑자기 엄청난 황금을 발견해서 돈 문제 걱정 없이 살게 되었으면 좋겠다. 아다비아가 눈을 뜨고 다시 원래의 예쁜 얼굴을 되찾았으면 좋겠다. 켈라자야가 정신을 차리고 멀쩡해졌으면 좋겠다. 라키사도 멍청한 소리에 현혹되지 말고 성실하고 똑똑한 예전 모습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차라클라야는 에드자 대학교에 입학해 자기가 원하는 꿈을 이뤘으면 좋겠다. 언젠가 다 같이 모여서 맛있는 간식을 먹으며 즐겁게 잡담하면서 모두가 똑같이 지독한 악몽을 꾸었다고 이야기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지금 이 현실이 모두가 똑같이 꾼 악몽이었다고...


 '그러니까 기적이지.'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잖아. 이 모든 것이 끔찍한 악몽이었을 리 없잖아. 눈을 떴을 때 샛노랗고 바늘 같은 아침 햇살이 눈을 콕콕 찌르면서 이제 정신차리라고 할 리 없지. 꿈 속에서 허우적거리지 말라고 흔들어 깨우는 선선한 아침 바람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상한 악몽이었다고 자리에서 일어날 리 없지. 이 모든 것이 꿈이 되어버리는 것. 다 허공으로 날아가버리는 것. 그러니까 기적이지.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


 '그래, 만약 그런 기적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이 모든 것이 현실이 아니라 가짜인 거야. 나는 지금 고향집에 누워서 잠자고 있는 거야. 어쩌면 아예 지금의 내가 원래 내가 아닐 수도 있어. 남아드라스 공화국 어디선가 살고 있는 사람일 수도 있고, 셀베티아 왕국 어디선가 살고 있는 사람일 수도 있어. 현실에서는 아예 다른 사람인데 꿈 속에서 지금 내 모습인 거야. 지금 이 모든 것이 시꺼매져. 원래 없었던 거야. 전부 새까만 어둠이 되어 부서지고 남은 끝없는 어둠 속에서 누군가 나를 흔들어. 눈을 뜨니 모든 것은 재수없는 악몽. 무슨 꿈을 꿨길래 그렇게 끙끙거렸냐고 물어보겠지. 어서 일어나서 학교 갈 준비하라고 할 거야. 그게 누구든 간에 말이야.


 그러면 아다비아도, 켈라자야도 모두 사라지겠지? 영원히 만날 수 없겠지? 꿈 속의 연인들이었으니까. 하루 정도는 꿈 속에서 만난 아다비아와 켈라자야가 누구였는지 우중충한 하늘을 보며 곰곰히 생각할 거야. 찐득찐득한 물기 머금은 공기를 느끼며 걔네들은 진짜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애들일지 생각하겠지. 여기에서 다른 모습으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 정도 생각해보려나? 밤이 되어 다시 잠들고 또 다시 아침이 찾아왔을 때, 걔네들은 잊혀질 거야. 잊혀지지 않더라도 그런 희안한 꿈을 꾼 적이 있다는 무의미하고 무미건조한 기억으로 남겠지.


 '아침에 나를 깨워주는 사람이 아다비아와 켈라자야라면 되잖아.'


 이 모든 것이 꿈. 꿈에서 나를 깨워주는 아다비아와 켈라자야. 학교겠지. 눈을 떠보니 수업이 끝났어. 둘이 나한테 이제 수업 끝났으니 집에 가자고 나를 흔들어 깨우는 거야.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둘에게 아까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 하면서 이 현실을 이야기해줘. 아마 둘 다 매우 어이없어하겠지. 아다비아는 왜 자기는 눈이 멀고 얼굴이 흉측해졌냐고 화를 내려나? 켈라자야는 나도 너한테 마음대로 때려도 되냐고 때리는 시늉을 할까? 둘 다 평소에 자기를 보며 무슨 상상을 한 거냐고 화낼까? 그렇게 웃으며 끝나는 하교길.


 '그런 건 없어.'


 이 모든 것이 꿈이라는 것도 엄청난 기적이고 욕심이야. 그런데 꿈에서 깨어났는데 아다비아와 켈라자야가 또 있다고? 이건 상상 속의 상상이야. 그냥 존재할 수 없는 거야. 그냥 기적이 일어나는 게 아니라 기적이 일어나고 거기에서 기적이 또 일어나야 간신히 이뤄질 수 있는 소원쯤 되겠지. 상상으로조차 불가능한 일. 간절히 원한다면 이 모든 것이 꿈이 될 수 있을까? 마딜인들의 저주술로는 그런 게 가능할까? 원하면 된다고 했으니까. 그래, 이 모든 게 한낱 꿈에 불과한 거라고 쳐. 눈을 뜨는 순간 멀쩡한 모습의 아다비아와 켈라자야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기적을 바란다? 아니야, 그냥 꿈에 불과한 허상이었다고 넘어가겠지. 이뤄질 수 없는 꿈이야.


 '차라클라야가 원하는 꿈 정도는 이뤄질 수 있잖아!'


 언젠가는 에드자 대학교가 다시 문을 열겠지. 영원히 저 상태로 남아 있을 리는 없으니까. 이 개같은 상황도 언젠가는 진정될 거고, 그때가 되면 학교도 다시 개교할 거야. 그때까지 돈 모으면서 입학 시험 준비하면 돼. 걔는 어차피 지금 상태로는 에드자 대학교로 진학하지 못 해. 오히려 걔한테는 돈을 모으고 입학 시험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 필요해. 차라클라야는 열심히 노력하니까 꼭 그 꿈이 이뤄질 거야.


 켈라자야조차도 차라클라야를 도와주고 있잖아. 차라클라야가 원하는 꿈은 반드시 실현될 거야. 여기 있는 모두가 도와주고 있으니까. 차라클라야도 간절히 원하니까. 다 같이 노력하면 차라클라야의 꿈은 이루게 해줄 수 있을 거야. 그건 이뤄질 수 없는 망상이 아니라 진짜 실현될 수 있는 거잖아. 차라클리야가 에드자 대학교에 입학해서 해맑게 웃으면 좋겠다. 얼마나 예쁠까? 폭풍우가 지나간 후 피어난 한 송이 새빨간 장미 같을 거야. 온통 진흙투성이에 난장판인 풍경 속에서 홀로 빛나는 장미. 그걸 보면서 우리 모두 희망 갖고 또 노력하면 다 좋아지지 않을까?


 모든 것이 꿈이 되어버리는 건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이야. 그렇지만 차라클라야가 원하는 꿈만큼은 여기에서 이뤄질 수 있어. 지금은 차라클라야의 꿈이 이뤄지는 것도 기적이야. 하지만 그것만큼은 노력하면 이뤄질 수 있잖아? 차라클라야가 노력하고 우리들 모두가 옆에서 도와주면 실현될 수 있는 기적이야. 차라클라야의 꿈이 현실이 되는 기적이 일어나면 모든 것이 완벽히 좋게 바뀌지는 않더라도 우리들 모두 조금씩은 더 좋아지지 않을까? 우리들 모두 조금씩 더 좋아지는 것도 엄청난 기적이잖아.


 어쩌면 답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을 바라는 건 무의미해. 그건 망상에 불과해. 하지만 이뤄질 수 있는 꿈이 현실이 된다면...그게 기적을 일으키지 않을까? 조그만 물결이 퍼져나가듯 조금씩 바뀌어갈 수 있잖아. 아다비아가 자기 상태에 적응하고 마음의 안정을 얻고 뭐라도 하게 된다면 그것도 엄청난 기적이잖아.



 "타슈갈!"

 "어?"


 누가 들어와 내 이름을 불렀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에베디나난이다. 에베디나단은 내쪽으로 걸어와 벽에 등을 대고 바닥에 앉았다.


 "손님 없네? 손님 없다고 그렇게 놀아도 돼?"

 "상관없잖아. 어차피 아무도 안 올 건데."

 "내가 왔잖아."


 에베디나단이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그래, 오늘은 네가 왔지. 아무도 안 올 건 아니었네. 에베디나단이 왔으니까. 에베디나단이 나를 빤히 쳐다본다. 딱히 할 말이 안 떠오른다. 에베디나단이 웃으며 말했다.


 "왜? 손님 왔는데 이러기야?"

 "아...뭐 찾는 거 있어?"

 "아니. 딱히 찾을 건 없고 심심해서 놀러왔어."


 에베디나단이 미소를 지어보인다. 잡담 상대가 필요해서 왔나 보네.


 "에드자는 매일 활기차네."

 "여기?"

 "응. 좋은 쪽, 나쁜 쪽 둘 다."


 외국인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우리들이야 매일 죽음의 공포를 느끼며 살고 있지만 말이야. 저주술사들도 아드라스인은 잘 안 건드리겠지? 마딜인들이 외국인은 잘 안 건드리잖아. 여기에 아드라스인이 별로 없기도 하구. 그래도 그걸 활기차다고 말하는 건 뭘까? 비꼬는 걸까? 이건 활기찬 게 아니잖아. 살려고 발버둥치는 거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모두 겁에 질려 움츠려 있는데.


 "남아드라스 공화국은 어떤데?"

 "거기?"


 에베디나단은 말 없이 천장을 잠시 쳐다보았다. 거기는 여기보다 훨씬 살기 좋은 곳이잖아. 어렴풋 기억나는 어렸을 적에 가서 봤던 남아드라스 공화국 풍경들. 거기도 그렇게 큰 도시는 아니었다. 그래도 여기보다는 훨씬 활기차고 역동적이었어.


 "죽어있는 곳이야."

 "거기가? 말도 안 돼."

 "사람들이 다 뇌가 없어. 벌레처럼 살아."

 "벌레는 무슨...그래도 여기보다 나을 거 아냐?"


 에베디나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생각도 없고 꿈도 없어. 벌레는 차라리 움직이기라도 하지."


 그냥 말을 말자. 여기 진짜 상황이 하나도 안 와닿겠지. 그러니까 저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살아야 뭐든 의미있지. 꿈이고 나발이고 죽으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한가롭게 꿈을 꿀 여유라도 있으면 정말 고맙지. 아무 것도 좋아지는 게 없잖아. 내일 누군가는 또 죽을 거잖아. 그게 내 주변 일만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이게 우리들의 꿈이다. 움직이고 싶어서 움직이는 게 아니야. 본능에 따라 저절로 움직여지는 거지.


 "저 서류들이랑 책들 쌓여 있는 거 뭐야?"

 "그거? 아, 여기에서 저주술 연구하는 애가 연구하는 거."

 "조금 봐도 돼?"


 에베디나단은 호즈라가 연구하는 것을 가리켰다. 호즈라가 키란에 대해 연구하며 보는 것들이다. 가져가는 것만 아니면 상관없지.


 "응. 봐도 돼. 그런데 서점 거 아니니까 빌려갈 수 없어. 헝클어놓지 말구."

 "알았어."


 에베디나단은 자리에서 일어나 호즈라가 저주술을 연구하는 것에 참고하는 자료들이 쌓여 있는 곳으로 갔다. 에베디나단이라면 저거 보고 뭔가 알아내는 것이 있을까? 에베디나단은 저주술에 관심 많잖아. 저주술 수련한다고 했으니 호즈라가 보는 것과는 또 다르게 볼 건가? 저주술사가 보면 다르게 보일 게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래봐야 아무 의미없는 거겠지만...에베디나단이 서류와 책을 대충 휙 읽어본다. 에베디나단의 눈썹이 위로 살짝 올라가고 눈은 점점 가늘어진다. 대충 보는 것 같지만 나름 집중해서 보나 본데? 신기한 거라도 있나?


 "신기한 거 찾았어?"

 "키란에 관한 거네."

 "응. 키란에 관한 거라고 했어."


 저주술에 관심 있다면 키란을 모를 수 없지. 키란이 아니었다면 마딜 공화국은 지금 어떤 모습이었을까? 키란이 사용한 최후의 저주술. 에드자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없애버렸다고 했다. 그것 때문에 에드자를 점령했고, 우르간 대제국군은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저주술이 위대한 이유, 더 나아가 모든 마딜인들이 저주술을 믿고 키란을 존경하는 이유가 바로 그 에드자성에서 보여준 키란의 저주술 때문이다.


 만약 키란이 그런 기적을 일으키지 못했다면 지금 마딜은 다른 모습이었을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어. 마딜 공화국 독립 과정에서 마딜인들이 한 것이 뭐 있어? 맨날 우르간 대제국군에게 학살만 당했지. 제대로 싸워서 이겨본 적이 있기는 한가? 아마 없을 거다. 마딜 공화국은 남아드라스 공화국과 셀베티아 왕국이 독립시켜준 거다. 독립했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저주술을 이렇게 떠받드는 사람들이 득실거리지는 않았을 거다. 오히려 마법 같은 것을 엄청나게 떠받들고 있었을 거다. 그나마 키란이 저주술로 어느 정도 공헌을 했기 때문에 마딜인들이 저주술을 숭배하는 것이야. 특히 마지막 대미를 장식한 에드자 전투를 혼자 끝냈다고 하니까 말이야.


 모두가 키란이 에드자에 있던 모든 생명을 없애버렸다고 하니 아마 사실일 거다. 그렇지만 아닐 수도 있잖아. 모두 해방군이 에드자를 포위하기 전에 도망가서 처음부터 비어있던 곳일 수도 있어. 문득 아다비아와 같이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후 서점을 향해 걸어가던 그때가 떠올랐다. 아다비아는 그때 키란이 에드자성 안에 있던 모든 생명체를 증발시켜버렸다는 기록은 왜곡된 것일 수도 있다고 했다. 왜곡일 수도 있고 날조일 수도 있겠지. 만약 지금 키란이 환생한다면 어떨까? 이 에드자 꼴을 보면 또 전부 날려버릴까?


 "에휴..."


 에베디나단이 한숨을 내쉬었다.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계속 서류를 휙휙 넘겨본다. 호즈라가 보는 서류를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없다. 키란의 저주술을 연구한다고 하는데 그런 거에는 관심이 없으니까.


 "이거 보면 뭐 달라지나?"

 "응?"

 "이런 거 본다고 무슨 깨달음 얻을 게 있어?"

 "나야 모르지. 그거 보고 공부하는 사람이 알지 않을까?"

 "부질없는 짓이야."


 에베디나단의 말이 그렇게 기분좋게 들리지는 않았다. 호즈라는 호즈라 나름의 계획과 생각이 있겠지. 호즈라는 저주술을 사용할 줄 모르지만 저 서류 속에서 무언가를 찾아낼 수 있잖아. 그걸 구현하는 것은 저주술사의 몫이구. 키란은 위대한 저주술사였다.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야. 호즈라가 어떤 자료를 갖고 연구하는지 모르겠지만 키란과 관련된 거니 그 속에 뭔가 있을 수도 있잖아.


 에베디나단은 서류를 내려놓고 다시 내 옆으로 와서 앉았다. 에베디나단은 조금 짜증났는지 눈을 조금 찌푸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마딜인들은 이래서 안 돼."

 "뭐가?"

 "저 따위 것 백날 잡고 있어봐야 답이 나오겠어?"

 "무슨 답?"

 "저주술."


 그건 네가 할 소리가 아닌 거 같은데? 너도 아드라스인이잖아. 태어나자마자 저주술을 믿는 마딜인과는 다르다구. 마딜인들에게 저주술은 믿음의 차원이 아니야. 믿고 안 믿고를 따질 문제가 아니라고. 우리는 저주술이 진짜 굉장한 건지에 대해 끝없이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어. 마딜인이 아니니까 당연한 거야. 그렇지만 마딜인들은 아니야. 마딜인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저주술은 굉장하고 무한하다고 믿어. 믿는다고 해야 하나? 아니, 그들에게는 그게 진리야. 그런 마딜인들을 보며 저주술로 뭐라고 할 자격이 되나?


 "저것으로 공부하는 사람은 마딜인이야."

 "그러니까 안 된다는 거야."

 "무슨 말이야? 마딜인이니까 저걸로 공부하지."

 "그래서 안 된다는 거야. 마딜인 중 키란 모르는 사람 있어?"

 "아니."


 마딜인 중 키란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 리 없지. 심지어 학교에서도 키란의 업적에 대해 배우니까. 나도 키란의 업적이라면 잘 안다. 마딜땅에서 태어나서 자랐으니까 알 수 밖에 없다. 이건 원해서 알게 된 게 아냐. 마딜 공화국에서 살고 있다면 알게 된다. 온통 키란을 칭송하니까. 정말 만약에 키란이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면 에드자가 이 꼴이 되지도 않았을 거야. 키란은 죽었지만 마딜인들에게 키란은 어떻게 보면 신 그 자체다.


 "너는 여기가 왜 지금 이런 상황일 거 같아?"

 "미친 저주술사들 때문에..."

 "그게 끝이야? 무엇 때문에 저주술사들이 미치기 시작했는데?"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 때문에..."


 시작은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 때문이었다. 그걸 모두가 필수로 배우게 하면서 문제가 터졌지. 저주술을 부정하는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 그게 없었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거야. 그 책이 문제였다. 그걸 강제로 배우게 하려고 한 놈들이 미친 거구.


 "그래, 좋아. 마딜인들이 저주술을 그렇게 열심히 믿는다면서?"

 "응, 맞아."

 "그러면 여기는 왜 맨날 이 모양이야?"

 "응?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왜 맨날 상황은 하나도 안 좋아지냐구."

 "저주술사들이 하도 날뛰니까."


 에베디나단은 다시 한 번 한 숨을 내쉬었다. 무슨 답을 원했던 거야? 당연한 거 아니야? 저주술사들이 미쳐 날뛰니까 이 도시가 이 모양이지.


 "마딜인들이 저주술 엄청 믿잖아."

 "응."

 "저주술은 간절히 원하는 것이 현실이 되는 거지?"

 "응. 그렇대."

 "그러면 이 도시는 왜 이 꼴이야?"

 "뭐?"

 "모두가 제발 나아지기를 바라는데 왜 에드자는 맨날 이 꼴이냐구."


 어?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렇네? 틀린 말 같은데 반박할 수 없다. 간절하게 원하는 것이 현실이 되는 것이 저주술이다. 여기 사람들 모두 더 나아지기를 바라고 있다. 그 누구도 매일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고 싶어하지 않아. 제발 이 진절머리나는 상황이 끝나기를 바라고 있어. 마딜인들이 말하는 저주술의 정의대로라면 모두가 간절히 원하니까 무슨 저주술이든 일어나서 상황이 좋아져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모두의 바램과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다. 오히려 전보다 더 큰 참사가 한 번 더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로 가고 있으니까.


 "저주술은 희망이 아니야. 현실이지."

 "현실?"

 "봐, 모두가 더 좋아지기를 원해. 하지만 너는 내일이 오늘보다 더 좋을 거라고 믿어? 내일 모든 게 다 끝날 거라고 봐?"

 "아니."


 내일 모든 게 다 끝나고 좋아진다고? 그게 말이 돼? 당연히 내일도 오늘과 다를 거 없을 거다. 오늘보다 더 나쁠 수도 있어. 아니, 더 나빠지겠지. 좋아진 날이 있는지나 모르겠다. 당연한 거잖아. 미쳐 날뛰는 저주술사들이 갑자기 사라질 리 없다. 그렇게 쉽게 해결될 일이었으면 벌써 다 해결되었겠지. 해결될 방법이 없으니까 더 나빠지기만 하는 거잖아. 어떤 멍청이가 모든 나쁜 상황이 오늘 다 끝나서 내일 좋아질 거라고 전망해?


 "그거 봐. 너도 그렇게 믿고 있잖아. 희망한다 희망한다 노래부르면서 정작 더 나빠질 거라고 믿잖아. 내일 더 나빠질 거라고 강하게 믿는데 좋아지겠어? 믿는대로 가는 거지."

 "믿는다고 다 바뀌어? 그러면 세상에 불행한 사람이 어디 있어?"

 "저주술은 믿는 게 현실이 되는 거라니까. 바라는 거 따로, 믿는 거 따로...뭐가 이뤄져야 저주술이겠냐? 당연히 믿는 게 이뤄져야 저주술 아냐?"

 "무슨 말이야? 사람들 다 좋아지기를 바라고 있는데!"


 에드자에 있는 사람들 중 누가 상황 더 나빠질 걸 바래? 모두가 간절히 더 나은 내일이 찾아오기를 바라고 있다. 당연히 내일 더 좋아지면 좋지. 그렇지만 내일 더 좋아질 리가 없잖아. 뭘 봐도 좋아질 기미는 하나도 안 보이는데! 믿는대로 가는 게 아니라 가는 대로 보면 나빠질 게 뻔한 거야. 이건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더 나빠져만 가는데 이걸 어떤 미친 놈이 내일 더 좋아질 거라고 믿어? 죽고 싶어서 환장하지 않았다면 당연히 내일 더 나빠질 거라 예측하지. 이건 상상이 아니라 예측이다.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 하지만 모두가 언젠가는 더 나아질 거라고 희망을 갖고 있잖아. 이런 상황이 매일 나빠지기만 해서 극단적으로 나빠질 거라 여기는 사람이 여기 어디 있겠어? 언젠가는 좋아질 거라 믿는다. 모두가 말이야. 단지 그게 내일이 아니라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먼 훗날이라 볼 뿐이지. 언제까지 모두가 이렇게 겁에 질려 살겠어? 미쳐 날뛰는 저주술사들도 언젠가는 다 체포되고 사살될 날이 오기는 할 거다. 그때가 되면 평화로워지겠지.


 "바라는 게 이뤄지는 것이 저주술이 아니야. 믿는 게 이뤄지는 게 저주술이지."

 "그러면 여기 사람들이 다 영원히 이렇게 나쁠 거라고 믿는다는 거야?"

 "당장 내일은 나빠질 거라고 확신하잖아."

 "그거야 당연한 거니까 그런 거구!"

 "하아...그러니까 나빠지는 거야. 모두가 내일 나빠질 거라 강하게 믿는데 왜 좋아져? 어떻게 좋아져? 그게 저주술이야."

 "뭔 오만 것이 다 저주술이야? 저주술만 없으면 여기가 이렇게 되지도 않았어!"


 그래, 에베디나단은 여기 사람이 아니야. 여기 상황이 와닿지도 않을 거야. 저주술에 반한 에베디나단이니 그렇게 보이는 거겠지.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아. 여기 문제는 저주술 때문이다. 저주술이 없다면 이런 상황이 오지도 않았어. 망할 저주술 때문에 모두가 불행해진 거야. 더 불행해질 거야. 아무리 모두가 행복해지기를 바래도 이뤄지지 않는 것은 다 저주술 때문이다.


 "저주술은 믿는 게 이뤄지는 거야. 그건 무한한 자유, 무한한 상상...다 맞아. 하지만 결국 믿는 것이 이뤄지는 세계 그 자체야."

 "저주술 따위가 없었으면 여기는 훨씬 행복했겠지. 모든 게 저주술 때문에 이렇게 된 거니까."


 에베디나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에 알려줬지? 동전을 실에 매달아서 그게 도는 상상을 계속 해보라구. 한 번 해봐. 결국 이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건 저주술이니까."

 "안 해."

 "한 번 해봐. 저런 쓸 데 없는 짓보다는 그게 훨씬 더 의미있어."


 에베디나단이 호즈라가 연구하는 서류와 책을 가리키며 말했다. 호즈라가 그걸 안 해봤을까? 해봤는데도 무의미하니까 자기는 저주술을 못 쓴다고 하는 거겠지. 에베디나단은 손을 흔들고 서점 밖으로 나갔다.


 망할 저주술. 저주술만 아니었으면 우리들 모두 나름대로 즐겁게 살고 있었을 거다. 저주술사들은 저주술에 열광해. 어떻게 된 게 한결같이 다 똑같은 소리야? 무한한 자유? 이게 무한한 자유야? 마음껏 사람 죽이는 게 저주술사들만이 누릴 수 있는 무한한 자유야? 여기가 어떻게 되든 말든 자기 쾌락만 누리는 그런 자유? 그딴 게 자유라면 우르간 대제국군이 아주 뿌리까지 다 뽑아버렸어야 했어.


 저주술은 굉장한 게 아니야. 키란이 없었다면 철저히 사라졌을 미개한 것이야. 여기보다 훨씬 발전한 주변 나라들 모두 저주술은 철저히 탄압해. 그럴 만도 하지. 저주술사가 득시글한 여기 지금 상황을 봐. 이게 정상이야? 이게 좋은 거야? 다른 나라들이 사용하는 마법보다 훨씬 쓰레기 같은 건데 상황은 더 엉망으로 만들고 있어. 우르간 대제국군이 저주술사를 한 명도 안 남기고 다 죽여버려야 했어. 그랬으면 이런 상황이 오지도 않았잖아. 저주술은 미개하고 어지럽기만 해. 역사가 말해주고 지금 여기 현실이 말해주고 있어. 저주술사들이 아무리 무슨 무한한 자유, 무한한 상상 같은 소리를 떠들어봐야 다 허무맹랑한 소리일 뿐이다. 그건 행복의 열쇠 같은 게 아니야. 그게 행복의 열쇠였다면 켈라자야는 언제나 행복해야지. 언제나 환한 얼굴로 즐거워해야지.



 어제 이고는 매우 늦은 시각에 혼자 서점으로 돌아왔다. 켈라자야는 서점에 오지 않았다. 이고 말로는 켈라자야는 루즈카 집에서 잠을 자고 올 거라고 했다. 와히디야도 루즈카 집에 왔다고 했다. 왠지 둘을 붙여놓으면 절대 안 될 거 같기는 하지만 루즈카가 있으니까 별 일은 없을 거 같다고 말했다. 솔직히 그 말을 들었을 때 걱정되었다. 켈라자야는 와히디야를 매우 싫어하고, 와히디야는 켈라자야한테 저주술 대결하자고 계속 조르고 있으니까 둘이 같이 있으면 싸움나는 게 오히려 당연하거든. 그래도 루즈카니까 별 일 없기는 할 거다. 루즈카라면 둘이 싸우려 들면 둘 다 가볍게 제압해버리겠지.


 "어쩌면 다음달에 여기 공사해야 할 수도 있어."


 이고가 어제 자기 직전에 한 말이 계속 떠오른다. 다음달에 여기를 공사할 수 있다고 했다. 지금은 2층이 놀고 있지만 저기를 공사해서 방을 몇 개 만들 수도 있다고 했다. 당장 쓸 일은 없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미리 방을 만들어놓기로 했다고 했다. 이 건물 주인이기도 한 서점 주인도 2층을 지금처럼 휑한 공간으로 버려둘 바에는 차라리 방이라도 만들어서 사용하는 게 나을 거라고 했다고 했다.


 '2층에 방이 만들어지면 라키사도 여기에서 살 수 있지 않을까?'


 라키사를 한 번 쳐다봤다. 라키사는 뭔가 적고 밑줄을 쳐가면서 책을 보고 있다. 이따 학습 모임 가기 위해 준비하나보다. 만약 2층에 방이 몇 개 생기면 라키사도 여기에서 살게 될까? 라키사는 지금 다른 곳에서 살고 있다. 여기 돈 받는 것으로 월세 감당하기 힘들 거야. 학습 모임 나가면서 여기에서 점심도 안 먹고 그냥 가니까 점심값도 계속 지출되고 있을 거구. 여기에 방을 만들고 라키사에게 살라고 하면 빈 방 놀리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아닌가?'


 라키사가 가는 학습 모임.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연구하고 있지. 그게 연구라고 할 수 있는지나 모르겠다. 그건 인생 낭비도 아니야. 차라리 잠이나 푹 자면 피로라도 풀리지. 그건 멀정한 정신도 썩어들어가게 하는 거잖아. 이로울 게 하나도 없는 독약같은 거야. 나도 라키사가 그 이상한 학습 모임에 가는 게 엄청나게 싫다. 나만 그런 게 아니야. 이고도 엄청나게 싫어해. 라키사한테 직접 말 안하고 있을 뿐이지 실제로는 엄청나게 싫어한다. 켈라자야도 당연히 싫어하구. 이고 애인인 루즈카도 그 학습 모임은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 남아드라스 공화국에서 온 블랑쉬블르는 황당해할 뿐이구.


 위층에 방을 몇 개를 만들든 라키사는 아마 못 들어갈 거야. 그래, 안 들어오는 것이 나아. 라키사가 학습 모임을 포기할 거 같지도 않다. 학습 모임을 계속 나가면서 저 위층에서 산다? 여기 분위기 어떻게 될 지 안 봐도 뻔하다. 어쩌면 이고가 참다 못해서 라키사를 쫓아내버릴 수도 있어. 지금도 라키사가 학습 모임에 가는 것을 영 탐탁치 않아 하지만 혼자 있는 시간에 그러는 거니까 별 말 안 하고 있는 거잖아. 그 꼴을 맨날 보면 이고가 진짜로 폭발해버릴 수도 있어. 내가 보고 겪은 것만큼 겪는다면 이고도 머리 뚜껑 열려버리겠지.


 "여기 정말 괜찮은 걸까?"


 라키사가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 중얼거렸다. 중얼거린 거지만 나한테 들으라고 한 소리겠지.


 "괜찮겠지. 별 거 없잖아."

 "이렇게 일이 없어도 괜찮은 걸까?"


 라키사가 고개를 돌려 내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라키사도 불안하기는 할 거다. 지금이야 서점에서 일하고 있으니까 돈 벌어서 에드자에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당장 여기가 없어지면 돈 벌 곳이 없다. 어디 가서 돈 벌 거야? 여기 맞은편 찻집 가서 컵이라도 씻을까? 그런 일조차 없잖아. 일거리 찾아 돌아다니는 마딜인들이 거리에 넘쳐난다. 구걸하는 마딜인들도 그만큼 넘쳐난다. 내가 일하는 시간에 손님은 한 명도 안 오고 있다. 하지만 여기 혹시 일거리 없냐고 물어보러 오는 사람들은 매일 꼭 몇 명씩 찾아온다. 라키사가 일하는 시간에도 그렇게 여기 사람 필요하지 않냐고 물어보러 오는 사람들이 온다. 그러니 더 걱정되겠지. 진짜 여기 일자리가 없어지면 답이 없으니까.


 "일이야 뭐..."

 "여기 진짜 망하면 어떻게 해? 넌 걱정 안 돼?"

 "걱정되기는 해."


 일이 아예 없지는 않다. 라키사가 일하는 시간에는 일이 정말 없다. 솔직히 이런 아침에 서점 문을 열어놔야 할 이유를 전혀 모르겠다. 어차피 손님은 하나도 찾아오지 않는 시각이니까. 아침에는 이고가 루즈카 집에 가니까 서점 봐줄 사람이 필요해서 라키사에게 오전에 서점 좀 봐달라고 하는 건데...그냥 문 안 열어도 아무 상관 없잖아? 아침에 와서 서점 청소하고 계산대 뒤에 앉아서 책 보고 할 거 하다가 가는 게 라키사의 일이니까. 그럴 거라면 솔직히 아침에 문 안 열어도 되지. 청소야 오후에 문 열면서 나랑 이고가 같이 해도 되니까. 라키사 근무 시간에 일이 아예 없는 건 맞다. 자리 지키라고 있는 건데 지금 라키사가 자리를 지킬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구.


 "너 근무 시간에는 일 있어?"

 "어쩌다 가끔..."

 "일이 진짜 있어?"

 "응. 있어."

 "그걸로 여기 운영이 될까?"

 "되지 않을까? 이고도 일하고 있는데."


 내 근무시간에도 일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래도 아주 가끔, 정말 일하는 방법 다 잊어버릴만 하면 손님이 오기는 한다. 곰곰히 생각해봤다. 일주일에 내 근무시간에 손님이 몇 명 오지? 그래도 서너 명은 되는 거 같은데...밤에 정말 가끔 책 수거하러 가기도 하구. 아예 없지는 않다. 라키사 근무 시간에만 아예 없는 거지. 이고는 이고 나름대로 일을 한다. 일이 예전에 비해 형편없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일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야. 도서카드 정리해보면 책 빌려가는 사람은 여전히 있다. 일거리 자체가 많이 줄어들었고 대부분은 이고가 직접 책을 갖다주고 받아오는 거라 진짜 일이 하나도 없어보이는 거지. 라키사 너한테만 말이야.


 "나는 여기 일이 너무 없어서 정말 걱정돼."

 "응."

 "너는 정말 걱정 안 돼?"

 "걱정되기는 해."

 "우리 무언가 방법을 찾아야하지 않을까?"

 "방법? 무슨 방법?"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거 같아. 서점 주인이 언제 서점 문 닫겠다고 해도 이상할 거 없잖아."


 라키사가 팔에 턱을 괴며 한숨을 내쉬었다. 답이 없다. 서점을 아무리 깨끗하게 청소해놔봐야 뭐해? 깨끗하다고 사람들이 오는 것도 아닌데...길거리 나가서 사람들에게 책 좀 보라고 소리칠까? 그런다고 사람들이 서점으로 오지는 않을 거다. 당장 먹고 살 궁리하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누가 한가롭게 책을 빌리고 구입하러 여기 와? 그 돈이면 밥을 한 끼 더 사먹고 말지.


 "망하기 전에 여기 상황이 좋아지기를 비는 거 말고는 없잖아. 나가서 사람들한테 서점 오라고 소리쳐봐야 소용도 없을 건데."

 "그런 게 아니잖아!"

 "그러면 뭐?"

 "너도 진지하게 방법 좀 생각해봐! 여기 문 닫은 다음에 길바닥에 드러누울 거니?"


 라키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짜증 가득 담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네가 뭐 떠올려보든가. 여기 상황이 이 따위인데 무슨 방법이 있어? 누구는 생각 안 해본 줄 아나? 나도 방법이 없나 생각해보곤 한다. 그런데 진짜 방법이 없으니까 이러고 있지.


 가만히 생각해보니 더 짜증나네. 그렇게 걱정되면 당장 학습 모임 가는 것부터 그만둬야지. 지금 나와 라키사 월급을 누구 돈으로 주고 있는지 알고 그런 소리 하는 거야? 나와 라키사 월급은 이고가 자기 월급에서 나눠주는 거다. 이고가 그 학습 모임을 그렇게 싫어하는데 거기에 바득바득 가는 건 뭔데? 이고가 가지 말라고 직설적으로 이야기해줘야 알아들을 건가?


 라키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빗자루를 들고 서점 바닥을 쓸기 시작한다.


 "너 바닥 왜 쓸어? 아까 오자마자 청소 다 하지 않았어?"

 "가만히 있는 것보다 뭐라도 하는 게 좋잖아. 손님이 올 지도 모르잖아."


 그렇게 바닥 열심히 쓸어봐야 손님이 올 리 없잖아. 라키사가 아까 오자마자 청소를 다 해놔서 서점은 매우 깔끔하다. 깔끔한 상태 그대로다. 누가 서점 안에 들어오기나 했어야 더러워질 거나 있지. 아무도 안 들어왔으니 더러워진 것도 없다. 그새 창문으로 먼지가 들어와서 쌓였을 리도 없구. 이해해야지. 아예 일이 없으니 많이 불안하기는 할 거다. 지금 빗자루로 바닥 쓰는 건 저주술인가? 손님 오라고 갈망하면서 바닥 쓸면 없는 손님이 올까?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모르잖아. 손님 오기를 간절히 빌면서 청소하다 보면 진짜 한 명 오는 거 아니야? 먼지가 없는 책장 먼지를 털었다. 간절히 원하는 게 저주술이랬지? 라키사는 손님이 오기를 간절히 원하면서 청소하고 있다. 저주술이 진짜라면 손님이 오겠지. 이렇게 청소한다고 손님이 올 리는 없겠지만...그래도 가만히 놀고 있는 것보다는 마음이 편하다. 서점을 위해서 뭐라도 하고 있으니까. 그냥 놀고 있는 것은 아니잖아. 지금 올 리 없겠지만 언젠가 올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어. 이따 라키사가 퇴근한 후라도 손님이 오면 서점이 깨끗하다고 좋아하겠지. 지금 당장 손님이 안 오더라도 오늘 중으로든, 아니면 내일이든, 정 안 되면 이번 주 안이라도 손님이 온다면 라키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 이뤄진 거잖아. 그러면 그건 저주술이 이뤄진 거라고 해야 하나?


 아니야. 그딴 건 저주술이 아니야. 그런 게 저주술이라면 온갖 것이 다 저주술이지. 이 세상 모든 것이 저주술로 움직인다고 해야 할 거야. 지금 나와 라키사가 청소하는 것과 언젠가 손님이 올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 그냥 우연이지. 라키사의 간절한 마음이 누군가의 마음을 흔들어서 오게 한 것은 아니잖아. 저주술이라면 라키사가 간절히 원하는 마음으로 인해 당장 여기에 없던 손님이 펑 튀어나와야해. 그게 저주술이잖아. 무조건 빌고 빌어서 이뤄지기만 하면 그게 저주술이라고? 그딴 게 저주술이면 세상에 저주술사 아닌 사람이 어디 있어? 그런 논리라면 마딜 공화국 바깥에 있는 저주술을 금지하는 이 세상 모든 나라 사람들 다 저주술사겠다.


 청소가 끝날 때까지 당연히 손님은 안 왔다. 당연하지. 그런 건 저주술이 아니야. 서점 청소를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오지 않을 손님은 오지 않아. 설령 이따 손님이 온다 하더라도 그게 라키사가 청소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고, 그렇기 때문에 라키사가 저주술을 사용한 거다? 그건 말장난이지. 그런 모든 게 다 저주술이면 여기가 매일 파리만 날리는 것도 저주술이게? 누군가 이 서점 망하기를 간절히 원해서 손님이 안 오는 거야?


 다시 계산대 뒤로 가서 앉았다. 라키사는 입구를 말 없이 바라본다. 백날 쳐다봐라. 이 시각에 손님이 오나. 장담컨데 절대 안 올 거다. 평화로웠던 과거에도 이 시간에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런 엉망진창인 상황에서 이 시각에 손님이 온다고? 모든 에드자 사람들이 독서를 해야 세상이 좋아진다고 믿어도 그런 일은 일어나기 힘들 거다. 글자 모르는 사람들도 수두룩하니까.



 누군가 서점으로 들어왔다. 진짜야? 진짜 손님이 온 거야?


 "타슈갈, 안녕!"

 "너!"


 감비르다. 아침부터 재수 더럽게 없네. 기껏 열심히 청소했더니 누군가 서점으로 오기는 했다. 하필 감비르다. 저놈은 여기 절대 오면 안 된다. 저 새끼만은 여기 절대 들어오게 할 수 없다. 설령 엄청난 돈을 주고 책을 빌려간다고 해도 안 된다고 할 거야. 아다비아를 죽이려고 한 놈이니까. 한동안 안 보여서 속이 시원했는데 어떻게 된 게 열심히 청소한 오늘 딱 나타나네.


 "나 보고 싶지 않았어?"

 "꺼져."

 "왜? 나는 너 보고 싶었는데. 나가서 차 한 잔 할까?"

 "내가 미쳤다고 너랑 차를 마시냐?"


 라키사가 내 옷소매를 가볍게 잡아끌었다. 라키사를 쳐다봤다. 굳게 다문 입. 말이 없지만 눈빛에서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읽었다. 제발 감비르한테 그렇게 대하지 마. 쟤는 너랑 좋게 지내고 싶어하잖아. 둘이 좋게 차 한 잔 마시고 오는 게 그렇게 어려워? 지금 너는 근무 시간도 아니잖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라키사가 원하는 거니까. 여기에서 이러고 있으면 저놈이 계속 서점에 있겠지. 켈라자야나 이고가 오면 더 시끄러워질 거야. 이건 저놈이 좋아서 같이 차를 마시는 게 아니야. 여기가 시끄러워지는 게 싫으니까 내가 참는 거지.


 "가자."


 감비르와 같이 서점 맞은편 찻집으로 들어갔다.


 "여기 차 한 주전자 주세요!"


 감비르를 쳐다봤다. 어? 이놈이 오늘은 웬 일로 여장을 안 했지? 팔을 걷어부친 하얀 셔츠에 누런색 바지. 얼굴에 화장도 안 했다. 머리카락은 여전히 길다. 그래도 단정하게 뒤로 묶었다. 머리를 길게 기른 남자야 평범한 사람들 중에도 있으니까 이상할 것까지는 없다. 설마 이놈, 드디어 정신차렸나?


 "왜 왔어?"

 "너 보고 싶어서."

 "끔찍한 소리 하지 말구."


 무서운 소리 하고 있어. 그래도 전에 만났을 때보다 마음이 편하다. 주변 눈치를 덜 신경쓰게 된다. 이놈이 여장하고 와서 찻집에 왔을 때는 주변 시선이 엄청나게 신경쓰였다. 신경 안 쓰이면 그게 미친 거지. 세상에 여장하고 와서 여자 흉내내고 있는 남자와 같이 차를 마시고 있는 놈을 누가 정상인으로 보겠어? 그때 나를 본 사람들 모두 다 나도 같이 미쳤다고 여겼을 거다. 지금은 최소한 그런 건 신경 안 써도 된다. 그냥 머리를 길게 길러 뒤로 묶은 남자와 차를 마신다고 여기겠지. 그런 건 전혀 이상할 거 없어. 친구끼리 찻집 와서 차 마시는 건 당연한 거니까.


 "나에 대해 궁금한 거 없어?"

 "뭐가?"

 "정말 하나도 궁금한 거 없어?"


 궁금한 거? 네가 지금 내 눈 앞에서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 왜 내 앞에 또 나타났는지 궁금해. 그래, 그래도 지금 저 모습이면 괜찮아. 참을 수 있어.


 "웬 일로 여장 안 했냐?"

 "역시! 너 나한테 관심 많구나!"

 "뭔 헛소리야? 눈알이 달렸으면 당연히 그게 제일 먼저 보이지."

 "내가 왜 오늘은 남자 인간의 옷을 입었을 거 같아?"

 "드디어 정신차렸냐?"


 말투가 조금 이상하기는 하지만 괜찮아. 이 정도라면 견딜 수 있다. 저놈이 여장하고 1인 시위하다가 경찰들한테 두들겨 맞는 것도 봤잖아. 그런 거에 비하면 이건 진짜 별 거 아니다. 진짜 이제 정신차린 건가?


 "나 정신 잃어버린 적 없어."

 "여장하는 게 제정신으로 할 짓은 아니잖아."

 "그거? 음...그게 그렇게 싫어?"

 "그러면 그게 좋냐? 볼 때마다 눈알 썩을 거 같은데..."

 "괜찮아. 덕분에 너의 상상의 세계도 그만큼 더 넓어졌잖아."


 이걸 말이라고 하나? 상상의 세계가 뭐가 더 넓어져? 볼 때마다 속 울렁거리는 거 참느라 죽을 뻔 했다. 뭔 생각을 하든 '감비르'라는 것만 떠오르면 자동적으로 여장한 감비르 모습이 떠올라서 엄청나게 고통스러웠다. 직접 보면 눈이 썩고 뭔가 생각하다 떠오르면 머리 속이 썩는 느낌이었다. 그딴 게 그렇게 좋으면 혼자 즐기고 혼자서 무한대로 상상의 세계를 넓혀갈 것이지, 왜 나한테 고통을 주냐고!


 "그래, 그렇게 미친 짓 할 수 있다는 것은 알게 되었네."

 "나는 남자 인간이면서 동시에 여자 인간이야. 그동안 너무 여성성에만 신경썼더니 균형이 깨져서 다시 균형을 맞추는 중이야."

 "그러니까 너 말은 지금 너는 여성성이 폭발하고 있다는 거야?"

 "응, 내 생각에는 그게 맞는 해석인 거 같아."


 이놈은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어쨌든 한동안 여장하고 돌아다니지는 않겠네. 그냥 서점에 영원히 안 와줬으면 좋겠지만 계속 나타날 거라면 차라리 지금 저 꼴로 나타나는 게 낫지. 저 꼴로 나타나면 최소한 입만 안 열면 이고, 켈라자야가 기겁할 일은 없을 거니까. 무슨 독극물 치우듯 조용히 내가 끌고 나가서 헛소리 좀 들어주면 되구. 헛소리 들어주는 것도 주변 시선 신경 안 써도 되니 그나마 편하다. 지금 나와 감비르가 나누고 있는 대화 내용을 귀를 쫑긋 세워 듣고 있을 놈은 없을 거니까.


 "야, 그냥 여장 안 하면 안 되냐?"

 "왜? 나의 여장한 모습 보면 너무 흥분돼?"

 "미쳤냐?"

 "너도 강한 부정은 강한 부정이라는 거 알지?"

 "하아...진짜..."


 말을 말자. 그냥 말을 안 하는 게 나아.


 "그런데 있잖아, 너, 나를 대하는 태도가 부드러워진 거 같아."

 "뭐?"

 "그렇잖아. 나는 느끼고 있는데?"

 "최소한 눈이 괴롭지는 않으니까."


 감비르가 무슨 헛소리를 해도 일단 괜찮아. 그냥 듣자마자 잊어버리면 돼. 그러면 끝나. 최소한 다른 사람들은 지금 이 모습을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거야.


 "솔직히 말해봐. 너는 내 내면의 모습은 어떻든 전혀 관심 없는 거 아니야?"

 "응. 관심없어."

 "오직 나의 외면에만 관심있는 거야?"

 "그게 관심이냐? 미친 짓 하려면 너 혼자 하라고. 너 여장하고 꼴깝떠는데 왜 나까지 자꾸 끌어들이려고 해? 그러면 남들이 나 보고 나도 같이 미친놈이라고 여길 거 아냐?"

 "아...그런 거야? 그러면 앞으로 너한테만 아주 특별하게...진짜 너무 특별하게 남자 인간 모습으로 오면 괜찮은 거야?"

 "아니. 그냥 좀 오지 마! 너 아니어도 심란한 일 많으니까!"


 감비르는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계속 올 거야. 이렇게 소통하는 거 너무 좋아."

 "나는 진짜 싫다니까!"


 이게 소통이냐? 감비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나한테 감비르는 소통의 상대가 아니라 말이 안 통하는 불통의 상대다. 제발 나한테 와서 이상한 소리 늘어놓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도 못 알아듣는지 모르겠다. 이게 소통이야? 나는 분명히 계속 헛소리 하지 말고 헛짓거리 하지 말라고 하고 있는데? 그거 하나도 전해지지 않고 있는데 그게 소통이야? 이게 어느 나라 소통 방식이야? 저주술사들의 소통 방식이냐?


 "우리 같이 연대하자. 당장은 아니라도 좋아. 같이 소통하고 연대해서 차별과 편견에 대항하면 말이야, 언젠가는 분명히 함께 7가지 꿈을 꾸고 하얀 언덕 위 새까만 꽃을 딸 걸? 그 꽃이 있으면 아다비아를 치료할 수 있어."

 "나는 너랑 소통이고 연대고 안 한다고! 하기 싫다고 몇 번을 말해?"

 "괜찮아.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겠어."

 "뭘? 이제 너 꼴 보기 싫다는 내 진심이 전해졌냐?"

 "아니. 너는 내 옷차림에만 신경쓸 뿐이야. 나는 오늘 너와 소통하고 연대의 끈을 미약하게나마 느꼈어. 옷차림만 내가 양보하면 되지?"

 "그래, 너 좋을 대로 해라."


 제발 안 왔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서점 근처에 얼쩡거리는 것까지 막을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최소한 옷이라도 정상적으로 입고 오면 그나마 낫겠지. 감비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일어났다. 감비르가 찻값을 지불하는 가는 틈에 바로 서점으로 돌아왔다.


 "감비르랑 대화 잘 했어?"

 "몰라."

 "그래도 나는 기뻐."


 라키사가 매우 밝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저렇게 활짝 미소짓는 얼굴은 대체 얼마만이지? 언제 봤는지 가물가물하다. 아니, 본 적이 있나? 언제 봤는지가 아니라 진짜 여태 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나 싶다. 뭐가 그렇게 기쁘지?


 "뭐가?"

 "오늘은 네가 감비르랑 대화 잘 했잖아."

 "뭔 대화를 잘 해?"

 "이렇게 조금씩 다시 서로에게 다가가면 되잖아. 다시 모두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너랑 나랑도..."

 "너와 나?"


 라키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다시 서로에게 조금씩 다가간다면..."

 "알았어."


 그래. 라키사가 원하잖아. 라키사와 완전히 멀리 지내고 싶지 않아. 어디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르겠어. 그렇지만 조금씩 서로가 양보하면서 다가가다보면 다시 괜찮아지지 않을까? 어딘가 크게 꼬여버린 나와 라키사의 관계. 다시 풀어질 수 있을 거야. 라키사가 원하는 건 모두가 사이좋게 지내는 거니까. 좋게 생각하자. 감비르가 정상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면 괜찮아. 속으로 뭔 생각을 하든 입으로 뭘 떠들든 그냥 넘겨버리면 돼. 라키사가 가는 학습 모임. 그거도 그냥 내가 너무 신경쓰지만 않으면 아무 상관없잖아. 마딜인이 저주술 믿는 게 뭐가 이상해? 그거도 나름대로 저주술이겠지. 그러면 되잖아. 어차피 라키사가 저주술을 쓰게 될 일도 없을 테니까.


 라키사가 보고 있는 책을 쳐다봤다.


 "같이 볼래?"

 "아니, 괜찮아."


 라키사는 다시 책을 보기 시작했다. 곁눈질로 책을 바라봤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문장은 바로 이거였다.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것은 차별과 편견이다.


 아니야. 이건 노력해서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절대 아니다. 저런 걸 대체 어떻게 받아들이라는 거야? 저걸 듣는 것까지는 좋아. 저걸 진심으로 믿는 모습을 어떻게 멀쩡하다고 봐줘야 해? 라키사에게 다시 다가가려면 저런 말을 믿는 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한다는 거잖아. 이건 될 일이 아니야. 틀린 거잖아. 틀린 걸 맞다고 우기면 그게 미친놈이잖아. 어떻게 정상인이 맨정신으로 미쳐...그게 노력으로 될 일이야? 저걸 보고 참아야한다. 그런데 참는다고 될까?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까? 틀린 걸 맞다고 박수쳐줄 수는 없는 거 아냐.


 하지만 참아야겠지? 너무나 밝은 표정을 짓던 라키사. 지금도 매우 즐거워보인다. 두 볼은 살짝 상기되어 있고 입꼬리는 위로 올라가 있다. 그게 그렇게 좋을까? 라키사가 저렇게 좋아하는데...참고 듣기라도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까?



 라키사는 오늘 평소보다 매우 일찍 퇴근했다. 오늘은 일이 있어서 나한테 2시간만 일 좀 봐달라고 했다. 대신 내일은 자기가 2시간 더 일한다고 했다. 알겠다고 했다. 아직 켈라자야는 자고 있다. 지루한 오전 시간. 책장을 넘기다 달력을 쳐다봤다. 이제 1116년 6월 30일이다. 벌써 올해의 절반이 지나갔다.


 '이제 조금씩 좋아지는 걸까?'


 이번 달은 그래도 다른 때에 비해 평화로웠다. 일단 내 주변에서 잔인한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는 끔찍한 6월이었을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나한테는 아니야. 항상 걱정할 게 있고 두려운 게 있지만 이 정도면 정말 평화로운 한 달이었어. 심지어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지난 달에 비해 책을 빌려간 사람이 늘어났다. 매일 다음날은 더 나빠질 거라 예상했지만 그런 나를 비웃는 것처럼 가만히 생각해보니 매일 조금씩 더 좋아졌다.


 '에베디나단 말대로 모두가 더 나아질 거라 믿어서 그런 걸까?'


 에베디나단이 말한 게 떠올랐다. 저주술은 믿는 게 현실이 되는 것. 나만 너무 겁먹고 걱정하고 있었던 걸까? 다른 마딜인들은 모두 다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좋아질 거라고 믿고 있다고? 설마...내 주위에 험악한 일이 안 생겼을 뿐이잖아. 창 밖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새벽에 강가에서 온몸이 칼로 난자당한 시체 3구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뼈까지 뚫고 찔러대어서 모두 너덜너덜한 상태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내 주변에서 일어나지 않을 뿐이지, 미친 저주술사들은 여전히 밤에 이 도시 여기저기에서 활개치고 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계속 나빠져가고 있다고 봐야만 할까? 사람 죽어나가는 건 어제 오늘 일도 아니잖아. 상황 엉망된 후에는 매일 그랬어. 단 하루도 빠짐없이 말이야. 이제는 떼거지로 몰살당하는 일이나 발생하지 않으면 더 나빠졌다고 하기도 어려워. 왜냐하면 매일 일어나는 일이니까. 이건 그냥 일상이야. 밤에 밖에 나가면 위험해. 밤에 돌아다니지만 않으면 괜찮을 거야. 아니, 밤에 돌아다녀도 괜찮아. 재수없게 미친 저주술사와 맞닥뜨리지만 않으면 돼. 큰 길은 가로등도 있고 경찰도 있잖아. 으슥한 골목길만 안 들어가면 생각만큼 위험하지는 않아. 정말 위험할 때도 밤길 돌아다닐 때 별 일 없었잖아.


 진짜 나 혼자 쓸 데 없이 겁먹고 앞으로 더 나빠질 거라 믿고 있는 거 아닐까? 이제 사람들은 시체가 발견된 것을 덤덤히 이야기하고 있어. 예전처럼 공포에 떨면서 말하고 있지 않아. 더 나빠질 거라고 봐야할 근거가 있을까? 당장 서점만 해도 그렇잖아. 지난 달에 비해 책을 빌려간 사람이 늘어났어. 몇 달 전만 해도 누가 책을 빌리러 서점에 와? 정말 아무도 안 왔지. 그런데 지금은 오기는 오잖아. 그러면 더 좋아진 거 아냐?


 그 누구도 절망 뿐일 거라고 봤던 나날들. 그러나 달라졌어. 이제 차라클라야가 있잖아. 이렇게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꿈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 있어. 열심히 앞으로 나아가잖아. 조그만 불빛을 갖고, 불빛이 꺼지면 손으로 더듬어서라도 앞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잖아. 차라클라야가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뭔가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해야만 할 거 같아. 호즈라, 켈라자야도 그렇겠지? 그래, 차라클라야 뿐만이 아닐 거야. 에드자 어딘가에서 또 다른 마딜인이 차라클라야처럼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지금도 노력할 거야. 내일은 더 좋아질 거라고 믿으면서 말이야. 그런 마딜인들이 의외로 엄청나게 많은 거 아니야? 그렇다면 에베디나단 말대로 여기 상황은 더 좋아지겠지. 많은 에드자 사람들이 진심으로 믿으니까.


 '아니야, 아직 몰라.'


 속단하기는 일러. 차라클라야가 우리 모두에게 밝은 빛을 보여주고 있는 건 사실이야. 그러나 차라클라야 같은 사람이 과연 흔할까? 이런 상황 속에서? 당장 창밖만 봐도 활기 넘치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사람들.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그러나 부지런히 몸을 움직인다고 해서 활기찬 건 아니야. 오히려 활기가 없어. 그냥 움직이고 있을 뿐이야. 차라클라야가 너무 특별한 거야.


 '그래도 너무 비관적으로만 보는 것도 안 좋을 거야. 분명히 좋아진 것도 있잖아.'


 어제 감비르가 드디어 여장을 하지 않고 정상적인 모습으로 서점에 왔다. 아직 정신을 완전히 차리지는 못했지만 그놈이 여장을 하지 않고 왔다는 것도 굉장한 일이다. 그놈이 다시 정상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일은 이제 영원히 없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냥 미친 게 아니라 완전히 미쳐버렸으니까. 그런 감비르가 정상적인 모습으로 왔다. 정신상태는 여전히 미쳐 있었지만 그게 어디야. 그것도 기적같은 일이었다. 아니, 기적이었다. 자기 말로는 여성성이 너무 강해져서 균형을 맞추기 위해 남자 옷을 입고 나온 거라고 했지만...마지막에 옷차림은 자기가 양보하겠다고 했다. 그 말을 감비르가 과연 지킬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런 말을 했다는 거 자체가 기적이야.


 라키사도 다시 서로에게 조금씩 다가가보자고 했어. 라키사와 사귈 일은 없을 거야. 아다비아와 켈라자야와 사귀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과거처럼 친한 친구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친구라면 생각이 많이 달라도 상관없잖아. 생각이 달라도 서로를 위해주면 그게 친구니까.


 '어서 빨리 다시 개교했으면 좋겠다.'


 학교 다닐 때는 학교 가기 정말 싫었다. 매일 고통스러웠다. 아다비아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아예 포기하고 학교에 가지 않아버렸을 거다. 감비르처럼 말이야. 아다비아 덕분에 낙제를 면하기는 했지만 시험 치르는 날까지 학교 가는 하루하루가 고문당하는 기분이었다. 학교에 공부하러 가는 게 아니라 고문당하러 끌려가는 것 같았다. 제발 학교가 문을 닫아버리기만을 바랬다. 그런데 정작 학교가 폭동 때 불타버리고 언제 문을 다시 열지 기약이 없어져버리니 학교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 아니, 그냥 돌아가고 싶은 게 아니라 어서 빨리 개교했으면 좋겠다. 당장 내일이라도 말이야. 학교에 가던 그 순간 순간이 그렇게 소중한 순간일 줄 몰랐다. 내일 당장 등교하라고 한다면 오늘 밤새워서라도 예습을 해서 갈 텐데...


 방문이 열리더니 켈라자야가 나왔다.


 "잘 잤어?"

 "응."


 켈라자야가 기지개를 켜며 내 쪽으로 걸어오더니 나를 덥썩 껴안았다.


 "야, 나 근무중이야!"

 "너는 내 꺼잖아!"

 "무슨 네 꺼야?"


 켈라자야를 억지로 뜯어냈다. 켈라자야가 깔깔 웃으며 화장실로 갔다. 쟤는 갑자기 왜 저래? 새벽에 들어올 때는 완전 축 쳐져서 들어오더니 자고 일어나니까 혼자 신났네. 기분좋은 꿈이라도 꿨나? 일하고 있는데 그렇게 껴안으면 어떡해? 누가 서점 들어와서 보면 얼마나 민망할 거야. 그래도 켈라자야 기분이 좋아보이니 좋다. 당황스럽기는 해도 솔직히 좋다. 예전처럼 이유없이 성질내고 때리려 들지 않는 게 어디야?


 켈라자야가 씻고 나왔다. 여전히 밝은 표정이다. 왜 저렇게 기분이 붕 떠 있지? 분명히 새벽에 들어올 때는 저렇지 않았는데...


 "너 무슨 좋은 일 있어?"

 "나? 아니. 왜?"

 "너무 기분좋아 보여서."

 "나 지금 너랑 있잖아!"


 언제는 나랑 같이 안 있었어? 오후에는 항상 같이 있었잖아. 아니, 오전에도 같이 있었지. 내가 오전에 근무 없어서 자고 있으면 옆에 와서 같이 잤으니까. 둘만 같이 있는 시간이 오늘이 처음이 아닌데 오늘따라 유독 신나보인다.


 "기분 좋은 꿈이라도 꿨어? 너 오늘 기분 엄청 좋아보여."

 "그냥 신나. 너랑 있어서 너무 기뻐!"


 켈라자야가 다시 나를 꼭 껴안는다.


 "야, 나 근무중이라니까."

 "그래서?"

 "이렇게 앉아 있는 것도 일하는 거야."

 "아무도 없잖아! 내가 너 일으켜세운 것도 아니잖아. 너랑 이렇게 있어서 너무 좋아!"


 켈라자야가 매일 이러면 얼마나 좋을까? 켈라자야가 항상 이렇게 즐거워했으면 좋겠다. 그래, 정말 모든 것이 좋아지고 있어. 나 혼자 계속 부정적으로 미래를 보고 있었던 거야. 다 좋아지고 있잖아. 잠시 뒤에 켈라자야가 원래대로 또 이상한 모습을 보인다 해도 언젠가는 다시 또 이렇게 밝은 모습을 보여줄 거 아냐.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켈라자야는 예전에 비해 많이 좋아진 거야.


 "너네 오전부터 뭐하는 짓이야!"


 블랑쉬블르다. 블랑쉬블르는 이 시각에 무슨 일이지?


 "너네 아주 둘이 좋아 죽으려고 하는구나?"

 "예, 언니!"

 "이 참에 아예 결혼해버리지 그래? 결혼하면 낮이고 밤이고 항상 같이 있을 수 있잖아."

 "정말요?"

 "아, 무슨 결혼이에요!"


 귀가 뜨거워진다. 무슨 결혼이야?


 "왜? 너도 어른이잖아. 돈 없으면 풀꽃으로 반지 만들어서 끼워주면 되지. 누나가 돈 빌려줄까? 이자는 음...너는 믿음이 안 가니까 1년에 2배!"

 "장난하지 마세요!"

 "좋아서 귀 빨개진 거 봐. 내일 결혼할 거야? 아니면 모레?"

 "아, 농담도!"

 "너네 둘 진짜 잘 어울려!"

 "그래도 그건 아니죠!"

 "그러면 누나랑 할까? 누나는 똑똑하고 돈도 많은데...너 설마 나 진짜 좋아하는 건 아니지?"

 "제가 누나를 왜 좋아해요!"


 켈라자야가 있는 힘껏 나를 꽉 껴안는다. 얘는 농담 진담도 구분 못 하나?


 "켈라자야, 농담이야, 농담! 뭘 그렇게 경계해? 설마 내가 진짜 쟤랑 결혼하겠어?"

 "저한테서 타슈갈 빼앗아가려고 하지 마세요!"

 "안 빼앗아가! 너 다 가져도 돼. 언니 미모 질투하는 거야?"


 블랑쉬블르가 켈라자야를 약올렸다. 켈라자야는 블랑쉬블르를 흘겨보면서 고양이가 쥐를 도망 못 가게 발톱 세워서 잡는 것처럼 손톱을 세워 나를 찍는다. 하여간 블랑쉬블르는 짓궂게 말장난치는 데에는 아주 도가 텄어. 블랑쉬블르가 나와 켈라자야를 보며 깔깔 웃으며 걸어왔다.


 "이고는? 루즈카는? 둘은 어디 있어?"

 "이고는 루즈카 집 가서 아직 안 왔어요."

 "그래? 그러면 조금 기다려야겠네?"

 "예."


 블랑쉬블르는 계산대 뒤로 와서 켈라자야 옆에 앉았다.


 "손님 왔는데 차 안 가져오니?"

 "누나가 무슨 손님이에요? 무슨 손님이 계산대 뒤에 앉아요?"

 "그러면 나 지금 여기 일하러 온 거야?"

 "그건 아닌데..."

 "이고한테 네가 나한테 일 시켰다고 일러야겠다. 자기가 할 일을 나한테 다 떠넘기고 시켰다고 고자질해야지!"

 "아, 누나!"

 "그러면 어서 차 한 잔 가져와."


 켈라자야에게 놓아달라고 했다. 켈라자야가 순순히 놓아줬다.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그냥 맹물이나 찾아 마실 것이지 무슨 차를 끓여오라는 거야? 켈라자야도 방으로 따라들어왔다.


 "불 붙여줘?"

 "응."


 켈라자야가 화로에 있는 숯을 집중해서 쳐다본다.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불이 붙었다. 숯불 위에 물주전자를 올려놓고 물이 끓기를 기다리면서 컵에 찻잎을 넣었다. 물이 끓자 찻잎이 들어 있는 컵에 물을 따랐다. 물이 초록빛으로 변해간다. 블랑쉬블르는 집에서 이것보다 훨씬 더 좋은 차 마시잖아. 블랑쉬블르한테는 이거 완전 시원한 물만도 못한 것일 건데. 컵을 들고 나가서 블랑쉬블르에게 건네주었다. 블랑쉬블르는 컵을 받아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이고랑 루즈카는 지금 오라고 하고서는 왜 안 오는 거야?"

 "둘이 무슨 일 있나 보죠."

 "하긴...둘이 연인이니까..."


 블랑쉬블르 얼굴은 힘이 쭉 빠져나가 무표정한 얼굴이 되었다. 말 없이 차만 홀짝인다. 갑자기 조용해졌다. 블랑쉬블르가 차를 홀짝이는 소리만 들린다. 블랑쉬블르가 차를 다 마셨다. 여전히 블랑쉬블르는 무표정한 표정이다.


 잠시 후, 호즈라가 왔다. 호즈라는 오자마자 바닥에 앉아서 서류와 책을 뒤적이며 키란에 대해 연구한다. 블랑쉬블르는 호즈라가 뭘 하는지 전혀 관심이 없나 보다. 그냥 계속 무표정한 얼굴로 문만 바라본다. 블랑쉬블르 때문일까? 켈라자야는 말없이 나와 내가 보는 책을 번갈아 쳐다본다. 몰라. 이고와 루즈카가 약속 시간에 늦어서 짜증났나 보지.


 한 시간쯤 흘렀다. 이고와 루즈카가 서점 안으로 들어왔다. 루즈카는 이고 팔에 꽉 매달려 찰싹 달라붙어 있다. 블랑쉬블르가 갑자기 활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네 진짜 이러기야? 너무 늦었잖아!"

 "언니, 미안해요. 일이 조금 있었어요."

 "일 때문이 아닌 거 같은데? 네가 그렇게 이고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으면 어떻게 빨리 걸어와?"

 "그건 아니에요! 진짜 일이 있었어요."

 "농담이야. 너네들 모두 왜 그렇게 장난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언니가 말하면 진짜 같단 말이에요."


 루즈카는 블랑쉬블르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도 이고 팔에 계속 꽉 매달려 찰싹 달라붙어 있다. 루즈카가 저러는 모습도 처음 본다.


 "너네 아직 점심 안 먹었지?"

 "예."

 "그러면 나가서 점심 좀 먹고 와. 우리끼리 이야기할 게 조금 있거든."

 "예."


 이고는 루즈카, 블랑쉬블르와 여기에서 할 이야기가 있으니 나가서 점심 좀 먹고 오라고 했다. 적어도 한 시간 정도는 여기에서 나가서 들어오지 말라는 말이겠지. 무슨 중요한 이야기를 나눌 건가 보다. 분위기 봐서는 그렇게 심각한 이야기를 나눌 것 같지는 않은데...일단 자리 비켜달라고 했으니 비켜줘야지.



 켈라자야, 호즈라와 자리에서 일어나서 서점에서 나왔다. 점심을 먹고 조금 돌아다니다 서점 돌아가면 대충 될 거다. 그런데 어디 가지? 둘 다 어디 가자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 차라클라야가 일하는 식당으로 갈까?"

 "아, 거기? 그럴까?"

 "어디인데?"

 "에드자 대학교 근처야. 거기 괜찮은 식당이야."


 호즈라가 괜찮은 식당이라고 하자 켈라자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자 대학교 쪽으로 걸어간다. 켈라자야가 내게 팔짱을 낀다. 호즈라가 켈라자야와 나를 번갈아 봤다.


 "너희 잘 어울린다."

 "그렇지? 얘는 내 꺼야."

 "응."


 켈라자야가 활짝 웃는다. 호즈라도 켈라자야를 보며 미소지어 보인다. 호즈라는 나보다 켈라자야한테 더 관심있잖아. 호즈라 앞에서 켈라자야가 내게 팔짱을 끼고 있는 건 별로 신경쓰이지 않는다. 사람들 돌아다니는 길거리에서 이렇게 팔짱 끼고 있는 게 훨씬 더 신경쓰이지. 싫지는 않다. 좋기는 좋다. 그냥 사람들 시선이 신경쓰일 뿐이다. 그거 뿐이야. 사귀는 사이인데 팔짱끼고 돌아다니는 것이 이상할 건 없잖아. 시위가 일어난 후 모든 것이 엉망이 되면서 이렇게 팔짱끼고 돌아다니는 연인들이 안 보이게 된 거 뿐이다. 그 전에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어. 지금이니까 더 신경쓰일 뿐이다.


 햇볕이 따갑다. 더 더워졌으면 켈라자야도 이렇게 팔짱끼려고 하지 않았을 거야. 더워 죽겠는데 찰싹 달라붙으면 더 덥지. 지금도 덥긴 하지만 이 정도는 괜찮아. 오늘따라 왜 나도 점점 마음이 붕붕 뜨지? 그냥 좋은 일이 있을 거 같다. 다 좋아지고 있어. 그게 느껴져. 여름이 오고 있으니까. 따가운 햇살 맞고 식물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어. 나뭇잎이 울창하잖아. 생기가 넘쳐. 그러니까 좋아지고 있는 거야. 생명의 기운이 넘쳐 흐르잖아.


 "어? 타슈갈!"


 남자와 여자가 손을 흔든다. 자에드와 예라다. 쟤네는 왜 하필 이렇게 좋을 때에 마주치는 거야?


 "타슈갈, 어디 가?"

 "밥 먹으러."

 "밥 먹으러 어디?"

 "에드자 대학교 쪽에..."


 호즈라와 켈라자야가 자에드와 예라를 바라본다. 얘네는 아마 자에드와 예라를 모르겠지? 소개시켜줄 필요는 없을 거야. 알아봐야 좋지도 않을 테니까. 자에드와 예라는 호즈라와 켈라자야를 번갈아 보았다.


 "둘은 누구야?"

 "얘는 내 여자친구, 얘는 그냥 친구."

 "아, 그래? 여자친구 사귄 거 축하해!"


 예라가 웃으며 말했다. 저 어색한 웃음. 눈은 웃지 않는다. 저 눈빛은 대체 뭐지? 경멸하는 눈빛도 아니고 좋아하는 눈빛도 아니다. 관심 없는데 억지로 짓는 웃음 같다. 이상하지는 않다. 자에드, 예라와는 서로 알고만 지내는 사이니까. 예의상 축하한다고 해준 거겠지.


 "아다비아 소식 들은 거 있어? 걔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한데 소식 들리는 게 전혀 없네."

 "몰라. 나한테도 소식 없으니까."

 "희안하네. 분명히 에드자에 있을텐데..."


 아다비아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말 안 해 주는 게 좋을 거야. 자에드와 예라가 왜 아다비아를 찾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영원히 모르는 게 나아. 뮈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봐도 얘네가 아다비아에 대해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거 같단 말이야. 켈라자야도 아무 말 안 한다. 그래, 얘네한테는 아다비아에 관한 모든 게 비밀이야. 아무 것도 말 안 해줘야 해. 느낌이 그래. 얘네가 아다비아가 어떻게 되었는지 안다면 분명히 아다비아를 해치려 할 거야. 직감적으로 느껴진다.


 "우리 이만 가볼께. 점심 맛있게 잘 먹어!"


 자에드와 예라가 손을 흔들고 우리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다시 식당을 향해 걸어간다. 호즈라, 켈라자야 둘 다 자에드와 예라가 누구인지 별로 안 궁금한 모양이다. 나도 쟤네들이 어떤 애들인지 하나도 안 궁금하다. 그냥 왠지 참 밥맛없는 애들 정도랄까? 쟤네가 나한테 딱히 나쁜 짓을 한 건 없는데 그냥 친해지고 싶지 않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항상 볼 때마다 이유없이 거리를 많이 두고 싶은 애들이니까.


 "어? 너희들 어디 가?"


 아, 미치겠네. 자에드와 예라 다음은 와히디야냐? 저 미친년은 왜 여기에서 마주치는 거야? 와히디야가 호즈라를 밀치고 내 팔을 잡는다. 켈라자야가 호즈라 팔을 손으로 내리쳤다.


 "왜 때려!"

 "타슈갈은 내 꺼야! 손 대지 마!"

 "언니들이 우리한테 사이좋게 지내라고 한 거 잊었어?"

 "그거랑 이게 무슨 상관이야? 타슈갈은 내 애인이야! 타슈갈한테 집적거리지 마!"

 "좋아. 오늘만. 딱 오늘만 양보할께."


 와히디야가 켈라자야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와히디야와 사귈 일은 영원히 없지. 켈라자야가 미쳤다고? 와히디야에 비하면 정상인이야. 와히디야, 저건 진짜 제대로 미쳤거든. 와히디야는 친구로도 두어서는 안 돼. 와히디야가 아무리 저래도 쟤가 우리 서점에 있는 책을 보고 쓰레기라고 보는 건 하나도 안 변했을 거야. 속으로는 여전히 블랑쉬블르를 오물덩어리라고 여기고 있는 거 아니야? 나랑 켈라자야도 그렇게 보고 있을 거구. 블랑쉬블르한테 한 번 혼나서 억지로 숨기고 있는 것일 거야. 생각이 그렇게 쉽게 바뀌나.


 "너희들 어디 가? 나도 같이 가."

 "점심 먹으러 가고 있어."


 호즈라가 대답했다. 호즈라라면 와히디야와 잘 지낼 수도 있겠다. 호즈라는 키란을 연구하고 있고 저주술사를 동경하잖아. 와히디야는 정신이 저 따위이기는 해도 어쨌든 저주술사구. 둘이 죽이 잘 맞으려나?


 "우리 같이 가자! 나도 점심 안 먹었어!"

 "그래. 같이 가자."


 호즈라가 같이 가자고 했다. 식당 가서 아예 탁자를 따로 앉을까? 나랑 켈라자야가 같이 한 탁자에 앉고, 호즈라와 와히디야가 다른 탁자에 앉아서 밥 먹으면 되잖아. 그러면 켈라자야와 와히디야가 서로 으르렁거리지 않고 모두가 평화롭게 점심을 먹을 수 있을 거야. 그 식당에 있는 탁자가 전부 4인용 탁자이기는 하지만 억지로라도 따로 앉자고 해야지. 그래, 나랑 켈라자야랑 사귀니까 우리 둘이만 앉아서 먹고 싶다고 해도 이상할 거 없잖아? 이건 식당 가서 말해야지. 켈라자야와 와히디야가 같이 앉아 있는 탁자에서 밥을 먹는다고? 둘이 접시 집어던지고 싸우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지. 와히디야가 분명히 켈라자야한테 계속 시비걸 거니까. 한두 번이냐? 둘이 만날 때마다 와히디야가 한 번도 빠뜨리지 않고 켈라자야한테 시비걸었는데...



 식당 앞까지 다 왔다. 식당 문이 닫혀 있다. 안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뭔가 날아다니고 쓰러지고 집어던지는 소리가 들린다.


 "뭐지?"


 켈라자야가 인상을 찌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와히디야도 표정이 어두워졌다. 문이 열렸다.


 "타슈갈!"


 뭐야?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차라클라야.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전부 피범벅이다. 차라클라야 머리카락을 타고 핏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피비린내가 확 덮친다. 이거 무슨 일이야?


 "타슈갈, 나 드디어 꿈을 이뤘어요!"


 피범벅인 얼굴에서 천천히 하얀 이가 드러난다. 시뻘건 얼굴에서 빛나는 새하얀 이빨. 새빨간 피 속에서 빛나는 하얀 미소. 기쁨에 찬 눈.  차라클라야가 왼손을 들어올린다. 둥근 것. 둥근 것...


 차라클라야가 또박또박 말한다.


 "인간의 신체는 피부, 근육, 뼈, 피, 기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신체는 피부, 근육, 뼈, 피, 기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그날 켈라자야가 가르친 아드라스어 문장.


 "나 너무 기뻐요!"


 아...


 "타슈갈은 안 기뻐요?"


 이거...


 "축하해줘요!"


 오른손을 위로 휘두르는 차라클라야. 그와 동시에 금속이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더러운 것. 역겨워."


 와히디야의 목소리. 피범벅이 된 채 기뻐하는 차라클라야의 얼굴. 저 환한 미소. 진짜 행복한 표정.


 "패배자들. 쓰레기들."


 차라클라야의 목소리. 와히디야가 차라클라야를 향해 한 걸음 걸어나왔다. 와히디야가 허리에 차고 있던 은빛 사슬 허리띠를 풀었다.


 "죽어주세요!"


 차라클라야...다시 한 번 울리는 금속끼리 부딪히는 소리. 와히디야가 두 손으로 허리띠를 잡아 오른손을 빙빙 돌린다. 갑자기 꼿꼿한 자세로 서는 차라클라야. 쫙 펴지는 와히디야의 허리띠.


 "야!"


 차라클라야 입술이 움직인다. 소리 없는 말. 타슈갈...땅에 떨어지는 차라클라야 머리. 차라클라야 몸이 한 토막씩 무너진다.


 "타슈갈, 나 잘 했지?"


 활짝 웃으며 두 손으로 내 두 팔을 가볍게 잡는 와히디야.


 "이 미친년아! 차라클라야 살려내!"


 제기랄...망할...제기랄...망할...제기랄...망할...제기랄...망할...제기랄...망할...제기랄...망할...제기랄...망할...제기랄...망할...제기랄...망할...제기랄...망할...제기랄...망할...


 두 손으로 와히디야 멱살을 움켜쥐었다. 이 쳐죽일 년아, 너 지금 뭐 한 거야? 이 미친년이 지금 뭔 짓을 한 거야! 이 새끼 진짜 죽여버릴 거야. 감히 차라클라야를 죽여?


 "타슈갈, 그만해!"


 켈라자야 목소리. 등이 갑자기 엄청나게 뜨겁다. 숨이 안 쉬어진다. 온몸에 힘이 쭉 빠진다.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를 향해 흘러오는 피. 꿈. 희망. 새빨간 차라클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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