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중앙아시아 생존기 (2012-2013)

우즈베키스탄의 러시아인이 우즈벡어 못 하는 이유

좀좀이 2012. 9. 8.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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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어는 아직도 강력한 지위 - 제2 모국어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살며 느끼는 것 중 하나는 러시아인들이 우즈벡어를 알려고 하지도 않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중앙아시아 언어 환경의 특수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지역은 과거 소련의 지배를 받았던 지역이며, 실상 모든 교육이 러시아어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중년층부터는 우즈벡인조차 우즈벡어로 어려운 개념을 설명하는 것을 매우 어려워한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미국이나 영국 유학파 교수들이 영어 섞어 쓰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우리나라에서 영어 섞어 쓰는 교수들은 조금만 노력을 기울이면 충분히 한국어로 설명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 하는 것에 불과하다. 최소한 고등학교까지 한국에서 정상적으로 나왔다면 말이다. 하지만 여기 중년층부터는 아예 모든 학교 교육을 러시아어로 배운 사람들이다. 즉, 우즈벡어로 어려운 개념을 설명하는 법 자체를 태어나서 지금까지 접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소련 시대에 우즈베키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헌법에 국어는 러시아어와 우즈베크어라고 명시되어 있기는 했지만 실제 모든 교육은 러시아어로 진행되었다. 소련 시절 우즈벡어는 길거리에서, 집에서 쓰는 언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환경에서 살았던 사람들이다 보니 러시아어를 더욱 편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대통령조차 독립 후 초기에는 우즈벡어로 연설하는데 매우 어눌한 우즈벡어로 연설했고, 나중에 따로 우즈벡어를 배웠다고 할 정도다.



이와 같은 특수성은 우즈베키스탄 및 다른 중앙아시아에서의 언어 환경에서 매우 특이하고 재미있는 현상을 보여준다. 바로 자기가 어떤 언어를 쓰는지에 따라 주변의 언어 환경을 완벽히 바꾸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우즈벡어를 사용한다면 주변 사람들이 모두 우즈벡어를 사용하고, 러시아어를 사용한다면 주변 사람들이 모두 러시아어를 사용한다. 이렇게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언어환경을 자기 마음대로 바꾸어버릴 수 있는 경우는 흔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우며, 한국인에게는 매우 놀라운 일이기도 하다. 특히, 여기에서 어학 연수를 하는 경우, 이 현상은 장점이자 단점으로 작용한다.



이런 언어 환경 속에서 매우 흥미로운 점은 러시아인들은 우즈벡어를 정말 못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대체 왜 우즈벡어를 모를까? 이 문제는 우즈벡인들이 러시아어를 매우 유창하게 구사하는 이유와는 또 별개의 이유가 있다고 본다.



우즈베키스탄의 언어 환경에 대한 논문과 글을 읽어보면 대체로 우즈베키스탄 정부에서 우즈벡어 보급에 별 관심이 없고, 우즈벡어를 공부해야 할 경제적 동기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은 분명 맞다. 복잡하고 많은 증거를 끌고 올 필요 없이 우즈베키스탄에서 러시아로 일하러 가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다.



하지만 단순히 경제적인 동기 부여가 없기 때문에 러시아인들이 정말 우즈벡어에 관심이 없고 잘 모르는 것일까? 이것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무언가 크게 부족하다. 왜냐하면 이 나라는 독립 후 모든 다른 민족 학생들에게 우즈벡어를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중장년층이야 그렇다 쳐도, 학교에서 배운 러시아인들은 우즈벡어를 구사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런 청년들조차 우즈벡어를 거의 구사하지 못한다. 분명 우즈벡인들과 어울려 살고 학교에서 우즈벡어를 배우는데도 말이다.



요즘 우즈베키스탄에서 러시아인 학생들을 위한 우즈벡어 교과서를 읽고 정리하며 다른 블로그 (http://turkiclibrary.tistory.com/) 에 올리면서 이런 이유도 중요하게 작용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우즈벡어 교과서는 두 종류가 있다. 우즈벡인을 위한 Ona tili 가 있고, 러시아인 및 다른 민족들을 위한 O'zbek tili 가 있다. 러시아인 학생들은 학교에서 O'zbek tili 로 우즈벡어를 배운다.



이 O'zbek tili 를 보면 정말 문제가 크다는 생각이 확 든다. 난이도가 너무 높기 때문이다. O'zbek tili 2권을 보면 애들이 알파벳을 배우고 정확한 발음을 배우는 단계다. 그런데 지문은 난이도가 낮지 않다. 단어의 난이도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단어야 어차피 개인이 외우는 문제이기 때문에 단어 문제는 일단 제쳐놓고 문법의 난이도만 본 것인데 문법의 난이도가 너무 높다. 어느 정도 난이도냐 하면 어학원에서 중급의 중간 단계 정도 되는 난이도다. 지금까지 배우고 공부한 우즈벡어를 정리한다는 기분으로 하고 있어서 지문을 번역하고 문법 설명도 간략히 적어놓고 있는데, 2권에서 적은 문법이 이미 한바닥이다. 이게 2권으로 끝도 아니고 9권까지 있다. O'zbek tili 나 Ona tili 나 총 9권 - 즉 9학년까지 배우는 과정인데 2권에서 어학원에서 중급의 중간 단계에서 배우는 문법까지 다 나온다는 것이다. O'zbek tili 2권이면 초등학교 2학년이 배우는 책이다. 영어로 치면 abcd 알파벳 배우는 애들이 현재완료, 수동태 같은 것을 배운다는 것이다.



게다가 더 문제인 것은 문법이 뒤죽박죽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쉬운 이해를 위해 영어로 설명하자면 'I go to school.' 배우는 애들 교과서에 'I had gone to school.' 같은 지문이 같이 나온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선 학교에서 이와 같은 이유로 선생님들이 우즈벡어를 가르칠 때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더욱이 우즈벡어는 교과목 가운데 매우 비중이 떨어지는 과목이다. 앞서 말한 우즈베키스탄의 언어 환경까지 같이 보면 왜 러시아인들이 우즈벡어를 못 하는지 보다 명확해진다.



먼저 우즈베키스탄에서 자기 주변의 언어 환경이 자신이 쓰는 언어에 따라 완벽히 바뀐다고 했다. 그런데 러시아인 어린이가 집에서는 당연히 러시아어를 배웠으니 말도 러시아어로 한다. 이 경우 모두가 러시아어를 하는 언어 환경이 된다. 거리에서 주워들어서 알 것이라는 전제가 통하지 않는 것이다.



학교에서 우즈벡어를 배우는 체계는 매우 좋지 않다. 교과서에 문제가 크다는 것은 가르칠 때 많은 문제를 낳는 결정적 원인이다. 왜냐하면 가르치는 사람은 교과서를 기준으로 가르치는데, 이 교과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가르치는 사람이 기준으로 잡는 것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니, 교육에 있어서 근본적 문제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우즈벡어가 중요한 과목도 아닌데다, 사회적으로도 크게 요구되는 능력도 아니다.



이런 상황이면 우즈벡어를 잘 하는 게 놀라운 거다. 여기에 이유를 계속 붙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변수와 이유들을 집어넣을 수록 이들이 우즈벡어를 못 하는 이유에 대한 추가적 설명만 될 뿐이지, 반박거리가 되지 못한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우즈벡인 학교 교사들의 질이 러시아인 학교 교사들의 질보다 많이 떨어져서 교육에 관심 있는 우즈벡인들은 자식을 러시아인 학교에 보낸다는 것이다. 당연히 그 학교에 들어간 우즈벡인 아이들은 우즈벡어가 많이 떨어진다.



논문에서 우즈베키스탄은 향후 언어 때문에 사회적 갈등과 혼란이 초래될 수 있다고 했다. 여기 와서 본 결과 그 말에 진심으로 동의한다. 실제로 젊은 우즈벡인들은 예전 세대에 비해 러시아어를 잘 구사하지 못한다. 지금대로 간다면 구 소련 세대가 사라진 후에는 러시아어의 지위가 우리나라에서 영어가 가지고 있는 지위 수준까지 떨어지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전망해 보고 있다.



이 나라에서 러시아인들도 우즈벡어를 잘 구사하려면 아마 교과서부터 다 뜯어고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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