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두 개의 장벽 (2012)

두 개의 장벽 - 20 투르크메니스탄 투르크멘바쉬

좀좀이 2012. 8. 29.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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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


11시. 경찰이 대합실 사람들에게 여권을 달라고 했어요.


"무슨 여권 검사하나?"


경찰은 단순히 여권을 검사하는 것이 아니었어요. 여권을 싹 걷어갔어요. 20명 채 안 되는 인원들이 끼리끼리 무리지어 있었는데 우리는 3등 했어요. 1, 2등 모두 그룹. 1등은 러시아 여권을 건넨 가족. 딸 한 명과 대머리 러시아 남자와 여자였어요. 2등은 투르크멘인 무리. 3등은 우리였어요.


"오늘 가기는 가나 보다!"


이 지루함. 이 추위. 이 콧물. 이것들로부터 드디어 해방인가? 이 나라는 들어올 때도 기다렸는데 나갈 때도 기다리는구나. 다시 한 번 투르크메니스탄 비자를 받기 위해 기다렸던 그 기다림들을 떠올렸어요.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아무 것도 아니야! 그 악몽 같던 나날들. 제발 비자 나오라고 빌던 시간들. 꼭두 새벽에 가서 멍때리며 앉아 있기. 비 와서 담벼락 아래로 도망가기. 한참 기다리다 들어가서 5분 만에 쫓겨나기. 정말 그 비자 받기와 반대되는 이제 비자 끝내기의 순간. 그런데 비자를 끝내는 것도 지루하게 기다려야 했어요. 아주 수미쌍관식 비자 사용이었어요.


"우리 몇 시간 기다렸지?"

"4시간 쯤 되었을 걸?"


경찰이 여권을 걷어갔기 때문에 얌전히 대합실 안에 앉아 있었어요. 참 희안한 것이 이럴 때 론니 플래닛이라도 보며 일정을 정하고 계획을 조금이라도 더 구체적으로 세우면 시간이 잘 갈텐데 그럴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어요. 그저 의미없이 론니 플래닛을 펼쳤다 접었다 할 뿐이었어요. 여행 중 찍은 사진들을 보며 지나간 시간을 하나 하나 다시 떠올려보는 것도 시간 때우기 매우 좋은 일. 그러나 이것은 귀찮아서라기 보다는 다른 이유 때문에 하지 않았어요. 배터리가 소중했거든요. 사진을 넘겨보며 배터리 전력을 소모했다가 배터리가 다 떨어져버리면 다음날 사진을 제대로 못 찍으니까요.


애들 몇 명이 뛰어다니며 노는 것 외에는 그 어떤 소리도 없었어요. 발권이 되었을 때에만 해도 떠드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쯤 되자 모두 입을 닫고 체력을 아끼고 있는 듯 했어요. 할 것이 없어서 애들이 떠들고 노는 것을 구경했어요. 이렇게 앉아서 구경하니 애들이 노는 것을 구경하는 것도 나름 재미있었어요. 아이들이 노는 것은 예측이 되면서도 안 되니까요.


12시.


드디어 경찰이 출입국 사무실에서 여권 뭉치를 들고 나왔어요.


이제 드디어 시작인가?


썩은 동태 눈깔이 되어 가던 제 눈에 실낱같은 불빛이 들어왔어요. 콧물도 멈추는 것 같았어요. 이 지루함도 끝? 드디어 배 타고 아제르바이잔 가는 거야?


경찰은 1등으로 여권을 제출한 러시아인 가족을 불렀어요. 그 사람들은 짐을 챙겨 안으로 들어갔어요. 경찰도 그들과 함께 안으로 사라졌어요. 다시 찾아온 조용함. 그리고 잠시 후.


"어이!"


우리를 보며 경찰이 들어오라고 했어요. 경찰이 우리에게 여권을 건네주었고, 우리는 경찰에게 여권을 받아 출입국 사무실로 들어갔어요.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수하물 보안검색. 모든 짐을 엑스레이 검사대에 돌리고 있었어요. 항상 그래왔듯이 카메라 가방에 주머니에 있던 모든 것을 때려박고 후다닥 엑스레이 검사대에 짐을 다 올렸어요. 지금 가장 걱정되는 것은 바로 이 엑스레이 검사였어요. 도서 반출에 문제가 있다면, 그리고 특히 팔지도 않고 비매품이라고 떡 하니 적혀 있는 교과서를 어떻게 구했냐고 추궁하며 교과서 반출 금지라고 하면 결국 공수래공수거가 되어버리는 것이었어요.


별로 내색을 안 하려고 했지만 신경이 쓰였어요.


'설마 가방 까보라고 하지는 않겠지?'


다행히 별 거 없이 넘어갔어요. 이제 본격적인 출입국 심사. 항상 그렇듯 비자 있는 페이지를 펼쳐서 건넸어요. 여기는 그냥 별 생각이 없었어요. 긴장되고 그런 거 전혀 느끼지 않았어요. 5일 비자를 꽉꽉 채워서 쓰기는 커녕 4일만 쓰고 나가는 데다 처음 정해진 대로 파라브 국경으로 들어와서 투르크멘바쉬 항구로 나가는 것이었거든요. 여기서 아슈하바트로 돌아가야 할 일은 거의 0%.


여권 하나 가지고 출입국 심사 처리하는 것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을 뿐, 문제는 전혀 없었어요. 당연히 출국시에는 돈을 내는 것도 없었어요. 입국시 받았던 입국세 납부 영수증이나 그 이전에 비자를 발급받았을 때 받은 비자비 납부 영수증을 제출하는 것도 없었어요. 투르크메니스탄 사람들 말이 정확히 맞았어요. 영수증은 그냥 영수증이고, 돈을 제대로 지불해서 그 결과물일 뿐 아무 데도 필요하지 않았어요.


여권에 출국 도장을 받고 짐을 챙겨 출입국 사무실에서 나왔어요. 이제 정말 끝이었어요. 항구라는 특수성 때문에 출국심사가 끝났다는 것만으로 투르크메니스탄에서 벗어났음을 느낄 수는 없었어요. 그러나 남은 것은 이제 아제르바이잔으로 가는 것.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어요. 배표도 샀고, 배는 앞에 있었어요.


군인이 마지막으로 우리의 여권을 확인하더니 배로 가라고 했어요.


배로 가자 자동차를 싣는 입구에서 사람들이 노닥거리고 있었어요. 보통 배를 이렇게 탔던가? 제 기억에 자동차 싣는 입구로 태웠던 적은 없었어요. 그래서 여기로 가는 거 맞나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입구에서 노닥거리던 사람들이 우리에게 바쿠 가냐고 물어보았어요. 그래서 바쿠 간다고 했어요.


"표."

"여기요."

"여권."

"여기요."


매표소에서 끊은 표와 여권을 달라고 해서 표와 여권을 건네주었어요. 이번에는 90달러를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90달러를 건넸어요. 여권, 표, 돈을 받은 선원이 우리에게 따라오라고 했어요. 선원을 따라갔는데, 선원이 어떤 여직원을 부르더니 방에 데려다주라고 했어요.


"90달러는 기본 방이고, 여기에 돈을 더 내면 더 좋은 방 갈 수 있어요."

"그냥 기본 방으로 갈께요."


90달러까지 나올 거라고 예상은 못 했어요. 아마 50달러 정도 나오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90달러가 나오자 이거는 꽤 세게 느껴졌어요.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국제선인데 그렇게까지 비싼 것은 또 아니기도 해요.




90달러짜리 방에 들어간다고 하자 이 방에 들어가라고 했어요.


"이거 좋다고 해야 하나, 나쁘다고 해야 하나?"



생긴 것은 정말 허름하게 생겼어요. 그래도 짐을 쌓아 놓을 공간은 그럭저럭 있었어요. 만약 다른 2명이 더 들어오지 않는다면요. 다른 2명이 더 들어온다면 좁을 수도 있는 크기였어요. 침대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이 방은 원래 4인실이에요.



매우 흥미롭고 이 방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 장본인. 바로 세면대였어요. 위에 달린 밸브를 열어서 사용하는 세면대였어요. 온수도 잘 나왔고 냉수도 잘 나왔어요. 이 정도면 간단한 세수 정도는 그냥 방에서 해도 되었어요. 무조건 공용 세면실을 쓰라고 하지 않고 방에 세면대가 갖추어져 있다니 이 정도면 90달러의 가치는 하는 건가?


여직원은 흡연은 당연히 자유이며, 창밖으로 꽁초를 버릴 때 불을 꺼서 버리면 된다고 담배와 관련된 규정을 알려주었어요. 화장실과 샤워실은 공용이라고 했어요. 이게 딸린 방도 있는데 그건 더 비싸다고 했어요. 그래서 여기에서 그냥 자겠다고 하자 열쇠를 주고 갔어요.


이제 투르크메니스탄 경찰과 군인과는 안녕이었어요. 사실상 투르크메니스탄과는 끝난 것이었어요. 어느 침대를 쓸까 살펴보았어요. 2층은 깨끗한데 1층은 정말로 지저분했어요. 톱밥과 먼지, 모래 투성였어요. 아무리 시트를 깐다고 해도 도저히 잘 수 있을 거 같지 않았어요. 자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옷에 뭍고 옷 속에 들어가고 하면 골치아프니까요. 빨래를 안 만들 수 있다면 안 만드는 것이 즐거운 여행을 위한 방법. 그래서 2층에서 자기로 했어요. 친구는 2층에서 자는 것이 싫다며 1층에서 자겠다고 했어요.


"나가자!"


대충 어디에서 잘 지를 표시하기 위해 가방을 침대에 던져놓고 갑판으로 나갔어요. 배를 탔을 때 묘미는 누가 뭐라고 해도 갑판에서 전망을 바라보는 것이죠! 갑판에서 보는 풍경 없는 배 타기는 물 없이 밥 짓기.



허름하고 부서진 것도 많았지만 갑판에서 음식을 먹으며 놀 수 있게 되어 있었어요. 펄럭이는 아제르바이잔 국기를 보니 투르크메니스탄을 벗어났다는 사실이 더욱 와닿았어요. 이제 배에 탔으니 투르크메니스탄 일정은 정말로 모든 게 다 끝난 거에요.




우리 옆의 배 이름은 나흐치반 Naxçivan 호였어요.




이 국기 정말 그리울 거야. 만약 기억보정이 일어난다면 말이야. 사람들은 과거를 아름답게 생각한다고 하지. 인간의 두뇌가 과거를 아름답게 조금씩 바꾸어가기 때문이래. 그래서 정말 힘들고 괴로웠던 것도 뒤돌아서서 보면 미소가 나오고 웃음이 나올 수 있는 거라 하더군. 그런데 어쩌지? 나는 그 능력이 많이 떨어지는데...성질이 더러운 건지 기억력이 좋은 건지 힘들고 괴로웠던 것은 그 고통이 그대로 다 기억나서 뒤돌아보며 웃음이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말이야. 이 나라, 들어오기도 힘들었고 나가기도 힘들었어. 그 짓 다시 생각해도 웃음은 안 나와. 그런데 만약 기회가 된다면 다시 오고는 싶을 거야. 물론 또 그 대사관 가서 새벽부터 기다리는 짓을 몇 번씩 하라고 한다면 안 가고 싶겠지만. 황량한 국가에서 너의 초록색이 빛나고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었어. 정말 너 - 투르크메니스탄 국기가 황량한 땅에서 펄럭이며 홀로 초록빛을 뿜어내던 그 장면만큼은 그리울 거야.


그리고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어요.


갑판 위에서 투르크멘바쉬 전망 볼 수 있어!





여기도 하얀 대리석을 바른 건물은 존재하는구나.



저 건물의 색상과 디자인이 너무 낯익고 친숙했어요.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도 비슷한 건물이 있거든요. 흙빛 속에서 딱 저 건물이 빛나고 있었어요. 여기를 저런 건물로 도배해 놓으면 매우 웃기겠는데? 무슨 공원이나 도박단지처럼 보이지 않을까? 제가 이 도시를 디자인해야 한다고 한다면 그렇게 하지는 않을 거에요. 하지만 이 나라는 몰라요. 아니, 타지키스탄에서부터 여기까지 하얀 건물을 너무나 좋아해서 돈만 있으면 모든 건물을 다 하얗게 대리석으로 발라버릴 수도 있어요. 타지키스탄은 솔직히 확신하기에는 긴가 민가 하는 부분이 있지만, 우즈베키스탄은 타슈켄트 나보이 거리를 보면 거의 확실해요. 우즈베키스탄도 돈만 넘치면 아마 하얀 대리석 치덕치덕 건물들을 많이 세우고 그렇게 개보수할 거에요.




자리를 옮기고 시선을 돌렸어요.



베르디무하메도프 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 사진이 걸려 있는 종이 상자처럼 생긴 건물이 바로 항구에요. 사진이 걸린 쪽 건물이 매표소가 있는 건물이에요.



투르크메니스탄에서 펄럭이는 아제르바이잔 국기. 저 국기가 단순한 국기 이상으로 느껴졌어요. 그 결정적 이유는


여기서 보이는 남자들 다 자유롭게 담배를 뻑뻑 피워대고 있어.


그동안 못 태워 밀린 담배를 다 태우려는 것인지 정말 열심히 태워대었어요. 학생은 방학 전날 밀린 방학 숙제를 열심히 하고, 아제르바이잔 배에서는 밀린 담배를 열심히 태웁니다. 정말 딱 그랬어요. 보이는 남자는 죄다 담배를 열심히 태우고 있었어요. 물론 투르크메니스탄 경찰과 군인이 안 보이는 쪽에서요. 해바라기씨도, 담배도 자유. 투르크메니스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자유.


그리고 예전에 갔던 나라로 가는 것을 의미했어요. 아제르바이잔은 작년 - 즉 2011년에 다녀왔어요. 그 나라로 다시 가는 길이었어요. 스페인에서 타지키스탄까지의, 유럽에서 아시아까지의 제 여행이 다시 끊어지는 구간 없이 이어지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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