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기적과 저주2019. 1. 23. 11:48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3장 19화


 아다비아와의 공부가 끝났다. 오늘따라 아다비아가 별로 성질을 내지 않았다. 예습을 한 자도 하지 못해서 계속 버벅거렸는데 웬일인지 화를 하나도 내지 않았다. 내가 버벅거릴 때마다 그저 한숨만 쉴 뿐이다. 얘가 오늘은 무슨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나? 예전 같았으면 마구 화내고 뭐라고 했을 텐데. 아다비아가 내가 버벅거리는 모습을 보고도 조용히 있는 게 이상하다. 오히려 오늘은 너무 친절했어. 예전 서점에 찾아와서 내 공부를 알려주던 때처럼 말이야. 이거 좋은 거 맞겠지? 마음의 안정을 조금 더 찾았다고 받아들여도 될까?


 창밖을 바라보았다. 날이 매우 좋다. 햇볕이 살짝 따갑다고 느낄 정도로 강하게 쏟아지고 있다. 멀리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린다. 잘 들리지는 않지만 아마 평범한 일상이겠지. 괴로운 이야기는 아닐 거야.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거리에서 아이들이 재잘거리고 꺅꺅거리며 뛰어노는 소리. 햇볕을 쬐며 낮잠 한숨 자도 꽤 즐거울 날이야. 이 책을 베개 삼아서 햇볕 쬐며 드러누워 푹 자고 일어나도 좋겠다. 이왕이면 강가에서 강물이 흐르는 소리를 들으면서 말이야.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잎이 사그락 소리를 내며 바르르 떨리는 소리가 나를 깊은 잠으로 빠져들게 만들겠지. 그러고 보니 아다비아와 이런 추억을 만든 적은 한 번도 없구나. 아다비아 뿐만 아니라 켈라자야하고도 말이야. 둘과 조용하고 평화로운 시간을 보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켈라자야야 그럴 만도 하지. 여기가 시끄러워지고 난 후에 만났으니까. 그런데 아다비아와는 시끄러워지기 전부터 알고 지냈지만 그랬던 적이 없다.


 그때는 그럴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 아다비아가 대체 왜 내게 공부를 알려주는지, 그 자체가 궁금했으니까. 게다가 그때는 지금처럼 아다비아와 사귀고 있지도 않았잖아. 아다비아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당시 나는 아다비아와 그렇게 많이 친하다고 느끼지는 못했어. 공부를 알려줘서 고맙기는 하지만, 그 전에 아다비아가 내뱉었던 말들 때문에 아다비아의 마음을 제대로 읽을 수 없었으니까. 아다비아가 그때 왜 내 공부를 도와줬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지금은 아다비아와 사귀고 있고 아다비아를 좋아해. 하지만 아다비아가 나에게 사귀자고 한 것이 진짜 나를 좋아해서 사귀자고 한 건지, 아니면 자기가 알고 있던 남자 중 가장 못난 인간이 나라서 나한테 사귀자고 한 건지 여전히 의문이다.


 아무렴 어때? 지금은 아다비아와 사귀고 있잖아. 비록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떠올려보면 한숨만 쏟아져 나오지만 아다비아를 좋아하고 있어. 그거면 돼. 앞으로 어떻게든 되겠지. 이 지긋지긋한 상황이 영원히 이어질 것도 아니잖아. 언젠가는 정리되겠지. 그때가 되면 아다비아를 먹여살릴 방법도 찾을 수 있을 거야.


 "오늘은 왜 화 안 내?"

 "응?"


 아다비아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다비아는 지금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전혀 모를 거다. 내가 왜 이런 질문을 던졌는지 알기 위해 예전보다 더 힘들게 머리를 굴릴 거다. 나는 그저 오늘 아다비아가 평소와 달리 나를 보고 화내지 않아 신기해서 물어본 것 뿐이다. 그 이상의 의미는 전혀 없다.


 "그냥. 오늘은 갑자기 친절하게 알려줘서."

 "내가 화 안 내는 게 신기해?"

 "아니. 그냥 예전 네가 내 공부 도와줄 때 떠올라서."


 아다비아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다. 내가 말실수했나? 그때가 좋았지. 아다비아가 말만 예쁘게 했다면 우리 전공 모든 남학생이 아다비아를 좋아했을 거다. 그놈의 입이 문제였지. 꼭 사람 성질 돋구는 말만 골라서 해대었다. 문제는 아다비아가 그게 왜 문제였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거다. 아마 지금도 여전히 모르겠지. 아다비아가 그때는 앞도 잘 볼 수 있었고, 얼굴도 예뻤고, 성적도 좋은 모범생이었다. 입만 열지 않으면 누가 봐도 하늘은 너무 불공평하다고 느낄 정도였지. 아다비아도 그때가 그립고, 뮈젤로 가기로 한 그 선택에 대해 여전히 후회하고 있겠지?


 "너는 그때보다 더 멍청해진 거 같아."

 "뭐?"

 "그래도 그때는 열심히 하기라도 했지."


 웃음이 나오는 걸 간신히 찾았다. 저 입은 여전하구만. 모처럼 과거 그 시간으로 돌아간 기분이다. 그때는 나보고 한심하다고 하지는 않았다. 아마 그때도 속터지는 거 엄청 참았을 거야. 지금은 그걸 바로바로 터뜨리는 거구.


 "지금도 열심히 하고 있잖아."

 "열심히? 얼굴에 뚫린 구멍이 입이라고 아무 소리나 쏟아내는 거야?"


 아다비아가 내쪽으로 손을 뻗었다. 나를 더듬더니 내 귀를 찾아내 꽉 꼬집었다.


 "야, 아파!"

 "야, 너 다시 말해봐. 뭐? 지금도 열심히? 그게 말이라고 하는 소리야?"

 "지금도 그때만큼 열심히 하고 있다구! 야, 놔! 진짜 아파!"

 "열심히? 너 머리 속이 다 썩어 문드러진 거니? 정신 나가버린 거야? 뭐? 열심히?"

 "야, 진짜 놓으라니까! 진짜 아파!"

 "그러면 지금 내가 간지러우라고 귀 잡아당기는 줄 알아?"

 "야, 놔!"


 아다비아 손을 억지로 뜯어내었다. 아다비아는 다시 내 귀를 잡으려 들었다. 아다비아 양 손을 꽉 잡았다. 이건 보이지가 않으니 내가 진짜 아파하는지 아닌지도 분간 못하겠지. 그렇게 귀 꼬집으면 진짜 아프다구!


 "나 먹여살리겠다고 했잖아. 뭘로 먹여살릴 건데?"

 "방법 찾고 있다니까!"

 "방법은 무슨...나 버릴 거잖아!"

 "내가 너를 왜 버려!"

 "거짓말하지 마!"

 "진짜야!"


 아다비아를 꼭 안았다. 아다비아가 가만히 있는다. 그래. 가만히 있어. 너는 그냥 마음의 안정만 찾으면 돼. 나는 나대로 계속 길을 찾고 있다구. 네가 안정을 찾아야 나도 길을 찾을 거 아니야. 길을 찾아 나서려 해도 네가 또 그때처럼 울부짖고 난리칠 거 같아서 자꾸 너만 바라보게 된단 말이야. 오늘은 아다비아가 울지 않는다. 진짜 뭐 좋은 일이라도 있나? 예전 같았으면 이런 상황에서 울부짖었을 텐데. 아다비아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었다. 아다비아 숨소리가 들린다. 전혀 거칠지 않다. 부드러운 숨소리. 지금 이 방안으로 찾아들어오고 있는 빛과 소리만큼 평화롭다. 오늘은 빈 손으로 오지 않고 아까 과자 사와서 몇 개 먹여줘서 그런 건가? 과자의 힘이야? 아니야, 아다비아가 전보다 많이 좋아졌어. 그런 거야. 어제 무슨 꿈을 꾸었든, 어둠 속에서 길고 긴 생각 끝에 어떤 깨달음을 얻었든 간에 마음의 안정을 조금 더 많이 찾은 게 분명해.


 "아다비아, 우리 잠깐 같이 산책할래?"

 "산책?"

 "응. 너 밖에 안 나가본 지 매우 오래되지 않았어?"

 "오래 되었어. 아마 그럴 거야."

 "그러니까 오늘은 우리 같이 잠깐 밖에 나가자."


 아다비아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오늘 햇볕 매우 좋아. 거리도 모처럼 평화롭구. 멀리 갈 것 없이 루즈카 집 주변 한 바퀴만 돌아보고 오자."

 "싫어!"


 아다비아는 고개를 세게 저었다.


 "그냥 이렇게 있고 싶어!"


 아다비아가 나를 더 세게 꽉 끌어안았다. 내 가슴팍으로 고개를 파뭍었다. 멀리 가자는 것도 아니고 그저 루즈카 집 주변 가볍게 걸어보자는 거잖아. 앞이 안 보인다고 해도 햇볕 쬐며 걸으면 기분이 조금 더 나아질 거다. 이 방에 갇혀 있은 지도 꽤 오래 되었잖아. 아무리 앞이 안 보인다 하더라도 가끔은 나가서 햇볕 쬐야지. 피부로 햇볕을 느끼면 그것만으로도 조금 더 기분이 좋아질 텐데.


 "왜 싫은데?"

 "싫어! 나 더럽단 말이야!"

 "네가? 네가 뭐가 더러워? 너 지금 엄청 깨끗해!"


 아다비아가 더럽다고? 무슨 말이야? 나보다 훨씬 더 깨끗한데. 루즈카가 매일 씻겨주는지 아다비아는 항상 깨끗하다. 옷도 항상 깔끔하구. 그런데 더럽다니? 더러운 건 나겠지. 당장 오늘도 세수하고 머리만 감았는데. 옷도 어제 입었던 옷 그대로다. 빨래하기 귀찮아서 옷도 안 갈아입었다. 지금 나보다 네가 훨씬 더 깨끗한데 뭐가 더럽다는 거야? 누가 봐도 너는 깨끗해. 이 거리 사람들 대부분보다 네가 더 깨끗할 걸?


 "아냐. 나 더러워. 너도 나 더럽다고 생각하고 있잖아!"

 "아니라니까!"

 "뭐가 아니야?"


 아다비아가 나를 밀쳐내었다. 또 그 소리인가. 그건 더러운 게 아니라 그냥 잠깐 잘못한 거 뿐이잖아.


 "아니라구! 너 하나도 안 더러워!"

 "아니야. 나는 이미 더러워졌어. 그건 씻는다고 지울 수 있는 게 아니야!"

 "아다비아, 너 진짜 안 더러워. 뭐가 그리 더럽다는 건데?"

 "나는 더럽단 말이야!"

 "아니라고! 제발! 너 하나도 안 더러워. 뭐가 더럽다는 거야?"

 "나는..."


 알아. 네가 뭐 때문에 더럽다고 하는지 말이야. 그게 쉽게 지워질 건 아니지. 쿠룬나스였으니까. 사람도 잡아먹어봤겠지.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잖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지금 여기 몇이나 있어? 기껏해야 나랑 켈라자야, 라키사에 이고, 루즈카, 블랑쉬블르 정도 아니야? 거리에 있는 그 누구도 네가 과거에 뭐였는지 전혀 몰라. 그들은 그저 네 깔끔한 옷만 볼 뿐이라구. 네가 앞을 왜 못 보는지에 대해서조차 전혀 관심갖지 않아! 설령 누군가 네가 왜 장님이 되었냐고 물어본다 한들, 네가 적당히 저주술사한테 공격받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면 모두가 고개 끄덕거려. 그게 지금 상황이라구!


 "아다비아, 그 누구도 너한테 더럽다고 하지 않아."

 "거짓말! 다 알아!"

 "네가 뭐였는지, 뭐인지 그 누구도 신경 안 쓴다구! 너는 그냥 너만의 행복 찾으면 돼."

 "아니야! 모두 다 알아! 내가 얼마나 더럽고 끔찍한 년인지 다 알고 있단 말이야!"

 "아니라구! 네가 네 입으로 떠들어대지만 않으면 다 몰라! 너 한 명한테 신경 쓰는 인간 여기 몇 없어! 다 자기 살기 바쁘단 말이야!"

 "그만해! 나 안 나가! 나는 더럽단 말이야!"


 아다비아가 벽에 기대어 몸을 있는 힘껏 움츠렸다. 아다비아가 눈이라도 보인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아다비아를 잡아들어서라도 밖으로 나갔을 거다. 그리고 아다비아에게 이제 거리 한 번 보라고 말했겠지. 아다비아가 직접 거리를 보면 알게 될 거다. 그 누구도 아다비아 그 한 명 따위에는 신경 전혀 안 쓴다. 나와 켈라자야, 루즈카, 이고, 블랑쉬블르 정도나 신경쓰지. 치롤라는 조금 신경쓰려나? 거기에 감비르 정도? 지금 여기 사람들, 다른 사람들한테 신경쓸 만큼 여유롭지 않다. 일상은 지속되고 있지만 그 속에 죽음의 위협도 계속 존재하고 있다. 누가 죽든 자기와 관련없는 사람이면 신경도 안 쓴다. 살해당하는 사람이 한둘도 아니고, 살인 사건이 매일 몇 건씩 터지고 있으니까. 얘가 앞만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앞만 볼 수 있다면 이런 건 정말 해결하는 데에 몇 분 걸리지도 않을 텐데.


 "알았어. 네가 정 나가기 싫다면..."

 "나는 안 나가!"


 아다비아에게 살며시 다가가 아다비아 손을 잡았다. 아다비아가 나를 껴안았다.


 "우리 계속 이렇게 있자. 나 이렇게 있고 싶어. 나 진짜 아무 것도 필요 없어. 그냥 너랑 계속 이렇게만 있고 싶어."

 "알았어."

 "그러니까 절대 나 버리면 안 돼? 나 더럽다고 내던지면 안 돼?"

 "너 절대 안 버린다니까! 애인을 왜 버려?"

 "애인 버리는 남자 많잖아!"

 "너 절대 안 버려! 너 진짜 좋아한단 말이야!"

 "그러니까 제발...나 버리지 마. 알았지?"

 "안 버려. 진짜 너 안 버린다구."


 아다비아는 말없이 계속 나를 꽉 껴안고 있다. 언제쯤 아다비아가 자기가 더럽다고 느끼지 않을까?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답답하다. 대체 뮈젤에서 어떤 일이 있었던 거야? 왜 아다비아는 쿠룬나스가 되어서 돌아온 거야?


 "인간 사회의 진리도 정말 재미있어. 예를 들면 우리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건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하잖아? 그런데 알고 보면 우리는 매일 사람을 잡아먹고 있는 거야!"


 뜨거워 죽을 것 같던 작년 여름, 중앙학문연구소로 들어가 한동안 볼 수 없었던 아다비아가 서점으로 돌아와 나와 라키사에게 했던 말. 알고 보면 우리는 매일 사람을 잡아먹고 있어. 그 말대로라면 너는 너 자신을 더럽다고 여길 이유가 하나도 없잖아. 무슨 일을 겪은 거야? 그때는 그렇게 확신에 차서 우리에게 그런 말을 가르치려 하고선 이제 와서 무슨 생각의 변화가 일어나서 너 자신을 더럽다고 하는 거냐구! 직접 물어보고 싶다. 그러나 그러면 안 되겠지. 그건 정말 나중에 아다비아와 결혼한 이후에나 물어볼 수 있으려나? 아니면 아다비아가 기적적으로 두 눈을 뜨게 된 다음에야? 아다비아가 뮈젤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정말 궁금하다. 그렇지만 이건 아다비아가 스스로 말해주지 않는 한 영원히 알 길이 없겠지. 루즈카와 블랑쉬블르는 뭔가 알고 있을 건가? 만약 그 둘이 뭔가 알고 있다면, 이고는 그 둘에게 뭔가 전해들어서 알고 있는 게 있지 않을까?



 루즈카 집에서 나왔다. 이대로 서점으로 돌아갈까? 기분이 묘하다. 지금 기분이 나쁜지 좋은지조차 분간되지 않는다. 아다비아는 앞으로 다시 나아가고 있는 게 맞을까? 오히려 뒤로 내빼고 있는 거 아닐까? 쿠룬나스가 된 건 괴로운 기억이야. 아무리 그때 나와 라키사에게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것이 이상할 거 없다고 큰 소리쳤지만 그건 맨정신으로 감당할 것이 아니니까. 아다비아도 말로 그렇게 떠들 때에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 몰랐겠지. 그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 아는 놈이 오히려 이상한 거니까. 평생 그런 일을 겪어볼 인간이 어디 있어? 마딜 전쟁때도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은 없었을 건데. 오늘 부드러운 아다비아의 모습. 그건 진짜 좋아지는 모습일까? 아니면 더 나빠져서 화낼 힘조차 잃어버린 걸까? 애매하다. 아까 아다비아와 같이 있었을 때에는 그저 그게 좋은 거라고만 여겼다. 그러나 루즈카 집에 나와 이렇게 바깥 공기를 온몸으로 맞으니 불길한 생각이 떠오른다. 오히려 불길한 생각이 현실을 똑바로 보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안 돼. 아다비아는 좋아지고 있어. 좋아지고 있어야만 하고.


 '길이나 조금 걸을까?'


 머리 속이 복잡하다. 평화로운 서점으로 돌아가도 머리 속 혼돈은 그대로겠지. 아니, 오히려 더 심해질 거야. 너무나 평화로워서 다른 데에 신경쓸 필요가 없거든. 오늘도 호즈라는 자기 할 것 하고 있을 거고, 켈라자야는 계산대 뒤에 앉아 책을 읽거나 멍하니 앉아 있겠지. 이고는 뭔가 하고 있을 거구. 항상 똑같은 모습. 그 어떤 것도 내 관심을 끌지 못해. 잔잔한 수면 같은 분위기 속에서 나는 내 머리 속 혼돈 속으로 혼자 빨려들어갈 거야.


 어디로 갈까? 서점에 늦게 가도 이고가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별 상관 없다. 어차피 아다비아 보러 간다고 했으니 조금 늦는다고 해서 이고가 뭐라고 하지 않겠지. 이렇게 돌아다니는 일 자체가 없으니까 걱정 조금 하긴 할 건가? 그렇지만 아다비아 보러 가서 돌아오는 시간이 항상 일정했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들쭉날쭉했지. 날이 저물기 전에만 돌아가면 별 일 없을 거다. 시간은 많아. 어디든 가고 싶은 곳으로 가면 돼. 조금이라도 으슥한 곳은 피해서 큰 길로만 걷는다면 별 일 없을 거야. 요즘은 백주대낮에 큰 사건이 터지는 일은 별로 없으니까. 큰 길을 따라 어디로 갈까?


 '차라클라야나 보러 갈까?'


 차라클라야는 지금 한가하겠지? 점심 시간은 지났잖아. 이 시각에 식당에서 밥 먹는 사람은 없겠지. 그냥 놀러가도 될까? 차 한 주전자 시켜놓고 앉아 있다가 와도 될 거 같은데. 차만 시키면 실례일 건가? 하지만 거기 차만도 팔잖아. 사람도 없는데 차 한 주전자 마시고 오는 게 뭐가 문제야. 혼자 차 한 잔 마시고 와야겠다. 차라클라야가 한가하다면 더 좋을 텐데. 만약 차라클라야가 한가하면 어떻게 할까? 같이 공부하자고 할까?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책은 차라클라야한테 하나도 도움 안 될 건데. 상관없잖아. 어차피 차라클라야는 지금 글자 외우고 있을 텐데 글자 외우는 거나 조금 도와주면 되지. 차라클라야가 한가했으면 좋겠다. 글자 외우는 거 도와주면서 이런저런 잡담이나 나누다 오면 기분 좀 나아질 거 같은데.


 차라클라야가 있는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리를 계속 둘러보았다. 이렇게 평화로워도 되는 걸까? 간간이 사람들이 잡담 나누는 소리가 들린다. 그 중에는 어제 어디에서 어떤 사람이 어떻게 살해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어젯밤에는 시장쪽에서 거지 몇 명이 죽었다고 한다. 온몸이 잘게 토막나서 몇 명이 죽었는지도 모른댄다. '대체 어떤 저주술이길래 사람을 그렇게 썰어버릴 수 있을까'라고 이야기하며 혀를 쯧쯔 찬다. 그러나 안타까워하는 말투가 아니다. 오히려 잘 죽여주었다는 듯 밝은 소리로 이야기한다. 이 도시에서 시장에 있는 거지들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경찰이 없으면 무슨 짓을 할 지 모르는 놈들이니까. 경찰이 있으니 얌전히 벽에 기대어 사람들이 돈을 주기만 기다리고 있는 거지, 경찰이 없다면 온갖 나쁜 짓 다 할 놈들이다. 행인에게 달라붙어 주머니를 뒤질 거고, 여자를 강제로 끌고가 범하겠지. 아예 없었던 일도 아니니까. 솔직히 나도 거지들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전혀 슬프거나 안타깝지 않다. 그 미친 저주술사가 나한테만 안 달려들면 돼. 거지놈들은 좀 많이 죽여줘도 괜찮아. 시장 깨끗해지고 거리 안전해지고 얼마나 좋아. 바하르 일거리가 미세하게나마 조금 줄었겠네. 거지들 몇 놈 죽어버려서. 그래, 그런 쓰레기들만 잡아 죽이라구. 엉뚱한 사람들 괴롭히지 말고. 이왕이면 게첸 같은 놈도 잡아죽이지. 그놈은 다른 쪽으로 쓰레기에 기생충이잖아. 맨날 힘들다고 징징거리면서 거기서 주는 돈 빨아먹느라 그만둘 생각은 안 하지. 그러면서 자기정당화하려고 자기가 착취당하네 뭐하네 헛소리만 해. 라키사한테 계속 그러고 있겠지? 라키사도 참 속 좋아. 나는 그거 도저히 못 받아주겠던데.


 그래도 저주술사가 정신 조금 차렸나봐. 일반인 죽었다는 소리는 별로 안 들리니까. 그래서 이제 살인 사건 이야기 듣는 것에 아무렇지 않은 건가? 그 일들이 나와 내 주변에 일어나는 일로 느껴지지 않아서. 나는 거지도 아니고 저주술사도 아니니까. 이런 일이 신경쓰이는 건 솔직히 켈라자야 때문이다. 켈라자야만 아니라면 정말로 나와 먼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어. 일단 나는 최소한 거지는 아니니까. 내가 저주술을 쓸 줄 아는 것도 아니구. 그냥 그들만의 싸움이잖아. 모르지, 그 거지들 중 어떤 거지는 진짜 저주술사여서 살해당한 걸 지도. 어쨌든 켈라자야만 아니라면 나와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사람들의 이야기야. 켈라자야가 자꾸 밤새도록 거리를 돌아다니니 이런 소리 들을 때마다 신경이 예민해지는 거다. 오늘은 켈라자야한테 서점에서 자고 가라고 할까? 여름이니 딱히 이불 같은 거 안 덮고 자도 되구. 날 쌀쌀해지면 제대로 된 이불도 하나 사야겠어. 켈라자야한테 밤에 돌아다니지 말고 그거 덮고 서점 안에서 자라고 하게.



 식당에 도착했다. 당연히 손님이 아무도 없다. 이 시각에 손님이 있을 리 없지. 점심 시간이 지난 지 꽤 되었으니까. 곱슬기가 있는 긴 머리. 차라클라야가 식당 구석 의자에 앉아 있다가 내가 들어오자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본다. 차라클라야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차라클라야도 활짝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들며 일어난다. 지금 어떻게 저렇게 밝게 웃을 수 있을까? 나는 차라클라야에게 인사하기 위해 일부러 웃음을 지은 건데 차라클라야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활짝 웃는다. 꿈을 향해 꿋꿋히 걸어가면 아무리 힘들어도 저렇게 밝게 웃을 수 있는 걸까? 자리를 잡고 앉았다. 차라클라야가 내게 다가왔다.


 "주문하시겠어요?"

 "예. 차 한 주전자 주세요."

 "금방 가져다 드릴께요."


 차라클라야가 주방 안으로 달려갔다. 이 좁은 식당에서 달릴 게 뭐 있다고. 차 한 주전자 끓여서 갖고 나오는 게 촌각을 다투는 급한 일도 아니구. 식당 안을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텅 빈 자리들. 이따 저녁 먹을 때가 되면 몇 자리 찰까?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질 좋은 차가 나올 리는 없지. 서점 앞 찻집에서 나오는 차만큼만 되는 차가 나와도 다행이다. 이런 곳은 식당이지 찻집이 아니라 질이 좋은 차를 쓰지 않으니까. 맹물 마시면 맛 없어서 시키는 차잖아. 물 끓는 소리가 들린다. 잠시 후, 차라클라야가 찻잔과 찻주전자가 올라가 있는 쟁반을 들고 나왔다. 내 탁자에 차와 찻주전자를 놓아준다. 음식 냄새. 이것은 차라클라야 몸에서 나는 냄새일까, 식당 여기저기 찌든 냄새일까? 아까 아다비아를 껴안았을 때 느꼈던 비누 냄새와 전혀 다른 냄새. 여기에서 일하기 때문에 몸에 밸 수 밖에 없는 냄새.


 "지금 많이 바빠요?"

 "아니요. 지금은 매우 한가해요."

 "뭐하고 있었어요?"

 "전에 타슈갈과 켈라자야가 가르쳐준 글자들 하나씩 떠올려보고 있었어요."

 "글자 다 외웠나요?"

 "예..."


 차라클라야가 말끝을 흐렸다. 아직 다 못 외웠나 보네. 글자만 집중해서 외울 시간이 많지 않을 테니까. 그새 글자 여러 개 잊어버렸을 거다. 일하면서 공부하는 게 뭐 그렇지. 온전히 공부에 집중할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일 마치면 피곤해서 글자가 눈에 들어오나? 다 여기저기 사방팔방 도망가버리지. 틈이 나면 쉬고 싶은 생각만 들구. 기껏 마음 먹고 글자를 보려고 해도 일 생각도 나고 다른 잡생각도 나서 집중이 잘 안 된다. 나도 잘 알지. 나도 일하면서 대학교 다녔으니까. 물론 서점 일 때문에 공부를 못해서 아드라스어를 잘 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건 거의 완벽에 가까운 거짓말이지만 말이다.


 "우리 같이 다시 하나씩 외워볼까요?"

 "아니에요."

 "예? 왜요?"


 차라클라야에게 같이 글자를 외워보지 않겠냐고 하자 차라클라야가 두 손을 쭉 뻗어 흔들었다. 뭘 저렇게 완강히 거부해? 말한 내가 민망하잖아.


 "타슈갈은 지금 차 마시러 왔잖아요. 제가 괜히 귀찮게 하는 거라서요."

 "아니에요. 어차피 저 혼자 왔잖아요. 혼자 차 마셔봐야 심심한데요. 여기 앉아요. 같이 공부해요."


 의자를 빼서 의자 바닥을 가볍게 손으로 탁탁 쳤다. 차라클라야가 얼굴을 붉히며 자리에 앉았다.


 "우리 처음부터 다시 글자 외워볼까요?"

 "예...저 많이 잊어버렸어요."

 "괜찮아요. 누구나 다 그래요. 계속 하다보면 좋아져요."


 아, 종이가 없구나! 밖에 나가서 사오기에는 조금 먼데. 그냥 탁자에 손가락으로 써야겠다. 탁자에 글자를 하나 쓰고 발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나서 차라클라야에게도 똑같이 그 글자를 소리내어 발음하며 손가락으로 써보라고 시켰다. 전에 켈라자야가 차라클라야에게 알려준 방법대로 계속 처음부터 새로운 글자까지 반복해간다. 확실히 전에 외웠던 글자라 그런지 차라클라야가 그때보다 훨씬 빨리 잘 외운다. 기억하고 있는 글자도 여럿이었다. 거의 다 기억하고 있었다. 순서대로 쓸 때 몇 개 잊어버린 게 있었고, 아직은 곰곰히 생각해야 글자를 쓰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매일 틈날 때마다 글자를 외우면 금방 다 외울 것 같다.


 글자를 한 번 쭉 다 외웠다.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차라클라야의 태도와 달리 실제로는 다 알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잘 기억하고 있는데요?"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외웠어요."

 "글자 외우느라 힘들지 않았어요?"

 "재미있었어요. 신기하기도 하구요. 이 글자로 마딜어도 쓸 수 있죠?"

 "쓰려고 하면 쓸 수는 있어요. 그런데 마딜어 글자는 따로 있어요."

 "아...그렇군요."

 "그런데 마딜어 글자는 공부할 때 별 도움 안 되요. 공부할 때 보는 책은 거의 다 아드라스어와 셀베티아어로 되어 있거든요."

 "마딜어 글자도 배우고 싶어요."

 "아드라스어 글자 완벽히 외우면 그때 알려줄께요. 아드라스어도 공부해야 하잖아요."

 "마딜어 글자도 알려줄 수 있어요?"

 "예, 당연하죠."


 마딜어 글자 알려주는 거야 쉽지. 그건 내가 아주 어렸을 적 배워서 지금까지 쓰고 있는 글자니까. 문제는 그게 대학교 들어오면서 실상 전혀 쓸모 없어져 버렸다는 거다. 무조건 아드라스어나 셀베티아어로 된 책으로 수업하니까. 그러지 않는 데라고는 저주술 전공 뿐일 거다. 차라클라야한테는 마딜어 글자가 필요할까? 아마 지금은 필요할 거다. 뭐라도 적어야 하니까. 하지만 공부를 해 갈수록 마딜어 글자가 점점 더 필요없게 되어갈 거다. 그게 이 거지 같은 마딜땅의 현실이니까. 마딜어 글자 따위 사실 몰라도 돼. 마딜어 소리나는 대로 아드라스어 글자로 적어도 상관 없으니까.


 "타슈갈은 정말 친절한 거 같아요."

 "예? 제가요?"

 "예. 쉬러 와서 저한테 또 공부 알려주잖아요."

 "뭐 힘들거나 어려운 것도 아닌데요. 그냥 아는 거 알려주는 것 뿐인 걸요."

 "그래도요. 타슈갈도 이래저래 피곤할 거 같은데요."


 피곤한 건 맞다. 일 때문에 힘든 건 아니다. 그냥 내 주변 모든 게 나를 힘들고 지치게 한다. 아다비아는 영원히 앞을 볼 수 없는데 마음의 상처는 끔찍하게 깊지, 켈라자야는 그냥 제정신이 아니다. 켈라자야도 마음의 상처가 상당히 깊은 것 같구. 라키사는...걔는 멀쩡하던 애가 나날이 미쳐가고 있다. 실상 그냥 손 놓고 있다. 사귀는 사이도 아니니 내가 신경쓸 필요도 없지만...그래도 친구인데 그렇게 망가져가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기도 힘들다. 진짜 이러다 라키사 상태가 아다비아와 켈라자야 상태보다 더 나빠지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저 망상에 불과한 게 아니라 진짜 이대로 간다면 그렇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이고도 라키사는 그냥 손 놔 버린 거 아닌가 싶어보이구. 하지만 차라클라야가 지금 말하는 피곤함은 그런 것 때문에 피곤한 게 아니라 일 때문에 피곤해 보인다고 말한 거겠지. 일 때문은 아니야. 서점에 일 별로 없어. 그 폭동 이후 일 때문에 힘든 적은 단 하루도 없다. 일이 너무 없어서 나한테 월급 주는 이고한테 눈치가 너무 보여서 문제지.


 "힘내요. 노력하면 분명히 좋아질 거에요."


 차라클라야가 내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그리고는 생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래, 앞으로 나아가야지. 노력해야지. 그러면 안 좋아질 리 없잖아. 여기가 아주 쑥대밭이 되고 들짐승이 시체 뜯어먹는 폐허가 된다 하더라도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좋아질 수 있어. 꼭 에드자에서 내가 원하는 행복한 미래를 찾아야한다는 건 아니니까. 사실 여기에 내가 원하는 미래 따위가 존재할 리도 없구. 죽어라 노력하다보면 아다비아와 켈라자야를 데리고 이 망할 마딜땅을 떠날 수 있을 거야.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세계로 말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슬슬 서점 돌아가야지. 차라클라야 보러 여기 오기 잘 했어. 차라클라야 모습을 보니 나도 노력하면 좋아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다음에 또 와주세요!"

 "예, 시간 되면 올께요. 차라클라야도 시간 되면 언제든 서점으로 와요!"


 서점으로 돌아가는 길. 여전히 평화롭다. 좋게 생각하자. 아다비아는 좋아진 거야. 한 번에 모든 게 다 좋아질 수 없잖아. 미세하게나마 나아진 거야. 그 증거가 오늘 화를 내지 않았단 거다. 다음에는 또 전처럼 성질 버럭버럭 낼 수 있어. 그래도 오늘 한 번 화내지 않고 작년 이맘때처럼 내 공부를 봐주었다는 것은 아직 희망이 있다는 거야. 조금은 나아졌기 때문에 그렇게 화를 참을 수 있었던 거야.



 하얀 옷을 입고 춤추고 있는 여자. 길고 가느다란 두 팔이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는 깃털처럼 자유로이 하늘을 떠다닌다. 에르키나. 하늘을 향해 올라가고 싶은가봐. 라키사가 에르키나를 보며 활짝 웃고 있다. 박수를 치며 에르키나의 춤을 바라보고 있다. 에르키나는 춤을 정말 잘 추는구나. 깃털이 에르키나가 된 걸까, 에르키나가 깃털이 된 걸까. 푸른 하늘에는 구름이 한 점도 없다. 너무나 맑은 날. 춤추는 에르키나의 그림자조차 하늘을 향해 날아갈 것 같아.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에르키나의 동작이 흘러간다. 라키사는 계속 웃으며 에르키나를 바라보고 있다. 두 손을 입에 모아 환호한다. 진심으로 즐거워하는구나.


 멀리 새까만 먼지가 라키사와 에르키나를 향해 몰려온다. 검은 재가 하늘을 향해 올라가다 땅에 떨어지고 다시 불의 열기 때문에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위로 올라갔다 아래로 내려갔다 하면서 둘을 향해 조금씩 다가가고 있다. 더러워. 하얀 에르키나와 극명히 대비되는 검은 먼지 구름. 에르키나는 춤을 멈추고 서서 라키사에게 다가간다. 라키사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둘은 미소지으며 서로를 바라본다. 뭐해? 지금 저기서 검은 먼지 구름이 다가오고 있잖아! 에르키나가 라키사를 향해 두 손을 뻗는다. 그 두 손 사이로 하늘에서 커다란 핏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땅에 부딪힌 새빨간 핏방울은 팍 터져 사방으로 흙빛 방울을 퍼뜨린다.


 라키사, 에르키나 손을 잡아! 검은 먼지 구름이 쫓아오고 있어! 둘이 같이 빨리 자리를 피해! 그러나 라키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에르키나를 바라보기만 한다. 에르키나는 계속 밝은 표정을 지으며 라키사를 향해 두 손을 내밀고 있다. 라키사, 왜 에르키나 손을 안 잡는 거야? 검은 먼지 구름이 이제 세 걸음 걸어가면 닿을 정도까지 다가왔다. 거기서 뭐 해? 거기 가만히 있으면 너네 둘 다 저 시꺼먼 먼지를 뒤집어써서 더러워질 거야! 어서 피해!


 에르키나가 주변을 둘러본다. 이미 새까만 먼지 구름이 에르키나와 라키사를 에워싸고 있다. 그제서야 에르키나는 웃음을 거두고 두 손으로 라키사의 오른손을 꽉 잡는다. 그래, 지금이라도 달려! 라키사, 거기서 뭐하는 거야? 왜 멍하니 서있기만 해? 검은 먼지 구름에 잡아먹히고 싶어? 라키사가 에르키나를 노려보더니 씨익 웃는다. 그리고 등부터 서서히 검은 먼지가 되어 검은 먼지 구름에 흡수되어 간다. 에르키나가 꽉 잡은 오른손이 마지막으로 검은 먼지가 되어 에르키나 두 손 사이로 흘러내린다.


 몸이 굳어버린 에르키나. 큰 소리로 라키사를 부른다. 바닥에 깔려 있던 검은 먼지 구름이 하늘로 살짝 떠오르더니 에르키나의 머리를 뒤덮는다. 곧 그 구름은 두건 모양으로 변해 에르키나 머리를 완벽히 덮어버렸다. 저건 교수형 처할 때 사람 머리에 뒤집어씌우는 그 두건 아닌가? 두건 모양으로 변한 검은 구름 아래쪽 끝자락이 밧줄 모양으로 변하더니 확 오그라들었다. 에르키나는 검은 구름의 그 밧줄 모양으로 변한 부분을 움켜쥐고 풀어내려고 한다. 검은 구름이 떠오른다. 에르키나의 두 발이 땅에서 떨어져 하늘로 올라간다.


 아무 소리도 없다. 공중에 붕 뜬 에르키나. 두 손으로 목에 감긴 검은 구름을 뜯어내려고 애쓰며 두 다리를 바둥거린다. 그러나 목에 감긴 밧줄 모양으로 변한 검은 구름은 계속 에르키나의 목을 조여 간다. 에르키나의 두 팔과 두 다리가 힘없이 축 늘어졌다. 바람이 분다. 에르키나 몸이 바람을 따라 흔들린다. 죽었어. 에르키나는 죽었다. 라키사는? 라키사는 여전히 저 에르키나 목을 조르고 있는 검은 구름을 이루는 먼지에 섞여 있다. 왜? 라키사, 왜 지금 거기 있는 거야? 에르키나 죽었잖아!


 고요함 속에서 라키사의 목소리와 함께 에르키나 발 밑에 글자가 떠오른다.


 '나는 너야. 너는 나야.'


 라키사, 그만해! 에르키나 죽었잖아! 야, 이거 진짜라구! 지금 에르키나 죽은 거 안 보여? 시꺼먼 먼지가 되어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다시 조용해진 세계. 바람이 분다. 에르키나 발 밑에 떠오른 '나는 너야. 너는 나야'라는 글자가 새하얀 먼지가 되어 멀리 날아간다. 나는 너야, 너는 나야. 라키사. 에르키나.



 모든 게 사라졌다. 암흑만이 존재하는 세계. 눈을 떴다. 창 틈을 타고 들어오는 새가 지저귀는 소리.


 '뭐야? 꿈이었잖아?'


 이상한 꿈이야.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것 같은 기분. 나는 그 속에 없었다. 그저 일어나는 일을 보고 있었을 뿐이다. 새카만 먼지와 하나 되어 에르키나 목을 조른 라키사. 라키사한테 더 이상 별 관심 없는데 왜 이런 꿈을 꾼 거지? 오늘 무슨 안 좋은 일 생길 거니 조심하라는 뜻인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고 자리를 보았다. 켈라자야가 누워서 자고 있다. 시계를 보았다. 아침 9시. 달력을 보았다. 1116년 6월 17일. 꿈 때문에 아침부터 기분이 영 좋지 않다. 별 거 아닐 거야. 해가 떠 있을 때 꾼 꿈은 별 거 없는 꿈이라고 하잖아. 해는 한참 전에 떴으니 별 거 아닐 거다. 꿈 속에서 그 여자를 보자마자 에르키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진짜 그렇게 생겼었을까? 모르지. 라키사 말에 의하면 죽은 지 한참 되었으니까. 지금쯤 땅 속에 해골만 남아 있을 거야.



 세수나 해야겠다. 목에 수건을 두르고 물통으로 물을 떴다. 이따 물 길러 나갔다 와야겠다. 목에 수건 두르니 아까 꿈이 또 떠오른다. 에르키나 목을 조르던 검은 구름. 뭔가 꺼름찍해서 수건을 목에서 풀어 손에 쥐었다.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계산대 뒤에 라키사가 앉아 있다. 라키사는 말없이 책을 읽고 있다. 이 시각에 일이 있을 리 없지. 예전에는 이 시각에도 손님이 오곤 했었는데. 라키사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잘 잤어?"

 "응."


 할 말이 없다. 라키사한테 꿈 이야기를 해줄 필요가 있나? 그딴 거 라키사한테 말해봐야 둘 다 기분만 잡치겠지. 자살한 친구 이야기 괜히 해서 뭐해? 내가 잘 알던 사람도 아니다. 본 적도 한 번도 없는데. 꿈에서 그 여자를 보자마자 에르키나라는 걸 알기는 했지만 실제 그렇게 생겼을 리도 없잖아. 에르키나가 진짜 춤을 잘 추었는지도 알 수 없고. 쓸 데 없는 소리는 안 하는 게 낫다. 제대로 된 말도 라키사한테는 이상하게 전달되는데 이런 건 제대로 전달될 일이 아예 없어. 요즘 라키사랑 이야기하지도 않잖아. 오히려 라키사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이상한 거다. 그냥 내가 꾼 무지 많은 꿈 중 하나에 불과하잖아. 그 꿈 중 하나에 라키사와 에르키나가 나왔다고 그걸 라키사한테 말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 라시카와는 대화를 안 하는 게 차라리 나아. 그게 요즈음 일상이고. 라키사와는 필요한 말만 해야지.


 세수하고 머리를 감고 나왔다. 그냥 지금 물을 길러 나갔다 올까? 지금 일도 없는데. 잠은 다 깨었다. 물통과 바가지를 들고 나와 수레에 실었다. 물 길어오는 동안 수레를 써야할 일은 전혀 없을 거다. 설마 라키사가 수레 끌고 나가서 책 수거해 오겠어? 그만큼 수거해올 책도 없는데. 라키사가 수거해올 책 자체가 없을 거다. 지금은 할 일 정말 별로 없으니까. 그 폭동 이후 라키사가 책 수거하러 나갔다 온 적이 있긴 한가? 거의 없었다. 올해 들어서는 아마 아예 없었을 거다. 나도 진짜 어쩌다 한 번 다녀오는데 라키사가 다녀왔을 리가 없지. 라키사 근무 시간이 오전이라 책 수거하러 나가야 한다면 나를 깨워서 계산대 지키게 해야 한다. 그런데 그랬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수레를 끌고 우물로 갔다. 여전히 평화롭다. 골목에 핏자국이 보인다. 누군가 저기서 죽었구나. 어젯밤 죽었나보다. 다행히 시체는 안 보인다. 시체는 아침 일찍 치웠겠지. 그걸 여태 놔두고 있을 리 없잖아. 나와 관련되지만 않으면 누가 죽든 상관없어. 그래도 내가 느끼는 것보다는 훨씬 위험하다. 심지어 아무 일 없는 것 같은 이 동네조차도 말이다. 당장 멀지 않은 과거에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고 저 핏자국이 말해주고 있잖아. 지금은 괜찮아. 백주대낮에 저기 경찰들도 있으니까. 경찰에게 인사를 하고 우물로 갔다. 우물에서 물을 길었다. 이따 강가에 가서 시원하게 몸 좀 씻고 올까? 화장실에서 수건에 물을 적셔 몸을 닦아내는 것만으로는 답답하다. 가끔은 목욕탕을 가든 강가에 가든 해서 아주 박박 씻어야 개운하지.


 물을 다 길었다. 이제 수레를 끌고 서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물을 너무 많이 길어서인지 수레가 엄청 무겁다. 이거 끌고 서점 돌아가면 땀으로 온몸이 흠뻑 젖겠네. 여름은 이게 안 좋아. 뭐 조금만 돌아다녀도 온몸이 땀범벅이 되어버리니까. 수레를 끌고 서점으로 돌아간다. 변함없는 거리. 누가 밤새 살해당하든 말든 이 거리는 안 변해. 그냥 한결같아. 만약 이 길에 사람이 없다면 폭동 전이나 후나 바뀐 게 하나도 없을 거야. 사람만 새로 오는 사람과 죽어나가는 사람 때문에 바뀔 뿐이지.



 서점에 도착했다. 물이 가득찬 물통이 실린 수레를 끌고 서점 안으로 들어가자 라키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아. 너는 너 할 거 해."

 "아니야, 내가 도와줄게."

 "필요없어. 이건 내 일이니까."


 물통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 물동이에 물을 채웠다. 진짜 물 많이 떠왔네. 땀 좀 닦아야겠다. 다시 수건을 목에 두르고 물통 하나를 들고 화장실로 갔다. 수건에 물을 적셔 온몸을 닦아내었다. 그냥 지금 강가로 가서 몸 좀 박박 씻고 올까? 어차피 오전에는 할 일도 없는데. 하지만 귀찮다. 언제 또 강가까지 가? 목욕탕도 멀리 있고. 마른 수건으로 몸의 물기를 다 닦아내고 옷을 입은 후 밖으로 나왔다. 라키사가 또 나를 쳐다본다. 방으로 들어가 수건을 널고 물통을 제자리에 둔 후 다시 밖으로 나왔다. 계산대 뒤에 앉아 책을 펼쳤다.


 "내가 도와줄까?"

 "아니. 괜찮아."


 책을 들여다보았다. 아다비아가 화를 덜 내게 하려면 아다비아를 보러 가기 전에 책을 한 자라도 더 보고 가야지. 내가 공부하려고 하고 있다는 걸 느끼면 아다비아도 조금은 더 마음의 안정을 찾지 않을까? 일단 전에 아다비아와 같이 공부한 것을 복습해야겠다. 그건 단어도 다 찾아놓았기 때문에 보는 데에 별 어려움이 없다. 내용은 대충 기억하고 있다. 단어를 외워야지.


 "타슈갈, 우리 제대로 대화 안 한 지 꽤 된 거 같지 않아?"

 "글쎄."


 라키사가 말을 걸었다. 제대로 대화 안 나눈지 꽤 되었지. 너도 그건 알고 있나보네. 그런데 너랑 무슨 이야기를 해? 내가 무슨 말이든 한 마디 하기만 하면 삐딱하게만 듣는데. 라키사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게 느껴진다. 고개를 들어 라키사를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우리 참 친하게 지냈는데."

 "응."

 "우리 많이 멀어진 거 같아."

 "글쎄..."


 라키사가 입을 다물었다. 멀어진 거 맞아.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아다비아, 켈라자야와 동시에 사귀게 된 이후부터? 그거 때문일 수도 있다. 라키사 입장에서는 내가 아다비아, 켈라자야와 동시에 사귀고 있으니 말 걸기 껄끄러웠겠지. 그런데 나는 단순히 그거 때문이 아니다. 무슨 말을 하든 라키사가 자꾸 제멋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여서 그렇다. 차라리 말을 안 하면 나와 라키사 사이에 있는 벽이 높아질 일은 없으니까. 조금이라도 더 다가가려고 말 한 마디 하면 오히려 벽이 더 높아지잖아. 만약 라키사에게 예전처럼 말을 많이 걸었다면 나와 라키사 사이에 있는 벽은 하늘 높이 높아졌을 거다. 지금보다 더 서먹해졌을 거고, 오해도 더 커졌겠지. 서로 말을 안 하니까 이 정도 관계라도 유지되는 거야.


 "아다비아랑 켈라자야와 잘 사귀고 있니?"

 "응. 잘 사귀고 있어."

 "아다비아 상태는 어때?"

 "좋아지고 있는 거 같아."


 너는 아다비아 보러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안 갔지. 너랑 아다비아 원래 친하지 않았어? 그런데 어떻게 단 한 번도 아다비아를 보러 안 갈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쿠룬나스가 된 아다비아가 그렇게 싫어? 절대 용서할 수 없어? 그건 아다비아가 되고 싶어서 된 것도 아니잖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다비아도 그렇게 되는 걸 당해버린 거지, 자기 의지로 된 건 아니다. 그런데 여태까지 아다비아를 보러 안 갔다는 게 신기할 뿐이다.


 "다행이네."

 "너는 그 학습 모임 지금도 나가?"

 "응."

 "그래."


 라키사가 그 학습 모임 안 나갈 리가 없지. 계속 꼬박꼬박 거기 참석하고 있는 것은 잘 알고 있다. 내가 직접 물어보지 않아도 이고가 계속 라키사에게 물어보고 있으니까.


 "너, 내가 게첸씨와 만나는 게 그렇게 싫어?"

 "내 생각이 뭐가 중요해?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건데."

 "타슈갈, 아직도 게첸씨가 많이 싫어?"

 "그 새끼 이야기는 그냥 안 하면 안 돼?"


 또 게첸 이야기네. 그놈과 어울리든 말든 내 알 바냐? 내가 싫다고 해도 계속 만날 거잖아. 둘이 사귀든가. 예전에는 게첸이 라키사를 좋아한다는 것에 정말 화가 많이 났다. 그러나 지금은 별 감정 없다. 라키사가 좋다고 게첸과 어울리고 있는데 내가 뭐라고 해? 라키사는 자기 인생 자기가 살고 있는 것 뿐인데. 나는 분명히 게첸이 라키사를 여자로써 좋아하고 있다고 라키사에게 말했다. 라키사는 자기는 게첸을 이성으로써 전혀 안 좋아하니 괜찮다고 하며 내 말을 무시했고. 그걸로 된 거다. 뭘 더 말해?


 "게첸씨 너 앞에 안 나타난 지 오래되었잖아. 이제 너한테 찾아와서 힘들다고 이야기하지도 않구. 그래도 여전히 싫어?"

 "그냥 그 새끼 이야기는 하지 말자. 좋아하려면 너 혼자 많이 좋아하든가. 내가 너 그 새끼랑 어울려 다닌다고 뭐라고 해?"


 짜증난다. 내가 뭐라고 했어? 왜 아침부터 시비걸고 난리야? 싫다고 몇 번을 이야기해? 그러면 그건 그만 말하면 되잖아.


 "게첸씨 때문에 너랑 멀어져가는 거 아닌가 싶어."

 "그럴지도."

 "내가 게첸씨와 안 어울리면 우리 다시 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

 "그딴 거 관심없어. 너 인생이잖아."


 네 인생은 네 거야. 그걸 부정할 생각은 없다. 라키사와 예전처럼 친하게 지내고 싶어. 그러면 뭐해? 서로 다가가려 할 수록 더 멀어지기만 하는데.


 "그래. 내 인생이니까...하지만 나는 모두와 잘 지내고 싶어. 이런 어색한 거 싫어."

 "글쎄...나는 딱히 나쁘지 않은데?"

 "뭐?"

 "이렇게 지내는 것도 괜찮다구. 내가 뭐라고 말하든 너는 내 말 안 듣잖아."

 "아니야. 나는 네 말 잘 듣고 있어."

 "라키사, 너 나한테 게첸 그 새끼 이야기한 거 몇 분이나 지났다고 생각해?"

 "그건..."

 "그 새끼 싫다고 몇 번을 말해? 그런데 너 또 이야기하잖아. 그 엉터리 학습모임도 게첸도 다 싫다구."

 "뭐? 엉터리 학습 모임?"


 라키사가 나를 노려본다. 노려보면 엉터리가 제대로 된 걸로 바뀌냐? 엉터리는 그냥 엉터리지. 다른 것과 틀린 것은 엄연히 달라. 너는 지금 틀린 걸 맞다고 우기는 거구. 이번에는 뭐라고 말할 거야? 또 모든 사람은 다 다르다고 이야기할래? 되도 않는 소리 하고 앉았네. 이고도 블랑쉬블르도 틀렸다고 하잖아. 뭘 남아드라스 공화국에서 그런다는 거야? 남아드라스 공화국에서 온 사람들이 틀렸다고 하고 있는데. 지겹다.


 "내 말이 틀렸어? 이고도 블랑쉬블르도 다 틀렸다고 하잖아. 그걸 맞다고 우기는 건 틀린 거 아니야?"

 "그 둘이 남아드라스 공화국 전부를 다 알아?"

 "또 그 소리 한다. 그러면 너는 여기에 대해 아는 게 뭔데?"

 "뭐?"

 "너 논리대로라면, 너는 여기에 대해 아는 거 하나도 없네. 너는 무수히 많은 다양한 마딜인들 중 하나일 뿐이니까."

 "그래. 그래서 나는 함부로 여기에 대해 안다고 하지 않아."

 "그건 네 생각이고.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걸 나한테까지 강요하지 마. 나는 여기에 대해 알고 있으니까."

 "너 정말 오만하구나."

 "오만한 건 너 아니야? 남의 말 죄다 무시하고 있잖아. 모든 사람은 다 다르다는 믿음 갖고서."

 "너는 다르다는 걸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는구나."

 "다르다는 거?"


 이거 완전 웃기네. 다르다는 걸 못 받아들여? 다르다는 게 뭔지나 알고 지껄이는 거야?


 "너는 왜 차이를 받아들이지 못해? 네가 게첸과 감비르를 싫어하는 건 그 둘이 너와 다르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해서잖아."

 "그게 다른 거냐? 그건 틀린 거야!"

 "왜 그들은 틀렸다는 건데? 그러면 너는 다 옳고 그들은 다 틀렸다는 말이야?"

 "너 지금 말꼬리 잡고 물고 늘어지고 싶은 거야? 정신승리하고 싶어서? 라키사, 싫으면 그냥 때려치면 돼. 게첸 그 새끼 맨날 착취당한다고 씨부리지? 그러면 그 일 때려치면 돼. 왜 못 때려치고 맨날 징징거리는데? 거기서 버는 돈 많고 자기가 사치는 누리고 싶어서잖아. 이게 맞는 거야? 돈과 사치를 포기하고 일 때려치든가, 아니면 닥치고 일하든가 선택하면 될 걸 좋은 건 모두 갖겠다고 떼쓰는 게? 그리고 감비르? 그게 남자지, 여자냐? 자기가 여자라고 하면 뭐가 바뀌어?"

 "그 사람들은 그냥 너와 다른 생각을 하는 것 뿐이야."

 "달라? 너 다른 게 뭔지나 알아?"

 "당연히 알지!"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네가 다르다는 게 뭔지 어떻게 알아? 너처럼 지극히 평범한 애가 뭘 안다고?


 "그만하자. 너랑 쓸 데 없는 말하며 시간낭비하기 싫으니까."

 "왜? 왜 쓸 데 없다는 건데? 나는 이게 유익하다고 생각해. 서로의 진심을 알 수 있으니까."

 "같은 소리 몇 번을 해? 너는 그러면 지금까지 내가 너한테 거짓말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

 "똑같은 이야기 무한 반복하고 있잖아. 뭐가 서로의 진심이야? 너나 나나 뻔히 알고 있는 거잖아."

 "그래도...나는 우리가 많이 이야기하면 서로의 오해도 풀리고..."

 "무슨 오해? 사람들 다 다르다고 네가 이야기했잖아. 그럼 그걸로 된 거 아냐? 너랑 나랑 다르잖아. 그걸로 끝!"

 "하지만..."

 "하지만 뭐?"

 "아니야."


 라키사가 입을 다물었다. 똑같다. 벽은 더 높아졌다. 책으로 눈을 돌렸다. 단어나 외워야지. 라키사는 나한테 더 이상 말을 안 걸 거다. 이게 아닌데...라키사와 예전처럼 친하게 지내고 싶어. 그러나 그렇게 되는 건 불가능할 거야. 라키사는 너무 달라져버렸으니까. 매일 더 나빠지고 있으니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라키사 생각은 다른 게 아냐. 저건 틀린 거야. 틀린 걸 다르다고 받아들일 수는 없잖아. 모두가 다르고 진리 같은 건 없고 자기가 본 것만이 전부라고 믿는 세계. 그게 진짜야?



 서점 문이 열렸다. 누가 들어왔는지 고개를 들어 문 쪽을 보았다. 차라클라야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차라클라야, 어서 와요!"

 "안녕하세요."

 "이 시간에 여기 왠 일이에요?"

 "오늘은 오전에 일이 없어서 왔어요."

 "어서 와요!"


 라키사가 차라클라야와 나를 번갈아 본다. 처음 보는 여자한테 내가 너무 밝게 맞이해주니까 놀랐겠지. 라키사와 차라클라야가 너무 대비된다. 라키사는 시꺼먼 색, 차라클라야는 빛나는 흰색. 나는 시꺼먼 색에서 벗어날 거야. 너는 너 혼자 책 보고 시간 때우든가. 나는 차라클라야에게 글자를 알려주며 밝은 기운을 받아들일 거다. 방문이 열리고 켈라자야가 나왔다. 이제 막 일어났는지 두 눈이 팅팅 부어 있고 머리는 부스스하다. 켈라자야는 라키사를 한 번 쳐다보더니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서 차라클라야를 쳐다보았다.


 "어? 차라클라야, 오늘은 무슨 일 있어?"

 "아니요. 오늘은 오전에 일이 없어서 왔어요."

 "아...조금 기다려 줄래? 나 이제 일어나서...빨리 씻고 나와서 공부 도와줄께."

 "고마워요!"


 켈라자야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켈라자야 손을 잡았다.


 "잘 잤어?"

 "응. 푹 잤어."

 "아직 잠 덜 깬 거 같은데?"

 "아니야. 나 잠 다 깨었어. 얼른 세수하고 나올게!"


 켈라자야가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차라클라야는 그제서야 라키사에게 인사했다. 라키사도 차라클라야에게 인사했다. 둘에게 서로를 소개시켜줄 필요 있을까? 라키사는 오전에만 여기 있는데. 라키사는 나를 바라본다. 당황스러울 거다. 나와 켈라자야가 차라클라야를 밝게 맞이해주니까. 라키사가 서점에 올 때 밝게 맞이해주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는데. 이고조차도 라키사를 밝게 맞이해주지 않는다. 어쩔 수 없다. 스스로 여기 사람들과 자기 사이에 벽을 쌓아나가는데 어떻게 해.


 오늘은 차라클라야와 어떤 공부를 하지? 이제 글자는 다 외웠을 거구. 다 씻고 나온 켈라자야가 책장으로 갔다. 책장에 꽂힌 책을 유심히 쳐다보더니 어떤 책 하나를 뽑아들고 나와 차라클라야를 향해 걸어왔다.


 "우리 이걸로 보자. 아드라스어로 된 동화책이야."

 "예. 저 옛날 이야기 매우 좋아해요!"


 셋이 바닥에 앉아 같이 책을 보기 시작했다. 켈라자야는 차라클라야에게 문장을 읽어보라고 시켰다. 차라클라야는 더듬거리며 소리내서 문장을 읽었다. 차라클라야가 한 문장을 소리내서 읽자 켈라자야가 그 문장을 소리내서 읽었다. 그리고 단어를 하나씩 설명해주었다. 나는 옆에서 그 문장을 종이에 적고 단어와 단어 뜻을 적었다. 그렇게 열 문장을 보았다.


 "차라클라야, 이제 이 열 문장 외워."

 "예!"


 켈라자야는 차라클라야에게 열 문장을 외우라고 시켰다. 나는 차라클라야에게 문장과 단어를 적은 종이를 주었다. 차라클라야는 종이를 받아들고 나와 켈라자야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고는 소리내어서 문장을 읽으며 암기하기 시작했다.



 담배 한 대 태우러 나가야겠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켈라자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라클라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에요, 저 담배 한 대 태우고 오려구요."

 "차라클라야, 계속 그 문장 외우고 있어."

 "예."


 켈라자야와 밖으로 나왔다. 담배를 입에 물었다. 켈라자야가 담배 끝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톡 쳤다. 담배에 불이 붙었다. 연기를 깊이 빨아마셨다. 이 즐거운 상황에 유일하게 안 맞는 것 하나. 바로 라키사. 라키사도 같이 어울리면 좋을 텐데. 하지만 같이 어울리려면 라키사가 생각을 바꿔야겠지. 라키사 생각은 여기에서 환영받을 수 없는 틀린 생각이니까. 혼자서 아무리 우겨봐야 소용없다. 우긴다고 틀린 게 맞는 것이 되는 건 아니니까. 라키사가 생각을 바꾸는 기적이 과연 일어날까? 예전 라키사가 내게 에르키나에 대해 이야기해준 게 떠올랐다. 설마 에르키나에 대한 기억 때문에 지금 저러는 걸까?


 "모두가 거짓인 줄 알면서도 믿었어. 원래 그런 성격이었으니 당연한 거라구..."


 내 바로 옆에서 라키사가 말하는 것 같다. 정말 에르키나가 헤픈 여자로 몰려 '공식적으로 자살'당한 것에 대한 충격 때문에 그런 걸까? 하지만 폭동이 일어나기 전에는 안 그랬잖아. 왜 그 이후에 그렇게 변한 건데? 그리고 왜 나날이 더 그런 틀린 생각에 심취해가는 건데? 라키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자기는 지금 공부하는 것이 속박에서 해방되고 진리를 찾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다른 사람 모두가 지금 라키사 보면 스스로 나락으로 굴러떨어져가고 있다고 보고 있는데? 혼자 맞다는 건가? 이 세상 모두가 바보 천치고?


 "타슈갈, 나 잘 가르치는 것 같아?"


 곰곰히 생각하고 있는데 켈라자야가 갑자기 질문했다.


 "응! 정말 잘 가르쳐. 너한테 그런 능력이 있는 줄 몰랐어!"

 "고마워."


 켈라자야가 활짝 웃었다. 정말로 켈라자야가 그렇게 차라클라야에게 아드라스어를 잘 가르쳐줄 줄 몰랐다. 지금까지 보아온 켈라자야 모습을 보면 가르치면서 끝없이 두들겨패고 성질낼 거 같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옆에서 보는 나도 켈라자야에게 배우고 싶을 정도다.


 "너 어떻게 그렇게 잘 가르쳐?"

 "나?"

 "응. 정말 많이 놀랐어."

 "내가 배우던 거 반대로 했을 뿐이야."

 "뭐?"

 "내가 배울 때의 반대로."


 켈라자야가 생긋 웃어보였다. 켈라자야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켈라자야가 배울 때의 반대 모습. 대체 너는 배울 때 어땠다는 거야? 내가 네가 가르치는 모습을 직접 보기 전에 상상했던 그 모습이 네가 배울 때 당하던 모습이야? 비르바스 실험. 아니야. 설마 켈라자야가 그 피실험체였겠어. 그냥 얘는 불행한 과거를 갖고 있을 뿐이야. 그런 실험을 당했을 리 없어.


 "서점에 왜 아드라스어 교재 없어?"

 "그건 여기 없을 걸? 학교 근처에 가면 구할 수 있을 건가?"

 "학교 근처?"

 "응. 학교에서 아드라스어 배우니까. 거기라면 교재가 있을 수도 있어. 우리는 그런 교과서 같은 건 안 다루거든."

 "아, 그렇구나!"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켈라자야는 차라클라야에게 외운 것을 말해보라고 시켰다. 차라클라야는 첫 문장만 말했다.


 "차라클라야, 잘 했어. 우리 다시 한 번 같이 소리내서 읽어볼까?"

 "예."


 켈라자야가 먼저 읽고 차라클라야가 따라 읽었다. 켈라자야는 차라클라야에게 다시 외우기 시작하라고 지시했다. 차라클라야가 작은 목소리로 계속 소리내서 읽는다. 라키사를 보았다. 라키사는 혼자 책만 보고 있다. 라키사가 시커먼 암흑 덩어리로 보인다. 여기 모두 너무나 하얗고 밝고 즐거운데 거기만 새까맣고 어둡고 우울해. 암울한 너 만의 세계. 너는 왜 스스로 더 어두워져가는 거야? 우리 모두 이렇게 조금씩 더 밝아지고 있는데.



 라키사가 퇴근했고 이고와 호즈라가 서점으로 왔다. 차라클라야까지 같이 서점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었다. 차라클라야는 저녁 늦게서야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어느덧 날이 어두워졌다. 켈라자야는 오늘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서점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갔다.


 "아까 차라클라야라고 했지?"

 "응."

 "걔 괜찮은 애 같던데?"

 "너도 그렇게 느꼈어?"

 "어. 꽤 괜찮은 애 같더라."


 이고도 똑같이 느꼈구나. 진심으로 밝은 미래로 걸어가고 있는 애니까. 그 진심이 이고에게도 전해졌을 거다.


 "라키사 내보내고 걔를 데려올까..."

 "뭐?"

 "그냥 해본 말이야. 사람 함부로 자를 수는 없지."

 "그래도 라키사 내보내는 건 그렇잖아."


 이고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 요즘 라키사랑 이야기 좀 하냐?"

 "아니."

 "라키사 대체 왜 저러냐? 너 뭐 알고 있는 거 없어?"

 "왜?"

 "갈 수록 이상해져 가잖아. 쟤 그냥 놔뒀다가는 큰 일 날 거 같은데...그런 일에 엮이고 싶지 않아."

 "뭐? 뭐 들은 거 있어?"

 "아니. 그건 아닌데, 솔직히 그렇잖냐.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빠져가지고...멍청해도 정도껏 멍청해야지."

 "무슨 일 있었어?"

 "딱히 그런 건 아닌데, 라키사랑 이야기해보면 저거 대책없이 마구 나빠지는 거 같아. 망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소리를 그대로 하고 있잖아."

 "그건 그래."

 "타슈갈, 네가 라키사 좀 말려봐. 저거 그냥 놔두면 분명 사고칠 거란 말이야."

 "내 말은 더 안 듣는걸."


 이고는 창문을 활짝 열고 입에 담배를 물었다. 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연기를 한 모금 빨아들이더니 창문을 향해 연기를 뿜었다. 연기는 창문까지 가지 못하고 허공으로 다 흩어져버렸다. 남는 건 오직 담배 냄새 뿐이었다.


 "걔 사고칠 거 생각하면 쫓아내는 게 맞긴 한데..."

 "그래도 그건 아닌 거 같아."

 "그러니 말이다. 야, 너 믿고 고용했는데 이게 뭐냐? 어디 다른 곳 갈 데라도 있어야 쫓아내든 말든 하지."

 "미안."

 "뭐, 너라고 알았겠냐? 아다비아도 그렇고, 라키사도 그렇고..."


 이고가 다시 담배 연기를 한 모금 빨아마셨다. 살짝 벌어진 입 사이로 연기가 나오지 않는다. 몇 초 후. 이고의 한숨이 연기가 되어 입에서 뿜어져나온다.



 차라클라야가 서점에 왔다 간 지 일주일이 지나갔다. 오늘따라 호즈라가 뭔가 열심히 한다. 서점 문 닫을 시간이 넘었는데도 이고는 문을 닫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켈라자야는 이미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뭘 저렇게 열심히 하는 거지? 이고는 가만히 호즈라를 바라보고 있다. 호즈라, 오늘 뭐 영감이라도 떠올랐나? 이미 뭔가 잔뜩 써서 시커매진 종이 위에 계속 뭔가 쓰고 지우고 하고 있다.


 서점 밖으로 나왔다. 이고가 가만히 있으니 호즈라한테 이제 그만 돌아가라고 할 수도 없구. 담배를 입에 물었다. 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내 벽에 그었다. 성냥에 불이 붙었다. 담배에 불을 붙인 후, 성냥을 흔들어 불을 껐다. 연기를 빨아마셨다.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호즈라가 오늘따라 뭔가 잘 되고 있나보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별이 참 많이 떠 있다. 은하수가 천천히 흘러간다. 저 은하수 끝에는 뭐가 있을까? 은하수 끝에 있는 땅, 무지개 끝에 있는 땅은 어떤 곳일까? 거기는 여기처럼 거지같지 않겠지? 모두가 행복한 그런 세상일까?


 "이야, 진짜 오랜만이다!"

 "어머, 너 아직도 여기에서 일하고 있었니?"


 남자와 여자 목소리. 아! 자에드와 예라다. 작년 이맘때에는 자에드와 예라가 참 별로였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만나니 조금 반갑다. 얘네는 안 죽고 잘 살아있구나. 바하르는 지금 근무하고 있을 건가? 아니면 쉬고 있을 건가? 얘네는 운도 좋지. 동원령 절묘하게 피해서 이렇게 자유롭게 지내고 있잖아.


 "오랜만이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우리는 계속 중앙학문연구소에서 공부하고 있어."

 "거기 동원령 때문에 학생들 다 치안 업무 동원되지 않았어?"

 "우리는 뮈젤 다녀와서 면제거든."


 예라가 활짝 웃었다. 뮈젤 다녀와서 동원령 면제인 것이 너무나 자랑스럽나 보다.


 "뮈젤 다녀온 게 엄청난 것인가 보네?"

 "응! 당연하지. 가서 엄청난 연구를 진행했으니까."

 "어떤 연구?"

 "너한테 말해줘도 네가 이해할 지 모르겠네."


 역시나 사람 신경 긁는 것에 뭔가 있는 자에드의 말. 하지만 정말로 궁금하다. 뮈젤에서 대체 뭔 일이 있었던 거야?


 "뭔데? 얼마나 대단하길래 내가 못 알아듣는다는 거야?"

 "저주술을 체계화시키기 위한 연구였어. 정신 상태에 영향받지 않는 저주술."

 "뭐 마법이나 아그라 배열 같은 거야?"

 "그거보다 더 심오하고 수준 높지."

 "뭔데?"


 자에드와 예라는 서로를 바라보더니 키득키득 웃었다. 이것들 미쳤나? 왜 갑자기 서로 쳐다보고 웃어? 뭘 말해주고 내가 못 알아듣는 모습 보며 웃는 거라면 몰라도, 이건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고 웃기만 한다. 아다비아는 뮈젤 다녀와서 쿠룬나스가 되었다. 얘들은 뮈젤 다녀와서 정신이 나가버렸나? 진짜 뮈젤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저주술을 사용할 수 있는 힘을 항상 지니고 있는 방법."

 "부적 같은 거?"

 "에이, 그렇게 시시한 거 아니야. 부적도 어느 정도 가능하기는 하지만, 그건 파괴될 수도 있고 잃어버릴 수도 있잖아."

 "그러면? 부적 말고 다른 게 있어?"

 "응. 세상에 존재하는 힘을 고정된 형태로 만드는 거. 뭐 그렇다고 해야 할까?"

 "그게 뭔데? 조금 더 쉽게 이야기해줄 수 있어?"


 예라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미안해. 그건 너무 어려운 거라 말로 설명 못 하겠어. 어쨌든 지금 사람들이 사용하는 저주술과는 차원이 다른 저주술이야."

 "너희는 그걸 익힌 거야?"

 "응. 그런데 아직 더 많은 수련과 연구가 필요해. 나즈 레 교수님과 같이 계속 연구중이야."


 그냥 말만 번드드하게 하는 거 아니야? 그때 자에드가 말했다.


 "우리 지금 중앙학문연구소로 가야 해. 기회 되면 또 보자."

 "기회 되면."


 둘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둘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쟤들은 아다비아가 왜 쿠룬나스가 되었는지 왠지 알고 있을 거 같다. 그렇지만 그걸 직접 물어보지 못하겠어. 절대 쟤네들에게 그걸 물어봐서는 안 될 거란 예감이 든다. 여기에 아다비아가 있다는 말을 해서도 안 될 것 같구. 뮈젤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어째서 아다비아는 쿠룬나스가 되어 우리들 앞에 나타났고, 쟤네들은 멀쩡히 에드자 밤거리를 돌아다니는 걸까?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이고와 호즈라가 나를 쳐다본다.


 "뭐 하다 이제 들어와? 담배 재배해서 태웠냐?"

 "아니. 누구 좀 오랜만에 마주쳐서."

 "누구?"

 "자에드랑 예라."


 호즈라라면 뭔가 들어서 알고 있는 게 있지 않을까?


 "호즈라, 혹시 나즈 레 알아?"

 "나즈 레? 갑자기 왜?"

 "자에드랑 예라가 '나즈 레'라는 사람이랑 저주술 연구중이라고 해서."

 "아...그분은 정말 특이하신 분이야."


 이고도 호즈라를 쳐다보았다. 호즈라는 나와 이고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분은 중앙학문연구소에서 나오시는 일이 거의 없으셔. 나도 거의 못 봤어."

 "아, 그래서 특이하다는 거야?"

 "그거 말구...그 분이 연구하시는 게 많이 특이해."

 "뭔데?"

 "저주술을 안정화시키는 연구라고 들었어. 마법과 저주술을 합치는 연구도 진행하고 있다고 들었구."

 "그게 가능해? 마법이랑 저주술은 방법이 완전 반대라고 하던데."

 "너 그건 어떻게 알고 있어?"


 호즈라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그렇게 놀랄 만한 거야? 지금은 손님이 거의 없지만 예전에는 중앙학문연구소 학생과 에드자 대학교 저주술 전공 학생들도 여기 곧잘 왔다. 내 주변에 저주술사도 몇 있고. 당장 켈라자야만 해도 저주술사잖아. 저주술에 별 관심이 없다고 해도 주워들은 건 조금 있다. 저주술과 마법이 정반대라는 건 바하르가 알려주었다. 마법은 생각이 없어야 하고 저주술은 생각이 있어야 해서 둘을 합치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걸 합칠 수 있는 놈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지.


 "저주술사 친구가 알려줬어."

 "켈라자야?"

 "아니. 걔 말고 있어."

 "네 말이 맞아. 그게 이론적으로는 절대 불가능해. 그런데 그걸 나즈 레 교수님은 계속 연구하고 계셔. 꽤 많이 진행된 걸로 알고 있어. 어떤 논문 하나 덕분에 상당히 많이 진행되었대."

 "무슨 논문?"

 "꽤 오래 전에 그걸 시도해본 학생이 하나 있었대."


 이고가 호즈라를 쳐다보았다. 설마 전에 에베디나단이 나한테 보라고 주었던 그 논문? 이고 샤카샤그가 썼다는 그거?


 "마법에서 사용하는 방법을 저주술에 도입하면 저주술을 안정화시키고 체계화시킬 수 있다고 하시는데 그 연구가 잘 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어."

 "그게 가능할까?"

 "마법도 세상에 존재하는 거고 저주술도 세상에 존재하는 거니까...방법이 있지 않을까?"


 이고를 쳐다보았다. 이고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다.


 "호즈라, 오늘 많이 늦었다."

 "아, 그렇네요."

 "여기에서 자고 갈래? 지금 밖에 돌아다니기는 위험한데."

 "아니에요. 집에 돌아가야죠."

 "그러면 내가 집까지 데려다줄께."

 "이고님도 위험하잖아요."

 "괜찮아. 무슨 일 생기면 루즈카가 와서 구해주겠지."

 "루즈카님도 그렇게 이 도시 모든 곳을 꿰뚫어보는 능력은 없으세요."

 "그러면 타슈갈도 같이 가면 되잖아. 남자 둘이 같이 가면 어지간해서는 안 건드릴 걸."

 "아니에요. 그런 거 없어요."

 "그러면 너는 어떻게 돌아가게?"

 "괜찮아요."

 "그냥 자고 가. 내가 밖에서 자면 되니까."

 "아니에요."

 "고집 부리지 말구. 너한테 무슨 일 생기면 내가 루즈카한테 혼나. 왜 위험한 거 뻔히 알면서 한밤중에 혼자 집에 돌려보냈냐구."


 호즈라 표정이 영 못마땅해 보인다. 그래도 이고 말에 수긍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서 자자. 많이 늦었다. 너는 내일 아침에 무슨 일 있어?"

 "아니요."

 "그러면 푹 자도 되겠네. 자고 일어나서 책 좀 더 보고 가. 나는 내일 아침 일찍 루즈카 집에 가야 하니까."

 "예."



 방 안으로 들어갔다. 호즈라는 이고 자리에 누웠다. 나는 내 자리에 누웠다. 이고는 잘 자라고 인사한 후 불을 끄고 방 밖으로 나갔다.


 "진짜 그 연구 계속 진행중이야?"

 "응."

 "그거 막 사람 잡아먹고 하는 거 아니지?"

 "뭐? 저주술을 모욕하는 소리 하지 마!"


 호즈라가 낮게 목소리를 깔고 단호하게 말했다.


 "너는 왜 저주술 연구해? 저주술 못 쓰잖아."

 "저주술 연구할 때마다 황홀함을 느껴."

 "황홀함?"

 "응. 우리가 보지 못하는 아름다운 세계. 나도 보지는 못하지만 그게 존재한다는 게 느껴져. 그래서 연구할 때마다 너무 즐거워."

 "그런 것도 느껴지나 보네."

 "나도 저주술 배우고 싶어."


 호즈라가 저주술을 배우고 싶어하는 건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루즈카도 알고 있고 룬 바사르와 에클레 마스라히도 알고 있다고 했는데 왜 그 사람들한테 저주술 배우지 못했지? 그쪽으로 아예 소질이 없는 건가?


 "룬 바사르와 에클레 마스라히가 안 알려줬어?"

 "그분들은 내게 저주술에 소질이 없다고 안 알려주셨어."

 "소질?"

 "응...모든 걸 꼼꼼히 따져보려고 하는 성격은 저주술에 맞지 않대."


 어이없지만 맞는 말이다. 저주술은 그냥 엉망진창이지. 상상하면 그게 현실로 이루어진다는 거니까. 그 누구도 저주술이 뭔지 명쾌히 설명해주지 못한다. '저주술'이라고 뭉뚱그려 부르는 것 안에는 수많은 종류의 저주술이 존재한다. 켈라자야가 내 담배에 저주술로 불을 붙여주기는 하지만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 불은 어떤 물체가 일정한 온도 이상 올라갔을 때 빛과 열을 내는 현상이잖아. 손가락으로 내 담배를 건드리는 것만으로 담배 끝부분 온도를 순식간에 확 올리는 게 어떻게 가능한지 알 수 없다. 설명도 안 되구. 그런데 그게 가능하다. 마딜인들은 이렇게 설명한다. '담배에 불이 붙는다고 강하게 믿어서 현실이 된 거다.' 솔직히 이게 말이 돼? 그런데 그걸 믿어야만 저주술을 쓸 수 있다고 한다. 호즈라가 책 보고 서류 뒤적이며 연구하는 모습을 보면 저주술과 상당히 거리가 멀어보인다. 저주술사라면 저런 거 다 화로에 집어넣어 홀라당 불태우고 그냥 뭔가 열심히 믿어대겠지.


 "켈라자야가 나한테 저주술 알려주었으면..."

 "루즈카한테 알려달라고 하는 게 빠르지 않을까?"

 "루즈카님도 나는 저주술에 소질이 없대. 그분께서 내게 알려주신 게 지금 하는 작업이야."

 "아...그런데 켈라자야는 저주술 싫어하던데."

 "걔는 그게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건지 몰라서 그래. 나는 그게 너무 부러운데..."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켈라자야에 대해 들은 것은 입 밖으로 절대 내서는 안 돼. 블랑쉬블르와 에베디나단이 말해준 비르바스 실험과 비를레쉬 실험. 물론 켈라자야가 그 실험의 피실험체는 아니었을 거야. 그렇지만 어쨌든 켈라자야가 매우 괴로운 기억을 갖고 있는 건 분명하다. 켈라자야는 스스로 배우고 싶어서 저주술을 익히지 않았을 거야. 강제로 할 수 있게 된 거지.


 "너는 저주술 관심없어?"

 "나? 별로..."

 "나는 너도 매우 신기해. 우리와 다르지만 같잖아."

 "신기할 게 뭐 있다구."

 "아니. 너는 정말 신기해. 너를 볼 때마다 정말로 마법과 저주술이 하나로 합쳐지는 게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무슨 말이야?"

 "그냥...너를 보면 그런 느낌이 들어. 절대 하나가 될 수 없는 게 하나가 될 수 있다는...뭐 그런 느낌이랄까? 나쁜 뜻 아니야."

 "왠지 나쁜 뜻 같은데..."

 "아냐! 진짜 오해하지 마! 내 말은, 그러니까 내 말은 말이야, 너는 축복받은 존재일 수도 있다는 거야! 너는 그게 매우 싫은 것 같지만..."

 "별 걸 다 부러워하네."


 호즈라 말에 저절로 입꼬리가 위로 살짝 올라갔다. 그렇게 보려고 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내 피와 살, 뼈는 아드라스인이기 때문에 마딜인들끼리 서로 죽이는 이 혼란 속에서 한 발 빠져 있는 건 사실이니까. 사실 이건 엄청난 축복이지. 아드라스인은 잘 안 건드린다는 것 때문에 다른 마딜인들보다 조금은 더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거잖아. 나는 호즈라가 대단한 능력을 가졌다고 본다. 저주술을 사용하지 못하는데 저주술을 연구하고, 그걸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건 정말 대단한 거니까. 하지만 이걸 호즈라에게 직접 말해주지는 못하겠다. 이 말을 살짝이라도 잘못 들으면 자기를 비웃는 것으로 들어버릴 테니까.


Posted by 좀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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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포스팅 잘 보고 갑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마무리 잘 하세요~

    2019.01.23 16:01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