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기적과 저주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3장 18화

좀좀이 2019. 1. 15.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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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3장 18화


 "자냐?"

 "아니. 그런데 왜 벌써 왔어?"

 "일찍 오면 안 돼?"

 "그건 아닌데."


 자리에서 일어나 시계를 보았다. 이고가 왜 벌써 왔지? 평소 같으면 아직 올 시간이 아닌데. 오늘은 루즈카 집에 가서 별 일 없었나 보다. 아다비아도 어제 별 탈 없이 잘 보냈나 보네. 켈라자야는 맞은편 이고 자리에 누워 계속 자고 있다. 이고는 나와 켈라자야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내게 말 없이 따라 나오라고 손짓했다. 불안하다. 또 무슨 일 생긴 거 아냐? 가슴 속 심장 박동 소리가 고막을 둥둥 친다. 이고 표정을 살펴보았다. 아냐, 표정이 나쁘지 않아. 뭔가 나쁜 일이 있어서 따라나오라고 하는 거 같지는 않은데? 그런데 왜 사람 불안하게시리 말없이 나오라고 손짓하는 거야? 자리에서 일어나 이고를 따라 방에서 나왔다. 라키사는 계산대 뒤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딱히 뭐 있을 거 같지 않은데? 무슨 일이 있었다면 라키사도 분명히 낌새를 눈치채고 책을 덮었을 텐데 평소처럼 책 보고 있잖아.


 "내일은 너네 둘 다 서점 쉬어."

 "응? 갑자기 왜?"


 뭐야? 고작 이거 말하려고 일찍 와서 나한테 조용히 밖으로 나오라고 한 거였어? 괜히 긴장했잖아. 또 무슨 심각한 이야기할 줄 알았는데...이걸 이렇게 사람 긴장시켜가며 말해야할 거 있어? 그냥 아까 방에서 이야기하든 해도 되었잖아. 이게 뭐가 중요한 이야기라구.


 "너네 둘 다 너무 여기에만 있는 거 같아서. 내일은 둘 다 일 쉬고 하고 싶은 거 해."

 "알았어. 내일 서점 안 와도 되지?"

 "어. 그냥 내일은 오지 마. 바람도 좀 쐬고 해."


 라키사는 다시 시선을 책으로 돌렸다. 좋아하지도 기분 나빠 하지도 않는다. 쟤는 이고가 왜 저런 말을 하는지 궁금하지도 않나? 나는 지금 이고가 왜 갑자기 내일 쉬라고 하는지 엄청 궁금한데. 라키사를 쳐다보았다. 라키사는 다시 책을 본다. 저 책이 뭔지 알고 싶지 않아. 뭔지 알아봐야 짜증만 날 거니까. 방으로 다시 들어가 자리에 드러누웠다. 내일은 잠이나 실컷 자야지.


 "오전에 별 일 없었지?"

 "응."

 "대출이나 판매 있었어?"

 "없었어."


 이고와 라키사가 나누는 대화가 들린다. 지극히 업무적인 이야기. 서로 짤막하게 업무와 관련된 이야기만 간단히 한 후 말이 없다. 이고는 라키사가 계속 그 학습 모임에 나가며 이상한 생각에 더 깊이 빠져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까? 라키사가 게첸과 자주 만난다는 사실도 알고 있을까? 아마 모르겠지? 거의 항상 라키사가 퇴근한 이후, 나와 켈라자야, 호즈라가 점심까지 다 먹고 난 후에야 서점에 돌아오곤 하니까. 그래도 지금 라키사가 보고 있는 책이 무언지 안다면 눈치는 챌 텐데. 이고, 너는 라키사 그냥 놔둘 생각이야? 네가 봤을 때 라키사 괜찮아보여? 이고 눈에는 라키사가 괜찮은가 보다. 내가 진짜 이상한 건가?



 하루가 조용히 끝났다. 아무 일도 없었다. 평소와 달리 나와 켈라자야, 호즈라에 이고까지 같이 점심을 먹은 것 정도가 특별한 일이었달까? 손님이 몇 명 와서 책을 빌려갔다는 게 특별하다고 해야할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오늘은 이고가 서점에 일찍 온 것 치고 아무 것도 없었다. 밖이 시끄럽든 말든 여기만 조용하면 돼. 그걸로 만족해. 아다비아도 루즈카 집에서 조용하고 평화로운 하루를 보냈을 거야. 서점을 정리하고 이고와 같이 방으로 들어갔다.


 "내일 왜 갑자기 쉬라고 한 거야?"

 "너무 피곤해보여서."

 "뭐가?"

 "이것저것."


 이고는 자리에 드러누웠다. 나도 불을 끄고 자리에 드러누웠다.


 "그러면 내일은 하루 종일 자도 되겠네?"

 "아니. 여기에서 좀 나가서 싸돌아다니라고."

 "어?"

 "너 좀 나가서 돌아다니라고 일부러 쉬라고 한 거야."

 "나?"

 "그래, 너만 쉬라고 하면 그러니까 라키사도 같이 쉬라고 했다."

 "내가 왜?"


 이해를 못 하겠네. 내가 뭐가 피곤해 보인다는 거지? 여기에서 하는 일이 뭐가 있다구. 기껏해야 청소나 하는 정도인데. 예전이야 책 수거도 나갔다 와야 했고 책 정리도 하고 자잘한 일이 많았지. 지금은 아무 것도 없잖아. 손님이 오지 않으니 심지어 청소조차 별 거 없다. 게다가 청소는 아침에 라키사가 다 해놓고 가서 더 할 게 없다. 실상 하루 종일 내가 하는 거라고는 계산대 지키는 것 밖에 없잖아. 그런데 뭐가 피곤해 보인다는 거야?


 "하루쯤 서점 벗어나 있어봐."

 "왜?"

 "다른 생각 좀 해보라구."

 "무슨 다른 생각?"


 무슨 다른 생각을 하라고 하는지 도통 모르겠네. 서점에서 벗어나 있는다고 해서 다를 거 하나도 없잖아. 여기가 너무 편안하니 밖에 가서 위험을 겪어보라는 건가? 그거 말고는 왜 내가 여기에서 하루쯤 벗어나 있어야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여기 일을 소홀히 여기는 것도 아닌데. 여기 일 열심히 하고 있어. 단지 여기에서 할 일이 진짜 너무 없어서 매일 계산대에 앉아 멍하니 있는 거지. 그런데 그건 내 잘못이 아니잖아. 손님이 와야 일하는 시늉이라도 할텐데 손님이 안 오니까 그런 거 뿐이다.


 "너 너무 서점 안에만 있잖아."

 "그러면 일하는 시간에 밖에 나가야 해? 책 수거도 없는걸."

 "그게 아니라, 너 계속 아다비아와 켈라자야 때문에 힘들어 하잖아."

 "아, 그거..."


 이고가 가느다랗게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린다. 어쩔 수 없잖아. 둘이 자기들 멋대로 나한테 이제부터 사귀는 거라 했지만, 그걸 받아들였으니까 그에 대한 대가지. 정신이 이상한 켈라자야와 눈이 안 보이는 아다비아. 이걸 어떻게든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얘네들과 안 헤어지지. 항상 걔네들 때문에 머리 터질 거 같은 건 사실이야. 하지만 걔네들과 어떻게든 잘 되고 싶은 것도 사실이야. 잘 되고 싶기 때문에, 그리고 진짜로 걔네들을 좋아하니까 이렇게 머리 터질 거 같은 거지. 힘들지만 감당해내야만 하잖아. 누가 뭐래도 결국은 내가 선택한 건데.


 "여기에만 있으면 생각이 이상하게 흘러갈 수도 있고..."

 "저주술?"

 "그래. 여기에만 있으니까 답은 안 보이고 저주술이면 뭐든 다 될 거 같은 생각도 들고 하는 거지. 가끔은 좀 나가봐."

 "나간다고 뭐 있는 건 아니잖아."

 "가끔은 아예 싹 잊고 하루쯤 시간을 보내봐. 너한테는 지금 그게 필요한 거 같다."


 그런다고 달라질 게 뭐 있을까? 거리에 답이 있을 리 없잖아. 거리에 굴러다니고 있는 것이 답이라면 누군가 하나는 그 답을 주웠겠지. 아무도 답을 찾지 못했고, 그건 거리에 답이 없다는 거야. 그래도 이고 말에 차마 반박하지 못하겠어. 너무 단호하게 이야기해서 괜히 토를 달았다가는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꺼진 불 다시 켜고 나한테 한 소리 퍼부을 거 같거든. 라키사도 오전에 항상 서점에 있어서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판단한 걸까? 나야 아다비아와 켈라자야 때문에 항상 심란한 상태라 해도 라키사는 그런 거 없잖아.


 "라키사는?"

 "너한테만 그러라고 하면 조금 그렇잖아. 그래서 라키사한테도 쉬라고 한 거야. 걔도 뭐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거 같기도 하구."

 "라키사 진짜 괜찮을까?"

 "안 괜찮으면 어떻게 하게?"

 "그래도..."

 "말을 안 들어먹는데 별 수 있어? 그냥 자기 살고 싶은 대로 살라고 놔둬야지. 걔 뭐 요즘 이상한 짓 해?"

 "그건 아닌데..."

 "에휴...뭐 이상한 짓 하고 다니는가 보구만."

 "아냐. 걔가 이상한 짓 할 게 뭐 있어."

 "놔둬. 걔야 알아서 잘 하든가 하겠지. 설마 게첸하고 사귀기라도 하겠냐."


 그 설마가 왠지 일어날 거 같아. 이고한테 라키사가 요즘 게첸과 둘이 엄청 어울려 다닌다고 솔직히 말하고 싶다. 라키사는 자기 행동을 게첸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다. 모르는 건지 일부러 외면하는 건지...내가 말하면 뭐든 삐딱하게 들으니 어떻게 할 방법도 없구. 이고에게 라키사한테 한 마디 좀 해달라고 해볼까? 아니야. 이고 말마따라 그건 라키사 인생이지.


 "그나저나 내일은 루즈카 집 안 가도 돼?"

 "오늘 내일 것까지 다 사다놨어. 굳이 안 가도 돼."

 "너는 그러면 내일 뭐 할 거야?"

 "나? 서점에서 쉬려구. 모처럼 늦잠 좀 푹 자게."


 이고가 진짜 늦잠을 푹 자며 쉴 건지 아닌지 모르겠다. 이고도 많이 피곤하겠지. 매일 아침 일찍 시장 가서 이것저것 사서 루즈카 집에 갔다가 오후에 돌아와서 서점 일 보니까. 모처럼 아침에 아다비아한테 갈까? 아니야. 그쪽에도 뭔가 일이 있으니 이고가 내일 아침에 루즈카 집 안 간다는 거겠지. 이고가 내일 다른 생각 좀 해보라고 쉬라고 한 건데 그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라는 소리잖아. 아다비아한테 간다고 하면 뭐라고 할 게 뻔해. 이고에게 말하지 않고 가는 방법도 있겠지만 결국 루즈카가 이고에게 내가 왔었다고 나중에 말할테니 그게 그거지.


 "켈라자야는?"

 "걔한테는 너한테 심부름 보냈다고 하면 돼. 하여간 내일은 혼자 조용히 나가서 머리 좀 식히고 와."

 "알았어."


 별로 돌아다니고 싶지도 않은데 돌아다녀야 하네. 거리가 안 위험한 게 아니잖아. 위험한 상황이 익숙해져서 그러려니 하며 살고 있는 거지. 여기저기 싸돌아다녀봐야 위험하기만 하고 재미도 없는데...갈 곳도 없고 말이다. 모처럼 북쪽으로 가봐? 거기 가봐야 아무 것도 없는데...북문까지 가본 적이 없으니 가면 또 볼 게 있기야 하겠지. 그런데 그 동네 자체가 그다지 마음에 안 들어. 동문이고 서문이고 다 마찬가지구. 뭔가 굉장한 것 따위가 그런 곳에 있을 리 없잖아. 돌아다녀봐야 피곤하기만 한데 억지로 돌아다녀야 한다. 별 일 없겠지. 쉬게 할 거면 나한테도 늦잠이나 푹 자라고 할 것이지, 왜 나는 나가라는 거야? 나갈 거면 차라리 켈라자야와 같이 나가게 하든가.



 뭐야? 왜 내 옆에 바짝 붙어 있어? 저 자리에서 여기까지 굴러온 거야? 대체 뭐 얼마나 지독한 악몽을 꾸었길래 몸부림치다 여기까지 왔어? 좁아 죽겠네. 이 이불 내 꺼란 말이야! 너는 왜 여기 기어들어와 있는데? 이불을 빼앗아오기 위해 잡아당겼다. 뭐야? 왜 팽팽해지기만 하고 내 쪽으로 안 와? 아예 이불 끝을 몸으로 깔고 누웠나 보네. 벽에 바짝 붙어 있어서 더 굴러갈 것도 없는데 진짜 귀찮게 하네. 이 미친놈, 여자도 아니고 남자가 왜 나한테 바짝 달라붙어 있는 거야? 이거 감비르한테 정신병 옮은 거 아니야?


 아침부터 짜증나네. 몸을 일으켰다. 이고 이놈은 왜 내 옆에 바짝 달라붙어서 자는 거야? 자기 이불도 있으면서 내 이불 덮고 다 빼앗아가려고 하구. 추우면 화로에 불 지펴서 방 공기 덮히든가. 이거 거칠게 흔들어서 자기 자리로 돌려보내야지. 그런데 맞은편 벽 쪽에 이불 덮은 사람이 있다. 저거 뭐야? 저거 이고 아니야? 그러면 지금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거 누구지? 이고 아니었어?


 '켈라자야였구나!'


 나한테 찰싹 달라붙어 자던 사람은 켈라자야였다. 베개 대신 내가 아다비아와 같이 보는 책을 베고 자고 있다. 나와 이고 둘 다 잠을 자고 있으니 베개 남는 건 없지. 보통 이고가 자는 자리에서 자는데 오늘은 이고도 자기 자리에서 계속 자고 있으니 내 옆에 달라붙어서 자고 있나보다. 문은 자기가 열고 들어왔겠지? 켈라자야도 밖에서 여기 문 열 수 있으니까. 어제 이고가 켈라자야한테 여기 열쇠 주고 알아서 문 열고 들어와서 자라고 했을 수도 있구. 이고가 문을 열어주었을 수도 있는 거고. 어쨌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켈라자야가 안에 들어온 거니까 별 문제될 것은 없다.


 헝클어진 긴 머리 사이로 보이는 얼굴. 긴 속눈썹에 오똑한 코. 괴로운 꿈 꾸고 있는지 힘이 들어가 있고 굳게 닫힌 두 분홍빛 입술. 보통 마딜인보다 훨씬 하얀 누르스름한 피부. 머리카락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새까만 머리카락 사이에 갈색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섞여 있다. 와히디야가 켈라자야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잡종'이라는 말. 확실히 흔하디 흔한 마딜인과는 외모부터 뭔가 달라. 마딜인들은 갈색 머리카락이 없어. 돌연변이인가? 왜 얘는 갈색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보이는 걸까? 눈도 묘하게 달라. 평소에는 별로 신경쓰고 본 적이 없지만 이렇게 자세히 살펴보니 신기하다.


 '진짜 예쁘다.'


 켈라자야 자는 모습이 너무 예쁘다. 행복한 꿈 꾸고 있는 듯 입꼬리가 위로 가볍게 살짝 올라가 있다면 훨씬 더 예쁠텐데. 그런 켈라자야에게 무리겠지. 그래도 눈까지 힘껏 찡그리고 있지 않은 걸로 만족하자. 너무 끔찍하고 괴로운 악몽은 안 꾸고 있다는 거 아니야. 이 정도면 켈라자야가 평화로운 표정 짓는 거잖아. 어쩌다 화내고 우는 모습인데 켈라자야 얼굴 떠올리면 그런 표정만 계속 떠오른다. 내 마음 속 켈라자야는 항상 뭔가 화나 있고 우는 모습이다. 얘가 나한테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준 게 다 그런 것 뿐이니 어쩔 수 없지. 사실 그런 모습 보이는 건 정말 가끔 있는 건데. 머리카락을 살짝 쓰다듬어주었다. 켈라자야 입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간다.


 '얘가 멀쩡했다면 나와 사귈 일은 절대 없었겠지?'


 조용히 자고 있는 켈라자야. 그래서 오직 얼굴만 볼 수 있다. 얼굴만 보면 정말 예뻐.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얼굴이야. 켈라자야가 멀쩡하고 평범한 인생을 살아왔다면 나한테 사귀자는 말을 했을까? 아니, 절대 그럴 일 없었을 거야. 나한테 너무 과분한 미녀잖아. 나보다 훨씬 돈 많고 잘난 남자가 얼마나 많은데. 나중에 얘가 정신이 멀쩡해지면 어떻게 될까? 그런 일이 일어나면 그때 나를 떠나갈까? 그때 나는 웃으며 잘 가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 죽어도 그러지 못할 거다. 어쨌든 나도 잘 되어야지. 언젠가는 얘도 좋아지고 나도 좋아질 거야. 그때도 지금처럼 계속 사귀고 있어야 하고.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게 아니야. 진짜 그렇게 되어야 해. 이렇게 아름다운 애가 왜 정신은 그런 상태일까? 정확히는 잘 모르지만 어려서부터 뭔가 끔찍한 일을 엄청나게 겪었던 거 같은데...너무 예뻐서 세상이 그 대가를 치르게 한 건가? 그래야 공평한 건가?



 시계를 보았다. 오전 10시. 이제 나가야겠다. 자리에서 나와 켈라자야에게 이불을 잘 덮어주었다. 세수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이제 또 여름이구나. 날은 계속 뜨거워지겠지. 햇볕이 참 좋다. 나뭇잎 냄새도 기분좋다.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그런데 이제 나, 어디로 가지? 지금까지 그걸 결정하지 않았다. 밖으로 나오기는 했는데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다. 찻집 가서 적당히 시간이나 때우고 있을까? 그러면 이따 이고가 여기서 뭐 하냐고 하면서 쫓아내려나? 이고 말대로 거리를 걸어다니며 돌아다녀보는 것도 괜찮을 거 같은데.


 정처없이 걸어봐? 거리를 둘러보았다.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지금 내 상황에 딱 어울리는 상황이네. 어디로 가야할 지 전혀 모르겠다. 분명히 길은 멀쩡히 있고 끝없이 이어지고 갈라지는데 정작 내가 갈 길이 하나도 없어. 어디든 방향을 잡고 한 걸음 걸어나가면 뭔가 달라질까? 그런데 어디로? 일단 강가를 향해 걸어가? 아니면 남쪽으로 - 에드자 대학교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 내 발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 내가 한때 항상 가던 그 길. 에드자 대학교로 가는 방향이다. 그 길이 가장 익숙하기도 하고 거기로 한 번 걸어가보고 싶기도 하니까. 그쪽에 변한 거라고는 아무 것도 없겠지만 말이다.


 '역시 별다를 게 없지. 그 사이 바뀌었을 리 없잖아.'


 그 사이에 변한 건 없어. 그냥 다 그대로야. 그렇게 빨리 바뀌는 세상이라면 이렇게 위험에 익숙해지지도 않았겠지. 나는 영원히 이렇게 살 건가? 설마...계속 서점에서 이렇게 살아야 하다니 답 없는 인생이잖아. 매달 조금씩 돈을 모으고 있기는 하지만 그걸로 어떻게 먹고 살아. 나 혼자라면 먹고 살 수 있겠지만 아다비아와 켈라자야까지 먹여살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턱없이 부족한 정도가 아니지. 그냥 불가능한 거지. 그렇다고 지금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미래 생각은 그만 하자. '미래', '앞날'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기만 해도 답답해지니까. 답도 없는 거 매일 머리 쥐어싸매고 고민해봐야 뭐 해? 이게 내가 어떻게 한다고 해서 바뀔 세상도 아니구.


 '차라클라야 일하는 식당이나 가볼까?'


 차라클라야 일하는 식당이 에드자 대학교 쪽에 있다고 했지? 그러고보니 그쪽은 안 가본지 진짜 오래되었네. 갈 일이 아예 없었으니까. 대학교는 여전히 문 닫은 상태고, 그쪽으로 책 수거하러 갈 일도 없었다. 그나마 있는 책 수거하러 가는 쪽도 주로 서점에서 북쪽이었지 남쪽은 아니었다. 특히 대학교 쪽은 더욱 아니었다. 남쪽은 잘 못 사는 동네이고, 에드자 대학교가 무기한 휴교 상태라 나처럼 공부하러 올라와서 그쪽에 살던 애들은 다 고향으로 돌아갔겠지. 그래서 그쪽에서 오는 손님 자체가 없어진 것 같다.


 '오랜만에 대학교 가보면 어떨까?'


 그렇게 가기 싫었던 학교. 매일 혼나기만 하고, 그나마도 나중에는 없는 사람 취급당했지. 매일 학교 가기 진짜 싫었다. 이제 와서 떠올려보면 그게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었어. 매일 학교 가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었지. 아니야. 그건 정말로 특별하고 소중한 거야. 이렇게 곳곳에서 사건 사고가 터지고 학교는 홀라당 불타서 문 닫아버리는 게 일상이고 정상적인 거야. 이 마딜 땅에 위치한 에드자에서는 말이야. 오히려 그렇게 그런 게 싫다고 느끼던 순간이 여기에서는 희안하게 평화로웠던 순간이었던 거야.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거에 대해 투정부리고 있었던 거구.


 오늘따라 특별히 평화로운 건가? 예전 학교 다닐 때와 거리 분위기가 똑같다. 가게에서 사람들이 나와 장사하고 있고, 거리에서는 아이들이 뛰놀고 있다. 나무는 코를 시원하게 만드는 푸르른 향기를 뿜어내고 있고 새는 하늘을 날며 짹짹 지저귄다. 짐을 실은 수레를 끌고 가는 사람의 발소리, 수레를 끄는 말과 소 목에 달린 방울 딸랑거리는 소리. 어디를 봐서 이게 위험한 도시야? 그러나 그렇게 방심하는 순간 죽음이 나를 덮치겠지. 내가 그렇게 정신 놓기를 바라고 있었다고 말하면서.


 '그러고 보면 여기에서 참 많은 일이 있었어?'


 아다비아와도 걸었었고, 라키사와도 걸었던 길. 그런데 지금은 혼자다. 어차피 이고 자고 있었는데 켈라자야 깨워서 데리고 나올 걸 그랬나? 아니야, 걔 밤새 돌아다니고 돌아와서 한참 깊게 자고 있었는데 어떻게 같이 돌아다니자고 깨워? 사실 이 길은 아다비아, 라키사와 걸었던 시간보다 나 혼자 걸었던 시간이 훨씬 길잖아. 횟수로 따져도 나 혼자 걸었던 적이 훨씬 더 많을 거구. 이상할 거 없다. 지금 누군가 말상대가 있다면 걷는 것이 덜 심심하겠지만, 어떻게 보면 이 길은 항상 나 혼자 걷던 길이었으니까. 아다비아, 라키사와 같이 걸은 것이 오히려 특별한 것이었지.


 이 거리 풍경은 그대로인데 모든 게 너무 달라졌어. 라키사는 이상한 생각에 푹 빠져버렸다. 나와 이제 말도 안 나눠. 나도 라키사도 서로 대화나누는 것을 피한다. 이야기해봐야 서로 감정만 더 상하니까. 라키사는 대체 왜 그런 이상한 생각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걸까? 누가 봐도 그 학습 모임에서 공부하는 건 인생에 도움이 되기는 커녕 미래를 어둡게만 만드는 건데. 오늘은 서점 오지 말라고 했으니 또 게첸 만나러 갔을 건가? 진짜 둘이 사귀게 되는 거 아니야? 지금처럼 자주 만나고 어울린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데. 라키사 자기 말로는 절대 아니라고 하지만 그게 말 뿐인 건지 진짜인지 어떻게 알아? 그리고 게첸은 확실히 라키사와 어떻게든 사귀고 싶어하고. 알아서 되라지. 라키사한테 신경써봐야 나빠지기만 하는데 관심 꺼버려야지.


 아다비아는 예뻤던 얼굴이 흉측해지고 눈이 멀어버렸다. 지금은 사람을 안 잡아먹는다고 하지만 예전에는 사람을 잡아먹는 쿠룬나스였지. 왜 그 멀쩡한 애가 쿠룬나스가 되어 내 앞에 나타난 걸까? 뮈젤에 가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물어보고 싶지만 물어볼 수 없다. 물어본다고 말해줄 리도 없지. 오히려 성질만 버럭버럭 내다 엉엉 울어버릴 꺼야. 뻔하지. 괜히 그 기억 다시 들추어내게 할 필요도 없구.


 아다비아, 라키사 모두 너무 달라졌어. 지금 이 길을 나 혼자 걷고 있는 것은 그거 때문인가? 모두가 변해버렸는데 나 혼자 그대로라서? 그래서 나는 지금 이렇게 예전과 똑같은 길을 걷고 있는 걸까? 나만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길도 이 망할 에드자가 바뀌기 전으로 돌아가 있는 건가? 당연히 그럴 리 없다. 그냥 아침이니까. 그리고 여기에서는 미친놈이 날뛰어서 얻을 게 없으니까 그런 거겠지.


 '남들이 보면 나도 변했을까? 다른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내가 변했다면 뭐가 변했을까? 예전이나 지금이나 뭐가 달라졌는지 모르겠다. 길을 걸을 때 예전보다 주변을 더 감시하듯 바라보는 것? 그런데 그건 당연한 거잖아. 어디에서 어떤 일이 터질 지 모르는데. 그거 말고 변한 게 있나? 심지어 아드라스어 실력조차 예전과 똑같은데...여자친구가 두 명이나 있는 건 확실히 다르다. 그 당시의 나와 지금의 내가 대화를 나눈다면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에게 여자친구가 둘이나 있다는 것 외에는 하나도 놀라지 않지 않을까? 어쩌면 변한 게 하나도 없다고 놀랄 수도 있겠네. 진짜 모든 게 다 바뀌었는데 너는 어떻게 그렇게 그대로냐고. 이렇게 변했다면 나도 같이 변해야 하는데 홀로 허공에에 붕 떠 있는 것처럼 안 변할 수 있다는 게 굉장하다고 소리칠까? 어쩌면 어떻게 그렇게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아드라스어 실력은 하나도 안 변할 수 있는지 기겁할 수도 있겠다.


 '아, 변한 거 하나 있구나!'


 그때는 학교 가기 정말 싫어했다. 그러나 지금은 학교가 너무 가고 싶어. 이왕이면 예전처럼 아다비아와 함께. 이제는 켈라자야도 같이? 켈라자야 정도라면 저주술 전공으로 들어가면 거기서 바로 1등하지 않을까? 저주술 실력으로는 치롤라 정도는 그냥 우습게 갖고 놀잖아. 바하르랑 케르무크 보면 중앙학문연구소 들어가도 그냥 최상위권 차지할 거 같은데. 켈라자야가 나와 같은 셀베티아어 전공으로 들어갈 수는 없겠지. 켈라자야는 학교를 제대로 나온 거 같지 않으니까. 그렇지만 저주술 전공이라면 켈라자야가 마음만 먹으면 들어갈 수 있잖아. 추천서가 필요하다면 루즈카가 써주지 않을까? 아무리 상상이라도 아다비아, 켈라자야와 같이 등하교를 한다면 참 즐거울 거야. 아니, 그 이전에 등하교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즐겁고 행복하겠지. 그게 내가 변한 거구나.


 확실히 너무 다 달라졌다. 루즈카는 항상 피곤해보인다. 만날 때마다 피곤해보여. 진짜 많이 피곤하겠지. 매일 아다비아 돌보고 자기 할 건 할 것대로 해야 하니까. 이 도시에서 가만히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피곤한데 아다비아까지 돌봐야하니 보통 힘든 게 아닐 거다. 블랑쉬블르는 장난기가 많이 사라졌다. 나한테 짓궂은 말을 던지거나 하는 일이 많이 줄어들었다. 오히려 나한테 자꾸 심각한 모습을 자꾸 보여준다. 가볍고 생각없이 사는 것 같던 예전 모습과 너무 반대되는 모습이다. 바하르는 동원령 때문에 치안 유지에 동원되면서 예전에 비해 꽤 많이 거칠어졌다. 치롤라는 자기들 주장을 짓밟은 사람들에 대한 복수에 사로잡혀 있는 거 같고. 둘이 사귀고 있는데 둘 다 거칠어졌다. 둘이 다투게 되면 볼 만 하겠다. 바하르도 엄청 거칠어졌지, 치롤라도 싸우지 못해 안달났지, 가관이겠네.


 '이고는 변한 게 있나?'


 내 주변 사람들 다 바뀐 거 같다. 그런데 이고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딱히 바뀐 거 같지 않다. 바뀐 거라면 일 때문에 짜증내는 게 줄어든 거? 그런데 그건 그냥 일이 없어서잖아. 그 당시에야 내가 실수도 많이 했고, 서점 일이 꽤 바빴다. 그래서 일 때문에 짜증낼 일이 종종 있곤 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서점에 오는 손님 자체가 거의 없다. 이고 혼자 뭔가 하긴 하는 거 같다. 대출 카드 보면 책이 들어오고 나가고 하고 있으니까. 가끔 이고가 아침에 나갔다 조금 늦게 돌아올 때 책을 들고 오는 경우도 있구. 그러나 그 정도는 예전에 비하면 진짜 일 없는 거다. 예전에 일 없는 날과 비교해도 일이 엄청나게 없는 거지. 그래서 일 때문에 짜증낼 일 자체가 없어서 그러는 거잖아. 나중에 일이 많아지면 또 일 때문에 짜증내겠지. 특히 블랑쉬블르! 예전처럼 자주 책 빌려가고 자꾸 반납 안 하고 한다면 보나마나 또 엄청 짜증낼 거다. 그 정도? 의외로 이고는 변한 게 없는 거 같아. 항상 나와 같이 있다보니 익숙해서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이고랑 같이 있어서 나도 안 변한 건가? 아니면 이고가 나 때문에 안 변하는 건가? 생각해보니 참 희안하다. 심지어는 켈라자야조차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해 많이 변했는데 이고는 하나도 안 변했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차라클라야가 일하는 식당에 도착했다. 여기 맞겠지? 차라클라야 있는지 일단 한 번 봐야겠다. 식당 안을 살짝 들여다보았다. 차라클라야가 있다.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어? 여기 어떻게 오셨어요?"


 차라클라야가 나를 보고 깜짝 놀라하며 활짝 웃는다. 내가 온 게 정말 반갑나보다. 차라클라야의 저 환한 얼굴.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여기 잘 왔어. 마땅히 떠오르는 곳 없어서 여기로 왔지만 그게 정말 좋은 선택이었다. 여기 안 왔다면 혼자 온갖 쓸 데 없는 생각하면서 계속 어디 가야하나 고민하며 거리를 걷고 있었을 거다. 차라클라야는 어떻게 저렇게 진짜 밝은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걸까? 여기 생활 하나도 안 괴롭나?


 "그냥 식사하러 왔어요."

 "아, 여기 앉아요!"


 차라클라야가 식당 제일 안쪽 자리에 앉으라고 하면서 의자를 빼어주었다.


 "아...이럴 것까지는 없는데요."

 "아니에요! 그날 서점에서 너무 고마웠어요. 책을 보았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기뻤는 걸요."


 얘 그날 책 읽지도 못했잖아. 그날 차라클라야의 행동을 보아서는 얘 아드라스어, 셀베티아어는 고사하고 마딜어 글자도 모르는 거 같다. 아예 글자를 모르는 문맹일 수 있어. 책장을 넘기는 모습에서 티가 났다. 아무리 외국어라 해도 최소한 마딜어 글자라도 알면 그렇게 책장을 넘기지 않아. 글자를 안다면 책 표지부터 차근차근 넘겨보려 하지, 얘처럼 두서없이 여기저기 펼쳐보지는 않거든. 그냥 책 몇 권 빼서 본 게 뭐가 그렇게 기뻤다는 거지? 나한테는 그게 일상이라 그 자체가 얼마나 굉장한 건지 전혀 느끼지 못하는 건가? 그럴 수도 있겠다. 나도 학교에 매일 갈 때는 학교 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몰랐으니까. 그래도 이렇게 의자까지 빼주면 너무 부담스럽잖아. 서점 와서 책 뽑아서 책장 몇 번 넘겨보는 게 뭐 대단한 거라구. 일단 자리에 앉았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여기에서 제일 맛있는 거는 뭐에요?"

 "우리 식당은 구운 고기와 빵이 제일 맛있어요. 정말 너무 맛있는데 사람들이 잘 몰라요."


 차라클라야가 사람들이 여기 구운 고기와 빵이 매우 맛있다는 것을 잘 모르는 게 너무 아쉽다는 듯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입을 살짝 굳게 다물었다. 이거 진심을 담아 말하는 거 아냐? 정말 그럴 거 같다. 진심이 전해진다. 이건 가식적으로 그러는 게 아니야. 나한테 구운 고기와 빵을 팔아먹으려고 일부러 저렇게 아쉽다는 투로 말끝에 한숨이 담겨 있고 얼굴을 살짝 찡그리는 게 아니야. 진짜야. 차라클라야가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처럼 이것도 진심이야.


 "그러면 구운 고기랑 빵 주세요."

 "예, 고기 구우려면 시간 조금 걸리니 기다려주세요!"


 차라클라야가 주방을 향해 소리쳤다.


 "여기 구운 고기에 빵 주문 하나요!"


 차라클라야는 나를 보며 싱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도 같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진심. 이런 느낌이야. 진심이 통한다는 느낌. 헛도는 느낌도, 비뚤어져버린 느낌도 아니다. 정확히 차라클라야의 진심이 나한테 전해졌다. 진짜. 차라클라야가 내게 보여준 모습은 진짜였다. 절대 거짓이 아니었다. 구운 고기와 빵이 맛없을 수도 있어. 그렇지만 최소한 차라클라야한테는 정말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것일 거야. 왜냐하면 진짜였으니까.


 순간 머리 속에 섬광 같이 환히 반짝이는 생각 하나. 나는 왜 차라클라야의 말과 행동에 대해 진심이고 진짜라고 느끼는 걸까? 그건 지금 상황이 다 엉터리고 거짓이라고 느끼고 있기 때문 아닐까? 내가 게첸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이유는 자기가 매일 착취당하는 불쌍한 인간이라고 항상 징징거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돈은 엄청나게 많이 벌고 있어. 하는 짓도 보면 사치를 즐기고 있구. 게첸이 착취당한다고 말하는 건 거짓이야. 착취당하는 게 아니라 부자 놀이 하고 싶어서 괴로운 거지. 내가 감비르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이유는 되도 않는 소리를 해서야. 여장을 하면 남자가 여자로 변해? 그냥 남자야. 그걸 아니라고 자꾸 우겨대고 여자 흉내내려고 하니까 싫은 거다. 라키사와 말 안 하는 이유는 정말 누가 봐도 되도 않는 소리를 공부한답시고 몰입하기 때문이다.


 아다비아와 켈라자야와는 그런 건 없어. 하지만 어려워. 내 말이 제대로 전해지는지, 걔네들 마음이 내게 제대로 전해지고 있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어. 찾아갈 때마다 화내지만 그렇다고 한동안 안 찾아가면 더 화내면서 자기 버릴 거냐고 하는 아다비아. 언제 어떻게 또 폭발할지 몰라 항상 조마조마하며 바라봐야 하는 켈라자야. 나와 켈라자야, 아다비아 사이에 진심이 통하고 있기는 할 거야. 그러나 정말 제대로 통하고 있는지 항상 확신이 서지 않아.


 하지만 차라클라야는 달라. 그냥 전해지고 느껴져. 어렵게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머리를 쥐어싸고 고민할 필요 없어. 왜냐하면 꼬이고 뒤집힌 것 없이 그대로 전해지고 느껴지니까. 마치 맨 앞에 '이건 내 진심이야, 절대 꼬아서 받아들이거나 하면 안 돼. 알았지?'라는 전제조건을 붙이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 같아. 너무 편해. 오해하고 말고 없잖아.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입으로 들어와 순식간에 허파까지 얼려버리는 차가운 겨울 바람처럼 한 번에 싹 전해져.


 차라클라야는 걸레를 들고 탁자를 하나씩 닦고 있다. 대충 슥 문질러도 될 걸 있는 힘껏 박박 문지르며 닦고 있다. 진짜 온 정성 다해서 닦네. 여기가 자기 식당도 아닐텐데 저렇게 열심히 일하다니 놀랍다. 서점에서 먹고 자는 나도 서점을 저렇게 열심히 청소하지는 않는데.


 "매일 여기에서 일해요?"

 "가끔 쉬는 날도 있어요. 하지만 웬만해서는 항상 일하려고 해요."

 "왜요? 매일 일하면 힘들지 않아요?"

 "일당으로 돈 받거든요. 한 푼이라도 더 모으려면 쉴 수가 없어요."


 차라클라야는 왜 열심히 돈을 모으려 할까? 설마 대학교 진학하려고?


 "나중에 대학교 진학하려고 돈 모으는 거에요?"

 "예. 대학교 가려면 돈 많이 필요하다고 들었어요."

 "대학교 왜 가고 싶어요?"


 차라클라야는 밝은 표정을 유지하며 또박또박 말했다.


 "많이 공부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공부를 가르쳐주고 싶어요."

 "아...그렇군요."

 "저는 돈이 없어서 공부 많이 못했어요.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꿈을 꾸는 사람. 그것도 이렇게 아름다운 꿈을 꾸는 사람. 단순히 상상을 하는 게 아니라 꿈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진짜로 노력하는 사람. 나도 저랬었던 적이 있었지? 고향을 떠나 에드자로 가기 위해서. 이 망할 마딜땅을 벗어나기 위한 첫 번째 관문으로 에드자로 가기 위해 노력했었다. 지금 차라클라야에 비하면 민망할 정도의 노력이기는 하지만 고향을 벗어나려고 책을 보기는 했잖아. 그런데 여기 와서는 뭐지? 순간 내 자신이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던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나 뿐만 아니라 내 주변 모두가! 차라클라야 말고 내 주변에 지금 꿈을 이루기 위해 진짜 노력을 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나? 이고는 말할 것도 없고, 루즈카, 블랑쉬블르도 그냥 현실에 맞추어 살아가고 있어. 본인들이 뭐라 하든 그건 사실이니까. 바하르, 케르무크도 마찬가지겠지. 아다비아, 켈라자야는...걔네는 꿈이랄 게 있을까 의문이네. 아다비아와 켈라자야는 꿈 이전에 현실조차 감당 못 하고 있으니까. 진짜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차라클라야를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건 '진짜'를 느끼기 때문일까?


 다른 사람들 눈에 차라클라야가 어떻게 비치는지 모르겠다. 그냥 글자 하나 모르고 무식한 식당 종업원 정도로 보이려나? 그래도 일은 열심히 하는 좋은 직원? 그러나 내 눈에 차라클라야는 빛이 난다. 쟤야말로 진짜라는 느낌이 든다. 사람을 기분좋게 하는 빛을 뿜어낸다. 왜 기분이 좋아지냐하면 꼬인 것도 없고 거짓도 없는 진짜거든. 변명만 엄청나게 쏟아내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달라. 진짜로 꿈을 위해 노력하는 인간. 어떻게든 그 꿈을 이루어낼 이 세상에 존재하는 '진짜 인간'. 얼마만에 접하는 정상적이고 따스한 말이야? 이런 어수선하고 흉흉한 세상에 아름다운 꿈을 갖고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존재하다니...어떤 세상이 되더라도 진짜는 꼭 존재하는 건가?


 "차라클라야, 서점은 저녁 8시쯤 문 닫아요. 하지만 그 이후라도 차라클라야가 공부하러 온다면 언제나 반갑게 맞이해줄께요."

 "정말요?"

 "예, 저 어차피 오전에 일 없거든요. 차라클라야만 괜찮다면 아무 때나 와도 되요."


 차라클라야가 활짝 웃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그래, 차라클라야 공부 도와줘야지. 진짜잖아.


 "차라클라야, 구운 고기에 빵 나왔어!"

 "예!"


 주방에서 음식이 나왔다고 소리쳤다. 차라클라야가 주방으로 들어가더니 접시 두 개를 들고 나와 내 앞에 놓았다. 접시 하나에는 손바닥 두 개 크기인 고기가 있었다. 다른 한 접시에는 딱 고기 크기만큼 한 넙적한 빵이 있었다. 차라클라야는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다시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 뭐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잠시 후, 차라클라야가 접시 하나를 들고 나와 내 앞에 놓았다. 접시에는 잘게 썰린 야채와 과일이 수북히 담겨 있다. 나는 이런 건 시킨 적 없는데?


 "어? 이건 제가 안 시켰어요."

 "타슈갈에게 도움받는 게 너무 고마워서 주는 거에요."

 "제가 도와준 게 뭐 있다구요."

 "저한테 공부를 알려주겠다고 한 사람이 타슈갈 덕분에 두 명이나 더 생겼잖아요."


 그게 이렇게까지 고맙다고 해야 할 일이야? 그래도 그건 아니라고 하면 또 실례일 거 같다. 구운 고기와 빵, 잘게 썰린 야채와 과일을 먹었다. 맛있다. 지금 나한테야 고기라면 뭐든 다 맛있기는 하지. 고기라고는 맨날 말라 비틀어진 육포 먹는 게 전부니까. 예전에 이고가 같이 시장 가자고 나와 라키사, 켈라자야를 데리고 나와 갔던 식당, 치롤라 문병차 에드자 북쪽에 갔을 때 갔던 식당에서 먹었던 고기보다는 못하지만 꽤 맛있다. 이고가 데려갔던 그 식당 두 곳은 고급 식당이었으니 당연히 여기보다 맛있었지. 그 돈 받고 여기보다 맛 없으면 욕 먹어야하니까.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라클라야에게 돈을 지불했다.


 "괜찮으면 오늘이라도 일 끝나고 서점 와요. 진짜 언제든 와도 괜찮으니까요."

 "시간 될 때 꼭 갈께요!"


 차라클라야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차라클라야가 다시 서점에 와준다면 정말 기쁠 거야. 나도 잘 모르기는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차라클라야의 공부를 도와줄 거다. 진짜 진심에는 진짜 진심으로 답해야 하잖아.



 식당에서 나왔다. 이제 어디 가지? 에드자 대학교나 다시 가봐? 거기 가봐야 아무 것도 없을 텐데. 학교 전체가 홀라당 타고 무너졌다. 그 후 폐교되었다가 무기한 휴교로 바뀌었다. 건물을 다시 지으면 휴교령이 풀릴 거라는데 이놈의 학교를 다시 짓기 시작한다는 소리를 여태 듣지 못했다. 폐교는 너무 충격적이니까 무기한 휴교라고 하고 실상 폐교한 거지. 학교 홀라당 불탄 게 언제인데 아직도 학교를 다시 짓는다는 소리가 없어. 그냥 버린 거야. 어차피 에드자 대학교 따위는 세상에 존재하나 안 하나 다를 거 하나도 없으니까.


 "어? 타슈갈!"


 내 왼쪽에서 누가 나를 불렀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에베디나단이 손을 흔들며 나를 향해 걸어온다.


 "이 시각에 웬 일이야? 너 보통 지금 서점에 있지 않아?"

 "아, 오늘 모처럼 쉬는 날이라서."

 "그래? 지금 어디 가? 무슨 약속 있어?"

 "아니. 딱히 뭐 없어."

 "그러면 우리 같이 잡담이나 하며 걸을래? 찻집 가도 되구."

 "그래, 그러자."


 마땅히 할 것 없어서 이제 뭐하나 하고 있었는데 잘 되었다. 에베디나단과 잡담 나누며 걸으면 또 시간이 흘러가겠지. 본 지 꽤 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항상 같은 일상이라 시간의 원근감이 가물가물하다. 오랜만에 봐서 반갑다고 해야할지 말아야할지 모르겠다. 에베디나단은 시장쪽을 향해 걸어간다. 나도 같이 걸어간다. 오늘따라 이 길도 평온하네. 요즘은 진짜로 예전에 비해 많이 안전해진 걸까? 아니야. 길가에서 사람들이 어제 누가 어딘가에서 살해당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잖아. 그걸 예전처럼 호들갑떨며 이야기하지 않고 태연히 이야기할 뿐이지. 이건 절대 평온해진 게 아냐. 그냥 적응당해버린 것 뿐이야.


 에베디나단에게 뭘 물어보지? 그동안 뭐 했냐고 물어보기엔 에베디나단을 본 지 얼마 안 되는 거 같다. 에베디나단은 저주술 수련한다고 했으니 저주술에 대한 것을 물어보는 게 나을 건가?


 "저주술 수련할 때 뭐가 제일 어려워?"


 에베디나단이 나를 쳐다본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 내 귀 옆을 지나가고 있는 이 거리에 존재하는 무수한 잡담 중 하나라는 저 표정. 그런 건가?


 "의구심 이겨내는 거."

 "의구심?"

 "'내가 이걸 해낼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 때문에 항상 좌절하게 돼."

 "기적이 이루어지기를 무조건 믿는 거나 마찬가지인 건가?"

 "그거랑 비슷할 건가?"


 내가 당장 아다비아 눈을 치료하는 상상을 한다고 해서 될 리 없잖아. 그걸 된다고 맹목적으로 믿는 게 어려운 것, 그것과 같은 걸까? 아다비아 눈이 번쩍 뜨이는 상상을 아무리 맹목적으로 믿으려 해도 맨정신이라면 아다비아가 눈을 뜰 수 없다는 걸 뻔히 아니까 믿을 수가 없다. 믿는 것만으로 무언가를 해내는 것 자체가 솔직히 믿을 수 없는 거니까 그거 때문에 좌절한다는 거겠지. 납득간다. 나도 그러고 있으니까. 하면 될 거라는 믿음이 없잖아. 뭘 해도 더 좋아질 거라는 믿음이 없으니 뭐든 다 하기 싫다. 하지만 아무 것도 안 하면 더 나빠지는 걸 아니까 그냥 억지로 하고 있는 거지.


 "그런데 그건 사실 별 거 아니야."

 "응?"

 "저주술을 믿으니까. 그 정도는 별거 아니지."

 "아, 그렇겠네. 너는 저주술 믿잖아."

 "믿고 말고의 문제는 아니지. 진짜 있잖아. 있는 걸 있다고 믿고 연구하는 건데."


 아, 맞다! 저주술 자체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그걸 내가 쓰지 못할 뿐이지.


 "너 정말 저주술 쓸 수 있어?"

 "아주 조금."

 "안 어려워?"

 "나는 믿으니까. 그리고 진짜 되는데 안 믿어야할 이유가 없잖아."

 "너 담배에 저주술로 불 붙일 수 있어?"

 "아직 그 정도까지는 못 해. 한참 집중하면 붙일 수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켈라자야보다 못 하겠네. 감비르보다도 못 하려나? 이게 아드라스인과 마딜인의 차이일까 싶다. 나나 에베디나단은 아드라스인이니까 넘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는 거야. 마딜인들은 그것을 넘는 것에 아무 문제가 없구.


 "우리는 아드라스인이니까..."

 "꼭 그런 건 아니야. 자꾸 이게 될까 의심하게 되어서 마딜인들보다 더딜 뿐이지."


 그게 이고가 말한 차이 아닐까? 우리 아드라스인들은 저주술로 될까 계속 의문을 가지니까.


 "그런데 그거보다 더 어려운 게 있기는 해. 이게 진짜 어려운 거야."

 "뭔데?"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는 거."

 "뭐?"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는 것? 무슨 말이야? 상상으로 안 되는 게 있어? 상상 속에서는 뭐든 할 수 있잖아. 상상 속에서야 내가 이 세상 왕이고 신이지. 마음대로 다 할 수 있으니까. 상상 속에서는 불가능한 게 없잖아. 그런데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는 게 어렵다고? 이건 무슨 말이야?


 "우리 모두가 상상 속에 벽이 있어. 딱 그 벽 앞까지만 상상할 수 있는 거야."

 "응?"

 "그 너머를 상상해낼 수 있을 때 저주술은 한 단계 더 발전하게 돼."

 "무슨 말이야?"

 "음...그러니까 딱 네가 아는 것까지만 상상할 수 있다고. 그 너머는 상상할 수 없어. 뭐 그런 거야. 네가 저주술을 수련하면 이게 무슨 말인지 언젠가 알게 알게 될 거야."

 "그러면 내가 알 일이 없겠네."

 "그럴지도 모르겠다."


 내가 저주술을 수련할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나는 여기를 떠나 다른 나라로 가는 게 목표잖아.


 "그런데 그건 마딜인만 저주술을 쓸 수 있다는 생각 같은 거야?"

 "글쎄...그럴 수도 있겠지? 네가 저주술 쓰는 상상 해본 적 있어?"

 "아니."

 "그렇다면 네 상상의 벽은 일단 그거 아닐까?"


 내가 저주술을 쓰는 상상을 한다면 그때 벽을 하나 뛰어넘는다고? 당연히 나도 그런 상상 안 해본 건 아니다. 저주술로 아다비아 눈을 뜨게 하고 켈라자야 정신을 멀쩡하게 하는 상상, 당연히 안 해봤을 리 없잖아. 그게 당연히 안 될 거라는 걸 아니까 관두는 거지.


 "인간은 누구나 하늘을 나는 상상을 해. 그런데 그거 말고 다른 방법으로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거 떠올려본 적 있어?"

 "무슨 말이야?"

 "하늘을 나는 게 날개짓하거나 그냥 붕 뜨거나 하는 거 말고 말이야. 다른 방법 떠올려본 적 있어?"

 "그거 말고 뭐가 더 있는데?"

 "그게 바로 상상의 벽이야. 그걸 넘어서면 저주술이 한 단계 발전하는 거야."

 "날개짓하거나 붕 뜨는 거 말고 또 하늘로 올라갈 방법이 뭐가 있어?"

 "떠올려봐. 그러면 네 상상의 세계가 훨씬 넓어질 거니까. 갑자기 두 배로 넓어질 걸?"


 그런 게 의미있을까? 바뀌는 건 없잖아. 어쨌든 날지 못하는 것은 똑같은데. 그저 허황된 꿈 하나가 더 늘어나는 정도 아닐까? 그런데 궁금하다. 날개짓하거나 붕 뜨는 거 말고 또 하늘로 올라갈 방법이 과연 존재하기는 할까?


 "너는 또 다른 방법 알고 있어?"

 "아니."

 "뭐야? 너도 모르잖아."

 "그래서 그게 제일 어렵다구. 상상의 벽을 뛰어넘는 거."


 허탈했다. 에베디나단은 뭔가 답을 알고 있을 줄 알았다. 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확신에 차서 말했으니까. 그런데 정작 자기도 모른다니...헛웃음이 나왔다.


 "그게 쉬울 리 없잖아. 그게 쉬우면 마딜인들이 세계 정복했지. 저주술로 말이야."

 "그렇긴 하네."

 "그래서 인간을 이용해 실험하는 인간들도 있어."

 "뭐? 인간을 이용해서 실험한다고? 여기에?"

 "응. 있어."

 "그런 미친놈들이 마딜땅에 있다고?"

 "마딜 뿐만이 아니라 어디든 다. 그런데 마딜에도 있어."


 여기에? 이 마딜땅에? 인간을 이용해 실험하는 인간도 있다고?


 "이거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인데 말이야."

 "뭔데?"


 에베디나단은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우리에게 신경쓰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내가 치르치나 가서 직접 구한 정보야. 그런데 이거 진짜 누구한테도 말하면 안 돼? 알지? 우리끼리야 아드라스인이니까 이런 말 해도 되지만, 이거 마딜인들한테 말하면 무슨 일 당할 지 몰라."

 "알았어. 대체 뭔데?"


 에베디나단은 갑자기 나와 어깨동무를 했다. 그리고 천천히 이야기해주기 시작했다.


 "치르치나 인근에서 인간을 이용한 저주술 실험이 있었어. 두 종류 실험이 동시에 이루어졌는데, 이 실험 중 하나의 이름은 비르바스, 다른 하나는 비를레쉬 실험이었어. 각 실험에는 피실험체인 여자 아이 한 명이 있었어."

 "비르바스와 비를레쉬?"


 이름에서부터 뭔가 불길하다. 비르바스와 비를레쉬. 둘 다 실험 이름으로 쓰였다면 좋은 뜻이 아닌데? 특히 비르바스는 그냥 써도 무지 나쁜 뜻이잖아. 떼로 밟아버린다는 말이니까. 실험 이름부터 떼로 밟아버린다는 말이면...에베디나단은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계속 이야기했다.


 "한 무리는 무조건 학대를 했어. 그 중에서 딱 한 명은 그 학대받는 아이들에게조차도 학대를 받게 했구. 이유는 없어. 뭘 해도 학대당하는 거야. 그렇게 커진 모든 증오와 분노는 피실험체 한 명한테 집중되었어. 그 애는 그런 끔찍한 학대 속에서 저주술을 강제로 익혔대."

 "얼마나 끔찍한 학대였는데?"

 "네가 상상할 수 있는 것에서 극단 아닐까? 모두가 화풀이용으로 두들겨팼대. 밥도 제대로 줬을 리 없잖아. 남들 다 먹고 남은 찌꺼기만 모아다 바닥에 대충 뿌리고 주워먹게 했다고 하니까."

 "아...미친..."

 "더 끔찍한 건 말이야, 그게 그 피실험체 한 명한테는 단 하루도 빠짐없이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이었다는 거야. 모두의 증오와 분노가 담긴 그릇이었달까? 모든 증오와 분노를 집중시켜 끝없는 증오를 받은 아이가 어떤 저주술을 쓸 수 있는지 연구한 거야. 그게 바로 비르바스 실험이었어."

 "그게 가능해?"

 "응. 그랬대."


 미친 놈들...진짜 미친 거 아니야?


 "그런데 정반대의 실험도 있었어."

 "비를레쉬 실험?"

 "응. 그건 딱 정반대야. 한 무리는 무조건 칭찬하고 잘 했다고 하고 예뻐하는 거야. 그리고 그 중 피실험체 딱 한 명한테는 무조건 잘 했다고 칭찬만 했대. 무조건 모두가 사랑하고 아껴주고. 그러면서 저주술을 익히기 한 거야. 무조건 가장 좋은 건 그 피실험체 차지였구. 이렇게 모두의 사랑과 칭찬을 집중시켜서 끝없는 사랑을 받은 아이가 어떤 저주술을 쓸 수 있을지 연구한 게 비를레쉬 실험이야."

 "그건 그래도 낫네."

 "과연 그럴까?"

 "응?"

 "거기에서 나오면? 그때도 누구한테나 다 사랑받는 게 될 거 같아?"

 "아!"


 무조건 사랑받는 아이. 하지만 그 실험에서 나오는 순간 그 믿음은 깨진다. 아이가 받을 충격은...


 "여기서 재미있는 점이 하나 더 있어. 바로 그 양쪽 무리에서 선택된 애들에게 저주술로 남을 죽이도록 시킨 거야. 그리고 비르바스 실험 대상자들은 일주일에 한 번, 매번 한 번씩 한 명씩 비를레쉬 실험 대상자들에게 끌려갔어. 비를레쉬 실험 대상자들의 살해 대상으로 말이야."

 "그게 말이 돼? 그렇게 진짜 마구 죽여대는 실험이?"

 "응. 진짜야. 마딜놈들도 보면 미친놈들 많다니까."

 "설마..."

 "다 같은 인간이잖아. 궁금한 거지. 극단의 힘 같은 거."

 "그래도...그 실험 지금도 진행중이야?"


 에베디나단이 입을 다물더니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한 번 쳐다보더니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려 말했다.


 "몰라. 일단 그 실험은 끝났을 거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 그 피실험체 여자애 둘은 사라졌어. 그리고 나머지는 죄다 처참히 살해된 채 발견되었구."

 "뭐? 진짜?"

 "응. 심지어 실험 관계자들까지 모두 싹 다 살해당했어. 그러니 일단 그 실험은 끝났다고 봐야지. 어디에선가 비슷한 실험이 또 진행중인지는 모르겠지만..."

 "미친 마딜 새끼들..."

 "뭐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은 안 그러겠어? 다 방법만 다른 거지. 남아드라스 공화국이나 셀베티아 왕국도 뒤져보면 이런 거 있을 걸? 우르간 왕국은 말할 것도 없구."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런 실험을 할 수 있어? 멀쩡한 인간을 갖고?


 "너 그거 지어낸 이야기 아니지?"

 "절대 아니야!"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너도 그 실험 참여했어?"

 "그건 아니야."

 "그러면?"

 "내가 치르치나 있었을 때 마침 그 사건 일어나서 거기 완전 뒤집어졌거든."

 "그 실험이 폭로된 거야?"

 "아니. 치르치나 근교에서 사람들이 다 떼거지로 죽어 있으니까. 그것도 전부 몸이 갈가리 찢기고 터져 죽었는데 난리가 안 나겠어? 나도 그 현장 가봤는데, 너도 알잖아. 여기가 아무래도 다른 나라보다 미개한 거. 그래서 그냥 방치되어 있더라구. 운 좋게 거기서 수습되지 않은 실험 보고서 몇 개 찾았지. 그거 보고 진상 파악하게 된 거야."

 "미친 새끼들..."


 에베디나단 이야기를 들으니 뭔가 꺼름찍해졌다. 블랑쉬블르는 이 내용을 진짜 몰랐던 걸까? 아니면 에베디나단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걸까? 만약 에베디나단의 말이 맞고 블랑쉬블르의 짐작도 맞다면 켈라자야와 와히디야의 과거는 둘 다 끔찍했다는 거잖아. 둘의 행동을 떠올려보면 누가 비르바스 실험의 대상자였고 누가 비를레쉬 실험의 대상자였는지 솔직히 뻔하다. 아니야. 안 돼! 제발 아니기를...켈라자야의 과거가 그럴 리 없어! 켈라자야는 아니야! 켈라자야가 숨기는 과거가 그런 과거라고 절대 믿고 싶지 않다. 상상조차 안 되는 끔찍한 과거. 그리고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발악. 누가 그 모두를 죽였는지는 몰라. 하지만 비르바스 실험 피실험체가 그랬지 않을까? 모두의 증오와 분노를 온몸에 담고 있었으니까. 켈라자야가 그랬던 거야? 켈라자야가 지금껏 내게 보여준 행동을 보면 그러고도 남지. 아니야. 절대 아니야. 켈라자야는 그냥 버림받았던 것 뿐일 거야. 그런 실험의 피실험체였을 리 없어!


 "너 왜 그렇게 표정이 어두워?"

 "나?"


 에베디나단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내게 물어보았다. 아, 에베디나단은 켈라자야 모르지? 계속 나 혼자 서점에서 일하고 있을 때 왔으니까.


 "혹시 주변에 왠지 그 사건에 연루되었을 것 같은 사람이 있어?"

 "아니! 있을 리 없잖아!"

 "그런데 왜 그래?"

 "왜가 아니라 끔찍하니까 그렇지! 그런 놈들이 여기서 활개치고 있다면..."

 "그럴 수도 있겠네."


 '그럴 수도 있겠네'가 아니잖아. 다 끔찍해. 피실험체가 돌아다니는 것도, 그 실험을 계획한 사람이 여기 있는 것도. 다 아니겠지. 그런 놈들이 있었다면 여기 상황은 더 심각했을 거야.


 "아, 저주술 수련을 하고 싶으면 먼저 추를 매달아놓고 그것이 저절로 도는 상상을 해봐. 그게 돌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저주술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거야."

 "그거?"

 "응. 별 거 아닌 거 같지만 진짜니까."


 에베디나단과 헤어졌다. 다시 혼자 걷는다. 시장까지 왔다. 이제 슬슬 돌아갈까? 이 정도 돌아다니고 서점 돌아가면 이고도 딱히 뭐라고 하지 않을 것 같은데.



 발길을 다시 서점쪽으로 돌렸다. 시장 안에 들어가봐야 특별할 것도 없다. 아, 간식거리나 사서 갈까? 켈라자야 먹으라고. 내일 아다비아 문병갈 때 들고 갈 것도 조금 사고.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간식을 파는 가게로 갔다. 켈라자야한테는 사탕을 줘야지. 아다비아한테는 안 돼. 갑자기 발악하다가 사탕 꼴깍 삼키면 목 막히다. 아다비아한테는 과자 줘야겠다. 사탕과 과자를 샀다. 북적이는 시장. 오늘은 여기도 평화롭다. 담벼락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거지들. 저것들도 멀쩡히 오늘 하루를 잘 보내는구나. 그 피실험체들...과연 살아있을까? 켈라자야는 아닐 거니까. 살아있다면 이 세상, 이 모습이 어떻게 보일까? 특히 비르바스 실험 피실험체. 저 거지들도 그 피실험체보다는 행복한 인생을 살아왔고 살아갈 거란 거잖아.


 서점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만약 내가 저주술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아다비아의 눈도, 켈라자야의 아픈 기억도 고칠 수 있을까?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그게 이루어진다면 나는 그 후 어떻게 해야 할까? 둘 다 치료해주고 이 땅을 떠나면 되지 않을까? 여기 벗어나면 둘 다 뭔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모를 거 아니야. 이 땅을 벗어나 저주술을 쓰지만 않으면 되잖아. 그런데 왜 내 주변에는 다 이따위 인간들만 득시글대는 거야? 진짜 이상하네. 마딜 땅에 저주술사가 여럿 있는 거야 사실이다. 게다가 여기는 저주술사들이 다니는 학교도 있어. 내가 일하는 곳은 서점이라서 그럴 수도 있어. 책 많이 보는 사람 중 하나가 저주술사니까. 그렇지만 어찌 된 게 다 뭔가 하나씩 미친 거 아닌가 싶단 말이야. 그냥 더 미치고 덜 미치고의 차이 아닌가 싶기도 하구.



 누가 내 왼쪽 어깨를 탁 쳤다. 뒤를 돌아보았다. 아 제기랄...와히디야다.


 "왜? 아파?"

 "뭐야?"


 와히디야는 활짝 웃으며 내 왼팔에 팔짱을 꼈다. 이게 미쳤나? 백주대낮에 왜 이러는 거야?


 "야, 놔! 당장 풀어!"


 전에 켈라자야 앞에서 와히디야가 나를 끌어안는 바람에 엄청 혼났다. 그거 얼마 안 되었다. 켈라자야 겨우 풀렸다고. 걔 마음 풀어주느라 진짜 고생했다. 그런데 또? 이게 미쳤나! 팔을 빼내려 할 수록 더 힘줘서 내 팔을 꽉 잡는다.


 "야, 미쳤어? 대체 왜 그래?"


 "여기 사람들 많은데 너 껴안고 뜨겁게 입맞춤할까?"

 "뭐? 뭔 미친 개소리야!"


 와히디야를 내 팔에서 뜯어내었다. 이게 진짜 돌았나? 어디서 무슨 약이라도 먹고 온 거야? 이건 왜 백주대낮에 이 짓거리하는 거야?"


 "너는 내 건데 왜 그래?"

 "미쳤냐? 내가 왜 네꺼야?"

 "당연히 너는 내 것이니까. 내가 내 것을 껴안는 게 무슨 문제 있니?"


 두 눈을 크게 뜨고 오히려 내게 되묻는다. 이건 또 무슨 논리야? 내가 왜 와히디야 거야?


 "야, 나는 켈라자야의 애인이라구! 너랑 사귈 생각 죽어도 없어!"

 "너 말 진짜 지독하게 하는구나!"


 와히디야 얼굴이 굳었다. 뭐? 내가 틀린 말 했어? 나는 켈라자야의 애인이고, 와히디야와 사귈 생각은 진짜 눈꼽만큼도 없다. 아니, 와히디야 싫다구!


 "내 말이 지독한 게 아니라 네 행동이 지독한 거야! 너 때문에 켈라자야 오해 푸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무슨 오해?"

 "무슨 오해긴! 걔가 내가 너 좋아하는 줄 알았잖아!"

 "맞잖아. 너는 나 좋아하잖아. 어떻게 나를 싫어할 수 있어?"

 "어떻게? 싫으니까 싫지! 너 맨날 켈라자야한테 시비걸잖아. 그리고 지금 행동이 제대로 된 거라 생각해? 내가 너랑 사귄다고 했어? 나 너 이러는 거 진짜 싫다니까? 너랑 사귈 마음 절대 없구!"


 와히디야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진심이다. 나는 켈라자야를 좋아해. 그래, 사랑해! 하지만 너는 싫어! 왜냐하면 켈라자야를 못 살게 굴지 못해 안달이니까! 와히디야 눈에 눈물이 고인다. 왜?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 자기가 잘못해놓고, 뭐? 그러면 내가 좋게 말해줄 줄 알았어? 네가 팔짱끼면 막 신나서 어쩔 줄 몰라 할 줄 알았냐? 천만에! 네가 팔짱낄 때 이거 켈라자야가 우연히 보고 또 충격받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끔찍했다. 이번엔 다행히 빨리 뜯어내어서 안도했다.


 "너 정말 나쁘다."


 와히디야는 손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어쩌라구? 내가 지금 달래줄 거 같아? 뭘 달래줘? 사람 제대로 곤란하게 만들어놓고는. 와히디야를 뒤로 하고 서점을 향해 계속 걸어갔다. 와히디야는 따라오지 않았다.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야. 다시는 나한테 엉겨붙고 하지 않겠지. 확실히 끊어내야 해. 가뜩이나 켈라자야 어디로 튈 지 모르는데 괜히 와히디야에 대해 오해 사고 싶지 않다. 와히디야가 어찌 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고. 저건 친구도 아니잖아. 나한테 소중한 건 어디까지나 켈라자야지 와히디야가 아니다. 저건 분명히 켈라자야한테 시비걸기 위해 일부러 나한테 접근하는 거야.



 서점으로 돌아왔다. 켈라자야가 계산대 뒤에 앉아 있다.


 "이고는?"

 "아까 나갔어. 바람 좀 쐬고 싶대."

 "이거 먹어."


 켈라자야에게 시장에서 사온 사탕을 건네주었다.


 "고마워!"


 켈라자야가 해맑게 웃는다. 그래, 켈라자야는 아니야. 그런 실험을 당했다면 이렇게 웃을 수 있을 리 없잖아. 처음 만났을 때 친구인지 아닌지 따질 리도 없구. 믿고 싶지 않아. 지금 이렇게 입에 사탕 넣고 좋아하는 켈라자야가 비르바스 실험의 피실험체였다니...분명 맞을 거다. 안 그러면 블랑쉬블르가 그렇게 관심을 갖고 있을 리 없겠지. 블랑쉬블르가 이야기해준 것과 에베디나단이 이야기해준 것을 종합해서 보면 얘가 맞아. 그러나 아닐 거다. 믿고 싶지 않아. 켈라자야가 그런 일을 당했을 리 없어.



 혼자 거리를 돌아다닌지 일주일이 넘었다. 그게 어제 일 같은데 벌써 6월 10일이다. 이고는 오늘 일이 있어서 늦게 돌아온다고 했다. 루즈카 집에도 갔다 와야 하고 블랑쉬블르 집에도 다녀와야 한다고 했다. 블랑쉬블르한테 받아올 책이 있어서 그거까지 받아오면 서점 문 닫을 시간이 될 거 같다고 했다. 서점은 그냥 조용하다. 호즈라는 계속 서류와 책을 보며 무언가 적어가며 정리하고 있다. 켈라자야는 내 옆에 앉아 있다.


 서점 문이 열렸다. 누가 왔는지 보려고 서점 문 쪽을 바라보았다.


 "차라클라야!"

 "안녕하세요."

 "어서 와요. 오늘 쉬는 날이에요?"

 "예. 공부 배우러 왔어요."


 자리에서 일어나 차라클라야에게 다가갔다. 차라클라야는 아무 것도 안 들고 왔다. 이것만 봐도 얘가 문맹이라는 게 확실하다. 글자를 안다면 공부 배우러 올 때 뭐 쓸 거라도 하나 들고 오지. 얘는 지금껏 제대로 공부를 배워본 적이 없기 때문에 공부를 배우러 갈 때 무엇을 들고 가야하는지도 모르는 거야.


 "어떤 거 공부하고 싶어요?"

 "사람 치료하는 방법요. 그거 배워서 알려주면 서로 치료할 수 있을 거 같아서요."

 "아, 그러면 의학요?"

 "예. 힘없고 아픈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의학은 나도 모르는데...일단 의학 책을 찾아보았다. 책이 있기는 있다. 당연히 아드라스어다. 이걸 차라클라야가 볼 수 있을까?


 "차라클라야, 아드라스어 글자 알아요?"


 차라클라야가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사실...저 글자 몰라요."

 "아...그러면 우리 글자부터 같이 공부할래요?"

 "예!"


 마딜어 글자부터 알려줘야 하나, 아드라스어 글자부터 알려줘야 하나? 마딜어 글자 알아봐야 책은 못 본다. 책을 보고 공부하려면 아드라스어 글자부터 배우는 게 낫지. 하지만 일상 생활에서는 마딜어 글자가 더 중요하지 않나? 어떤 글자부터 알려줘야 할지 고민된다. 일단은 차라클라야가 책을 보고 싶어하니 아드라스어 글자부터 알려주는 게 낫겠지? 계산대로 가서 종이와 펜을 가져왔다. 켈라자야한테 비켜달라고 하기는 조금 그렇네. 그냥 사이좋게 바닥에 앉아서 공부해야겠다.


 아드라스어 글자를 하나씩 알려주기 시작했다. 한 글자 쓰고 발음해주고 차라클라야에게 따라쓰라고 했다. 그렇게 세 글자 알려주었는데 갑자기 켈라자야가 깔깔 웃기 시작했다. 쟤는 또 뭐가 웃겨서 저렇게 웃어대는 거야? 켈라자야는 내 옆으로 오더니 나를 밀쳐냈다.


 "왜 그래?"

 "너도 아드라스어 못하면서 누가 누굴 가르쳐주는 거야?"

 "어?"

 "타슈갈, 비켜. 내가 알려줄께."


 차라클라야가 켈라자야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에요? 왜 그러세요?"

 "아, 타슈갈은 아드라스어 그렇게까지 잘 알지 못해요."


 차라클라야가 나를 쳐다본다. 차라클라야도 놀랐겠지. 아드라스인이 아드라스어를 못한다고 하니까. 켈라자야가 무슨 헛소리하나 싶을 거다.


 "맞아요. 저 아드라스어 잘 몰라요. 마딜 공화국에서 태어나서 자라서요."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그러면...둘에게 같이 배우면 더 좋을 거 같아요!"


 켈라자야와 같이 차라클라야에게 아드라스어 글자를 알려주기 시작했다. 말이 좋아 같이 알려주는 거지, 켈라자야 혼자 다 알려준다. 글자를 또박또박 쓰며 쓰는 방법을 보여준 후 발음을 해준다. 그리고 똑같이 해보게 한다. 차라클라야는 손에 힘을 잔뜩 주고 글자를 천천히 써가며 소리내어 읽어본다. 차라클라야가 펜을 이상하게 잡으려 할 때마다 켈라자야는 차라클라야의 펜 잡은 손을 교정해준다. 나는 옆에서 그걸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하구. 그냥 마딜어 알려준다고 할 걸 그랬나? 그랬으면 내가 직접 알려주었을 텐데. 그렇지만 이렇게 옆에서 둘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도 좋다. 켈라자야도 차라클라야한테는 경계심을 보이지 않는다. 켈라자야가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 알려줄 수 있다는 게 놀랍다. 만약 비르바스 실험 피실험체였다면 이런 건 못하지 않았을까?


 "자, 이제 처음부터 다시 해볼까요?"

 "예."

 "순서대로 쓰면서 소리내서 발음해봐요."


 켈라자야는 차라클라야에게 계속 처음부터 글자를 써보고 읽게 시켰다. 한 글자 써서 알려준 후 맨 처음글자부터 다시 써보도록 시켰다. 차라클라야는 첫 글자부터 써가며 발음한다. 잘 써나가다가 막힌다. 켈라자야는 말 없이 묵묵히 쳐다본다. 저걸 참아내다니! 지금까지 보아온 켈라자야라면 바로 손이 올라가도 이상하지 않은데 전혀 그러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기다린다. 차라클라야는 한참 곰곰히 생각하다 한 글자 쓴다. 틀렸다. 그래도 켈라자야는 말 없이 기다린다. 차라클라야가 새로 배운 글자까지 쭉 다 썼다. 켈라자야는 그제서야 어떤 글자를 빼먹었는지, 어떤 글자가 틀렸는지 하나씩 지적해준다. 그리고 다시 써보게 한다. 차라클라야가 순서대로 다 적는다. 이번에는 틀린 것도 없고 빠진 것도 없다.


 "잘 했어요. 이제 다음 글자에요."


 또 같은 과정의 반복. 한 글자 알려줄 때마다 맨 첫 글자부터 순서대로 쓰게 시킨다. 저러면 맨 처음 글자만큼은 확실히 외우겠네. 저건 몇 번을 써보는 거니까. 글자가 늘어날 수록 차라클라야가 순서대로 써가는 시간도 길어진다. 그 시간을 켈라자야는 말없이 차라클라야를 바라보며 견뎌낸다. 다 쓰고 나서 틀린 게 있으면 지적해준다. 전혀 화내지 않는다. 오히려 매우 상냥하고 친절하게 틀린 부분을 고쳐준다.


 호즈라가 서류를 정리하고 인사하고 나갔다. 켈라자야는 호즈라에게 인사하고 다시 차라클라야에게 글자를 알려준다. 계속 반복된다. 틀리면 다시 순서대로 소리내서 발음하며 써보게 하고, 다 맞으면 새 글자를 알려준다. 둘 다 꽤 피곤할 텐데 피곤한 내색을 전혀 보이지 않는다. 글자를 하도 써서 시커매진 종이가 한 장 두 장 늘어간다. 차라클라야가 외운 글자 갯수도 종이가 늘어가는 것처럼 늘어나간다.


 글자를 다 알려주니 날이 어둑어둑해졌다. 차라클라야가 이것을 지금 이 자리에서 다 외웠을 리는 없겠지. 몇 번 더 와서 외워야 할 거다. 그래도 한 글자라도 외웠다면 그게 어디야. 이제 최소한 한 글자는 읽을 수 있다는 거잖아. 그것만으로도 차라클라야가 볼 수 있는 세상은 엄청나게 넓어진 거 아닐까? 전에 에베디나단이 이야기했던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해낸 것처럼 말이야.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이 글자들 꼭 다 외울게요!"

 "잘 외워와요."


 켈라자야가 미소지으며 차라클라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타슈갈, 켈라자야, 나중에 꼭 제가 일하는 식당 와요. 제가 맛있는 음식 드릴게요."

 "시간 될 때 갈게요."

 "아, 호즈라도 데리고 와요. 모두 같이 오세요!"

 "예."


 차라클라야가 집으로 돌아갔다. 이고는 아직도 안 돌아온다. 오늘 엄청 많이 늦을 건가 보다. 켈라자야를 바라보았다. 켈라자야도 나를 바라본다. 그냥 미소지어보였다. 켈라자야도 씨익 웃는다. 의외였다. 켈라자야가 차라클라야에게 글자를 가르쳐주며 울그락불그락할 줄 알았다. 그런데 전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속으로 기뻐하는 것 같았다. 자기도 남을 도와줄 수 있어서 기뻐했을까? 자기가 필요한 인간이라는 느낌을 받아서? 그런 것까지 물어보는 건 이상해. 기분 좋으면 좋은 거지. 켈라자야에게도 차라클라야의 진짜 진심이 전해진 거겠지? 누구든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그 진심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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