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기적과 저주2018. 10. 8. 13:00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3장 16화


 방 안으로 살살 들어오는 풀냄새 나는 어둠. 촛불이 바르르 흔들린다. 이제 5월 11일도 끝나간다. 바닥에 누워 두 눈을 감고 잠들면 이 하루도 끝나버리겠지. 그러나 그렇게 곱게 잠들 수 있을까? 아다비아는 지금 이 시각 끝없는 절망에 시달리고 있고, 켈라자야는 목적 없이 거리를 걷고 있다. 이게 모두 지금은 내가 신경써야할 것들. 둘 다 밤이면 얌전히 평화롭게 잠이나 잤으면 좋겠다. 그런 너무나 사소한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적이라니...이러니 내가 지금 잠을 똑바로 잘 수가 없지. 진짜 미쳐버리겠네. 설마 아다비아가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건 아니겠지? 켈라자야가 어둠 속에서 살해당하는 건 아니겠지?


 "이고, 자?"

 "어? 왜?"


 진짜 방법이 그것 밖에 없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거 말고는 현실적으로 답이 존재하지 않잖아. 그거 자체가 비현실적이기는 하지만 그게 제일 그나마 가능성 있는 길이니까. 몇 번이고 생각해봤다. 알아, 이거 불가능하다는 거. 하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내 머리가 조금은 시원해질 거 같아. 하나 안 하나 같은 결과라도 한다면 최소한 걔네를 위해 뭔가 노력한다는 생각에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겠지.


 "나 아무래도 저주술 수련해야할 거 같아."

 "뭔 말이야?"


 이고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표정이 매우 좋지 않다. 이고가 무슨 말을 할 지 예상이 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잠이나 자라.' 아니면 이렇게 말하겠지. '그딴 소리 할 시간에 책이나 한 줄 더 봐라.' 하지만 그것들이 다 답이 아니라는 걸 아니까 문제지. 그래도 내가 저주술 수련할 거라고 한 게 아니라 저주술 수련해야할 거 같다고 말해서인지 아직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다. 대체 왜 이런 말을 했는지 정확히 알려고 저러고 있는 것일 거다. 어떤 이유든 좋은 말을 해줄 리 절대 없겠지만.


 "아다비아랑 켈라자야 저렇게 놔둘 수는 없잖아."

 "응?"

 "쟤네 고쳐주는 건 저주술 밖에 없지 않을까?"

 "그러니까 걔네들 고쳐주기 위해 저주술 수련하겠다고?"

 "응."


 이고가 두 눈을 감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 한숨 속에서 이고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 새끼는 잠이나 처 잘 것이지 왜 이 밤에 헛소리하는 거야? 이고는 말없이 두 눈을 감고 가만히 있는다. 이고도 답답하겠지. 자기가 생각해봐도 아다비아와 켈라자야를 정상인으로 만드는 방법은 저주술 외에 없으니까. 그거 말고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둘을 지금까지 그렇게 놔두지 않았을 거다. 인정할 수 밖에 없어. 받아들여야만 해. 저주술 외에는 방법이 없어. 걔네 둘과 동시에 사귀게 된 이상 나는 저주술 수련을 해야만 해. 그거 말고는 그 어떤 희망도 존재하지 않으니까.


 "너 진짜 그게 저주술로 될 거라 믿냐?"

 "저주술은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거니까..."

 "그래서?"

 "내가 저주술을 익히면..."

 "저주술 익히면 뭐?"

 "걔네 정상으로 돌아가는 상상을 해 현실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촛불이 흔들린다. 이고의 그림자도 흔들리다. 나를 쏘아보는 이고의 눈빛. 이고가 하루 종일 느낀 모든 짜증과 분노가 저 눈빛을 이루고 있다. 분명해. 왜 이놈마저 정신이 돌아버린 거 아니냐고 속으로 절규하고 있겠지. 그렇지만 그게 싫다면 나한테 답을 달라구! 너도 알잖아. 저주술 외에 그 어떤 답도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거. 그리고 아다비아와 켈라자야는 어찌 되었든 내 애인이라는 거.


 "그딴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그게 되면 마딜땅에 미친놈들은 왜 있고 병신들은 왜 있냐?"


 반박을 못 하겠다. 어줍잖은 저주술로 해결될 문제라면 지금 이곳 상황이 이 지경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그래도 그나마 존재하는 희망을 불가능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은 아니잖아. 루즈카도 해결 못 한 문제를 내가 과연 해결해낼 수 있을까? 어찌 되었든 하는 게 안 하는 것보다 낫잖아. 혹시 알아? 저주술 수련하다 뭔가 다른 깨달음을 얻어 걔네들 문제를 해결할 다른 방법을 찾게 될 지 말이야.


 "우리는 피가 아드라스인이야. 네가 아무리 마딜인처럼 굴어도 넌 아드라스인이라구. 네 뼈 속에 새겨진 아드라스인의 기운은 어쩔 수 없어."

 "그런 게 어디 있어? 이게 제대로 된 아드라스인이야? 몸뚱이만 아드라스인이지!"


 인정한다. 나는 제대로 된 아드라스인이 아니다. 몸뚱이만 아드라스인일 뿐이다. 제대로 된 아드라스인이라면 아드라스어도 완벽히 잘 구사해야지. 아니, 아드라스어가 모국어야지. 생각도 아드라스어로 하고, 말도 아드라스어로 하는 게 훨씬 편하고. 하지만 나는 생각도 마딜어로 하고 말도 마딜어로 하는 게 훨씬 편하다. 아드라스인의 문화가 뭔지 잘 몰라. 남아드라스 공화국은 아주 어렸을 적 딱 한 번 가본 게 전부다. 마딜인들과 어울리며 내가 딱히 이질적이라고 느껴본 적 없다. 이 몸뚱이가 마딜인 몸뚱이었다면 완벽한 마딜인이었겠지.


 "아무리 네 부모님께서 네게 아드라스어 안 알려줬다 해도 넌 아드라스인이야. 어렸을 적 미세한 것 하나하나가 너 뼈 속에 박혀있다구! 그러니까 너는 아드라스인이야. 저주술의 정신이 뼈에 새겨진 마딜인과는 달라! 너 지금까지 저주술을 네 자신의 이야기라 생각해본 적 있어?"

 "글쎄."

 "없잖아! 그런데 무슨 네가 마딜인이야? 아드라스인이지. 이제부터 네가 저주술이 네 자신의 이야기라 생각한다고 해서 그 생각이 바뀌냐? 너 무의식 속에 이미 꽉 자리잡혀 있는데?"

 "노력하면..."

 "노력한다고 다 돼? 노력하면 밥 안 먹고 살 수 있어? 막 하늘 날아?"

 "저주술로는 가능할 수도 있잖아."

 "저주술이 무슨 만병통치약인 줄 알아? 그럴 거면 왜 일하냐? 왜 공부해? 죄다 저주술만 수련하지. 한 놈만 성공해도 다 놀고 먹는 거 아냐? 그게 말이 돼? 이 도시 구석구석에 굶어죽고 얼어죽는 사람 천지인 거 몰라? 여기 사람들은 멍청해서 일하고 열심히 사냐?"


 이고의 말에는 감정이 듬뿍 실려 있었다. 이고는 저주술을 왜 저렇게 혐오하는 걸까? 애인인 루즈카는 마딜 공화국에서 손꼽히는 저주술사잖아. 그런데 저주술 이야기만 들으면 아주 학을 떼려고 한다. 지금 이고의 말이 틀린 건 아냐. 이고 말마따라 저주술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면 마딜 공화국이 이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지상낙원이었겠지. 다른 나라를 가본 것이라고는 아주 어릴 때 남아드라스 공화국을 가본 것 뿐이다. 그렇지만 알아. 이 나라, 이 세상에서 가장 거지같이 못 사는 나라야. 그러니 뭐 하나 제대로 된 게 없지. 제대로 된 건 모두 외국에서 수입해온 것. 책 하나 제대로 된 게 없는 나라잖아. 그렇지만 이고의 저런 반응은 이런 사실과는 별개다. 저건 진짜 감정적으로 싫어하는 거야. 마치 우리가 길거리에 있는 배설물을 보면 자연스럽게 인상을 찌푸리게 되는 것처럼, 이고는 저주술을 너무 싫어한다. 분명히 루즈카는 저주술사인데 말이다.


 밤공기가 조용히 나와 이고 사이에 쌓여간다. 뭐라도 해야 해. 그게 내 만족을 위해서든, 아니면 진짜 아다비아와 켈라자야를 위해서든. 그거 답은 결국 저주술 아닐까? 그거 말고는 그 어떤 답도 없잖아. 그나마 그게 제일 희망이 보이는 길이다. 그거 말고 대체 무슨 방법이 있다고? 그래, 켈라자야의 불안정한 정신상태야 내가 항상 옆에 있어주면 된다고 치자. 아다비아의 두 눈은?


 '맞다. 에베디나단!'


 에베디나단은 마딜인이 아니다. 분명히 아드라스인이다. 누가 봐도 에베디나단은 마딜인이 아니라 아드라스인이다. 그렇지만 에베디나단은 저주술사잖아. 이 땅을 벗어나 저주술을 사용하면 처형당한다는 것은 여기가 아닌 마딜 바깥에서도 누군가는 저주술 수련을 하고 있다는 소리잖아. 그 증거가 에베디나단이고. 아드라스인이니까 저주술을 사용할 수 없다구? 그러면 에베디나단은 뭔데?


 "마딜인 말고도 저주술 쓸 수 있는 사람들 있잖아! 마딜인 외에 저주술 못 쓴다면 여기 밖에서 저주술 수련은 왜 막는데?"


 내 말에 이고가 두 눈을 크게 떴다. 허를 찔려서 놀랐나? 이고는 나와 자신 사이에 쌓여 있는 밤공기를 모두 들이삼키려는 듯 숨을 크게 깊이 들이마셨다. 밤공기 삼켜댄다고 존재하는 사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 에베디나단은 뭔데? 아드라스인이지만 저주술을 수련하고 있고 저주술을 쓸 수 있는 에베디나단은 어떻게 설명할 건데? 이번에는 뭐라고 둘러댈 거야?


 "그래서 여기 말고 다른 나라에서 위대한 저주술사 등장했어? 그래, 수련하면 쓸 수야 있겠지."


 결국 수련하면 된다는 이야기잖아. 믿으면 이루어진다는 거잖아! 이고는 잠시 말을 쉬다 천천히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런 어설픈 저주술로 아다비아 눈 뜨게 할 수 있어?"

 "뭐?"

 "어설프게야 쓰겠지. 그렇지만 너 목표가 뭔데? 네가 어설프게나마 저주술을 쓸 수 있게 되는 거야, 아니면 아다비아 눈 뜨게 하는 거야?"

 "아다비아 눈 뜨게 하는 거."


 내가 저주술 수련을 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는 결정적 이유는 아다비아의 두 눈을 뜨게 해주는 거다. 이건 정말 그 어떤 정상적인 방법으로 해결될 수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네가 저주술 수련을 해서 아다비아 눈을 뜨게 해주겠다, 이거지?"

 "아마도..."

 "야, 생각해봐. 너 지금부터 저주술 수련해서 뭐 얼마나 대단한 저주술사가 될 건데? 저주술이 아예 뼈에 새겨진 루즈카도 못하는 걸 네가 하겠다구?"

 "하면 될 수도 있잖아."

 "그게 노력으로 될 거 같냐? 루즈카는 노력 안 해? 걔는 아예 그게 자기 밥줄인데? 너랑 루즈카는 아예 태생이 달라. 그런데 루즈카가 못하는 걸 네가 한다고? 너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꼭 안 된다고 할 수는 없잖아!"

 "뭐가 안 돼? 세상에 될 게 있고 안 될 게 있지. 네가 도대체 언제부터 저주술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너 솔직히 그냥 막연히 하다보면 되겠지 하는 거 아냐?"

 "그러면 답을 알면 연구는 왜 해? 수련은 왜 하고?"


 아다비아, 켈라자야와 동시에 사귀게 된 다음날에도 저주술이 모든 걸 해결해줄 거라고 믿지 않았다. 솔직히 지금도 그게 모든 것을 다 해결해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그게 인간을 하늘을 날게 만들어주고, 죽은 사람도 살려내게 해주고 할 리야 없으니까. 그렇지만 눈 먼 사람을 다시 눈 뜨게 하는 것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그게 어떤 방법을 통해 이루어야 하는지가 그렇게 중요해? 계속 수련하고 방법을 찾다보면 우연히 발견될 수도 있는 거잖아.


 "그거 답 찾으려고 다른 저주술사들은 노력 안 하겠냐? 아주 저주술이 이 세상 모든 것의 답이라고 믿는 놈들이? 그런데 해도 안 되잖아! 맹목적으로 믿어도 안 되는 걸 너처럼 그게 거짓일 수도 있다고 의심하는 놈이?"

 "오히려 맹목적으로 믿어서 안 되는 것일 수도 있잖아!"

 "그게 말이 되냐? 저주술은 믿음과 비례하는 건데?"


 이런 건 루즈카와 이야기해봐야 하는 거 아닐까? 어차피 이고도 저주술 모르잖아. 저주술이 뭔지야 알겠지. 그런 건 루즈카한테 들은 게 있을 테니까. 그렇지만 자기도 저주술이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 건지, 어떻게 사용하는지 하나도 모르잖아. 이고가 아는 저주술이나 내가 아는 저주술이나 별 반 차이 없을 거다. 어쩌면 내가 더 많이 알고 있을 수도 있어. 나는 마딜 땅에서 태어나서 자랐으니까. 이건 정말 무의미한 언쟁 아닐까?


 "타슈갈, 너 진짜 힘든 거 알아. 그런데 진짜 저주술은 아니야. 너 꿈은 여기 떠나는 거잖아. 이 쓰레기 같은 마딜 뜨는 거 아니었어?"

 "어...맞아."

 "너 어설프게 저주술 수련하면 저주술사라 여기 뜨지도 못해. 걔네 둘 도와주지도 못하구. 이거야말로 진짜 최악 아냐?"

 "아..."

 "야, 진짜 이럴 때일 수록 정신차려."


 이고가 벗어놓은 웃도리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이고도 엄청 흥분했다. 이고가 방 안에서 담배 태우면 감정적으로 엄청 격해졌다는 거니까. 나도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연기를 깊이 빨아들였다. 깔깔한 연기가 몸 속 깊이 흘러들어간다. 연기를 바닥으로 뿜었다. 망할...바닥에 부딪혀 희미하게 사라져가는 이 연기처럼 싹 다 없어져버렸으면 좋겠다.


 "너 켈라자야 잘 도와주고 있잖아. 걔 너랑 있으면 잘 참고 사고도 안 치지 않아? 계속 그러라구. 그러면 걔도 언젠가는 저주술 안 쓸 거 아냐. 아다비아는 네가 공부 열심히 알려주고. 그러면 둘 다 조금 이상하기는 해도 정상인처럼 살지 않겠어?"

 "그게 될까?"

 "그때 걔네들 데리고 여기 뜨면 되잖아. 너 지금 잘하고 있는데 왜 쓸 데 없는 저주술 타령이야?"

 "그걸로 될 리가 없잖아."

 "좋아지고 있잖아. 모기 눈깔만큼이라도 좋아졌잖아. 그러면 된 거 아냐?"


 이고가 담배를 화로에 집어던졌다. 깊은 밤. 답 없는 밤. 망할 밤. 아다비아는 뭐가 좋아지고 켈라자야는 뭐가 좋아졌다는 거야. 아다비아는 오늘도 여전히 시꺼먼 미래만 보고 있을 거고 켈라자야는 지금도 밤거리를 싸돌아다니고 있을텐데. 이게 오히려 더 나빠지는 것일 수도 있다. 충분히 가능해. 더 아래로 힘차게 뛰어내리기 위해 힘을 비축하고 있는 것일 수 있어. 아다비아가 느끼는 절망을 내가 뭔 수로 덜어줘? 켈라자야가 나 때문에 참은 분노를 내가 어떻게 줄여줘? 내 눈에만 보이지 않을 뿐, 안에서는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을텐데.


 "자자. 쓸 데 없는 생각하지 말구."


 이고는 자리에 몸을 뉘였다. 나도 자리에 드러누웠다. 두 눈을 감았다. 깜깜하다. 이것이 내 미래 아닐까?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아다비아와 켈라자야와 함께 해야할 숨막히는 깜깜함. 이것은 내 욕심이 너무 커서일까? 알아. 둘을 포기하면 돼. 그러면 어디 가서 구걸해서 먹고 사는 한이 있더라도 여기를 뜰 수 있겠지. 그렇지만 둘 다 잡고 싶어. 둘 다 잡으면 이 깜깜함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거야. 둘을 놔버리면 나 혼자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 거구. 아닌가? 둘을 놔버리면 둘은 둘 대로 암흑 속으로 떨어지고 나는 나 혼자 쓸쓸하게 깜깜한 어둠 속으로 굴러떨어지는 건가?



 어젯밤 이고와 언쟁 벌인 것 때문에 머리가 뒤숭숭한데 아다비아는 성질을 버럭버럭 낸다. 1116년 5월 12일. 뭔가 지독하게 꼬이는 것 같은 날. 오전에 푹 자고 루즈카 집에 와서 아다비아를 보러 와서 책을 펼쳐 한 줄 읽자마자 아다비아 기분이 매우 나빠졌다. 지금 내가 책이 눈에 들어오게 생겼냐? 이걸 본다고 답이 나와? 그래서 더 보기 싫다. 이거 열심히 봐봤자 뭔가 뾰족한 수가 튀어나오는 것도 아니잖아. 학교가 언제 문을 다시 열 지도 모르고. 학교가 다시 문을 열어도 아다비아와 같이 학교에 갈 수 있을까? 아다비아가 다시 학교로 돌아가려고 할까?


 "너 바보야? 왜 이것도 몰라? 너 공부 하나도 안 했지?"

 "응."

 "왜 안 했어?"

 "시간이 없어서."

 "네가? 너 오전에 일도 안 하잖아! 무슨 시간이 없어?"

 "진짜 시간이 없었어."


 시간이야 많았지. 단지 이 책을 보기 싫어서 안 봤을 뿐이야. 무슨 변명이 필요하겠어? 물론 지금은 아다비아한테 '이 책 진짜 보기 싫어서 안 봤어'라고 말하면 아다비아가 노발대발할 거라 시간이 없었다고 둘러대는 것이기는 하지만...하고 싶은 것이라면 없는 시간 쪼개서 하고 하기 싫은 것이라면 있는 시간 쪼개서 안 한다. 내가 볼 의욕만 있었다면 진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하더라도 어떻게든 이 책을 봤을 거다. 그런데 이 책 볼 시간이 엄청나게 많았고, 아드라스어를 아는 켈라자야, 호즈라가 곁에 있었음에도 내가 이 책을 지난 번 아다비아 문병갔다 돌아온 후 단 한 번도 펼쳐보지 않은 이유는 별 거 없다. 이 책 진짜 보기 싫어서.


 "너 거짓말 할래? 내가 너처럼 멍청한 줄 알아? 너 지금 나 앞 안 보이니까 무시하는 거지?"

 "아니야!"


 무슨 앞이 안 보인다고 무시를 해? 책을 안 본 것은 사실이지만 아다비아가 앞이 보이는 상태였다고 해서 내가 과연 이 책을 펼쳐보았을까? 아마 아닐 거다. 어차피 학교는 문을 닫았고, 언제 다시 개교할지 기약이 아예 없다. 언제 학교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는데 차라리 어디 가서 대장간 일이라든가 음식 만드는 일이라도 배우는 게 낫지 않을까? 아니면 서점에서 일해서 번 돈을 악착같이 모아서 뭐가 되든 일단 셀베티아 왕국으로 떠나든가. 이것을 공부한다고 답이 보이는 상황은 아니잖아. 이걸 공부하나 안하나, 아다비아 눈이 보이나 안 보이나 답 없는 상황인 건 매한가지인걸.


 "이 멍청아! 내가 그거 모를 줄 알아? 왜, 새로운 거짓말 해보지 그래?"

 "무슨 거짓말?"

 "맨날 시간 없었다는 말 말고 참신한 거 말이야. 아, 너는 머리가 돼지만도 못해서 그런 생각을 못 하지?"

 "뭐?"

 "내 말이 틀렸어? 차라리 켈라자야와 열심히 노느라 나한테 관심 쏟을 시간이 없었다고 하지 그래?"

 "뭔 말이야? 뭘 또 켈라자야와 열심히 놀아?"

 "너 찔리나 보다? 왜? 내가 딱 맞췄어? 인간의 머리라면 아무리 관심없어도 이 정도로 못할 수는 없잖아!"


 참자. 지금 이런 말을 마구 내뱉고 있는 것은 아다비아다. 내가 잘못한 거야. 당연히 책을 한 줄이라도 보고 왔었어야 했다. 책을 아예 안 보고 왔을 때 아다비아가 성질을 마구 낼 거라 충분히 예상했다. 그래, 내가 아다비아와 보내는 시간에 너무 무성의하게 준비했던 거야. 그렇지만 아다비아가 성질내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니 짜증이 치솟는다. 저건 내가 여기 왔을 때 성질내지 않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오지 말라고 해서 안 오면 성질내고, 오면 왜 왔냐고 성질내고, 책 안 보고 오면 왜 안 보고 왔냐고 성질내고, 보고 오면 후딱 책 다 보고 다시는 안 오려고 하냐고 성질내고...이건 뭐 뭔 짓을 해도 성질내니 답이 없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아다비아가 성질을 내지 않을까? 아다비아가 두 눈을 뜨게 되는 것 외에는 진짜 답이 없는 거 아니야? 아다비아가 두 눈을 뜨기 전까지는 나한테 항상 저렇게 성질을 내지 않을까?


 "밥은 왜 처먹어? 너는 길거리 쓰레기나 주워먹어! 돼지처럼!"

 "야, 그건 말이 조금..."

 "왜? 내가 잘못 말했어? 사람 같지도 않은 머리면 돼지처럼 먹어야 하는 거 아니야?"


 아, 열받네. 마음 같아서는 같이 소리치고 싸우고 싶다. 내가 잘못했다. 그래, 내가 진짜 진짜 크게 잘못했다. 내가 완전 무성의하게 아다비아와 시간 보내려고 왔으니까. 반성한다. 책도 조금 더 봐야 했고 어떻게 하면 아다비아 기분을 좋게 해줄지 뭐라도 하나 더 고민하고 왔어야 했다. 아다비아 기분을 조금이나마 밝게 만들어줄 말과 행동 하나 정도라도 떠올리고 와서 실행해야 했다. 그런데 아무 것도 안 했지. 그러니 아다비아는 성질 제대로 났구. 그렇지만 말이 너무 심하잖아? 저 말을 감비르가 했다면 바로 턱에 주먹을 꽂아버렸을 거다. 시간이 없어서 공부를 안 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돼지처럼 길거리 쓰레기나 주워먹으라니 말이 너무 지독하잖아! 꼭 이걸 잘 읽고 다 잘 알아야 인간인 건 아닌데.


 "너 차라리 그 두 눈 뽑아버려. 나처럼 장님이면 아무리 병신짓 해도 다 이해해준다?"

 "야! 그래도 그건 아니지!"

 "뭐?"

 "그래도 앞을 봐야 뭐라도 하지."


 아다비아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차! 내가 엄청난 말실수를 했다. 별 거 아닌 말이라 생각하고 무심코 내뱉은 말이었지만 상대는 앞이 안 보이는 아다비아다.


 "뭐? 너 그 말 다시 말해봐."

 "응? 무슨 말?"

 "방금 한 말 말이야!"

 "아...그러니까..."

 "왜? 왜 말을 못 해? 뭐 찔리는 거 있니?"

 "미안해."

 "뭐가?"


 아다비아가 나를 향해 상체를 굽히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저 붕대 뒤에 있는 진짜 아다비아 눈과 표정은 어떤 모습일까? 아마 분노에 가득차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겠지. 아다비아 앞에서 말할 때는 무엇을 말하든 이게 아다비아 신경을 긁지 않을지 신경쓰며 말해야 하는데 순간 이걸 놓쳐버렸다. 진짜 아다비아에게 상처주려고 한 말이 아닌데. 뭐라고 말해도 아다비아는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겠지.


 "네가 생각하는 그런 뜻으로 말한 거 아니야."

 "내가 무엇을 생각했는데?"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


 이야기가 계속 꼬인다. 아, 진짜 그냥 잘못했다고 싹싹 빌 걸! 괜히 아다비아한테 네가 생각하는 그런 뜻으로 말한 거 아니라고 말했다. 진짜 꼬이기 시작하면 한없이 꼬인다. 아다비아는 앞을 봐야 뭐라도 한다는 말에 대해 자기는 아무 것도 못하는 무능력하고 밥이나 축내는 기생충이라고 생각했겠지. 그러나 그 말을 아다비아에게 그대로 말했다가는 아다비아가 몇 배로 더 상처받고 화날 거다. 돌아버리겠네. 대화가 좋게 풀려나가는 게 아니라 더 나쁜 쪽으로 치달아간다. 진짜 아다비아에게 상처주려고 한 말 전혀 아닌데 왜 자꾸 아다비아한테 상처주는 말만 입에서 튀어나가지? 분명히 조심스럽게 말한다는 게 오히려 더 나쁜 결과를 야기해버렸다. 그래, 나와 아다비아 사이에 벽은 없어. 라키사처럼 오해의 벽만 높아지지는 않아. 분명히 말은 통해. 그런데 이게 말이 서로 오가면서 말이 좋은 쪽으로 흘러가는 게 아니라 나쁜 쪽으로 흘러간다.


 "나라도 앞을 봐야 할 거 아니야."

 "왜? 너처럼 돼지만도 못한 게 앞은 봐서 뭣하게? 아, 쓰레기 어디 있나 찾아야 하니까 그런 거니? 그건 그냥 코로 찾아! 너 그런 뜻으로 말한 것도 아니잖아!"

 "아니야. 아다비아, 진짜 아니야!"

 "그러면 무슨 뜻으로 말한 건데?"


 아다비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바늘이 되어 고막을 콱 찌른다. 루즈카가 방으로 안 달려오는 게 신기하다. 루즈카는 1층에서 아다비아가 소리치는 것 모두 듣고 있을 거다. 아다비아가 항상 이래서 놀라지도 않는 건가?


 "그래도 너랑 나 중 하나는 앞을 봐야 구걸이라도 할 거 아냐."

 "아, 그러니까 나는 장님이니까 구걸도 못한다, 이 소리니?"

 "그런 말 아니야! 아다비아, 진짜 아니야. 나라도 앞을 봐야 우리 둘이 합쳐서 뭐라도 먹고 살 거 아냐."

 "너 그거 너무 티나는 거짓말이라는 거 다 알고 있거든?"

 "아니야. 진짜야!"

 "그러면 우리 결혼해."

 "뭐?"

 "지금 결혼하자구!"


 그 순간이 떠올랐다. 아다비아가 눈 먼 년이 할 수 있는 게 몸 팔고 구걸하는 거 말고 뭐 있냐고 절규하며 나를 향해 다리를 벌리던 그 잊어버리고 싶은 장면. 그 순간을 어떻게 잊어? 아다비아의 보이지 않는 두 눈을 떠올릴 때마다 그날 바로 그 지옥같던 장면이 저절로 떠오른다. 그것은 나와 아다비아 사이에 있었던 과거. 그리고 언젠가 다시 우리 둘 사이에 벌어질 수 밖에 없는 미래. 그 끔찍한 순간에서 도망치고 싶기 때문에 어떻게든 아다비아 눈을 뜨게 하고 싶다. 너무나 무서우니까. 그 어떤 것 단 하나도 변하거나 흐릿해지지 않고 생생하게 매일 아다비아를 떠올릴 때마다 선명하고 뚜렷하게 떠오르는 과거의 악몽이자 파탄난 미래.


 "아다비아, 나 진짜 돈 없어. 결혼이 애들 장난도 아니잖아."

 "그러니까 너는 나랑 결혼하기 싫다는 거잖아!"

 "그게 아니라 지금 할 수 없다는 거야!"

 "어차피 미래에도 안 할 거 아니야? 내가 모를 줄 알아?"


 머리가 아프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지금 아다비아와 결혼? 미쳤어? 그래, 지금 결혼했다 치자. 당장 내일부터 어떻게 할 건데? 나와 아다비아가 굶어죽는 데에 딱 한 달이면 될까? 아니면 아다비아는 몸 팔고 나는 돈 주고 아다비아와 몸을 섞을 남자 찾아 거리를 헤매는 미래? 진짜 엄청나게 잘 되어야 아다비아 고향으로 내려가 거기에서 어떻게 흙이나 파먹으며 사는 거네. 그러면 동네 주민들과 아다비아 부모님께서 불쌍해서 뭐라도 줄 건가? 끔찍하잖아!


 "아다비아, 나도 방법 찾고 있어. 너 싫으면 내가 여기 왜 와?"

 "내 이런 모습 보고 우월감 느끼려구."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우월감이야?"

 "그러면 너는 나 보러 왜 오는데?"

 "너 걱정되고 보고 싶으니까!"

 "아, 내가 또 사람 잡아먹나 감시하려고?"


 내가 그거 때문에 여기 올 리가 있어? 여기 오는 이유는...말하려니 부끄럽다. 흥분해서 내뱉으려고 한 말. 그러나 그 말이 가슴 속에서 혀뿌리까지 올라온 순간, 혀뿌리에서 엄청난 신호를 내 뇌로 쫙 쏘아보냈다. 아, 그건 진짜 맨정신으로 말하기 부끄러워. 이럴 줄 알았으면 옷에 술이라도 뿌리고 올 걸 그랬나? 술 취해서 내뱉은 진담으로 꾸며서 말하게.


 "내 말이 맞구나! 그러면 그렇지. 네가 나를 보러 올 이유가 없잖아. 이렇게 책 한 자 안 보고 오는데..."

 "아니라니까."

 "그러면 뭔데?"

 "그게..."


 심장은 쿵쾅쿵쾅 뛴다. 혀가 입천장에 천천히 달라붙는다. 입을 열지 못하겠다. 진짜 그 소리를 어떻게...그래도 말해야 한다. 목소리가 일개미가 되어 살금살금, 비실비실 입에서 기어나왔다.


 "너 좋아하니까."

 "나 그 말 안 믿어."

 "진짜야."

 "내가 어떻게 해야 그 말을 믿을 수 있는데?"


 아다비아가 '풉' 소리를 내며 고개를 휙 돌렸다. 진짜인데...진짜로 너 좋아하니까 네가 이렇게 내가 뭘 하든 성질내도 내가 계속 너 보러 오는 거잖아. 너 설마 정말 내가 네가 지금도 사람 잡아먹는지, 아니면 다른 사고 치는지 감시하려고 여기 오는 거라 여기고 있는 거야? 그럴 거라면 내가 여기 올 필요 없잖아. 당장 1층에 루즈카가 있는데. 어쨌든 보고 싶으니까, 좋아하니까 오는 건데...


 "너, 내 애인이잖아."

 "그러니까 강제로 사귀게 되었지만 의무감 때문에?"

 "아니. 나 진짜로 너 좋아해. 많이..."

 "그런데 왜 그렇게 목소리가 기어들어가? 나를 좋아하는 게 그렇게 수치스럽니?"

 "아니."

 "그러면 왜?"

 "아, 그렇잖아!"


 답답해서 소리쳤다. 너한테 좋아한다고 말하는 게 얼마나 부끄러운지 꼭 내 입으로 말해야 해? 그 정도는 그냥 그러려니 해줄 수도 있잖아! 그때 봤다. 아다비아의 양쪽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가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붕대로 감은 눈 아래가 살짝 붉어진다. 그래도 그렇지, 꼭 그렇게 추궁해야 하냐? 어쨌든 아다비아가 좋아하니 기쁘다. 그래도 자주 해줄 말은 아니야. 진짜로 부끄럽다구. 그 미소도 잠시. 아다비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

 "내가 이러니 너는 나 떠날 거지?"

 "무슨 말이야?"

 "내가 이렇게 매일 성질만 내니까 너 나 버릴 거잖아."

 "안 버려! 내가 너를 왜 버려?"

 "아냐. 솔직히 말해도 돼. 나도 알고 있어."

 "아니라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언젠가 나를 버릴 거 알고 있어."


 얘는 또 내가 자기 버릴 거라는 소리를 한다. 내가 너를 버릴 거였다면 진작에 버렸지. 어젯밤 이고와 저주술 수련을 할 지 말 지를 놓고 언쟁을 벌일 필요도 없었어. 솔직히 켈라자야야 내가 항상 옆에 붙어 있으면 크게 폭주하지는 않으니까 그나마 덜 걱정된다. 그렇지만 너는 아니잖아. 내가 옆에 항상 있어줘도 문제잖아. 지금 너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그렇다고 내가 네 옆에만 있어줄 형편도 아니니까. 그래서 계속 머리 쥐어싸매고 고민하고 있는데 뭘 버려? 아무리 답이 없다고 해도 아다비아를 버릴 생각은 없다. 오히려 지금 이렇게 툭하면 나한테 자기를 버릴 거라고 하는 아다비아가 나를 버릴 수 있겠지.


 "너 절대 안 버려. 내가 왜 너를 버려? 우리 사귀는 사이잖아!"

 "그러면 왜 매일 나 보러 안 와? 말만 그럴싸하게 하고 행동은 전혀 아니잖아!"


 아다비아를 보러 매일 오지는 않는다. 나도 일해야지. 시간을 내려고 하면 내서 올 수도 있겠지만 아무 때나 오기 조금 그렇다. 여기는 아다비아 집이 아니라 루즈카 집이니까. 야심한 밤에 아다비아 보러 막 찾아올 수 없잖아. 루즈카가 괜찮을 시간에 찾아와야지. 물론 여기까지 오기 귀찮아서 안 온 날도 있지만, 오고 싶었지만 시간이 안 맞아서 못 온 날도 있다.


 "나 알고 있어. 너는 나를 안 좋아하고 거북해하니까 매일 안 오는 거야. 그저 어쩌다 마지못해 찾아오는 거지. 맞지?"

 "아니야. 그게 아니라 나는 서점에서 일하잖아. 그래서 여기 올 시간 별로 없어. 여기 네 집도 아니잖아. 이거 루즈카 집이지."


 아다비아가 조금 전 내가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지었던 것과는 또 다른 미소를 지었다. 뭔가 빈정거릴 것 같은 저 표정. 눈을 볼 수 없으니 정확히 어떤 마음이 담긴 표정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알 수 있다. 아까와는 달라. 이번에는 또 어떤 독한 말을 퍼부으려고 저러는 걸까. 대체 마음이 독에 얼마나 짙게 찌들어 있으면 무슨 말을 들어도 저렇게 다 꼬아서 들으려 하는 걸까.


 "그러면 너 서점 때려쳐."

 "뭐?"

 "너 서점 때려치라구. 나한테 공부나 배워."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다비아가 소리쳤다.


 "이 멍청아, 나한테 공부나 배우라고! 너는 머리도 멍청한 게 귀까지 먹었니? 나한테 공부 배우는 게 너 미래를 위해 훨씬 나은 일이잖아!"

 "나도 돈 벌어야할 거 아니야!"

 "너 거기에서 백날천날 일해서 돈 얼마나 벌 건데? 나 먹여살릴 수 있을 정도로 많이 받아? 차라리 나한테 공부나 배워. 그러면 어디 가서 서류 정리하는 일이라도 구할 수 있을 거 아니야!"

 "야! 당장 먹고 살 돈도 없는데 어떻게 그래? 누구는 그러기 싫어서 안 그래? 다 당장 먹고 살 돈 없으니까 일하는 거 아냐!"

 "그러면 너는 죽을 때까지 서점에서 일만 할 거야? 거기에서 무슨 미래가 보여? 너 왜 그렇게 멍청하니? 생각 좀 하면서 살면 안 돼?"


 진짜 열받네. 자기는 지금 루즈카 집에 신세지고 돈 쓸 일 하나도 없으니 이렇게 편히 이야기하지. 그래. 너 미래 시꺼멓지. 그러나 당장 내일 걱정은 별로 없을 거다. 루즈카가 당장 내일 여기에서 쫓아낼 일이 없으니 먼 미래는 시꺼매도 내일은 오늘과 같게 느껴질 거야. 하루종일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답 없는 미래, 그리고 네 자신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후회만 하고 있겠지. 내가 너랑 같냐? 당장 서점 때려치면 내일부터 뭐 먹고 살라고? 그래, 당장 내일이야 먹고 살겠지. 모아놓은 돈이 있으니까. 그런데 그 돈 다 쓰면? 지금 여기 일 못 구해서 구걸하는 거지들이 온 거리에 득시글한데! 나도 거기 껴서 같이 구걸이나 해? 그러면 너 미래는? 너야말로 왜 나한테 너를 버리라고 자꾸 강요하는 건데?


 "그렇게라도 돈 모으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건데!"


 너만 소리칠 줄 아냐? 나도 소리칠 줄 알아!


 "너, 나한테 지금 당장 헤어지자고 비는 거야? 한 푼이라도 더 모아놔야 너 여기에서 나오게 될 때 내가 하루라도 더 먹여살릴 거 아냐! 너도 돈 못 벌고 나도 돈 못 벌면 앞으로 어떻게 할 건데? 사이좋게 흙 파먹고 콱 뒤져?"

 "아, 그래. 너 속마음 잘 알았어. 너 돈 떨어지는 날이 나를 버리는 날이구나!"

 "너 자꾸 왜 그래? 너 진짜 나 싫어? 싫으면 왜 사귀자고 했어? 아주 헤어지지 못해 환장했어? 너 먹여살릴 돈은 어떻게든 마련해야 할 거 아냐!"


 입을 다물었다. 그 뒤에 순간 튀어나오려고 한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멍청하게 그 교육은 신나서 쫄래쫄래 따라갔냐고, 병신 머저리도 아니면 거기가 저주술사들 가는 교육인데 네가 낄 자리인지 아닌지는 분간했어야 했을 거 아니냐고 말이다. 거기서 아다비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단지 아다비아가 거기에서 도망쳤고, 내 앞에 쿠룬나스가 되어 나타났다는 사실만 알 뿐이다. 얌전히 나랑 같이 에드자 대학교나 잘 다녔으면 얼마나 좋아! 아니면 중앙학문연구소 가서 하던 일이나 얌전히 처 하면서 지내고 있든가!


 "봐. 내 말 부정 못 하잖아."


 아다비아가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다비아, 그만하자. 나 노력하고 있잖아!"

 "무슨 노력!"


 아다비아가 두 손으로 두 눈을 가리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 아다비아는 두 눈만 안 보이는 게 아니라 마음도 아픈데! 아다비아가 아무리 심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쏟아낸다고 해서 나까지 소리쳐서는 안 되었다. 순간 화가 나서 소리쳐버렸다. 아다비아가 또 상처 크게 받은 거 아니야? 진짜 아다비아와는 왜 이렇게 엉망이지? 내 생각과 마음은 이게 아닌데...아다비아의 상처를 보듬어주고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게 해주려고 하는데 그 결과는 아다비아에게 새로운 상처를 입힌다. 왜 내 말은 아다비아에게 전해질 때 한 번 틀어져서 전해질까? 전혀 그런 의도로 이야기하는 것들이 아닌데. 대체 뭐가 문제야.


 "미안해. 소리쳐서..."

 "나도 이렇게 될 줄 몰랐어!"


 아다비아가 울먹이며 말했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 나도 몰랐단 말이야!"


 그래, 너라고 알고 그렇게 되었겠냐. 너도 당연히 몰랐겠지. 거기 가면 네가 눈이 멀고 쿠룬나스가 될 거라는 걸 알았다면 너는 당연히 거기 안 갔을 거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 누구도 거기 가지 않았겠지. 거기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다. 그건 아다비아가 직접 이야기해주지 않으면 알 길이 없을 거다. 아마 아다비아가 거기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줄 리는 없겠지만...


 "타슈갈, 미안해. 나 자고 싶어. 돌아가줘."

 "응."


 아다비아가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누웠다. 딱히 해줄 말도 없고, 무슨 말을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말 없이 아다비아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고 방에서 나왔다. 1층에서는 루즈카가 조용히 서류를 정리하고 있다. 루즈카에게 이만 가겠다고 인사했다. 루즈카는 입을 가리고 하품을 한 번 하더니 내게 조심히 돌아가라고 했다. 루즈카도 참 많이 피곤할 거야. 일은 일대로 해야 하고 아다비아도 돌봐야 하구. 루즈카에게 저주술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지금 루즈카 모습을 보니 한가하게 나와 대화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잠깐이라도 눈을 붙여야 할 것 같다. 루즈카도 지금 이 상황이 영 불만족스럽겠지? 루즈카라고 다를 거 없을 거다. 편하게 노닥거리며 이고와 놀고 싶겠지. 아다비아가 루즈카에게 어떻게 대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앞이 안 보이는 아다비아를 돌봐야하는 것 자체가 무지 힘들고 피곤할 거다.



 주변을 둘러보며 서점을 향해 걸어간다. 혹시 아다비아가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나 찾아본다. 뭐라도 하나 찾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주변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없다. 눈 먼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따위는 보이지 않아. 누군가 돈을 주기를 바라며 바닥에 가만히 앉아 있는 거지? 그거 말고는 다 앞을 봐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이 거리, 이 가게들, 이 사람들. 이 속에 아다비아가 할 수 있는 멀쩡한 일이 단 하나라도 있다면 아다비아의 깜깜한 미래에 한 줄기 가늘은 빛이라도 될 텐데...그딴 게 있을 리 없지. 이건 관찰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있는데 몰라서가 아니라 없기 때문에 알려고 한들 알 수가 없는 거다. 왜냐하면 없는 거니까.


 "타슈갈!"


 누가 앞에서 손을 흔들며 나를 향해 다가온다. 에베디나단이다. 나도 반갑게 인사했다. 진짜 오랜만에 보네. 에베디나단이 내 앞으로 걸어왔다.


 "진짜 오랜만 같다."

 "응. 한 달 쯤 되었지?"

 "아마도?"


 에베디나단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더라? '이고 샤카샤그'라는 인간이 쓴 논문을 줬을 때다. 한 달이 넘은 거 같기도 하고, 안 넘은 것 같기도 하다. 날짜고 요일이고 모든 게 다 뒤죽박죽이다. 그걸 신경써야 할 일이 거의 없으니까. 예전에는 학교도 가야 했고, 시험 날짜도 챙겨야 했고, 책 수거 때문에 대출 카드도 정리해야 해서 날짜와 요일을 잘 챙겨야 했다. 지금은 학교도 안 가지, 책 수거도 이고가 가라고 할 때만 다녀오면 되지 날짜를 챙길 일이 하나도 없다. 에베디나단을 본 지 아마 한 달은 더 되었을 거다.


 "지금 어디 가?"

 "서점."

 "아...많이 바빠?"

 "아니."

 "그러면 우리 잠깐 찻집 가서 이야기나 할래?"

 "그러자."


 에베디나단과 찻집으로 갔다. 찻집에 가서 차 한 주전자와 과일 한 접시를 주문했다. 직원에게 돈을 내었다.


 "아, 내가 반 낼께."

 "아니야. 네가 준 그 논문 잘 봤어."

 "그거? 그거 재미있지?"

 "흥미롭기는 하더라."


 에베디나단은 내 말에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나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흥미로운 내용이기는 했다. 저주술과 마법을 합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내용이었으니까. 그 저자 '이고 샤카샤그'는 저주술과 마법을 합치는 것을 성공했을까? 아마 그는 저주술을 사용하지도 못했을 거다. 만약 그가 저주술을 알았다면 둘을 합칠 수 있다는 소리를 하지 못했겠지. 당장 저주술을 사용할 수 있는 바하르가 그건 불가능하다고 했잖아.


 "그거 굉장하지 않아? 마법과 저주술을 합치는 거야. 그러면 마법의 비밀도 풀리고 저주술의 비밀도 풀릴 수 있어!"

 "말도 안 돼. 어떻게 저주술과 마법을 합쳐?"

 "저주술로 안 되는 게 뭐가 있어? 다 되는 거지."

 "그거 쓴 사람은 저주술 쓸 줄 모를 거야."

 "과연 그럴까?"


 내 말에 에베디나단은 '흐음' 소리를 내며 흥미롭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뭔가 말을 하고 싶은데 참는 거 같기도 하다. 자기는 그것에 대한 답을 알고 있다는 건가? 설마...그랬다면 지금 여기에 이렇게 있지도 않았겠지. 아마 자기도 그냥 그게 가능하다고 믿을 뿐일 거다. 그렇게 쉽게 찾을 수 있는 답이었다면 누가 그 답을 못 찾았겠어? 만약 그게 그렇게 쉽게 찾을 수 있는 답이었다면 바하르가 에베디나단보다 훨씬 먼저 찾았을 거다.


 더 이야기해봐야 재미없을 거다. 에베디나단이 이야기해주는 것을 듣는 것 자체는 재미있을 수도 있다. 일단 내가 모르는 거니까. 하지만 다 듣고 나면 이걸 내가 왜 들었을까 싶어질 거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일 게 분명하니까. 그걸 해낸 사람이 누구인지라도 알려주고 그걸 통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아야 재미있고 내 인생에 조금이라도 도움되는 거지. 그게 과연 아다비아와 켈라자야를 정상인처럼 만들어줄 수 있는 답일까? 그런 거 연구할 시간에 차라리 내가 저주술을 수련하고 말겠다. 마침 차와 과일이 나왔다. 에베디나단 찻잔에 차를 따른 후 내 찻잔에 차를 따랐다. 차에서 말린 풀 냄새가 스믈스믈 기어올라온다.


 "그건 그렇고, 그동안 너 뭐 하면서 지냈어?"

 "나? 이래저래 할 일이 있었어."

 "저주술 관련된 거?"

 "그런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구."


 에베디나단은 두루뭉슬하게 이야기했다. 뭐 알아서 잘 살았겠지. 그러니 이렇게 내 앞에서 웃고 있을 수 있는 거구. 룬 바사르 암살 사건때 에베디나단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 건가? 그때 분위기 참 살벌했는데. 어디에서 작은 사건 하나만 터져도 그게 어마어마한 일의 시발점이 되고도 남을 분위기였다. 진짜 그때 잘 넘어가서 다행이지. 그리고 나는 그때 이후 아다비아랑 켈라자야와 동시에 사귀게 되었구. 내가 여자 두 명과 동시에 사귀고 있는 건 에베디나단한테 할 필요가 없을 거다.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녀서 좋을 거 하나도 없는 거니까. 여자 두 명과 동시에 사귀는 것도 그렇게까지 자랑할 일이 아닌데, 하필이면 그 둘이 아다비아와 켈라자야잖아.


 "너 그런데 요즘 무슨 일 있어?"

 "응? 왜?"

 "너 지금 무지 피곤해보여."

 "아...뭐 이 도시에서 사는 거 자체가 피곤한 일이라서 아닐까?"


 아다비아랑 켈라자야와 동시에 사귀면서 걔네 둘의 일 모두 내 걱정거리가 되었지. 라키사와의 관계는 완전 엉망진창이 되었구. 이 모든 것이 이 도시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도 되긴 할 거다. 뭐 하나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으니까. 감비르처럼 자기가 남자이자 여자라고 주장하는 미친놈도 멀쩡히 활보하고 다니고, 사치를 즐기기 위해 일하면서 맨날 착취라고 씨부리기나 하며 이상한 소리나 지껄이는 게첸 같은 기생충 같은 새끼도 멀쩡하게 잘 살고 있다. 웃긴 도시지. 그러니 그런 폭동도 일어난 거겠지. 이런 도시에서 살고 있으니 피곤할 수 밖에. 아다비아, 켈라자야, 라키사 모두 이 도시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 나와 정말 평범하게 잘 지내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런 이야기 다 하고 싶지 않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문제다. 남한테 함부로 이야기할 것도 아니구. 특히 에베디나단은 저주술을 매우 좋아하잖아. 표정 보면 이 도시 자체를 너무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은데...불필요한 소리는 말아야지.


 "무슨 고민 있어?"

 "아니. 별 고민 없어."

 "진짜?"

 "그냥 이 지긋지긋한 땅을 빨리 떠나고 싶어. 그게 고민이지, 뭐."

 "아...너는 여기 정말 싫은가 보네."

 "응. 다 미쳤어."


 에베디나단은 내 말을 듣고는 말 없이 차를 한 모금 홀짝였다. 솔직히 이해되지 않아. 나와 에베디나단은 아드라스인이니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이 덜 건드린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서로 지지고 볶아대는 마딜인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견디고 사는 걸까? 오히려 마딜인들은 이런 상황에 별로 피로를 못 느끼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마딜인들을 볼 때마다 내가 유난인 거 아닌가 싶기도 하구. 나도 마딜땅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나는 왜 이 상황이 돌아버릴 거 같고 마딜인들은 전혀 그렇지 않아보일까? 에베디나단은 이런 것을 아예 못 느끼는 걸까? 예전에 여기가 어땠는지 잘 몰라서 그냥 원래 이런 곳이라고 여기고 있는 거 아냐? 여기도 원래 이런 곳은 아니었어. 망할 폭동때부터 이렇게 된 거지. 이야기 주제나 에베디나단이 좋아할 만한 주제로 바꿔야겠다.


 "너는 아드라스인인데 어떻게 저주술 쓸 수 있어?"

 "그게 왜? 내가 아드라스인인 거랑 저주술 쓰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


 내 질문에 에베디나단은 오히려 내게 그게 왜 이상한 거냐고 진지하게 되물어보았다. 너 아드라스인이잖아. 여기에서 태어나 자란 것도 아니잖아. 그런데 어떻게 저주술을 쓸 수 있어? 아마 저주술은 매우 나쁘고 미개한 거라고 아주 어렸을 적부터 배워왔을 건데. 그 기억이 뼛속 깊이 새겨져서 저주술을 수련하려고 할 때마다 그 기억이 뼈 속에서 기어나와 막아설텐데.


 "저주술은 마딜인들의 문화 같은 거잖아."

 "에이, 아냐! 마딜 공화국 밖에도 저주술 수련하는 사람들 꽤 있어."

 "진짜?"

 "응, 진짜로! 단지 그게 불법이니까 티만 안 낼 뿐이지. 그런 사람들이 없으면 왜 저주술이 불법이겠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지푸라기 우려낸 것 같은 맛. 무엇을 말려서 이걸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무엇이든 간에 뭘 어떻게 해도 블랑쉬블르 집에서 마셨던 차처럼 훌륭한 맛은 못 나겠지. 근본이 다르면 결과에서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어. 저주술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 같은 아드라스인들이 백날 천날 수련한다고 해봤자 우리는 근본이 다르니 한계가 존재할 거야. 이고 말처럼 말이야. 아니, 그건 이고가 말하기 전부터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죽어라 노력하면 가능하기야 하겠지. 그러나 그 한계가 분명히 있어.


 "저주술은 얼마나 강하게 믿느냐 문제야. 마딜인만 쓸 수 있고 그 외 사람들은 못 쓰는 건 아냐."

 "그래도 우리 같은 사람들은 한계가 있지 않을까?"

 "한계? 그런 건 없을걸? 그런 게 있다면 내가 저주술을 쓸 수 있을 리 없잖아. 내가 뭐 특출나게 이쪽에 소질있는 것도 아닌데."


 에베디나단이 오른손 검지 손가락으로 자기 머리를 톡톡 쳤다.


 "저주술은 모든 사람들 것이야. 마딜인들만의 것은 절대 아니야."

 "하지만 저주술은 여기서만 발달했잖아."

 "그거야 다른 곳에서는 저주술 수련 자체를 금지하고 있으니까 그런 거구."

 "저주술은 마딜인들이나 쓰는 거 아니야? 훨씬 발달해서 미개한 저주술 못 쓰게 하는 거 아냐?"


 에베디나단이 눈을 살짝 치켜뜨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저주술이 마법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생각해. 무한하잖아. 마법은 유한하고. 끝이 있는 것이 끝없는 것을 어떻게 이겨?"

 "그래도...마딜 해방 전쟁때 마법사들이 저주술사들 학살하고 다녔잖아."

 "그러나 최종 승자는 키란이었지."


 결국 키란이 이겼으니 저주술이 마법보다 우월하다는 건가. 진짜 키란 아니었으면 저주술 숭배하는 사람들은 어땠을까 궁금하다.


 "키란 말고는 다 마법사에 비해 형편없었잖아. 그렇게 잘난 저주술이었다면 마법사들이 저주술을 배우려들지 않았을까? 진짜 솔직히 말해서 저주술은 마딜인들이나 쓰는 거 아냐?"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내 육체가 아드라스인이기 때문. 내가 마딜인이었다면 이런 말을 할 생각 자체를 못했을 거다. 설령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입 밖에 내뱉을 엄두를 내지 못했겠지. 마딜인들에게 저주술이란 자신들의 정체성 그 자체 같은 거니까. 내가 마딜인 육체를 갖고 저 소리를 하고 누군가 그걸 들었다면 이 자리에서 바로 시비가 걸렸을 수도 있다. 그리고 몰매를 맞았을 수도 있다.


 "바로 그 생각이 마딜인이 아닌 사람들은 저주술을 제대로 쓰지 못하게 하는 거야."

 "응?"

 "그렇게 해보기도 전부터 '나는 안 될 거야' 해버리니 될 리가 있어?"

 "그러면 맹목적으로 믿어대면 된다는 거야?"

 "그게 일반적인 수준으로는 불가능하지만...하지만 그게 핵심이야. 그거만 하면 돼."

 "설마..."

 "설마가 아니야. 그런 생각에 얽매여 저주술을 사용할 때 스스로 제한을 걸어대니 제대로 된 저주술을 쓸 수 있겠어? 저주술은 결국 믿음의 힘인데. 자기 스스로 못 믿는데 무슨 저주술을 사용해?"

 "그러면 내가 저주술을 광적으로 믿으면 나도 쓸 수 있다는 거야?"


 내 질문에 에베디나단은 차 한 잔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깊이 숨을 들이마신 후 길게 내뱉고 자신의 찻잔에 차를 천천히 따랐다. 그리고 고개를 똑바로 들어 내 눈과 자신의 눈을 정확히 맞추었다.


 "너 스스로 저주술을 쓸 수 있다고 극한까지 믿는다면.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너도 훌륭한 저주술사가 될 거야. 어쩌면 키란보다 더 훌륭한 저주술사가 될 수도 있어."

 "과장이 너무 심한데?"

 "아니. 모든 인간이 키란을 능가할 수 있어. 스스로 키란은 위대하고 넘지 못할 벽이라 한정지어버리니 문제지. 그러니 오히려 네가 가능할 수 있어. 너는 솔직히 키란 별로 존경 안 하잖아?"

 "그야 그렇기는 한데..."

 "우리한테는 그게 오히려 장점이야. 키란이 대단해? 뭐가? 너도 키란이 뭐가 대단한지 솔직히 잘 와닿지 않잖아. 그러니까 우리는 무제한의 상상을 할 수 있어."

 "상상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잖아."

 "그래. 상상한다고 다 되는 건 아니야. 그걸 믿어야지."

 "믿기만 하면 돼?"

 "잘 믿어야지."


 그러니까 뭘 잘 믿으라는 거야? 그런 소리는 누가 못 해? 공부 열심히 하면 잘 하게 될 거라는 거랑 똑같은 소리잖아. 어떻게 열심히 해야하는지를 말해줘야지.


 "네가 정말 네 상상을 잘 믿는다면 일곱 가지 꿈의 비밀 밝혀낼 수 있을걸? 그거만 알면 장애가 있는 사람을 원래대로 돌리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닐 거야. 그게 뭐야? 심지어는 죽은 사람도 되살릴 수 있을 거야."

 "그게 말이 돼? 죽은 사람을 어떻게 되살려내?"

 "키란은 해냈잖아."

 "키란이?"

 "몰랐어? 키란이 보여준 기적같은 저주술. 하나가 죽은 사람을 하나 되살린 거고 하나가 에드자를 통째로 날려버린 거잖아."

 "죽은 사람 되살린 건 그냥 치료해준 거 아냐?"

 "아니야. 그거 진짜야."

 "그게 누군데?"

 "글쎄...하지만 진짜야."


 들어본 적은 있다. 키란이 죽은 사람 하나를 되살린 기적을 보여주었고, 사람들 모두 그 장면을 보고 더 이상 키란은 같은 인간이 아니라고 여겼다고 했지. 그러나 그거 솔직히 지나치게 과장한 거 아니야? 심각한 부상을 입은 사람을 어떻게 기적적으로 치료해낸 것을 보고 무턱대고 그 사람이 죽었다고 단정지었다가 경악한 이야기가 진실 아닐까? 무슨 수로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내? 죽으면 그냥 끝인데.


 "만약 그 어떤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면 저주술이 그 해답이 될 거야."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아닌 것 같다. 에베디나단이 저주술에 대한 환상이 너무 커서 저런 소리를 하는 것일 거야. 상상으로 불가능한 거야 없지. 그러나 그걸 믿는다고 해서 모든 게 다 이루어질까? 그렇다면 여기 사람들은 다 왜 이따위로 살고 있는데? 에베디나단 말이 맞다면 어떻게든 극단적으로 결과가 나왔겠지. 다 행복하거나, 아니면 다 죽어서 사라져버렸거나.


 "너는 일곱 가지 꿈의 비밀 알아?"

 "나도 그건 지금 풀고 있어. 저주술사라면 누구나 그 비밀 풀고 싶어하잖아."

 "아...하긴, 그것만 풀어내면 모든 답을 다 알게 된다고 하니까."

 "그리고 여기 와서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들었는데 말이야."

 "뭔데?"

 "그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 이 땅에 있대."

 "정말?"


 일곱 가지 꿈의 비밀을 아는 사람이 마딜땅에 있다구? 누구? 일곱 가지 꿈의 비밀은 모든 마딜인들이 알고 싶어하는 거다. 그걸 아는 사람이라면 마딜 공화국 전체를 손에 집어넣을 수도 있겠지. 그것보다 존경받을 수 있는 게 없으니까.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면 여기 사람들이 그를 모를 리 없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런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이건 에베디나단이 지어낸 이야기 아니야? 겉으로는 놀라는 체 했지만 솔직히 이건 에베디나단이 너무 지나치게 나간 거다. 여기 사람들을 아직 잘 모르니 그런 말을 함부로 할 수 있는 거지. 여기 사람들에 대해 잘 알게 된다면 저런 말은 절대 할 수 없다.


 "진짜야. 그런데 그게 누군지 모르겠어."

 "그런 사람은 아마 없을걸."

 "단서가 몇 개 있는데 영 찾을 수 없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여기 사람들이 다 알고 있을 걸."

 "에헤!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라니까. 그리고 내가 너한테 근거 없는 헛소리 하는 거 아니야. 진짜 확실한 근거가 있으니까 말하는 거야."

 "그 일곱 가지 꿈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자라면 마딜인들 모두가 알아야 정상이잖아."

 "모르지. 비밀이 너무 굉장해서 미쳐버렸는지."


 에베디나단은 차를 다시 한 번에 다 마시고 다시 자기 잔에 차를 따랐다.


 "저주술에 대해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마. 어차피 네가 저주술을 사용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네가 저주술사라는 거 몰라."

 "그래도 저주술이 모든 것의 해답이 될 수는 없잖아."

 "해결되지 않는 게 확실한 문제라면, 특히 장애나 죽음 같은 문제 때문에 고민이라면 진심을 다해 저주술에 매달려봐. 그거 말고는 답이 없잖아. 답이 있는 곳에서 답을 찾아야하지 않을까?"


 나도 그래서 고민이다. 아다비아와 켈라자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가 저주술을 수련해야 할까?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저주술 속에만 존재할 거다. 그 외에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아. 그 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답은 상상 속에나 존재하고,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것이 저주술이니까. 순간 문득 떠올랐다. 과연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이 저주술일까? 나와 라키사의 관계에서 빚어지고 있는 문제에 대한 답도?


 "아드라스인이라는 사실은 저주술 수련에 아무 문제도 안 돼. 오히려 마딜인들이 일곱 가지 꿈의 비밀을 못 밝혀내는 이유에 대해서 말이야, 내 생각은 이래. 마딜인들은 자기들만이 저주술을 쓸 수 있다고 믿어. 물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그런데 바로 그런 생각 때문 아닐까?"


 저주술이 모든 것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내 모습을 에베디나단은 내가 저주술에 대해 아직도 아드라스인은 못 쓴다고 여기고 있다고 읽었나보다. 망할 저주술. 저주술이란 대체 뭘까? 그 속에 진짜 모든 것에 대한 답이 있을까?



 아다비아 문병을 다녀오는 길에 에베디나단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지 며칠이 지났다. 이제 1116년 5월 15일 밤. 달라진 건 없다. 그 며칠 사이에 달라질 거였다면 내가 걱정하지도 않았겠지.


 "타슈갈, 뭐해?"

 "어? 너네가 이 시간에 왠일이야?"

 "너랑 놀려고 왔지."


 케르무크와 바하르가 서점으로 찾아왔다. 이 시각에 둘이 놀러온 건 또 얼마만에 일이야? 왜 왔는지는 저 둘이 말하지 않아도 안다. 일곱 가지 꿈의 비밀을 밝혀보기 위해 밤거리를 돌아다녀보자고 온 거지. 아직 직접 저주술을 수련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렇게 저주술사 친구 두 명과 같이 돌아다니는 건 괜찮잖아. 이건 내가 저주술 수련하는 것도 아니니까. 이러다 좋은 꿈 하나 꾸어서 케르무크나 바하르가 일곱 가지 꿈의 비밀을 밝혀내면 아다비아와 켈라자야도 고쳐주겠지.


 "오늘은 어디 가?"

 "시장이나 가볼까?"

 "거기는 왜? 거기 한밤중에 뭐가 있다구."

 "혹시 알아? 거기에 대단한 것이 있을지 말이야. 일곱 가지 꿈의 비밀을 밝힐 단서가 의외로 시시한 곳에 있을 수도 있어."


 시장이라니 뭔가 시시하다. 종종 갔던 곳이기도 하고 잘 아는 곳이라 하나도 흥분되지 않는다. 그런 곳 가서 무슨 신기한 것을 발견하겠어. 밤이면 사람이고 물건이고 아무 것도 없을텐데. 케르무크 말대로 시시한 곳에 진리가 숨어 있을 수도 있어. 그러나 그런 경우는 정말 드물지. 일곱 가지 꿈의 비밀을 밝힐 단서가 한밤중 아무 것도 없는 시장에 숨어 있다? 아닐 거야. 이건 그냥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거다. 흥분이고 뭐고 없다.


 "아, 타슈갈, 너 혹시 켈라자야가 누군지 알아?"

 "켈라자야?"


 나만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바하르도 케르무크도 아무 말 없다. 둘 다 가보기는 하지만 시시하겠지. 그냥 이 도시를 이 잡듯 뒤져보자는 식으로 가보는 것일 뿐일 거다. 거기에 비밀이 숨어있었으면 여기 사람들 1/3은 다 비밀을 찾았겠다. 그렇게 셋 다 아무 말 없이 너무나 잘 아는 길을 향해 걸어가는 길이었다. 침묵이 녹아든 밤공기 사이로 우리 셋의 발자국 소리가 암흑 속으로 퍼져나간다. 갑자기 바하르가 갑자기 내게 질문을 던졌다.


 "응. 들어본 적 있어?"

 "걔 내 여자친구인데..."

 "진짜?


 얘네들 내가 켈라자야와 사귀는 거 모르지? 그걸 말해줄 일이 없었다.


 "너 그러면 아다비아는 어떻게 되는 거야? 아다비아는 포기했어?"

 "아니."

 "그러면? 켈라자야랑 잘 안 되면 그 다음에 아다비아야?"

 "그게...둘과 동시에 사귀는 중이야."

 "진짜?"


 둘 다 깜짝 놀라 거의 동시에 소리쳤다. 그럴 만도 하지. 한 남자가 두 여자와 동시에 사귀는 일은 절대 흔한 일이 아니니까. 그런 일이 있기는 해. 그런 경우, 보통 한 명은 앞에서 사귀고 한 명은 뒤에서 사귀지. 나처럼 둘을 동시에 앞에서 사귀는 경우는 진짜로 별로 없다. 아니, 아예 없을 수도 있어. 나도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나한테 벌어진 건지 아직까지도 모르겠다. 그냥 그렇게 된 거야. 아직까지는 둘이 안 싸우니 다행이지만, 둘이 싸우기라도 하면...


 "너 그래도 돼?"

 "뭐가?"

 "누가 첫 번째고 누가 두 번째야?"

 "그런 거 없어."

 "그런 거 없다니? 야, 그러면 둘이 머리채 잡고 싸울 거 아니야!"

 "걔네가 나한테 동시에 같이 사귀자고 했어."

 "이야, 너 능력 좋다!"

 "이런 일이 세상에 있기도 하구나. 이건 저주술로도 불가능한 거 아니야?"


 저주술로도 이건 설명이 안 될 거다. 나도 왜 아다비아와 켈라자야가 갑자기 나와 동시에 사귀겠다고 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왜 그렇게 결정했냐고 물어보고 싶지만 애써 참고 있다. 물어봐봐야 내가 원하는 속 시원한 답은 안 해줄테니까. 아다비아는 보나마나 성질낼 거고, 켈라자야는 '그냥'이라는 말로 대충 넘어가겠지. 이건 뻔해. 걔네 둘과 동시에 사귀게 되어서 얼마나 심란한지 너희들이 과연 알까? 아마 전혀 감도 못 잡을 거야. 그냥 두 명을 동시에 사귀는 것도 아니고 하나는 앞을 아예 못 보고 하나는 정신이 이상해. 그 하나만 짊어져도 감당 안 되는 문제 둘을 동시에 짊어지고 있는 거다. 케르무크가 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면 이제 여자 둘이랑 동시에 결혼하는 거야?"

 "어?"

 "야, 이제부터라도 계란 많이 먹어."

 "뭔 소리야?"

 "너 지금부터 그렇게 준배해놓지 않으면 나중에 고개 숙인 남자 된다?"

 "뭐?"


 케르무크가 갑자기 주먹을 쥐고 오른팔을 확 접어 세웠다.


 "남자는 자고로 밤에 튼튼한 불기둥을 딱 세워야 대접받는 거야!"

 "야! 뭔 헛소리야?"

 "이놈, 알면서 모르는 척 한다."


 케르무크와 바하르가 깔깔 웃었다. 지금 내가 그런 걱정할 때냐? 계란은 고사하고 매일 말라 비틀어진 풀만 뜯어먹으며 돈 모아도 부족할 판인데. 걔네 둘 동시에 책임지려면 돈이 한 두 푼 필요할 게 아니잖아. 진짜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어야 감당이 될까? 그래도 많이 어려울 거 같은데. 나는 지금 답 안 보여서 죽겠는데 둘은 아주 이상한 소리 하며 웃어댄다. 그래, 웃어라. 그렇게라도 웃으면 복이라도 오겠지.


 "그나저나 켈라자야 어떤 애야?"

 "그냥 평범해."

 "진짜?"

 "응. 갑자기 켈라자야는 왜?"

 "아...그게..."


 바하르가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치롤라가 반드시 켈라자야 만큼은 저주술로 꺾겠다고 이를 갈더라구. 아주 제대로 독이 올랐어. 걔네 둘 사이에 뭐 있었어?"

 "둘이 말다툼이 조금 있었어."

 "뭐 때문에?"

 "저주술."

 "아..."


 치롤라가 일곱 가지 꿈의 비밀을 밝히겠다고 자살하려고 했을 때 켈라자야가 치롤라를 진짜 죽이려 들었다는 이야기는 차마 못 하겠다. 그걸 이야기하지 않으면 그 뒤에 있었던 치롤라와 켈라자야의 갈등도 이야기할 수가 없다. 바하르가 뭘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저주술'이라는 말에 뭔가 이해했다는 모습을 보여서 다행이다. 뭐 적당히 저주술로 둘이 대결했든지 뭐했든지 했다고 지레짐작하고 있겠지. 실제로는 그 정도가 아니었지만 그렇게 짐작하는 게 아주 틀린 건 아니니까 별 상관 없을 거다.


 "치롤라가 요즘 '와히디야'라는 애하고 같이 저주술 수련한대. 그런데 와히디야는 너랑 켈라자야 무지 좋아하나봐. 치롤라 말이, 걔가 항상 자기한테 너네들 어떻게 지내는지, 너네들 어떤 애들인지 물어봐댄다더라."

 "와히디야가?"

 "응. 너 와히디야도 알아?"


 그건 뭐 때문에 나와 켈라자야에 대해 치롤라에게 꼬치꼬치 캐물어보는 걸까? 참 안 좋은 소식이다. 와히디야가 그런다는 건 분명히 안 좋은 일인데. 안면 근육이 우그러든다. 와히디야는 또 무슨 꿍꿍이야? 켈라자야랑 어떻게 하면 저주술로 싸울 수 있을지 궁리하고 있는 거 아니야? 켈라자야가 그렇게 싫다고 하는데 걔는 왜 그렇게 켈라자야한테 집착하지? 치롤라야 그렇다 치지만 와히디야는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왜 그렇게 인상 써? 와히디야 이상한 애야?"

 "그거 완전 미친년이야!"

 "진짜? 어떻게 미쳤는데?"


 바하르가 와히디야가 어떻게 미쳤냐고 물어봤다. 응, 와히디야는 제대로 미쳤지. 와히디야를 제대로 겪어본 사람은 그 누구라도 와히디야가 정상인이라고 말 못 할 걸? 오죽했으면 블랑쉬블르한테 그렇게 정강이도 채이고 발도 밟혔겠어. 블랑쉬블르가 아무리 장난기 많다지만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는데. 어쩌면 조만간 루즈카한테도 제대로 혼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이건 시비 걸기 위해 태어난 것도 아니고...하여간 희안한 미친년이다.


 "서점이고 외국인이고 다 쓰레기래. 아주 혐오하는 티 팍팍 내면서 진심으로. 게다가 켈라자야한테는 시비걸지 못해서 안달이야. 보기만 하면 저주술로 대결하자고 시비걸어. 걔만 나타나면 아주 죽겠어."

 "진짜?"

 "그러면 내가 너한테 거짓말하겠냐? 너 와히디야 본 적 없어?"

 "응. 나는 본 적 없지."


 그때 케르무크가 말했다.


 "그 정도면 저주술도 자비 없는 거 아니야? 미쳤으니까 뭐 망설이고 나발이고 없을 거 같은데?"

 "치롤라 말에 의하면 자기가 학교에서 봤던 그 어떤 저주술사들보다 압도적이래. 심지어는 교수보다도 더 뛰어날 수도 있겠다더라."

 "그런데 치롤라도 저주술 꽤 할 줄 알잖아."

 "그러니까. 나도 그래서 와히디야가 어떤 애인지 궁금하더라구. 치롤라가 그 정도로 말할 정도라니..."


 바하르와 케르무크는 둘 다 저주술사라 와히디야에 대해 더욱 궁금한가보다. 너네 둘 다 걔 직접 겪어보면 저주술이고 나발이고 일단 골이 꽤나 아플텐데. 걔가 마딜인들한테는 조금 정상적으로 행동하나? 걔가 켈라자야에게 시비걸고 저주술 대결하자는 건 진심이야. 그리고 내가 대놓고 '미친년'이라고 하는 건 저주술 모르는 내가 봐도 이건 진짜 목숨 걸고 한판 떠보자고 하는 게 보여서 그런 거구. 호기심으로 가볍게 접근해볼 애는 죽어도 아냐. 만약 켈라자야가 나와 만나 서로를 믿게 되기 전에 와히디야를 만났다면 분명히 둘 중 하나는 죽었을 거다. 둘 다 거침이 없거든. 일반인이라면 당연히 지켜야 할 선 같은 게 전혀 없어.


 "와히디야는 진짜 미친년이야. 정말 조심해야 해."

 "너한테 쓰레기라고 해서 미친년이 아니라?"

 "그게 아니라 이건 정말 겪어보지 않으면 몰라. 하여간 조심해."


 케르무크가 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아, 궁금하네. 왠지 딱 내 스타일일 거 같은데? 나한테 소개해주면 안 돼?"

 "너? 너 아마 걔한테 찢겨죽을 수도 있을 걸?"

 "완전 멋지잖아! 그런 여자를 정복해야 남자지!"

 "걔가 아무 것도 안 해도 너 뇌가 터져 뒤질 거다."


 안 겪어봤으니 그런 말 쉽게 하지. 켈라자야도 진짜 감당하기 어려운데 와히디야는 그런 켈라자야는 '켈라자야 따위'로 만들어버릴 정도다. 케르무크는 자기처럼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상상하고 있겠지. 와히디야는 자유로운 영혼 정도가 아니야. 그냥 일반인이라면 당연히 갖고 있어야할 '넘지 말아야할 선'이 아예 없어. 켈라자야한테 시비걸고 진짜 싸우려 드는 거 보고 알았다. 이건 켈라자야보다 더 위험해! 케르무크, 너 와히디야 앞에서 입 잘못 놀렸다가는 와히디야가 그 자리에서 너 죽이려 들 걸? 케르무크가 저주술을 얼마나 잘 쓸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와히디야 감당하는 거 쉽지 않을 거다. 치롤라가 대단하다고 했다고 하잖아. 치롤라는 루즈카가 직접 데려온 애라구!



 시장에 도착했다. 역시 이럴 줄 알았어. 당연히 아무 것도 없다. 상인들이 정리를 하고 가서 그런지 쓰레기조차 없다. 여기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둘. 시꺼먼 암흑과 '없음'이라는 것 그 자체. 여기에 무슨 진리가 숨어 있다는 거야? 이 낮과 대비되는 공허함 속에? 이런 거라면 혼자 방에서 불 끄고 있어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거잖아. 시끄럽고 분주한 낮과 정확히 정반대 모습이라 이질적이기는 하지만 딱 그것 뿐이었다. 시장 안을 걸어다니는 동안 이상한 것이라고는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이렇게 야심한 오밤중에 시장을 친구 둘과 걷고 있다는 이 경험 자체가 희안한 거라면 희안한 거겠지.


 "요즘 여기에서 사람들이 실종되는 일이 발생하곤 한대."


 적막 속에서 케르무크가 입을 열었다.


 "그딴 일이야 여기에서 일 터지기 전부터 흔했어. 그딴 것들 하나 사라진다고 누가 신경쓰는 것도 아니구."


 바하르가 시큰둥하게 말하고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연기를 깊이 빨아들였다 내뱉은 후 가래를 바닥에 퉤 뱉고 말을 이어갔다.


 "그것들 뭉쳐서 사고나 안 치면 다행이지. 여기서 사람들 죽이는 저주술사놈들, 그놈들이나 싹 쓸어줬으면 좋겠네. 길거리 쓰레기만도 못한 것들인데."

 "그래도 그건 말이 심하잖아."


 바하르는 담배 연기를 다시 한 번 깊이 빨아들였다.


 "너, 그러면 그놈들 좋아? 맨날 구걸이나 하고 술에 찌들어 있는 놈들인데? 어떻게 하면 지나가는 여자한테 치근덕대고 엉덩이랑 가슴 주물러대볼까 궁리만 해대는 인간 쓰레기들인데? 길거리 쓰레기는 그냥 가만히 있기라도 하지. 그것들은 지들이 먼저 돌아다니면서 여기저기 시비걸고 추행하지 못해 안달이잖아."

 "그렇긴 해."


 바하르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사실은 사실이니까. 경찰들이 그놈들이 사고치려고 할 때 피떡이 되도록 두들겨패대지 않는다면 아주 가관일 거다. 그놈들이 원래 기본적인 도덕은 지켜서 그렇게 얌전히 쭈그려 앉아있기만 하는 게 아니야. 일반인들한테 껄떡대고 시비걸면 경찰이 죽여패니까 그거 무서워서 얌전히 있는 거지. 경찰들 없었으면 사고를 쳐도 엄청나게 쳐대었을 거다. 대놓고 강도질하고 여자들 으슥한 곳으로 끌고 들어가 겁탈하려 들었겠지.


 "그런데 너는 그 사람들 진짜 좋아? 너 걔네들 다 받아줄 수 있어?"

 "아니. 미쳤냐? 내가 왜 그것들을 다 받아줘?"

 "그거 봐, 너도 네 눈에서 사라졌으면 하는 거잖아."


 케르무크가 바하르를 거들었다.


 "그런 놈들만 골라 죽이면 아주 그냥 사회정의 실현인데. 이 미친 저주술사 놈들은 엉뚱한 새끼들만 골라 죽인다니까? 아주 그냥 나중에는 에드자가 거지밭 되겠어."

 "어쩌면 진짜 그걸 원하는 거 아냐? 그 새끼들은 빵만 주면 좋다고 헤헤거리니까. 정작 죽여야할 새끼들은 안 죽이고 엉뚱한 놈만 쳐죽이고 있어."


 둘 다 맞는 말을 한다. 죽여야할 범죄자나 찾아서 죽이면 얼마나 좋아? 그러면 이 도시 엄청 안전해지겠네. 그런데 엉뚱한 사람들만 죽여댄다. 물론 죽임당한 모든 사람이 다 착하지는 않겠지. 그래도 그렇게 뛰어난 저주술사라면 어떻게 범죄자만 잘 골라서 죽여버릴 수 있을 거 아냐? 하지만 그렇게 착한 저주술사가 존재할 리 없지. 무턱대고 아무나 다 죽여서 모든 사람 다 피곤하고 미쳐버리게 만들고 있다.



 별 소득 없이 서점으로 돌아왔다. 서점 문 앞에 누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왠지 저거 내가 아는 사람 같은데? 켈라자야는 확실히 아니다. 아, 망할...와히디야가 왜 저기 서 있어? 저 미친...지금이 몇 시인데 서점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거야?


 "와히디야, 너 여기서 뭐 해? 지금 완전 밤이잖아."

 "그냥 있어."

 "그러니까 이 시각에 잠 안 자고 여기에 왜 멍하니 서 있냐구."

 "그냥 여기 왔어."


 너하고 제대로 된 대화가 될 리가 없지. 너야 저주술사니 별 걱정 안 된다. 너 걱정까지 해줄 여유도 없구.


 "뭐 알아서 조심히 집에 돌아가."


 서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와히디야가 따라서 들어왔다.


 "지금 서점 문 닫았어. 일 있으면 내일 와."


 와히디야는 나를 밀치고 서점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간다. 아, 진짜 저건 아무리 봐도 제정신이 아니야.


 "야, 서점 문 닫았다구! 여기 왜 들어와?"

 "여기 지금 켈라자야 있어?"

 "켈라자야? 걔 여기 없어."

 "그러면?"

 "몰라. 아마 밖에서 돌아다니고 있겠지."


 무심결에 말했다. 이 어두운 밤. 켈라자야는 오늘 서점에서 자고 가겠다고 하지 않았다. 서점 문을 닫을 시간이 가까워졌을 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걸로 봐서 켈라자야는 오늘도 밤새 이 도시 안을 배회하고 있을 거다. 나도 켈라자야가 지금 이 시각에 차라리 서점 안에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겨울이 아니니까 내가 밖에서 자도 아무 문제도 없다구. 밤새 도시를 배회하는 것보다 여기에서 얌전히 잠이나 자는 게 훨씬 안전하고 좋잖아. 그러나 켈라자야는 없다. 지금 어딘가를 돌아다니고 있겠지.


 "알았어."

 "응. 이제 나 자러 들어가야 해. 알아서 조심히 들어가."


 와히디야는 서점 한가운데에 서서 가만히 나를 쳐다본다. 저건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 거야? 제발 좀 나가라. 네가 밤에 뭘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제 자야한다구.


 "너는 켈라자야 좋아해?"

 "응. 당연하지."

 "너를 죽이면 켈라자야의 분노를 볼 수 있을 건가?"

 "뭔 소리야!"


 순간 움찔했다. 쟤는 켈라자야보다 더한 미친년이야. 저 말을 했다는 건 진짜 그럴 생각이 있다는 거고, 그 생각을 실행하는 데에 망설임 따위란 쟤에게 존재할 리가 없겠지.


 "아니야."


 제발 좀 서점에서 나가라. 진짜 네 두 발이 서점에서 나가자마자 문 쾅 닫고 후다닥 문 잠궈버릴 거다.


 "가끔은 쓰레기 중에 갖고 싶은 쓰레기도 있어."

 "뭐 그렇지. 그런 건 가져도 되잖아."


 괜히 와히디야 자극하지 말자. 치롤라도 대단하다고 했으니 조심해야 한다. 방안에서 이고가 자고 있다고 하지만 이고도 저주술사를 감당해낼 리 없잖아. 살살 달래서 몰아내야 한다. 잘못해서 지금 저거 성질 건드렸다가는 대책없다.


 "이 도시는 아무리 내가 청소해도 깨끗해지지 않아."

 "그러면 청소 더 하면 되잖아."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어."


 그럴 생각이었으면 여기 올 게 아니라 밖에 나가서 달빛 별빛 보면서 길이나 쓸든가!


 "나는 켈라자야가 왠지 모르게 낯익고 좋아."

 "진짜?"

 "응. 너무 좋아서 꼭 죽이고 싶어."

 "와히디야, 좋으면 친해지려고 노력해야지, 왜 죽이고 싶어해?"

 "왠지 그래야 할 거 같아."

 "뭐 배신 같은 게 두려운 거야?"

 "아니. 그런 게 아니야."


 와히디야가 입을 다물었다. 가느다랗게 들리는 와히디야의 숨소리. 무슨 할 말이 또 남아 있는 거야? 제발 그냥 나가주면 안 돼?


 "죽이기 위해 좋아하는 거 같아."

 "그딴 게 어디 있어? 좋아하는데 왜 죽여?"

 "몰라. 너는 내가 켈라자야를 죽이면 나를 어떻게 할 거야?"

 "뭐?"

 "내가 켈라자야를 죽이면 너는 나한테 어떻게 할 거냐구."


 어이없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아, 와히디야는 내가 켈라자야와 사귀는 거 모르지? 진짜, 설마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정말 만약에의 만약에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말이야...그런 개같은 상황이 발생한다면 말이야. 어둠 속에서 빛나는 와히디야의 두 눈. 장난기 하나 없이 진지한 눈빛. 응, 이런 건 사실 물어볼 필요도 없어. 너무나 뻔한 대답이고, 너무나 당연한 대답이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루어질 대답이니까.


 "그러면 너 목을 따버릴 거야."

 "어떻게? 너 저주술 쓸 줄 알아? 아니면 칼 좀 쓸 줄 아니? 어떻게 목을 딸 건데?"


 왜 이걸 진지하게 물어보는 거야? 이게 심각해야 하는데 와히디야가 저렇게 너무 진지하게 나오니 오히려 맥이 풀린다.


 "와히디야, 나 진짜 너한테 하나만 부탁하자." 

 "뭔데?"

 "제발 좀 켈라자야한테 시비 좀 걸지 마."


 와히디야는 나를 향해 걸어왔다. 손을 뻗으면 서로가 서로를 잡을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왔다.


 "나는 걔가 좋은데 이상하게 걔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거슬려."


 허리가 꽉 조인다. 등을 세게 누르는 두 손. 저절로 허리가 펴진다.


 "야, 너 뭐 하는 거야!"


 와히디야가 갑자기 나를 꽉 껴안았다. 와히디야의 두 팔을 쥐고 억지로 잡아뜯어내려는데 와히디야는 내 품에 얼굴을 몇 번 부비더니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며 씨익 웃어보인다.


 "내가 이렇게 하면 켈라자야가 제대로 분노하지 않을까?"

 "저리 가!"


 와히디야가 나를 놓아주고는 서점에서 나갔다. 어둠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나를 어루어만져준다.


Posted by 좀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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