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기적과 저주2018. 5. 28. 18:24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3장 12화


 아디비아가 내게 원하는 건 대체 뭘까?


 오늘은 1116년 4월 10일. 모두 같이 벚꽃놀이 다녀온지 벌써 7일이 흘렀다. 아다비아가 병문안 와주기를 바라지만 말로는 다시는 오지 말라고 한다는 것 같아서 그동안 병문안을 두 번 갔다. 그렇지만 병문안 갈 때마다 아다비아는 내게 성질을 내었다. 가만히 있으면 가만히 있는다고, 뭐라도 말하면 지금 자기 상처주려고 작정한 거냐고 화냈다. 뭘 해도 무조건 성질내었다. 아무 말 하지 않으면 왜 아무 말 안 하냐고 따졌다.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야? 헤어질 때 인사는 '이 멍청아, 다시는 오지 마!' 였다. 그 말대로 병문안 안 가면 또 병문안 안 왔다고 성질내겠지. 그냥 성질낼 사람이 필요한 건가?


 무엇을 원하는지 확실히 말하라구!


 아다비아에게 뭘 해야 할 지 전혀 모르겠다. 이건 뭐 실마리라도 있어야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성질만 내고 있으니 방법이 없다. 실컷 짜증내고 화내기만 한다. 진짜 눈만 다친 것이 아니라 머리도 다친 거 아니야? 예전에는 저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뭔가 신경긁는 말을 잘 하기는 했다. 그렇지만 무엇을 원하는지는 감을 잡을 수 있게 이야기했다. 지금은 무턱대고 화만 내고 있을 뿐이고. 차라리 무엇을 원하는 건지 확실히 말해주면 거기에 맞춰보려고 노력이라도 할텐데 그건 아무 것도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오직 화내고 짜증내기만 한다. 내가 무슨 독심술을 사용할 줄 아는 것도 아니고...나한테 계속 알아맞추어보라고 문제를 내고 틀려서 화내는 건가? 그러면 무턱대고 화만 낼 것이 아니라 계속 틀리면 답을 맞추도록 유도하든가 암시를 주든가 해야할 거 아냐.


 "이따 이고 돌아오면 문병 가야지."


 왜 화내는지 모르겠지만 문병 안 가면 안 왔다고 제대로 토라지겠지. 진짜 선택지가 바보 같은 선택지 뿐이네. 안 가서 아다비아가 제대로 토라지든가, 가서 아다비아가 성질을 내든가. 이게 뭐야? 문병 안 가면 제대로 토라지고 나중에 몇 배 더 성질낼 거니까 가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거잖아. 예전에 매일 교수한테 혼나던 때가 떠오른다. 혼날 거 뻔히 알면서도 수업 안 들어가면 다음에 수업 안 들어간 것까지 더해져서 화낼 거 같아서 억지로 들어갔다. 딱 그 꼴이다. 이게 진짜 뭐하는 건지 모르겠다. 켈라자야는 대체 어떻게 해서 아다비아와 그렇게 친해진 걸까? 아다비아의 그런 성질머리를 어떻게 다 받아주고 달래는 거지? 아다비아 문병가서 뭐하냐고 물어봐도 켈라자야는 그저 이야기하다 왔다고만 대답한다.


 '보나마나 또 짜증내고 화만 낼텐데...'


 먹을 거라도 뭐 사가야 하나? 과자라도 사가서 입에 물려주면 조금은 덜 짜증낼까? 아다비아가 왜 내게 화를 내고 짜증을 내는지 알 수가 없으니 갑갑하다. 뭐라도 안다면 덜 짜증나게 할텐데. 아다비아가 조금이라도 기분이 좋아졌으면 좋겠다. 자기 스스로 생각해도 암울한 것만 잔뜩 떠오르겠지. 그러니 뭐라도 좋으니 걔가 조금이라도 기분이 좋아질 것을 하나 해주고 싶다.



 서점 문이 열리고 켈라자야가 들어왔다. 오늘은 꽤 늦게 왔네? 아침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켈라자야는 아무 말 없이 책장을 천천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쟤가 웬 일로 책장을 둘러보지? 갑자기 무슨 일이야? 켈라자야가 책을 보는 모습을 본 게 언제인지 모르겠다. 언제부터인가 켈라자야가 여기 와서 하는 일이라고는 잠 자는 것과 멍하니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것 뿐이었다. 뭔가 곰곰히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한데 물어봐도 도통 대답을 안 해준다. 어쨌든 켈라자야가 책장을 둘러보는 이 장면 자체가 참 어색하고 이상하다. 켈라자야는 내가 자기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에 전혀 신경을 안 쓰고 책장에 꽂힌 책만 천천히 살펴보고 있다. 저기에 켈라자야 마음에 드는 책이 하나라도 있을까? 정신병에 관한 책이라면 재미있게 보려나? 아니야. 켈라자야는 자기가 이상하다는 것 자체를 못 느끼고 있을 테니까. 그걸 느꼈으면 일단 밤새 이 도시를 돌아다니는 짓 자체를 하지 않겠지. 켈라자야는 책 한 권을 뽑아서 내 옆으로 왔다.


 "무슨 책이야?"

 "이거?"


 켈라자야는 내게 책 표지를 보여주었다. 아드라스어로 된 책이다.


 "너 아드라스어 알아?"

 "응."

 "어떻게?"

 "그냥."


 켈라자야는 책장을 펼쳤다. 저거 무슨 책이지? 켈라자야가 바짝 붙어서 책을 읽고 있기 때문에 고개를 돌리면 책장을 잘 볼 수 있다. 문제는 내가 아드라스어를 잘 모른다는 거지. 켈라자야는 책장 넘기는 것 자체를 즐기는 건지 페이지를 술술 넘긴다. 얘가 이걸 이렇게 자유롭게 읽을 수 있나? 마딜어로는 아무 것도 안 적혀 있는데? 내가 마딜어로 된 책을 읽는 만큼 빨리 책장을 넘겨댄다.


 "너 그거 다 이해돼?"

 "응."

 "진짜?"

 "응."


 진짜 이 책에 적힌 아드라스어를 다 이해한다고? 책장 넘기는 속도가 장난 아닌데?


 "너는 이거 못 읽어?"

 "나?"


 당연히 나한테 물어본 거겠지. 여기에 지금 나와 켈라자야 말고 아무도 없으니까. 켈라자야는 두 눈을 살짝 크게 뜨며 나를 정면으로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이런 것도 못 읽냐고 물어보고 싶은 거야? 이런 것을 아무 무리없이 읽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게다가 아다비아나 라키사도 아니고 켈라자야가 읽는 건 더 이상한 일이구.


 "너 정말 아드라스어 몰라?"

 "응?"


 켈라자야가 재미있는 건수 하나 잡았다는 듯 살짝 밝은 표정을 지으며 나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었다.


 "누가 그래?"

 "너 이거 읽을 수 있어?"


 켈라자야가 책장을 내 얼굴 바로 앞에 들이대었다. 소리내서 읽을 수는 있다. 글자는 아니까. 하지만 이것이 무슨 말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아드라스어 공부 안 한지 언제야? 언제 마지막으로 공부했는지도 까마득하다. 몇몇 단어는 공부했던 기억이 난다. 그게 무슨 뜻이었는지는 전혀 생각이 나지 않지만...진짜 뭐라고 적혀 있는 거야? 뚫어져라 쳐다보았지만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아다비아 말이 맞나보네."

 "응? 아다비아가 뭐랬는데?"

 "너 무지 돌머리래. 진짜 자기 아니었으면 학교 쫓겨났을 거래. 진짜야?"

 "응."


 켈라자야는 내 대답에 놀랐는지 눈을 더 크게 뜨고 나를 응시했다. 사실인데. 아드라스인이기는 하지만 아드라스어 모른다구. 부모님과 대화할 때조차도 마딜어로 대화했다. 남아드라스 공화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한 적도 없고, 아드라스어를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 내 인생에서 아드라스어가 사사건건 발목잡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렸을 적부터 아드라스어를 공부했겠지. 그래도 이해한다. 이런 경험이 한두 번 있었던 것은 아니니까. 켈라자야도 내 외모를 보고 당연히 아드라스어를 잘 알고 있을 거라 추측했을 거다. 하지만 세상에는 예외가 존재해. 나는 마딜 공화국에서 태어나 자랐고, 대학교 들어오기 전까지 아드라스어를 알아야할 이유가 아무 것도 없었다.


 "내가 알려줄까?"

 "아니!"


 그건 정말 아니야. 내게 아드라스어를 알려준 것은 아다비아 하나로 족해. 너한테까지 아드라스어를 배우고 싶지는 않아. 이건 자존심 문제가 아니다. 켈라자야가 아드라스어를 곱게 알려주지 않을 것 같은 직감 때문이다. 얘라면 가르치다 속터질 것 같을 때 저주술로 내게 응징을 가할 거 같거든. 지금껏 켈라자야가 보여준 모습을 보면 그러고도 충분히 남을 거다. 책으로 머리를 내려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해야겠지. 너한테 아드라스어를 배울 일은 전혀 없을 거다.


 내가 단호하게 거부해서일까? 켈라자야는 인상을 찌푸리고 고개를 홱 돌렸다. 기분이 상했나? 그래도 그건 아니야. 너한테 배우다가 무슨 봉변을 당하려구. 지금까지 봐온 켈라자야라면 내가 못하는 모습 보고 속터질 거 같을 때 손이 올라가든 저주술을 사용하든 폭력적인 응징을 가할 게 분명하다. 그런 뻔히 예상되는 위험에 왜 스스로 몸을 던져? 그런 도박은 하고 싶지 않다.


 '모처럼 책이나 들고 갈까?'


 아다비아와 같이 공부했던 때가 떠오른다. 그때 참 좋았는데. 단 하루도 빠짐없이 내 공부를 도와줬었지. 그때 그 즐거운 기억을 떠올리게 하면 아다비아도 좋아하지 않을까? 아다비아와 같이 갔던 그 식당과 찻집을 가는 것도 괜찮을 거 같고. 하지만 아다비아가 밖으로 나오는 건 무리일 거야. 앞이 안 보이니 나 혼자 데리고 다니기는 힘들 거 같다. 그렇지만 예전 같이 공부하던 때를 떠올리게 하는 것 정도라면 아다비아도 좋아하겠지? 그때 아다비아가 그렇게 상냥할 수 없었는데. 아다비아가 단 한 번도 화를 내지 않고 세세하고 꼼꼼하게 잘 알려주는 모습을 보며 정말 많이 놀랐다.



 켈라자야는 책을 보다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고가 돌아왔다. 가방에 아다비아와 같이 보았던 책을 집어넣고 밖으로 나왔다. 햇볕이 참 좋다.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하늘이 알려준다. 그래, 이거라면 아다비아도 조금은 즐거워할 거야.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 결국 우울해하겠지만 잠시라도 즐거워할 수 있다는 게 어디야? 걔에게 필요한 건 단 한 순간만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즐거워하는 것일 거야. 어차피 끝은 암울함이니까. 그때 이야기 나누면 그 동안은 조금 기분이 좋아지겠지. 한 번만 기분이 좋아져도 괜찮잖아. 걔는 언제나 제일 밑바닥 상태일 거니까. 더 나빠질 것도 없을 거다. 이 아름다운 햇빛도 잘 될 거라고 응원해주는 것일 거야.



 루즈카 집에 도착했다. 루즈카에게 인사를 하고 아다비아가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아다비아는 하얀 옷을 입었다. 그러고보니 쟤는 에드자로 돌아온 이후 항상 흰 옷만 입고 있네? 흰옷이 그렇게 좋은가? 아니면 무슨 일이라도 있어서 흰옷에 집착하는 걸까? 다리에 이불을 덮은 채 침대 위에서 벽에 기대어 앉아 있다. 문 여는 소리가 들렸는데도 내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것 같다. 눈에 붕대를 감고 있어서 눈이 어떻게 변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붕대 아랫쪽 얼굴은 아무 변화 없다. 누가 들어왔든 관심이 전혀 없나보다. 될 대로 되라는 건가.


 "나 왔어."

 "왜 왔어?"

 "너 보고 싶어서."

 "거짓말하지 마."


 무미건조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다비아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을까? 깊은 어둠 속에 존재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 무엇을 보고 있길래 내가 온 것은 무가치한 것처럼 대하는 걸까. 의자를 아다비아가 앉아 있는 침대 옆으로 가져와 앉았다. 가방에서 책을 꺼내었다. 이 책 얼마만에 펼치는 거야? 아다비아는 계속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이제 모기만도 못한 건가. 그런데 또 병문안 안 오면 안 왔다고 뭐라고 하잖아. 예전 얘의 말처럼 지금 태도의 진짜 뜻을 도통 모르겠다.


 "예전에 네가 내 공부 도와줬던 거 기억나?"

 "기억나."

 "그때 네가 공부 도와줘서 참 좋았는데."

 "그게 좋았던 사람의 태도였어?"

 "응?"

 "아니야. 그런 기억 필요 없어. 너는 분명히 나를 싫어하니까."


 가시 돋힌 아다비아의 목소리. 그러려니 한다. 눈이 멀어버린 이후 항상 저러니까. 책을 펼쳤다. 아다비아와 마지막으로 같이 공부했던 부분을 펼쳤다. 너무 오래 공부를 안 했다. 이렇게라도 읽어주면 아다비아가 예전 추억 떠올리며 조금은 좋아하겠지. 소리내서 읽기 시작했다. 아드라스어를 소리내서 읽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이었어? 글자는 다 안다. 그런데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그 이전에 소리내서 읽는 것 자체가 힘들다. 혀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하도 공부를 안 했더니 혀까지 굳어버렸나?


 "야,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아...우리 같이 공부했던 때 떠올려보자고."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야?"

 "아니야!"


 아다비아 표정이 일그러지는 게 보인다. 이를 꽉 깨물고 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래, 어디 한 번 읽어봐."


 이거 왜 이렇게 안 읽히지? 머리 속에서는 글자 발음이 술술 나오고 있다. 오직 머리 속에서 말이다. 혓바닥이 제대로 안 움직인다. 혀가 옆으로 한 바퀴 돌아가버리는 것 같다. 이러면 안 되는데? 그냥 다 엉망이다. 내용은 당연히 모른다. 아드라스어 다 까먹었지. 그래도 소리내서 읽을 수는 있을 줄 알았다. 그게 안 된다. 소리내서 읽는 것도 안 된다고? 아무리 소리내서 잘 읽으려 해도 안 된다. 녹슨 경첩이 뻑뻑하게 움직이다 끊어지려고 하는 것처럼 더듬더듬 소리가 나온다.


 "너 지금 뭐해?"

 "우리 같이 공부한 거 뒷부분 읽고 있어."

 "왜 그따위로 읽어?"

 "응?"

 "너, 나 없어도 열심히 공부한다고 하지 않았어?"

 "그게...공부할 여유가 없었어."

 "여유가 없다니?"


 아다비아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너는 뮈젤에 있었으니 모르겠지. 너 없는 동안 여기 엄청 시끄러웠어. 진짜 전쟁나는 줄 알았다고! 단 하루도 평화로웠던 적이 없었다. 매일 내가 오늘 하루를 무사히 넘기고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뜬다는 것 자체에 고마워해야 했다. 불안과 공포가 일상이었다. 그런 와중에 무슨 책을 펼쳐서 읽고 공부를 해? 불안과 공포를 이겨내는 것이 급선무였는데. 시간이야 많았다. 세상이 하도 불안하고 공포로 가득 차서 그 누구도 책을 빌려가려 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한가하게 책을 펼칠 마음의 여유 따위는 전혀 없었다.


 "여기 단 하루도 조용한 적 없었어."

 "그래서? 서점도 난리였어?"

 "아니. 그건 아닌데..."

 "야! 그걸 말이라고 해?"


 아다비아가 베개를 집어들더니 나를 향해 있는 힘껏 휘둘렀다. 눈이 안 보여서 그런지 나를 정확히 때리지 못했다. 하마터면 한 대 맞을 뻔 했지만. 아다비아는 계속 있는 힘껏 베개를 휘둘러대었다. 저걸 내가 다 맞아줘야 할 이유는 없지.


 "야, 너 어디 있어!"

 "여기 있잖아!"

 "그걸 말이라고 해?"


 아다비아는 계속 베개를 휘둘러대었다. 내쪽을 향해 휘두르는 거 같기는 한데 허공에 대고 휘두르기만 한다. 얘는 갑자기 왜 있는 힘껏 베개로 나를 때리려고 하는 거야?


 "죽어, 병신아! 죽어! 왜 살아? 공부 열심히 한다고 했잖아!"

 "무슨 공부할 만큼 평화로웠던 줄 알아? 진짜 하루하루 공포의 연속이었다구!"

 "죽어! 이 머저리야!"


 아다비아가 내가 있는 쪽을 향해 베개를 있는 힘껏 던졌다. 계속 거칠게 숨을 내뱉으며 씩씩거린다.


 "이게 공부 열심히 한 거야?"

 "공부할 상황이 아니었다니까!"

 "나가 죽어!"


 아다비아가 있는 힘껏 소리쳤다. 이게 그렇게 화를 낼 일이야? 내가 공부 안 했던 게? 아다비아 눈을 가린 붕대가 조금씩 젖어간다.


 "아...진짜 한 명은 눈이 병신이고 하나는 머리가 병신이고..."


 할 말이 없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지. 나도 내가 아드라스어를 이렇게 못할 줄은 몰랐다. 그래도 소리내서 읽는 건 할 줄 알았다. 내가 아드라스어 글자를 소리내서 읽는 것조차 엉망이라는 사실에 나도 깜짝 놀랐다. 아다비아가 내쪽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이번에는 방향을 제대로 잡았다. 아다비아는 내 두 팔을 잡더니 손으로 더듬어 내 옷깃을 찾아내 멱살을 잡았다.


 "그래, 같이 구걸이나 하자. 다리 하나 확 분질러져버려! 장님과 절름발이 거지 부부 최고잖아!"


 아다비아가 나를 마구 흔들어댄다. 할 말이 없다. 입이 백 개라도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꺼내야할까? 예전에 같이 공부했던 추억을 떠올리게 하려고 책을 들고 왔다. 그렇지만 확인한 것은 내 아드라스어 실력이 더 엉망이 되었다는 것. 아다비아가 공부를 도와주기 이전 수준만도 못하다. 나 스스로 끔찍한 수준이라 느낄 지경이니까. 아다비아는 주먹으로 내 다리를 내리쳤다. 이건 아프다. 이거 피할 수도 없고 그냥 다 맞아야하네. 자업자득이지. 한 번이라도 소리내서 읽고 올 걸. 내가 이렇게 아드라스어를 못하게 된 것에 아다비아가 왜 분노하는지 잘 모르겠다. 자기 놀리려고 일부러 그런 거라 생각해서 더 화난 걸까?


 아다비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쳤나보다. 아다비아 손 진짜 맵네. 내 이런 모습에 웃음이 터져나오려 한다. 너무나 한심해서. 정말 바보같아서. 아다비아는 침대에 드러누워 이불을 뒤집어썼다.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네. 자리에서 일어났다. 학교가 무기한 휴교 상태라 다행이야. 내일 학교가 다시 개교한다면 정말 난리날 거야. 이 불행한 상황이 안심거리가 되어버렸다.


 "너, 다음에 올 때 그 책 가져와."

 "응? 이거?"

 "이 답없는 돌대가리야!"


 방에서 나와 루즈카에게 인사를 했다. 루즈카는 별 말 없이 인사를 받아주었다. 매우 피곤해보인다. 계속 한숨을 내쉬며 탁자에 기대어 앉아 있다. 루즈카한테 무슨 피곤한 일 있나? 아다비아가 저래서? 아니면 또 다른 뭔가 심각한 문제가 발생해서? 아다비아 돌보는 일 자체가 피곤해서일거야. 하루 종일 밖에 제대로 나가지도 못하고 저렇게 자리를 지키며 아다비아가 사고치지 않나 보는 거 같은데. 게다가 아다비아 씻겨주고 먹여주고 옷도 갈아입혀주어야 하니 그것도 힘들 거고.



 루즈카 집에서 나왔다. 아다비아가 다음에 올 때 이 책을 또 가져오라고 했다. 다음에는 이 책을 한 번이라도 소리내서 읽은 후 와야겠다. 아다비아가 왜 그렇게 화를 내고 나를 때렸는지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내가 이렇게까지 아드라스어를 못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 자체에 깜짝 놀랐다. 어느 정도는 될 줄 알았는데...아다비아가 켈라자야한테 이걸 이야기하지는 않겠지? 켈라자야가 강제로 자기한테 배우게 하려 드는 거 아냐? 그건 더 무서운데...


 "타슈갈!"


 누가 나를 불렀다. 뒤돌아보았다. 치롤라다. 치롤라는 진짜 오랜만에 보는 거 같다. 얘는 잘 지내고 있겠지? 바하르랑 잘 사귀고 있으려나? 바하르 말만 들어보면 둘이 아주 행복해 죽으려고 하는 거 닮더만.


 "지금 서점 가?"

 "응."

 "서점에 켈라자야 있어?"

 "응. 지금쯤 일어났으려나?"

 "같이 가."


 치롤라는 서점에 켈라자야가 있냐고 물어보더니 내게 같이 서점에 가자고 말했다. 너 켈라자야한테 좋은 감정 전혀 없지 않아? 전에 칼 들고 일곱 가지 꿈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자살한다고 했다가 켈라자야한테 진짜 죽을 뻔 했잖아. 그 이후 켈라자야를 슬금슬금 피하는 거 같던데. 치롤라는 켈라자야에 대해 좋아하고 싫어하고를 떠나 일단 많이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자기를 진짜 죽이려 했으니 그렇겠지. 나도 싸우다 죽도록 두들겨맞아본 적은 있지만 누가 내게 진짜 죽이겠다고 덤벼드는 경험은 해보지 못했다. 그런데 치롤라는 켈라자야에게 당했지. 그때 솔직히 나도 충격받았고 켈라자야가 무서웠다. 장난으로, 또는 위협을 하기 위해 그런 게 아니었다. 진짜로, 진심으로 치롤라를 죽이려고 했다. 루즈카가 막지 않았다면 그날 켈라자야는 치롤라를 죽였을 거다. 그런데 켈라자야가 있다는데 서점에 가겠다고? 그것도 자고 있는 켈라자야가 아니라 깨어 있는 켈라자야인데?


 "켈라자야 지금 일어나 있을 건데?"

 "그래서 가는 거야."

 "왜? 너 일곱 가지 꿈의 비밀 깨우쳤어? 복수하게?"

 "그런 거 아니야."


 치롤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복수하러 가는 것만 아니라면야 상관없겠지. 치롤라가 켈라자야에게 복수하려 든다면...상상하기도 싫다. 솔직히 치롤라가 켈라자야를 이걸 거라 생각이 들지 않는다. 둘이 저주술로 싸운다면 솔직히 치롤라를 응원할 거다. 켈라자야가 싫어서, 치롤라가 바하르 여자친구라서가 아니다. 켈라자야는 치롤라가 덤벼들면 분명히 진짜 죽이려 들 거거든. 치롤라는 최소한 그렇게 상대를 진짜 죽여버리려 들지는 않겠지. 사람을 죽이면 어쨌든 살인이다. 이 도시에서 살인 사건이 매일 발생한다 해서 살인이 가벼운 죄라는 건 아니다. 켈라자야가 살인범으로 체포되어 처형당할 바에는 차라리 치롤라한테 패배하는 게 낫다는 거다.


 "바하르랑 잘 지내?"

 "응."

 "바하르가 너 많이 좋아하는 거 같던데."

 "응. 바하르 너무 힘든 것 같아."


 치롤라 반응을 보니 나와 별로 대화를 나누고 싶어하는 것 같지 않다. 상관없다. 나도 솔직히 치롤라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으니까. 얘하고 무슨 이야기를 나눠? 얘는 나한테도 앙금이 많이 남아 있는 거 아니야? 그때 시위 참여 안 해서 말이다. 그 시위에 대한 내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그 시위 때문에 모든 게 엉망이 된 거야. 그 시위가 없었다면 아다비아가 눈이 멀어버리는 일도 안 생기지 않았을까? 켈라자야는 시위가 없어도 어쨌든 내가 있는 서점으로 찾아왔겠지. 라키사와는 지금보다 훨씬 더 가까운 사이가 되었을 거구. 나도 치롤라가 바하르 여자친구라 말을 먼저 걸어본 거다. 그렇지 않다면 별로 신경도 안 썼을 거다. 봐도 본 체 만 체 했겠지.


 서점에 가까워질수록 치롤라 얼굴이 굳어간다. 점점 긴장해가는 것 같다. 서점에 무슨 볼 일이 있어서 가려는 걸까? 치롤라는 서점에 볼 일이 딱히 없을텐데. 서점에서 책을 열심히 빌려다보지도 않았다. 그 전에 이렇게 에드자가 엉망이 되기 전부터 서점에 자주 오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 켈라자야 깨어있다니까? 이고한테 무슨 볼 일 있나? 하지만 얘가 이고한테 볼 일이 뭐가 있어? 라키사? 치롤라가 라키사한테 볼 일이 뭐가 있지? 요즘 라키사가 그 모임에 나간다는 것 듣고 라키사 보러 가는 건가? 그런데 그러려면 나한테 라키사가 있냐고 물어봤겠지, 왜 켈라자야가 있냐고 물어봐. 라키사는 당연히 있을 거고, 켈라자야가 신경쓰이니 켈라자야 있냐고 물어본 건가? 아, 오늘 라키사 안 나오는 날이지!


 "오늘 라키사 안 나오는 날이야. 라키사한테 볼 일 있으면 내일 와."

 "아니. 라키사한테는 볼 일 없어."

 "그러면?"

 "켈라자야."

 "켈라자야?"


 귀를 의심했다. 켈라자야한테 볼 일이 있다고? 이거 진짜 켈라자야한테 복수한답시고 덤비려 하는 거 아니야?


 "치롤라, 너 켈라자야한테 복수하려고 하는 거 아니지?"

 "너 그거 나한테 왜 물어보는 거야?"


 치롤라가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진짜 제발 조용히 좀 살자. 켈라자야는 내가 어떻게 막아볼 수 있는 상대가 아냐. 지금 네가 걔한테 덤벼들면...끔찍하다. 켈라자야는 보나마나 또 치롤라 죽이려 들 거고, 그걸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서점에 있나? 이고라면 어떻게 막아볼 건가? 아니야. 켈라자야가 작정하고 싸우려 들면 이고도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을 거다. 켈라자야는 저주술사고 이고는 평범한 사람이잖아. 루즈카나 되어야 어찌 해볼 수 있겠지만 루즈카는 서점이 아니라 자기 집에 있다.


 "복수 때문이라면 진짜 아니야."

 "복수? 하긴 할 거야. 그렇지만 지금은 안 해. 나도 알아. 나보다 켈라자야가 저주술이 훨씬 뛰어나. 오늘은 그거 때문에 가는 거 아니야."

 "그러면 왜?"

 "켈라자야에게 물어볼 것이 있어."

 "너 진짜 켈라자야랑 싸우러 가는 거 아니지?"

 "아니야. 그런데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너네 둘이 싸우면 곱게 안 끝날 거 같으니까 그렇지!"


 치롤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곱게 안 끝날 거야. 어쨌든 오늘은 아니야. 나도 내가 아직 많이 부족한 거 아니까."


 이거 상당히 불안하다. 치롤라가 켈라자야에게 볼 일이 있다고 하는 것 자체가 안 좋은 일이다. 치롤라를 되돌려보내고 싶다. 네가 켈라자야 만나서 좋을 일 하나도 없어. 요즘은 그래도 예전보다는 많이 순해지기는 했다. 그래도 여전히 위험해. 예전에는 진짜로 상태 많이 안 좋아졌고, 지금은 상태가 그때보다 좋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안 좋아. 언제든지 예전처럼 날뛸 수 있다고. 켈라자야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무슨 과거가 있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우리와는 생각하는 것이 달라. '적당히'라는 것도 없어. 요즘은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좋아서 얌전한 것일 거야. 둘은 안 만나게 하는 게 최선이다. 그렇지만 내 마음대로 서점에 오는 치롤라를 되돌려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일단 내 서점이 아니니까. 그리고 치롤라와 친하지도 않으니까. 치롤라가 걱정되어서 이러는 것이 아니다. 바하르의 여자친구만 아니었다면 치롤라에게 관심은 티끌만큼도 없다. 켈라자야가 걱정되기 때문에 이러는 거다.



 '진짜 둘이 싸우지만 말아라.'


 서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켈라자야는 계산대 옆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치롤라가 안으로 들어왔다. 켈라자야는 치롤라를 보더니 별 신경쓰지 않고 다시 책을 읽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이고는 치롤라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이고는 치롤라가 조금 신경쓰일 거다. 루즈카가 치롤라를 에드자로 데려왔으니까. 치롤라가 잘못되면 루즈카가 괴로워할 거다. 그거 때문에 치롤라가 신경쓰이겠지. 치롤라는 켈라자야를 향해 걸어갔다. 켈라자야는 치롤라가 자기를 향해 다가오든 말든 신경을 안 쓰고 책만 본다. 치롤라가 켈라자야 앞에 섰다.


 "켈라자야."


 치롤라가 켈라자야 이름를 부르자 켈라자야가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치롤라를 바라보았다. 치롤라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무슨 비장한 생각을 말할 것처럼 분위기를 잡는다. 켈라자야는 치롤라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보인다. 그저 자기를 불렀기 때문에 바라보는 것 같다. 잠시동안 침묵이 흘렀다. 긴장되네. 치롤라가 헛짓거리 하는 거 아니야? 이고를 바라보았다. 이고도 치롤라가 사고치는 거 아닌가 긴장했는지 말없이 치롤라를 주시하고 있다.


 "켈라자야,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뭔데?"

 "너에게 저주술이란 무엇이야?"


 켈라자야는 치롤라의 질문을 듣자마자 바로 대답했다.


 "아무 것도 아니야."


 치롤라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켈라자야가 자기를 무시한다고 여기고 있나? 치롤라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네게 저주술이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어?"

 "아무 의미 없어."

 "어떻게?"


 치롤라가 어이없어하며 소리쳤다. 켈라자야에게 어떤 대답을 원한 거야? 켈라자야가 저런 대답을 하는 것이 전혀 놀랍지 않다. 오히려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라 덤덤하다. 켈라자야가 장황한 대답을 할 리가 없으니까. 치롤라는 켈라자야와 대화를 나누어본 적이 없으니 잘 몰라서 저러는 거겠지. 켈라자야가 자세하고 장황한 설명과 대답을 할 거라 기대했던 거야? 그런 대답을 기대했다면 완벽히 틀린 거다.


 "아무 의미없는 거니까."

 "어떻게 아무 의미가 없을 수 있어? 너는 저주술을 수련하면서 저주술에 대해 아무 생각도 해보지 않았어?"

 "응. 왜 그런 걸 생각해야 하는데?"


 치롤라는 이를 꽉 깨물었다.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잠시 켈라자야를 노려보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 지금 장난치는 거 아니야."


 켈라자야는 아무 표정 변화 없이 치롤라를 바라보았다. 오히려 왜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을 자기 앞에서 펼치는지 도통 모르겠다는 듯 치롤라와 눈을 마주치고 있다.


 "나, 너한테 당한 거 안 잊고 있어. 그건 솔직히 치욕적이었어."

 "죽고 싶다고 했잖아. 그런데 그게 왜? 뭐 잘못된 거 있니?"

 "나도 저주술사야. 그리고 네게 저주술의 의미를 물어보는 건..."


 치롤라 눈이 흔들렸다.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눈에 눈물이 고이더니 한 방울 흘러내렸다.


 "그래. 나는 너보다 부족한 저주술사야. 그래서 물어보는 거야. 어떻게 해야 더욱 강한 저주술을 사용할 수 있는지..."

 "그냥 해."

 "나, 지금 너한테...꼭 그래야겠니? 너한테 부탁하는 거 안 보여?"


 치롤라 눈에서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나름대로 자존심 상하는 거 참고 물어보고 있구나. 분하지만 사실이니까. 노력만으로는 켈라자야의 저주술 실력을 넘어서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나보다. 그래서 자존심 굽히고 직접 켈라자야에게 그렇게 강해지는 비결이 뭐냐고 물어보러 왔구나. 저주술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렇게 강한 저주술사가 될 수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서.


 "나는 사실을 말했어. 내게 저주술은 아무 의미없어. 단 한 번도 이게 내게 의미있었던 적은 없어."

 "거짓말하지 마! 나를 얼마나 비참하게 만들고 싶어? 너, 지금 네가 나보다 훨씬 강하다는 거 뽐내려고 그러는 거니? 그래, 너 나보다 훨씬 강해!"

 "거짓말? 나는 솔직히 말하고 있어. 저주술 따위는 내게 무의미한 거야."

 "너 당장 저주술 사용하지 못하게 되도 아무렇지 않다는 거야?"

 "그래.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이따위 저주술. 쓸 수 있으니까 쓸 뿐인데."


 치롤라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마음 같아서는 켈라자야 머리채를 움켜쥐고 싶겠지. 저주술로 혼내주고 싶을 거고. 치롤라는 지금 켈라자야의 말 한 마디 한 마디 다 엄청난 모욕으로 느끼고 있을 거다. 기껏 자존심 굽히고 물어보고 있는데, 그것도 자기에게 너무나 소중한 저주술에 대해 물어본 건데 돌아온 대답이 '그따위 것'에 '무의미한 것'이니까. 치롤라는 계속 눈물을 흘리며 켈라자야를 노려보았다.


 "너 정말 나쁘다. 이렇게 부탁하는데..."

 "내가 나빠? 뭐가?"

 "이렇게 부탁하는데...그렇게까지 나를 모욕해야 해?"

 "모욕?"

 "더러운 거짓말로 나한테 이렇게 상처주니 기분좋니?"

 "더러운 거짓말?"


 켈라자야 눈썹이 꿈틀거렸다. 책을 힘껏 탁 덮더니 옆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 다시 말해봐. 더러운 거짓말?"

 "내 말 틀렸니? 너는 내게 더러운 거짓말하면서 속으로 나를 비웃고 있잖아!"


 켈라자야의 굳게 다문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눈에 힘이 바짝 들어간다. 켈라자야 진짜 많이 화났다.


 "나는 지금 진실을 말했어. 너는 왜 나를 안 믿니?"

 "거짓말하지 마!"

 "거짓말? 나는 네게 내 진심을 말했어!"

 "너는 그 말을 내가 믿을 거라 생각해? 저주술 보고 무의미한 것이라 하는 그 말?"

 "그러면 무가치한 것을 무가치하다고 하지, 뭐라고 해야 하는데? 가치있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거짓말 아니야?"

 "너는 지금도 거짓말하고 있어!"


 켈라자야는 나를 쳐다보았다. 켈라자야, 참아. 진짜 참아. 제발 사고치지 마. 여기에서 너 말릴 수 있는 사람 아무도 없어. 나는 네가 사고치지 않고 조용히 지냈으면 좋겠어. 아침에 서점으로 와서 내 옆에 앉아 있다 안에 들어가서 곤히 자고, 일어나서 멍하니 앉아 있다 밤에 나가는 생활. 이왕이면 밤에 안 돌아다니고 낮에 돌아다녔으면 좋겠지만 그게 싫다면 어쩔 수 없어. 그냥 지금 생활 유지하며 별 일 없이 지내는 것만이라도 계속되었으면 좋겠어. 그러니 제발! 켈라자야는 두 주먹을 꽉 쥐고 부르르 떨었다.


 "너, 나한테 시비걸려고 온 거야? 왜 내 말을 안 믿어?"

 "너야말로 지금 나를 모욕하면서 즐거워하고 있잖아!"

 "내가 지금 즐거워보이니?"

 "내 말이 틀렸어? 맞잖아! 너는 정말 못되었어. 정말 나빠!"

 "뭐? 너 솔직히 말해. 나한테 왜 온 거니?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싶다고 말해!"

 "솔직히 말했잖아! 네게 저주술은 어떤 의미냐구!"

 "내가 무가치하다고 대답했잖아. 너는 왜 내 말 안 듣니?"

 "저주술이 어떻게 무가치할 수 있어? 너는 내게 소중한 저주술을 욕하며 나를 비웃는 거야!"

 "너 그냥 솔직히 말해. 나랑 저주술 대결하고 싶지? 그래서 온 거지?"

 

 그때 누가 문을 있는 힘껏 쾅 소리를 내며 열고 들어왔다. 이건 또 어떤 미친놈이야? 서점 입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와히디야였다.


 "오늘은 서점이 왜 이렇게 시끄러워?"


 치롤라와 켈라자야가 와히디야를 쳐다보았다. 이고도 와히디야를 바라보았다.


 "뭐야? 저건 새로운 쓰레기네."

 "나?"

 "예. 당신요. 순수한 마딜땅을 오염시키는 외국인. 당연히 쓰레기죠."


 이고는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고는 와히디야 오늘 처음 보지? 와히디야가 블랑쉬블르한테도 저랬다가 혼났지. 한 번 혼난 것으로는 정신 못차리나 보다. 그렇게 해서 차릴 정신이었다면 켈라자야는 루즈카에게 한 번 제압당한 후 바로 정상인이 되었겠지만 말이다. 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와히디야를 쳐다보았다. 와히디야는 그런 이고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 이고는 날벼락 맞은 기분일 거다. 블랑쉬블르가 그때 왜 그랬나 이제 이해가 될 거다. 설마 그때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마구 상상되고 있는 거 아니야?


 "켈라자야, 저주술 쓸 줄 알아요?"

 "그건 왜 물어보죠?"

 "밖에서 들리길래요. 저주술 꽤 사용하나봐요?"


 와히디야가 미소를 지으며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켈라자야를 바라보았다. 켈라자야는 인상을 찌푸렸다.


 "몰라요. 그딴 거."

 "저주술이 무가치한 것이라는 말 듣고 놀랐어요. 저주술사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죠?"

 "무가치한 걸 무가치하다고 하지, 가치있다고 하나요?"

 "켈라자야의 저주술은 어느 정도 실력인지 궁금해요."


 와히디야가 오른손을 켈라자야의 목에 부드럽게 갖다대었다. 켈라자야는 와히디야를 노려보며 바로 와히디야의 손목을 잡고 목에서 와히디야의 손을 떼어내었다.


 "당신에게 내 저주술 능력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요."

 "왜요? 서로 대결해보는 것도 수련인데요."

 "나는 저주술에 관심없어요."

 "진짜요?"


 와히디야는 두 눈을 둥그렇게 뜨며 켈라자야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당신은 여기 쓰레기들과 있다보니 점점 쓰레기가 되어가는 거에요? 애초에 잡종이니 뭐 상관없으려나?"

 "그래서 지난 번에 당신 기준 쓰레기에게 처맞았군요. 바닥에 더러운 먼지들과 뒹굴고."


 와히디야 표정이 어두워졌다. 솔직히 그건 아주 굴욕적이었지. 옆에서 봤을 때 많이 웃겼다. 블랑쉬블르 진짜 잔인했다. 어떻게 정강이를 걷어차고 바로 반대편 발을 콱 밟아버리냐? 그런데 그때 블랑쉬블르가 화날 만 했어. 자기보다 어려도 훨씬 어릴 와히디야한테 오물덩어리 소리 들었으니까.


 "아, 저주술 대결해보고 싶다! 켈라자야의 저주술은 얼마나 대단할지 너무 궁금해요!"

 "나는 당신 저주술 하나도 안 궁금해요. 그딴 대결 같은 거 재미도 없구요."

 "내가 먼저 저주술 사용하면? 당하고 가만히 있을 거에요?"

 "해 봐. 죽여버릴테니까."

 "앗! 흥분되요! 이러면 진짜 켈라자야랑 저주술 대결해보고 싶어지잖아!"


 와히디야가 왼손을 켈라자야 턱 아래에 갖다대어 부드럽게 턱을 움켜쥐었다. 켈라자야는 흠찟하더니 바로 오른손으로 와히디야의 목을 움켜쥐었다.


 "아, 너무 흥분되는데요? 심장이 짜릿짜릿해!"

 "너 진짜 죽는다?"


 이고가 책으로 둘 사이를 내리쳤다. 와히디야와 켈라자야는 팔에 책을 맞고 서로의 목을 놓아주었다.


 "여기가 무슨 진흙탕인줄 알아? 어디서 저주술 지랄이야?"


 켈라자야는 책에 맞은 오른팔을 움켜지고 고개를 푹 숙였다. 와히디야는 왼팔을 계속 흔들어대며 이고를 노려보았다.


 "역시 쓰레기는 신성한 저주술의 가치를 몰라보는군요."


 이고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켈라자야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있고, 와히디야는 이고를 계속 노려보고 있다. 쟤네가 남자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멱살잡혀 서점 밖으로 끌려나갔겠지?


 "당신, 저주술사에요?"

 "저요? 맞아요."


 치롤라가 와히디야의 옷깃을 잡고 물어보았다. 와히디야는 치롤라를 훑어보더니 미소지었다.


 "그쪽도 저주술사에요?"

 "예."

 "아까 밖에서 들었어요. 우리 같이 저주술 이야기 나눌래요?"

 "그래요."


 와히디야는 나와 켈라자야를 향해 손을 흔들고는 치롤라와 함께 서점에서 나갔다.


 "켈라자야, 괜찮아?"

 "응."


 켈라자야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이고는 둘이 열어놓은 문을 닫고 켈라자야를 향해 돌아왔다.


 "팔 괜찮아?"

 "예."

 "많이 아팠지?"

 "아니에요. 제가 경솔했어요."

 "아니야. 그래도 진짜 죽이려 들면 어떻게 해?"

 "걔가 죽이려 들어서요."

 "켈라자야, 사람 함부로 죽이는 거 아니야."

 "예."


 이고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켈라자야는 자리에 앉았다. 계속 고개를 힘없이 푹 숙이고 있다.


 "괜찮아?"

 "응."


 켈라자야 왼팔을 주물러주었다. 진짜 아플 거다. 이고가 장난으로 내리친 것이 아니라 진짜 힘껏 내리쳤으니까. 뼈 부러지면 어쩌려고 그렇게 내리친 거야? 켈라자야 치마 위로 물방울이 하나 떨어졌다. 얘 우는구나.


 "너, 나 믿지?"

 "응."

 "남들은 왜 나를 안 믿어?"

 "왜?"

 "나는 솔직히 말했단 말이야. 그런데 그게 왜 모욕을 준 거라는 거야? 나 진짜 저주술 따위 관심 없어! 그런데 왜 나한테 시비거는 거야."

 "걔한테는 무지 의미있고 소중한가 보지."

 "나는 진심을 말했을 뿐인데...시비도 와히디야가 먼저 걸었단 말이야! 다 나를 미워해!"


 켈라자야가 오른손으로 두 눈을 덮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진짜 화나고 억울할 거다. 켈라자야는 진심을 말했고, 저주술 대결 싫다고 했다. 그건 진심이었다. 그렇지만 치롤라는 켈라자야가 거짓말을 하며 자기를 모욕하고 있다고 했고, 와히디야는 시비를 걸며 저주술 대결을 하려 했다. 결국 이고에게 와히디야와 같이 책으로 팔을 얻어맞았지.


 "나는 너 믿잖아. 너 좋아하고."


 켈라자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많이 서러운 게 있나보다. 켈라자야는 왜 자꾸 자기를 믿어주는 것에 집착할까? 그리고 자기를 안 믿는 것에 왜 이렇게 상처받고 서럽게 우는 걸까? 얘가 언제쯤 자기 과거를 내게 다 이야기해줄지 모르겠다. 과거에 분명 무언가 큰 충격이 있었던 건 확실한데...그게 분명히 켈라자야에 대한 불신과 연관이 있을 거구. 켈라자야가 나를 덥썩 끌어안더니 내 품에서 엉엉 운다. 켈라자야를 가볍게 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시간은 어떻게든 흘러간다. 4월 15일도 이렇게 끝나간다. 서점 문을 닫을 시간이 되었다. 켈라자야는 조금 전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오늘밤에도 켈라자야에게 아무 일 없기를. 라키사는 오늘도 그 모임에 갔겠지? 오늘은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진지하게 경청하고 있을까? 아다비아는 지금이 밤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여름이라면 풀벌레 소리로 밤이 왔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봄. 밤이라고 해서 풀벌레 소리가 들리지는 않는다.


 "타슈갈! 가자!"


 케르무크다. 바하르가 보이지 않는다.


 "바하르는 안 왔어?"

 "오늘 가볼 곳은..."

 "뭔데?"

 "바하르 데려가기는 조금 그런 곳이야."

 "어디인데? 얼마나 이상한 곳이길래 바하르 데려가기는 그렇다는 거야? 지난번에는 여자친구 있는 애를 거기 잘도 데려가놓고선."

 "있어, 그런 곳."


 이고에게 친구와 밖에 나갔다 오겠다고 이야기했다. 이고는 먼저 불 끄고 자겠다고 했다. 그러라고 했다. 오늘 대체 어디 갈 지 모르겠지만 이 동네 근처는 아닐 거다. 갔다 오는 것에 몇 시간 걸리겠지. 사실 새벽에 - 아예 켈라자야와 같이 서점으로 돌아와도 상관없다. 오전에는 라키사가 근무하니까. 나야 오후 근무이니 아주 늦게 돌아와도 아침에 조금 더 자도 된다. 내가 자고 있으면 이고가 라키사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루즈카 집에 가겠지.


 "어디 가는데 바하르는 안 데려왔어?"

 "있어, 그런 곳."

 "진짜 위험한 곳 아니야?"

 "위험하지 않아. 위험한 곳이면 왜 바하르를 안 데려오겠냐? 오히려 강제로라도 끌고와야지."


 케르무크는 입에 담배를 물고 실실 쪼갠다. 진짜 안 위험한 곳 맞아? 지난번 일을 떠올려보면 이놈이 데려갈 곳은 일단 좋은 곳은 아닐 것 같다. 적당히 술집 가거나 하지는 않겠지. 그런 곳이라면 바하르 데려가기 조금 그런 곳이라고 하지 않았을 거다. 어쨌든 지난번보다는 덜 위험한 곳에 가는 거라는 말을 믿어야 하나? 사실 생각해보면 케르무크 말이 그럴싸하기는 하다. 위험한 곳이라면 한 놈이라도 싸울 수 있는 놈이 더 필요하니까. 게다가 바하르는 저주술을 사용할 줄 알잖아. 만약 미쳐 날뛰는 저주술사가 있는 곳이라면 더더욱 바하르를 데려가는 것이 좋다. 바하르를 안 데려가는 것은 지난번보다는 덜 위험하단 소리인가? 그래도 영 꺼름찍하다.


 "너 돈 좀 있냐?"

 "돈? 왜?"

 "지금 얼마 있어?"

 "그건 왜? 돈 빌려달라고?"

 "아니. 재미 좀 봐야지."

 "무슨 재미?"

 "있어. 가보면 알아."


 뜬금없이 나한테 지금 얼마 있냐고 왜 물어봐? 이러니 더 이상하잖아. 돈 필요하면 그냥 돈 빌려달라고 하든가. 물론 돈을 빌려줄 생각은 없다. 자주 보는 것도 아니고 어쩌다 만나는 놈인데. 게다가 켈라자야, 와히디야 정도는 아니지만 이놈도 맨정신은 아니다. 돈을 빌려줬다가 받을 확률이 아주 없어보인다. 그런데 돈을 왜 빌려줘? 돈이야 갖고 있다. 밥 먹고 술 마실 돈 정도는 지금 주머니 속에 있다.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보았다. 1주므아 동전 2개가 있다.


 "그때 그 사건 어떻게 되었는지 들은 거 있어?"

 "그 사건이라니?"

 "우리 그때 목 뽑힌 할머니 봤잖아."

 "아...그거?"


 케르무크는 별 일 아니라는 듯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때 케르무크가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안 놀란 건 아니었다. 아마 속으로는 내심 놀랐겠지. 그랬으니 이건 자기도 죽겠다고 말했을 거다. 그 일이 벌어진지 한 달 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아무 일 아니라는 듯한 반응이다. 무덤덤하게 담배 연기를 내뱉더니 앞을 보며 말했다.


 "몰라."

 "응?"

 "그런 일이 어디 한둘이야? 그냥 또 누구 하나 죽었거니 하는 거지."

 "그래? 진짜?"

 "여기서 죽어나간 사람들 모두 죽인 사람이 있어. 그런데 살인자 잡힌 이야기 들어본 적 있어?"

 "아니."

 "그냥 일상이야. 조금 끔찍한 일상."


 그러고보니 그렇다. 매일 사람들이 살해당한다. 하루 조용하다 싶으면 그건 단지 이 동네 주변에서 죽지 않았다는 것 뿐이다. 한둘이 살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도 매일. 하지만 살인범을 잡아내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만약 살인마가 잡혔다면 엄청 시끄러웠겠지. 살인마가 아니라 단 한 명이라도 죽인 사람을 잡아냈다면 그 소식으로 이래저래 시끄러웠을 거다. 그놈이 하나만 죽였는지, 진짜 여럿을 죽인 살인마인지 서로 옥신각신하며 열심히 추리하고 이야기를 지어내며 어디를 가든 그 소리가 들렸을 거다. 그렇지만 그런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다. 오직 사람이 죽었다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못 잡는 걸까, 안 잡는 걸까?"

 "못 잡는 것일걸."

 "왜?"

 "경찰도 죽어나가는 판에 경찰이 안 잡으려 하겠어? 당장 자기들도 죽게 생겼는데."


 맞는 소리다. 살해당하는 사람들 중에는 경찰도 있다. 경찰도 한둘이 죽는 게 아니다. 그렇게 여기저기 지키고 있지만 일반인이고 경찰이고 살해당하고 있다. 경찰이 귀찮은 일이라 해결 안 하는 건 아닐 거다. 당장 자기가 죽을 수도 있는데. 경찰은 안 건드려서 남의 일인 상황이 아니다. 경찰도 죽이기 때문에 밤에 여기저기 지켜야 하는 경찰들에게는 자기 일처럼 느껴질 거다. 그들도 이게 누구 소행인지 밝히고 싶겠지. 그런데 능력이 안 되어서 못 잡는 것이라면...이 도시에서 사람들을 죽여대는 놈인지 놈들인지는 굉장한 실력을 가진 저주술사란 건가?


 "지난 번 그 할머니 죽인 놈, 대단한 놈이야?"

 "글쎄...그런데 왠지 그럴 거 같아."

 "왜?"

 "솜씨 좋더라구. 척추까지 쫙 뽑아버린 거."


 그 할머니 시체가 떠올랐다. 털이 곤두섰다. 속도 안 좋다. 어떻게 그렇게 목과 척추를 뽑아버릴 수 있지? 할머니가 아예 저항을 못한 건가? 죽여놓고 뽑은 건지 뽑아서 죽인 건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렇게 뽑아냈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거다.


 "야, 재수 옴 붙게...그 이야기는 그만하자."

 "응."

 "오늘은 우리 재수가 아주 빠방하게 좋아야 한단 말이야."

 "진짜 위험한 곳 가는 거 아니야?"

 "아냐! 진짜 안전한 곳이야. 단지 운이 좀 따라줘야 해."


 뭔 또 운이 따라줘야 해? 분명 이상한 곳 가는 건 맞다. 케르무크는 실실 쪼개며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아, 진짜 오늘은 운 좀 쫙쫙 붙어줘라."

 "어디 가는데?"

 "가보면 알아. 진짜 오늘은 우리 운빨이 어느 정도인지 한 번 봐보자."

 "설마 도박하러 가냐?"

 "가 봐."


 이거 도박장 가려고 하는 거 아니야? 아무리 봐도 이거 도박장 가는 거 같은데...도박장 가는 거라면 바하르를 안 데려온 것이 이해가 된다. 걔는 동원령 때문에 경찰 업무를 담당하고 있으니 거기 가는 건 영 꺼름찍해할 거다. 게다가 아까 돈 있냐고 물어본 거라든가, 지금 계속 운이 따라줘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거나 도박장 가는 길이라면 다 이해가 되는 소리다.


 "야, 너 지금 나 도박장 데려가는 거지?"


 케르무크는 내 말에 낄낄거리기만 한다. 이거 맞구만.


 "나 도박 안 해."

 "한 번 휩쓸려봐. 혹시 알아? 거기에 일곱 가지 꿈의 비밀을 풀 수 있는 단서가 있을지 말이야."

 "거기 있기는 뭐가 있어?"

 "그건 모르지. 한 번 흐름에 맡겨봐. 전에 갔던 곳보다는 훨씬 양호하잖아. 돈 따면 완전 꿀이고."

 "뭔 돈을 따? 도박 안 할 거라니까."

 "그래서는 아다비아 눈 뜨게 할 수 있겠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방법 없다니까?"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아다비아 눈을 뜨게 할 수 없다. 아다비아 눈을 다시 뜨게 하려면 일반인들이 상상 못 할 어떤 이상한 방법을 찾아내야만 한다. 그렇지만 그게 도박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다. 도박해서 돈 잃는 거랑 아다비아 눈 뜨는 게 무슨 연관이 있다는 거야? 내가 돈을 잃고 개털이 되면 분노와 좌절에 새로운 길이라도 발견한다는 거야? 백날 천날 돈 걸고 운을 믿어봐야 아다비아가 눈을 뜰 리는 없다. 도박판에서 돈을 따기 위해 쓸 운이라면 조금이라도 모아서 아다비아가 눈을 뜨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에 운을 써야지. 그런다고 아다비아가 눈을 다시 뜨게 되는 일이 일어날 리 없지만 말이다. 내 평생의 운을 다 끌어모아도 아다비아가 눈을 뜨는 기적은 안 일어날 거야.


 "일단 흐름에 몸을 던져보자구. 뭔가 느껴져서 네가 좋은 꿈 꿀 수 있잖아? 벌써 잊어버린 거야? 네가 어떤 특이한 꿈을 꿔서 나한테 이야기해주면 그걸로 일곱 가지 꿈의 비밀을 밝혀내본다니까. 그거 말고 방법 없잖아?"

 "내가 도박 한 번도 안 해본 줄 알아?"

 "너 도박장 가본 적 있어?"

 "아니. 그건 아닌데...그래도 애들이랑 당연히 해봤지!"

 "그 정도 말고 말이야, 진짜 제대로 된 분위기에 몸을 맡겨보자구."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도박 자체는 해봤다. 가끔 애들과 돈을 걸고 주사위를 던져보았고, 동전을 쥐고 몇 개인지 맞추곤 했다. 푼돈으로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 수 있는 것 중 하나였다. 돈을 딸 때도 있고, 잃을 때도 있었다. 재미야 있지. 자주 할 건 아니지만. 실제로 모두 자주 하지는 않았다. 무엇을 하며 놀지 떠오르지 않을 때, 누군가 내기나 하자고 하면 그때 가끔 하는 정도였다. 도박장에서 한다고 해도 다를 건 없겠지. 따면 기분 좋은 거고, 잃으면 기분 나쁜 거고.



 술집들이 모여 있는 골목 끝까지 걸어갔다. 가장 끄트머리에 있는 집이 시끄럽다. 저기인가 보다. 도박하는데 조용할 리가 없지. 저기서는 무슨 도박을 하고 있을까? 케르무크는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었다. 3주므아였다. 동전을 쥔 손을 흔들어댄다. 그때마다 동전끼리 부딪혀 짤랑짤랑 소리를 낸다. 이놈은 오늘 자기가 돈을 딸 거라고 생각하나? 저주술로 도박 결과도 바꿀 수 있을까? 그렇다면 저주술사들은 도박하면서 먹고 살아도 될 텐데.


 "저주술로 도박 결과 바꿀 수 있어?"

 "응?"

 "그러니까 주사위 원하는 눈금이 나오게 한다든가..."

 "이론적으로는 가능해."

 "너 그러면 저주술로 돈 딸 거야?"


 케르무크는 걸음을 멈추고는 입에 담배를 물었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추어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어디까지나 이론적이야."

 "너는 못 한다는 거야?"

 "못 해. 그게 될 정도면 이미 엄청난 저주술사란 말인데."

 "왜?"

 "기술적인 문제도 있고, 결정적으로..."

 "결정적으로?"


 케르무크는 담배 연기를 깊이 빨아들였다. 결국 실력 부족으로 못한다는 말을 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거야? 이렇게 굳이 무게잡을 필요 없잖아. 그냥 깔끔하게 '나는 실력이 부족해서 아직 그런 건 못해'라고만 말하면 될 일이구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케르무크를 한심하게 보거나 만만하게 볼 리 없다. 케르무크가 나한테 자기는 엄청난 저주술사라고 말한 적도 없고, 케르무크가 굉장한 저주술사라 내가 이런 일에 동참하고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인간의 정신력을 우습게 보지 마. 사람 죽이는 것보다 도박 결과 바꾸는 게 더 어려워."

 "그게 말이 돼?"

 "안 믿기겠지만 진짜야. 집념은 광기를 못 이겨."


 케르무크는 담배를 땅에 버린 후 발로 비벼서 불을 껐다.


 "그래도 저 안에 들어가서 절대 내가 저주술사란 말 하지 마라. 사람들은 저주술로 뭐든 다 할 줄 안단 말야. 괜히 저주술 소리 했다가는 우리 둘 다 두들겨맞고 다 털리기 딱 좋아."

 "알았어."


 저 안에서 저주술 이야기를 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도박에서 속임수 쓴다고 하면 눈 뒤집히는 거 내가 모를까. 친구들과 푼돈으로 할 때도 서로 속임수 썼네 안 썼네 싸우는 일이 드물지 않다. 그런데 저 도박장에서 저주술 이야기 꺼냈다가는 분명히 저주술로 결과를 조작했다고 생각하겠지. 안 봐도 뻔하다. 어이없게 돈 잃으면 속임수에 당했다고 믿고 싶어지니까.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여기저기서 분노와 환호가 터져나오고 있다.


 "너 뭐 할 줄 아는 거 있어?"

 "딱히..."

 "그러면 주사위나 하자."

 "주사위?"


 케르무크는 나를 입구 바로 왼쪽으로 끌고 갔다.


 "너 좋아하는 숫자에 걸어. 맞추면 두 배."

 "잔돈 없는데..."

 "얼마 있는데?"

 "1주므아 2개."

 "야, 그냥 1주므아 걸어! 남자가 통 크게 딱 걸어야지. 애새끼도 아니고 마르라 걸래?"

 "이 미친놈아, 뭔 1주므아를 걸어?"


 케르무크는 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마르라 동전은 하나도 없었다. 전부 주므아. 심지어 은화인 나르 동전도 있다. 이런 데에 나르를 건다고? 1나르면 100주므아인데? 저거 미친 거 아냐?


 "먹을라면 한 번에 크게 먹어야지. 딱 걸라니까? 푼돈이 모인다고 큰 돈 되냐? 푼돈이 모여봐야 흙먼지지. 어짜피 한 방이야!"

 "나는 조금 생각해보련다."


 케르무크는 피식 웃더니 6에 1주므아를 걸었다. 판 뒤에 서 있는 사람이 주사위를 던졌다. 6이 나왔다.


 "아, 썅! 그냥 다 걸껄!"

 "뭘 다 걸어?"

 "야, 다 걸었으면 한 방에 3주므아 벌었어! 이런 건 한 방에 왕창 먹어야 한다니까?"

 "미친 새끼. 6 안 나왔으면 너 벌써 개털 거지되었어."

 "그거 무서우면 돈 어떻게 버냐? 아...이번에 몇에 걸지?"

 "2."

 "어? 뭔가 왔어?"


 케르무크는 두 눈을 반짝이며 나를 쳐다보았다. 뭔가 오기는 뭐가 와? 그냥 대충 찍는 거지.


 "두 배니까 2? 완전 딱이네. 이번엔 한 방에 간다. 크게 가자!"


 케르무크는 2에 4주므아를 걸었다. 이런 또라이 새끼를 봤나. 이따 나한테 술 사달라고 조르는 거 아니야? 당연히 안 사준다. 이딴 데에 주머니에 있는 돈을 다 거는 병신이 어디 있어? 한 번 땄으면 딴 돈 갖고 놀 것이지. 무슨 한 방에 가? 한 방에 골로 가려고 환장했네. 그런데 2가 나왔다.


 "앗싸! 기분 진짜 째지네. 야, 다음엔 어디 걸까? 오늘 완전 끗발 제대로 붙는데? 어디 걸까? 어디? 3? 아니면 4?"

 "2."

 "어? 또 2? 진짜?"

 "뭐가 진짜야? 대충 거는 거지."

 "기분 째지네. 또 가자! 2에 두 배 가자!"


 케르무크는 2에 8주므아를 걸었다. 8주므아면 몇 끼야? 어차피 딴 돈 잃고 다 잃어봐야 3주므아란 건가? 그래도 잃으면 8주므아 잃어버린 것만 생각날 건데. 이놈은 도박하고 싶으면 혼자 올 거지 나는 왜 데려온 거야? 내가 돈 거나봐라. 보나마나 잃겠지. 이번엔 분명히 잃는다. 이번에도 또 2 나온다고? 말도 안 돼. 절대 못 따. 이번에 싹 다 털리고 나한테 뭐라고 하는 거 아니야? 여기에 실력이 어디 있어? 그냥 아무 거나 대충 찍는 거지. 아이고, 분명히 잃는다. 병신...이런 데에 3주므아나 거나. 땄으면 적당히 빠져나올 것이지. 주사위는 2가 나왔다.


 "와, 너 완전 미쳤다! 무슨 약 빨았냐? 뭐 이렇게 잘 맞춰? 씨발, 완전 대박이네! 야, 벌써 16주므아야. 너도 걸어! 너 완전 오늘 운빨 대박인데? 너 진짜 오늘 여기서 신세 편다. 신세 펴기만 하냐? 너 여기서 집 사갖고 나가겠는데?"

 "돈 걸기는 뭘 걸어?"

 "나 혼자 다 먹는다?"

 "너 돈 걸고 너가 따먹는 건데 그럼 너 혼자 먹지 나랑 같이 먹냐?"

 "아, 진짜 내가 안타깝다. 너 오늘 집 사서 나간다니까?"

 "헛소리 말고."

 "이번엔 어디 걸까? 뭐 딱 꽂히는 거 있어?"

 "2."

 "2를 또 걸라구? 진짜?"

 "대충 찍어. 이게 뭐 실력 갖고 하는 거냐?"

 "오, 완전 사나이인데? 씨발, 좋아! 나 또 간다! 사나이 인생 한 번 살지 두 번 사냐? 나 진짜 남자, 사나이야!"


 케르무크는 2에 16주므아를 걸고 자기 가슴을 주먹으로 쾅쾅 쳤다. 이 미친 또라이 새끼 2에 또 거네? 그것도 16주므아를 다 걸었다. 이거 완전 돌았다. 이걸 어떻게 끌고 여기서 나가지? 2가 연속으로 세 번 나온다고? 그걸 믿냐? 걸더라도 좀 생각을 하고 걸 것이지. 운빨이라 해도 2가 연속으로 세 번 나올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2에 또 걸어? 나 같으면 다른 숫자에 걸었다. 주사위는 2가 나왔다.


 "와, 씨발, 대박! 아, 미치겠네! 이럴 줄 알았으면 돈 좀 더 빌려서 올걸! 이게 대체 얼마야? 야, 벌써 32 주므아야!"

 "어?"

 "32주므아! 와, 나 썅 돈 없는 게 지랄이네. 이럴 때는 진짜 인생 한 방 다 걸어서 승부를 봐야 하는데! 야, 너 돈 없냐? 나 좀 빌려줘봐."

 "미친놈아, 뭔 돈을 빌려줘?"

 "야, 지금 이건 무조건 되는 판이라니까? 졸라 따고 있잖아? 이럴 때 확 그냥 승부를 걸어야 사나이지! 이거 씨발 졸라 되는 판이라니까? 아, 진짜 집을 걸었으면 얼마야? 집이 벌써 4채야. 아, 진짜 개같네. 나도 돈만 좀 있었으면 여기서 확확 불릴 건데!"

 "말 되는 소리를 해라."

 "야, 그러지 말고 너 돈 좀 빌려줘!"

 "안 돼!"

 "아...이거 완전 되는 판인데...아 진짜 개쓰레기같은 세상. 돈이 없으니까 돈을 못 벌잖아. 아, 씨발! 또 간다! 이번에는 몇?"

 "2."

 "2? 2 가자!"


 케르무크는 2에 또 돈을 전부 걸었다. 당연히 케르무크 말고는 그 누구도 2에 돈을 걸지 않았다. 벌써 세 번이나 연속으로 2가 나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2가 안 나오게 하겠지. 여기서 또 2가 나오면 진짜 이상한 일이니까. 진짜 지금 2가 또 나오면 주사위 갖고 장난치는 것 아닌가 의심해봐야 한다. 절대 2 안 나와. 이 병신, 지금까지 운빨로 번 돈에 원금 3주므아까지 싹 다 날리겠네. 뭐 그러려니 해라. 먹고 빠질 줄도 알아야지. 주사위는 2가 나왔다.


 "으아! 씨발, 이거야! 아, 대박!"


 케르무크는 64주므아를 받아들었다.


 "아, 졸라 고민되네. 한 방 더 갈까, 말까?"

 "너 좋을대로 하세요."

 "그래? 너 오늘 완전 귀신 붙은 거 같아! 한 번만 더 맞춰줄 수 있어?"

 "이걸 뭘 또 맞춰줘? 나도 설마했구만."

 "그래? 이번엔 느낌이 안 와?"

 "뭔 느낌이 와? 다 운빨이구만. 너 오늘 끗발 얼마나 서나 한 번 다시 걸어보든가."


 케르무크는 64주므아를 집어들고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고민되겠지. 64주므아면 진짜 큰 돈이다. 저 미친놈이 만약 64주므아 전부 걸면 이제 동전이 구리에서 은으로 바뀐다. 하지만 잃으면 모든 게 순간의 꿈이 되겠지. 케르무크는 주머니에 64주므아를 집어넣었다. 그때 주사위가 던져졌다. 1이 나왔다.


 "와, 나 오늘 뭐 되나봐!"

 "왜?"

 "3에 걸까 고민하다 말았는데 1 나왔어! 씨발 하마터면 개거지 될 뻔했네. 졸라 위험했어!"

 "자랑이다."

 

 케르무크가 나를 잡아끌고 밖으로 나왔다.


 "저 개같은 주사위, 사람 완전 홀리네."

 "정신 차렸냐?"

 "응? 정신을 차리다니?"

 "너 아까 완전 미쳤더만."

 "미치다니?"


 케르무크는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기가 뭔 짓을 했는지도 모르는 건가? 또라이도 아니고 돈을 계속 다 걸어대더만. 그것도 내가 2에 걸라고 계속 말한다고 진짜 2에만 계소 걸어대었다. 어쨌든 돈을 땄으니 잘 되긴 했지만 잃었으면 세상 망한 것처럼 한숨 내쉬었겠지.


 "야, 너 오늘 진짜 뭐 되는 날인가봐! 너도 화끈하게 걸어. 여기서 돈 따서 아다비아 맛난 거라도 하나 사주면 좋잖아!"

 "뭔 돈을 걸어?"

 "진심 나 너 오늘 미친 줄 알았어! 너 진짜 깡 좋다. 어떻게 2를 연속으로 네 번 걸 생각을 했어? 안 쫄렸어? 너 말대로 걸면서 심장 떨려 죽는 줄 알았는데!"

 "그게 뭔 깡이야? 그냥 대충 찍는 거지."

 "너 오늘 신들린 거 같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2를 연속 네 번 걸어? 이건 귀신이라도 못 맞춘다니까? 너도 눈 감고 한 번 걸어버려!"

 "싫어. 안 해. 너 그거 맞춰주느라 내 운 다 써버렸을 거다."

 "하...진짜 되는 날인데...아깝네."


 그때였다. 사람들이 우루루 도박장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우리도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 때문에 저렇게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몰려오지? 심각한 일 때문은 아닌 것 같다. 그냥 많이 오는 시간인가보다. 안은 아까보다 사람이 훨씬 많은데 더 조용해졌다.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작은 목소리로 떠든다. 거의 다 오늘 어디에서 어떤 사고가 일어났고, 몇 명이 죽었다는 이야기다. 경찰 옷을 입은 사람이 뭉치고 엉킨 사람들을 헤치며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맨 앞에 도착하자 탁자 위에 올라갔다.


 "오늘 12명!"

 "만세! 땄다!"

 "아, 썅! 왜 12명이야!"


 케르무크에게 뭐가 12명이냐고 물어보았다. 케르무크가 내 귀에 대고 말했다.


 "오늘 살해당한 사람."

 "오늘 살해당한 사람?"

 "저거 오늘 몇 명 살해당했나 놓고 내기하는 거야."

 "뭐?"


 귀를 의심했다. 지금 하루에 몇 명 살해당했는지 놓고 내기하고 있는 거야? 그래서 조금 전 사람들이 계속 어디에서 몇 명 죽었냐고 떠들어대었던 거야?


 "이거 조작이잖아! 내가 아까 저녁에 경찰한테 물어보니까 13명 죽었다고 했어!"

 "아, 그거요? 13명으로 집계되었는데 한 명이 극적으로 살아났어요."

 "이 개쓰레기 새끼, 왜 살아나고 지랄이야? 그냥 뒈질 것이지!"


 뭐? 사람이 죽을 뻔 했다가 간신히 살아났는데 왜 살아나고 지랄이냐고? 미친 거 아냐? 살아나서 다행이라고 해야 정상 아니야? 그러나 이 생각이 이상한 건가. 여기저기에서 간신히 살아난 사람을 욕하는 고함 소리가 쏟아져 나온다. 왜 살아났냐고, 그냥 뒈졌으면 돈 딸 건데 그놈 때문에 돈 잃었다고, 죽어야 할 새끼가 내 돈 먹고 살아났다고. 미쳤다. 진짜 다 미쳤다.


 "자, 자, 진정하고 내일 거에 돈 거세요. 13명보다 위, 아래?"


 진행자가 사람들을 진정시키며 내일 몇 명 죽을지에 대해 돈을 걸라고 했다.


 "내일은 조금 더 줄어들지 않을까?"

 "아니야. 어제 14명, 오늘 13명. 하락만 했으니까 내일 한 번 상승하겠지."

 "저기 판 봐봐. 선 그어보면 저항선 맞고 계속 떨어지는 추세잖아. 내일도 조금 줄어들 걸?"

 "에이, 지금 숫자가 삼각수렴해가는 거 안 보여? 13이 지지선이라니까. 내일 확 뛸 거야."

 "뭘 모르시네. 이제 한 번 튀어오를 때 되었다구요. 내일 20봐요."

 "튀어오르기는 뭘 튀어올라? 경찰이 얼마나 눈 시퍼렇게 뜨고 여기저기 감시하는 줄 알아?"

 "어차피 경찰도 죽잖아요. 이제 이 하락도 끝나간다니까요? 분명히 내일 크게 반등할 거에요."

 "나는 폭락 본다. 이렇게 계속 죽어나가는데 경찰이 바보도 아니고 가만히 있겠어? 자기들도 머리가 있으면 위험하니까 좀 쉬겠지. 내일 폭락 본다."


 이 새끼들 지금 뭐라는 거야? 무슨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지껄여가며 나름 분석을 하고 있다. 그런데 거기에 사람은 없다. 오직 숫자 변화만 보면서 더 죽을지 덜 죽을지를 예측하고 있다. 이 숫자들이 죽은 사람 수라는 것은 안중에도 없다. 미쳐도 제대로 미쳤어. 아니, 인간이 아니야. 이건 그저 인간의 탈을 쓴 짐승, 괴물들일 뿐이야.


 "내일 호재 뭐 있냐?"

 "내일 북부에서 물자 좀 많이 들어온다고 하던데?"

 "아, 내일 북문에서 장 크게 열리지?"

 "아마도? 물자만 제때 들어오면 그러겠지."

 "거기서 한 방 좀 터져라. 씨발 그러면 15는 그냥 찍을 건데."

 "폭락! 폭락! 내일 물자 안 온다."

 "내일 무조건 폭등한다. 장만 잘 열리면 거기서 15는 무조건이야. 일단 오늘 밤에 최소 7은 찍지 않을까? 거기에 시장에서 15 찍으면 22야."

 "그건 불가능하다니까요. 저항선 맞고 떨어지는 추세라니까요?"

 "이건 결국 심리 게임이잖아! 그런 예측을 깨고 확 뛰겠지. 사고가 언제 '나 언제 일어납니다'하고 일어나냐?"

 "그따위로 하니까 맨날 돈 잃죠."

 "뭐? 너 뭐라고 했냐?"


 갑자기 두 명이 멱살을 잡았다.


 "너, 씨발 이 새끼야, 뭐라고 씨부렸냐?"

 "하 참...지금 나이 믿고 깝치는 거에요? 한 주먹도 안 될 게?"

 "죽어볼래?"

 "죽여보든가요. 아, 진짜 개같네. 아저씨 죽이고 당장 1 깔아드릴까?"

 "이 새끼가!"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청년한테 건다!"

 "에이, 저 아저씨 한 주먹 하는 아저씨야."

 "청년도 만만찮을 걸? 나 쟤 싸우는 거 직접 봤어!"

 "돈 걸어!"

 "못 걸 줄 아냐?"


 사람들이 서로 멱살을 잡고 있는 청년과 아저씨를 둘러싸고 누가 이길지 내기를 걸기 시작했다. 진행자가 외쳤다.


 "청년이 이긴다는 쪽은 왼쪽, 아저씨가 이긴다는 오른쪽, 비긴다는 돈 걸지 마세요!"


 사람들이 왼쪽과 오른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야. 여기 더 이상 못 있겠어. 케르무크를 잡아끌고 밖으로 나왔다.


 "미친 새끼들."


 내 말에 케르무크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저것들 다 미쳤어. 제정신이 아니야. 아니, 그냥 인간이 아니야. 다 도살해버려도 싼 축생들이다. 내가 저주술을 쓸 수 있다면 당장 안으로 뛰쳐들어가 다 죽여버릴 거다. 저런 새끼들은 살 가치도 없어. 몇 명이 죽었는지 돈을 걸고, 싸움이 일어났는데 말리지 않고 오히려 돈을 걸며 싸우라 부추기는 것들. 저것들은 많이 죽으면 많이 죽어서 돈 땄다고 신나하겠지. 저기 있는 모두 그런 적이 한 번 넘게 있을 거다. 오히려 더 나빠지기를 바라는 놈들. 사람들이 죽어나가기를 바라는 것들. 사람들을 죽여대는 놈들은 저딴 놈들이나 다 죽여버릴 것이지!


 "걱정마. 저기 있는 놈들 다 진짜 사람 못 죽이는 놈들이니까."

 "그래도...미친 쓰레기 새끼들. 다 뒈지지 않고 뭐한대? 다 더 죽을 거에 돈 걸고 스스로 자살하든가!"

 "뭐...저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잖아. 다양성은 존중해야지."

 "다양성 까고 있네!"



 케르무크와 헤어졌다. 바로 서점으로 돌아갈까? 아냐. 이 미친 기억. 강으로 걸어갔다. 강에 도착해서 보니 벚꽃이 다 저물었다. 강물은 오늘도 조용히 흐른다. 저 강물이 이 역겹고 더러운 기억을 싹 다 씻어갔으면! 소리치고 싶다. 씨발, 이 쓰레기 새끼들아! 그러나 소리칠 수 없다. 소리치면 경찰들이 몰려오겠지. 그리고 내가 미친놈인지, 살인마인지 조사하려고 잡아갈 거다. 돌아버리겠네.


 "꽃 살래요?"


 누가 나를 톡톡 치며 불렀다. 전에 모두와 꽃놀이 왔을 때 꽃을 팔던 그 여자였다.


 "아니요."

 "뭐 안 좋은 일 있어요?"

 "그냥 다 미친 거 같아요."


 여자는 미소를 지으며 강을 바라보았다.


 "언젠가는 좋아질 거에요."


 희안한 여자네. 이 야심한 시각에 꽃을 팔러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지. 솔직히 지금 돌아다니는 사람 중 정상인 인간이 있을 리가 없는데.


 "안 무서워요? 야심한 밤인데요."

 "꿈을 놓치는 것보다 무서운 건 없으니까요."

 "꿈이요?"

 "대학교에 가고 싶어요. 그러려면 돈을 벌어야 하구요. 책도 읽고 싶어요. 돈이 없어서 책을 빌려볼 수 없어요."

 "아...학교 가봐야 피곤하기만 할텐데요."

 "무언가 배우고 싶어요. 알고 싶은 것도 많구요. 계속 꿈꾸다보면 언젠가는 이루어지겠죠?"


 여자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책 읽고 공부하는 것이 소원이라니...그 꿈을 이루려고 이 시각까지 꽃을 팔러 돌아다니다니 대단하다. 미친 건지 희망을 이루기 위해 발버둥치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보다는 훨씬 나아보인다. 아드라스어는 소리내서 글자 읽는 것도 못하고, 아다비아 눈을 뜨게 해주고 싶은데 할 수 있는 것은 없고...나는 나아지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시간 되면 서점에 놀러와요. 여기에서 남쪽으로 걸어가다보면 서점 있어요. 저 거기에서 일해요."

 "서점에서 일해요? 정말 좋겠다! 책 많이 읽겠어요!"

 "아뇨...요즘 책이 눈에 하나도 안 들어와서..."

 "진짜 놀러가도 되요?"

 "예. 나중에 시간 되면 놀러와요. 저는 타슈갈이에요. 만약 저 안 보이면 타슈갈 어디 있냐고 물어보면 되요."

 "저는 차라클라야에요. 꼭 나중에 놀러갈께요!"


 차라클라야는 내게 고맙다고 허리를 굽혀가며 인사를 하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Posted by 좀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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