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기적과 저주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3장 11화

좀좀이 2018. 4. 9.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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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3장 11화


 이고는 서점 문을 닫을 때가 되어서야 돌아왔다. 서점 문을 닫고 말없이 수레를 자리에 갖다 놓았다. 수레를 세우는 순간 이고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뭔가 안 좋은 이야기라도 들은 건가? 이고는 나를 향해 다가왔다.


 "별 일 없었어?"

 "응. 딱히."

 "블랑쉬블르가 한 판 했다면서?"

 "아...그거? 와히디야가 블랑쉬블르한테 오물덩어리라고 했다가 몇 대 맞았어."

 "진짜 무슨 미친놈 소굴이 되어가나."


 이제 서점 문을 닫을 시간. 빗자루를 쥐고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 와히디야 이야기를 듣고 기분이 안 좋은가보네. 좋을 리가 없겠지. 이 서점에서 시끄러운 일이 일어나는 걸 좋아할 리가 없으니까. 그때 이고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이고가 와히디야를 서점에서 내쫓았을까? 예전에 치롤라와 바하르가 서점에서 저주술에 대해 논쟁을 벌이려 할 때가 떠올랐다. 먼지가 너무 날리지 않게 바닥을 살살 쓸었다. 서점에 오는 사람들이 예전에 비해 많이 줄어들어서 더러운 것도 별로 없다. 대충 쓸어도 금방 깨끗해질 것 같다. 빗자루질을 하는데 반짝이는 동전이 하나 보였다. 누가 흘렸지? 동전을 집어들었다.


 "뭐야? 동전 아니잖아!"


 좋다 말았네. 모처럼 동전 하나 줍나 했는데 동전이 아니었다. 동전처럼 생긴 동그랗고 작고 평평한 은조각이었다. 그래도 은이니까 갖고 있다가 나중에 팔아야지. 어떻게 생긴 것인지 살펴보았다. 한쪽에는 아무 무늬가 없었고, 반대편에는 작게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무슨 글자가 새겨져 있는지 살펴보았다. 위에는 '에르키나', 아래에는 '라키사', 그리고 가운데에는 '영원한 우정'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거 내일 라키사 오면 돌려줘야겠다.'


 라키사 것이었다. 좋다 말았다. 이게 라키사 것이 아니었으면 나중에 팔아먹었을텐데. 라키사는 이거 잃어버려서 당황해하고 있는 거 아니야? 아까 루즈카 앞에서 망신당해서 하루 종일 기분 많이 나빴을텐데...오늘 진짜 재수없는 날이라고 불평하며 울고 있는 거 아냐? 지금 가서 주고 올까?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다. 이미 시간도 늦었고 라키사는 내일도 서점에 온다. 아닌가? 지금 찾아가서 '너 많이 당황해할 거 같아서 갖고 왔어'라고 말하며 주고 올까? 아까 낮에 나 때문에 기분 많이 상했을텐데 그렇게 하면 기분 좀 풀리려나? 귀찮다. 그냥 내일 줘야겠다.



 서점 청소를 마치고 이고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야, 너 요즘 라키사랑 잘 지내냐?"

 "나? 그럭저럭."

 "라키사 요즘 이상하다면서?"

 "응?"


 이고가 벽에 기대어 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고 말에 드러누웠다가 일어나 벽에 기대어 앉았다. 방 가운데에 있는 램프의 불빛 너머로 담배 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 길게 내뿜은 이고의 모습이 보였다. 루즈카가 아까 있었던 일을 이고한테 이야기해줬나보다. 와히디야 일도 들어서 알고 있는 거 같던데 라키사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도 대충은 알고 있겠지.


 "너 진짜 걔하고 잘 지내고 있는 거 맞아?"

 "그럭저럭."

 "나 하나만 묻자."

 "뭐?"


 이고는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끄고 내 두 눈을 응시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에 살짝 힘이 들어간 눈. 시시껄렁한 말을 할 표정이 아니다. 천장에 있는 공기가 천천히 내 몸 위로 내려와 나를 짓누른다. 이고가 저렇게 분위기 잡는 일이 어지간해서는 없는데...이고는 말없이 나를 가만히 계속 쳐다본다. 말해도 될 지 안 될 지 고민하는 것 같다. 루즈카에게 무슨 이야기를 듣고 왔길래 저러는 걸까? 루즈카가 라키사에 대해 좋게 이야기했을 리는 없겠지. 나와 라키사 관계에 대해 충분히 이상하게 생각할만한 장면이기는 했어. 어린애가 고자질하듯 내가 그걸 루즈카한테 물어보았으니까.


 "라키사 일 때려치라고 할까?"

 "뭐?"


 귀를 의심했다. 라키사를 내보낸다고? 라키사가 그 학습 모임에 나가는 것이 못마땅하기는 하지만 그게 여기에서 나가라고 할 정도였나? 이고 표정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장난으로 말하는 게 아닌 것 같다. 단지 내 마음을 한 번 떠보려고 던지는 말이 아니라 진짜로 여기에서 라키사를 내보내야 하나 고민하는 듯 싶다.


 "여기가 미친놈 소굴이 되는 꼴은 못 봐."

 "그래도 쫓아내는 건 그렇지 않아?"


 라키사가 점점 이상하게 변해가는 건 싫어.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기에서 내보내는 건 그렇지 않나? 서점 수입이 많이 줄어들기는 했다. 그것만으로도 라키사를 내보낼 충분한 이유가 되기는 해. 어찌 보면 그 시위 이후 지금까지 손님도 별로 없는 이 서점에 라키사까지 고용하고 있는 것이 대단한 일이긴 하지. 차라리 서점이 망할 거 같으니 내보내야겠다고 한다면 이고의 말에 어느 정도 납득했을 거다. 그렇지만 단지 라키사 생각이 이상하다고 내보내는 건 아니지 않나? 쫓아낼 구실거리 만드는 거야?


 "너 진짜 걔랑 아무 일 없어?"

 "없어."

 "그러면 걔 대체 왜 그래? 멀쩡하던 게 왜 갑자기 미쳤냐?"

 "글쎄...걔도 제 딴에는 뭔가 생각이 있지 않을까?"

 "진짜 빨리 내보내야 하나..."

 "그래도 그건 좀 그렇지 않아?"

 "그런 애들은 빨리 쳐내야 해. 질질 끌다가 나중에 나만 나쁜 놈 된다고. 보나마나 나중에 내가 자기를 착취했네 뭐했네 할 거 뻔한데."


 이고의 말에 뜨끔했다. 침침한 어둠이 내 표정을 가려주고 있어서 다행이다. 라키사가 그 착취 이야기도 했다. 설마 라키사가 이고한테 가서 그런 이야기를 했나? 그건 아닐 거야. 라키사는 생각이 다른 거지, 진짜 미친 것은 아니잖아. 자기도 바보가 아닌 이상 지금 이 서점에 둘이나 있을 필요가 없다는 건 잘 알고 있겠지. 솔직히 오전에 일 하나도 없잖아. 오전에는 문 닫아놔도 된다. 에드자 대학교는 무기한 휴교 상태지, 중앙학문연구소는 동원령 내려졌지, 오전에 여기 올 사람이 없다. 오후에도 사람이 별로 없는데. 예전에는 밤마다 책 수거하러 다녀야 했지만, 그 시위 이후로는 밤에 책 수거 나가본 일이 거의 없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책 수거가 그 게첸 집에 가서 책을 수거해오는 것이었구. 이런 상황을 라키사도 잘 알고 있을텐데 이고한테 가서 그런 소리를 하지는 않았을 거다. 진짜 그런 소리를 했다면 이고 말대로 라키사는 여기를 그만두어야 하는 게 맞는 거구.


 "설마 라키사가 그러려구."

 "누가 처음부터 그러려고 작정하고 들어오냐? 자연스럽게 그렇게 흘러가는 거지."


 이미 여러 차례 겪어보았으니 뻔할 거라고 말하는 것 같은 저 표정. 당연한 걸 왜 물어보냐는 듯 귀찮은 기색이 대답에 잔뜩 담겨 있다. 그렇지만 라키사가 설마 그러겠어. 라키사가 착취 이야기를 한 것은 아마 모르겠지. 당연히 모를 거다. 그렇지만 사실 이고 말대로다. 라키사가 어떻게 생각하든 이고가 말한 대로 행동했고, 어쩌면 이고 예상대로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도 라키사는 그러지 않을 거야. 여기에서 일하는 것을 진심으로 좋아하잖아.


 "라키사는 안 그럴 거야. 열심히 살잖아. 너한테 뭐 착취 같은 소리 해?"

 "아니. 내가 요즘 걔랑 이야기할 틈이나 있냐? 루즈카 집에서 돌아오면 걔 바로 퇴근하잖아."

 "걔는 열심히 사니까 그러지는 않을 거야. 책임감도 있고 일 열심히 하잖아."

 "미치는 데 이유 있냐? 그런 애들이 미치면 2배 더 빠르게 미쳐."


 이고가 무엇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상당히 안 좋은 이야기를 들었나 보다. 라키사가 참여한다는 그 학습 모임에 대해 뭔가 들은 것이 있나? 이고는 계속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루즈카한테 오늘 있었던 일을 들었다면 내가 미쳤다는 생각은 하지 않겠지. 그나저나 이고 진짜 고민하나본데? 아무리 그래도 라키사가 서점에서 쫓겨나는 건 아니다. 걔 여기에서 일하는 거 얼마나 좋아하는데...게다가 지금 여기에서 쫓겨나면 걔 일할 곳 없을 거다.


 "설마...라키사는 안 그럴 거야. 똑똑하잖아."

 "똑똑한 게 아니라 멍청한 거지. 눈 없어? 보면 뻔히 보이는 걸..."

 "그 정도 아니야. 너무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이고는 내 말에 인상을 찌푸리며 짜증을 내었다.


 "걔는 진짜 울고 싶은데 뺨 때리려고 작정했나. 걔 설마 이 서점이 내 것인 줄 아는 거 아냐?"

 "에이, 걔 너도 여기 직원인 거 알아."

 "여기라도 좀 편한 맛이 있어야지...진짜 사방팔방 다 미친놈 투성이가 되어 가네."


 흔들리는 불빛.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 봄비가 대지를 촉촉히 적시는 이 밤. 하지만 전혀 평화롭지 않다. 내가 생각해도 내가 웃기다. 아까는 라키사랑 그렇게 언쟁을 벌였는데 지금은 이고 앞에서 라키사 내쫓지는 말자고 라키사를 옹호하고 있으니...이고 심정도 이해가 된다. 이고한테도, 나한테도 이 서점은 집 같은 곳이다. 집은 평화로워야지. 밖이 아무리 미친놈 세상이라 해도 집 안만큼은 평화로워야 한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정신을 차리지. 이고가 라키사에 대해 무엇을 듣고 무엇을 알고 있는지 정확히 모른다. 그렇지만 이고가 저렇게 말하는 것으로 보아 매우 안 좋은 것을 듣고 알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안 그러면 이고가 저 정도까지 이야기할 리가 없으니까. 그래도 라키사를 서점에서 내보내는 건 아니다. 라키사가 감비르처럼 미친 건 아니잖아. 게다가 라키사는 절박하다고. 여기를 그만둔다면...그나마도 더 미치겠지. 고향에 끌려가서 미쳐버리거나, 주변에 말리는 사람이 없어서 미쳐가는 줄도 모르고 폭주해 더 미쳐버리거나.


 "오늘 무슨 이야기 들은 거 있어?"

 "오늘?"

 "갑자기 막 흥분한 거 같아서."


 아무리 봐도 뭔가 안 좋은 이야기를 들은 게 분명해. 그래서 저렇게 흥분했겠지. 라키사를 내보낼까 이야기하는 것 보면 상당히 안 좋은 것을 들은 모양인데...라키사가 이고 앞에서 딱히 잘못하거나 말실수한 적은 없는 것으로 안다. 요즘 이고와 대화 자체를 얼마 하지 않았으니까. 나도 내가 말을 자꾸 걸어대어서 이것저것 들은 거다. 라키사가 학습 모임에서 무슨 이리 있었는지 먼저 말해준 적은 없다. 그건 이고에게도 마찬가지일 거다. 이고가 서점 돌아오면 인사하고 휙 나가버리니까.


 "아...뭐 이것저것 들었어."

 "이것저것 뭐?"

 "그 라키사가 참여한다는 학습 모임 같은 거. 진짜 다 병신들인가?"

 "왜?"


 그 모임에 게첸과 감비르가 참여한다는 거에서 답이 나왔지. 보나마나 병신 머저리 집단일 거다. 입으로 내뱉는다고 다 말이 되는 건 아니니까. 논리적으로 그럴싸하다고 다 맞는 건 아니고. 무슨 소리를 할 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거긴 그냥 틀린 곳. 짐승 새끼들도 안할 짓을 서슴치 않고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겠지. 그게 자유니 평등이니 진리니 떠들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거보다 이고는 그 모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애꾸눈 병신 같아."

 "애꾸눈 병신?"


 이고의 말에 깔깔 웃었다. 애꾸눈 병신. 자기들 보고 싶은 것만 본다고 그렇게 말한 건가? 그래도 그렇지, 표현이 너무 웃기잖아. 정확히 어떤 의미로 이야기한 지는 조금 더 들어봐야 한다. 그렇지만 애꾸눈 병신은 또 뭐야?


 "아니야. 뇌가 반쪽이 없을 거야."

 "왜? 뭐 걔들 병신이기야 하지만."


 이고는 주머니에서 동전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엄지와 검지로 동전을 세워서 들어 내 쪽을 향해 내밀었다.


 "봐. 앞면이 있으면 뒷면이 있다구. 이건 하나야."

 "응. 그런데 갑자기 왜?"

 "너, '다양성'의 뒷면은 뭐일 거 같아?"

 "글쎄..."


 이고가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이 앞면이 '다양성'이라면 말이야, 이 뒷면은 끔찍한 게 기다리고 있지."

 "뭐?"

 "무시."


 아! 이고의 말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그 의미가 가슴을 후벼팠다. 내가 이 나라를 떠나려고 하는 이유. '너는 아드라스인이니까.' 정말 질리도록 듣는 이야기. 조금만 의견이 달라도 돌아오는 그 말.


 "너와 나는 다르니까. 그 말이 뭔지 알잖아? 무시하고 차별하는 걸 좋게 말하는 거. 너도 피는 아드라스인이니까 잘 알 거 아냐?"

 "응."

 "반대가 아니야. 한 덩어리야. 마딜인들이야 알 리가 없지. 하지만 우리는 피가 아드라스인이니까 알잖아? 너한테는 사람들이 아드라스인이니까 그런다고 말 안 해?"

 "해."

 "그거야. 다르니까 다르다고 무시해버리는 것. 그걸 몰라. 알 리가 없지. 배때기 불러서 헛소리하는 거니까. 당해본 적도 없고. 그렇게 자기들끼리 미쳐가는 거야."

 "네가 가서 그 모임 엎어버려!"


 이고가 주머니에 동전을 집어넣고 내게 말했다.


 "너야말로 라키사 좀 어떻게 해봐. 그놈들이야 언젠가 자연도태될 건데, 라키사도 그래도 너 괜찮아? 나야 라키사가 너무한다 싶으면 여기서 쫓아내버리면 끝이지만."

 "어떻게 말려야하나 모르겠어."

 "하여간 나는 말했다. 진짜 그쪽으로 푹 빠지면 쫓아내버릴 거야. 그때는 죽든 말든 내 알 바도 아니고."

 "그건 심하지 않아?"

 "아니. 아닌 건 아닌 거야."


 이고는 자리에 드러누웠다. 이고는 또 왜 저러지? 저런 말 함부로 하지 않는데...아주 뜬금없지는 않다. 이고가 감비르를 싫어하는 거 보면 저러는 것도 이해가 간다. 라키사한테 뭐라고 이야기해줘야 하지? 라키사는 이고가 이렇게 그 학습 모임 싫어하는 거 전혀 모르겠지? 이고랑 요즘 이야기를 나누어본 적이 제대로 없을 거다. 이고가 돌아오자마자 퇴근하고 있으니까. 설마 키란을 자기들 멋대로 해석한 것처럼 이고에 대해서도 '아드라스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제멋대로 해석하고 있는 거 아냐?



 색색의 화려한 꽃이 수놓아진 넙적한 사각형 모자를 쓰고 춤추는 여자. 새까만 눈썹과 검은 눈, 뚜렷한 이목구비. 활짝 웃고 있다. 하얀 블라우스 위에 갈색과 은색으로 화려하게 수가 놓인 흙빛 조끼를 걸치고, 검은색 긴 치마를 입고 있다. 가느다랗고 길다란 팔을 쭉 펼치며 즐겁게 춤을 춘다. 깃털이 되어 바람에 몸을 맡긴다. 하늘로, 하늘로 높이 높이 떠올라간다. 팔을 하늘을 향해 시원하게 쭉 내뻗을 때마다 그녀의 몸이 하늘을 향해 떠올라간다. 그 장면을 보며 한 여자가 박수를 치며 환호한다. 라키사다. 춤추던 여자는 라키사의 손을 잡았고, 라키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와 같이 춤추기 시작한다. 둘 다 활짝 웃는다. 그녀의 이름은 에르키나.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비가 그쳤다. 공기가 조금 차가워졌다. 에르키나. 어제 주운 그것에 새겨져 있던 이름. 설마 에르키나가 그렇게 생겼을라구. 본 적도 없는 사람인데. 별 의미없는 꿈이다. 신경쓸 필요가 전혀 없다. 세수를 하고 계산대에 앉았다. 평화로운 봄날. 켈라자야가 들어와서 방 안으로 들어갔고, 이고가 수레를 끌고 시장으로 갔고, 라키사가 서점으로 들어왔다. 참 의미없는 꿈인데 계속 생각난다. 특히 그 춤추던 여자. 에르키나. 그 메달에 라키사와 에르키나가 새겨져 있는 게 무의식적으로 꽤 인상적이라 느꼈나보다.


 "너 어제 이거 떨어뜨리고 갔더라."


 라키사에게 메달을 돌려주었다. 라키사가 두 눈을 크게 뜨고 메달을 받아들더니 모처럼 밝은 표정을 지었다. 라키사에게는 정말 소중한 것이었나보다. 당연한 것을 한 것 뿐이다. 그런데 안도하며 환한 표정을 짓는 라키사를 보니 기분이 그냥 좋아진다. 일부러 떨어뜨리고 간 거라 해도 잘했다고 하고 싶다. 정말 얼마만에 보는 밝은 표정이야?


 "고마워! 어제 이거 잃어버려서 한참 찾았었어! 어디 있었어?"

 "계산대 아래에 떨어져 있던데?"

 "아...영원히 못 찾는 줄 알았어."


 라키사는 꼭 쥐고 그 손을 자기 가슴에 갖다대었다.


 "에르키나가 누구야? 너랑 많이 친해?"

 "아...응."


 라키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많이 소중한 건가 보네?"

 "응."


 라키사는 내 말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 나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저 손을 펴서 메달만 바라볼 뿐이다. 그렇게 소중한 거면 집에 잘 보관할 것이지, 왜 괜히 목걸이에 매달고 왔다가 떨어뜨려?


 "그 메달 때문에 어제 이상한 꿈 꾸었어."


 라키사는 품에서 조그맣고 하얀 헝겊으로 만든 주머니를 꺼내서 메달을 집어넣었다. 메달을 찾았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내가 뭐라고 말하는지 별로 신경쓰지 않는 것 같다. 그래도 그 이야기는 해야겠어. 정말로 희안한 꿈이었단 말이야. 아름답게 춤을 추던 처음 보는 여자. 라키사에게 함께 춤을 추자고 권하던 그 미소. 에르키나.


 "어떤 여자가 너랑 막 즐겁게 춤추더라구. 춤 진짜 예쁘게 잘 추더라. 에르키나라던데."

 "별 꿈 아닐 거야."

 "그렇겠지? 그나저나 에르키나는 어떤 애야? 걔는 에드자 안 왔어? 묄른에 있어?"

 "죽었어."

 "어?"


 라키사가 고개를 숙이고 계산대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입을 꽉 다물고 있다. 그 어떤 소리도 입에서 새어나가지 않게 하려는 듯 입술에 힘을 꽉 주고 있다. 꿈 속에 나타난 '에르키나'라는 여자가 무언가 있는 여자라고 직감했다. 눈을 뜨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그 모습이 눈에 아주 선하다. 내가 그림을 잘 그린다면 어떤 모습이었는지 그림을 그려서 라키사에게 보여줬을 거다. 워낙 인상적이고 선명한 꿈이라 이야기한 것이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 에르키나가 어떤 여자인지 사실 그렇게 궁금하지는 않았다. 단지 그 꿈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 그런데 뭐? 죽었다고? 나 지금 잘못 들은 건가? 그러나 사람이 죽었다는 말을 농담으로 할 리 없지. 가볍게 던진 말에 돌아온 무거운 쇳덩이. 민망하다. 이런 대답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다양성이니 학습 모임이니 하는 서로의 신경 긁는 이야기 말고 다른 이야깃거리 찾았다 싶었는데 그게 더 심각한 주제였다.


 "아...그렇구나. 그거 너한테 정말 소중한 물건이겠다."


 라키사는 말이 없다. 그저 계산대만 계속 바라볼 뿐이다.


 "몸이 많이 약했나보네."

 "아니. 자살했어."

 "뭐? 왜?"

 "여자라서."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라키사는 조용히 숨을 깊이 들이마시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 안으로 들어가 차를 두 잔 타서 나왔다. 차 한 잔을 내 앞에 놓고 다른 한 잔을 자기 쪽에 놓았다. 자살. 무슨 아픔이 있었던 걸까? 얼마나 살았다고. 우리 나이에 자살할 일이 뭐 있어?


 "에르키나는 밝고 쾌활했어. 상냥하고 자상하기도 했구. 남자들에게 인기도 좋았어. 걔와 나는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친한 친구였어."

 "응."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에르키나에 대해 치욕스러운 소문이 돌기 시작했어."

 "치욕스러운 소문?"

 "아무 남자하고나 어울린다고...한순간이었어. 걔의 모든 좋은 점이 '헤픈 여자'의 특징이 되기까지..."

 "아..."


 상냥하고 자상하니 아무 남자에게나 웃음을 흘리고, 밝고 쾌활하니 아무 남자들과 서스럼없이 잘 섞였다는 건가.


 "그래서 결국 자살했어. 이해돼? 걔는 아무 남자와도 관계를 갖지 않았어. 그런데 순식간에 그렇게 된 거야."

 "응? 아무 남자와 관계를 갖지 않았다고?"

 "그래! 나는 걔와 가장 친한 친구였기 때문에 알아. 걔는 그런 애가 아니야. 그런데 모두가 헤픈 여자라고 믿어버렸어. 단지 여자 성격이 그렇다고!"

 "진짜?"


 라키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에르키나'라는 라키사의 절친은 남자와 단 한 번도 관계를 가진 적이 없는데 아무 남자와 마구 관계를 갖는 헤픈 여자라고 소문이 나서 자살했다고? 그게 말이 돼? 자기들끼리 물어보면 뻔히 드러날 헛소문인데?


 "그거 조금만 물어보면 금방 드러나는 거 아냐?"

 "맞아. 하지만 모두가 거짓인 줄 알면서도 믿었어. 원래 그런 성격이었으니 당연한 거라구..."

 "말도 안 돼."


 설마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거야? 말이 안 되잖아. 무슨 귀신이 에르키나 흉내를 내며 남자들과 관계를 가진 것도 아니구. 지금 나를 바보로 아나? 그러나 라키사는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찻잔을 바라보고 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따지고 싶다. 그딴 소문이 도는 거 자체가 말도 안 되잖아. 라키사는 손수건을 꺼내 잠시 눈에 가져다 대었다. 진짜인가? 그런 일이 가능한 거야? 라키사는 손수건을 눈에서 떼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로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걔는 결국 그거 때문에 자살했어. 하지만 자살 아니야."

 "그러면?"

 "걔네 가족이 죽였어. 가족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자살이야.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대."

 "헐..."


 라키사는 찻잔을 들었다. 찻잔을 든 손이 가볍게 떨리고 있다. 라키사는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찻잔을 다시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내게 고향은 지옥이야. 거기는 다르다는 걸 용납 못 해. 특히 여자에게는...더욱 가혹한 곳이야."



 드디어 4월이다. 1116년 4월 1일. 오늘도 이고는 늦는다. 홀로 서점 계산대 뒤에 앉아 서점 안을 둘러본다. 이제 다 끝났기를. 이 서점 안은 이렇게나 평화로운데. 창문에서 살살 들어오는 봄의 향긋한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봄의 향기가 내 옷을 잡아끌고 어서 밖으로 나와 같이 놀자고 조른다. 알아, 이런 날은 밖에 돌아다녀야 하는데. 그렇지만 지금 내가 나가면 이 서점은 누가 지켜? 잠이 솔솔 몰려온다. 봄바람이 부드러운 손으로 얼굴을 위에서 아래로 쓰다듬어준다. 계속 눈을 감으라고 하면서. 억지로 눈을 뜨려고 노력하지만 계속 눈이 감긴다. 켈라자야는 좋겠다. 이럴 때 방 안에서 곤히 자고 있으니 말이다. 나도 진짜 안에 들어가서 한숨 자고 나오고 싶다. 아니면 켈라자야를 깨워서 같이 밖에 돌아다니며 놀자고 하든가. 아다비아 병문안도 가야 하는데 계속 못 가고 있네. 그래도 요즘 못 간 건 내 무신경함 때문이 아니다. 이고가 계속 서점을 비우고 있으니 내가 어디 갈 수가 없잖아.


 이렇게 아름다운 봄날. 작년도 아름다웠지. 지금 생각해보면 참 아름다운 봄이었다. 물론 작년에는 교수한테 혼나느라 정신없었지만. 그래도 돌아다니기는 잘 돌아다녔다. 비록 책 수거하러 돌아다닌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들 모두 그렇게 소중한 것일 줄은 몰랐다. 오히려 그 지옥같은 시간이 어서 지나가고 방학이 오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방학이 뭐야. 하루하루 교수에게 혼나지 않고 잘 넘어가기만을 바랬지.


 라키사의 말이 계속 머리에서 맴돈다. 라키사가 겪은 지옥. 그 이야기를 들으니 라키사가 왜 그렇게 다양성에 집착하는지 이해가 되었다. 라키사 말이니 믿어야겠지. 에르키나는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을 거다. 단지 남들보다 더 쾌활하고 밝았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헛소문의 대상이 되었겠지. 그 자체는 놀랍지 않다. 그런 거야 어디를 가나 흔히 볼 수 있는 거니까. 그게 결국 죽을 이유가 되었다는 것은 많이 놀랍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에르키나가 도망가려고 해봤자 어디로 도망갈 수 있었겠어? 라키사 말대로 가족들이 죽인 거라 해도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가족의 명예'라는 미명하에 누군가를 죽이는 일은 있을 법한 일이니까. 이미 확 퍼진 소문을 에르키나의 가족들이 거짓이라고 밝힐 방법은 딱히 없었을 거다. 에르키나의 처녀성을 뭔 수로 입증하고 공개해? 그렇다고 그 동네가 미쳤다고 욕하며 거기를 떠날 수도 없을 거구. 에르키나만 불쌍한 거지.


 "적당한 선은 잘 지켜야할텐데..."


 라키사에게 그 모임에 그만 가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다. 그 모임은 분명히 잘못된 거다. 거긴 병신들이 미친 헛소리나 지껄이는 곳이다. 이고도 그 모임을 무지 싫어하고, 심지어 자기를 내보낼까 진지하게 고민중이라는 것을 알려줄 수 없었다. 에르키나 이야기 때문에. 라키사 눈에는 그 사람들이 다 에르키나처럼 보일 건가? 지금 여기도 공포이지만, 라키사에게는 고향도 끔찍할 거다. 어쩌면 고향이 지금 여기보다 더 끔찍할 수도 있어. 그렇게 메달까지 만들 정도로 친했으니 에르키나의 자살이 더욱 충격적이었겠지. 그리고 그래서 더더욱 지금 다양성이 평화를 가져올 거라 믿는 걸거야.


 게첸 그 새끼가 라키사에게 계속 껄떡거리는 것 때문에 그 모임이 더 싫다. 아침에 라키사는 어제 게첸이 자기를 중앙학문연구소로 데려가서 맛있는 음식도 사주고 수첩과 펜도 사주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내게 게첸에게 무엇을 선물해주는 것이 좋겠냐고 물어보았다. 그냥 하지 말라고 했는데 내 말을 들을까? 라키사가 보답으로 뭔가 주면 게첸은 분명히 그걸 라키사가 자기를 좋아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건데. 진짜 라키사랑 게첸이 이어지는 거 아니야? 설마...라키사도 게첸은 좋은 친구일 뿐이라고만 이야기했다. 물론 그런 관계가 깊어지고 깊어지면 연인으로 발전할 수가 있기는 하지만 게첸은 안 될 거야. 그렇게 징징거리는 남자를 누가 좋아해?


 이고가 라키사에게 전에 라키사가 게첸에게 대신 책을 빌려준 거에 대해 며칠 전 한 마디 했다.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했다. 게첸이 여기 다시 올 생각은 한동안 못 할 거다. 라키사와 사귀기 전까지는 엄두도 못 내겠지. 이고도 게첸에게는 책 안 빌려줘도 된다고 했고. 라키사가 게첸을 차별하는 것 아니냐고 따졌지만, 이고는 차별이 아니라 고객 관리라 응수했다. 여기는 고민 상담해주고 들어주는 곳이 아니라 서점이라고. 맞는 말이다. 여기가 무슨 자기 불만 쏟아놓고 징징거리는 곳인 줄 알아. 그렇게 거기 있기 싫으면 때려치고 나오면 될 걸, 그 돈 때문에 거기 계속 매달려 있는 주제에.



 에베디나단이 서점 문을 열고 들어왔다.


 "뭐 해?"

 "서점 지키고 있어."

 "이렇게 좋은 날에? 이런 날에는 봄기운을 한껏 들이마셔야지."

 "내가 나가면 여기는 누가 지켜?"

 "그렇기는 하네."


 에베디나단이 머리를 긁으며 웃었다. 뭘 뻔한 것을 물어봐? 너무 뻔한 것을 물어보아서 자기도 민망할 거다.


 "표정이 별로 안 좋네?"

 "이런 날 여기에만 있으니 당연히 안 좋지."


 내 표정이 그렇게 심각했나? 밝은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라키사가 이야기해준 에르키나 이야기를 곰곰히 생각해보고 있었다. 공식적으로 자살한 에르키나. 그러나 실제로는 가족의 명예를 위해 살해당했다고 했다. 그것부터 시작된 여러 생각들. 모두 하나같이 웃으며 생각할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며칠 전 꿈에서 본 에르키나 얼굴이 자꾸 떠오른다. 그 환한 얼굴과 춤. 에르키나와 같이 활짝 웃으며 춤추던 라키사. 그래도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던 것은 아닌데. 이런 이야기까지 다 할 필요는 없다. 그저 이렇게 좋은 날에 밖에 나가지 못하고 여기 안에 있어서 짜증난다고 둘러대면 충분하겠지.


 "무슨 고민 있어?"

 "고민은 무슨...그냥 잠하고 싸우고 있었어."

 "그래? 딱 고민이 가득한 표정인데."

 "아니야. 고민은 무슨."


 에베디나단은 나를 유심히 쳐다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 앉았다. 이런 도시에서 저렇게 밝은 표정을 지을 수 있다니 신기하다. 외국인이 느끼는 것과 마딜인이 느끼는 것은 아예 다른 걸까? 하긴, 에베디나단에게는 여기에서 발생한 누군가의 죽음이 자기 일로 다가올 일이 거의 없겠지. 어쩌면 여기 상황과 분위기 자체를 우리와 다르게 읽고 있는 것일 수도 있구. 여차하면 여기를 뜨면 된다는 생각에 이곳 상황에 그리 크게 신경 안 쓰는 것일 수도 있겠다. 외국인을 건드리는 일 자체도 별로 없고, 여기에 뿌리를 내린 것 같지도 않아보이니 여기를 뜬다고 해서 에베디나단에게 달라질 것은 없겠지.


 "여기는 참 평화로워."

 "여기가?"

 "여기, 서점."


 에베디나단이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서점이야 평화롭지. 한동안 간간이 게첸이 와서 징징거리고 감비르가 찾아와서 역겨운 여자 흉내를 내서 시끄러웠었다. 그렇지만 이제 둘 다 안 오고 있다. 그러니 아주 평화롭다. 서점이 시끄러울 일이 뭐가 있어? 여기에 오는 사람들 대부분이 와서 필요한 책 찾아서 빌려가거나 사가는 일 뿐이다. 게첸 같은 놈이 미친놈이지. 그놈은 술집에서도 쫓겨날 거다. 점원 잡고 그렇게 신세한탄해봐라. 앞에서야 적당히 받아줄 수 있지만 뒤에서는 다 욕한다. 어쨌든 그런 놈들이 이제 여기 안 오니 원래대로 조용해졌다. 서점이 조용해지고 원래대로 돌아온 것처럼 밖도 제발 빨리 이렇게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좋겠다.


 "서점이야 원래 조용한 게 정상이잖아."

 "그래도. 밖은 좀 시끄러운 거 같던데."

 "밖이 이상한 거야."


 여기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 밖이 이상한 거다. 사실 여기가 조용할 수 있는 이유는 게첸, 감비르 같은 놈들을 쫓아냈기 때문이다. 그런 놈들이 여기로 모여들면 여기도 바깥만큼 시끄러워졌을 거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겠지. 그렇게 큰 소란을 만들 사람들도 여기 오니까. 당장 지금 안에서 잠자고 있는 켈라자야만 해도 여기에서 날뛰면 여기의 평화는 한순간에 깨질 거다. 간간이 찾아오는 와히디야도 마찬가지구. 와히디야는 여기에서 블랑쉬블르에게 시비를 걸었다가 몇 대 맞았지. 그러고보니 이 평화가 아무 노력없이 지켜지고 있는 것은 아니구나. 이고가 여기에서는 저주술 쓰지 못하게 하고 이상한 놈들은 쫓아내고 해서 밖과 달리 평화로울 수 있는 거였다.


 "여기 평화로웠던 적 있어?"

 "작년 가을 시위가 일어나기 전까지."

 "진짜?"

 "응. 그때는 정말로 평화로웠어."

 "내성 쪽에서 사람이 죽었다던데 그것도?"

 "응. 그 망할 시위 이후로 그런 일이 생기기 시작했어."

 "그래? 신기하네."


 에베디나단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여기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잘 모르나 보다. 에드자가 원래 그렇게 미친 곳은 아니었어. 그 시위 이후로 저주술사들이 미쳐 날뛰고 쿠룬나스가 밤에 활개치고 다니기 시작했지. 마딜인이 그런 소리를 했다면 뭔 소리냐고 발끈했을 거다. 그러나 에베디나단이야 외국인이니 잘 모를 수도 있지. 여기 상황을 다 알고 있다면 그게 외국인이야?


 "너는 별 피해 없어?"

 "학교가 문 닫아서 이러고 있어."

 "그거 문제네. 학교가 어서 문을 열어야할텐데."

 "무기한 휴교라고 하는데 언제 끝날지 몰라."

 "너 주변에 다치거나 죽은 사람들은 없어?"

 "아직은."

 "언젠가는 생길 수도 있다는 말이네?"

 "모르지."


 에베디나단은 가방을 열더니 책 한 권을 꺼내서 내게 건네었다. 매우 얇다. 표지는 찢어져 있었다.


 "이거 한 번 읽어볼래?"

 "뭔데?"

 "한 번 봐봐."


 마딜어로 적혀 있었다. 저주술 관련된 내용이다. 책을 에베디나단에게 돌려주었다. 저주술 책은 보고 싶지 않다. 그런 건 내 인생 목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 차라리 돈 많이 버는 법에 관한 책을 줘. 저주술 책 따위는 이 서점에도 많이 있단 말이야. 그리고 다 쓰레기지. 추운 겨울날 한 데 모아서 땔감으로 써도 시원찮을 것들.


 "저주술 관심없어."

 "이건 한 번 읽어볼만 해."

 "네가 쓴 거 아냐?"

 "아니야. 나도 여기 와서 구한 책이야. 그런데 되게 재미있어!"

 "뭐가?"

 "한 번 읽어봐. 이거 쓴 사람은 분명히 위대한 저주술사가 되었을 거야."


 에베디나단이 책을 다시 내게 건네주었다. 건네주니 일단 받기는 받았다. 이 책을 펼칠 일은 아마 없지 않을까 싶지만. 나중에 돌려달라고 하면 그때 돌려주지. 지금 받는 것 자체를 거부해버리면 에베디나단이 기분나빠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이 책을 왜 나한테 줘?"

 "나는 그거 몇 번이고 읽어서 다 외웠거든. 한 번 읽어봐도 괜찮을 거 같아. 저주술 연구하는 사람들이 이거 꽤 흥미로워하더라구."

 "나 저주술 같은 거 안 한다니까."


 에베디나단이 내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저주술을 싫어하더라도 요즘 저주술사들이 어떤 거에 관심있어하는지 알아두면 좋잖아?"

 "별로 관심 없는데..."

 "요즘 남아드라스 공화국을 제멋대로 상상하는 사람들 참 많이 보이더라. 솔직히 그 사람들 너무 병신 머저리 같아. 심지어는 나한테까지 유세떨더라니까? 진짜 한 방 먹여주고 싶더라. 남아드라스 공화국은 여기보다 훨씬 자유로우니까 저주술이 발전할 수 있는 잠재력이 크다나? 미친놈들, 자기들이 남아드라스 공화국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안다구. 그런데 그 사람들한테 안 속으려면 이런 것도 조금 알아둬야 하지 않을까? 한 번 봐봐. 꽤 재미있어."


 남아드라스 공화국이 어떤 곳인지 잘 알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게첸이 말한 곳 같은 곳은 아니다. 대체 거기 가서 무엇을 보고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거기도 결국 사람 사는 곳이겠지. 내 고향보다 에드자가 훨씬 큰 도시지만 여기도 고향처럼 결국 사람 사는 곳이잖아. 물론 저주술은 쓸 수 없겠지. 거기는 저주술 쓰면 사형이라고 했으니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에베디나단 말이 맞는 거 같기도 하다. 저주술보고 자유, 평등, 진리의 상징이라는 진절머리나는 소리. 그들은 과연 진짜 저주술이 뭔지 알고 떠드는 걸까? 아무리 저주술사라지만 말이다. 내가 매일 곡물 가루를 물에 개어 먹고 있다고 곡물 그 자체에 대해 완벽히 아는 건 아니잖아.


 에베디나단은 내가 지금 당장 그 책을 읽기를 원하는지 계속 나를 유심히 쳐다본다. 그렇지만 여기에 별 관심이 없다. 이 책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 정확히 모른다. 저주술에 대해 적혀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첫 장만 본 것 뿐이다. 저주술이라면 놀랍거나 신기하지 않다. 에베디나단에게야 저주술이 정말 놀라운 것이겠지. 그렇지만 나는 마딜땅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저주술 그 자체는 놀라울 게 하나도 없다. 저주술사를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나중에 볼께. 지금은 책이 눈에 안 들어와서."

 "한 번 잘 읽어봐. 그거 진짜 재미있어. 그거 쓴 사람은 진짜 천재야!"


 이게 대체 뭐라고 저렇게 칭찬하는 거야? 종이에 글자가 가득한 것이 지금까지 보아왔던 저주술 책들보다는 훨씬 나아보이기는 한다. 그래도 보나마나 헛소리겠지. 안 봐도 뻔하다. 저주술은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내는 것이고, 키란이 최고라고 적혀 있겠지. 그걸 온갖 되도 않는 소리로 양을 엄청나게 부풀려놓았을 거다. 머리 속에 상상하세요, 계속 상상하세요. 그러면 저주술을 사용할 수 있어요. 저주술은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내는 것. 인간이라면 그 누구나 저주술을 사용할 수 있어요. 저주술은 무한. 인간 상상력 그 자체. 키란님께서는 저주술로 에드자 전체를 파괴하고 마딜인의 해방을 쟁취하셨어요. 그러나 저주술은 그보다 더 광활하고 무한해요. 이딴 것일 거다.


 "불만이 있으면 스스로 바꾸려 노력하는 것 어때? 그게 남자잖아."

 "응?"

 "나는 그렇게 생각해. 남자라면 스스로 뭔가 바꿔보려 해야지! 너는 무슨 불만이나 고민 없어?"

 "아..."

 "맨날 누가 바꿔주기만 바라며 징징거릴 수는 없잖아."


 에베디나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지개를 쭉 켜고 창밖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살랑거리는 봄바람이 서점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에베디나단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책을 가리켰다.


 "그 책 꼭 읽어봐! 다른 사람들한테는 보여주지 말구!"


 에베디나단이 활짝 웃으며 서점 밖으로 나갔다. 이 책이 그렇게 재미있나? 표지도 찢어졌고 귀퉁이는 다 닳았다. 뭘 얼마나 몇 번을 읽어댄 거야? 지금은 자꾸 잠이 솔솔 몰려와서 못 읽겠다. 잠기운이 좀 가시면 그때 읽어보든가 해야겠다. 마딜어로 되어 있으니 작정하고 읽으면 금방 읽을 수 있겠지. 에베디나단도 남아드라스 공화국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는 것들이 참 마음에 안 드나보다. 그나저나 에베디나단은 왜 여기까지 와서 저주술 따위를 수련한 걸까? 마법이 저주술보다 훨씬 뛰어난 것일텐데.



 시간이 참 잘 간다. 그새 하루가 다 흘러버렸다. 벌써 4월 2일 저녁이다. 오늘은 이고가 제때 돌아왔다. 그래서 에베디나단이 준 책을 읽어볼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말라고 했으니까. 뭐 얼마나 비밀스러운 내용이 있는 책인지 모르겠다. 남에게 보여주면 안 되는 심각한 내용이라도 있나? 다른 내용이라면 꽤 호기심이 생겼을 거다. 아드라스인이 괜찮다고 한 거니까. 하지만 그 책은 저주술 책이었다. 그래서 하나도 안 궁금해졌다. 가뜩이나 별 관심도 없는 저주술, 아드라스인이 재미있다고 하니 더 관심이 없어졌다. 에베디나단에게는 별 것 아닌 내용도 신기하겠지.


 "우리 꽃놀이가자!"


 블랑쉬블르가 문을 활짝 열고 들어와 소리쳤다. 어쩌면 저렇게 해맑은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이 밤에 꽃놀이? 내일 아침에 가는 것도 아니고 지금? 이 깜깜한 밤에? 장님인가? 뭐 보이는 게 있다고 이 시각에 꽃놀이야?


 "이 밤에요?"


 블랑쉬블르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이고는 블랑쉬블르를 보더니 말 없이 인상을 찌푸렸다. 블랑쉬블르는 이고의 찌푸린 얼굴을 보더니 계산대로 달려와 나와 이고 팔을 잡아당겼다.


 "벚꽃은 밤에 봐야 더 예쁜 법이야! 어서 나와! 켈라자야, 너도 빨리 나와! 같이 꽃놀이 가자."

 "진짜요? 어디로요?"

 "내성 가는 길에 있는 개천. 거기 벚꽃 정말 예쁘게 폈어!"


 이고가 심히 못마땅한지 인상을 찌푸린 채 툴툴거렸다.


 "야, 밤에 뭐가 보인다고 꽃놀이야? 가려면 백주대낮에 가든가."

 "너는 예나 지금이나 진짜 운치 없구나? 밤에 보는 벚꽃이 얼마나 예쁜지 알아?"

 "그런 건 낮에 봐야 예쁜 거야."

 "툴툴대지 말고 어서 나와! 같이 가자니까. 루즈카도 가는데 너 안 갈 거야?"


 루즈카도 간다는 말에 이고가 마지못해 일어났다. 이고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블랑쉬블르는 이 어둠 속에 벚꽃 보는 것이 뭐가 좋다고 지금 꽃놀이 가자는 거야? 하여간 참 희안한 누나야. 그래서 항상 해맑은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거겠지? 이고도 꽃놀이를 간다고 하니 안 가겠다고 할 이유가 없다. 서점을 대충 정리했다. 청소는 내일 아침에 제대로 하지, 뭐. 다같이 꽃놀이 간다는데 다른 사람들 기다리게 할 수 없잖아. 계산대만 정리한 후 밖으로 나왔다.


 "루즈카 어디 있어? 밖에 아무도 없구만."

 "루즈카랑 아다비아는 마차 타고 먼저 갔어. 아다비아는 걷기 힘들잖아."

 "우리는 거기까지 걸어가?"

 "아니. 우리도 마차 타고 가자. 걸어가면 걔네가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해."


 이렇게 밤에 꽃놀이하러 나가도 별 일 없겠지? 루즈카와 켈라자야가 있으니 쿠룬나스라도 함부로 습격하지는 못하겠지. 켈라자야는 어떨지 몰라도 루즈카라면 쿠룬나스 하나 정도는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아, 라키사! 라키사는 꽃놀이 못 가는구나. 라키사 집에 들려서 라키사도 데려가자고 할까? 아니다. 라키사는 지금 집에서 자고 있겠지. 라키사도 예전처럼 일했으면 지금 같이 꽃놀이 갈 수 있었을텐데. 지금 라키사 집에 들린다 해서 라키사가 집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학습 모임에 가서 안 돌아왔을 수도 있으니까. 게첸이 참여하고 있다면 이제야 집으로 돌아가고 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이제야 시작했을 수도 있구. 많이 아쉽기는 하지만 어쩌겠어. 다 제 복이지.



 4인용 마차를 잡아서 탔다. 이 마부는 우리를 태우고 간 후 집으로 돌아갈 거다. 우리가 마지막 손님이겠지. 이 늦은 시각에 마지막으로 손님 잡았다고 좋아할 건가? 아니면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은데 우리가 마차에 타서 돈 때문에 이짓한다고 툴툴대고 있을 건가? 마차는 신나게 달린다. 켈라자야는 블랑쉬블르에게 찰싹 달라붙어 나를 바라보며 활짝 웃는다. 나한테는 이 시각에 밖에 돌아다니는 것이 매우 특이한 일이다. 책 수거 외에는 이 시각에 돌아다닐 일이 없으니까. 그러나 켈라자야에게는 지금 이렇게 돌아다니는 것이 일상이다. 켈라자야에게 밤에 벚꽃 보는 건 그냥 평범한 일이겠지?


 "켈라자야, 오늘 꽃놀이 뒤에 우리집에서 자고 가."

 "괜찮아요."

 "나는 오늘 기분좋게 놀고 너랑 같이 밤새 같이 있고 싶은데?"

 "그래도 되요?"

 "응. 내 집에 언제든지 와서 자고 가도 된다고 했잖아."

 "언니, 고마워요."


 블랑쉬블르는 켈라자야에게 오늘밤에는 자기 집에서 자고 가라고 했다. 밤새 이 도시를 배회하는 것보다 그게 훨씬 낫지. 켈라자야가 싫다고 했다면 내가 그렇게 하라고 권할 생각이었다. 평화로운 밤도 아니고 언제 무슨 일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밤인데. 잘 수 있는 곳이 있으면 거기 가서 자고 가는 게 좋잖아. 이제 날도 풀렸다. 서점에 딸린 방에서 세 명이 자기에는 좁다. 게다가 켈라자야는 여자이구. 겨울에는 서점에서 자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봄이다. 여차하면 내가 방 밖에서 대충 자리 피고 자도 된다. 켈라자야가 위험한 어둠 속을 돌아다니다 안 좋은 일 겪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가 조금 불편하게 자는 게 낫다.


 마차가 개천에 도착했다. 여기서 다리를 건너 조금 더 가면 게첸 집이다. 그놈이 나타나면 쫓아낼 거다. 물론 그놈과 마주칠 일도 없겠지. 모처럼 놀러 나왔는데 그런 재수없는 일이 일어나면 안 돼. 켈라자야는 활짝 웃으며 블랑쉬블르와 잡담을 나누고 있다. 블랑쉬블르도 매우 즐거워하는 거 같다. 반면 나와 이고는 아무 말 없다. 이렇게 모두 같이 밖에 나왔다는 것 자체가 즐거운 일이지만 이고와 딱히 할 말이 없다. 이고는 또 입에 담배를 물었다. 그러고보니 요즘 이고 담배 엄청 많이 늘었다. 입에 담배를 아주 물고 사는 거 같다.


 "저기 둘 와 있네!"


 어둠 속에서 램프를 세 개 켜놓은 자리가 보였다. 한 명은 은빛 지팡이가, 한 명은 모자가 달린 하얗고 긴 옷이 눈에 들어왔다. 진짜 아다비아도 왔다! 가로등의 불빛과 램프의 불빛으로 벚꽃이 하얀 눈처럼 빛나고 있다. 벚꽃과 아다비아의 저 하얀 옷이 참 잘 어울린다. 벚꽃과 하나가 되기 위해 옷을 일부러 저것으로 골라입은 거 아닌가 싶을 정도다. 아다비아와 루즈카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응. 잘 지냈어?"

 "예."


 아다비아는 흰 옷에 달린 커다란 하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다.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아다비아는 지금 이 벚꽃을 못 보겠지. 벚꽃 향기를 조금이라도 느낄까? 지금까지 벚꽃 향기를 느껴본 적이 없다. 그래도 꽃이니 향이 있기는 하겠지. 아다비아는 앞이 안 보이니 예전보다 더 섬세하게 벚꽃 향기와 이 풀냄새를 느끼고 있지 않을까? 아다비아 옆에 가서 앉았다.


 "안녕."

 "응."

 "너도 나왔네?"

 "너는 내가 안 나오기를 바랬지?"


 아다비아가 내 반대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얘는 왜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려? 설마 문병 안 가서 삐졌나?


 "너 나와서 많이 기뻐."

 "거짓말하지 마."

 "뭐가 또 거짓말이야?"

 "너 병문안 안 왔잖아!"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진짜로 갈 틈이 없었다. 툭하면 이고가 하루종일 서점을 비우고 있는데. 그리고 네가 문병 오지 말라고 성질냈잖아? 성질 버럭버럭 내면서 문병 오지 말라고 해서 안 갔더만 안 왔다고 화내네. 그래놓고 내가 문병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오지 말라고 해서 안 간 게 삐지게 할 일인가? 갔으면 또 왔다고 성질냈을 거면서.


 "네가 오지 말랬잖아."

 "오지 말라고 했다고 진짜 안 오니?"

 "그러면 오지 말라고 했는데 가야해?"

 "넌 정말 바보야? 저리 가!"


 그때 켈라자야가 아다비아 옆에 와서 앉아서 아다비아 손을 잡았다.


 "아다비아, 나 왔어."

 "켈라자야! 보고 싶었어!"


 아다비아가 켈라자야를 껴안았다. 켈라자야가 밝은 표정을 지으며 아다비아를 껴안았다. 둘이 정말 많이 친한가 보다. 켈라자야는 며칠 전에 아다비아 문병 다녀왔다고 했는데...그새 또 엄청 보고 싶었던 거야? 아주 10년 못 본 친구를 극적으로 다시 만난 것처럼 서로 좋아한다. 뭔가 조금 약오른다. 나한테는 오면 왔다고 성질내고 안 오면 안 온다고 성질내면서 켈라자야한테는 엄청 반가워하네. 그보다 대체 켈라자야를 보고 왜 저렇게 반가워하지? 진짜 자주 병문안 와준다고 그러는 거야?


 "너 켈라자야는 왜 그렇게 반가워해?"

 "얘는 병문안 자주 와준단 말야!"

 "병문안? 켈라자야, 너 아다비아 병문안 가서 뭐해?"

 "같이 이야기해."

 "너보다 켈라자야가 훨씬 착하고 똑똑해! 너는 어떻게 오지 말라고 진짜 안 와? 너는 정말 나빠."


 아다비아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병문안 오지 말라고 해서 안 간 게 뭐 그리 잘못한 건지 모르겠다. 내가 안 온다고 했나? 자기가 오지 말라고 했지. 게다가 요즘 이고가 자주 서점에 늦게 돌아와서 갈 짬도 별로 없었다. 이고가 루즈카 집에 있는 것은 알테니 그러면 내가 병문안 올 수 없는 것도 당연히 알 거 아니야? 그래도 이런 걸로 싸우고 누가 맞네 따지고 싶지 않다. 모처럼 모두 기분좋게 밖에 나왔는데. 라키사 빼고.


 "손 치워!"


 아다비아가 내 손을 쳐냈다. 진짜로 내가 병문안 안 왔다고 화났나보다. 진심이 담긴 손짓이다. 가볍게 툭 치는 게 아니라 때리듯, 무언가 떨어내려는 듯 탁 쳤다. 감정이 아주 팍팍 실려 있었다.


 "미안. 꼭 다시 오라고 했으면 갔을텐데..."

 "지금 네가 잘 했다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요즘 갈 짬이 없었어."

 "그럴 필요 없어. 너 오지 마."

 "진짜?"

 "너한테 와달라고 애원할 마음 없어!"


 아다비아는 켈라자야를 꽉 껴안았다.


 "쟤 진짜 멍청한 애야."

 "그래도 착하지 않아? 너 보기 싫어서 안 온 거 같지는 않은데..."

 "아니야. 쟤는 내가 보기 싫어서 안 왔을 거야."


 켈라자야가 나를 보더니 턱으로 아다비아를 가리켰다. 아...무조건 내가 잘못했다고 빌라는 뜻이구나!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지만 켈라자야 말을 들어야겠다. 안 그랬다가는 아다비아가 계속 나한테 성질을 버럭버럭 내겠지.


 "아다비아, 내가 진짜 잘못했어. 조만간 꼭 병문안 갈께."

 "아니. 오지 마. 너 꼴보기 싫어."


 그때 블랑쉬블르가 깔깔 웃었다.


 "셋이 아주 사랑 놀이 제대로 하는데? 봄바람이 가슴 속에 산들산들 불어오나봐?"

 "무슨 사랑놀이에요?"

 "아니야? 루즈카, 이고, 쟤네들 지금 사랑 놀이 하는 거 아냐? 진짜 낯간지러워서 못 봐주겠는데."


 이고가 밝은 표정을 지으며 한 마디 했다.


 "야, 사랑 싸움하려면 저기 가서 너네들끼리 해."

 "저 타슈갈 안 사랑해요!"


 아다비아가 이고에게 성질을 내었다. 아다비아가 나를 좋아할 리 없다니까. 뻔한 걸 물어보고 있어. 쟤는 나를 그냥 말상대가 되어줄 친구 정도로 생각할 거다. 아다비아 말에 켈라자야가 웃으며 고개를 아다비아 귀에 가까이 갖다대고 말했다.


 "그러면 타슈갈 전부 내가 가져도 돼?"

 "그건...반씩 나눠갖기로 했잖아."

 "너 타슈갈 싫어하잖아."

 "내 반쪽은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릴 거야!"

 "그거 내가 주워가면?"

 "음..."


 둘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를 뭘 반으로 갈라서 나눠가져?


 "야, 뭘 나를 나눠가져?"

 "응, 너 하도 못 되어서 너 확 세로로 절반 썰어버리려구."


 아다비아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하지만 표정이 밝다. 그래도 그렇지, 뭘 또 세로로 절반 썰어버려? 말을 해도 참 무섭게 하네. 예전 같았으면 그냥 거 참 고약한 표현이라고 웃으며 넘어갔을 거다. 그렇지만 지금은 조금 그렇잖아. 아다비아는 쿠룬나스였고, 켈라자야는 저주술사다. 둘 다 작정하고 하려고 하면 진짜 나를 반으로 쫙 갈라버릴 거 같단 말이야.


 블랑쉬블르가 바구니를 열고 안에 들어 있는 것을 하나씩 꺼내어 늘어놓기 시작했다. 빵, 과일, 음료, 구운 돼지고기, 구운 닭고기에 기름에 튀긴 야채들. 저런 건 어떻게 다 구하고 준비했대? 저거 준비하려면 돈도 꽤 들고 시간도 꽤 걸렸을 건데. 블랑쉬블르는 오늘 모두 같이 즐거운 시간 보내려고 제대로 마음먹었구나. 음식들 정말 맛있어보인다. 이 얼마만에 맡아보는 과일과 고기 냄새야!


 "진짜 맛있겠다!"

 "진짜 맛있겠지? 이거 나랑 루즈카가 오후 내내 준비했어!"


 루즈카와 블랑쉬블르가 음식을 늘어놓는 것을 도왔다. 음식 냄새들이 코를 살살 간지른다. 어서 손을 내밀어 나를 집으라고 유혹한다. 너의 입속에 들어가고 싶어. 내가 이렇게 매력적인데 너는 가만히 있을 거야? 이렇게 향긋하고 좋은 냄새인데도? 어서 빨리 음식과 과일을 먹고 싶다. 꽃놀이고 뭐고 간에 이런 음식을 먹을 수 있다니 너무 잘 되었어! 정말 기뻐! 이 얼마나 재수 좋은 날이야? 블랑쉬블르 말 듣기 정말 잘 했어!


 "너무 맛있겠어요!"


 그때 아다비아가 소리쳤다.


 "그만해!"


 아다비아를 쳐다보았다. 아다비아는 고개를 푹 숙이고 팔짱을 끼고 몸을 잔뜩 움추렸다. 무언가 끔찍한 것을 느꼈는지 벌벌 떨고 있다. 붕대로 눈을 감은 상태였지만 그 붕대 너머로 아무 것도 보지 않기 위해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는 것이 보였다.


 "괜찮아?"

 "꺼져! 저리 가!"


 켈라자야갸 아다비아를 꽉 껴안았다. 그리고 작게 귀에 속삭였다.


 "아다비아, 괜찮아. 정말 괜찮아."

 "아니야! 정말 무섭단 말이야!"


 갑자기 쟤 왜 저러지? 지금 뭐 있어? 쿠룬나스가 나타난 거야? 아니면 미친 저주술사가 우리를 노리고 있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벚나무. 하천. 풀. 그리고 봄날의 향기와 부드럽게 모든 것에 엉겨붙은 시꺼먼 어둠. 그 뿐이다. 아다비아는 양손으로 귀를 꽉 덮었다.


 "아다비아, 왜 그래? 여기 뭐 있어?"

 "하지마! 너 어떻게 그런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어? 너 정말 나빠! 미워!"


 아다비아가 엉엉 울기 시작했다. 내가 한 말? 나는 음식 보고 맛있겠다고 말한 것 밖에 없는데? 내가 무슨 말을 했다는 거야?


 "나 음식 보고 맛있겠다는 말 밖에 안 했어! 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야!"

 "그 소리 그만해! 이 더러운 자식아!"


 맛있겠다는 말? 그게 그렇게 문제야? 음식 보고 맛있겠다고 한 거 뿐인데? 아다비아는 계속 엉엉 운다. 켈라자야는 나를 흘겨보았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이고, 루즈카, 블랑쉬블르 모두 깜짝 놀라서 아다비아를 바라본다. 블랑쉬블르는 뭔가 짐작이 가는지 잠시 두 눈을 질끈 감고 입을 꽉 다물었다. 음식 보고 맛있겠다고 이야기한 게 왜 저렇게 발작을 일으키는 말이 된 거지? 설마 쿠룬나스 상태였을 때가 떠올라서 그러는 건가? 아다비아 손을 잡았다.


 "그런 뜻 아니야. 진짜 미안해. 그게 너한테 그렇게 상처주는 말일 줄 몰랐어."

 "너 알면서 그런 거잖아!"

 "아니야! 진짜 그런 의미로 한 말 아니야."

 "아다비아, 타슈갈이 그런 의미로 말한 거 아닐 거야."

 "켈라자야, 아니야. 타슈갈은 분명히 그런 의미로 말했을 거야!"


 켈라자야는 아다비아를 계속 꼭 안아주고 있다. 아다비아는 간신히 진정했는지 몸을 천천히 세웠다. 여전히 떨고 있었다. 가슴에 손을 얹고 계속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래도 일단 몸을 일으켜세운 것으로 보아 조금은 진정했나보다.


 "타슈갈은 왜 이렇게 나를 미워하는지 모르겠어."

 "아니야. 타슈갈은 너 안 미워할 거야."


 아다비아가 켈라자야에게 내가 자기를 미워할 거라 불평했다. 켈라자야는 계속 아다비아를 달랜다. 왜 저러는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아다비아가 안정을 찾자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음식이 정말 맛있다. 그러나 맛있다는 말을 못 하겠다. 그 말을 하면 보나마나 다시 발작을 일으키겠지. 켈라자야가 눈으로 닭고기를 가리켰다. 아, 아다비아는 앞이 안 보여서 먹여줘야하지?


 "아다비아, 이거 먹어봐."

 "뭔데?"

 "닭고기."


 아다비아가 입을 벌렸다. 입에 닭고기를 넣어주었다. 그러자 아다비아는 내 손가락을 꽉 깨물었다.


 "야, 아파!"

 "나 아프게 했으니 너도 아파야 해!"

 "알았어. 진짜 잘못했어."


 아다비아는 닭고기를 오물오물 씹어서 삼켰다. 맛있게 생긴 음식 보고 맛있겠다고 한 것이 뭐가 문제지? 사람을 잡아먹고 싶은 욕구에 시달렸을 때라도 떠올랐던 걸까? 그래, 그거야 충격이 심해서 나한테 말해줄 수 없겠지. 그게 문제가 될 거라 생각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아다비아에게는 상당한 충격이었겠지. 아다비아를 바라보았다. 말 없이 입을 다물고 있다. 무언가 더 먹고 싶은지 아닌지 알 수 없다.


 "쇠고기 먹을래?"

 "응."


 아다비아 입에 쇠고기를 넣어주었다. 아다비아는 또 오물오물 씹어서 삼켰다. 아다비아 입에 음식을 계속 넣어주며 간간이 나도 음식을 먹었다.


 "벚꽃 정말 아름답다! 매일 이랬으면 좋겠어!"


 블랑쉬블르가 벚나무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벚나무를 바라보았다. 벚꽃이 가득하다. 저거 우수수 떨어질 때 오면 진짜 멋있겠다! 아다비아를 데리고 오기는 어려울 거다. 켈라자야와 한 번 와볼까? 모두가 웃는다. 벚꽃 잎이 떨어진다. 앉은 상태에서 내 손 위로 벚꽃 꽃잎 두 장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아다비아가 앞을 볼 수 있다면 정말 좋을텐데. 그러면 같이 이 장면을 보며 함께 황홀해했을 거다. 손 위에 떨어진 벚꽃 꽃잎 한 장을 아다비아 손바닥에 올려놔주었다. 아다비아가 천천히 손을 쥐었다. 켈라자야에게 다른 한 장을 주었다. 켈라자야는 꽃잎을 가만히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그래, 이게 봄이야. 아다비아가 눈을 떴다면 더더욱 행복한 봄이었을 거야. 즐거움만이 가득한 계절. 어디서나 기지개와 활기를 볼 수 있는 시기. 매일 이런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다비아가 눈을 뜨고. 너무나 행복할텐데!


 "켈라자야, 차 좀 끓여주지 않을래?"

 "제가요?"

 "응. 너 저주술로 물 못 끓여?"

 "할 수 있어요."

 "이제 차 마시자. 차도 가져왔어."


 루즈카가 켈라자야에게 차를 끓여줄 수 있냐고 부탁했다. 켈라자야는 알았다고 했다. 블랑쉬블르가 바구니에서 주전자와 물통을 꺼냈다. 켈라자야는 주전자에 물을 붓고 주전자를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 몇 초 지나자 물에서 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블랑쉬블르는 그 물에 찻잎을 집어넣었다. 켈라자야가 다시 주전자를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


 "이제 잘 우러났겠다."


 블랑쉬블르가 찻잔에 차를 따랐다. 내 앞에 있는 찻잔에도 차를 따라주었다. 향을 맡아보았다. 구수한 냄새가 났다. 한 모금 마셔보았다. 끝맛이 매우 달았다. 이 밤에 정말 잘 어울리는 차다. 달콤한 밤. 꿈속같다. 이것이 꿈이라면 영원히 안 깨어도 괜찮을텐데. 이 상태로 계속 먹고 놀기만 해도 좋겠다. 계속 벚꽃을 바라보면서. 비록 '맛있다'는 말은 하면 안 되지만 그것 정도야 별 거 아닌 제약이다.


 "벚꽃 머리핀 사세요!"


 내 또래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조그만 바구니를 팔에 끼고 돌아다니며 머리핀을 팔고 있었다. 이상한 애는 아니겠지? 루즈카와 켈라자야가 그 여자에게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는 거 같지 않다. 일반인인가보다. 여자는 우리가 자리를 펴고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우리쪽으로 왔다.


 "머리핀 하나에 얼마에요?"

 "30마르라요."

 "10개 주세요."

 "예."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지만 분홍색일 거다. 천과 철사로 만든 꽃잎이 예쁘게 잘 붙어 있다. 벚꽃 머리핀을 받고 돈을 내었다. 벚꽃핀을 아다비아와 켈라자야에게 하나씩 주었다. 둘 다 활짝 웃었다.


 "네가 머리에 꽂아줘."

 "알았어."


 아다비아와 켈라자야 머리에 머리핀을 꽂아주었다. 둘 다 활짝 웃는다. 벚꽃핀이 아다비아와 켈라자야에게 정말 잘 어울린다.


 "2개 주세요."

 "예."


 이고도 두 개 샀다. 이고는 루즈카 머리에 핀을 꽂아주고는 블랑쉬블르에게 벚꽃 머리핀을 건네주었다.


 "나는 머리에 안 꽂아줘?"

 "내가 왜 꽂아주냐?"

 "내가 이것들 다 준비해왔잖아!"

 "머리에 핀 꽂아주는 건 연인들이나 하는 거구."


 이고는 블랑쉬블르에게 뭘 당연한 것을 물어보냐는 듯 눈을 살짝 찡그렸다.


 "너무한 거 아니야?"


 블랑쉬블르는 기분이 상했는지 이고를 향해 소리쳤다. 지금 이 분위기에서 이고가 블랑쉬블르에게 핀을 머리에 꽂아준다고 해서 이상하게 해석할 사람은 여기 없을 거 같은데. 당장 나만 해도 아다비아, 켈라자야와 사귀기 때문에 머리에 핀을 꽂아준 게 아니잖아. 다 같이 노는 분위기에 봄기운을 더 느끼고 즐겁게 시간 보내자고 핀을 꽂아준 거 뿐이다. 여기에서 핀 꽂아주는 거 갖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판단하는 게 이상한 거 아냐?


 "오빠, 블랑쉬블르 머리에도 핀 꽂아줘요."


 루즈카가 이고의 손에 자기 손을 얹으며 말했다. 이고가 영 못마땅한 듯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블랑쉬블르 머리에 머리핀을 꽂아주었다.


 "좀 성의있게 꽂아주면 안 돼?"

 "뭘 성의있게 꽂아줘? 꽂아줬으면 되었지."

 "에휴..."


 블랑쉬블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침침한 불빛 속에서 보았다. 블랑쉬블르는 살짝 웃고 있었다. 머리에 핀 꽂아주는 게 뭐 대단한 거라구. 그걸 안 해주려 하는 이고나 그거 해줬다고 즐거워하는 블랑쉬블르나 참 재미있다. 진짜 별 거 아닌데. 내가 이고라면 별 생각없이 블랑쉬블르에게 머리핀을 꽂아줬을 거다. 다 누가 머리에 핀을 꽂아주었는데 혼자 손으로 핀 받으면 기분이 조금 그럴 거 아냐. 끝까지 이고가 안 해주겠다고 버텼으면 블랑쉬블르가 나한테 해달라고 했을 건가? 또 이 누나 어쩌구 타령하면서 말이다. 그랬으면 나 역시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블랑쉬블르 머리에 머리핀을 꽂아주었겠지.



 행복한 밤이다. 넷과 헤어져서 이고와 둘이 서점으로 걸어서 돌아왔다.


 "너 벚꽃핀을 뭐 그렇게 많이 샀어?"

 "그냥. 서점 계산대 위에 올려놓게."

 "왜?"

 "좋잖아. 볼 때마다 오늘밤 떠올리구. 이렇게 다 같이 놀아본 건 처음이잖아."


 이고가 밝은 표정을 지으며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참 맑다. 환하게 뜬 달과 수많은 별들. 항상 이렇게 평화로우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 라키사도 있었다면 더욱 좋았을텐데. 많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이런 시간을 보낼 기회가 올 거라 알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구. 나 말고 다른 사람들 모두 즐거웠겠지? 아다비아도 웃으며 돌아갔다. 나한테는 역시나 꼴보기 싫고 가다가 확 자빠져버리라고 악담을 하고 마차를 타기는 했지만. 그래도 웃으며 말했다. 장난이겠지.



 아침이 되자 라키사가 서점으로 왔다. 이고는 라키사가 오자마자 수레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어젯밤에 다 같이 모여서 벚꽃놀이갔어."

 "그래? 재미있었어?"

 "응. 아다비아, 켈라자야, 이고, 루즈카, 블랑쉬블르 다 같이 갔어. 너도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아니."


 라키사가 단호하게 아니라고 딱 잘라 말했다. 우리들과 어울리기 싫은 건가? 적당히 '괜찮아' 정도로 대답하지 않을까 했는데 너무 딱 잘라서 아니라고 말해서 깜짝 놀랐다. 우리가 정말로 싫은 건가? 아니면 그렇게 다 같이 모여서 노는 것보다 학습 모임이 훨씬 가치있다는 건가? 자기만 빼놓고 갔다고 아쉬워하는 기색이 하나도 없다. 저 대답은 오히려 그때 없어서 다행이었다고 돌려말하는 것 같다.


 "왜? 정말 모처럼 평화롭고 즐거운 시간이었는데."

 "나는 벚꽃 싫어해."

 "벚꽃을 싫어해? 왜?"


 벚꽃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나? 모두가 벚꽃을 보면 예쁘고 아름다워서 너무 좋아하는데. 그만큼 벚꽃이 다 지고 나면 그 어떤 꽃이 아름답게 피더라도 아쉬움을 감출 수가 없다. 다시 내년 봄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벚꽃을 그리워한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벚꽃이다. 그런데 벚꽃이 싫다니? 벚꽃 싫다고 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취향 참 독특하네. 무슨 안 좋은 기억이라도 있나? 아니면 원래 취향이 독특한 건가?


 "에르키나가 벚꽃이 만발한 벚나무에 목매달았어."

 "아..."


 책상을 바라보았다. 어제 사온 벚꽃 머리핀 8개가 있다. 저거 치워야하나? 라키사도 책상 위에 있는 벚꽃 머리핀을 보았다. 잠깐 바라보고는 바로 고개를 휙 돌렸다.


 "안 치워도 돼."

 "너 많이 안 좋아할 거 같은데..."

 "괜찮아. 어젯밤 기억하려고 갖다놓은 거 아니야?"

 "응."

 "나 신경쓰지 마. 너한테는 좋은 기억의 상징이잖아. 그냥 거기 놔둬. 나는 그 기억 때문에 싫어. 그렇지만 에르키나도 벚꽃 참 좋아했어."


 라키사는 살짝 미소지어보였다. 라키사가 놔두라고 했으니 치우기도 그렇다.


 "그리고 오늘이 에르키나 태어난 날이자 죽은 날이야. 우연이겠지만..."


 라키사는 자리에 앉아서 벚꽃 머리핀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철사에 분홍색 헝겊을 붙여 만든 꽃잎과 그 속에 있는 하얀 꽃술. 꽃잎 아래로 초록색 헝겊과 철사로 만든 나뭇잎 한 장이 붙어 있다. 머리핀 여덟 개가 모여서 그 이파리는 많이 가려졌고, 풍성한 꽃이 되었다. 라키사는 고개를 돌려 나를 한 번 바라보더니 가방에서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무슨 책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에르키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라키사에게 무언가 말하기 더 어렵다. 저 책이 어떤 내용인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왠지 그 학습 모임과 관련된 책일 거 같다. 예전 같았으면 언쟁이 발생하면 나도 지지 않고 그건 틀렸다고 외쳤겠지. 그러나 지금은 못하겠어. 그 말이 라키사 마음의 상처에 정확히 찌르는 칼이 될 거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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