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기적과 저주2018. 3. 15. 0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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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3장 08화


 "이고, 나 부탁 하나 있어."


 이고가 루즈카 집에서 돌아오자마자 라키사가 이고에게 다가가 말했다. 이고는 무표정하게 라키사를 쳐다보았다.


 "뭔데?"

 "나 근무 시간 바꾸고 싶어."

 "근무 시간?"


 라키사를 바라보았다. 라키사가 아침마다 서점에 온 지도 꽤 되었다. 학교가 문 닫은 이후부터일 거다. 그 즈음부터 나도, 라키사도 갈 곳이 아무 곳도 없어서 근무 시간 상관없이 매일 서점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나야 여기서 사니까 하루 종일 있는 것이 집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라키사는 여기에서 살지 않는다. 일부러 항상 매일 아침 서점에 온다. 서점 와서 일이 있으면 일을 하고, 일이 없으면 책을 읽고 공부를 한다. 그래서 '근무 시간'이라는 것 자체를 잊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근무 시간이 정해져 있었다. 원래 근무 시간이 언제였더라? 그게 의미가 있긴 한가? 원래 근무 시간은 오후였다. 학교 끝난 후 점심 먹고 일을 시직했다. 그렇지만 지금 내 근무 시간은 정확히 언제일까? 이고가 루즈카 집에 갈 때 일어나서 서점 문을 연다. 그래서였구나. 이고가 서점에 돌아온 후 아다비아 문병을 다녀오겠다고 했을 때 별 밀 없이 다녀오라고 했다. 아다비아가 쿠룬나스가 되어 루즈카 집에 갇혀 있게 되었을 때부터 내 근무 시간은 자연스럽게 오전으로 바뀌었나보다. 어차피 하루 종일 서점에 있으니 별 의미 없는 근무 시간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응. 바꿀 수 있어?"

 "언제로?"

 "오전 근무로 바꾸고 싶어. 괜찮아?"

 "왜? 오후에 다른 일 하게?"

 "그냥 이제 오후에는 내 할 일 하고 싶어서."


 이고는 잠시 고민했다. 근무 시간이라는 것 자체가 희미해지다 못해 사라지다시피 했었으니 조금 생각해봐야겠지?


 "너 몇 시까지 서점에 올 수 있어?"

 "8시."

 "그래. 그렇게 해. 언제부터 그렇게 할래?"

 "내일부터."

 "그래."


 이고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산대 뒤로 외서 앉았다. 라키사도 자리로 가서 앉았다.


 "라키사."

 "응?"

 "오후에 뭐 할 건지 물어봐도 돼?"


 이고가 라카사에게 물어보았다. 라키사는 이고를 쳐다보며 잠시 침묵하더니 이고에게서 고개를 돌려 앞을 보며 대답했다.


 "사람들 만나서 공부하려고."

 "사람들?"

 "응. 알고 싶은 것들이 있어."


 말리고 싶다. 쟤가 어떤 사람들을 만나 무슨 공부를 할 지 대충 짐작이 간다. 감비르와 게첸도 그 모임에 참여하겠지. 자기들끼리 자유니 평등이니 진리니 다양성이니 한계 극복이니 헛소리를 지껄이며 되도 않는 소리가 답인양 떠들어댈 거다. 뻔하지. 그 패거리가 여기로 오면 나와 켈라자야가 분노할 거다. 이고도 환영할 리가 없구. 라키사, 제발 정신차려. 그건 정상이 아냐. 너까지 대체 왜 그래?


 "저주술 아니지?"


 라키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고가 한숨을 내쉬었다.


 "라키사, 다시 잘 생각해보는 거 어때?"

 "뭐를?"

 "진짜 저주술 수련할 생각이야?"

 "모르겠어. 하지만 할 수도 있어. 그게 답이라면..."

 "저주술만큼은 건드리지 마."

 "왜?"


 라키사가 고개를 홱 돌려 이고를 쳐다보았다.


 "나는 아직 저주술을 수련할 생각까지는 없어. 하지만 왜 저주술을 건드리지 말라는 거야?"

 "그런 건 건드리는 거 아냐."

 "그러니까 왜? 너도 저주술 나쁘다고 생각해?"


 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고, 루즈카는 저주술사 아냐?"

 "맞아."

 "그런데 왜 저주술이 나쁘다고 생각해? 설마 루즈카가 저주술사인 거 못마땅한 거야?"

 "아니야."

 "마딜인들에게 저주술은 혼 그 자체야. 너는 외국인이라 잘 이해 못 하겠지만..."


 이고가 답답한지 나를 쳐다보았다. 나도 답답해. 라키사가 왜 저러는지 도저히 이해 못 하겠어. 키란을 좋아하고 저주술 책을 즐겨 읽기는 했지. 그렇지만 그거 때문에 저러는 거라고 단정지을 수가 없다. 그게 맞다면 이 땅에 있는 모든 마딜인들이 다 저러고 있어야하니까. 감비르를 감싸고 돌 때 이해가 안 되었다. 그놈의 다양성. 다양성이 보장되면 평화가 올 거란 소리. 그래, 그거야 라키사 개인의 생각이니 그렇다 쳐. 아주 못마땅하고 틀렸다는 것을 알고 있기는 하지만 라키사 말마따라 다양성이라 하고 넘아가자. 그런데 왜 자꾸 저기에 얽매이고 빠져드는 거야? 아다비아 때문인가? 갑자기 왜 저렇게 바뀌었는지 도대체 모르겠다.


 "라키사, 너 전공 뭐야?"

 "셀베티아어."

 "다른 나라에서 저주술사 사형에 처하는 거 알지?"

 "알아. 걱정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이고, 나 저주술 수련하기 위해 공부하겠다는 거 아냐. 세상의 아름다움을 더 알고 싶어. 그게 우리 모두를 위한 길이라 생각하구."

 "알았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 혹시나 걱정되어서 물어본 거야."

 "기분 안 나빴어. 걱정해줘서 고마워."


 답답하다. 저거 말려야 하는데 이고는 왜 안 말리는 거야? 이고가 요즘 라키사가 어떤지 잘 모르나? 전에 라키사가 게첸과 서점에 왔을 때 이고는 없었다. 요즘 이고는 루즈카 때문에 정신적 여유가 별로 없을 거다. 그래서 저러는 건가? 이고도 감비르와 게첸 꽤 안 좋아하는데 왜 가만히 있지? 그 무리에 감비르, 게첸도 들어있다는 것 자체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거 아냐?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키사에게 한 마디 하고 싶다. 너 정말 왜 그래? 올해 들어서 너 너무 변한 거 알아? 전에 내가 살인마라고 한 것 때문에 그러는 거야? 네 눈에는 감비르가 정상으로 보여? 게첸이 진짜 너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믿는 거야? 왜 자꾸 보이는 것조차 안 보려고 해? 이런 말을 쏟아낸다면 라키사가 발끈하겠지. 지금은 아무 말 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이고가 저주술에 대해 조금 부정적으로 이야기하자마자 바로 공격적으로 변하는 것을 봤으니까. 그런데 내가 이야기했다가는 더 난리를 피우겠지. 정말 돌아버리겠다. 켈라자야는 원래 미쳤고, 아다비아는 흉측한 장님이 되었고, 그나마 남은 멀쩡한 너마저 대체 왜 그래? 뜯어말리고 싶지만 뜯어말리려 하면 더 과격하게 나갈 것 같다는 두려움이 온몸을 꽉 움켜쥐고 있다.


 라키사는 묵묵히 책을 읽는다. 이고는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다. 문을 나서려는 순간 누가 안으로 들어왔다. 독한 향수 냄새와 길게 기른 머리, 쌀쌀한 날씨에도 짧은 치마를 입고 있는 수염이 일개미 더듬이만큼 자란 얼굴. 감비르다.


 "안녕."

 "너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오냐?"

 "우리 여기에서 이야기할까, 나가서 이야기할까?"


 뒤를 돌아보았다. 이고 얼굴이 아주 안 좋아보인다. 딱 봐도 당장 끌고 나가서 알아서 처리하란 표정이다. 라키사도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내가 여기서 감비르에게 폭언을 쏟아부으면 또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겠지. 라키사 때문에 참는다. 어떻게든 라키사와 잘 지내고 싶다. 지금보다 훨씬 더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고, 우리 둘 사이에 있는 보이지 않는 장벽을 어떻게든 치우고 싶다. 그래, 이건 라키사가 원하는 일이야. 내가 억지로라도 네 말 듣는 시늉이라도 한다면 너도 내 말을 듣는 척이라도 하겠지. 감비르 면상을 보자 다시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참자. 진심으로 라키사와 가까워지고 싶다. 서로 가까워지려고 할 때마다 꼬여버렸지만 천 번이고 만 번이고 풀려고 노력하다보면 분명히 풀릴 거야. 그러다보면 너를 좋아하는 마음이 결국은 너한테 전해지겠지.



 감비르를 잡아끌고 서점 맞은편 찻집으로 갔다. 자리를 잡고 앉아서 차 두 주전자를 주문했다. 이놈과 한 주전자에 담긴 차를 나누어마시고 싶지 않다. 이 새끼는 아다비아를 죽이려고 했으니까.


 "너는 머리가 비었냐?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어머, 너 말이 너무 폭력적이다. 나도 그날 많이 화난 거 참은 거 아니?"

 "진짜 좋게 말할 때 차나 처마시고 꺼져라."

 "타슈갈, 내가 여기에서 소리치면 어떻게 될 거 같니? '여러분! 루즈카 집에 쿠룬나스가 살고 있어요! 진짜에요!' 확 소리칠까?"

 "이 새끼가 진짜!"


 화가 솟구쳐서 순간 몸이 먼저 반응했다. 의자에 불이 붙은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새끼 면상이 다 박살날 때까지 주먹을 꽂아넣을 거다. 그러나 감비르는 그저 미소지으며 나를 똑바로 쳐다볼 뿐이다. 쳐볼테면 쳐봐. 지금 여기에서 나 때리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감비르는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아무 자세도 취하지 않는 감비르의 모습이 내게 말해주고 있다. 찻집에서 소란을 피우면 안 돼. 마지막에는 사람들이 왜 싸웠냐고 물어볼 거고, 거기서 감비르가 아다비아가 쿠룬나스이고, 지금 루즈카 집에 있다고 말해버린다면 아다비아와 관련된 모든 게 끝이다.


 "너는 갈 수록 머리가 나빠지는 것 같아. 아직도 모르겠니?"


 감비르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감비르는 자기 머리카락 한 가닥을 뽑아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머리카락 끝부분이 뭉쳐지며 머리카락 길이가 계속 짧아져갔다.


 "나 이제 저주술 쓸 수 있어. 여기는 사람이 많아서 이 정도만 보여줄께."

 "그래서 뭐?"

 "어? 타슈갈, 너 아직도 모르겠어? 나는 너 정도는 쉽게 이길 수 있단다. 어머, 가소로워라."

 "너 진짜 뒤져볼래?"

 "어떻게? 설마 내가 꼬집고 할퀴기만 할 거라 생각하는 거니? 내가 진짜 여자가 되어서 그럴 거라 믿는 거라면 좋기는 한데...나 주먹질도 발길질도 할 수 있어!"


 감비르가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저놈이 남자라는 것은 당연히 알고 있지만 주먹과 발차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잊고 있었다. 여장하고 여자인 척 하고는 있지만 엄연한 남자지. 싸우는 법을 모를 리 없다. 나도 이제 이놈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햇갈리는 건가? 저놈이 여자 흉내만 안 내고 있었다면 굳이 떠올리려 하지 않아도 당연히 치고박고 싸울 줄 안다는 걸 알 텐데. 이건 떠올리고 자시고 할 문제도 아니지.


 "너 정말 날이 갈수록 폭력적이 되어가는구나!"

 "아니. 너만 보면 면상을 갈겨주고 싶어서 그런다."

 "내가 많이 부러운가보네? 너도 이렇게 남자이자 여자인 존재가 되고 싶니?"

 "지랄 말고 왜 왔어? 무슨 낯짝으로 나타난 거야? 어서 차나 마시고 꺼져."


 감비르는 피식 웃더니 상체를 앞으로 숙여 나와의 거리를 좁혔다. 가까워지니 그만큼 저 새끼 면상 더 때리고 싶다.


 "너, 나한테 사과해!"

 "뭘 사과해, 이 미친놈아."

 "너 그날 나한테 난폭하게 폭력을 휘둘렀잖아! 내가 그날 얼마나 마음의 상처를 받았는지 아니?"

 "개새끼야, 너는 그날 나한테 죽었어야 했어!"

 "왜?"

 "왜긴 왜야? 너 진짜 죽이려 했잖아!"

 "그게 잘못된 거니?"

 "이 새끼가 진짜...그러면? 그게 잘했다는 거야?"


 참자. 진짜 참자. 지금 이 새끼를 여기서 두들겨패면 안 된다. 그러면 아다비아가 위험해지니까.


 "너 아다비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어?"

 "뭐?"


 감비르가 원래 목소리에 원래 말투로 말했다.


 "걔는 지금 진정한 지옥 속에 있는데? 눈도 안 보여, 사람 잡아먹은 기억은 생생해, 너 걔 예전 모습으로 되돌릴 수 있냐구."


 대꾸할 수가 없다. 아다비아가 진짜 사람을 잡아먹었는지는 모르겠다. 단순히 쿠룬나스 상태였던 것인지 진짜 사람을 잡아먹은 것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쿠룬나스 상태였으니까 사람을 잡아먹었겠다고 추측할 뿐이다. 설령 사람을 안 잡아먹었다 해도 자기가 사람을 잡아먹는 쿠룬나스였다는 것 자체가 끔찍한 기억일 거다. 인간을 잡아먹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 자체가 괴롭겠지. 그보다 더 문제는 바로 눈이다. 루즈카가 칼로 두 눈을 그어버렸다. 아다비아는 이제 앞을 못 본다. 이것은 저주술로도 해결 못 한다고 한다. 아다비아가 비참한 모습을 내게 보여준 것도 눈이 멀어버렸다는 사실 때문이다.


 "걔가 지금 얼마나 끔찍한 구렁텅이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지 상상이나 가? 너 걔 책임질 수 있어?"

 "그렇다고 죽이려 들어?"

 "걔는 죽는 것이 낫다니까? 너 걔 입장에서 생각해본 적 있어? 너는 사람 죽이는 게 별 거 아닌 거 같아?"

 "걔가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증거가 어디 있어!"

 "그게 증거가 꼭 필요한 거냐? 인간을 잡아먹으려 했다는 그 자체가 끔찍하단 거 몰라? 너는 인육 막 먹을 수 있어?"


 저 주둥이 안 혓바닥을 확 잡아뽑아버리고 싶다. 하지만 틀린 말이 아니다. 나라도 인육을 먹고 싶어 미쳐버릴 것 같았던 기억이 있다면 그 기억 때문에 끊임없이 괴로워하고 있겠지.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거니까. 그것은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 넘지 말아야할 최소한의 선이다. 어찌 보면 인간을 잡아먹었다는 것 그 자체는 별 거 아닐 수 있을 수도 있다. 그 이전에 인간을 잡아먹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진짜 문제겠지.


 "거기다 걔 지금 눈도 안 보이지? 눈 먼 여자가 할 수 있는 게 대체 뭐 있냐? 까놓고 말해서 가랑이 벌리는 거 말고 할 거 있어? 아, 걔는 이제 면상도 걸레 되어서 돈도 못 받겠네. 얼굴에 수건 덮고 해야할 건가? 면상 보면 토쏠리니까 베게로 가리고 말이야."

 "입 닥쳐라."

 "그러면 반박해보든가. 내 말이 틀렸어? 나는 지금 사실만 말하고 있는데?"

 "누가 그렇게 정해놓았는데?"

 "정한 사람은 없어. 왜냐하면 모두가 그렇게 정했으니까. 내 말이 틀렸어? 이 세상에 맹인 여자가 할 수 있는 게 구걸과 창녀짓 말고 뭐가 있는데? 답이 있으면 나한테도 좀 알려줄래? 나도 생각 좀 고쳐먹게 말이야."


 이 새끼를 진짜 죽여버리고 싶다. 그런데 다 맞는 말이다. 나도 그걸 아니까 아다비아 때문에 괴로운 거구. 어떻게든 아다비아가 그렇게 비참해지는 것만큼은 막고 싶다. 아다비아가 다리를 벌릴 때 본 그 끔찍한 미래. 나도 알아. 아다비아의 두 다리 사이에서 봤다. 이불로 덮으며 상황을 일단 모면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순간 내 눈에 안 띄게 가렸을 뿐이다. 어짜피 정해진 미래니까.


 아다비아가 비참해지지 않는 방법? 있기는 있을 거다. 정말로 돈이 많은 남자와 결혼하는 것. 하지만 누가 아다비아와 결혼하려고 하겠어? 얼굴은 흉측하지, 눈이 멀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지, 그렇다고 아다비아가 돈이 많은 것도 아냐...축사 속 돼지처럼 사는 방법이 그나마 나은 방법이겠지만 누가 아다비아를 그렇게 돌봐줘. 축사 속 돼지야 살찌워서 잡아먹기라도 하지, 아다비아를 그렇게 돌봐줘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어.


 "왜 아무 말도 못해? 내 말이 틀렸냐?"


 이 잔인한 새끼. 맞는 말이라 어떻게 반박을 못 하겠다.


 "그거 봐. 그때 죽여버렸어야 했다니까?"

 "네가 아다비아를 위해서 걔를 죽이려 했다고? 미친 소리 하지 마라."

 "하긴 그렇지?"


 감비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내리깔아봤다. 이 자식이 원래 태도와 말투로 말하니까 배로 열받네. 차라리 여자 흉내내면서 말했으면 미친놈 헛소리하고 있다고 넘겨버릴텐데 멀쩡한 태도로 씨부리고 있으니 그렇게 흘려넘기지도 못하겠다. 게다가 저 뻔뻔한 태도. 마치 자기가 다 맞다는 듯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어떻게 반박을 해서 말로 저놈 명치에 한 방 꽂아버리고 싶은데 반박을 못 하겠다. 반박을 못 하니 저놈은 의기양양하게 저 뻔뻔한 태도를 계속 견지하고 있는 거고.


 "아다비아가 지금 이 시각에 숨쉬고 있다는 것 자체가 역겨워. 토쏠린다구. 어떻게 사람을 잡아먹으려 할 수 있냐? 그딴 새끼는 당연히 죽어야지. 그건 인간이 아니잖아? 인간의 탈을 뒤집어쓴 더러운 짐승이라구. 뭐,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거야 인간 사회의 진리이니 놀라울 건 없지만..."

 "무슨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게 인간 사회의 진리야?"


 순간 머리 속에 새하얀 섬광이 번쩍했다. 아다비아도 예전에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뜨거웠던 작년 여름 어느 날. 서점에 찾아와서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고 했었지.


 "인육을 뜯어먹지 않을 뿐이지, 일을 하게 만들어 노동력을 빨아먹고 있잖아. 내 말 틀렸어? 너는 서점 주인에게 매일 잡아먹히고 있는 거구."

 "내가 왜 서점 주인한테 잡아먹혀?"

 "그러면 서점 주인은 병신이냐? 당연히 너한테 이득을 취하고 있으니 너를 고용하고 있지."

 "되도 않는 소리 막 뱉지 마라."

 "뭐, 믿고 싶지 않겠지. 그렇지만 사실은 사실이잖아. 애써 부정하려 해도 소용 없다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막 갖다붙이지 마!"

 "너 거기에 있는 시간만큼 다 돈으로 받냐? 아니잖아."


 감비르가 어디 반박하려면 반박해보라는 듯 아주 밝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렇게 인간이 인간이 잡아먹는 세계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 교묘하게 노동력만 빨아먹든, 아다비아처럼 직접 뜯어먹든 말이야."

 "결국 아다비아를 위해 그런 건 아니란 거잖아!"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 나는 이 세상의 정화를 위해 쓰레기 하나 죽이고, 아다비아는 아다비아대로 지옥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고...좋잖아? 이런 걸 왜 안 해? 왜? 나도 좋고 아다비아도 좋은데?"

 "너만 좋은 거겠지."

 "너, 아다비아한테 살고 싶다는 말 들었어? 아닐 꺼 같은데...오히려 죽여달라고 하지 않아?"


 웬만해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장면들을 계속 떠오르게 만든다. 꿈에서 봤어도 눈 뜬 후 지독한 악몽이었다고 욕하고 하루 종일 기분 꿀꿀할 법한 장면들. 현실이라 틈만 나면 떠오르는 그 장면들이 감비르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실려와 또 다시 생생하게 펼쳐진다.


 "그거봐. 너야말로 지금 아다비아를 괴롭히고 있는 거라니까? 너 아다비아 책임질 수 있어? 그 눈 먼 식인종년 평생 책임질 수 있냐구. 죽지 못하게 해놓고 어찌 살아야할지 답도 안 주면 그거야말로 잔인한 거 아냐? 걔는 살아있는 동안 영원히 찢어지게 괴로울 건데? 영혼이 남아 있으려나 모르겠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지금이라도 아다비아 죽이게 좀 도와달라는 거냐?"

 "늦었어. 루즈카가 퍽이나 가만히 있겠다."

 "왜? 루즈카한테도 덤벼보지 그러냐?"

 "아직 루즈카한테 덤빌 정도는 아니라서. 그년도 언젠간 내 손에 죽을 거야. 아니면 내 스승 손에 죽든가. 배신자잖아? 저주술 탄압하는데 멀뚱멀뚱 바라보기나 하고. 그건 암묵적인 탄압 지지야."

 "그래서 지금 찾아온 게 '나는 잘못한 거 없다' 그 소리 하려고 온 거냐?"

 "혼이 실린 그 말을 듣는다면 좋겠지만...네가 그런 말을 할 리 없잖아. 얼마 전에는 게첸씨에게 아주 폭력적이고 무례하게 굴었다면서? 아주 무식한 거 팍팍 티내면서 말이야."


 감비르가 내 눈을 노려보며 말했다. 게첸 그 새끼, 감비르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고자질했나? 하여간 그 새끼는 마음에 드는 구석이 단 하나도 없다.


 "게첸 그 새끼가 너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그렇게 말해?"

 "아니. 라키사한테 들었어."

 "라키사?"


 두 눈을 꼭 감고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게첸에게 한 행동이 부끄러워서가 아니다. 라키사가 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걔는 뭘 꿈꾸고 뭘 원하는 거야? 상관없다. 진심으로, 온 마음 온 뜻 온 영혼을 다 해 게첸을 싫어하니까. 그리고 감비르의 되도 않는 헛짓거리도 그만큼 싫고. 억지로 나를 네놈들 생각에 동화시키려 하지 말고 제발 너네들끼리 놀아.


 "너나 게첸씨나 똑같이 힘을 착취당하는 처지인데 왜 그렇게 게첸씨를 미워하냐? 같이 손잡고 잘못된 세상에 저항해도 부족할 판에."

 "뭐가 같은 처지야? 그새끼 돈지랄하는 거 내가 모를 거 같냐? 내가 받는 돈의 몇 배를 받는 새끼가 왜 나한테 와서 징징거려? 그 병신한테 제발 나한테 와서 우는 소리 좀 그만하라고 해라. 그 돼지 새끼 멱따는 엄살 소리에 진심 죽겠거든?"

 "너는 정말 무식하구나. 시야도 좁고."

 "뭐라 생각하든 좋으니까 나를 엮으려 하지 말라고!"


 감비르가 혀를 끌끌 차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진짜 시간 아깝다.


 "이제 나한테 할 말 다 했냐? 나 이제 일해야 해."

 "아, 너 지금 근무시간이었냐? 아니지, 착취당하는 시간이었냐?"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짜, 제발 우리 다시는 보지 말자. 게첸 그 새끼한테도 전해. 제발 서점 오지 말고 좀 꺼지라구."

 "나 있잖아, 너한테 알려줄 것이 있어. 진짜 중요한 건데 안 들을 거야? 아다비아 관련된 건데..."


 감비르가 다시 여자흉내를 내며 말했다. 아다비아 관련된 것? 이번에는 얼마나 헛소리를 하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다비아 관련된 것이라고 하니 신경쓰인다. 감비르를 쳐다보았다. 감비르는 팔짱을 끼고 나를 바라보더니 눈동자를 내가 앉았던 의자로 움직였다. 다시 자리에 앉았다.


 "뭔데? 이번엔 무슨 개소리를 하려고 그러냐?"

 "나 말이야, 아다비아가 다시 눈 뜨는 법 안다? 너 궁금하지 않니?"

 "걔가 뭔 수로 눈을 다시 떠?"

 "진짜야! 나, 아다비아가 다시 눈 뜨는 법 알아."


 감비르가 입을 가리고 호호호 웃었다. 그래, 무슨 헛소리인지 들어나보자.


 "이번엔 무슨 헛소리 지껄일 거냐? 모두가 불가능하다는데 무슨 방법이 있다는 거야?"

 "바로 그게 문제야. 사람들은 제 멋대로 안 된다고 한다니까? 엄연히 방법이 실존하는데 말이야."

 "그러니까 어떤 방법?"


 감비르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올 리는 없겠지. 그래도 어떤 소리를 하는지 들어나 보자.


 "있잖아, 저주술이 진정한 자유와 평등, 진리라는 건 알고 있니?"

 "그러니까 저주술 수련하면 눈 뜬다는 거냐? 개소리 집어치워!"

 "어머? 이건 진짜인데 안 믿을 거니?"

 "뭐가 진짜라는 거야?"


 감비르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보나마나 저주술로 아다비아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다는 소리겠지. 나라고 그 생각 안 해봤을 거 같아? 이미 저주술로 해결할 수 있냐고 루즈카와 켈라자야에게 물어봤다. 당연히 불가능하다고 했다. 아주 저주술 만능론자 납셨네.


 "일곱 가지 꿈을 꾸면 하얀 언덕에 갈 수 있어. 그 하얀 언덕 꼭대기에는 새까만 꽃이 있거든? 그 새까만 꽃을 따서 아다비아에게 준다면 아다비아는 다시 눈을 뜰 수 있어."

 "그러니까 저주술 수련해서 일곱 가지 꿈의 비밀을 풀어내라고?"

 "응!"

 "지금 장난하냐? 그걸 말이라고 해?"

 "그러면 그거 말고 답이 있니? 그것조차 안 하면 아예 방법이 없는 거 너도 잘 알지 않니? 아무 것도 안 하고 아다비아가 나날이 더 비참해져가는 모습 구경만 할래? 너 설마 취향이 그런 쪽이야?"


 감비르가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음흉한 놈 바라보듯 두 눈을 찡그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제대로 된 답이 나오기를 바란 내가 병신 머저리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네가 잘 생각하기를 바래. 비참해져가는 아다비아 구경하는 것이 취향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말이야."


 더 대꾸할 가치도 없다. 자리에서 일어나 서점으로 돌아왔다. 저 지긋지긋한 저주술 소리. 아주 우주 삼라만상을 다 저주술로 바꿀 수 있다고 하지 그러냐?


 "감비르랑 무슨 이야기 했어?"


 라키사가 물어봤다.


 "헛소리 듣고 왔어."

 "어떤 이야기였는데?"

 "걔가 할 말이 뻔하지 않아?"


 지금 내게 말을 건 사람은 감비르가 아니라 라키사다. 말이 험하게 나오려 했지만 꾹 참았다. 화난 건 감비르 때문이지, 라키사 때문이 아니잖아. 라키사가 감비르에게 게첸 일을 말하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 라키사에게 감비르 때문에 화난 것을 풀고 싶지 않다. 라키사 의도가 어쨌든 감비르가 그 이야기를 나한테 했기 때문에 감비르한테 제발 게첸한테 서점 와서 징징거리지 말라고 말했으니까.


 "감비르도 감비르 나름의 생각이 있을 거야."

 "응. 그걸 누가 알려줘서 하고 있는 거겠어."


 라키사는 내게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더 말하지 않았다. 무엇을 말하고 싶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다. 감비르 옹호하고 들 거니까. 라키사와 말싸움하고 싶지 않다. 라키사는 자신의 행동이 모두가 잘 지내는 길이라고 생각해서 그랬겠지. 하지만 아니야. 오히려 네가 그럴 수록 감비르와 게첸이 더 싫어져. 그놈들이 나와 엮이지 않으면 된다니까? 게첸이 징징거리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다. 그 새끼가 나한테 와서 징징거리니까 문제인 거고 싫은 거지. 감비르는 친구이니 신경이 쓰이기는 하지만 그놈한테 내가 뭔가 딱히 하고 있는 것도 없잖아? 왜 자꾸 나를 그놈들이랑 연결하고 친하게 지내게 만드려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맨날 그놈들 찾아가서 시비걸고 싸우고 모욕주고 돌아오는 거 아니잖아. 오히려 반대로 그놈들이 나를 찾아와서 내 정신이고 뭐고 다 들쑤셔놓지.



 어느덧 어두워졌고 서점 문을 닫을 시간이 되었다. 서점 문을 닫으려는데 바하르와 케르무크가 찾아왔다.


 "일 끝났어?"

 "응. 이제 문 닫으려구."

 "이제 뭐할거야?"

 "딱히 없는데?"

 "그러면 우리 술이나 한 잔 하자."


 이고에게 나갔다 오겠다고 이야기했다. 이고는 그러라고 했다. 내일부터는 아침 일찍 라키사가 출근할테니 내가 일찍 일어날 필요가 없다. 아니구나, 켈라자야 때문에 잠깐 일어나 있기는 해야되는구나. 이고가 루즈카 집 갈 때와 라키사가 서점 올 때까지 약간의 시간이 있고 그때 켈라자야가 오니까 그때 일어나 있기는 해야 한다. 안 그러면 켈라자야가 서점 안으로 못 들어온다. 잠깐 깨어 있다가 정 졸리면 라키사가 서점 왔을 때 방으로 다시 들어가서 자야지. 어차피 곤드레 만드레 되도록 마시지도 않을 거다. 그렇게 안전한 밤길은 아니잖아.


 "이 시각에 문 열은 술집 있어?"

 "술집이야 어디든 있지."

 "목숨 내놓고 마시는 사람들 많나 보네."

 "그래도 요즘은 많이 조용하잖아. 사람들 별로 죽지도 않는걸."

 "어디에 있는 술집 갈 건데?"

 "내성 남문 근처."


 밤길을 걷는다. 설마 남자 셋인데 별 일 있겠어? 으슥한 길로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가로등 켜져 있고 곳곳에 경찰이 지키고 있는 큰 길로 걸어가고 있는데. 간간이 시꺼먼 골목길이 보이기는 하지만 별로 안 무섭다. 뭐가 저 어둠 속에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쪽은 일단 셋이잖아. 바하르는 저주술을 사용할 줄 알구. 켈라자야보다는 믿음이 영 안 가기는 하지만 바하르도 어쨌든 저주술사다. 게다가 켈라자야보다 저주술 실력이 후달린다 해도 일단 경찰이나 마찬가지이기도 하구. 케르무크도 중앙학문연구소 학생이었다고 하니 저주술을 쓸 수도 있겠지. 아주 든든하다.


 "야, 쿠룬나스 나오면 나는 막 소리치면서 전력으로 경찰 향해 뛰어야 하냐?"


 둘은 나를 쳐다보았다.


 "우리 버리고 너 혼자 튀게?"

 "그러면 내가 쿠룬나스 앞에서 뭐 해?"

 "의리없는 놈. 돌멩이라도 던져!"

 "돌멩이로 쫓아낼 수 있으면 그게 사람 잡아먹겠냐?"

 "그러면 돌멩이로 머리 후려치든가. 이거 우리 둘이 저주술사라고 벌써부터 튈 준비하는 거 봐라."


 시시껄렁한 잡담. 그래, 이게 정상이다. 내 주변 상황과 인간들이 아주 비정상인 거야. 뭔 저주술이니 자유니 평등이니 진리니 헛소리들이야. 그런 거 떠들 시간에 차라리 이따 뭐 먹을지 진지하게 생각해보라구.


 술집이 가까워져간다. 어디에 있는 술집에 가는지는 모르지만 술집이 가까워져간다는 것을 여럿이 열심히 알려주고 있다. 가로등 아래에서 한 사람이 벽을 짚고 토하고 있다. 속 뒤집힐 때까지 마셨구만. 뱃속에 있는 것을 다 토했는지 침을 퉤 뱉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등을 펴고 똑바로 서나 했더니 바로 자리에 쭈그려 앉아 자기가 토한 것을 유심히 쳐다본다. 조금 더 걸어가자 이번에는 어둠 속에서 이쪽을 향해 휘청휘청 걸어오는 사람이 보인다.


 "그래도 길바닥에 뻗지 않고 집에 가서 잘 건가 보네."

 "그래도 집에 가서 자는 게 어디야? 이 날씨에 길바닥에서 자면 죽을 건데."

 "그리고 다음날 저주술에 당해 죽었다고 난리치고?"

 "야, 진짜 그런 놈들 때문에 짜증 엄청 나! 미친놈들, 거리에 사람 죽어있기만 하면 무조건 저주술 때문이라고 더든다니까? 딱 봐도 밤새 술처먹고 길바닥에서 자다 얼어죽은 건데도 말야. 무슨 사람 못 죽여 환장한 저주술사 투성이인 줄 알아."


 바하르가 짜증냈다. 짜증낼 만도 하다. 내가 여기 오기 전에도 사람들은 똑같이 죽었을 수 있다. 겨울에 술 취해서 길바닥에 쓰러져 자다 얼어죽는 게 뭐 특별할 게 있어. 그런 일은 내 고향에서도 간간이 있는 일이었다. 겨울에는 길바닥에 쓰러져서 잠자다 죽고, 여름에는 동네 하천에 코박고 빠져 죽고 말이다. 술 취해서 길거리에서 죽는 일이야 놀랄 일도 아니다. 동네가 잠깐씩 장례식으로 시끄러워질 뿐이지. 그런데 지금은 그런 흔하디 흔한 일이 벌어져도 저주술사 소행 아니냐고 떠들어대고 시끄러워지니 동원령 때문에 경찰 업무 보고 있는 바하르에게는 참 짜증날 거다. 어쨌든 사람들이 저주술사가 죽인 거 아니냐고 해대디 그런 일이 하나 생길 때마다 동원령이 끝날 날은 또 멀어질 거다.


 술집이 가까워질수록 시끄러운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린다. 뭐가 좋은지 서로 껴안고 깔깔 웃는 놈들, 멱살 잡고 서로 소리치는 놈들, 가로등 부여잡고 엉엉 우는 놈들...진짜 별 놈들이 다 있다. 남자도 보이고 여자도 보인다. 한결같이 다 정신나갔다.


 "이거야 말로 진짜 저주술의 지상낙원 아냐?"


 케르무크가 낄낄거리며 말했다.


 "아주 솔직하잖아! 자유롭고. 게다가 평등하기까지 해! 이 새끼들 다 똑같은 주정뱅이들이라니까?"

 "개같은 소리 하지 마라. 어디 재수 옴 붙게..."

 "그러니까 내가 빨리 중앙학문연구소 때려치라고 했잖아."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냐?"


 바하르가 툴툴대었다. 케르무크는 주변을 둘러보며 뭐가 좋은지 계속 킥킥 웃었다.


 "날이 추운 게 아쉽네. 물고 빠는 놈들이 안 보여."

 "그런 거 구경하러 왔냐? 술 마시러 왔지."

 "왜? 이왕 왔는데 그런 거 구경하면 더 재미있잖아. 혹시 알아? 우리도 껴줄지."

 "미친 새끼. 하여간 너 병신인 건 인정해줘야 해."

 "그래서 동원령 안 끌려갔잖아."

 "아, 진짜! 망할 동원령..."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술 한 병과 삶은 야채를 주문했다. 주문하고 얼마 채 되지 않아 바로 술과 안주가 나왔다. 말이 좋아 삶은 야채지, 물에 불린 풀떼기다. 진짜 겨울 지긋지긋하다. 먹을 수 있는 게 죄다 이따위 것들이야. 맨정신에 이따위 것을 돈 내고 먹어야한다니 한숨만 나온다. 어쩔 수 있나. 남부와 북부에서 올라온 패거리들이 성 밖에서 계속 물자를 뜯어간다는데. 서로 술잔에 술을 따라준 후, 잔을 부딪히고 술을 입에 털어넣었다. 쓰다. 하도 써서 물에 불린 풀떼기를 안 집어먹을 수가 없다.


 "너 진짜 원래 중앙학문연구소 학생이었어?"

 "나? 응."

 "거기 왜 때려쳤어?"


 케르무크가 중앙학문연구소 학생이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여기까지 걸어오며 걔가 한 말들을 들어보면 그런 곳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당연히 안 어울려서 뛰쳐나왔겠지만, 그 이전에 거기를 들어갈 지능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답답하고 재미없어서. 맨날 되도 않는 헛소리하는 놈들 투성이라 짜증나더라구."

 "무슨 이야기?"

 "너도 알지 않아? 요즘 이 도시에 돌아다니는 말들 말야."

 "그걸 진짜 거기에서 다 이야기해?"

 "더 심한 병신도 있어. 게다가 그걸 물고 빨고 환장하는 놈들도 있구."


 그때 바하르가 케르무크에게 한 마디 쏘아붙였다.


 "너는 그 말을 전부 행동으로 하고 있잖아."

 "그렇지! 언행일치 몰라? 병신들, 주둥이만 졸라 나불대요. 나처럼 말과 행동이 딱!"

 "넌 분명 감방 갈 거다. 아니면 제 명에 못 살거나."

 "혹시 아냐? 감방에 진정한 진리가 갇혀 있을지 말이야."


 이놈도 정상은 아니구나. 바하르 얘는 친구란 애들이 다 왜 이러냐? 감비르와 케르무크 둘 다 확실히 정상이 아니다.


 "너 거기 어떻게 들어갔어?"

 "나? 시험쳐서."

 "시험 어떻게 통과했어?"

 "설마 시험에 내가 이런 소리 썼겠냐? 면접에서도 똑바로 했지."

 "지금은 왜 그래?"

 "좋잖아! 너네 앞에서 딱히 가식적으로 굴어야할 필요도 없구."


 케르무크가 입에 술을 또 털어넣었다. 술을 삼키고는 아주 크게 '캬' 소리를 내었다.


 "야, 너 타슈갈이랑 제대로 이야기하는 거 처음 아냐? 너무 막 나간다."

 "아, 그렇지! 너 친구라길래 그랬지. 이제부터 가면 딱 쓸까? 말도 막 깍듯이 높여가면서 말이야."

 "그러지 마. 그러면 진짜 너 미친놈처럼 보일 거 같아."

 "역시 네가 뭐 좀 아네! 한 잔 하자!"


 술을 또 한 잔 마셨다. 정말 맛없다. 또 삶은 야채를 한 조각 입에 넣고 씹었다. 이놈의 풀떼기는 맛도 하나도 없어. 게다가 질기기까지 하다. 씹어도 부드러워지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이건 안주를 먹는 게 아니라 풀떼기로 입 안을 닦아내는 거다.


 "그나저나 감비르 완전 미치지 않았냐?"

 "너도 감비르 알아?"

 "당연히 알지! 바하르의 영혼의 친구 아냐. 걔는 진짜야."

 "뭐가?"

 "진짜 미쳤다고. 그건 노력으로 따라잡을 수 없는 거야. 중앙학문연구소에서 온갖 병신들 다 봤지만 그런 진짜는 없었어."


 케르무크가 엄지손가락을 척 세웠다.


 "바하르, 너네 학교 정체가 대체 뭐냐?"

 "얘가 이상한 거야. 우리 학교 애들 안 그래."


 바하르 말에 케르무크가 소리쳤다.


 "뭐가 안 그래? 죄다 책만 보고 헛소리 떠드는 병신들이잖아! 이 새끼들은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다니까?"

 "아니라니까!"

 "예를 들면 어떤 거?"


 케르무크가 주변을 한 번 둘러보더니 내쪽으로 몸을 굽히며 목소리를 조금 낮추어 말했다.


 "예라였나? 하여간 어떤 여학생이 나한테 모든 걸 공유하면 진정한 저주술을 깨달을 거라는 거야. 뭐 때문에 그런 말이 나왔더라? 하여간 나한테 갖고 있는 거 다 포기하래. 모든 건 욕심이 문제라고. 진짜 막 침 튀기면서 연설을 해. 과장이 아니라 무슨 침이 소나기가 쏟아지듯 막 튀어 나와!"

 "그래서?"

 "혼을 담아 소리쳤지! '야, 너, 나랑 지금 여기서 자자! 몸에 대한 욕심 버리면 바로 진리 깨우치는 거 아냐? 그래, 다 버려! 자유 좋네!' 그러니까 걔가 눈에 쌍심지 켜고 있는 힘껏 따귀 날리더니 펑펑 울더라구."

 "그거 예라 아냐. 다른 애야. 그리고 그 다음도 이야기해야지. 걔 남자 친구한테 너 뒤지게 처맞았잖아!"


 우리 모두 깔깔 웃었다. 이건 뭐 병신인가. 맞을만 하네. 얘도 감비르 못지 않게 미친 거 같은데...


 "진짜 치사하게 패거리를 끌고 와서 각목으로 패냐? 그때 진짜 너 아니었으면 죽을 뻔 했어. 그년도 이상한 년이야. 내가 틀린 말 했냐? 모든 욕심을 포기하라고 해서 너부터 포기해보라고 한 건데."

 "이 병신아, 그런다고 그걸 진짜 말하냐?"

 "그러면 어떡해? 아무말 대잔치하는 거 웃겨 죽겠는데."


 케르무크가 또 술을 입에 털어넣었다. 얘는 이 쓴 술을 안주 없이 참 잘 마신다.


 "아, 진짜 정신 차려야지. 타슈갈이 나 진짜 미친놈인줄 알겠다."

 "미친 건 사실이잖아."

 "야, 그래도 이런 것만 말하면 진짜 미친놈 같잖아. 너도 뒤로는 엄청 좋아했으면서."

 "그야 그렇지. 솔직히 너 때문에 무지 재미있기는 했어. 병신들이 병신 표정 짓는 거 구경하는 거 완전 재미있었는데."


 케르무크와 같이 학교 다녔다면 왠지 엄청 웃겼을 거 같다. 저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도 신기하지만, 저걸 어떻게 입 밖으로 꺼내냐? 진짜 대단한 놈이다.


 "너 원래 처음부터 그랬어?"

 "나? 아니야!"

 "한 달 간은 조용했지. 딱 한 달."

 "맞아, 딱 한 달."

 "한 달 사이 뭐 있었어? 아니면 원래 모습이 드러난 거야?"

 "아...그게...처음 한 달 동안 별 것도 아닌 놈들이 자꾸 나한테 가르치려고 들잖아. 어디서 이상한 거 주워보고 와서 막 일장연설을 해. 처음 몇 번 그냥 들어주니까 나를 아주 병신 돌대가리 취급하더라? 온 잡것들이 다 와서 강의를 하려 들어. 심지어는 막 직원들도 와서 저주술에 대해 떠들더라니까? 그래서 그러기 시작했지. 열받더라구."

 "바하르, 케르무크 말 사실이야?"

 "어. 저거 사실이야. 그때 이상하게 쟤한테 뭐 아는 척 하는 게 유행 같은 분위기였어."

 "너도 그랬어?"

 "나? 나는 안 그랬지."

 "당연하지! 그럴 시간에 너는 어디 예쁜 여자 없나 두리번거리고 있었잖아."

 "그러면 너를 쳐다볼까?"

 "그랬으면 의자로 너 대가리 찍어버렸겠지."


 깔깔 웃으며 사이좋게 술을 한 잔씩 마셨다. 술을 다시 한 병 주문했다.


 "그나저나 너 여자친구 눈 멀었다면서?"

 "여자친구?"

 "응. 바하르 말로는 너 여자친구라던데?"

 "아다비아? 걔 내 여자친구 아냐. 나 여자친구 없어."


 바하르가 내 등을 손바닥으로 툭 치며 물어보았다.


 "너 아다비아랑 진짜 안 사귀어? 걔가 맨날 서점 찾아가서 너 공부도 알려주고 했잖아. 이야기만 들어보면 완전 서로 좋아 죽을 사이 같았는데."

 "아니야, 그런 거."

 "아다비아가 너 진짜 좋아했다니까? 지금이야 뭐 다행인 건가?"


 술을 한 잔 마셨다. 아다비아를 떠올리면 내 자신이 참 밉다. 왜냐하면 진짜로 아다비아와 사귀는 관계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니까. 어떻게든 아다비아를 도와주려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다비아로부터 도망칠 궁리만 계속 하고 있잖아.


 "원래 어떤 애였는데?"

 "걔가 꽤 예뻤어. 예쁜 것에 비해 유독 인기도 없고 친구도 없었지만..."

 "왜?"

 "글쎄...타슈갈, 진짜 아다비아는 왜 인기도 없고 친구도 없었어?"

 "걔가 말을 참 밉게 잘 했지."


 둘이 이해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아무 관계 아니야?"

 "친구. 내가 도움 받았으니 나도 도와주기는 해야 하는데..."

 "돈 벌어! 돈 말고는 답이 없잖아."


 그걸 말이라고 하나. 내가 풍족하게 먹고 살 수 있고, 거기에 돈이 남으면 당연히 아다비아 돕는 데 사용하지. 나도 돈이 없으니 문제인 거구. 그런 답은 누가 제시 못 해. 어떻게 현실화할지가 문제인 거다.


 "감비르 그놈은 오늘 서점 와서 헛소리하더라."


 화제를 부드럽게 감비르로 돌려야겠다. 아다비아 이야기 계속 해봐야 뭐하냐. 어차피 답이 없는 건데.


 "이번엔 뭐래?"

 "일곱 가지 꿈을 꾸면 하얀 언덕에 갈 수 있고, 그 하얀 언덕 위에 피어 있는 새까만 꽃을 갖다 주면 눈 뜰 거래."

 "그거? 그거 그냥 전설이잖아."


 바하르가 담배를 입에 물고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나도 담배를 입에 물고 바하르의 담배를 받아서 불을 붙였다. 그때 케르무크가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향해 의자를 틀었다.


 "너 한 번 해볼래?"

 "뭐? 그 일곱 가지 꿈?"

 "어. 한 번 해보자."

 "저주술 수련하라고? 싫어! 그걸 내가 왜 해?"

 "아냐, 아냐!"


 케르무크가 손사래를 쳤다.


 "너는 너 꿈 이야기만 나한테 계속 해주는 거야. 그리고 나랑 여기 좀 돌아다녀보구. 혹시 알아? 진짜로 그 새까만 꽃이 실재할 수도 있잖아. 이 도시 어딘가에 피어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것이 진짜 저주술 끝에 존재할 수도 있구. 나는 저주술사니까 그렇게 해보는 거야. 내가 만약 진짜 찾게 되면 그 꽃을 아다비아한테 주면 되는 거 아냐? 너 아다비아 싫어해?"

 "아니."

 "어차피 눈 뜨게 하려면 이 방법 밖에 없잖아. 안 되면 마는 거고, 되면 그거 빌미로 걔랑 사귀면 되는 거구."

 "뭘 걔랑 사귀어?"

 "야, 걔가 너 엄청 좋아했대메? 게다가 예쁘기까지 하면 최고 아냐? 눈만 뜨면 그걸로 바로 확 낚아채! 진짜 눈 다시 뜨게 해주면 평생의 은인 아냐?"


 감비르에 이어 케르무크까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술 마시더니 정신이 나갔나?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그 말도 안 되는 방법 외에는 방법이 아예 없으니까. 이녀석이 내일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나 할 지 모르겠지만, 아다비아가 다시 눈을 뜰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그 말도 안 되는 전설 밖에 없다. 아니면 앞이 안 보여도 되는 어떤 일을 찾아내든가. 지금 아다비아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는 거나 전설을 믿어보는 거나 그게 그거다. 둘 다 답이 없다.


 "진짜 될 거 같아?"

 "어쨌든 방법 없잖아. 나 혼자 꿈을 꾸는 건 한계가 있구."

 "한 번 해볼까?"

 "생각 잘 해봐. 성공하면 너 바로 아다비아랑 사귈 수 있다니까?"

 "아다비아랑 너네가 상상하는 그런 관계 아니라구!"

 "너 아다비아가 원래대로 돌아와서 너한테 사귀자고 하면 안 사귈 거야?"

 "고민 엄청 될 거 같은데..."

 "뭘 고민해? 그 정도면 절하고 모셔가야 정상이야. 걔 매일 서점 찾아가서 너 공부 도와줬다면서? 진짜 그 정성이면 평생 받들여 모셔야해."

 "그래서 뭐 방법 있어?"

 "말했잖아. 너는 꿈 이야기 해주고, 나랑 여기저기 돌아다녀보면 된다니까?"

 "괜찮네. 너 내일 술 깨고 무슨 말 했는지 다 까먹는 거 아냐?"

 "아냐! 나 지금 술 하나도 안 취했어! 뭐 얼마나 마셨다구."


 케르무크가 웃으며 말했다. 얘 말 믿어도 될 건가? 바하르가 딱히 뭐라고 안 하는 것으로 보아 별 거 없을 거 같기는 한데...그래도 아까 얘 중앙학문연구소 다닐 때 이야기를 떠올려보면 평범하지는 않은 녀석이다. 일단 믿어보자. 케르무크 말 듣는다고 잃을 것도 없다.



 술을 조금 더 마시고 서점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어둠 속에 쿠룬나스나 사람들 마구 죽이는 저주술사는 없었다. 조금씩 좋아지고 있나보다. 어쩌면 진짜보다 훨씬 더 과장되어 있을 수도 있어. 저주술과 전혀 상관 없이 죽은 사람들까지 죄다 저주술로 죽었다고 믿어버리는 바람에 이 도시가 훨씬 더 위험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지 않을까? 쓸 데 없이 더 긴장하고 겁먹고 있고. 작년 정말로 시끄러웠을 때와 달리 요즘은 그런 사건이 터졌다는 말이 거의 없다. 모두가 무감각해진 건지, 모두가 필요 이상으로 지나치게 겁먹어서 더 부풀리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케르무크와 술을 마신지 며칠 지났다. 꿈을 꾸었는지 안 꾸었는지 모르겠다. 일어났을 때 기억나는 꿈이 없다. 꿈을 꾼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아무리 떠올려보려 노력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정작 꿈을 기억하려고 하니 하나도 안 꾸네.'


 다시 자리에 드러누웠다. 이고 자리에는 켈라자야가 내 쪽을 향해 누워 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다. 오늘은 기분 좋은 꿈이라도 꾸나? 쟤는 어떤 꿈을 꿀까? 평범한 꿈은 안 꿀 거 같다. 꿈에서 이것저것 다 신나게 때려부수고 파괴하고 있는 거 아냐? 켈라자야는 참 자유롭게 사는 거 같다. 꿈 속에서는 더 자유롭게 행동하고 있으려나? 아니면 내가 단 한 번도 꾸어보지 못한 지독한 악몽이 얘에게는 일상일까? 어쨌든 지금 표정 보니 오늘은 좋은 꿈 꾸고 있는 것 같다. 켈라자야한테 어떤 꿈을 꾸었는지 말해달라고 해볼까? 켈라자야가 이야기해줄 거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몇 개 이야기해준다 해도 별 도움이 안 되는 것만 골라서 이야기해주겠지. 자기 과거와 조금이라도 관련있는 건 아예 입에 올리려하지 않을 거다. 특히 그 '죽음보다 무서운 것'에 관한 것이라면...


 밖에서는 라키사가 일하고 있다. 라키사가 게첸과 서점에 오든 감비르와 서점에 오든 알 바 아니다. 나랑 아무 상관없다. 왜냐하면 이제 라키사가 오전 근무니까. 이렇게 방에 들어와 드러누워 있어도 된다. 지금 이렇게 드러누워 있는 이유도 라키사가 감비르와 서점에 같이 왔기 때문이다. 라키사는 내가 감비르와 사이좋게 이야기하기를 원하겠지만 그런 건 불가능하다. 보나마나 또 저주술이 어쩌구 헛소리할 거고, 나는 그 소리에 맞추어 부글부글 끓겠지. 차라리 이렇게 아예 내가 자리를 피해버리는 것이 나, 라키사, 감비르 모두에게 좋은 거다. 그래도 생각해보면 감비르가 게첸보다 나아. 요즘 라키사가 게첸 이름으로 책을 빌려가던데 별 일 없겠지? 그 꼴보기 싫은 새끼가 요즘 서점에 안 와서 참 좋다. 책 받아오는 것도 라키사가 알아서 잘 하겠지.



 "타슈갈, 일어나! 우리 밥 먹자."


 켈라자야가 흔들어서 깨웠다. 잠깐 눈 감고 있는다는 것이 깜빡 깊게 잠들었나보다. 시계를 보았다. 정오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밥이라고 해봐야 말린 과일과 곡물 가루에 물 부어서 먹는 거다. 혼자 먹어도 될 건데 같이 먹자고 깨웠네. 라키사랑 둘이 먹어도 될텐데. 세수를 하기 위해 물을 떠서 화장실로 갔다. 세수를 하고 물통을 방에 가져다 놓은 후 방으로 돌아와 창문을 열었다. 햇볕과 함께 부드러움이 가득 담긴 바람이 방 안으로 들어온다. 날이 확실히 꽤 풀렸다. 사발 세 개에 곡물 가루를 떠넣고 말린 과일 몇 조각 집어넣은 후 쟁반 위에 올려 방에서 나왔다. 다 먹어치우는 데에 얼마 걸리고 말고 할 것도 없다. 별 말 없이 먹어치운 후 설거지를 하고 사발을 방 안에 갖다놓았다.


 "이제 봄이 오려나?"


 의자에 앉아 창밖을 보았다. 이제 곧 봄이 올 거다. 거리의 눈은 이제 다 녹았다. 눈도 다 녹았으니 조금 더 나아지려나? 아니면 눈 아래 파뭍혀있던 재앙이 다시 떠오르는 건가? 시끄러운 일은 이제 없을 거야. 작년에 그렇게 시끄러웠으면 되었잖아?


 "안녕."


 굵게 두 갈래로 땋은 길고 검은 머리에 넙적하고 노란빛이 살짝 도는 흰색 원통형 모자를 쓴 여자가 들어왔다. 쟤 이름이 와히디야였지? 무릎까지 내려오는 두꺼운 검은색 외투 밖으로 발목까지 내려오는 어두운 청색 치마가 보였다. 와히디야는 서점에 들어오자마자 인상을 찌푸리며 내 앞으로 왔다.


 "이 도시 왜 이렇게 더러워?"

 "사람이 많으니까."


 얘는 들어오자마자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뭘 보고 왔길래 나를 보자마자 에드자가 더럽다고 푸념을 하는지 모르겠다.


 "역겨워. 혐오스러워."

 "그러면 이 도시에 안 있으면 되잖아."

 "아니, 아무래도 여기는 청소가 필요한 거 같아."

 "그러면 빗자루 들고 거리 쓸든가."

 "그래야겠지?"


 와히디야는 계산대 위에 놓인 책을 보더니 책을 들었다.


 "뭐하게?"

 "청소하려구."

 "청소하는데 책은 왜 집어들어? 책으로 쓸게?"

 "아니. 이런 역겨운 것, 찢어서 불태우게."

 "야, 뭔 소리야? 너 그거 얼마짜리인지 알아?"

 "비싼 쓰레기는 쓰레기 아니야?"

 "무슨 말이야? 이게 왜 쓰레기인데?"


 와히디야 손에서 책을 빼앗았다. 와히디야는 어이없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얘는 글자 모르나? 멀쩡한 책보고 쓰레기라고 한다. 서점에서 책이 왜 쓰레기야?


 "이것은 순수한 마딜땅을 더럽히는 오물덩어리! 당연히 없애야지."

 "이게 무슨 오물덩어리야? 이거 책인거 몰라?"

 "알아."

 "그런데 왜 이게 오물덩어리야?"

 "외국에서 들어온 거니까. 말도 안 되는 헛소리로 우리 마딜인의 정신을 더럽히고 있잖아!"

 "너 이 책이 무슨 책인지는 알고 하는 말이야?"

 "알 필요 없어. 딱 봐도 더럽다는 건 알 수 있으니까. 일단 마딜어가 아니잖아?"


 어이없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박수를 쳐주고 싶다. 나도 아드라스어를 못해서 엄청나게 시달렸었으니까. 네가 여기 있는 외국어로 된 책을 모두 마딜어로 번역해주던가, 아니면 진짜 이 땅에 있는 모든 외국어로 된 것을 싹 다 없애준다면 정말 고마울 거다. 물론 당연히 그렇게는 못 할 거다.


 "더러우면 책 찢을 게 아니라 빗자루로 거리나 쓸어."

 "너 바보니? 내 말 모르겠어?"

 "뭐? 뭐가 더럽다는 건데?"

 "이 도시에는 타락한 사람이 너무 많다구! 혐오스러워!"

 "그러니까 어떤 타락한 사람?"

 "주정뱅이라든가..."

 "아...그거야 좀 더럽지."


 주정뱅이가 더럽긴 하지. 술 취해 별 짓 다하는 놈이 깨끗할 리는 없잖아? 그게 정상도 아니구.


 "하지만 주정뱅이 없는 동네가 어디 있냐? 그거야 어디를 가든 다 있지."

 "아니. 있어."

 "어디?"

 "내가 살던 동네."


 거짓말하고 있네. 술 취한 사람 없는 동네가 세상에 어디 있어? 술을 안 마시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밤에 취해 돌아다니고 있을 거다.


 "그러면 거기로 돌아가."

 "돌아가고 싶어!"

 "그러면 돌아가면 되지, 왜 여기 있어?"

 "못 돌아가니까! 없어졌단 말이야!"

 "어딘데 없어져?"

 "푸투르 볼라작. 치르치나 근처에 있는 곳이야."


 푸투르 볼라작? 그런 곳도 있었나? 어느 산골짜기에 처박힌 동네야? 일단 도시는 아닐 거다. 그리고 얼마나 못 사는 동네였으면 술 취한 사람 하나도 없다는 거야? 아마 자기 상상 속에서 지어낸 곳이겠지. 술 취한 사람 없는 동네가 어디 있어. 그때였다. 켈라자야가 내 옆으로 바짝 붙어서 내 팔짱을 꼈다. 그리고 와히디야를 유심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와히디야도 나와 켈라자야를 주시했다.


 "너네 뭐야? 사귀어? 외국인과 잡종 연인이니?"

 "뭐?"

 "틀린 말은 아니잖아. 너는 아드라스인, 얘는 딱 봐도 혼혈. 맞죠? 우리 동네에서 혼혈을 봐서 혼혈 얼굴은 바로 알아볼 수 있어요."


 켈라자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계속 와히디야 얼굴만 바라볼 뿐이었다.


 "대체 얼마나 깡촌이면 주정뱅이 하나도 없었다는 거야?"

 "깡촌이 아니라 정말 고귀한 곳이야. 아주 순수한 마딜인의 정신이 살아숨쉬는 곳."

 "그러면 거기 돌아가면 되잖아. 동네가 뭐 없어져?"

 "파괴되었으니까. 타락한 것에 의해서."


 와히디야가 이를 꽉 다물었다. 무슨 홍수가 나든가 해서 마을이 싹 다 쓸려갔나? 홍수가 뭐 타락한 거야? 그건 그냥 자연 재해인데.


 "타락한 것에 파괴되었으면 순수했다는 증거는 있나요?"


 켈라자야가 와히디야에게 물어보았다. 와히디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왜냐하면 나는 정말 행복했으니까요. 모두가 행복해하고, 모두가 즐거워했어요. 그거면 충분하지 않나요?"

 "정말 모두가 행복해했어요?"

 "당연하죠! 얼마나 행복해했는데요? 웃음이 떠나지 않았어요!"

 "당신만 즐겁고 행복했던 게 아니라요?"

 "그럼요!"

 "와히디야가 행복했던 게 어째서 순수했다는 증거에요?"

 "그거야말로 진정한 진리니까요. 행복해지기 위해 진리를 찾는 거 아닌가요? 그 순수함 위에 있는 저주술. 그거야말로 마딜인의 정신이에요."

 "저주술 좀 쓸 줄 아나봐요?"

 "당연하죠! 모두가 내 저주술을 보고 감탄하곤 했어요!"


 켈라자야는 이상한 미소를 지었다. 진짜 재미있어서인지 비아냥거리기 위해서인지 구분되지 않는 묘한 미소다. 그 미소를 그대로 유지하며 다시 물어보았다. 


 "타락한 건 뭐에요? 고작 주정뱅이?"

 "주정뱅이, 거지, 불량배, 창녀, 외국인, 외국 문화, 온갖 저주술을 모욕하는 소리들!"


 와히디야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팔짱을 끼더니 두 손으로 자기 양팔을 꽉 움켜쥐고 이를 꽉 깨물었다. 조금 많이 짜증나네. 외국인이면 나도 포함되잖아? 이고가 이 자리에 있었으면 뭐라고 했을까? 나는 그래도 마딜 땅에서 태어나서 자랐지만 이고는 남아드라스 공화국에서 자라서 나중에 여기로 건너온 거잖아.


 "와히디야, 여기에 있는 책 대부분이 네가 말한 그 타락한 거야. 게다가 타슈갈은 네 기준으로 그 타락한 '외국인'이구. 여기 왜 왔어? 네가 싫어하는 것이 다 모여있잖아."


 라키사가 말에 와히디야는 여전히 아주 못마땅하다는 자세를 유지하며 대답했다.


 "감비르가 재미있는 곳에 재미있는 애가 있다고 가보랬어. 자꾸 가다 보면 적응되고 깨닫는 게 있을 거라구."


 감비르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애한테 여기 가라고 추천한 거야? 그 이전에 감비르와 와히디야가 어떻게 만났는지 궁금하다. 지금 와히디야 모습을 보면 감비르를 아주 안 좋게 볼 거 같은데...


 "네 기준으로 보면 감비르도 타락한 거 아냐?"

 "맞아."

 "그러면 왜 걔 말을 듣고 여기 왔어?"

 "왜 그렇게 미쳤나 궁금해서."

 "그래서 답을 찾았어?"

 "아니. 하지만 분명 재미있기는 하네."


 와히디야의 인상이 조금 펴졌다.


 "특히 켈라자야. 나 당신과 친구하고 싶어요. 혼혈이기는 하지만 재미있을 거 같아요."

 "싫어요."


 친구가 되고 싶다는 와히디야의 말에 이번에는 켈라자야가 인상을 있는대로 찌푸리며 단칼에 거절했다. 켈라자야가 와히디야한테는 왜 이러지? 얘 친구라면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는 애인데? 와히디야는 아쉽다는 듯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이상할 것도 없다. 켈라자야보고 잡종이라고 했는데 켈라자야가 퍽이나 좋다고 친구하자고 하겠다. 게다가 외국인도 타락한 것이라면서? 켈라자야가 진짜 혼혈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진짜 혼혈이라면 켈라자야도 와히디야 기준에서는 타락한 것이다. 반쯤 타락했다고 해야 하나?



 와히디야가 인사를 하고 나갔다. 켈라자야는 계속 나와 팔짱을 끼고 문 쪽만 바라보고 있다. 라키사를 바라보았다. 라키사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시선을 책으로 돌렸다. 하지만 알 수 있다. '그거 봐라. 지금 그 꼴 보고 둘이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는 말을 믿으라는 거야? 대체 어디까지 거짓말을 할 거야? 속시원하게 너희 사귄다고 말하면 내가 뭐라고 해?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계속 나를 상처받게 하는 거 몰라?'


 "켈라자야, 이제 내 팔 놔줄래? 방에 들어가서 책 좀 갖고 나오게."

 "아, 알았어."


 켈라자야가 내 팔을 놔주었다. 방으로 들어갔다. 미치겠네. 켈라자야는 대체 왜 저러는 거야? 사실 많이 좋기는 했다. 하지만 켈라자야는 정말 감당 안 된다. 일단 제정신이 아니잖아. 앞이 안 보이는 아다비아나 정신이 나간 켈라자야나 그게 그거잖아. 그리고 나 정말로 라키사 좋아한다고. 라키사랑 정말 많이 친해지고, 더 나아가 사귈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단 말이야. 그런데 주변에서는 아다비아에 신경쓰라고 하고 켈라자야는 자꾸 나한테 좋다고 한다. 그리고...진짜로 어떤 때는 내가 아다비아를 좋아하는 거 아닌가, 어떤 때는 내가 켈라자야를 좋아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요즘 들어 특히 자주 말이다. 그리고 그만큼 라키사가 저러는 것이 짜증나구.


 라키사와는 그냥 정말로 안 맞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서로 대화할 때마다 나와 라키사 사이에 엄청난 벽이 있고 말도 안 통한다는 생각이 들곤 하니까. 사람 속 긁는 데에 천부적 소질이 있는 아다비아나 그냥 제정신이 아닌 켈라자야와 말할 때도 그런 느낌을 받지는 않았다. 어쨌든 말이 통한다는 느낌이었지. 하지만 라키사는 아니다. 말이 안 통하는데 무슨 수로 더 가까워져? 진짜 모르겠다. 요즘은 내가 라키사를 좋아하는 것 맞나 싶은 생각까지 들곤 하니까. 어쨌든 켈라자야도 아다비아도 아니다. 진심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 어떻게 봐도 나는 라키사를 좋아한다. 그러나 방금 일로 나와 라키사 사이의 벽은 두 배 더 높아졌겠지.


 "책이 어디 있더라?"


 방구석 어디에 던져놓았을 건데 안 보인다. 책에 신경도 안 쓰고 있었지. 이고나 켈라자야가 치웠을 건데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다. 일단 내 자리에는 없다. 이고 자리를 뒤져보았다. 책 하나가 나왔다. 키란 전기. 이거 아직도 루즈카한테 안 돌려줬어? 작년 여름에 루즈카가 서점에 들고 왔던 책이잖아.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날 블랑쉬블르가 인식론을 들고 왔고, 루즈카가 키란 전기를 들고 왔다. 그래서 기억한다. 이고는 이 책 다 읽었을 건가? 책장을 펼쳤다. 마딜어로 되어 있다. 이거나 읽어야겠다. 어차피 내가 원래 보던 책은 아드라스어로 되어 있어서 펼쳐놓기만 하던 책이었다. 그건 이 방구석 어딘가에 있을테니 나중에 찾아봐도 되겠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햇살이 참 좋다. 그리고 그 창문 아래에 내가 찾던 책이 있었다. 저기 있으면 책 상할텐데? 누가 치웠는지는 몰라도 참 고약한 곳에 갖다 놓았네. 내가 원래 펼치던 책은 내 자리 위에 올려놓고 키란 전기를 들고 나오려고 문고리를 잡았다.


 "여기 뭐 중요한 쪽지 같은 거 끼워진 건 아니겠지?"


 책 사이에 뭔기 끼워져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책장을 후루룩 넘겨보았다.


 "뭐야, 이거?"


 책장 여기저기에 새빨간 줄이 잔뜩 그어져 있었다. 어떤 부분은 한 장 전체가 빨간색으로 쫙쫙 그어져 있었다. 그때 방문이 열렸다. 이고였다.


 "뭐해?"

 "아...그게..."


 이고는 내가 들고 있는 책을 봤다.


 "그거 읽게?"

 "응."

 "읽어. 나 그거 예전에 다 읽었어."

 "괜찮아?"

 "뭐?"

 "이거 읽어도 되냐구."

 "읽으라니까? 그건 너 잘 읽겠다. 마딜어로 써 있어서."


 이고는 별 시원찮은 걸 다 물어보고 있다는 투로 말하더니 자기 자리로 가서 드러누웠다.


 "나 한 시간만 잘께. 한 시간 뒤에 깨워줘."

 "알았어."


 책을 들고 나왔다. 자리에 앉아 책을 펼쳤다. 첫 장부터 빨간줄 투성이다. 제일 먼저 빨간 줄이 그어진 문장은 '키란은 어려서부터 우르간인들을 끝없이 증오했다'는 문장이었다. 정확히는 '키란은 치르치나에서 태어났다'라는 첫 문장 바로 다음 - 즉 두 번째 문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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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좀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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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소설 재미있네요 . 좋은하루 되세요 ^^

    2018.03.15 10:00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