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기적과 저주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3장 04화

좀좀이 2017. 12. 4.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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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3장 04화


 자리에서 일어나 이고를 따라나섰다. 라키사와 켈라자야도 따라나왔다. 서점에서 나와보니 이고가 벽에 기대어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슬쩍 우리를 한 번 쳐다보더니 다시 허공을 바라보며 연신 담배 연기만 빨아들인다. 대체 얼마나 안 좋은 일이기에 계속 저렇게 한숨만 내쉬며 담배만 태워대는 걸까? 차라리 고래고래 소리치면서 계산대를 싹 다 뒤엎어버리고 난동을 부리면 속이라도 시원하겠다. 이렇게 계속 조마조마해하며 이고 눈치를 살필 필요는 없을테니까.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죄를 숨겨야하는 것처럼 이고를 신경쓰는 것이 참 불편하다. 이고가 켈라자야를 바라보았다.


 "너는..."


 말끝을 흐리고 다시 허공을 바라보며 담배 연기를 들이마신다. 켈라자야는 이고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이고는 담배를 하나 더 꺼내서 불을 옮겨 붙이고는 서점 문을 잠갔다. 루즈카 집에 가자며 다 나오라고 하더니 계속 담배만 태우고 있다. 보통때라면 가면서 태우라고 했을 거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말을 던질 분위기가 아니다. 대체 무슨 일 때문에 루즈카 집에 셋 다 가자고 하는 거야? 설마 치롤라 때문인가? 그런데 치롤라는 전에 만났을 때 루즈카 집에서 나와 다른 곳에 방을 잡고 산다고 내게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루즈카 집에 치롤라가 있을 리는 없을 거구. 루즈카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이고가 우리 셋을 불러서 루즈카 집에 가자고 할 필요가 있나?


 나와 라키사만 불러서 같이 가자고 했다면 여러 가지를 추측해볼 수 있다. 그러나 켈라자야까지 부르니 도대체 왜 갑자기 루즈카 집에 가자고 불러내고서는 저렇게 갈 생각은 안 하고 담배만 태워대는지 감을 잡을 수 없다. 켈라자야가 밤마다 뭘 하는지 모르겠다. 그것은 즉 우리들과의 접점이 이 서점 외에는 딱히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켈라자야가 루즈카와 알기는 할 거다. 루즈카한테 저주술로 호되게 혼났으니까. 설마 치롤라에게 무슨 일이 생겨서 둘이 이제 화해하라고 데려가는 건가? 그런데 그러면 정말 나쁜 일이잖아! 그렇지만 그렇게 둘을 억지로 화해시켜야 할 필요가 있나?


 이고는 담배를 다 태우고는 서점 문을 잠갔다.


 "가자."


 이고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켈라자야를 바라보았다. 켈라자야도 나를 쳐다보았다. 야, 네가 무슨 일 때문에 루즈카 집에 셋 다 가야하는지 물어봐! 켈라자야에게 눈빛으로 이야기했다. 켈라자야가 내 눈빛과 표정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고개를 가로저었다. 얘는 왜 쓸 데 없이 이럴 때에는 아주 정신이 멀쩡한 거야? 나한테 뺨도 잘 갈기고, 라키사 앞에서는 내가 오해받을 말을 얼굴 새빨개져서 잘만 하더만 정작 필요할 때는 아주 정신이 또렷하네. 켈라자야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없이 이고를 쫓아간다. 라키사를 바라보았다. 라키사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얘는 아직도 여전히 오해중인가보네. 이제 나랑 말 섞기도 싫다는 건가? 그건 진짜 오해라구! 그리고 지금 그런 거 따질 분위기가 아닌 거 너도 알잖아! 이고가 왜 저렇게 한숨만 내쉬고 담배만 뻑뻑 태워대며 우리들을 루즈카 집으로 끌고가는지가 중요한 거잖아.


 내가 그냥 물어볼까? 밤새도록 안 들어오다가 새벽 6시에 들어와서 방에서 담배만 뻑뻑 태우다 한숨을 푹푹 내쉬며 간신히 잠들더니 일어나서 다짜고짜 루즈카 집에 가자고 한다. 나는 분명히 잘못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이런 일을 당해야할 짓을 한 것이 전혀 없다. 라키사와 켈라자야는 모르겠다. 뭐 크게 잘못한 것이 있을 수도 있지. 특히 켈라자야라면 그러고도 남는다. 한밤중에 이 도시를 돌아다니며 뭔 짓을 하는지 당최 알 수가 없으니까. 그러나 나는 잘못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구! 감비르 그 망할 자식, 게첸 그 썩어빠진 쓰레기놈이 뭐라고 나한테 헛소리를 지껄여대든 그 말에 전혀 혹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둘을 열심히 서점에서 내쫓아내기 위해 노력중이다. 물론 내가 있으니 그 둘이 썩은 음식에 파리 꼬이듯 자꾸 서점으로 찾아오는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야.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내가 루즈카 집에 이렇게 끌려가야 할 이유를 도통 모르겠다는 거다. 루즈카에게 '루즈카님'이라고 부르지 않아서? 그런 것 때문이라면 굳이 이렇게 끌고갈 필요가 있나?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면 했어도 한참 전에 이야기했겠지. 하루 이틀 루즈카를 루즈카라고 부른 것도 아닌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고 쥐어짜봐도 내가 왜 이렇게 끌려가야하는지 모르겠다. 아무 이유가 없다. 하지만 이고가 저러고 있으니 뭔가 커다란 죄를 지어서 잡혀가는 기분이 든다.


 눈길 위를 수레와 마차가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이 길 옆으로 비켜선다. 수레와 마차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다시 길 한복판으로 나와 바닥의 거무튀튀해진 눈을 바라보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거리의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주위를 살펴보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모두가 어디에서 갑자기 무슨 일이 터질지 감시하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한다. 우리를 바라보며 우리가 나쁜 놈인지 곁눈질로 살펴본다. 기분이 무지 나쁘다. 그러나 저들도 우리 때문에 기분이 매우 나쁠 거다. 우리도 똑같이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거리에서 이런저런 이야기 소리를 듣는다. 어제 또 어디에서 사람이 죽었댄다. 몸이 찢겨져 죽은 사람, 가죽만 남은 채 발견된 사람에 별별 이상하고 기괴한 방법으로 사람들이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누구도 딱히 놀라운 일이라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너무나 담담하게 어디에서 누가 죽었다는 소식을 서로 주고받는다. 그래, 이제 이건 일상이니까. 나한테만 일어나지 않으면 된다는 거다. 설령 바로 내 옆에 있는 나와 관계없는 행인이 바로 지금 죽더라도 괜찮다는 거겠지. 왜냐하면 나한테 일어난 것은 아니니까. 어차피 항상 일어나는 일상적인 사건들. 내 옷에 피가 튀어서 더러워지지만 않으면 된다는 건가. 저 사람들을 욕할 자격이 있을까? 솔직히 나도 그렇잖아. 내가 이 사람들과 다르다면 저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 하나하나에 전부 경악하고 기겁해야할 거다. 하지만 나도 그러려니 하며 열심히 이고 뒤만 쫓아가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들 모두 일상이니까.


 어찌 하다보니 내가 라키사와 켈라자야 사이에서 걷고 있다. 다시 한 번 라키사를 쳐다보았다. 라키사는 나와 눈을 최대한 안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내쪽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내 반대쪽과 땅바닥만 번갈아 바라보며 걷는다. 켈라자야를 바라보았다. 켈라자야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고 때문에 무언가를 말할 분위기가 아니니까. 그런데 네가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써왔냐? 이 기분 나쁜 분위기를 어떻게든 조금 누그러뜨리기 위해 무의미한 날씨 이야기라도 던지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지가 않는다.


 켈라자야는 내심 나한테 이고에게 왜 그러냐고 물어봐달라는 눈치다. 구태여 그렇게 물어볼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루즈카 집까지 많이 왔으니 조금만 더 걸어가면 될텐데. 라키사는 계속 나와 켈라자야를 외면한다. 아까 그렇게 해명했는데도 계속 이런다. 이건 어떻게 풀어야할까? 켈라자야는 짐짓 모르는 척 나만 멀뚱멀뚱 바라보며 걷는다. 네가 바보가 아니라면 내가 너희 둘 사이에서 왜 이러고 있나 당연히 알겠지. 이게 다 네가 아까 이상하게 이야기해서 내가 오해받는 거잖아. 물론 라키사와 친하게 지내고 있기는 하지만 딱히 사귀는 사이는 아니니 네가 잘못한 것도 하나도 없기는 하지만. 라키사는 내가 켈라자야 따위와는 사귈 마음 전혀 없다고 아주 대놓고 소리쳐야 오해를 풀 생각인가? 그랬다가는 켈라자야가 엄청나게 상처받겠지. 아무리 오해를 풀고 싶어도 그건 할 짓이 분명 아니다. 이고는 아무 말 없이 분위기만 한없이 무겁게 만들고, 라키사는 내 마음을 잡아 비틀려고 작정했는지 계속 기분이 상한 티를 팍팍 내고 있다. 알아서 어찌 되겠지. 모르겠다. 지금은 나도 닥치고 이고를 따라가는 수밖에 없다. 물어본다고 해서 이고가 대답해줄 것 같지도 않고, 아무리 해명한다고 해서 라키사가 오해를 풀 것 같지도 않으니까. 지금 켈라자야의 반응을 보면 아까 자기에게 던진 내 말 뜻을 아주 정확히 알아들은 것 같다. 결국 지금 정신이 가장 멀쩡한 것은 켈라자야란 말인가.


 이고가 걸음을 멈추었다. 뭔가 중요한 것을 말하려고 그러나? 이고는 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켈라자야가 손가락으로 담배 끝을 톡 건드렸다. 이고가 고맙다는 말 대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나도 입에 담배를 따라 물었다. 켈라자야가 입꼬리를 살짝 위로 올리며 손가락으로 담배 끝을 가볍게 건드렸다. 라키사는 그 모습을 힐끔 쳐다보더니 시선을 다시 내 반대쪽으로 돌려버린다. 이고가 담배를 태우며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켈라자야와 서로 자리를 바꾸었다. 둘 다 내 담배 연기 마시는 것을 좋아할 리는 없을 테니까. 이고는 한숨을 숨기기 위해 담배 연기를 내뱉는다. 나는 그냥 태울 때가 되어서 태운다. 한숨까지 푹푹 내쉴 상황은 아니니까. 그저 이고와 라키사가 갑갑하게 만들 뿐이지.


 "점심 먹고 갈래?"

 "무슨 일인데?"

 "글쎄...그건 가서 이야기하자. 점심 먹고 갈래?"

 "아니. 그냥 가."


 이고가 뜬금없이 점심 먹고 가지 않겠냐고 물어봤다. 내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자 가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그러자 바로 라키사가 그냥 가자고 했다. 잘 했어. 라키사도 지금 이고 모습을 보며 뭔가 안 좋은 일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을 거다. 나와 켈라자야가 느끼는 것보다야 덜하겠지만. 루즈카 집에 도착해 들어가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고가 지금 저러는지 알게 될 거다. 밥은 그 다음에 먹어도 된다. 지금 먹어봐야 밥이 목으로 넘어가는지 목을 막아버리는지 모를테니까.


 루즈카 집 앞에 도착했다. 이고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더니 문을 두드렸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고가 주먹으로 문을 힘껏 쾅쾅쾅 두드렸다. 안에서 사람이 문 쪽으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문이 열렸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몸에 달라붙는 초록색 원피스 위에 갈색 외투를 걸친 루즈카가 말없이 우리들을 하나씩 천천히 살펴보았다. 켈라자야를 보더니 조금 놀란 듯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들어와요."

 "별 일 없었어?"

 "아직은요."


 루즈카가 왠일로 양팔에 팔찌를 차고 있지? 한 뼘 길이 되는 은빛 팔찌에는 섬세한 새 문양이 새겨져 있고, 새 주위에 여러 색깔 보석이 박혀 있었다. 팔찌 가운데에는 사슬이 있고, 그 끝에 반지가 매달려 있었다. 반지는 양손 중지 손가락에 끼워져 있었다. 루즈카가 저런 팔찌를 양팔에 차고 있는 모습은 처음 본다. 커다란 은빛 지팡이를 들고 있는 것이야 항상 보는 모습이었지만, 저런 장신구를 차고 있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서점에 찾아올 때나 루즈카 집에 가서 만날 때나 제일 많이 꾸민 것이 머리에 머리띠를 하고 있는 정도였다. 오늘 뭐 중대 발표라도 하려고 그러나?


 루즈카 집 안에 들어가자마자 주위를 살펴보았다. 어떤 여자가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탁자에 엎드려 있다. 저거 블랑쉬블르 아냐? 옷 모양새를 보니 저 여자는 아무리 봐도 블랑쉬블르다. 굳이 고개를 들게 해서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블랑쉬블르는 아드라스인이니까. 게다가 옷도 마딜인들이 입는 옷과 미묘하게 다르다. 무언가 날카로운 선이 살아있는 느낌이랄까. 블랑쉬블르 옆에는 술병과 컵이 있다. 왜 남의 집에 와서 술 취해서 저러고 있어? 설마 루즈카가 이고와 결혼한다고 이야기해서 충격받고 저러나? 하여간 저 인간은 참 켈라자야와는 다른 쪽으로 정신이 이상하다.


 "너희들 오느라 고생했지?"

 "아니요."

 "잠깐 탁자에 앉아 있을래?"

 "예."


 블랑쉬블르 옆에는 앉기 싫다. 저 인간 갑자기 고개 벌떡 치켜들고 무슨 술주정을 할 지 모르잖아. 라키사가 블랑쉬블르 오른쪽으로 가서 앉았다. 블랑쉬블르 왼쪽에 켈라자야가 앉았다. 옆이 아니니 다행이려나? 나는 블랑쉬블르 맞은편에 앉았다. 설마 고개를 들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이상한 장난 걸지는 않겠지? 다행인지 블랑쉬블르는 계속 고개를 들지 않는다. 그저 가만히 엎드려있을 뿐이다.


 "너희들 이거 한 잔씩 마셔.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많이 추웠을텐데."


 루즈카가 김이 펄펄 나는 보랏빛 음료가 담긴 컵을 하나씩 건네주었다. 이 오묘한 냄새는 뭐지? 약재로 쓰이는 나무껍질을 달인 것 같기도 하고, 포도주 냄새 같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조금 퀘퀘한 다른 과일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다. 한 모금 마셨다. 달고 시고 쓰고 떨떠름하다. 참 괴상한 맛인데 은근히 맛있다. 한 모금 홀짝일 때마다 몸도 한 모금씩 녹는다.


 "언니, 이거 맛있어요! 이거 뭐에요?"

 "포도주에 이것저것 넣고 끓인 거야. 술 아니니까 마음 놓고 마셔도 돼."

 "포도주면 술 아니에요?"

 "끓이면서 술기운은 다 날려보냈어."

 "언니, 나, 이거 한 잔 더 줘요! 너무 맛있어요!"


 켈라자야가 한 컵을 벌컥벌컥 들이마시고는 루즈카에게 빈 컵을 건네주었다. 얘는 이거 뜨겁지도 않나? 이거 한 잔 더 달라고 할 게 아니라 이고랑 루즈카에게 대체 우리를 왜 여기로 오게 했냐고 물어보라구! 루즈카는 말없이 컵을 받아 부엌으로 갔다. 이고는 바닥에 주저앉아 블랑쉬블르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다. 블랑쉬블르는 우리가 옆에 앉아 있건 이고가 쳐다보건 신경도 쓰지 않고 계속 미동도 없이 탁자에 엎드려 있다. 그다지 유쾌해질 것 같지 않은 분위기. 차라리 무슨 일이 있는지나 빨리 말해줬으면 좋겠다. 그러나 이고도, 루즈카도 아무 말 하지 않는다. 블랑쉬블르는 술 취해서 정신을 못차리는지 계속 탁자에 엎어져있기만 하고.


 루즈카가 켈라자야에게 보라색 음료가 든 컵을 건네주었다. 켈라자야는 호호 불며 홀짝이기 시작했다. 그래, 이 음료 맛있어. 하지만 지금 이 음료 맛을 느긋하게 음미할 분위기가 아니잖아. 설마 일부러 저러는 건가? 자기도 분위기 안 좋은 거 아니까 억지로 눈치 없고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연기하는 거야? 아까는 그 뜨거운 것을 마구 들이키더니 이번에는 호호 불어가며 홀짝인다. 자기 딴에는 분위기 좀 바꾸어보려고 노력해본 건가. 라키사는 음료를 다 마시고 컵을 탁자에 내려놓은지 예전이다. 나도 음료를 다 마시고 켈라자야만 바라보고 있다. 라키사와 눈 마주쳐봐야 라키사가 고개를 홱 돌릴 거고, 그렇다고 이고와 루즈카, 블랑쉬블르 보면 마음이 더 심란해질 거니까. 켈라자야가 다 마시고 컵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너희들 잠시 좀 따라올래?"

 "예."


 어디로 따라오라고 하는지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그때 블랑쉬블르가 고개를 살짝 들어 우리를 힐끗 쳐다보았다. 울었나? 눈이 팅팅 부어 있었다. 블랑쉬블르는 다시 얼굴을 파뭍었다. 아무래도 따라가면 안 될 거 같다. 느낌이 쌔하다. 직감적으로 무엇을 예상하든 그것보다 더한 일이 일어날 거라는 것을 느꼈다. 루즈카와 이고가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 우리 신변에 별 일은 없을 거다. 그러나 평생 모르는 것이 약인 그런 것을 억지로 깨닫게 해주려 하는 느낌이랄까? 보기 싫고 듣기 싫은데 억지로 눈꺼풀 잡아올리고 귀에 대고 소리치는 것을 당하는 기분? '안 가면 안 될까요?'라고 말하고 싶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고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꼴은 영락없이 죄수들이 끌려가는 모양이다. 루즈카가 앞에서 끌고 가고 이고가 뒤에서 도망치지 못하게 감시하는 모습이다. 그때 블랑쉬블르가 고개를 치켜들고 의자에 등을 젖히고 기대어 천장을 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루즈카는 그런 블랑쉬블르를 힐끔 쳐다보더니 다시 말없이 앞장서서 걸어갔다.


 문 앞에 램프 두 개가 걸려 있었다. 루즈카가 램프를 들자 램프에 불이 붙었다. 하나를 이고에게 전해주고 문을 열었다.


 "어두우니까 계단 조심해."


 루즈카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우리들 모두 계단으로 내려가기 시작하자 이고가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이고가 문을 닫자 루즈카가 계단에서 내려가는 것을 멈추고 뒤돌아보지 않은 채 질문을 던졌다.


 "너희들 쿠룬나스에 대해 들어봤니?"

 "예."

 "어디까지 아니?"

 "쿠룬나스가 잡아먹은 시체는 본 적 있어요."


 루즈카의 질문에 내가 대답했다. 예전에 우물가에서 본 적이 있지. 몸 안의 피와 뼈, 살이 가죽을 벗어놓고 도망친 것 같은 모습. 하지만 쿠룬나스가 사람의 속을 파먹는다는 이야기 이상 아는 것은 없다. 그것이 지금 에드자에 돌아다니며 사람을 잡아먹고 있다. 분명히 에드자 안에 쿠룬나스가 존재한다. 그렇지만 직접 본 적은 없다. 직접 봤다면 나도 잡아먹혔을테니까. 오직 그 희생자의 시체를 직접 보았기 때문에 그것은 여기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을 뿐이다. 루즈카가 숨을 깊이 들이마시더니 가늘은 신음 소리를 내었다.


 "이제부터 너희들에게 보여줄 것은 쿠룬나스야."

 "예?"

 "어젯밤 쿠룬나스 한 마리를 생포했어. 그런데 너희들에게 꼭 보여줘야 할 거 같아."


 쿠룬나스? 그걸 왜 우리들한테 보여줘?


 루즈카는 다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루즈카 뒤를 따라 지하실 바닥까지 내려갔다. 멍석 가운데가 불룩하게 솟아있다. 저 불룩하게 솟아있는 부분 아래에 쿠룬나스가 있다. 이고는 멍석 끝으로 가서 램프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멍석 끝을 붙잡고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천천히 멍석을 들추어 걷어내기 시작했다. 검은색 머리카락. 피와 흙, 딱지가 얼굴 전체에 범벅이 되어 알아보기 힘든 얼굴. 설마...


 "타슈갈, 네가 가서 확인해볼래?"

 "저요?"

 "그래. 확인해봐."


 아니야. 이건 착각일 뿐이야. 그러나 이것이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믿기 싫다. 이것은 단지 너무나 비슷한 것 뿐이야. 내가 알던...


 길거리에 쌓여 있는 눈. 사람들이 재를 던지고 여기저기서 뭍어온 흙이 뒤섞여 회색에 갈색에 오염되어 버린 순백의 눈. 하늘에서 내린 눈은 땅에 떨어질 때까지 자신이 이렇게 더러워질 거라 상상하지 못했을 거다. 땅에 떨어지고나서야, 사람들이 재를 뿌려댈 때에서야, 여기저기에서 진흙이 자신을 덮쳐올 때에서야 아, 내가 이 세상에 내려오지 말았어야 했구나 후회하겠지. 그 위에 사람들의 피가 뿌려질 때 이 망할 에드자 땅에 떨어진 것을 투명한 눈물을 흘리며 영원히 저주할 거다. 이 싸그리 다 불싸지르고 파괴해도 시원찮을 에드자. 너는 왜 여기 온 거야.


 "아다비아!"


 쭈그려 앉아 머리카락을 치우고 얼굴을 확인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이 지저분하게 더럽혀진 하얀 외투와 그 속의 순백의 원피스. 그리고 흰색 구두. 두 팔은 뒤로 젖혀 묶여 있고, 두 다리도 꽉 묶여 있었다. 머리카락을 살짝 치우자 두 눈을 볼 수 있었다. 누군가 칼로 눈을 그어버렸다. 라키사가 외마디 비명이 터져나오는 것을 손으로 막으며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라키사는 이게 아다비아라고 아예 생각도 못 했겠지. 나는 알고 있었다. 이렇게 새하얗게 입고 서점으로 찾아온 아다비아를 두 번 봤으니까. 아니기를 바랬다. 세상에 똑같은 옷이 존재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알고 있었지만 제발 비슷한 사람이기를 빌었다. 그러나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그것도 가장 최악의 모습으로 아다비아는 내 앞에 다시 나타났다.


 그때 그렇게 퀭한 얼굴을 하고 나타났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던 거야? 저주술이라면 그렇게 혐오하던 네가 왜 지금 내 앞에서 이러고 있어? 너 저주술 따위는 싫다고 했잖아. 너 계속 위로 날아올라가고 있었잖아. 그런데 지금 이건 뭐야? 네가 왜 이런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난 거야? 너 아다비아 아니지? 아다비아와 똑같이 생긴 다른 사람이지? 진짜 아다비아는 뮈젤에 있고 너는 아다비아처럼 생긴 전혀 다른 사람이지? 어서 아니라고 대답해. 너는 아다비아가 아니야. 너는 가짜야. 이런 게 아다비아일 리가 없어!


 그때 켈라자야가 내 옆으로 오더니 아다비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이름은 켈라자야. 19살. 치르치나 출신. 이제 우리는 친구야."


 이 미친년은 지금 뭐라는 거야? 이게 어디를 봐서 아다비아야? 네가 그때 본 흰 옷을 입은 아다비아랑 이 쿠룬나스가 지금 같은 거라는 거야? 너 눈깔 삐었냐? 세상에 흰 옷 걸치면 다 아다비아냐? 이건 아다비아가 아니라구! 쿠룬나스 중 한 마리가 아다비아 비슷한 모양일 뿐이다. 야, 이 미친년아, 정신차리고 똑바로 봐. 이건 아다비아가 아니라구. 그냥 아예 다른 사람이라구! 속으로 절규하며 외치지만 안다. 이거 아다비아다.


 "타슈갈?"


 쿠룬나스가 힘겹게 입을 떼었다.


 "아다비아..."

 "타슈갈? 타슈갈? 진짜 타슈갈이야?"

 "응. 나야."

 "보지 마!"


 아다비아가 소리쳤다.


 "보지 마! 싫어! 보지 마!"


 아다비아가 온 몸을 비튼다.


 "비켜."


 루즈카가 나와 켈라자야를 뒤로 잡아끌었다. 나와 켈라자야가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지자 루즈카는 은빛 지팡이를 들어서 있는 아다비아를 향해 힘껏 내리쳤다. 지지지직 소리와 함께 아다비아 몸 전체에 섬광이 번쩍였다. 아다비아의 몸이 축 늘어졌다. 정신을 잃어버렸나보다. 이고는 말없이 멍석을 다시 아다비아 몸 위에 덮었다. 루즈카는 허리를 굽혀 내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타슈갈, 아다비아 맞니?"

 "맞아요."


 부정하고 싶다. 저건 아다비아가 아니다. 아다비아처럼 생긴 쿠룬나스일 뿐이다. 저게 어디를 봐서 아다비아야? 하지만 아다비아 맞다.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저 쿠룬나스는 아다비아다.


 "아다비아는 지금 쿠룬나스 상태야. 원래대로라면 경찰을 불러서 넘기는 게 맞아. 아니면 내가 직접 죽이거나. 그렇지만 너희들 친구라서 너희들을 부른 거야."

 "아다비아 어떻게 되는 거죠?"

 "그건 나도 몰라. 일단 나가자. 일어나."


 이고가 나를 잡아일으켰다. 루즈카는 입을 손으로 가리고 계속 흐느끼고 있는 라키사를 부축했다. 켈라자야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빳빳히 치켜들고 계단을 걸어올라갔다. 대체 어째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치롤라가 쿠룬나스가 되었다면 그러려니 했겠지. 원래 저주술을 쓰던 애였고, 복수심에 불타오르고 있었으니까. 자에드와 예라가 쿠룬나스가 되었어도 그런가보다 했을 거다. 걔들도 저주술을 쓰는 애들이니까. 그런데 왜 아다비아야? 쟤는 저주술 같은 것 자체를 엄청나게 싫어하고 멀리하던 애였잖아. 무슨 이유로, 어떤 방법으로 저렇게 된 거야?


 퀘퀘하고 답답한 지하실에서 나왔다. 루즈카가 문을 굳게 걸어잠갔다. 블랑쉬블르가 시체처럼 의자에 기대어 입을 쩍 벌리고 천장만 바라보고 있다가 우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다.


 "아다비아 맞아?"


 대답할 수가 없다. 아다비아 맞아요. 하지만 아니에요. 제가 알던 아다비아는 저런 아다비아가 아니에요. 아다비아는 저주술 따위 전혀 관심도 없는 애였다구요.


 "맞대요."


 블랑쉬블르가 나를 쳐다보더니 자세를 고쳐잡고 똑바로 앉았다. 깊이 심호흡을 하더니 내게 물어보았다.


 "너 아다비아랑 친해?"

 "예."

 "하나만 물어볼께."

 "예?"

 "어떻게 할래?"

 "무슨 말이에요?"

 "저거 죽이는 게 낫겠니, 살려두는 게 낫겠니?"

 "죽이다니요!"


 아직 술 덜 깨었나? 죽이기는 또 뭘 죽여? 쿠룬나스라 해도 살리고 봐야지! 저건 쿠룬나스 이전에 아다비아잖아. 아다비아라구!


 "쟤 이제 영원히 괴로울 거야. 죽고 싶을 만큼 말이야. 너 책임질 수 있어?"

 "뭔 소리에요? 살아있으면 당연히 살려야죠!"

 "진짜 죽는 게 나을 정도로 괴롭다구. 차라리 지금 죽이면 모두가 깔끔해."

 "술 처마실 거면 좀 곱게 처마시세요! 멀쩡한 애를 왜 죽이냐구요!"

 "너 진짜 책임질 수 있어? 쟤는 이제부터 죽는 거보다 더 한 고통을 겪을 건데? 끝도 없이 영원히. 심지어는 죽어서조차."

 "그건 그때 가서 알 바죠! 멀쩡히 살아 있는 애를 왜 죽여요?"


 이 미친 할망구 귀신아, 살아있다면 살려야지 왜 죽이자고 꼬드기는 거야? 지금 너 일부러 쟤 죽이자고 나한테 부추기는 거지? 진짜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지만 않았다면, 그리고 여자만 아니었다면 면상을 주먹으로 갈겨버렸을 거다. 나는 아다비아가 쿠룬나스라는 것도 모르겠다. 내 앞에 나타난 아다비아는 눈은 칼로 베여서 멀어버렸고, 얼굴 전체가 상처와 피범벅에 딱지와 흙, 오물로 엉망이 되어 있을 뿐이다. 걔가 어떻게 사람을 잡아먹을 수 있는지 전혀 모르겠고, 그것을 본 적도 없다. 내 앞에서의 마지막 모습은...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그대로 맞으며 서점 문 앞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그냥 들어오면 되는데 그것을 못 들어와서 한없이 그렇게 있었지.


 "너 진심이야?"

 "예! 그걸 왜 물어봐요?"

 "알았어."


 블랑쉬블르가 비틑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즈카가 달려가서 블랑쉬블르를 부축했다.


 "그래, 보자구. 저녀석이 분명히 책임진다고 했어."

 "언니, 일단 위로 올라가서 쉬어요."


 루즈카가 블랑쉬블르를 부축하며 2층으로 올라갔다.


 "가자."


 이고가 우리들을 루즈카 집에서 몰아내었다. 루즈카 집에서 나오자마자 이고는 품에서 담배와 성냥을 같이 꺼냈다. 이번에는 켈라자야가 불을 붙여주지 않았다. 이고는 당연하다는 듯 켈라자야에게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성냥에 불을 붙여서 담뱃불을 붙였다. 나도 담배를 입에 물었다.


 "불 붙여줘?"

 "응."


 켈라자야가 담배 끝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연기가 피어오른다. 쿠룬나스가 되려면 켈라자야가 되어야 정상 아닌가? 얘를 미워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얘는 저주술사잖아. 쿠룬나스가 되려면 뭔가 이유가 있어야 할 거 아냐. 차라리 이렇게 저주술을 쓰던 사람이 저주술 수련을 하다 뭔가 잘못되어서 쿠룬나스가 된다고 한다면 이해라도 하겠다. 그런 세계와는 아예 담 쌓고 혐오하던 아다비아가 왜 쿠룬나스가 되어 있는데?


 악몽이다. 이건 지독한 꿈이다. 원래는 지금쯤 눈을 뜨고 '아, 진짜 재수 더럽게 없는 꿈을 꾸었구나' 안도의 숨을 내쉬어야 하는데 꿈이 깨지를 않는다. 참 긴 꿈이다. 이따 잠자리에 누워서 눈을 감았다 뜨면 그제서야 꿈에서 깨어날 건가? 이따위 꿈은 왜 절대 깨지 않는 거야? 목구멍에서 느껴지는 담배 연기의 자극, 손끝에 느껴지는 담뱃불의 열기. 괜찮아. 다 꿈이야. 꿈에서 감각이 느껴질 때도 있잖아. 눈을 뜨면 푸르스름한 어둠이 이 세상 모든 것에 물들어 있는 새벽일 거다. 일어나서 정말 기분 더럽게 만드는 꿈이었다고 툴툴대면서 물을 길러 우물로 가겠지.


 "괜찮아?"


 켈라자야가 나를 쳐다보며 물어보았다. 그래, 꿈이야. 켈라자야가 이럴 리가 없지. 얘가 무슨 나한테 괜찮냐고 물어봐? 폭발하는 소리. 비명소리. 사람들이 어디론가 급히 달려간다. 그래, 다 터져라. 다 죽어라. 이 때려부셔도 시원찮을 에드자. 저 폭음과 비명소리가 너무나 멀게 느껴진다.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터진 일이 아닌데 현실과 꿈의 간극만큼 너무나 멀게만 느껴진다. 나 지금 걸어가고 있는 거 맞지? 안 걸어도 서점까지 알아서 흘러가는 거 아니야? 켈라자야가 내 어깨를 잡고 거칠게 흔들었다.


 "이 멍청아, 정신차려!"


 어디에서 화를 내야 하나? 어느 시점부터 엉망이었다고 해야할까. 켈라자야를 바라보았다. 켈라자야가 무섭게 인상을 쓰며 나를 쏘아본다. 아, 화났나보구나. 왜 너는 화났을까? 폭음? 비명? 쿠룬나스? 뭐가 뭐지? 나는 계속 서점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모든 것이 나로부터 열 걸음씩 멀어져 나만의 공간을 홀로. 켈라자야의 얼굴조차, 켈라자야가 흔들어대어서 흔들리는 내 몸뚱아리조차 허공에 맴도는 허무한 진동과 무의미한 빛이다. 나는 지금 서점으로 간다. 아다비아는 루즈카 집에 있다. 왜 그 꼴인지 모르겠지만.



 기억이 없다. 기억이 있는데도 그것이 기억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아마 3일이 지났을 거다. 그보다 더 지났을 수도 있고 덜 지났을 수도 있다.


 "보지 마! 싫어! 보지 마!"


 아다비아다.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그건 아다비아였다. 대체 왜 그런 것들과 제일 거리가 먼 아다비아가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히 아다비아였다. 루즈카는 아다비아가 쿠룬나스랬어. 블랑쉬블르는 지금 죽여버리는 것이 훨씬 낫다고 했어. 이고는 아무 말 없다. 서점으로 돌아온 후 또 담배를 몇 대 쉬지 않고 태우더니 정신이 돌아온 것처럼 보였다. 그 속이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겉보기에는 그랬다. 감당 안 되는 큰 짐을 내던져버린 것처럼 심호흡 한 번 하더니 원래 그랬던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꿈을 꾸는 건지 꿈에서 깨어난 건지 모르겠다. 아다비아가 그럴 리가 없잖아. 아다비아를 다시 보러 가기는 해야 하나? 보러 가면 뭐라고 이야기하지? 그 이전에 거기에 아다비아가 있기는 할까?


 모든 것을 다 부정해버리고 싶다. 모든 것이 두 개로 보이고 느껴진다. 희뿌연 현실과 선명한 현실. 어느 것이 진짜일까. 둘 다 진짜다. 어느 것을 믿어야할까? 둘 다 믿어야겠지. 그러면 뿌연 것을 따라가야 해, 선명한 것을 따라가야 해? 둘 다 따라가야한다. 그런데 어떻게? 말이야 쉽지만 대체 어떻게 행동해야하는 거야. 내가 안 봤으니 아다비아가 쿠룬나스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이고도, 루즈카도, 블랑쉬블르도 아다비아는 쿠룬나스라고 한다. 내가 본 건 얼굴 전체에 깊은 상처가 생겨 엉망이 된 아다비아의 모습. 그 뿐이다. 아다비아가 사람을 잡아먹는 건 보지도 못했다. 그런데 진짜란다. 믿어야 한댄다. 이걸 어떻게 믿으라는 거야? 내가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향해 손을 내뻗으면 내가 보지 않은 진짜가 그것은 아니라고 외쳐. 내가 들은 진짜를 향해 손을 내밀면 내가 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진짜는 그게 아니라 바로 자신이라고 절규해. 어느 쪽을 잡고 따라가야하는 거야. 그래, 다 진짜라 하자. 아다비아가 사람을 잡아먹었다고? 진짜로? 걔가 무슨 수로 사람을 잡아먹어. 무슨 가죽을 발라내고 살코기만 발라먹는 것도 아니고 가죽 멀쩡히 남기고 그 속만 어떻게 파먹냐는 거다. 걔는 저주술 쓸 줄도 모를 건데.


 라키사는 바뀐 것이 없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평범하게 행동한다. 쟤는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혹시 라키사가 바로 이 환상 속에서 유일한 진실 아닐까? 그러니 저렇게 항상 같은 모습인 거 아냐? 모든 것은 나의 망상이 만들어낸 환영. 그래서 제멋대로 이상하게 변해가. 그러나 라키사는 그런 것이 아니라 진실이자 진짜.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같은 침착한 모습을 보이는 건가? 켈라자야는 미묘하게 변한 것 같다. 뭔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바뀐 거 같은데 어떻게 바뀌었는지 잘 모르겠다. 나를 걱정한다는 느낌이 든달까? 그래봐야 담배 태우러 나갔을 때 담뱃불을 붙여준 후 표정 없는 얼굴로 나를 계속 주시하는 것 뿐이지만.


 "타슈갈."


 고개를 들었다. 감비르다. 이 새끼도 가짜 아닐까? 그래, 내가 미친 거야. 세상은 멀쩡하고 내가 미쳐버린 거다. 모든 것이 나의 망상이다. 그러면 돼. 내 앞에 있는 역겨운 꼬라지 하고 되도 않는 여자 흉내 내고 있는 감비르조차 다 내 망상이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한 거야. 솔직히 감비르가 여장하고 자기가 남자이자 여자라는 되도 않는 미친 헛소리 한다는 것이 말이 돼? 그거도 불과 몇 개월 사이에? 그래, 그냥 내가 미친 거다. 나 스스로 정신을 차리면 이 모든 환상도 하나씩 깨질 거다. 애초에 시위도, 쿠룬나스도, 저주술을 이용한 살해사건들도 다 없었던 거야.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 따위는 애초에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어.


 "지금 너 시간 되니? 나 너랑 너무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지, 뭐야!"

 "그래, 가자, 병신 새끼야."

 "어머, 나 너무 기뻐!"


 감비르는 헝겊으로 둘러싼 나무판을 팔 안쪽에 끼고 내 팔을 잡아당겼다. 그래. 가자, 이 망령 새끼야. 어차피 내 환상이겠지. 이건 진짜 감비르가 아니라 내 망상이 만들어낸 환영 같은 거야. 내 망상이 어디까지 이어지나 나도 한 번 구경해보자. 이 환영과 끝까지 간다면 일단 이 환영이 나타나는 망상은 깨지지 않을까. 다 내 잘못이야. 세상은 잘못한 거 없어. 모두가 다 정상이고 나 혼자 미쳐있는 거야.


 "나 있지, 오늘 세상 사람들에게 진리를 널리 전파할 거야. 나 벌써 흥분되는데 어쩌지?"

 "해 봐."

 "어머! 너 이제 나 지지해주는 거야?"

 "뭐 해 봐. 어디까지 할 수 있나."


 아다비아는 쿠룬나스가 되어버렸다. 감비르는 어디까지 막 나갈 수 있을까. 이놈은 이놈대로 또 자신만의 끝을 향해 달리고 있는 거겠지. 그 끝이 어떤 모습일지 모르겠다. 뭐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스스로 아랫도리를 잘라버리든, 되도 않는 소리를 믿는 사람들을 하나 둘 늘려서 자신의 세력을 만들든. 될 대로 되라지. 이 미친 새끼 헛소리, 대체 어디까지 발전하나 한 번 들어보기라도 해보자. 이거 라키사가 바라던 거 아닌가?


 감비르가 옆에서 계속 뭐라고 씨부려댄다. 너 놀리고 싶은 대로 주둥이 나불거려라. 어차피 나한테는 와닿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아. 네가 만들어내는 소리들 모두가 귓구멍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내 육신의 표면을 따라 생긴 알 수 없는 벽을 타고 내 너머로 흘러넘어간다. 알아서 하겠지. 어디까지 하나 한 번 보자. 아다비아는 쿠룬나스, 너는 대체 끝이 뭘까.


 "나, 오늘 여기에서 1인 시위할 거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지켜봐줄 거야. 내 말을 듣고 사람들이 깨우칠 거 생각하니 벌써 너무 뿌듯해! 이렇게 세상은 오늘 진정한 진리와 자유를 향해 한 발짝 더 나아갈 거야!"


 감비르가 헝겊을 푸르고 뭔가 적힌 팻말을 집어들었다.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남성과 여성이라 구분짓는 것도 편견에 가득찬 차별! 우리 모두 하나가 되어요!' 뭔 개소리야?


 멀찍이 떨어져서 감비르가 대체 뭔 헛소리를 지껄이나 구경한다. 사람들이 지나가며 자기를 바라볼 때마다 춤추고 노래부르고 말도 안 되는 소리치며 난리도 아니다. 자기 치마도 들추어 보여주지를 않나, 팻말을 내려놓고 헝겊을 집어넣어 만든 가슴을 뽐내지를 않나 아주 가관이다. 그러면서 계속 외친다. 우리 같이 편견에 가득찬 차별을 뛰어넘어요! 저는 여성이자 남성이에요! 이분법적인 편견에서 우리 함께 벗어나요! 지정성별이 있다는 것 자체가 차별이에요! 우리 모두 연대해요! 우리 모두 모든 인간을 사랑해봐요! 다양성은 더욱 다양해질수록 빛나는 법이에요! 진정한 진리와 자유만이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이에요! 우리는 이 세상 모든 것과 똑같아요! 남자와 여자는 사회적 고정관념에 불과해요! 자기결정권을 존중해주세요! 물어보는 것도 폭력이에요! 하지만 진정한 진리와 자유를 알아주시기 바래요!


 대체 뭐라는 거야? 저렇게 살고 싶을까. 그래, 좋게 생각하자. 아다비아는 살아야 한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만 한다. 쿠룬나스? 몰라. 나한테 중요한 것은 아다비아의 활짝 웃는 모습이다. 분명히 그렇게 다시 웃게 될 거다. 내가 이 환상에서 벗어난다면 아다비아는 거기에서 웃고 있을 거다. 그리고 내 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툭 치면서 '너 또 졸았지?'라고 이야기하겠지.


 감비르는 아주 혼자 춤추고 꼴깝떨고 잘 하고 있다. 이 추운 날에 저 짓거리를 하고 있는 감비르는 대체 뭐고, 그것을 이렇게 멀찍이서 구경하고 있는 나는 뭘까? 괜찮아. 이건 다 내 망상 속 세계일테니까. 저 새끼 저러다 어디까지 가나 한 번 보자. 그렇게 끝을 보면 감비르에 대한 내 망상은 끝날 거다. 그렇게 망상을 하나씩 끝내가야지. 뭐가 진짜든 상관없어. 다 내 망상 속의 환상이잖아? 어차피 모든 것이 거짓일텐데.


 경찰 두 명이 감비르에게 다가갔다.


 "지금 뭐하시는 거에요?"

 "저는 진리를 알리고 있어요."


 경찰 둘은 어이없다는 듯 서로를 쳐다봤다. 감비르는 그 둘에게 윙크를 날렸다.


 "대체 진리가 뭐길래 여기에서 난동이에요?"

 "편견에 가득찬 차별을 깨는 게 난리에요. 설마 제 미모를 탐하시는 거 아니죠? 저 지금 성적 수치심 느꼈어요!"

 "당신 남자 맞죠?"

 "아니요! 저는 여자이자 남자에요!"

 "뭐라는 거에요?"

 "그런 질문 자체가 편견에 가득찬 차별! 지금 저를 성적으로 희롱하려고 오신 거죠?"

 "아, 됐구요, 이제 댁으로 돌아가세요. 가뜩이나 세상도 흉흉한데..."


 그래도 저 경찰들은 참 착하네. 감비르에게 최대한 공손하게 이제 그만하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부탁한다. 그래도 인내심이 참 강한 분들이시구나. 그동안 별별 일을 다 겪으셨으니 저 정도에는 버티실 수 있는 것이신가?


 "어머? 저에게는 제 뜻을 널리 알릴 자유가 있거든요?"

 "그런 자유는 댁에서 혼자 열심히 탐닉하시구요. 어서 돌아가요. 가뜩이나 요즘 미친놈들 많이 날뛰는데..."

 "누가 누구보고 지금 미쳤다는 거에요? 당신들은 지금 나를 성적으로 희롱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저보고 미쳤다고 하는 거군요! 그거야말로 엄청난 차별이자 혐오 범죄 아닌가요?"

 "하아...이거 안 되겠네."


 경찰이 감비르의 턱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감비르는 주먹을 그대로 맞고 휘청거렸다. 그때에 맞추어서 다른 경찰이 몽둥이를 꺼내 무릎 뒷편 윗부분을 세게 때렸다. 감비르가 풀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발로 감비르의 면상을 걷어찼다. 감비르가 얼굴을 감싸고 쓰러졌다. 경찰들은 몽둥이로 때리고 발로 짓밟아대기 시작했다. 꼴 좋다. 잘못을 했으니 벌을 받아야지. 저것이 감비르의 끝인가.


 "미친 새끼가 말로 할 때 처들을 것이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찰들이 얼마나 두들겨팰 지는 모르겠다. 많이 때리기는 할 거다. 자기를 배려해주는 사람보고 망언에 폭언을 날려대었으니 인과응보다. 저 새끼 저렇게 두들겨맞고 제발 정신 좀 차렸으면 좋겠다. 성적 희롱? 네가 불특정 다수를 향해 성적 희롱을 했지. 아까 네가 너 스스로 치마 들추고 헝겊으로 만든 가슴 뽐내고 할 때 사람들이 얼마나 민망해하며 지나갔는지 알아? 저놈 머리 속에는 '희롱한다'는 개념이 주체와 객체가 뒤바뀌어 있나보다. 여자이자 남자 좋아하네. 그런데 이런 것조차 내 망상이 만들어낸 환상일까?


 서점이 보인다. 서점 문 옆 벽에 검은 코트를 입고 있는 여자가 기대어 서 있다. 켈라자야다. 켈라자야 옆으로 가서 담배를 물었다. 켈라자야가 말 없이 불을 붙여주었다.


 "너 그 병신 쓰레기랑 어디 갔었어?"

 "아...내성 남문."

 "거기 왜?"

 "그놈이 무슨 1인 시위인가? 그거 한다고 끌고 갔어."

 "그래서 따라간 거야?"

 "응."


 켈라자야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노려보았다. 괜찮아. 다 내 망상 속 환영인걸. 시위까지 내 망상이라면 켈라자야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애인가? 담배 꽁초를 바닥에 버리고 발로 비벼서 불을 껐다. 이제 들어가야지. 순간 켈라자야가 한 손으로 내 목을 움켜쥐었다.


 모든 것이 흔들린다. 내 머리카락 끝부터 발끝까지. 내 피부부터 내 뼛속까지. 모든 것이 무섭게 요동친다. 내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정신없이 부들부들 떤다. 혈관이, 혈관 속에 흐르는 핏방울들이 무섭게 진동하고 심장이 터져버릴 거 같다. 뭐야.


 "정신차려!"


 켈라자야가 내 목을 놔주었다. 방금 뭐지? 내 몸을 이루는 모든 것이 미친듯이 흔들리고 진동하는 끔찍한 기분. 그러나 변한 건 아무 것도 없어. 응, 이것이 현실이야. 내가 미친 것도 아니고, 망상도, 환상도 아니고, 환영 따위도 아니야. 이 모든 것이 진짜이고 실제이자 진실이다. 정신이 하나도 없지만 이 모든 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사실만큼만은 확실히 머리 속에 자리잡았다. 다 진짜야.


 "너 이러면 죽어! 제발 정신차려!"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진다. 벽에 기대었다.


 "아다비아는 내 친구야. 안 죽여. 그러니까 너 이제 제발 정신차리라구!"

 "어..."

 "죽지 마. 나도 네가 좋아. 그러니까 이러지 마."


 뭘까. 얘는 뜬금없이 뭔 소리야.


 "우리 들어가자. 너 항상 밖에 오래 있으면 감기 걸린다고 잔소리했잖아."


 켈라자야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맞다. 내가 정신을 차려야 한다. 어차피 모든 건 안 바뀌어. 나부터 정신을 차려야 아다비아를 어떻게든 도울 수 있을 거다. 이렇게 있으면 그저 계속 나빠질 뿐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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