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기적과 저주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2장 20화

좀좀이 2017. 10. 29.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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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2장 20화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알고 있었지만 혹시나 하고 기대를 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모두가 예상했던대로였다. 좋아진 것이 아무 것도 없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거다. 그래도 너무 아쉽다. 그래도 연말에는 단 하루만이라도 즐거운 일이 있지 않까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애초에 가능성이 없는 일이었다. 보기 좋게 그 기대는 헛된 것이었음이 밝혀졌다.


 "불꽃놀이 없는 연말이라니..."


 이고가 한숨을 내쉬며 바닥만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살해당하는 일이 자꾸 발생하다보니 정부에서 연말의 불꽃놀이를 금지시켰다. 이해는 한다. 불꽃놀이가 발생하는 동안 어떤 미친놈이 무슨 짓을 벌여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일지 모르니까. 이제는 길거리의 모든 것이 위험하잖아. 이 서점 밖은 단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위험한 공간. 어디에서 무엇이 폭발할지 모른다. 어떤 식으로 사람을 죽일지 이제는 예상조차 불가능하다. 사람도 폭발하고, 동물도 폭발한다. 며칠 전에는 그 망할 국수를 50마르라에 팔던 가게 앞에서 개가 폭발하면서 한 명이 죽었다. 그 전에 며칠 전에는 고양이가 폭발해다고 했지. 아주 다 폭발해버려라.


 에드자의 연말 불꽃놀이는 정말 굉장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에드자로 올라올 때 그 불꽃놀이를 볼 수 있을 거라 기대를 많이 했다. 이고에게 에드자의 연말 불꽃놀이가 진짜 굉장하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이고가 그것만큼은 정말 굉장하다고 했다. 마딜인들이 다른 나라 가서 우리나라의 굉장한 것이라 소개할 만한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남아드라스 공화국에서 넘어온 이고가 그렇게 이야기할 정도라니 더더욱 기대되었다. 올해 연말에는 그 멋진 불꽃놀이를 보며 고향에서 탈출하고 맞이하는 연말을 멋지게 기념할 거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 꿈은 다 날아갔다. 오히려 사상 최악의 연말이 되어버렸다. 즐거움은 아무 것도 없고 공포와 긴장만이 지배하는 연말. 거기에 그 멋지다는 불꽃놀이도 없다.


 정부에서 불꽃놀이를 금지한 이유는 아주 타당한 이유였다. 어떤 사고가 발생할지 모른다는 것이었으니까. 그 깜깜한 어둠 속에 사람들이 모두 거리로 나와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순간은 지금 이 상황에서 정말 위험할 거다. 순식간에 많은 사람을 죽이기 딱 좋겠지. 어두워서 잘 보이는 것도 없을 거구. 쿠룬나스들은 만찬이 차려졌다고 신나할 수도 있겠다. 경찰과 군인들이 도처에 깔려 있다지만 그들이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겠지. 나만 이렇게 불꽃놀이를 기대하는 것이 아닐 테니까. 하지만 그래도...에드자에서 맞이하는 첫 번째 연말을 이따위로 보내야하다니! 라키사의 표정도 어둡다. 라키사도 에드자의 불꽃놀이를 많이 보고 싶어했다. 라키사도 올해 에드자로 왔으니까. 고향에서 나처럼 여기의 연말 불꽃놀이가 굉장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했다. 라키사는 나와 심정이 거의 비슷할 거다. 에드자로 오면서 이제 더 멋진 미래가 펼쳐질 거라 기대했는데 현실은 저주받은 시간이니까.


 켈라자야는 멀뚱멀뚱 나와 라키사, 이고의 얼굴을 바라본다. 켈라자야는 에드자의 연말 불꽃놀이가 얼마나 굉장한 것인지 들어본 적이 없나보다. 얘는 우리랑 뭔가 확실히 다른 애니까 그러려니 한다. 어렸을 적 당연히 겪어야할 것을 못 겪어본 애 같달까? 예전에 남들이 자기를 미워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이야기했었지. 포크가 있는데도 맛있어보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맨손으로 마구 집어서 입안에 우겨넣기도 했고. 켈라자야가 지금 이 분위기를 전혀 이해 못하는 것이 이해될 것 같다.


 "내일 불꽃놀이 하지 않는 것이 그렇게 나쁜 거야?"

 "응. 정말 나쁜 소식이야."

 "왜?"

 "에드자의 연말 불꽃놀이는 정말 굉장하다고 하거든. 꼭 보고 싶었는데..."


 켈라자야는 그게 뭐 대수냐는 듯 말했다.


 "우리끼리 하면 안 돼?"


 켈라자야가 내게 던진 질문에 바로 이고가 대답했다.


 "안 돼. 내일 절대 불꽃놀이 하지 말래."

 "누가 그랬어요?"

 "정부에서. 곳곳에 벽보가 붙었어."

 "몰래 하면 정부에서 잡아가요?"

 "응. 어쩌면 그 자리에서 죽일 수도 있어."


 켈라자야는 말없이 나와 라키사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니 얘 내일은 어떻게 하지? 내일은 서점 문 아예 닫을 건데. 물론 서점 안에 내가 있기야 하겠지만. 설마 내일 하루 종일 켈라자야와 서점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나?


 "오빠, 내일 서점 문 안 열죠?"

 "응."

 "나 그러면 내일 여기 안 올래요."

 "어디 갈 곳 있어?"

 "예."

 "어디?"

 "에드자요."


 켈라자야가 이고의 질문에 대답한 것을 듣고 피식 웃었다. 여기는 그러면 에드자 아니야? 에드자의 어디냐고 물어보는 거잖아. 얘가 밤마다 대체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그것은 이고도 모르는 것 같다. 물어봐도 '에드자에 있어'라고 대답할 뿐이다. 그 이상을 이야기해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이고에게도 그러는 모양인 것 같았다. 혼자 어떤 연말을 보낼지 모르겠지만 알아서 잘 보내겠지. 내일은 켈라자야가 서점에 오지 않는다고 걱정할 필요 없겠다.


 "라키사, 너는 내일 뭐 할 거야?"

 "내일은 집에 있을 생각이야. 괜히 돌아다녀봐야 위험하잖아."


 라키사도 내일 서점에 안 오겠구나. 그래, 쓸 데 없이 돌아다니는 것보다야 집 안에 얌전히 있는 것이 훨씬 낫다. 내일은 여기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들에게 아주 좋은 기회일테니까. 나라도 내일이 사람 많이 죽이기 좋은 날이라고 생각하고 뭔가 큰 일을 저지를 궁리를 할 텐데, 그놈들은 더하겠지.


 "이고, 너는 내일 루즈카 집에 가?"

 "응. 오전에 블랑쉬블르 집에 들려서 인사하고 루즈카 집에 가야지. 애인인데 당연히 연말은 같이 보내야할 거 아냐."

 "하긴, 내일 루즈카를 혼자 놔두었다는 루즈카가 바로 너 차버리겠지."

 "뭔 소리야?"

 "맞는 말이잖아. 루즈카가 너랑 사귀어주시는 거잖아."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이고가 당황해하며 소리쳤다. 내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잖아? 루즈카처럼 대단한 여자가 너와 사귀어주는 것이 기적이지. 라키사도 이고를 보며 웃었다.


 "타슈갈 말이 맞아. 이건 너 편 못 들어주겠어"

 "아니라니까!"

 "그러면 루즈카가 너한테 매달리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뭘 사귀어주신다는 거야? 둘이 좋으니까 사귀는 거지."

 "아니야. 이것은 루즈카가 너를 불쌍히 여겨서 사귀어주시는 거야."


 이고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럴 거면 너네는 왜 안 사귀냐? 확 사귀어버려! 둘이 아주 잘 놀잖아!"

 "우리가 뭐! 많이 친한 거 가지고 왜?"

 "너희 사귀면 내가 불꽃 터뜨려줄까?"

 "그런 거 아니야!"


 라키사가 소리쳤다. 라키사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나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라키사랑 사귀기는 뭘 사귀어. 지금 나 살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당장 우리 넷이 내일 이 시각 다 살아있을 거라는 보장도 없다. 연애는 무슨...라키사랑 제대로 같이 단 둘이 식사를 해본 적도 없다구. 그날 내가 사준 머리띠는 아마 버려버렸겠지? 그 머리띠를 하고 온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나라도 그 머리띠는 꼴도 보기 싫을 거다. 내가 줘서 싫은 것이 아니라 그 머리띠를 볼 때마다 그날, 그 사건이 뚜렷하게 떠오를 것 같아서 말이다. 처음 라키사에게 준 선물이 저주받아버리다니...


 켈라자야는 남자와 여자가 사귄다는 것을 제대로 알기는 하고 말하는 걸까? 다른 사람들이라면 이런 생각 자체를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켈라자야는 모르겠다. 미움만 받았다고 하니 서로 좋아하고 사귀고 싶어하는 마음 자체를 이해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사귄다는 것이 남자와 여자가 손잡고 다니는 행위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있는 거 아닐까? 그래도 그건 아닐 거야. 켈라자야는 이고를 무지 좋아하잖아. '좋아한다'는 감정 자체가 없는 애는 아니니까 사귄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라도 짐작은 하고 있을 거다. 그 좋아한다는 것과 사귄다는 것의 의미가 어떻게 다른지 느끼고 확실히 구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내일은 나 혼자 하루 종일 있어야 한다. 모두가 행복하고 즐거워야할 연말에, 여럿과 어울리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야하는 연말에 이 서점에서 나 혼자 하루 종일 보내야 한다니 비참하다. 작년 집에서 연말을 보낼 때에는 정말 좋았다. 에드자로 떠난다고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많이 만들어주었다. 친구들도 집으로 찾아와서 재미있게 시간을 보냈다. 집 안에는 맛있는 음식 냄새와 온기가 가득했다. 그게 바로 불과 1년 전의 일이다. 그 1년 전 그날이 이렇게 그리워질 줄이야. 손을 내뻗어 그 순간만 다시 집어오고 싶다. 내일은 혼자 최악의 연말을 보내야 하잖아. 이렇게 암울한 연말은 내 인생 최초다.



 서점 문이 열리고 손님이 하나 들어왔다. 저 사람 게첸 아니야? 그때 감비르에게 매우 호감을 보였던 그 사람! 그 후로 몇 번 얼핏 보기는 했다. 당연히 아는 체 하지 않았다. 그때 처음 본 순간부터 절대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감비르의 그 미친 말도 되지 않는 소리보고 멋지다고 하는 놈이라면 제정신일 리가 없지. 그런데 저 인간이 서점에는 왜 온 거야?


 게첸은 서점에 들어오더니 서점을 천천히 돌아다니며 책을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중앙학문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면서? 거기에 좋은 책 훨씬 더 많을 텐데 여기는 뭣하러 왔어? 시위가 발생한 이후 서점에 새로 들어온 책은 단 한 권도 없다. 여기 있는 책은 중앙학문연구소에도 다 있겠지. 책을 뽑아서 몇 페이지 넘겨보고 집어넣는 짓을 반복한다. 그렇게 책을 대충 훑어보다 내게 다가왔다.


 "내일이 연말이네요."

 "예."

 "내일 뭐하세요?"

 "서점 닫고 쉬어요."


 이 인간은 왜 나한테 그런 걸 물어보고 있어? 연말인데 당연히 가게 닫고 쉬어야지. 12월 31일과 1월 1일에는 모두가 쉬는 거 몰라? 심지어 단 하루도 쉬지 않는 빵집조차 이 이틀만은 쉰다고. 바보냐? 내일 당연히 놀지, 뭐하긴 뭐해?


 "그러면 감비르씨와 함께 식사하지 않겠어요?"


 돌겠네. 아무리 내가 내일 혼자 울적하게 서점에서 12월 31일을 보낸다 해도 너와 감비르와 식사를 같이 하는 것보다는 행복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둘이 무슨 대화를 나누고, 내게 무슨 이야기를 할 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찔하다. 저건 감비르에게 무슨 말을 들었길래 나한테 와서 같이 식사를 하자고 하는 거야? 미친 소리 지껄일 거라면 너네 둘이서 해! 멀쩡한 나를 끼워넣으려 하지 말구.


 "싫어요."

 "아쉽네요. 유익하고 좋은 시간이 될 텐데요."

 "그건 당신한테나 유익하고 좋은 시간이구요."


 그저께 감비르가 내게 찾아왔었다. 서점에 들어오자마자 이고는 인상을 찌푸렸고, 라키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감비르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켈라자야는 그때 자고 있었다. 바로 서점 밖으로 끌고나갔다. 찻집으로 데려가 자리에 앉혔다. 감비르는 게첸과 같이 식사를 하지 않겠냐고 물어봤다. 바로 싫다고 거절했다. 왜 싫냐고 물어보자 싫기 때문에 싫다고 대답했다. 가만히 있어도 돌아버릴 거 같은데 그딴 쓰레기만도 못한 헛소리 대잔치를 들으라구? 감비르는 게첸이 깨어있는 사람이지만 갇혀 있는 상태라고 이야기했다. 그렇든 말든 나는 그 사람과 친하게 지낼 생각 전혀 없다고 말했다. 깨어 있든 잠들어 있든 내 알 바 아니다. 아니지, 헛소리를 해대며 나를 더 환장하게 만들 거라면 차라리 잠들어 있는 게 낫겠네. 그때 한 번 본 것 뿐이지만 그 인간이 어떤 인간일지는 감이 온다. 아마 감비르만큼 미쳤을 거다.


 "안타깝네요. 진정한 자유로 가는 방법에 대한 심도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인데요."

 "그런 자유는 댁이나 실컷 찾으시구요."


 라키사가 놀라서 나를 바라보았다. 라키사에게 게첸 이야기는 안 했었지! 뜬금없이 왠 땅딸막하고 뚱뚱한 사람이 찾아와서 나한테 식사를 같이 하자고 하고, 내가 대놓고 아주 싫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 자체가 놀라울 거다. 이 인간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딱 봐도 아주 비싼 옷에 비싼 팔찌를 두르고 향수도 엄청 뿌렸다. 내 반응에 세상의 고통은 다 자기 혼자 짊어진 것 같다는 저 우그러진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


 "저는 외국을 가본 적이 있어요. 그래서 자유가 뭔지 잘 알아요. 여기는 자유가 없어요."

 "예, 그래서요?"

 "자유란 너무나 황홀한 거에요."

 "예. 알겠으니 감비르와 둘이 실컷 떠드세요. 저는 관심 하나도 없으니까요."

 "감비르와 저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남아드라스 공화국은 그것보다 훨씬 더 한 것도 정상이니까요."


 이고 표정을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어떤 얼굴일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기가 차겠지. 이건 또 뭔 개소리인가 싶을 거다. 나한테 이런 소리를 하는 것 자체도 솔직히 웃긴 이야기다. 내 육체만큼은 아드라스인이니까. 그래, 감비르에게 내 이야기를 들어서 내가 육체만 아드라스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 그렇지만 이고는 진짜로 남아드라스 공화국 사람이다. 거기에서 살다가 여기로 넘어왔다. 그런 이고가 앞에 있는데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지껄인다.


 "남아드라스 공화국에 좀 있어봤나봐요?"

 "한 달 있었었어요. 일 때문에 다녀왔었죠."

 "아, 그러세요? 참 많이 아시겠어요."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어요. 거기 사람들은 너무나 자유롭더라구요. 진리를 추구하는 자세도 멋있었구요."


 더 이야기를 나누기도 짜증난다.


 "그 꼬라지가 그렇게 좋으면 따라서 하시든가요. 아저씨도 치마 입고 화장 떡칠하고 여자 흉내내지 그러세요?"

 "저는 제 일 때문에 그럴 수 없어요. 그래서 감비르씨를 응원해요."


 말 같지도 않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그리 좋으면 너도 감비르처럼 하고 둘이 사이좋게 손잡고 거리 활개하고 다니든가. 이새끼 자기는 못한다고 하면서 뭔 얼어죽을 응원이야?


 "세상은 더 다양해질 필요가 있어요. 타슈갈씨도 같이 동참했으면 좋겠는데..."

 "내가 그런 미친짓을 왜 해요? 헛소리할 거면 당장 나가세요!"

 "앞으로 종종 오죠. 여기 흥미로운 곳이네요."


 게첸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나갔다. 감비르 이놈은 나에 대해 뭐라고 지껄였길래 저놈이 여기 찾아와서 망발을 늘어놓고 가는 거야?


 "타슈갈."

 "왜?"

 "저새끼 내가 죽일 거야."

 "너는 또 무슨 헛소리야!"


 켈라자야가 나를 부르더니 다짜고짜 게첸을 죽이겠다고 말했다. 얘는 또 왜 이때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어? 켈라자야는 계속 게첸이 나가고 닫힌 문을 노려보고 있다.


 "저새끼 진짜 나쁜 새끼야. 제일 나쁜 새끼야. 반드시 죽여버릴 거야."

 "야, 너까지 왜 그래! 죽이기는 왜 죽여!"

 "제일 악질인 새끼니까. 저건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인다."

 "악질이고 나발이고 네가 왜 사람을 죽이냐구!"

 "나쁜 새끼는 죽어야 하니까."

 "그러니까 네가 왜 살인을 저지르냔 말야! 그냥 평범하게, 행복하게 좀 살아!"


 켈라자야가 내 두 눈동자와 자신의 두 눈동자를 똑바로 맞추었다.


 "평범하고 행복하게?"

 "그래!"

 "내가?"

 "그러면 누구? 내가 너한테 말하고 있지, 누구한테 말하고 있냐?"

 "그러니까 나? 내가 평범하고 행복하게?"


 켈라자야는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물어보았다.


 "그래! 몇 번을 말해야 알아먹을래! 너, 바로 너! 좀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라구!"


 켈라자야에게 소리쳤다. 켈라자야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건 또 무슨 반응이야? 평소에 이랬으면 성질 버럭버럭 내던 애가 갑자기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풀이 죽은 것 같다.


 "이고, 진짜 남아드라스 공화국에서는 남자가 막 여장하고 여자 흉내내는 게 정상이야?"

 "뭔 개소리야?"

 "아까 저새끼가 그랬잖아. 감비르도 그렇고!"

 "미쳤냐? 내 말 안 믿기면 블랑쉬블르한테 물어봐! 그게 정상인가. 여기니까 그러고 돌아다니는 거지. 남아드라스 공화국이었으면 벌써 저주술사라고 불싸질러 죽여버렸어!"

 "그런데 왜 저 새끼고 감비르고 다 그래!"

 "나라고 아냐? 저새끼 한달은 무슨 한달이야? 머리 속 망상이 한달이었을 거다."


 이고도 짜증이 상당히 많이 났나보다. 모르겠다. 나가서 담배나 태워야겠다. 서점 밖으로 나왔다. 켈라자야가 안 따라나온다. 담배를 입에 물고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응원은 무슨 응원이야? 뚫린 게 주둥이라고...지가 그 꼴로 하고 다니든가."


 연기를 힘껏 쭉 빨아마셨다가 내뱉었다. 다음번에 감비르가 오면 몽둥이로 때려서 쫓아내야하나? 나에 대해 무슨 소리를 했길래 저 밥맛 떨어지는 새끼가 와서 나한테 지랄 헛소리야? 미쳐버리겠다.


 "타슈갈, 화 많이 났어?"

 "어? 아니."


 라키사가 문을 열고 나오며 내게 화가 많이 났냐고 물어봤다. 이게 화가 난 건지 짜증이 난 건지 모르겠다. 하여간 기분은 무지 나쁘다. 그렇지만 대놓고 라키사에게 기분나쁘다고 이야기할 수도 없잖아.


 "너는 아까 그 사람을 왜 그렇게 미워해?"

 "저 사람도 정신 이상한 사람이야."

 "남아드라스 공화국을 아는 척하는 것은 나도 별로였어. 그렇지만 그거 말고는 그렇게 반응할 정도는 아니지 않았어?"


 라키사는 또 왜 이래? 아, 라키사는 감비르가 어떤지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지? 가슴에 헝겊 뭉치를 대고 천으로 둘러서 여성의 몸을 익혀가고 있다는 감비르의 행동은 그때 차마 말하지 못했다. 이고와 켈라자야도 그때 감비르를 보고 단지 여자 흉내를 조금 더 잘 내고 싶어서 그런 줄 알겠지. 그런데 아니야. 그 새끼, 그때 진짜로 그런 행동을 통해 여성을 완벽히 이해한다고 믿고 있었다구. 이건 전혀 과장이 아니다. 내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그 자식이 자기 입으로 한 소리니까.


 "감비르나 저 사람이나 다 미쳤다구."

 "그냥 생각이 좀 다른 거 아니야?"

 "라키사, 감비르가 너한테 뭐라고 말했는지 몰라. 그런데 감비르 진짜 미쳤어. 저 사람은 그런 감비르가 훌륭하대."

 "서로 생각이 일치한 거 아니야? 너와는 생각이 다르고."


 얘는 왜 감비르를 자꾸 감싸려고 하는 거야? 진짜 그 새끼 미쳤다니까? 진짜 그 동물 이야기와 가슴 이야기를 직접 들어야 확 와닿을 건가? 그런데 그건 나도 차마 입으로 말하지 못하겠다. 그게 정상이야? 그 누구도 그 이야기를 들으면 내가 험담하기 위해 없는 이야기 지어낸 줄 알겠지. 아니라구, 그거 진짜라구!


 "진짜 아니야. 정말로 미쳤다구. 왜 내 말은 안 믿으려고 해?"

 "네가 생각이 조금 많이 다른 것 갖고 너무 과격하게 구는 것 같아서. 우리 모두 친구잖아. 친구끼리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어. 특히 지금은."


 소리를 지르려다 꾹 참았다. 지금 라키사와 이 이야기로 계속 이야기하다가는 엉뚱한 라키사에게 화를 내버릴 것 같다. 그래, 네 말이 맞다고 치자. 나랑 생각이 완전 달라. 빛과 어둠처럼, 물과 불처럼 아예 같은 구석 하나 없어. 좋다구, 그런 거. 그런데 그걸 왜 자꾸 나한테 강요하려고 드는데? 왜 나한테 자꾸 자기의 '투쟁'에 동참하라고 하냔 말이야. 그렇게 좋은 거면 둘이 손잡고 실컷 그 잘난 투쟁하라고 하라구! 나한테 자꾸 권유하지 말고.


 "타슈갈. 감비르가 겉보기에 매우 이상한 거 알아. 하지만 그게 잘못은 아니잖아. 나는 우리 모두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어."


 라키사가 내 손을 잡았다. 이 손을 확 뿌리칠 수도 없구. 내가 감비르 같은 애가 사귀자고 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봤을 때 라키사가 발끈하며 절대 싫다고 한 것이 떠오른다. 라키사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지금 감비르가 자꾸 진정한 진리와 자유 타령하며 내게 저주술을 같이 수련하고 '투쟁'을 하자는 것에 상당히 짜증난다. 그 되도 않는 여장에 여자 흉내는 역겹고. 하지만 단순히 그래서는 아니다. 누구나 다 안다. 그러고 다니면 모두가 감비르를 멀리 할 거다. 앞에서는 박수를 쳐주는 놈들도 있겠지. 라키사, 너처럼 말이야. 하지만 뒤에서는 다 거리를 아주 멀리 둘 거다. 슬금슬금 피하겠지. 이게 진짜 힘들다. 감비르를 향해 다가가라고? 아니, 무조건 내가 있는 쪽으로 잡아끌고 와야만 한다. 혼자 착각에 빠져 웃다 죽는 것이 진짜 행복한 죽음인지는 몰라. 그런 깊은 생각까지는 안 해봤어. 하지만 그런 결과를 아는데 다른 사람들처럼 적당히 박수나 쳐주며 슬금슬금 피하는 것이 진짜 친구일까? 그런데 그러면 감비르는 나를 적이라고 여기겠지. 똑같이 하고 다닐 거 아니라면 박수쳐주지 마!


 "들어가자. 춥다."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서점 문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라키사가 내 손을 놓았다.



 서점 문을 닫을 시간이 되었다. 켈라자야는 오늘도 밤거리로 걸어나갔다. 이고와 서점 문을 닫는데 누군가 서점쪽으로 달려왔다.


 "타슈갈!"

 "바하르!"


 진짜 오랜만이다. 이놈, 얼마만에 보는 거야?


 "잘 지냈어?"

 "살아있잖아."


 바하르의 대답이 명언이다. 그래, 살아있으면 된 거야. 지금 이 상황에서 무엇을 더 바래. 맨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해당하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살았으면 된 거야.


 "나 간다!"

 "뭐?"

 "새해 인사 미리 하려고 급히 온 거야. 다시 일하러 가야해."

 "무슨 일?"

 "순찰. 그래도 내일까지만 야간 뛰고 새해부터 주간이야!"

 "진짜 잘 되었다!"

 "새해 복 많이 받아!"

 "너도!"


 바하르가 왔던 길로 다시 달려갔다. 바하르는 좋은 일이 하나 생겼다. 드디어 야간 순찰에서 벗어난다. 동원령 자체가 해제된 것은 아니니 이제 주간 순찰이나 경비를 서겠지만, 밤보다는 훨씬 나을 거다. 야간 순찰 때문에 일상 전체가 엉망이라고 했었지. 게다가 밤에 사고가 많이 일어난다. 밤이 훨씬 위험하다. 이것은 단순히 근무 시간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비록 같은 공간이지만 위험이 훨씬 줄어든 환경에서 근무하게 된다는 거다. 좋아진 것은 맞은데, 생각해보면 웃기다. 동원령이 발동된 상태 자체가 문제잖아. 바하르는 빼앗겼던 것 중 일부를 돌려받은 것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축하해주어야 하다니.


 '이제 자고 일어나면 내 인생 최악의 12월 31일을 경험하겠네.'


 두 눈을 감았다. 차라리 1월 1일에 일어났으면 좋겠다.



 계단 위에 세 여자가 서 있다. 얼굴은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는다. 아주 멀리 저 위에서 세 여자가 올라오라고 한다. 올라오라고 말하는 목소리도 들리지 않고, 나를 향해 손짓을 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그 여자들을 향해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아무 이유없다. 그 계단을 올라가서 그녀들에게 가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어떤 것도 알려주지 않았는데 알고 있다. 저 위로 올라가야 한다.


 계단을 올라간다. 이 끝없는 계단. 올라가야 한다. 올라가야 하니까 올라가는 거다. 한 걸음 한 걸음 계단 위로 발을 올린다. 얼마나 계단을 올라갔을까? 뒤돌아보았다. 저 아래에서부터 많이 올라왔구나. 여전히 세 여자의 얼굴이 뚜렷히 보이지 않는다. 올라가야지. 저 여자들이 있는 곳까지 가야하잖아. 또 한참 계단을 올라갔다. 세 여자는 내게 계속 올라오라고 한다.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데 안다. 저 여자들은 나를 부르고 있어.


 계단을 올라갈 수록 두 여자는 나와 조금씩 가까워진다. 한 여자는 내가 계단 한 칸을 올라갈 때마다 한 칸씩 멀어진다. 그런데 지금 나는 세 여자 중 누구를 향해 걸어올라가고 있는 걸까? 나 지금 왜 올라가는 거야? 세 여자 중 누구를 향해서 가고 있는 거지?



 잠에서 깼다. 희안한 꿈이다. 전에도 이거랑 비슷한 꿈을 꾼 적이 있는 거 같은데. 그 계단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건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다. 이고는 아침 일찍 블랑쉬블르와 루즈카를 보러 나갔구나. 다시 자리에 드러누웠다. 내 숨소리만 들린다. 내가 코로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쉬는 소리가 나를 다시 잠재운다. 암흑 속으로 나는 다시 녹아들어간다.


 "일어나야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로에 불을 지폈다. 12월 31일. 올해 - 1115년의 마지막 날이다. 우울하다. 오늘 하루 종일 이렇게 보내야 하다니. 담배를 태우러 서점 밖으로 나갔다. 아무도 없다. 멀쩡한 상황이었다면 지금 사람들이 길거리에 북적였겠지. 행복해하며 웃고 있었을 거다. 만약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라키사와 둘이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을까? 아니면 켈라자야까지 셋이 거리를 돌아다니며 깔깔 웃고 있었을까? 아다비아까지, 바하르까지, 치롤라까지 여섯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구경하며 행복하고 신나는 분위기를 마음껏 누리고 있었을까? 감비르 그놈은...상황이 이렇게 나빠지기 이전에 변해버렸으니 차마 끼워주지 못하겠다. 그렇게 거리를 돌아다니다 이고와 루즈카를 만났겠지? 그리고 그때 블랑쉬블르가 나타나 이고를 놀리는 거야. 루즈카는 우리 오빠에게 그러지 말라고 이고 편을 들어주고. 블랑쉬블르는 혼자서도 신나게 잘 노니까 거리를 홀로 쏘다닐 거다.


 그러나 지금 거리에는 아무도 없다. 멀리 경찰만 보일 뿐이다. 서점 안에도 아무도 없다. 이렇게 조용한 12월 31일이라니. 나 홀로 보내는 12월 31일이라니! 담배를 끄고 안으로 들어왔다. 할 것이 없다. 거리를 돌아다녀봐야 볼 것도 없겠지. 사람들은 없고 위험하기만 할 거다. 할 것이 뭐 없나? 책장에 꽂힌 책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저주술 책을 펼쳤다. 아다비아가 저주술 책을 매우 싫어했지. 나도 정말로 싫어하구. 마딜인 망신은 이 저주술 책들이 시킬 거야.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이 책들을 보고 얼마나 비웃겠어? 치롤라와 바하르가 이 책들을 놓고 논쟁을 벌였던 것도 기억난다. 라키사는 공부하다 너무 마딜어로 된 책이 읽고 싶다고 저주술 책을 읽었구. 켈라자야는 저주술 책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모레 켈라자야가 오면 한 번 물어볼까? 너는 이 책들 보면 무슨 생각이 드냐고. 켈라자야의 대답은 왠지 내 예상을 크게 벗어날 것 같다.


 - 눈에서 흘러나온 소리없는 검은 함성.


 검은 눈물이라고 할 것이지, 검은 함성은 뭐야? 저주술 깨우치면 눈으로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거야? 참 말 같지도 않은 것을 써놓았다. 몇 페이지를 한꺼번에 넘겼다.


 - 하늘로 비상하는 날개 잃은 새.


 우리 생각 좀 하고 삽시다. 날개 잃은 새가 무슨 수로 하늘을 나나요? 이건 아예 말도 안 되는 소리. 차라리 물 속으로 헤엄치는 날개 잃은 새라고 하지 그러냐? 그게 조금이라도 더 이해되겠다. 더 볼 것도 없겠다. 맨 마지막장을 펼쳤다. 맨 마지막장에 가장 중요한 내용이 있겠지? 기대할 것도 없지만 혹시나 해서 펼쳐보았다.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다. 뭐야? 맨 마지막장은 그냥 백지였어? 불빛에 비추어보았다. 글자가 희미하게 보인다. 가장 중요한 거라 불에 비추어봐야 보이게 써놓은 거야?


 - 나, 너, 그, 당신, 우리, 너희, 그들


 이따위 대명사를 맨 마지막에 왜 적어놓은 거야? 무슨 중요한 비밀이 적혀 있는 줄 알고 혹시나 기대했던 내가 머저리다. 이 나라, 이 땅, 이 사람들에게 뭘 기대해? 말도 안 되는 소리 써놓다가 그나마도 한계에 다다라서 맨 마지막장에 숨겨놓은 문구가 고작 대명사들이다. 이 책을 누가 썼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책 맨 마지막장을 쓸 때 자기도 알지 않았을까? 이것을 일부러 찾아보는 놈이 바보라는 것 말이야.


 잠깐, 이거 인쇄소에서 인쇄한 책이잖아. 인쇄소에서 무슨 수로 이렇게 빛에 비추어봐야만 보이도록 인쇄했지? 똑같은 책이 옆에 하나 또 있다. 옆에 있는 책 맨 마지막장을 펼쳐서 불빛에 비추어보았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 대명사는 그러면 누가 일부러 적어놓은 거라는 소리인데? 이 맨 마지막장이 텅 비어있으니 뭔가 써넣어보고 싶은데 쓸 말이 없어서 대명사만 쭉 써놨나보다. 어차피 말도 안 되는 소리들의 나열인데 되는대로 적어놓을 것이지, 머리 굴린답시고 굴린 게 대명사의 나열이구나. 한심하다. 혹시나 뭔가 대단한 것이 있을까 잠시 고민한 나도 한심하고, 이것을 써놓은 놈도 한심하다.


 방으로 들어갔다. 옷을 아무리 껴입어도 춥다. 난로 앞에서 몸을 천천히 돌리며 골고루 몸을 녹였다. 이러고 있으니 내가 구운 고기가 되어가는 것 같다. 고기 구울 때 뒤집어가며 굽는 것처럼 불을 쬐며 한쪽을 녹인 후 몸을 틀어 다른 쪽을 녹인다. 그동안 한쪽은 또 얼어서 시리다. 도저히 못 앉아있겠다. 이불 속으로 들어가야겠다. 쉬는 날이니 하루 종일 이불 속에 있어야지.


 내년이 되면 무엇이 좋아질까? 아다비아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지금보다 좋아지는 것이네. 편지에 그렇게 써서 걱정되기는 하지만 별 일 아닐 거야. 아무리 쓸 말이 없어도 그렇지, 무슨 유서처럼 편지를 써서 보내? 여기는 숨쉬는 것조차 사람 심란하게 만드는 분위기이구만. 그러나 그래야 아다비아답지. 자기 딴에는 쓸 말은 없지만 나름 성의껏 쓴다고 쓴 게 그 편지일 거다. 아다비아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안 일어날 거야. 그리고 얼마 후 내년이 찾아오면, 내년 중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오겠지. 다시 만나게 되면 확 그냥 마지막 편지 그게 뭐냐고 할까? 그 편지 받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냐고 말하면 아다비아 반응이 어떨까? 막 엄청 좋아하는 거 아냐?


 날이 풀리면 더 좋아지겠지? 미친놈들이 활개치고 다니기는 하지만 언젠가는 다 사라지겠지. 하나 둘 체포되고 처형될 거다. 쿠룬나스도 사냥당할 거구. 내년 이맘때에는 지금보다 훨씬 평화롭지 않을까? 날이 풀리면 에드자 대학교 복구 작업도 시작될 거다. 지금은 춥고 돈도 없어서 방치하고 있는 것일 거야. 언제까지 저렇게 방치해놓을 리가 없잖아. 학교는 내년 가을쯤 휴교령이 풀릴까? 봄이 찾아오고 복구 작업이 개시되면 늦어도 내후년 봄에는 휴교령이 풀릴 거다. 내후년 봄에 휴교령이 풀린다면 원래 졸업해야 할 때보다 1년 반 늦어진다. 괜찮아. 올해 2학기가 정상적으로 진행되었다면 나는 어차피 낙제였어. 좋아질 거야. 지금까지 이보다 더 나빠질 것은 없다고 생각할 때마다 상상을 뛰어넘는 방법으로 더 나빠졌다. 그렇지만 내년에는 분명히 좋아지는 일이 있잖아. 일단 바하르는 야간 순찰 근무에서 벗어나고, 나는 아다비아를 만날 수 있을 거다. 이것이 어디야.



 하루 종일 잤다. 정신없이 잤다. 올해 쌓인 피로를 한 번에 다 풀려고 작정한 것처럼 잤다. 도중에 깨어나기도 했지만 아주 쉽게 다시 잠들었다. 아무 것도 안 보이는 어둠 속에서 성냥을 찾아 화로에 불을 붙인 후, 등에도 불을 붙였다. 이제 곧 자정이다. 벽에 기대어 앉아 시계를 바라보았다. 다섯, 넷, 셋, 둘, 하나. 1116년 1월 1일. 자리에서 일어나 서점 밖으로 나왔다. 아무도 없다. 불이 켜진 곳도 거의 없다. 거리의 가로등 불빛만 흔들릴 뿐. 너무나 적막하고 고요하다. 최고의 연말을 기대했지만 현실은 최악의 연말이다.


 담배 한 대를 태운 후 바로 안으로 들어왔다. 난로 옆에 누웠다. 하도 자서 그런지 잠이 안 온다.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쓰고 뒤척였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나갔을까? 서점 문이 열리더니 잠겼다. 그리고 방문이 열렸다.


 "자냐?"

 "아니."

 "새해 축하한다."

 "새해 축하해."


 이고가 내 옆으로 와서 앉았다.


 "진짜 최악의 새해 첫날이네."

 "그러니까. 이게 뭐야? 불꽃놀이도 없구."

 "내년에는 볼 수 있을 거야."

 "그래도 어제 불꽃놀이 못 본 건 안 변하잖아."

 "진짜 불꽃놀이는 꼭 봐야하는 건데..."


 이제 자정이 넘었으니 새해. 작년을 되돌아보았다. 작년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참 피곤한 한 해였어. 올해는 제발 여기저기서 사고 안 터지는 조용한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오늘부터 1년을 기다려 맞이하는 올해 연말에는 매우 화려하다는 에드자의 새해 맞이 불꽃놀이를 감상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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