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기적과 저주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2장 16화

좀좀이 2017. 10. 15.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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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2장 16화


 추워서 잠에서 깨어났다. 아직까지도 이고는 화로를 사용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지금 이 정도면 옷을 두껍게 껴입으면 견딜만 하다고 한다. 이게 뭐가 견딜만한 기온이야? 자다가 얼어죽는줄 알았구만. 전에 켈라자야와 라키사를 서점에서 재웠을 때도 밤공기가 차가워서 넷이서 한 방에서 잤잖아. 이제 화로에 불을 때도 될 것 같은데 이고는 화로에 불을 지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역시 추위는 너무 싫어. 루즈카랑 블랑쉬블르는 따스한 방에서 자고 있겠지? 더운 건 다 똑같지만 추운 건 돈 없으면 더 춥다. 지난해에는 집에서 지냈기 때문에 겨울에 서럽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한겨울에 정말 잘 사는 애들 집에 놀러갔을 때 그 집이 유독 따스하다고 느꼈을 뿐이지. 그런데 올해는 벌써부터 다르다. 돈 아껴야한다고 불을 지피지 않는 거야 이해를 하지만 추워서 이불에서 나오기가 싫다. 나도 돈이 많다면 제대로 된 집에서 벽난로와 화로에 불을 뜨겁게 지필텐데!


 셀베티아 왕국은 이렇게 많이 춥지 않겠지? 거기도 이렇게 추울 건가? 어차피 학교는 휴교중이니 아주 남쪽에 있는 나라 말을 공부해서 다음해 겨울에는 거기로 떠나버릴까. 이건 너무 서럽다. 아침마다 추워서 이불을 뒤집어쓰다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 너무 싫다. 그래도 일어나야지. 우물에 가서 세수하고 물도 길어와야겠다. 오늘 하루도 이렇게 시작되는구나. 진짜 얼어죽지 않고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어두침침한 방에서 수건을 집어들고 방에서 나왔다. 물통 두 개를 집어들었다. 진짜 오늘은 반드시 화로에 불 좀 피우자고 이고한테 제대로 졸라야겠다. 이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지, 얼어 죽자고 하는 짓은 아니잖아! 화로에 불을 피우면 그 위에 솥을 올려놓아야 한다. 그래야 물이 끓으면서 김이 사방팔방 퍼져서 방이 더 따뜻해지니까. 그러려면 물을 많이 떠와야 한다. 물 부족하고 물 뜨러 나가기 귀찮다는 핑계를 못 대게 만들 거다. 물론 그런 핑계를 댈 일이야 아마 없겠지만 말이다. 진짜 이게 뭐야? 온몸이 찌뿌둥하고 으슬으슬 춥다.


 서점 문을 열고 나와 바닥에 물통 두 개를 내려놓았다. 담배를 아직 태우지도 않았는데 내 입김이 담배 연기처럼 선명히 보인다. 아직 거리에 어두운 빛이 많이 남아 있다. 이제야 하늘이 조금씩 밝아질까 말까 하고 있다. 이 시각에 켈라자야가 오지는 않겠지. 성냥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켈라자야 덕분에 성냥을 쓰는 속도가 줄어들기는 했다. 그래도 이따 성냥을 사오기는 해야 한다.


 '이고한테 겨울만은 켈라자야, 라키사까지 서점에서 같이 살게 하자고 진지하게 건의해볼까?'


 물론 넷이 자기에는 방이 너무 비좁다. 과장 조금 덧붙이면 내가 방에 누워 있는 건지, 방에 끼어있는 건지 분간이 안 될 지경이다. 그때 넷이서 방에서 자는데 정말 너무 좁았다. 화로에 불을 지핀다면 자리는 더욱 좁아질 거다. 그래도 넷이 한 방에서 자면 각자의 체온와 숨 때문에 실내 온도가 조금은 더 올라가잖아. 불편하고 자시고 일단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자고 봐야지.


 '내가 이고였으면 이런 방에서 안 잔다. 루즈카 집에 신세지고 말지.'


 루즈카 집은 여기보다는 분명히 따뜻할 거다. 전에 치롤라 문병 갔을 때 안에서 화로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 게다가 거기는 제대로 된 집이라 벽난로도 있었다. 아직 결혼한 사이가 아니라 한 방에서 자기 그렇다면 열기가 미약하게나마 남은 벽난로 앞에 쭈그려서 자겠다. 그게 이 서점에 딸려 있는 방에서 자는 것보다 훨씬 인간적으로 잠을 청할 수 있는 방법이니까.


 '확 블랑쉬블르한테 우리 겨울 동안만 사귀자고 해? 맨날 나한테 자기랑 사귀지 않겠냐고 장난이나 쳐대는데.'


 진짜 밤새 떨면서 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별 생각이 다 든다. 따뜻하게 잘 수만 있다면 뭔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대체 며칠째야? 오늘은 11월 4일. 거의 일주일째 이렇게 벌벌 떨며 자고 있다. 이 날씨가 따뜻해질 일은 절대 없다. 오히려 날이 더 많이 추워질 거다. 이 추위는 3월이나 되어야 좀 사그라들겠지. 이제 11월인데 어떻게 3월까지 버티지? 옷을 껴입고 담요를 뒤집어쓰는 것도 한계가 있는데.


 아다비아는 따뜻한 방에서 푹 자고 있겠지? 편지가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별 일 아닐 거다. 그날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었겠지. 그렇게 좋은 곳이라고 편지를 보내고서 그 다음 편지에 그렇게 써서 보낼 것은 뭐야? 사람 걱정되게시리...별 일 없겠지. 지금 따스한 방에서 기분좋게 자고 있을 거다. 나한테 그런 편지를 보내놓은 것을 생각하며 그 일을 어떻게 둘러댈까 고민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 설마 반쯤 졸면서 써서 자기가 무슨 말을 편지에 써놓았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거 아니야?


 조금 이따 라키사와 켈라자야가 서점으로 올 거다. 라키사는 요즘 들어 서점에서 멍하니 있는 시간이 많이 늘어났다. 그냥 정신줄 놓고 멍하니 있곤 한다. 정신적으로 정말 끔찍하게 힘들겠지. 나도 그 일들이 자꾸 떠오른다. 잊으려 할 수록 오히려 더 선명하게 기억난다. 라키사도 마찬가지일 거다. 아니, 그 누구라도 그런 일들을 겪고 충격을 안 받았다면 그게 미친놈이겠지. 그런데 이렇게 남을 걱정하고 있는 나도 비정상인걸까?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그때 이후 다른 곳에서도 똑같은 사건이 몇 건 일어난 것 같다. 진짜 세상이 미쳐돌아가려고 하나보다. 죽을 거면 혼자 곱게 죽을 것이지, 왜 자기 몸을 터뜨려 죽으며 애꿎은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끼치는 거야? 바하르 말로는 그건 아마 저주술이 아닌 것 같다고 했지만 그게 저주술이 아니라고 볼 수도 없잖아. 그날, 그 자리에는 살점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옷가지도 어디 간 건지 보이지 않았다. 그저 피와 뼈만 있을 뿐이었다. 이런 건 저주술이 아니라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 바하르가 모르는 저주술로 자살하는 방법이 있을 거다.


 아무리 생각해도 켈라자야는 많이 이상하다. 켈라자야는 밤에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밤을 지새길래 매일 아침 서점에 찾아와서 잠을 청할까? 밤새 거리를 돌아다니며 담뱃불 붙여주고 10마르라씩 받는 건가? 하지만 아주 야심한 밤, 누가 거리를 돌아다니며 담배를 태워? 그런 식으로 돈을 벌고 싶다면 낮에 돌아다니며 하는 것이 훨씬 낫지. 켈라자야는 이상한 것이 그것 뿐만이 아니다. 그냥 다 이상하다. 특히 치롤라를 죽이려 들었을 때 그 모습, 그리고 서점 앞에서 자기가 개를 죽인 것이 아니라고 절규하던 그 모습. 원래 어떤 애고 무슨 일을 겪어왔던 것인지 너무 궁금하다. 아직까지 과거에 대해 물어보지 못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이 친해지면 켈라자야가 자기의 과거 이야기를 스스로 이야기할까? 사실 지금이라도 당장 직접 물어보고 싶다. 그러나 왠지 절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아주 강하게 든다.



 담배를 다 태웠다. 이제 물통 두 개를 들고 우물을 향해 걸어가야지. 쌀쌀한 공기가 옷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지금도 이렇게 공기가 차가운데 1월이 되면 얼마나 추울까? 날이 추워져서 사람들이 미쳐가는 걸까? 날이 풀리면 사회가 안정될까? 전쟁의 위기가 지나간 후에 거리에서 터져죽는 방식으로 자살을 택하는 사람들. 이 또한 한순간의 소나기 같은 걸까. 그래도 전쟁이 터지려 하던 그 순간보다는 나으니까. 그때는 진짜 내가 죽냐 사냐의 문제였지만 지금은 남이 죽는 것을 목격하는 문제잖아. 이 미친놈들아, 제발 좀 그만 좀 하라구! 전쟁 위기까지 겪었으면 이제 겪을만큼 겪은 거 아니야? 어디까지 더 나빠질 수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일부러 그러는 거야?


 우물 근처에 경찰 두 명이 서 있다. 새벽에 우물로 갈 때마다 마주치는 경찰이다. 둘은 잡담을 나누고 있다. 저들도 진짜 불쌍하다. 저들은 대체 무슨 잘못이 있어서 밤새 찬공기 맞아가며 거리에 있어야 하는 거야? 경찰들과 눈이 마주쳤다. 가볍게 목례를 했다. 경찰들도 가볍게 목례를 하며 내 인사를 받아주었다. 저 사람들은 나보다 더 절실하게 이 상황이 좀 빨리 끝나기를 바라겠지? 바하르처럼 말이야. 경찰이 번갈아가며 하품을 한다. 정말 피곤할 거다. 속으로 자살한 놈들 욕을 엄청나게 하고 있겠지.


 우물에 도착했다. 두레박을 우물 안으로 집어넣은 후 끈을 잡아당겼다. 묵직해진 두레박이 끌려올라온다. 손을 물에 집어넣어보았다. 차다. 정말 많이 차다.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얼굴이 짜릿짜릿하다. 다시 물을 길어서 물통에 채운 후 물통의 물을 바가지로 떠서 머리에 끼얹었다.


 "아, 차가워! 머리 시려워!"


 누가 관자놀이에 주먹을 대고 꽉 누르며 빙빙 돌려대는 느낌이다. 두피가 시렵다. 화로에 불만 지핀다면 이렇게 고통스럽게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을 필요도 없는데! 아무리 화로의 불이 꺼지고 물이 식어버렸다고 해도 이것처럼 양심없이 차갑지는 않겠지. 그 전에 화로 위 솥의 물이 따스해지면 그 물을 떠서 세수하고 머리를 감을 거다. 이게 다 아직 화로에 불을 지피지 않아도 견딜 수 있다고 우기는 이고 때문이야! 진짜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화로에 불 피우자고 할 거다.



 머리를 후다닥 감고 수건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아냈다. 물통에 물을 가득 채웠다. 이제 아까 서점에서 우물로 출발했을 때보다 날이 조금 더 밝아졌다. 이제 사물의 윤곽은 모두 보인다. 색은 여전히 어둡고 밝은 것 정도로만 분간되고 있지만 말이다.


 "저거 뭐야?"


 아까 우물에 왔을 때 어두워서 못 본 건가? 아니면 우물 주변이 어떤지 딱히 신경을 쓰지 않아서 몰랐던 건가? 우물 한쪽에 신발이 보였다. 어떤 놈이 우물에 신발을 던져놓은 거야? 신발을 보러 다가갔다. 옷가지가 있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 것처럼 넓게 퍼져 있지 않고 좁게 쌓이듯 흐트러져 있었다. 그리고 상의의 소매에는 장갑 같은 것이 있었다. 외투 윗부분에 긴 털이 수북히 난 무언가가 끼어 있다. 털이 너무 머리카락 닮았다. 발로 살짝 건드려보았다. 귀. 귀다.


 "여기요! 여기요!"


 경찰을 향해 달려갔다. 경찰들이 내 외침에 깜짝 놀랐는지 똑바로 서서 나를 주시하고 있다.


 "우물가에 이상한 거 있어요!"

 "무슨 이상한 거?"

 "가죽...사람 가죽요!"

 "뭐? 사람 가죽?"


 경찰들이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나를 노려보더니 우물을 향해 달려갔다. 나도 경찰을 쫓아 달려갔다. 경찰 하나가 털을 잡아 위로 들어올렸다. 옷에서 그 힘없는 것이 쑥 빠져나왔다. 이건 누가 뭐래도 사람 가죽이다. 두 눈이 있어야할 자리에 아무 것도 없다. 아니, 가죽 안에 있어야할 모든 것이 없다. 핏자국도 없어보이고, 뼈와 살, 내장은 가죽 안에 확실히 없었다. 그렇다고 가죽을 누가 칼로 자른 것도 아니었다. 그 어디에도 칼로 갈라 베인 곳이 없었다.


 "이거 쿠룬나스 짓 아냐?"


 가죽을 집어들었던 경찰이 가죽을 여기저기 살펴보더니 손을 놓아버리며 낮은 목소리로 신음하듯 말했다. 바하르가 쿠룬나스가 돌아다니니 조심하라고 경고했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속으로 그런 것이 왜 에드자에 돌아다니나 했다. 그런데 이건 분명히 쿠룬나스 짓이다. 전설로만 들었던 그 쿠룬나스다! 사람의 속만 싹 빼가고 가죽만 남긴다는 그 쿠룬나스! 쿠룬나스가 아니라면 이건 누가 어떻게 해낸 것이라고 설명되지 않아. 가죽만 남기고 그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빼가는 것이 어떻게 가능해. 가죽을 베어내지 않고 말이야!


 "너 이거 언제 발견했어?"

 "아까 저 봤잖아요. 여기서 세수하고 물 길은 후에요."

 "너 그동안 뭐 이상한 낌새 같은 거 못 느꼈어?"

 "전혀요. 저도 물통 들고 돌아가려고 할 때 발견했어요."


 경찰들이 입을 다물고 신음 소리를 내었다. 그 중 하나가 중얼거렸다.


 "분명히 이쪽에서 사람 소리 없었는데...진짜 미치겠네."


 대체 여기에서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사람이 터져 죽지를 않나, 가죽만 남기고 죽지를 않나...나도 정말 미쳐버리겠다. 평화로운 일상이 찾아오나 싶으면 왜 이런 더 무섭고 충격적인 일이 일어나는 거야?


 "진짜 아무 것도 없었어?"

 "예. 진짜로요! 아저씨들도 여기 근처에 있었잖아요."

 "그렇지. 네가 세수하는 건 보였으니까."


 물통을 집어들었다. 이 자리를 빨리 피하고 싶다. 경찰들에게 인사하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그저 어서 서점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다. 물통을 들고 발걸음을 부지런히 옮겼다. 어서 서점으로 가야 한다. 쿠룬나스. 서점으로 가야 한다. 사람 가죽. 빨리 서점으로 가자. 속이 울렁거린다. 서점으로 가야만 해.


 "우웩!"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물통을 바닥에 떨어뜨리듯 내려놓고 쓰러지듯 쭈그려앉아 토했다. 경찰이 집어들었던 그 인간 가죽. 우웩! 그 흐느적거리던 가죽. 우웩! 우웨엑! 이 망할 일! 우웨에엑!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야! 우웩! 이제 모두 좀 작작하라구! 우웩! 눈물이 나온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아침에 우물로 세수하러 간 것이 그렇게 잘못한 거야? 라키사에게 머리띠 사준 것이 그렇게 크게 못된 짓을 한 거야? 내가 뭘 잘못해서 이런 일을 겪어야하는지 누가 시원하게 말 좀 해줘!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물통에서 물을 한 웅큼 떠서 입에 넣고 입안을 헹군 후 다시 뱉어내었다. 여전히 속이 안 좋다. 계속 구역질이 나려고 한다. 간신히 일어나 다시 물통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어떻게든 일단 서점으로 돌아가야해. 나 지금 잠에서 안 깨어난 거야. 이거 진짜 악몽이야. 아니지, 이건 꿈이 아니라 어떤 놈이 고약한 장난을 쳐놓은 것일 거야. 그건 사람 시체가 아니야. 너무 정교하게 잘 만든 거라 나와 경찰들이 착각한 거야.



 열심히 걸었다. 서점 문을 열었다.


 "너 부지런하네?"


 속이 울렁거린다. 바닥에 물통을 내려놓고 바로 화장실로 뛰어들어갔다. 쭈그려앉아 또 다시 토했다. 신물이 올라온다. 이고가 깜짝 놀라 달려와 등을 두드려주었다.


 "야, 너 어젯밤 몰래 술 퍼마셨어? 왜 이렇게 아침부터 토를 해대?"


 이제 뱃속에서 올라오는 것도 없다. 그런데 구역질이 안 멈춘다. 멈출 수가 없다. 계속 그 사람 가죽이 떠오르니까. 화장실에서 풍기는 이 더러운 오물의 악취가 차라리 낫다. 그 가죽. 뭘 토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구역질이 계속 나온다. 더럽다. 끔찍하다. 무섭다. 침을 뱉고 간신히 일어났다.


 '나도 그렇게 죽는 거 아니야?'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몸이 덜덜 떨렸다. 누가 쿠룬나스인지 어떻게 알아? 쿠룬나스가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알아? 어느 순간 나를 그렇게 만드는 거 아니야? 나도 가죽만 남기고 죽어버리는 거 아니야?


 "야, 괜찮아? 왜 그래?"

 "쿠룬나스...망할 사람 가죽..."

 "쿠룬나스? 그 전설 속 괴물?"

 "봤어. 그거..."

 "쿠룬나스를 봤다고?"

 "사람 가죽. 멀쩡한 사람 가죽 봤어. 우물가에서!"

 "그거 진짜야?"


 진짜 우리 모두 그렇게 죽임을 당하는 거 아니야? 우물에 있던 시체도 자기가 그렇게 죽을 거라 생각도 못했을 거 아니야. 그 사람이라고 그렇게 죽고 싶었겠어? 쿠룬나스가 잡아먹는데 속수무책으로 당했겠지. 나라고 그 사람이랑 다를 거 없잖아. 나도 저주술 따위 몰라. 쿠룬나스가 어디선가 나를 잡아먹으려 들면 어떻게 그것을 알아채지? 뭘 알아채야 막든 도망가든 할 거 아니야!


 "나 진짜 그렇게 죽는 거 아니야? 나 가죽만 남고 죽는 거 아냐?"

 "정신차려! 헛것 본 거야!"

 "아니야! 진짜 봤다구! 경찰들도 봤어!"

 "야, 진정해. 일단 진정하고 그 다음에 이야기하자."

 "뭘 진정해? 지금 내가 죽게 생겼는데? 쿠룬나스가 나 잡아먹으려 들면 어떻게 해!"

 "일단 정신부터 좀 차리라구! 우리는 괜찮을 거야!"

 "뭐가 괜찮아!"


 그때 서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서 고개를 홱 돌렸다. 켈라자야였다.


 "무슨 일이야? 왜 아침부터 이렇게 시끄러워?"

 "타슈갈이 뭐 헛것 봤나봐."

 "헛것 아니라구! 쿠룬나스가 나타났어! 내가 그 사람 가죽 똑똑히 봤어!"


 켈라자야는 무표정한 얼굴로 살짝 흥분된 듯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담담한 척 말했다.


 "에드자는 너무 재미있는 곳이야. 그런 것까지 돌아다니다니."


 저건 미쳐서 죽음에 대한 공포 자체가 없는 건가? 아니면 자기는 저주술 쓸 수 있으니 상관없다는 거야?


 "뭐가 재미있어! 진짜 가죽만 남았다구!"

 "응. 그래서?"

 "뭔 그래서야! 진짜 쿠룬나스가 나타났다니까!"

 "응. 그게 왜? 사람은 죽잖아."


 이건 또 뭔 개같은 반응이야? 죽는 게 다 같은 죽는 거야? 죽더라도 곱게 죽어야지! 쿠룬나스한테 잡아먹히는 거랑 때 되어서 평안히 죽는 거랑 같아?


 "그거 별로 무서운 거 아니야. 아마 별 것 아닐 거야. 그러니 진정해."

 "뭐가 별 거 아니야? 사람을 그렇게 죽이는데!"

 "너 지금 살아있잖아. 그런데 왜 무서워?"

 "살아있으니까! 이 미친년아, 살아있으니까 무섭지, 내가 죽었으면 죽는 게 왜 무서워!"


 켈라자야가 깜짝 놀라서 두 눈에 힘을 주고 나를 응시했다. 지금 말장난하자는 거야? 내가 죽었으면 죽는 게 당연히 안 무섭지. 당연히 내가 살아있으니까 죽음이 무서운 거 아니야! 켈라자야는 아무 말이 없다. 무슨 호기심이 생겼는지 내가 무슨 말을 더 하기를 기다리는 듯 하다.


 "너 방에 좀 들어가서 쉬어. 일단 눈 좀 붙여."


 이고가 내 어깨를 감싸더니 방으로 끌고들어갔다.


 "잠 좀 자. 화로에 불 피워줄까?"

 "진짜 이렇게 죽는 거 싫다구!"

 "알아, 알아. 그렇게 죽고 싶은 놈이 어디 있어? 일단 좀 진정해. 너 그렇게 진정하지 못하면 그게 더 위험한 거, 잘 알고 있잖아?"


 이고는 나를 자리에 앉히고는 화로에 장작을 집어넣고 성냥을 그어서 안에 집어넣었다. 장작에 불이 잘 붙은 것을 확인하고는 삼발이를 들고 와서 화로 주변에 얹어놓고 솥을 그 위에 걸쳤다. 물을 한 통 솥 안에 부은 후 밖으로 나갔다. 나 괜찮겠지? 어떻게든 살아남겠지? 쿠룬나스 같은 것은 내 앞에 안 나타나겠지? 이렇게 죽기 싫어. 이 망할 땅에서 꼭 떠날 거야! 이 '마딜 공화국'이라는 곳 자체가 아주 글러먹은 저주받은 동네야. 나는 꼭 살아서 여기에서 탈출하고 말 거야! 그때까지 나 살 수 있겠지?



 켈라자야가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내 옆에 앉았다.


 "많이 무서워?"

 "그러면 안 무서워? 죽게 생겼는데?"

 "지금 너한테 아무 일도 안 일어나고 있잖아."

 "계속 나한테 안 찾아올 거란 보장 있어?"

 "지금은 괜찮잖아."


 얘는 왜 내 옆에 와서 미친 헛소리를 계속 지껄이는 거야? 너는 저주술 쓸 줄 아니까 쿠룬나스와 마주치면 싸워서 무찌르면 된다는 거야? 죽음이 아예 안 무서워?


 "너 대체 뭔 일을 겪었길래 그래? 이게 안 무서우면 뭐가 무섭다는 거야!"

 "나? 나 말이야? 나는..."


 켈라자야가 말끝을 흐렸다. 고개를 숙이고 바닥만 바라본다. 얘도 무서운 게 있기는 있을까? 그냥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나도 무서운 거 있어. 나도..."

 "그러니까 뭐? 죽는 것도 안 무서우면 대체 뭐!"

 "있어! 나도 있다구!"


 켈라자야는 나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죽는 것보다 무서운 게 뭔데? 말을 말자. 얘와 제대로 된 대화가 될 리가 없지. 나 진짜 살아남겠지? 쿠룬나스가 박멸된 후에도 계속 살아있겠지? 그럴 거야. 쿠룬나스 같은 것은 내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고, 경찰과 군인들이 쿠룬나스 사냥에 나설 거다. 성 밖에 아직 남쪽과 북쪽에서 몰려온 군인들이 진을 치고 있잖아. 그들도 쿠룬나스 사냥에 나서겠지. 얼마 안 가서 쿠룬나스는 다 잡혀서 죽을 거고, 아무 일 없는 일상으로 돌아갈 거다. 그래, 아무 일 없는 일상. 조용하고 평화로운 하루하루. 그런 날이 곧 찾아올 거야.


 방안이 조금씩 따뜻해진다. 신경은 곤두서 있지만 몸의 긴장이 조금씩 풀린다. 잠이 조금씩 내 머리를 짓누른다. 켈라자야는 계속 나를 노려보고 있다. 노려보면 뭐 어쩔 건데? 네가 나를 죽이게?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설마 미안하다고 말하기를 바라는 거야?


 "넌 행복한 거야."


 켈라자야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뭐가 또 행복해? 그러면 어떤 것이 진정 불행한 건데? 굳게 다문 켈라자야의입술이 무언가 더 이야기하고 싶은지 실룩실룩 움직인다. 그러나 그렇게 실룩거리기만 할 뿐, 두 입술이 벌어지지는 않는다.


 "너 치르치나에서 무슨 일 있었어?"

 "있어...죽음보다 무서운..."


 켈라자야는 무릎 사이로 고개를 푹 숙였다. 관두자. 더 물어봐서는 안 될 거 같다.



 "야, 괜찮아?"

 "어?"


 누가 나를 흔들어서 깨웠다. 고개를 들어 누가 깨운 건지 보았다. 바하르였다. 켈라자야는 맞은편에 누워서 자고 있다.


 "이 시각에 네가 웬일이야?"

 "퇴근하고 잠깐 들렸는데 이고가 너 좀 안 좋은 일 겪었다고 이야기해주더라구."

 "아..."

 "찻집 가서 이야기할까?"

 "그러자."


 방에서 나왔다. 라키사가 안 보인다. 아, 오늘 라키사가 쉰다고 했지! 다행이다. 라키사가 내가 쿠룬나스에게 잡아먹힌 사람의 시체를 보았다고 들었다면 엄청나게 힘들어했을 거다. 라키사도 귀가 있으니 언젠가 이야기를 듣기는 하겠지만 조금이라도 지난 사건으로 인한 충격을 추스린 후에 듣는 것이 낫겠지.


 "이제 괜찮아?"

 "조금."


 이고가 나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이게 잠깐 잔다고 좋아질 성질의 것은 아니잖아. 내가 자고 일어났다고 쿠룬나스가 환상의 세계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구.


 "나 찻집 좀 다녀올께."

 "그래. 바하르랑 이야기 좀 하다 와."


 바하르와 찻집으로 갔다. 자리를 잡고 앉았다.


 "너 진짜 그 시체 본 거야?"

 "어."

 "그 가죽?"

 "어."

 "아 망할...그거 진짜였네. 왜 하필 여기냐, 또!"


 바하르가 머리를 쥐어싸며 짜증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우물도 얘가 순찰도는 길에 있던가? 밤에 같이 순찰을 다녀본 적이 없으니 그건 잘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쿠룬나스가 진짜 있으니 동원령이 해제될 날은 더욱 멀어졌다는 것이다. 쿠룬나스가 무서운 건지, 동원령 유지가 무서운 건지 모르겠다. 어떤 이유에서건 바하르에게는 매우 짜증날만한 일이다. 바하르도 쿠룬나스 정도는 자기가 저주술로 무찌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그 시체를 못 보아서 아직 확 와닿지 않는 걸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바하르가 짜증났다는 것이다.


 "그런 잡귀신은 왜 마딜 땅으로 기어들어온 거야?"

 "그거 막 자기들끼리 수를 불려가지는 않겠지?"

 "그건 모르지. 전설에 그런 내용은 없었잖아."

 "진짜 그런 일은 안 일어나겠지?"

 "내가 어떻게 알아. 그 내용이 빠진 건지 진짜 원래 아닌 건지..."


 차가 나왔다. 바하르가 잔에 차를 따라 내 앞에 놓았다.


 "한 잔 마시고 안정 좀 찾아."

 "그래야지. 맨정신으로 마주쳐도 죽을 판인데."


 뜨거운 차에 입술을 살짝 대어보았다. 수천 개의 작은 바늘이 입술 끝을 찌른다. 진짜 많이 뜨겁구나. 그리고 이것이 바로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지. 아직은 내가 멀쩡히 살아있다. 언제 쿠룬나스가 내 앞에 등장해 나를 잡아먹으려 들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일단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면 쿠룬나스도 어떻게 해보지 못하지 않을까?


 "너무 걱정하지 마. 너는 밤에 혼자 돌아다닐 일은 없잖아."

 "아, 그렇기는 하지."


 생각해보니 그렇다. 밤에 책을 수거하러 돌아다니는 것은 이고다. 이제부터는 이고와 같이 밤에 책을 수거하러 돌아다녀야 하나? 그 전에 라키사는? 이고한테 말해서 날이 저물기 전에 퇴근시키라고 할까? 어둠 속에서 쿠룬나스 만나면 어떻게 해? 이고도, 라키사도 저주술 못 쓰는데. 켈라자야를 고용하자고 할까? 켈라자야는 저주술을 사용할 줄 아니까 쿠룬나스에게 허무하게 당하는 일은 없지 않을까?


 "라키사 집에 돌아갈 때랑 이고 책 수거 돌아다닐 때는 어떻게 하지?"

 "야, 그렇게까지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너무 신경쓰지 마. 그놈에게 당하는 놈이 재수없는 거야."

 "그게 우리면 어떻게 해?"

 "뭐, 가능성이 없다고는 못하지만...그래도 우리는 아닐 거야. 그거 하나 돌아다닌다고 모든 일상 다 포기할래? 그러면 얼어죽거나 굶어죽을 건데?"


 바하르 말을 듣고 보니 그 말이 맞다. 쿠룬나스는 솔직히 많이 무섭다. 그 인간의 가죽을 보고 나니 예전에 이야기로만 들었을 때와는 전혀 느낌이 다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쿠룬나스 때문에 모든 일상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러면 지금 내게 주어지는 선택지는 어쨌든 죽는 거다. 일상을 포기하고 얼어죽거나 굶어죽기. 일상을 포기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쿠룬나스에게 죽임을 당할 위험이 있기는 하지만 일상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살 확률이 훨씬 높을 거다.


 "당연히 어두워지면 많이 조심해야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쿠룬나스에 너무 신경쓰지는 마. 여기에 경찰이 얼마고 군인이 얼마인데 설마 쿠룬나스 그까짓 거 하나 못 죽이겠어? 정 안 되면 성 밖에 있는 놈들한테 도와달라고 하면 돼. 그러니 너무 겁에 질려 있지 마."

 "그렇게 노력해야겠다. 그래도 그건..."

 "그건 그렇지..."


 한숨만 나온다. 그래. 나한테, 우리한테만 안 일어나면 돼. 안 일어날 거야.



 "너 감비르 봤어?"


 바하르가 화제를 감비르로 돌렸다. 그 미친놈? 그때 받은 충격이 또 생생히 떠오른다.


 "어. 그거 완전 미쳤던데?"

 "너한테는 뭐라는데?"

 "몰라. 하도 충격적이라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제대로 기억도 안 나. 무슨 편견, 차별 같은 소리만 해대던데. 동물까지도 육체적으로 사랑해야 한다고 하구."

 "그 자식 너한테 그렇게 지껄였어?"

 "응."


 바하르는 한숨을 내쉬며 찻잔 속의 차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


 "너한테는 뭐라고 했는데?"

 "지금 저주술은 다 거짓이니 세상을 뒤엎고 혁명을 일으키재!"

 "혁명?"

 "미친놈. 자기가 저주술에 대해 알면 뭘 얼마나 안다구."

 "그것만 말했어?"

 "응. 마음껏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저주술이라고만 이야기했어. 그런데 동물까지 육체적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건 뭔 말이야?"

 "몰라. 그 미친놈. 진정한 저주술을 위해서는 동물을 보고도 성욕을 느껴야 한다나? 그러면서 수간이 잘못된 거라니까 편견이고 차별이래!"

 "어떻게 너한테는 그런 소리까지 하냐?"


 바하르가 기가 차서 입을 쩍 벌렸다. 너는 나한테 듣고 어이가 없지? 나는 그 말을 직접 들었다구.


 "그리고 복장은 그렇다 쳐. 말투는 또 왜 그래? 억지로 여자 흉내내려는 거 듣고 있는데 토할 거 같더라."

 "그러니까 말이야. 진짜 치르치나 가서 뭔 일을 겪었는지 모르겠어. 보통 미쳐도 거기까지 미치지는 않을 건데..."


 그래, 미쳐도 보통 그 단계까지 미치지는 않지. 아무리 미쳐도 남자와 여자의 다른 육체조차 사회적 구속이라고 하는 놈은 없을 거야. 그건 생각이고 자시고 이전에 당장 자기 아랫도리를 만져보기만 하면 바로 알 수 있는 거니까.


 "너 걔 말려야 하는 거 아냐? 너 걔랑 많이 친하잖아. 좀 말려봐."

 "저게 말 듣겠냐?"

 "그러면? 그냥 놔두게?"

 "그러면 어떻게 해?"


 바하르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래도 친구라면 어떻게든 감비르의 저 미친 짓을 말려야하는 거 아닌가? 나야 감비르를 대학교 와서부터 만났다지만 너는 고향에서부터 친구였대메?


 "너는 감비르에게 어떻게 대할 거야?"

 "적당히 들어주는 시늉이나 해야지. 그거 말려봐야 말 들을 리도 없구. 오히려 자기가 더 잘났다고 생각할 걸? 나랑 인연 끊고 말이야."

 "그러면 감비르는 계속 자기 혼자 착각에 빠져 사는 거잖아."

 "뭐 어쩌겠어. 그게 걔 인생이지."

 "그게 뭔 자기 인생이야? 그러면 걔 주변 사람들 다 걔한테 거짓 박수나 쳐주고 속으로 인연 끊어버릴텐데!"

 "맞아. 내 주변에 감비르랑 알고 지내던 애들이 감비르 돌아온 모습 보고 다 그러고 있어. 너 정도 이야기를 들은 것도 아닌데 말이야."


 이거 감비르 친구 맞아? 이건 감비르를 속이고 점점 더 거리를 두어가며 인연을 끊어가겠다는 거잖아! 감비르는 계속 모두가 자기를 지지해준다고 착각에 빠져 있을 거구.


 "야, 그게 무슨 친구냐? 그러면 걔는 사회적으로 병신되는 거잖아!"

 "그러면 어떻게 해? 걔 면상에 대고 '너 졸라 미친 새끼야' 이렇게 소리칠까? 그러면 서로 원수밖에 더 돼?"

 "그래도 친구라면 말려야지!"

 "그러면 너는 어떻게 말릴건데? 진짜 걔한테 '이 미친 새끼야, 너 존나 토쏠리는 거 아냐?' 이렇게 면상에 대고 말할래? 그러면 걔가 너 말 듣냐? 보나마나 걔는 그러면 너를 자기 혁명의 적이라고 여기고 원수로 취급할걸?"


 바하르의 말을 들어보니 바하르의 말이 맞기는 하다. 감비르를 말리는 것이 친구의 도리이기는 하지. 하지만 이미 미쳐버린 감비르에게 너는 미친놈이라고 이야기하면 내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나를 원수로 여길 거다. 감비르 행동에 대해 정면으로 지적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저놈의 미친짓을 그냥 놔둘 수도 없고...이건 답이 안 보인다. 그렇다고 가만히 들어주면 자기를 지지하는 줄 알겠지. 당장 전에 나와 만났을 때 내가 그렇게 어이없어해도 감비르는 내가 자기 말을 이해한다고 혼자 착각했다. 그러니 나한테 진리를 깨우쳤다느니 같이 뭔지 모를 '편견과 차별'을 파괴하는 투쟁을 하자고 진지하게 이야기하지.


 "뭔가 방법을 찾아야하지 않을까?"

 "몰라. 고향에서부터 봐왔지만 걔는 답이 없어. 자기 혼자 꼴깝떨다 피 보고 깨우치지나 않으면..."

 "그러면 그냥 거리 많이 두고 멀리 하게?"

 "그러려구. 지금 내 일도 미칠 거 같은데 걔까지 챙겨주게 생겼냐? 챙겨준다고 말을 들을 놈도 아니구."

 "아...진짜 골아프네. 친구니 말리기는 해야 하는데..."

 "조심해라. 네 말 들어보니 완전 중증 같은데. 그런데 걔한테 진지하게 조언하려면 걔랑 인연 끊을 각오는 해야 할 거야."

 "그러니까...뭐라고 말했다가는 인연 끊고 원수로 여길 거 같고, 그렇다고 놔두자니 저건 분명 미친 거고..."

 "너 하고 싶은대로 해. 나는 걔하고 이미 마음 속으로 인연 끊었다. 제정신 돌아오면 그때 다시 새로 관계를 만들든가 하려구. 돌아도 정도껏 돌아야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정신을 차리라고 하면 인연이 끊길 거고, 그냥 놔두자니 그건 친구의 도리가 아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나 이만 간다. 눈 좀 붙여야 이따 밤에 또 근무서지."

 "나도 들어가서 일해야지. 조심해! 쿠룬나스 진짜 있는 거니까!"

 "너도. 그리고 다음에 감비르 또 만나게 되거든 어땠는지 이야기 좀 해줘."

 "말이 통하기를 좀 빌어주라."

 "알았다."


 서점으로 돌아왔다. 켈라자야가 책을 읽고 있다. 만약 감비르와 켈라자야가 만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나와 이고, 라키사까지 다 미쳐버리는 거 아니야? 그나저나 우리 모두 괜찮아야 하는데...멀리 있는 내 가족, 아다비아까지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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