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기적과 저주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2장 13화

좀좀이 2017. 10. 6.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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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2장 13화


 협상은 잘 될 거야. 분명히 모두가 싸우고 싶지 않을 거야. 싸우면 모든 것을 잃게 되잖아. 어쨌든 많은 사람이 죽을 거야. 제일 힘없는 사람들만 죽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양쪽 다 저주술사가 바글바글할 거다. 아무리 저주술사가 형편없다고 해도 저주술사들이 손가락만 빨고 응석만 부리고 있지는 않겠지. 어떻게든 하나라도 더 죽이려고 발악할 거고, 이왕이면 더 높은 사람을 죽이려고 노력할 거다. 전쟁이 발생하는 순간 그 누구도 피해를 피해갈 수 없다. 그러니 모두가 안 싸우려고 들겠지? 서로 무엇을 뜯어내기 위해 발악중일지는 모르겠지만 제발...협상은 잘 될 거야. 어떻게든 잘 될 거야. 반드시 그래야만 해. 여기로 오기 위해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기껏 고향에서 탈출해 에드자까지 올라왔더니 전쟁으로 죽으라고? 싫어! 절대로! 이제야 조금 잘 될 것 같았는데 왜 끝없는 수렁으로 빠져야하냐구!


 라키사는 지금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쭈그려 앉아 있다. 무릎에 턱을 괴고 바닥만 바라보고 있다. 간간이 한숨만 내쉰다. 라키사도 협상이 잘 끝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 거다. 라키사는 나보다 잃는 것이 훨씬 크겠지? 고향에 돌아가면 너무나 뻔하고 정해진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내게 불평을 했었다. 라키사는 그 자신의 의지와 전혀 관련없는 인생을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싫을까? 아마 그것까지는 라키사도 생각해본 적이 없을 거다. 이제야 생각해보기 시작했겠지. 이건 나도 마찬가지다. 나라고 여기 올 때 전쟁나서 죽는 것이 고향에서 사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런 생각 자체를 안 해봤다. 설마 에드자에서 전쟁이 날까 싶었으니까.


 이고는 벽에 기대어 앉아 맞은편 벽만 계속 바라보고 있다. 이고도 협상이 잘 되기를 바라고 있겠지? 그래도 우리들 중에서는 이고가 가장 상황이 낫지 않을까? 일단 기본적으로 외국인이잖아. 정 안되면 자기 나라인 남아드라스 공화국으로 돌아가면 될 거다. 아니면 셀베티아 왕국 같은 나라로 넘어가서 또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거나. 이고는 이 위기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이고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감을 전혀 잡을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와 라키사와는 아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는 거다. 요즘 들어서 계속 이고와 우리는 생각이 다르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래도 이고도 전쟁이 나는 것을 바라지는 않겠지.


 전쟁은 안 나겠지? 내가 전쟁을 안 나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그저 전쟁이 나지 않게 해달라고 비는 수밖에. 답답하다. 담배나 한 대 태워야겠다.


 "어디 가?"

 "담배 태우러."


 자리에서 일어나자 라키사가 어디 가냐고 물어보았다. 내가 지금 갈 곳이 어디 있어? 밖으로 담배 태우러 나가는 것 말고 나갈 일이 아예 없다. 나가는 것 자체가 꺼려지기도 하구. 그래도 서점 안에서는 담배를 태우면 안 되니까 잠깐 담배를 태우러 나갈 뿐이다. 이고도 담배를 태우러 간간이 나갔다 들어왔다 하고 있다. 아직 전쟁이 나지는 않았으니 담배도 서점 안에서 태우면 안 되나보다.


 서점 밖으로 나왔다. 거리에 사람이 하나도 없다. 맞은편 카페도 문을 닫았다. 이토록 거리가 조용했던 적이 있었던가? 언제나 사람이 적어도 하나는 있었다. 아주 어둑해지기 전에는 항상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맞은편 카페에서는 사람들이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거리에서 들리는 소리라고는 담배 연기를 내뿜는 내 숨소리, 그리고 새가 지저귀는 소리 뿐이다. 새는 전쟁이 일어나든 안 일어나든 상관없겠지?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리고 상황이 매우 안 좋아진다면 날아서 여기를 벗어나버리면 될테니까. 적막한 거리에 울리는 새가 지저귀는 소리. 이것이 이제 마지막으로 누리는 평화일까?


 담배를 비벼끄고 다시 서점 안으로 돌아와 라키사 옆에 앉았다. 라키사는 나를 한 번 흘깃 쳐다보더니 다시 바닥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고는 나를 쓱 쳐다보더니 다시 맞은편 벽만 바라본다. 각자 머리 속이 엄청나게 복잡할 거다. 그 복잡한 머리 속을 입 밖으로 내쏟는다면 그 소리들이 이 서점 안에 빈 공간이 모래 한 알만큼도 남지 않게 꽉 채워버리겠지?



 '에드자로 올라오지 않고 인파사에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속이 터져 죽었겠지. 그때를 떠올려보면 이렇게 전쟁이 터질지 걱정하는 것이 그때보다는 차라리 행복하다. 물론 인파사에 있었다면 전쟁이 터질지 걱정할 필요는 없었을 거다. 전쟁이 나려고 하는 곳은 에드자이지 인파사가 아니니까. 여차하면 국경을 넘어 남아드라스 공화국으로 도망칠 수도 있구. 여기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은 없었을 거다. 그렇지만 전쟁과 상관없이 내가 미쳐버리지 않았을까? 어쩌면 치르치나 같은 곳으로 도망쳐버렸을 수도 있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나는 그 동네에서 외국인이었다. 아무리 아이들과 사이좋게 잘 어울리고 있어도 결국은 외국인이었다. 왜냐하면 내 피는 외국인의 피니까. 부모님이 남아드라스 공화국에서 넘어온 아드라스인이다. 당연히 나는 피로 보면 마딜인이 아니다. 그렇지만 피만 아드라스인일 뿐이다. 아드라스어도 모르고 아드라스인의 문화도 잘 모른다. 아드라스인의 문화를 아예 모르지는 않을 거다. 우리집에서 먹는 음식은 다른 아이들이 집에서 먹는 음식과 차이가 있었으니까. 친구들 집에 놀러가보면 잘게 다지고 빻아서 물에 개어먹는 음식이 많았다. 우리집은 식재료를 잘게 다지고 빻아서 물에 개어먹는 일이 거의 없었다. 물은 물대로 마시는 것이고, 식재료는 식재료대로 먹는 것이었지.


 아이들과 잘 놀다가 의견 충돌이 일어나면 아이들은 내게 여기는 마딜인의 땅이라고 하곤 했다. 나도 마딜인인데? 아이들은 아니라고 했다. 너희들과 똑같이 입고 똑같이 말하고 똑같이 놀고 있었잖아? 그래도 아이들은 아니라고 했다. 나보고 너는 우리와 다르다고 했다. 그러면서 마딜 공화국은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너희와 완벽히 같잖아? 아주 조금 전까지 너희와 아무 문제 없이, 아무 차이 없이 잘 어울리고 있었잖아? 그런데 아이들은 내게 자기들과는 다르다고 했다. 뭐가 다른지 그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다. 단지 자기들과 다르다고만 말할 뿐이었다.


 부모님이 왜 마딜 공화국으로 넘어오게 되었는지 잘 모른다. 하지만 뭔가 큰 잘못을 지어서 도망쳐온 것이라거나, 거창한 큰 뜻이 있어서 넘어온 것은 아니었다. 가끔 아버지께서 남아드라스 공화국으로 다녀오실 때가 있었으니까. 마딜 공화국이 남아드라스 공화국보다 물가가 저렴해서 여기로 넘어오신 것 아닐까? 아마 그럴 거다. 남아드라스 공화국 - 특히 수도의 물가는 여기의 거진 10배라고 했었으니까. 집에서 두 분이 대화하실 때는 아드라스어로 이야기하셨다. 그러나 내게는 마딜어로 이야기하셨다. 어렸을 적에 내게 딱히 아드라스어를 가르치시려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커다란 가게에서 일하셨다. 그 가게는 남아드라스 공화국과 마딜 공화국 사이에서 장사를 하는 가게였다. 어머니는 다른 아주머니들처럼 집안일을 하시고, 텃밭을 가꾸셨다.


 인파사에 가끔 남아드라스 공화국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보일 때가 있었다. 그 사람들은 내가 보이면 말을 걸어오곤 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아드라스어를 배운 적이 없으니까. 내가 무슨 말인지 못 알아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으면 아드라스인도, 마딜인도 나를 매우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이해는 한다. 내 외관은 아드라스인이니까.



 딱 한 번, 아버지를 따라서 남아드라스 공화국에 다녀온 적이 있다. 국경을 넘을 때 아버지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했다. 너는 아드라스어를 모르니까 괜히 떠들어대지 말고 얌전히 침묵만 지키라고 했다. 남아드라스 공화국으로 들어가는 국경. 군인들이 마딜인들이 들고 온 짐을 모두 까보고 헤집어대고 있었다. 마딜인들은 무슨 큰 죄를 지은 죄인이 자신의 죄가 걸릴까 조마조마해하는 것처럼 두 손을 앞에 가지런히 모으고 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바닥을 쳐다보고 있다가 가끔 군인을 힐끗 쳐다보곤 했다. 우리도 저렇게 당하는 건가? 한 사람이 검사받을 때마다 시간이 꽤 걸렸다.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되었다. 아버지는 군인들에게 뭐라고 이야기하셨다. 군인들은 웃으면서 그냥 지나가라고 했다. 아버지를 따라 군인들을 지나친 후, 뒤를 돌아보았다. 그 어떤 마딜인도 우리를 이상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지 않았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표정이었다.


 어떤 도시, 어떤 집에 도착했다. 아버지는 내게 친척들이라고 하면서 인사를 하라고 시켰다. 그들 모두 아드라스인이었다. 인사를 드렸다.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내게 뭐라고 이야기하고 나를 안아주셨다. 그들이 내게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른다. 왜냐하면 아드라스어로 이야기했으니까. 그저 나에게 환영한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추측만 해볼 뿐이다. 그 집에서 열흘간 머무르고 다시 인파사로 돌아왔다. 친척들은 내게 잘 대해주려고 했던 것 같다. 사촌들도 나와 어울려보려고 노력했다. 나도 사촌들과 어울려보려고 했다. 그러나 말이 통하지 않았다. 즐겁게 잘 지내기는 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여기에서도 나는 이들과 같은 사람들이 아니구나. 인파사에서는 겉모습이 다르다고 나 혼자 다른 사람이었는데 여기에서는 속모습이 다르다고 나 혼자 다른 사람이었다. 이렇게 쓰레기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내 핏줄의 고향인 남아드라스 공화국으로 돌아와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때 결심했다. 남아드라스 공화국이고 마딜 공화국이고 다 싫다. 어디를 가나 이 기분 더러운 느낌은 계속 나를 쫓아다닐 거 아냐. 이것은 내가 이들과 같다는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영원히 쫓아다닐 거다. 그러나 이 마음은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슨 수로 나의 겉모습을 뜯어내서 버리고, 무슨 수로 나의 속모습을 뜯어서 버려내? 차라리 이런 동질감을 느낄 거라는 희망 자체가 아예 없는 곳으로 가버리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선택한 것에 에드자로 가서 셀베티아어를 공부한 후 셀베티아 왕국으로 떠나는 것이었다.


 인파사를 반드시 떠나야겠다는 마음은 이 망할 마딜 공화국을 떠나겠다는 마음과 같다. 정말 너무 괴로웠으니까. 만약 에드자로 올라오지 않고 인파사에 머물렀다면 어쨌든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해 도망쳤을 거다. 아니면 미쳐버렸거나. '인파사'라는 곳 자체가 싫었으니까. 지금 이 상황 속에서조차 인파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만큼은 절대 안 든다. 인파사로 돌아갈 길이 있다면 차라리 거지로 살더라도 다른 나라로 도망칠 거다.



 '라키사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까?'


 라키사를 쳐다보았다. 라키사도 묄른으로 돌아갈 바에는 차라리 여기에서 머무르며 이렇게 공포에 질려 떨고 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겠지? 그래서 이렇게 옆에 있는 것이겠지? 비록 도망칠 기회가 없어서 여기에 남아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라키사도 도망칠 기회가 있었다 해도 묄른으로 돌아갔을 것 같지는 않다.


 '아다비아는 잘 지내고 있을까?'


 아다비아는 뮈젤에 있다. 뮈젤도 시끄럽기는 했을 거다. 그래도 여기만큼은 아니겠지. 전쟁이 난 것은 아니잖아. 뮈젤에서 도망쳐온 사람들도 있는 것으로 봐서 거기도 큰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거기에서 도망쳐온 사람들은 저주술 옹호론자들이잖아? 아다비아는 저주술을 싫어하니까 아마 별 문제 없었을 거다. 아다비아는 정말 운이 좋아. 만약 아다비아가 지금 에드자에 머무르고 있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저녁 먹자."


 이고가 방에 들어가서 빵과 말린 과일, 말린 고기를 들고 나왔다.


 "굶어죽지 않을 만큼 아껴먹으며 버텨야 해."


 이고는 나와 라키사에게 배고프다고 마구 집어먹지 말라고 했다. 이고 말이 맞다.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한다면 그것이 언제 끝날지 모르니까. 전투가 끝날 때까지 이고가 미리 사서 쟁여놓은 것으로 버텨야 할 거다. 전투가 끝나고 어느 한 쪽이 점령한 후 바로 시장이 문을 열 거라는 보장도 없다. 그런 것을 생각해보면 아주 오랫동안 이고가 비축해놓은 식량으로 견뎌야 한다.


 "이고, 너는 이런 거 겪어본 적 있어?"


 라키사가 마른 고기를 칼로 작게 썰고 있는 이고에게 물어보았다. 이고는 칼질을 멈추고 라키사를 바라보았다.


 "그럴 리가 있어? 나도 처음이지. 그런데 그건 왜 물어봐?"

 "아무리 봐도 너는 몇 번 겪어본 것 같아서."


 이고는 표정을 바꾸지 않고 다시 물어보았다.


 "왜 몇 번 겪어본 것 같은데?"

 "그냥...너는 뭔가 아는 사람처럼 행동해서."

 "이런 것을 겪어봤으면 내가 여기 있겠어?"


 이고는 다시 칼로 마른 고기를 작게 썰기 시작했다. 이고가 이런 상황을 겪어본 것 같긴 하다. 하지만 라키사의 생각처럼 이고가 뭔가 아는 사람처럼 행동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이 상황을 처음 겪어보기 때문에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렇게 해야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고만 식량을 방 안에 잔뜩 쌓아놓은 것은 아니잖아? 다른 마딜인들도 지금 집 안에 먹거리를 잔뜩 비축해놓고 있을 거다. 식량을 최대한 아껴먹어야 한다는 것 또한 이 상황에서 조금만 생각해보면 바로 떠올릴 수 있는 생존 방법이다. 이것은 별로 이상하지 않다. 진짜 이상한 것은 이고와 루즈카, 블랑쉬블르가 치롤라가 시위 진압 과정에서 두들겨맞은 것에 보여주었던 태도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이상하다. 그런 일을 겪어보지 않았다면 남자가 여자를 흠씬 두들겨팼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남자가 여자를 마구 패는 상황이 당연히 여겨지는 상황이라면 전쟁 같은 것 밖에 없지 않을까?


 "정 배고프면 방 안에 더 있으니 갖다 먹어."


 이고가 배고프면 방에서 더 꺼내서 먹으라고 말했다. 그러나 방에서 더 갖다먹고 싶지 않다. 정말로 긴 시간을 대비해야 하니까. 식사를 하고 다시 아까 앉아 있던 자리로 돌아가 벽에 기대어 앉았다. 라키사도 아까와 마찬가지로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쭈그려 앉았다.



 추워서 잠에서 깨어났다. 창 틈으로 햇볕이 스며들어오고 있다. 아침이다. 누가 이불을 덮어주었다. 바로 옆에 라키사가 이불을 덮고 곤히 잠들어 있다.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제 일어났어?"

 "여태 안 잤어?"


 이고는 계산대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나를 바라보다 졸린지 입을 가리고 하품을 크게 했다.


 "한 명은 깨어있어야 할 거 아냐?"

 "그래서 밤새 한숨도 안 잔 거야?"

 "너네 둘 다 일어나면 그때 자려구."


 이고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나도 따라나갔다. 이고가 담배 한 대를 내게 건네주었다. 이고에게 담배를 받아서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역시나 거리에는 아무도 없다.


 "빨리 협상 타결되었으면 좋겠다."

 "응."

 "이게 뭐하는 짓이야?"


 이고가 투덜거렸다. 먹을 것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잤으니 짜증이 많이 났을 거다. 게다가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제발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무턱대고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다. 이고는 다시 한 번 하품을 했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응? 뭐를?"

 "이 상황 말이야. 너무 깊게 생각하다 오히려 광기에 휩쓸릴 수 있어."

 "그게 무슨 말이야?"

 "너무 상황에 매몰되지 말라구. 가끔은 남의 일이라고 생각해봐. 네 일이 아니라."

 "그게 될 리가 없잖아! 너야 외국인이니까 그게 되겠지만..."

 "노력해봐. 라키사 안 지켜줄 거야? 서로 지켜줘야 살아남을 거 아냐?"


 이고가 담배를 땅에 던지고 발로 비벼서 불을 껐다. 나도 담배를 다 태웠다. 이고와 안으로 들어갔다. 라키사가 일어나 있었다.


 "나 이제 잘께."

 "이고, 밤새 안 잤어?"


 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네 둘 다 자는데 나까지 잠들면? 그랬다가 그새 뭔 일 터지면 다 죽는 거잖아. 그런데 어떻게 자? 적어도 하나는 깨어있어야지."


 이고는 계산대에 올려놓은 담요를 갖고 구석으로 가서 드러눕고 이불을 덮었다. 그렇게 잠깐 누워있더니 갑자기 상반신을 벌떡 일으키더니 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나 잘 건데, 무슨 일 생기면 무조건 나 깨워. 절대로 너네끼리 해결하려 들지 말구."

 "응? 왜?"

 "무슨 일 터지면 진짜 외국인인 내가 나서야 제일 안전하니까."

 "나도 아드라스인인데 상관 없지 않아?"


 내 말에 이고는 짜증이 났는지 나를 노려보았다.


 "너 아드라스어 못하잖아! 지금은 좀 닥치고 내 말 들어! 일일이 다 물어보고 이해해야 하겠다고 하지 말구! 이 상황이 장난같냐?"


 이고가 내게 일갈한 후 다시 드러누워서 목까지 이불을 끌어올리고 창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또 고요함만이 서점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아침 먹을래?"

 "아니, 별로."


 이고는 잠든 것 같다. 엄청 피곤했을 거다. 그래도 왜 나한테 짜증이야? 자기도 이런 일은 처음 겪는다고 했잖아? 그러면서 이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확신에 차서 명령하는 것은 또 뭐야? 곰곰히 생각해보면 틀린 말은 아니고, 여기에서 이고와 싸워봐야 모두에게 피해만 될 뿐이니 입을 다물고 있지만 나도 짜증난다. 자기가 한 선택이 틀린 선택이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야?


 "이런 순간에 타슈갈이 내 옆에 있다니..."


 라키사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옆에 찰싹 붙어서 쭈그려앉아 있으면서 그렇게 중얼거리는 것은 지금 나보고 들으라고 하는 거야? 아침부터 이고에 라키사에 다 짜증을 어디 풀 곳을 못 찾아서 나한테 풀려고 하나.


 "그게 그렇게 못 마땅해?"

 "말만 지켜준다고 하고 내 치마 속이나 들여다볼 궁리나 하는 놈이 옆에 있는데 좋아해야해?"


 라키사가 고개를 내게 돌려서 눈을 가볍게 찡그리며 내게 물어보았다.


 "내가 무슨 네 치마 속을 들여다보려고 했다고 그래?"

 "너무 진지한데 혹시 진심 아냐?"


 라키사가 입을 가리고 작게 킥킥 웃었다. 얘는 기껏 한다는 소리가 또 내가 자기 치마 속 들여다볼 궁리나 하고 있다는 헛소리야. 나는 지금 심각해 죽겠구만.


 "그래도 나를 지켜주겠다고 말한 사람이 옆에 있어서 혼자인 것보다는 좋아."


 얘는 지금 뭐하자는 거야? 뭐 좋게 생각하자. 라키사가 진짜로 내가 자기 치마 속이나 훔쳐볼 궁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면 지금 이렇게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지도 않았겠지. 아주 유쾌하지 못한 장난이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는 수밖에.


 "연애 한 번 못해보고 이꼴이라니..."

 "나도..."


 라키사가 연애 한 번 못해보고 이꼴이라고 말하자 나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라키사가 나를 흘겨보았다. 왜 흘겨봐? 나도 지금까지 연애를 제대로 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구! 나는 연애를 즐겨본 적이 있는 줄 아나.


 "너는 그래도 아다비아랑 데이트 한 번은 해봤잖아!"


 라키사가 쏘아붙였다. 아다비아랑 무슨 데이트? 그 성적 발표일에 밥 사준 거? 그게 데이트라고? 장난해? 그런 식이라면 너랑 같이 학교 가던 것도 다 데이트야?


 "성적 발표일때 아다비아한테 밥 사준 거?"


 라키사는 계속 나를 흘겨보며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설마 그것을 진짜 데이트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냥 낙제 면하게 많이 도와주어서 고맙다고 밥 사준 거를?


 "그게 무슨 데이트야? 그냥 한 학기 내 공부 많이 도와줘서 고맙다고 밥 사준 것 뿐이야!"

 "그러면 나는? 왜 나한테는 밥 사주냐고 물어보지도 않았어?"


 그러고보니 라키사한테는 공부 도와줘서 고맙다고 밥 사주겠다고 한 적이 없었구나. 라키사도 숙제도 빌려주고 내 공부도 도와주고 했는데 라키사에게도 밥 사준다고 할 걸 그랬다. 그건 내가 조금 잘못했다. 아다비아처럼 거의 매일 서점에 찾아와서 내 공부를 도와준 것은 아니지만 라키사도 내 공부 많이 도와주었는데. 게다가 시험 문제에 대한 답은 라키사가 알려준 답으로 적었잖아.


 "전쟁 안 일어나면 밥 사줄까?"

 "내가 거지니? 너한테 밥 사달라고 해서 얻어먹게?"


 라키사가 노려보면서 날카롭게 대꾸했다. 그러고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무릎에 얼굴을 파뭍었다.


 "화났어?"


 라키사는 아무 말 하지 않는다. 진짜 화났구나. 얘한테도 고맙다고 밥 사준다고 했어야 했는데 잊고 있었다. 자기도 내 공부 도와줬는데 내가 아다비아한테만 밥을 사줘서 기분 엄청 나빴나보다. 라키사가 서점에 왔을 때 공부 도와줘서 덕분에 낙제 면했으니 고마워서 밥 사주겠다고 하며 약속을 잡을껄.


 "화 많이 났어? 내가 잘못했어. 화 풀어."


 라키사는 여전히 말이 없다. 갑자기 라키사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내가 큰 거 바란 것도 아닌데...나는 왜 이렇게 불행한 거야!"


 라키사는 고개를 계속 무릎에 파뭍은 채 흐느끼는 목소리로 작게 소리쳤다.


 "우리 이제 더 나빠질 것도 없잖아. 전쟁만 일어나지 않으면 이제 좋은 일 뿐일 거야."

 "뭐가! 뭐가 좋아져! 좋아질 것조차 없잖아!"

 "아직 이 서점은 안 망했잖아. 여기서 돈 벌면서 기다리다보면 어쨌든 다 좋아질 거야."


 라키사가 소매로 눈을 문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여기에서 일하게 된 건 행운이네. 너 때문에 말이야."

 "아, 그거야 뭐..."

 "지금 혼자 외롭게 떨고 있었다면 정말 끔찍했을 거야."


 라키사는 다시 턱을 무릎에 괴고 곁눈질로 나를 쳐다보았다.


 "흥!"


 라키사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라키사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너 지금 무슨 생각해? 왜 아무 말도 없어?"

 "나? 지금? 그냥 이것저것."


 사실 아무 생각도 하고 있지 않았다. 머리가 멎어버렸달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머리가 터져버린 것 같다. 그래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고 조금 이상하지 않아?"


 얘는 뜬금없이 왜 이고가 조금 이상하지 않냐고 물어봐?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고 있는 이 일련의 사태 속에서 이고의 행동이 이상하기는 하다. 그렇지만 지금 이고가 저쪽에서 자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것을 물어보고 이야기하는 것은 대놓고 뒷담화를 나누는 기분이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가?"


 내가 아무 말이 없자 라키사가 다시 턱을 무릎에 괴며 중얼거렸다.


 "대체 뭐가? 어떤 점이 이상한데?"

 "아무리 봐도 이고는 이런 상황을 몇 번 겪어본 사람 같아."

 "아까 이고에게 물어본 그거?"

 "네가 봤을 때는 어때?"

 "이고가 하는 말이 틀린 건 없잖아."

 "그러니까 조금 이상하다는 거야."


 라키사는 내 눈과 눈을 맞추며 눈을 살짝 크게 뜨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상황이 처음이라면 분명히 크게 당황하는 것이 정상이잖아. 우왕좌왕하고 고민하는 모습도 보여야 하구. 그런데 이고는 그런 모습이 전혀 안 보여. 겪었던 일을 또 겪어서 뭔가 다 안다는 느낌이랄까? 그렇지 않니?"

 "전쟁 경험담 듣는 거야 어려운 일도 아니고, 우리 때문에 냉정해야 해서 저러는 것 아닐까? 자기까지 우왕좌왕하고 당황하면 우리는 더 혼란에 빠져버릴테니까."

 "아니야. 숨기는 것이 아니라 아예 안 느껴져. 그래서 이상하다는 거야."

 "게다가 이고는 자신이 외국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잖아. 아마 그래서 아닐까? 우리와 달리 지금 이 상황에서 몇 발짝 떨어져 있는 것 같은 상태니까. 그래서 그렇게 행동하는 것 아닐까 싶어."

 "그렇고 보니 그렇기는 한데...그래도 뭔가 조금 이상해."


 라키사는 이고를 바라보았다. 이고는 여전히 깊이 잠을 자고 있다. 어떻게 저렇게 깊이 자나 신기할 만큼 잘 잔다.


 "이불 네가 덮어준 거야?"

 "아니. 나는 네가 나한테 이불 덮어준 줄 알았는데?"

 "아...네가 덮어주었으면 그래도 네가 나 지켜주려고 뭔가 하나 했다고 하려 했는데...이고가 덮어줬구나."


 라키사는 뭔가 실망한 듯 또 한숨을 쉬더니 턱을 무릎에 괴고 바닥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또 하루가 지나갔다. 잠에서 일어나보니 이고가 의자에 삐딱하게 기대어 앉아 있다. 오늘도 이고는 또 밤을 새었구나.


 "일어났냐?"

 "응."

 "더 안 잘 거야?"

 "응. 일어나야지. 그래야 너도 잘 거 아냐."

 "나 물 길러 나갔다 올께. 별 일이야 없겠지만 자지 마!"

 "안 자!"


 이고는 물동이를 양손에 들고 밖으로 나갔다. 이고가 앉아 있던 자리로 갔다. 계산대 위에는 책 몇 권이 놓여 있었다. 아드라스어로 된 책도 있고, 대륙공통어로 된 책도 있고, 마딜어로 적힌 저주술 책도 있다. 이고도 저주술 책 보는 거야? 이런 책은 봐서 뭐하려구? 어떤 책인지 펼쳐보았다. 전에 내가 펼쳐봤던 책이었다. '손 끝에서 부서지는 산들바람. 악에 차서 개가 울부짖는 소리. 머리 위에서 방긋 웃는 햇볕' 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던 그 책. 이거 말고 또 뭐 있었지? 바하르가 보던 책에는 '광기의 토끼가 피를 마신다, 파랗게 부서지는 피의 노랫소리' 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지. 라키사가 빌려갔던 책에는 '촉촉하게 땅을 적시는 빨간 웃음소리'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 문장들은 잊을 수가 없다. 대체 이것 갖고 뭐하자는 건지 너무 황당했으니까. 이고 앞에서 이 문장들이 적힌 책을 보며 마딜인으로써 정말 너무 부끄러웠으니까. 이 문장들을 외우기라도 하면 지금 상황이 다 끝나는 거야? 이 쓸 데 없는 문장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대체 뭐야? 전쟁이 일어난다면 이런 의미없고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허세 가득한 문장들을 외치며 싸우는 건가? 그러면서 이것은 저주술이다, 저주술로 적을 무찔렀다...그러는 거야? 진짜 전쟁 일어나지 말아라.


 담배를 태우러 문을 열었다.


 "담배 태울 거에요?"


 빨간 블라우스 위에 빨갛고 긴 외투를 걸치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짧은 검은 치마를 입은 하얀 피부의 여자. 이 여자 전에 봤던 그 여자 아냐? 그 담뱃불! 내 10마르라 뜯어간 여자! 여자는 나를 쳐다보고 있다.


 "예."

 "제가 불 붙여드릴께요."

 "10마르라 달라고 하려구요?"

 "어떻게 알았어요?"

 "전에 그렇게 해서 10마르라 뜯어갔잖아요."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무슨 말이냐는 듯 따지듯 말했다.


 "저는 뜯어간 것 아니에요! 당신 담배에 불을 붙여주고 돈을 받아간 건데 왜 그게 돈을 뜯어간 거에요?"

 "10마르라 줘야 불 붙여준다고 말 안 했잖아요!"

 "그러면 공짜로 불 붙여줘요?"


 여자의 말에 할 말이 없었다. 입에 담배를 물었다. 여자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내가 입에 물은 담배 끝을 검지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이번에도 손가락으로 가볍게 톡 건드리는 것만으로 담배에 불이 붙었다.


 "하아...받아요."

 "고마워요."


 주머니를 뒤져서 10마르라 동전 하나를 건네주자 여자가 활짝 웃으며 동전을 받아 왼손에 들고 있는 조그만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때는 밤이라 손가방이 무슨 색인지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이제 보니 그 가방은 검은색이었다. 이 여자는 정상이 아닐 거야. 빨간 블라우스 위에 빨간 외투를 걸친 것부터 이상해. 담뱃불을 붙여주고 10마르라씩 받아가는 것도 이상하구. 바하르 말로는 이것이 쉬운 저주술이 아니라고 했는데, 왜 그 뛰어난 저주술 실력으로 남의 담배에 불이나 붙여주면서 10마르라씩 돈을 뜯어가는지 이해가 안 된다. 얼굴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새하얀 피부, 새까만 눈동자와 검고 긴 머리카락, 분홍빛 입술. 나랑 나이는 비슷해 보이고 얼굴도 예쁘장하게 생겼는데 왜 이렇게 미쳤지? 여자는 서점 맞은편 카페를 바라보았다. 그 앞에는 개가 엎드려 있었다. 개는 눈을 꿈뻑이며 나와 이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개가 일어났다.


 팍!


 갑자기 개의 뱃가죽이 터지고 피가 촥 퍼졌다. 피가 물통의 물을 아래로 쏟아붓듯 아래로 쏟아졌고, 방울이 되어 사방으로 퍼져 떨어졌다. 개의 머리와 네 발, 꼬리가 땅으로 툭 떨어졌다. 피 위에 가죽이 떨어져 피를 덮었고, 피는 가죽 위로 조금씩 올라타며 가죽을 붉게 적셔갔다.


 "야, 뭐한 거야!"

 "예?"

 "너 지금 뭐한 거냐구!"

 "내가 뭘 하다니요?"

 "저 개! 네가 한 거잖아!"

 "내가 한 거 아니에요!"

 "여기에 나하고 너 밖에 없잖아! 저주술 쓸 줄 아는 사람이 지금 너 밖에 더 있어?"

 "내가 한 거 아니라니까요! 나는 저런 지저분한 짓 안 해요!"


 지금 장난해? 네가 한 것이 아니라면 누가 저 개를 터뜨렸다는 거야? 조금 전까지 멀쩡하게 있던 개다. 갑자기 몸이 터지고 피가 쏟아져나왔다. 살아있던 개가 갑자기 터져서 죽었다. 여기에 나와 이 여자 밖에 없고, 저 개를 건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것은 저주술 말고는 설명이 안 된다. 그리고 이 여자는 저주술을 쓸 줄 안다. 그러면 범인은 바로 이 여자 아니야? 이 여자일 수밖에 없다.


 "내가 안 그랬다구요! 왜 엄한 사람에게 누명을 씌워요?"

 "지금 여기에 우리 둘 밖에 더 있어요?"

 "그게 뭐 어쨌다구요!"

 "당신 저주술사잖아요!"

 "맞아요. 그래서요?"

 "저 개를 건든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저 개가 터졌어요. 그러면 누가 한 거겠어요?"

 "저는 아니에요!"


 미친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단단히 미친 줄은 몰랐다. 여기에 나와 이 여자만 있고 멀쩡한 개가 갑자기 터져 죽었는데 자기가 안 했으면 누가 했다는 거야? 여자는 계속 어이없다는 듯 나를 노려본다. 기가 막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연기한다고 넘어갈 상황이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씌울 수도 없다. 설마 내가 했다고 몰아가려구? 나는 저주술 쓸 줄 모르는데?


 "무슨 일이야?"


 라키사가 서점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이 여자가 개를 저렇게 죽였어!"


 라키사에게 카페 앞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라키사는 '헉' 소리를 내며 손으로 입을 가리더니 여자를 쳐다보았다.


 "나 진짜 아니에요! 왜 나만 갖고 그래요! 진짜 내가 안 했다구요! 몇 번을 말해요? 저런 일만 일어나면 다 내가 한 건가요?"

 "그거보다 저거..."


 라키사가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다시 그 개가 죽은 자리를 바라보았다. 뼈! 뼈 어디 갔어! 개 머리, 네 발, 꼬리와 가죽, 그리고 피바다. 그것 뿐이었다. 그제서야 이것이 지금 언성 높이고 싸우던 그 사건보다 더 괴이한 사건임을 깨달았다. 뼈가 없다. 배가 터져서 죽었다면 내장과 뼈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가죽 아래에 뼈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 것도 없는 땅 위에 떨어진 가죽이었다. 뼈와 내장이 만들어야 할 굴곡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 저 개는 애초에 몸 속에 피만 있었다는 거야?


 여자를 다시 노려보았다. 여자도 나를 노려보았다.


 "왜 무고한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그래요? 내가 안 그랬다구요! 억울해요! 나 진짜 안 했다구요!"

 "여기에 저주술 쓸 줄 아는 사람은 당신 뿐이잖아!"

 "아니에요! 나는 저렇게 더러운 짓 안 해요! 대체 어떻게 해야 내 말 믿을 거에요!"


 진짜 미친 여자다. 여자의 눈을 보니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 고였다. 여자는 한 손으로 눈을 가리더니 엉엉 울기 시작했다. 진짜로 여자의 눈에서 눈물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다. 연기라고, 나를 속이기 위해서라고 보기 어렵다. 자기가 무엇을 한 줄도 모르는 건가?


 "타슈갈, 정말 저 여자가 한 거 맞아?"

 "맞아! 여기에 나랑 저 여자만 있었는데 저 개가 갑자기 몸이 터졌다니까? 그리고 이 여자는 저주술사야!"

 "어떻게 저주술사인지 알아?"

 "내 담배를 손가락으로 건드려서 불을 붙여줬어! 10마르라 받아갔구!"


 라키사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고개를 숙이고 계속 엉엉 울고 있다.


 "일단 울음 그쳐요. 저 개가 그러면 제멋대로 저렇게 된 건가요?"

 "나 진짜 몰라요! 내가 안 했어요! 모두 나만 미워해! 내가 진짜 안 했는데!"


 그때 이고가 양손에 물이 가득 든 물통을 들고 나타났다.


 "야, 뭔 일이야?"

 "그게..."


 이고에게 손가락으로 카페 앞을 가리켰다. 이고의 두 눈이 둥그래졌다.


 "저거 뭐냐? 어떤 미친놈이 저 짓을 했어?"

 "나 아니에요! 진짜에요! 왜 나쁜 건 다 내가 했다고 그래요?"


 여자가 고개를 번쩍 들더니 이고를 노려보며 외쳤다. 이고는 깜짝 놀라서 움찔하더니 양손에 든 물통을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이봐요, 대체 무슨 일인데요? 타슈갈, 라키사,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내가 잠깐 담배 태우러 나왔거든. 그때 이 여자가 나타나서 나한테 담뱃불을 붙여주었어. 저주술로 말이야."

 "저주술로?"

 "응! 이 여자 저주술사야!"


 여자가 버럭 소리쳤다.


 "내가 담뱃불 붙여준 것이 뭐가 문제에요! 왜 그게 저 개를 죽였다는 이유가 되요!"

 "이봐요, 진정하세요. 지금 상황 알잖아요."

 "지금 상황 뭐요! 나는 정말 안 했다구요! 저 개 내가 죽인 거 아니에요!"

 "알았어요. 당신이 안 죽였어요. 되었죠?"

 "거짓말! 당신 지금 나 의심하잖아요! 내가 안 했어요! 왜 안 믿어줘요? 진짜 내가 안했다니까요!"

 "의심 안 해요. 당신이 안 했겠죠. 개가 제멋대로 터져죽는다고 해서 놀랄 거 없잖아요. 뭐 다른 놈이 했겠죠."


 갑자기 여자의 눈빛이 바뀌었다. 계속 눈물을 흘리고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지만 이고를 바라보는 표정은 한결 부드러워졌다.


 "진짜 내가 한 거 아니라고 믿어주는 거에요?"

 "예. 그러니까 진정해요."

 "진짜죠? 진짜 내 말 믿어주는 거죠?"

 "예. 다른 놈이 했을 거에요. 어떤 미친놈인지는 모르겠지만요."


 갑자기 여자가 이고 품에 덥썩 안기더니 이고를 꽉 껴안으며 다시 엉엉 울기 시작했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드디어 만났어! 내 말을 믿어주는 사람!"


 이고가 매우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어찌할 줄 몰라하며 라키사를 바라보았다.


 "알았어요. 당신 말대로 저건 당신이 한 거 아니에요. 그러니 이제 돌아가요. 밖에 있으면 위험한 거 알잖아요."


 라키사가 여자를 달래며 이고에게서 떼어내려고 하자 여자는 라키사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당신은 나 의심하잖아요! 일부러 나를 믿어주는 사람과 떼어놓고 내게 죄를 덮어씌우려는 거죠? 내가 모를 줄 알아요?"

 "아니에요! 쟤 그런 애 아니에요. 그러니 이제 나 좀 놓아줘요. 당신이 안 한 것은 알지만, 지금 이러면 사람들이 당신 더 의심할 거 아니에요? 저 개 시체도 치워야 하구요."

 "저거요?"


 여자는 이고를 놓아주더니 개 시체를 바라보았다. 개의 시체와 피가 점점 검게 변해가며 연기가 피어올랐다. 사방에 튄 피가 만든 핏자국도 검어졌다. 갑자기 딱 그 개 시체가 있는 곳에만 바람이 세게 불었다. 검게 변한 개의 시체와 피는 가루가 되어 사라져버렸다. 남은 것은 불로 무언가 태운 냄새 뿐이었다.


 "봤죠? 저는 아까 그런 추잡한 짓 안 해요!"

 "알았어요. 그러니 이제 어서 집으로 돌아가요. 밖에 돌아다니는 것은 위험해요."

 "예? 어디로요?"

 "집으로 돌아가요."

 "집이라니요?"

 "집 없어요?"

 "예."


 여자는 이고의 옷깃을 잡고 이고를 바라보았다. 이고는 한동안 멍하니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한숨을 푹 내쉬고는 따라들어오라고 했다. 내가 먼저 문을 열고 이고가 떠온 물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고, 라키사가 따라들어왔다. 마지막으로 이고와 여자가 들어왔다.


 "이거 다 책이에요? 굉장해요! 너무 멋져요!"


 여자는 서점 안을 뛰어다니고 안에서 뱅뱅 돌면서 춤을 추었다. 그렇게 춤을 추다 손으로 책을 톡 건드려보고 혼자 깜짝 놀라며 수줍은 듯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또 뛰어다니고 안애서 뱅뱅 돌며 춤을 추었다. 책을 펼쳐볼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고 손끝으로 책을 가볍게 톡톡 건드려보기만 하며 저러고 있다. 저건 진짜 미쳐도 단단히 미친 거야.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니다.


 "아침 먹었어요?"

 "아니요."


 이고가 방 안으로 들어가더니 먹을 것을 꺼내왔다.


 "나 이거 먹어도 되요?"

 "먹어요. 상황이 상황이라 많이 내놓지는 못하지만 이해해줘요."

 "아니에요! 너무 고마워요! 이렇게 훌륭한 것들을 저같은 것에게 주시다니요! 역시 정말로 당신은 착한 사람! 나를 믿어주는 사람!"


 여자는 조심스럽게 말린 과일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살살 빨아먹기 시작했다. 너무나 행복한 표정이다. 마치 이 세상에서 이렇게 맛있는 것은 처음 먹어본다는 듯한 표정. 살짝 눈을 감고 부드럽게 다문 입 속에서 턱만 살짝살짝 움직인다. 이 여자 대체 뭐지? 어쩌다가 이렇게 미쳐버린 거야?


 "이름이 뭐에요?"

 "내 이름은 켈라자야. 18살. 치르치나 출신."


 여자는 갑자기 반말로 자기 이름과 나이, 출신을 쭉 읊었다. 치르치나? 이래서 모두가 치르치나에 대해 별로 좋지 않은 반응을 보였던 건가? 저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면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 너무 당연하다.


 "나는 이고에요."

 "우와, 이름 멋져요! 여기 사람 아니죠?"

 "예. 남아드라스 공화국에서 왔어요."

 "그러면 저주술사 막 미워하지 않아요? 설마 속으로 나를 증오하고 있어요?"

 "아니에요. 그런 거 없어요."

 "아, 다행이다! 당신은 역시 나를 믿어주는 착한 사람이에요!"


 켈라자야는 이고에게 팔짱을 끼더니 얼굴을 팔에 비비며 행복한 듯 두 눈을 감고 활짝 미소를 지었다.


 "이고는 나보다 나이 많죠?"

 "예. 32살이니 당신보다 많죠."

 "그러면 말 편하게 해요, 오빠! 나 정말 오빠 있는 애들 부러웠어요!"

 "응, 그래."


 켈라자야는 나와 라키사를 보더니 이고에게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오빠, 쟤네들은 나쁜 애들이니까 쫓아내요!"

 "아니야. 쟤네들 착하고 좋은 애들이야. 그냥 오해했던 거 뿐이야."

 "아니에요! 나를 의심했다구요!"

 "당황했던 것 뿐이야. 이제부터라도 서로 인사하고 친하게 지내면 되잖아."

 "오빠가 그렇게 하라고 한다면...오빠는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니까요."


 켈라자야는 영 못마땅하지만 이고의 명령이니 마지못해 따른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 이름은 켈라자야. 18살. 치르치나 출신."

 "나는 타슈갈이야. 너랑 동갑이고 인파사 출신이야."

 "반가워. 나는 라키사고, 타슈갈처럼 너랑 동갑이야. 나는 뮈젤 출신이야."



 식사를 마치고 이고와 담배를 태우러 나가려는데 켈라자야가 따라나왔다.


 "제가 담뱃불 붙여드릴께요!"

 "응? 굳이 그럴 필요 없어. 안에서 쉬고 있어."

 "아니에요. 오빠는 그냥 붙여드릴께요. 너는 10마르라!"

 "쟤도 그냥 붙여줘. 이 상황이 끝날 때까지 같이 지내야 하는데. 이제는 모르는 사람도 아니잖아?"


 켈라자야는 여전히 내가 영 못마땅한 눈치였다. 이고를 바라보았다. 이고의 표정이 말해주고 있었다. 지금 어쩌겠냐. 얘가 미쳐서 날뛰면 그건 더 큰 일이야. 너도 봤잖아. 얘 저주술사야. 어줍잖은 놈들이 아니라 진짜 위험한 애라구. 이런 애가 폭주하는 순간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지금은 일단 이렇게 하는 수밖에 없어. 나도 미치겠다. 얘는 왜 자꾸 나한테 오빠, 오빠 하면서 달라붙어대냐? 이고가 말하지 않았지만 이고의 표정을 보고 이고가 속으로 하고 있는 생각이 귀에 울리는 듯 했다.


 켈라자야가 똑같은 방법으로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치르치나에서 어떤 일 했어?"

 "거기 나빠요. 다 나쁜 놈들 뿐이에요."

 "응? 거기 어떻길래?"

 "다 나빠요. 맨날 때리고 혼내고 나만 다 잘못했다고 하구..."


 맨날 때리고 혼내고 켈라자야만 다 잘못했다고 했다고? 얘가 이상한 걸까, 치르치나 사람들이 진짜 이상한 걸까?


 "뭐? 진짜?"

 "너 또 내 말 안 믿지?"

 "아니야, 네 말 믿어!"

 "그러면 왜 물어봐?"

 "놀라워서...진짜 사람들이 맨날 너 학대했어?"

 "학대? 그게 뭐야?"

 "그러니까 막 때리고 괴롭히는 거."

 "그게 '학대'라는 거야?"

 "응."


 얘는 또 뭐지? '학대'라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사람은 또 처음 본다. 표정을 보니 나를 시험해보려고 하는 것이거나 비꼬는 것이 아니다. 진짜 몰라서 물어보는 표정이다. 이고, 루즈카, 블랑쉬블르가 보여주었던 그 폭력에 대한 반응과는 전혀 다르다. 어린 아이가 '이것은 뭐에요?'라고 물어보는 것과 똑같은 반응이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나한테 한 건 학대 맞을까?"

 "뭘 어떻게 했는데?"

 "맨날 때리고, 구박하고, 괴롭혔어. 툭하면 밥도 굶기구. 항상 나한테 재수없다고 하고 뭔가 안 좋은 일이 있다고 하면 다 나 때문이라고 하구."

 "진짜?"

 "너 내 말 안 믿지?"

 "아니야! 진짜로 네 말 믿어. 단지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

 "내 말이 거짓말이라는 거야?"

 "아니라니까! 내가 알던 세상과 너무 달라서..."

 "그래서 거짓이라는 거니?"

 "아냐, 아냐. 그런 곳도 존재하는구나..."


 이고도 놀랐는지 담배를 들고 켈라자야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대체 치르치나에서 얘는 어떤 일을 겪어온 거야? 얘 말 진짜 다 사실일까?


 "치르치나에서는 뭐 먹었어?"

 "그냥 먹으면 아픈 것과 풀을 넣고 푹 끓인 거."

 "그냥 먹으면 아픈 것?"

 "응. 냄새도 고약하고 곰팡이도 피어있고 그런 거. 그런 거랑 말린 풀 넣고 푹 끓인 거 먹었어."


 설마 썩은 것? 버리는 것 말하는 거야? 그런 것도 팔팔 끓이면 먹을 수는 있으니까. 그런데 설마 그런 것을 맨날 밥으로 먹으라고 주었다고?


 "안으로 들어가자."

 "예, 오빠!"


 안으로 들어왔다. 이고는 문을 잘 잠그고 켈라자야에게 물어보았다.


 "너 저주술은 어디에서 배웠어?"

 "치르치나에서요."

 "너 글은 아니?"

 "예. 글 배웠어요."

 "그래, 알았어. 나 잠깐 눈 좀 붙일께. 서점 안에서는 절대 저주술 쓰지 마. 알았지?"

 "알았어요. 여기 안에서는 절대 저주술 안 쓸께요!"


 이고가 어제 드러누워서 자던 자리로 가서 드러누웠다. 켈라자야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나와 라키사 맞은편에 앉았다.


 "너희들 여기에서 살아?"

 "타슈갈은 여기에서 살고 나는 다른 곳에서 살고 있어."

 "여기 너무 아름다워. 책이 이렇게 많은 공간이라니!"

 "너 책 좋아해?"

 "응. 나 책 매우 좋아해. 그런데 읽은 적은 별로 없어."


 책이 가격이 저렴한 것이 아니라 못 구해서 별로 못 읽어봤나보다. 그런데 여기에 켈라자야가 읽을 수 있는 책이 얼마나 될까? 저주술 책 외에는 아무 것도 못 읽을 것 같은데.


 "켈라자야, 너는 치르치나에서 여기로 바로 온 거니?"

 "아니."

 "다른 곳도 돌아다녔어?"

 "응. 여기저기."

 "다른 곳은 어때?"

 "좋았어."


 켈라자야가 하품을 했다. 안으로 들어가서 이불을 들고 나와 켈라자야에게 건네주었다.


 "졸리면 덮고 자."

 "고마워. 나 조금 잘께. 이런 멋진 곳에서 잠을 자다니 너무 황홀해."


 켈라자야는 가방을 베고 드러누워 이불을 덮었다.


 "전쟁 안 나니까 걱정하지 마."

 "응? 무슨 말이야?"

 "일어날 전쟁이라면 벌써 일어났어. 걱정하지 마."


 켈라자야는 전쟁이 안 일어날 거라며 라키사를 바라보았다. 라키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도 너를 믿어. 꼭 네 말이 맞았으면 좋겠어."


 라키사와 둘만이 깨어 있는 시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 있다. 정말 전쟁은 안 일어나겠지? 오늘도 시간은 계속 흘러간다. 이고가 일어났고, 켈라자야가 일어났다. 식사를 하고, 또 서점 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한숨 자고 일어난 켈라자야는 아까와 달리 얌전히 있었다. 마음의 안정을 찾은 모양이었다. 켈라자야는 독서를 좋아한다고 하고서 책은 건드리지 않았다. 켈라자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다. 뭔가 생각을 하고 있기는 할 텐데.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가 버렸다. 이제 1115년 10월 14일. 밤새 켈라자야와 이고가 무언가 작은 목소리로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얼핏 깨었을 때 둘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잠에서 아주 깨어난 아침에 보니 둘은 그때까지 안 자고 있었다.


 이고와 켈라자야가 잠에서 깨어난 후, 점심을 먹었다. 또 조용히 하루가 흘러가고 있었다.



 저녁 즈음. 거리가 멀리서부터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환호성을 지르는 소리가 점점 서점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협상이 타결되었습니다! 협상이 타결되었습니다!"


 그렇게 기다리던 저 소리! 너무 기뻐서 라키사와 껴안았다. 우리 살았어! 이제 더 나빠질 것은 없어! 좋아서 라키사와 껴안고 방방 뛰었다. 그러다 라키사와 눈이 마주쳤다.


 "아, 미안!"

 "괜찮아. 우리 정말 살았어! 다행이야!"


 라키사에게 미안하다고 하자 라키사가 괜찮다고 하며 계속 활짝 웃으며 기뻐했다. 거리로 달려나갔다. 내성쪽을 향해 달려갔다. 거리에 벽보를 붙이고 있는 군인이 보였다. 사람들이 그 앞에 구름떼처럼 몰려 있었다. 사람들을 헤치고 벽보에 적힌 내용을 읽었다.


 "아..."


 남부군과 북부군은 에드자 안으로 진입하지 않고 양쪽 모두 일부 병력을 주둔시키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인식론 강제 교육 정책은 폐지한다. 가장 중요한 에드자 대학교 폐교령! 폐교령은 철회되었다. 대신 에드자 대학교는 모든 건물을 완벽히 재건할 때까지 무기한 휴교령으로 바뀌었다. 학교의 모든 건물이 홀라당 다 타버렸으니 언제쯤 다시 지어질까? 천막에서 수업 듣는 것은 절대 안 된다는 말이었다. 정부가 에드자 대학교 건물들을 다시 지을 의욕이 있을까? 저 말대로라면 건물만 계속 안 짓고 버티면 어쨌든 학교는 폐교된 상태와 다를 게 없잖아.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서 기쁘기는 하지만 이번에는 에드자 대학교가 다시 문을 열 때까지 기약없이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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