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기적과 저주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2장 11화

좀좀이 2017. 9. 28.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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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2장 11화


 어느덧 10월 1일이다. 아침 공기가 차다. 낮에는 아직도 따스하지만 밤에는 확실히 춥다. 이제는 누가 뭐라고 해도 가을이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자 월동 준비를 해야 하는 계절. 그러나 나는 이 가을에 수확할 것이 없다. 학교에 가지 않고 하루 종일 서점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 생활에 적응이 되어갈 뿐이다. 긴 방학을 보내고 며칠 학교 나갔다가 학교가 폐교되었으니 놀랄 일도 아니다. 오히려 잠시 학교에 나간 그 며칠이 오히려 더 이상한 날이랄까.


 어제 이고가 루즈카 집에 다녀왔다. 이고는 치롤라 소식을 전해주었다. 치롤라는 그그저께 퇴원해서 루즈카 집에 머무르고 있다고 한다. 병원에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잠만 잔다고 한다. 가볍게 음식을 먹고 깊게 자고, 잠시 일어나서 가볍게 음식을 먹고 다시 자는 생활을 반복중이라고 한다. 루즈카와는 그 어떤 대화도 안 나누려고 하고, 루즈카와 얼굴 마주치는 것도 극도로 피하려고 한다고 한다.


 "루즈카한테 많이 화났나봐. 자기편 끝까지 안 들어준다고."


 이고는 루즈카가 정말 안 되었다는 투로 말했다. 이고의 말이 다 맞지는 않을 거다. 설령 다 맞다 해도 다 믿고 싶지 않다. 치롤라가 너무 극단으로 나간 건 맞아. 이건 내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한 거니까. 치롤라가 끌려가지도 않고 어디 부러진 곳 없이 '적당히' 얻어터지는 수준으로 끝났다는 것은 분명히 다행이다. 밤에 시위대를 마구 짓밟고 두들겨패는 소리를 직접 들었으니까. 하지만 병원 복도에서 이고와 루즈카가 나누던 이야기가 계속 떠오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여자가 그렇게 맞았다는 것 그 자체가 경악할 일이잖아? 여자조차 두들겨패서 진압했다는 그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경중을 따지고 있는 모습...이건 와닿고 안 와닿고의 문제가 아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여자를 그렇게 개 패듯 패? 진짜 흠씬 두들겨맞은 것 같던데. 얼굴이고 몸이고 구분하지 않고 마구 때렸던데 그게 놀랍지 않다니...그래서 이고의 말이 다 맞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루즈카도 치롤라에게 뭔가 잘못한 것이 있을 것 같고.


 이고는 치롤라가 일곱 가지 꿈의 비밀을 깨닫기 위해 잠만 열심히 자는 것이 차라리 잘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지금 제정신일 리가 없을 텐데 그 상태에서 뭐 한다고 하다가 더 큰 사고를 일으킬 바에는 차라리 조용히 잠이나 자는 게 낫다나.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서점에서 나가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않으니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제 상황이 안정된 것 같아 보여도 아직 여전히 군인과 경찰들이 곳곳에서 거리를 지키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괜히 뭔가 하겠다고 하다가 사고를 치면 일이 더 커질 것이다.



 지금이야 치롤라가 일곱 가지 꿈의 비밀을 밝히겠다고 잠만 쿨쿨 자는 것이 낫겠지. 그렇지만 과연 정확히 이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만 그렇게 잠을 잘까? 일곱 가지 꿈의 비밀을 밝히겠다고 한 사람들은 먹고 자는 것만 반복하다 폐인이 되던데? 우리 동네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니다. 다른 지역 사람들로부터도 똑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일곱 가지 꿈의 비밀에 목매달기 시작하면 먹고 자는 것만 반복하면서 사람이 폐인이 되어간다고. 치롤라도 이제 실상 폐인이 되어버리는 것 아닐까? 일곱 가지 꿈의 비밀은 답은 고사하고 실낱 같은 실마리조차 존재하지 않는 전설이잖아. 키란이 일곱 가지 꿈을 꾼 사람이라고 하지만 키란이 정말 자기가 일곱 가지 꿈을 꾸었다고 말한 적이 있나? 키란의 저주술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그가 일곱 가지 꿈을 모두 꾸고 깨달았을 거라고 추측하는 것 뿐이잖아. 상황이 안정된 후에 치롤라가 그 일곱 가지 꿈의 전설에서 벗어나 다시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지금 사고를 치고 더 큰 문제를 만드는 것보다야 얌전히 잠이나 자는 것이 낫겠지만 말이다.


 치롤라와는 그렇게 친하지 않다. 게다가 치롤라는 저주술사다. 걔가 일곱 가지 꿈의 비밀을 쫓다가 폐인이 된다 해도 별 일은 없을 거다. 어차피 걔야 저주술사고, 저주술사가 저주술의 비밀을 밝히겠다고 연구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 그렇지만 일곱 가지 꿈이 뭔지도 모르는데 그 꿈의 비밀을 밝히겠다고 스스로 폐인이 되겠다고 하는 것을 그냥 놔두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루즈카는 훌륭한 저주술사라고 하니 루즈카는 뭔가 답을 알고 있을까? 루즈카는 일곱 가지 꿈의 비밀에 사로잡혀 폐인이 되어버린 사람을 구제하는 방법을 알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만약 그 답을 알고 있다면 전국 여기저기에 퍼져 있는 바로 그 폐인이 되어버린 저주술사들을 치려해 주어야지, 왜 여기 있어? 치롤라가 다른 사고를 치고 죽으면 자기가 죄책감을 크게 받을 것 같으니 그것 피하려고 치롤라에게 독 같은 일곱 가지 꿈의 비밀을 주입한 걸까?


 그렇지만 이렇게 삐딱하게 보아야할 이유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치롤라가 일곱 가지 꿈의 비밀 이야기를 모를 리가 없지. 걔는 원래 저주술사니까 나보다 그 이야기를 더 잘 알고 더 많이 접했을 거다. 이번에 진압당하는 과정에서 자기의 무능력하고 무기력함을 깨닫고 그 방법으로 한 방에 역전하기로 결심한 것이라 보아야 할까? 어쨌든 루즈카가 명령한 것이 아니라 치롤라 스스로 결정한 것이니까. 치롤라가 뭔가 스스로 생각이 있어서 일곱 가지 꿈의 비밀을 밝혀보기로 결심한 거다. 그 생각이 어떤 생각인지는 치롤라에게 직접 들어보아야 알 수 있을 거다. 물론 치롤라에게 그것을 물어볼 수 있는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보다 더 궁금한 것은 바로 이고와 루즈카다. 어떻게 그렇게 냉정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지? 대체 과거에 무슨 일을 겪었던 거야? 그 복도에서의 이야기는 충격이 너무 크다. 그 자리에서 어떻게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냐고 따져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왠지 언성이 높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것만은 물어보고 싶다. 물어보지 않고 꾹 참고 있는 이유는 그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서로 얼굴을 붉히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어서다. 왠지 이고는 그것에 대해 또 대충 대답하려고 하고, 나는 그 태도에 화가 나겠지. 게다가 이 이야기가 나오면 라키사도 분명히 흥분하며 달려들 거다. 아마 셋 다 얼굴이 시뻘개지지 않을까? 어떤 이야기들이 오고 갈지는 모르겠지만 막연히 그렇게 될 거라고 예상한다.


 둘이 그렇게 이야기한 것에는 자기들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일 거다. 루즈카는 전쟁을 직접 겪었으니 이해가 된다. 전쟁중 험하고 괴로운 일을 많이 겪었겠지. 전쟁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전쟁 시절 우르간 대제국군이 마딜인들에게 얼마나 잔악무도한 만행을 저질렀는지는 어려서부터 매우 많이 들었다. 루즈카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른다. 바하르가 항상 '루즈카님'이라고 깍듯이 높여서 부르니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만 알 뿐이다. 하지만 전쟁 시절을 겪었으니 어렸을 적부터 들어온 전쟁 시절 우르간 대제국군이 마딜인에게 벌인 잔악무도한 만행 중 하나 정도는 직접 목격했을 거다. 그래서 그런 말을 했다고 생각한다면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비록 나는 상상속에서조차 그 충격과 실상을 그려보기 어렵지만, 루즈카는 그것을 직접 보고 겪었을 수 있으니까.


 그래, 루즈카는 그렇다 치자. 그런데 이고는 뭐야? 남아드라스 공화국이 마딜 공화국처럼 심한 전쟁을 겪었어? 이고가 지금 32살이라고 했었다. 32년 동안 이고가 특별한 전쟁이라도 겪었어? 아니면 남아드라스 공화국에서는 남자가 여자를 두들겨패는 것이 일상이야? 남아드라스 공화국 사람들에게 그것이 일상이라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그랬다면 나도 어렸을 적 집에서 아버지가 어머니를 두들겨패는 장면을 매일매일 목격해야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손찌검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둘이 언성을 높이며 다툰 적은 있지만, 폭력을 사용한 적은 없다. 어디까지나 말로만 무섭게 다투셨다. 이고의 유년기가 막장이었나? 막장 가족에 막장 동네에서 살았던 건가? 맨날 남자가 여자를 두들겨패는 것이 일상인 그런 동네, 그런 집? 그래서 마딜 공화국으로 도망온 거 아냐? 대체 자기가 뭘 얼마나 끔찍한 상황을 겪었다고 그렇게 말을 막 할 수 있는 거야? 아니야, 남아드라스 공화국은 여기 마딜 공화국보다 훨씬 나은 곳이잖아. 게다가 우리 부모님을 보면 아드라스인이라고 남자가 여자를 두들겨패는 문화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블랑쉬블르도 아드라스인 여자인데, 이고가 블랑쉬블르를 보고 도망가고 숨기는 할 지언정, 블랑쉬블르를 때리는 일은 없었다.



 이고를 바라보았다. 이고는 조용히 책을 읽고 있다. 대체 같은 책을 몇 번 읽는 거야? 이고가 읽는 책은 여름에 루즈카가 서점에 가져온 키란 전기다. 출판될 거라고 했지만 아직까지 출판이 안 되고 있는 모양이다. 만약 출판되었다면 이고가 몇 부 구입해서 서점에 들고 왔을 테니까. 아마 모든 인쇄소가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을 인쇄해대느라 키란 전기의 인쇄는 아직까지도 밀리고 있나 보다. 이고가 이상하게 키란 전기만큼은 열심히 읽는다. 열심히 읽는 것인지 습관처럼 저 책을 집어들고 멍하니 페이지만 계속 넘겨대는 거야? 키란 전기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길래 저렇게 몇 번이고 계속 보는 걸까? 마딜어로 된 책이라 읽기 힘들어서 저러는 건가? 그런데 이고는 마딜어도 잘 하잖아? 게다가 이게 하루 이틀 읽는 것도 아니구.


 라키사도 책을 읽고 있다. 라키사는 여러 책을 돌아가며 읽고 있다. 학교에서 배우는 교재도 보고, 셀베티아어 교재도 보고, 간간이 저주술 책을 보기도 한다. 저주술 책을 보는 것은 아무리 봐도 신기하다. 라키사는 무슨 말인지 보고 이해가 갈까? 저 마딜인의 망신 같은 책을 보며 라키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무리 봐도 저주술 책은 무언가 뜻을 담고 있는 책이 아닌 것 같던데. 설마 라키사는 저 책에 담긴 의미를 찾아내는 능력을 갖고 있는 걸까? 그건 아닐 거다. 저것은 맨정신으로 보고 이해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다. 만약 저 책을 읽고 이해해낸다면 라키사가 저주술사라는 말이다. 하지만 라키사는 저주술을 사용할 줄 모른다. 게다가 바하르는 저 책에 담긴 문장을 음미하고 완벽히 상상해서 느낌과 같이 문장을 외우는 것이라 했다. 뭘 음미하고 뭘 완벽히 상상하라는 거고, 뭔 느낌과 같이 문장을 외우라는 거야? 라키사도 그건 딱히 모르는 것 같다. 저기 인쇄되어 있는 엉터리 문장들이 재미있어서 계속 보는 걸까? 아니면 진짜로 외국어로 된 책만 보다보니 머리가 아파서 머리 식히려고 그나마 마딜어로 된 책인 저주술 책을 보는 걸까?


 서점 문을 조심스럽게 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서 누가 들어왔는지 바라보았다. 블랑쉬블르였다.


 "안녕! 왜 이렇게 분위기가 확 가라앉아 있어?"

 "항상 이랬잖아."


 블랑쉬블르의 말에 이고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블랑쉬블르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가볍게 인상을 찌푸렸다.


 "뭐가 항상 가라앉아 있었다고 그래? 오늘은 완전 초상집 분위기인데. 오랜만에 왔더니 분위기가 너무 안 좋네. 역시 내가 안 와서 이렇게 된 거야?"


 블랑쉬블르는 생각이...있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여기 상황을 자기도 알고 있을텐데 저렇게 태연하게 웃으며 장난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지금 여기는 웃고 떠들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닌데.


 "서점에 손님이 계속 한 명도 안 오고 있어요."

 "그래? 이고가 손님이랑 한 판 붙었지?"

 "아니야! 시위 때문에 아무도 책을 안 읽어."


 블랑쉬블르가 모를 리 없겠지만 일부러 대답해주었다. 당장 블랑쉬블르 당신도 서점에 한동안 안 왔잖아요. 이렇게 흉흉하고, 학교는 폐교한 상황에서 누가 서점에 책을 빌리러 오겠어요. 하지만 여전히 블랑쉬블르는 진지한 모습이 하나도 없다. 고작 한다는 말이 이고가 손님과 한 판 붙어서 손님들이 다 떨어져나간 것 아니냐는 말을 했다. 그 말에 이고가 황당하다는 듯 헉 소리를 짧게 내더니 바로 반박했다.


 "진짜? 왠지 이고의 저 못된 성격 때문에 사람들이 안 오는 것 같은데..."

 "아니라구! 진짜로 손님들이 안 와. 시위 일어난 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안 오고 있어."

 "어머! 그거 심각한 문제인데? 나라도 책 빌려갈까?"

 "됐다. 그러지 마. 아직은 충분히 잘 버틸 만 하니까. 이제 시위도 끝났으니 사람들이 책 빌려가겠지."

 "잘 되었다!"


 블랑쉬블르는 이고의 반응에 활짝 웃으며 손뼉을 쳤다.


 "타슈갈, 누나 안 보고 싶었어? 어떻게 내가 그렇게 안 오고 있는데 한 번도 안 찾아와? 이 누나 상처받았어!"

 "전혀요. 제가 누나를 보러 왜 찾아가요?"


 라키사가 나를 살짝 흘겨보는 것이 느껴지는 것 같다. 라키사, 아니라구! 블랑쉬블르는 원래 저러고 놀아! 저 말을 진짜로 받아들이면 안 돼!


 "어머, 라키사! 너 지금 나 질투하는 거야?"

 "제가요? 제가 무슨 질투요?"

 "너 지금 타슈갈 흘겨본 거 아니야?"

 "제가 흘겨보다니요? 타슈갈이 진짜 언니 좋아해요?"

 "아니야! 저거 블랑쉬블르의 장난이야!"


 라키사가 아주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블랑쉬블르에게 물어보았다. 야, 진짜 아니야! 블랑쉬블르를 내가 왜 좋아해? 저거 다 블랑쉬블르의 장난이라니까! 갑자기 블랑쉬블르가 깔깔 웃었다. 라키사도 따라서 웃었다.


 "타슈갈 정말 재미있지 않니? 놀리는 재미가 너무 쏠쏠해!"

 "그러게요. 잠깐 연극 좀 했다고 저러다니요."


 둘 다 정말 짓궂네. 사람 가지고 장난칠 일이 따로 있지. 둘에게 속았다는 생각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어? 타슈갈 얼굴 빨개졌어! 뭐 숨기고 있는 거 아니야?"

 "그러게요. 정말로 뭐 숨기고 있나봐요."

 "아니라니까!"


 그래도 모처럼 웃는 소리가 들리니 좋다. 그냥 이 한 몸 희생했다고 생각할까? 그렇지만 라키사가 계속 나를 그게 진짜였냐는 듯 눈을 살짝 게슴츠레 뜨고 바라본다. 아니라구! 그런 눈으로 그만 보라구! 내가 블랑쉬블르를 좋아할 리가 없잖아! 이고를 바라보았다. 이고도 미소를 짓고 있다. 야! 너는 블랑쉬블르의 마수에서 벗어났다고 지금 좋아하는 거야? 이러면 안 되지! 블랑쉬블르는 보나마나 너를 보러 온 건데 왜 내가 이렇게 당해야 해?


 "이고, 잘 지냈어? 나 안 보고 싶었어?"

 "내가 너를 보고 싶었을 리가 있겠냐? 오늘은 무슨 일로 왔어?"

 "무슨 일이라니? 나 여기 오면 안 돼?"

 "그건 아니지만..."

 "이번 시위에서 잘 살아남았나 보러 왔어."

 "참 일찍도 온다."


 이고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블랑쉬블르에게 퉁명스럽게 대한다. 블랑쉬블르는 계속 혼자 싱글벙글이다. 이고가 저렇게 무성의하고 퉁명스럽게 말하면 화날 법도 한데 뭐가 좋다고 싱글벙글인지 모르겠다. 항상 저러기는 하지만 말이다.


 "너희들도 시위 잘 피했다니 다행이야!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니?"


 그게 걱정한 사람의 태도인가요? 태도를 보면 저 말이 영 와닿지 않는다. 블랑쉬블르의 질문에 라키사가 대답했다.


 "예. 저희는 잘 넘겼어요. 그런데 치롤라가..."

 "치롤라? 그 루즈카가 데려왔다는 애? 걔가 왜?"

 "시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다 크게 고생했어요."

 "크게 고생하다니? 어떻게?"

 "시위 진압 과정에서 많이 맞았어요."

 "어머...어째!"


 블랑쉬블르가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건 진짜로 놀랐나보다.


 "많이 다쳤어? 몸은 어떻대?"

 "그그저께 퇴원했대. 별로 안 다쳤어. 운이 좋았지."

 "정말 다행이다


 이번에는 이고가 대답했다. 블랑쉬블르는 이고의 말에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블랑쉬블르에게도 시위때 괜찮았냐고 물어보는 것이 그래도 예의겠지?


 "블랑쉬블르는 이번 시위때 괜찮았어요?"

 "나? 나야 당연히. 이 정도쯤이야."

 "이 정도쯤이요?"

 "왜? 이번에는 모든 게 다 평화로웠잖아? 진압도 별 거 없었고."

 "진압이 별 거 없었다구요?"


 블랑쉬블르의 말에 깜짝 놀랐다. 이번 시위에 대한 진압이 별 거 없었던 거라구?


 "응. 너무 평화롭던데?"

 "이게요?"

 "이 정도면 평화로웠던 거 아니야?"


 블랑쉬블르는 오히려 내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내 두 눈을 응시하며 되물어보았다. 나는 블랑쉬블르가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다. 그런데 그것은 블랑쉬블르도 마찬가지인가보다. 저 표정이 가식이나 장난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당연한 것을 말했는데 왜 그렇게 놀라냐는 듯한 반응이다.


 "몽둥이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두들겨팼는데요?"

 "그거 말고 특별한 것 없었잖아. 게다가 시위대가 저주술 쓰려다가 일이 그렇게 커진 거라고 들었어."

 "그래도 여자를 그렇게 패는 건 너무하잖아요."

 "여자는 저주술 못 쓰니? 여자는 공격 못 해?"

 "그렇기는 하지만...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어떻게 그렇게 마구 두들겨팰 수가 있어요?"

 "어쨌든 진압한 경찰과 군인들이 때린 것 밖에 없잖아."

 "그게 정상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정상인데?"


 이거 뭐지?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에게, 아니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 저 멀리 달, 별에서 온 사람에게 '이곳은 이런 곳이랍니다'라고 설명해주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여기에서는 최소한 남자가 여자를 때리지는 않아요. 남자가 여자를 때리는 것은 형편없는 남자의 상징이라구요. 그러므로 진압 과정에서 여자를 무자비하게 두들겨팬 것은 이곳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일이에요. 이렇게 설명해주어야 하나?


 "남아드라스 공화국에서는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에요?"

 "남아드라스 공화국?"


 블랑쉬블르가 이고를 바라보았다. 이고 표정이 조금 전과 달리 아주 딱딱하게 굳었다. 이고의 얼굴에 정을 대고 망치로 정을 때리면 이고의 얼굴이 부서져버릴 것 같다. 블랑쉬블르도 이고의 표정을 보더니 장난기가 싹 사라졌다.


 "너의 말을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어. 대체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시위대가 저주술을 쓰려고 했어. 그래서 몽둥이로 때려서 진압했어. 그게 왜? 여자가 시위하면 무조건 봐줘야 하니? 여자는 저주술 못 써? 칼 못 휘둘러? 다 할 수 있잖아."

 "그래도 그렇죠!"

 "뭐가? 진압한 사람들이 작정하고 죽이려고 들었어?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도 다 잡아 족쳤니? 집집마다 사람들을 끌어내서 죽이고 집에 불을 질렀어? 이 도시 전부 멀쩡하잖아. 체포된 사람이 많다고는 들었어. 처형된 사람들도 좀 있고. 하지만 그것 뿐이잖아. 그러면 뭘 하라는 거야? 뭘 어떻게 진압하라는 거야? 내성으로 쳐들어간 무리를 진압한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니?"


 진짜 답답하다. 말이 안 통한다. 지금 그 이야기가 아니잖아! 어떻게 진압 과정에서 여자를 그렇게 두들겨팰 수 있냐는 것을 이야기하는 거잖아.


 "진압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여자를 그렇게 때릴 수 있냐구요! 남아드라스 공화국에서는 남자 여자 구분 안 하고 그냥 막 패요?"

 "너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니? 정확히 이야기해줄래?"

 "그러니까 남아드라스 공화국에서는 일상에서도 남자가 여자 막 패도 아무렇지 않냐구요!"

 "너도 아드라스인이잖아. 당연히 남자가 여자를 때리면 한심한 남자지."

 "그런데 이번 진압에서 여자가 두들겨맞았다구요! 진압이야 보나마나 대부분 남자가 했을 거구요!"


 블랑쉬블르는 잠시 말없이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네 말은, 진압한 사람은 남자야. 그리고 시위에 참여한 여자가 두들겨맞았어. 그래서 남자가 여자를 때려서 놀랐다는 거야?"

 "예!"

 "타슈갈, 잘 생각해봐. 그게 그 상황에서 그렇게 중요하니? 라키사가 너를 칼로 찌른다면 너는 안 죽니? 여자가 칼로 찌른 거라서?"

 "그건 아니죠."

 "그런데 왜 자꾸 거기에 집착해? 나는 이해를 못 하겠어."


 서로 대화가 안 통한다.


 "남아드라스 공화국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어요?"

 "이런 일?"

 "예. 이런 시위요."


 블랑쉬블르는 다시 한 번 이고를 바라보았다. 이고의 얼굴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다. 블랑쉬블르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있었어. 이것보다 더 심한 적도 있었구."

 "그때 어땠어요?"

 "글쎄...나는 잘 모르겠어."


 블랑쉬블르가 대답을 피했다. 심한 적이 있다고 말해놓고 자기는 잘 모르겠다고 하는 것은 또 무슨 말장난이야? 더 따져들고 싶었지만 참았다. 더 따져봐야 좋을 것이 하나도 없을 테니까. 블랑쉬블르가 장난을 쳐서 그나마 잠깐 웃었던 분위기가 싹 사라지고 아까보다 분위기가 더 어두워졌다. 라키사 표정도 굳었고, 이고 표정도 굳었고, 블랑쉬블르는 내가 왜 이렇게 흥분하는지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서점 문이 열리고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서점으로 들어온 사람은 우체부였다.


 "편지 온 것 있어요?"

 "예. 여기로 한 통 왔네요."


 우체부는 이고에게 편지 한 통을 건네주고 바로 서점에서 나갔다. 이고는 편지 봉투를 살펴보았다.


 "이거 뭐라고 쓴 거야? 글씨 더럽게 못 썼네."

 "내가 읽어줄까?"

 "응. 진짜 저 우체부 아저씨도 대단하네. 이런 글자를 어떻게 읽고 여기로 갖다주셨지?"


 이고가 라키사에게 편지 봉투를 건네주었다. 라키사는 편지 봉투 위에 적힌 글자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거 타슈갈에게 온 편지야."

 "나?"


 설마 아다비아가 보낸 편지인가? 그런데 아다비아는 글씨 예쁘게 잘 쓴다. 아다비아가 보낸 편지라면 이고가 편지 봉투에 적힌 글자를 못 읽었을 리는 없을텐데. 이고가 글자를 아예 못 읽은 것은 아닐 거다. 마구 갈겨쓴 글자를 보니 짜증나서 일부러 못 읽는 척 이야기한 것이겠지. 라키사가 편지를 내게 건네주었다. 편지 봉투를 받아서 대체 글씨를 얼마나 못 썼는지 보았다. 정말 못 썼다. '에드자'만 큼지막히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그것도 상당히 못쓴 글씨였기는 했지만 보고 바로 읽을 수 있었다. 그 아래에 있는 주소는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고 쓴 것처럼 쭉 갈겨썼다. 우체부 아저씨도 이거 읽느라 고생 좀 했겠다. 안 버리고 여기로 배달해주신 것이 대단하다.


 편지 봉투를 찢었다. 누렇고 얇은 종이가 접혀 있다. 제일 저렴한 종이다. 설마 아다비아가 보낸 편지는 아니겠지. 편지 봉투의 글씨도 그렇고, 지난 번 편지를 떠올려보았을 때 이것은 아다비아가 보낸 편지가 절대 아니다. 아다비아는 좋은 종이에 향기가 나라고 향수까지 뿌려서 보냈으니까. 나한테 편지를 보낼 사람이 아다비아 말고 누가 있지? 편지를 편지 봉투에서 조심스럽게 꺼냈다.


 "이거 감비르가 보낸 편지인데?"

 "감비르? 걔 잘 살고 있대?"

 "몰라. 아직 읽지도 않았어."


 감비르가 보낸 편지라는 말에 라키사가 반가운 소식이 왔다는 듯 바로 걔 잘 지내고 있냐고 물어보았다.


 "감비르가 그 치르치나로 저주술 수련한다고 하러 간 그 애지?"

 "응. 맞아. 그래도 아직 살아 있나봐."

 "어서 읽어봐! 걔 거기서 대체 무슨 바보짓하나 궁금하다."


 이고는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들어왔다는 듯 호기심을 보이며 내게 빨리 읽어보라고 했다. 그때 블랑쉬블르가 이고에게 말했다.


 "치르치나? 왜? 거기 뭐 있다고?"

 "몰라. 거기로 저주술 수련하러 갔대."

 "거기 정말 저주술 수련하기 좋은 곳이야?"

 "설마...너 거기 안 가봤어?"

 "치르치나? 가봤어. 꽤 되기는 했지만...거기 분위기 별로 안 좋지 않아?"

 "거기? 나야 오래전에 가봤지. 그때는 진짜 좀 그랬는데. 요즘은 어떨지 모르겠다."


 감비르 이 녀석 진짜 치르치나에서 저주술 수련 잘 하고 있을까? 내 주변 모두가 감비르가 치르치나로 저주술 수련하러 간다고 했을 때 이상하다고 했었다. 편지를 펼쳤다. 편지지에 적힌 글자는 다행히 무리없이 읽을 수 있는 정도였다.



 타슈갈에게.

 너는 잘 지내고 있냐? 지금 열심히 학교 다니고 있겠지? 이번에도 또 교수 연구실 끌려갔냐? 지난 학기에는 운좋게 통과했을지 몰라도 이번에는 아마 많이 어렵다고 느끼고 있겠지. 그래도 열심히 해라. 혹시 아냐? 너의 의지가 저주술이 되어 다시 한 번 기적이 일어날지 말이다. 강한 정신과 의지는 현실을 바꾼다. 그것이 바로 저주술. 너는 부정했지만 그것이 저주술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너도 깨닫겠지.

 치르치나는 저주술 수련하기 좋은 곳이다. 이것은 맞는 말이자 틀린 말이다. 그 이유는 나 역시 잘 모르겠다. 엄청난 분노가 하나의 생명체가 되어 숨쉬고 있는 곳. 그러나 그 괴물에게 지배당하고 있는 곳. 바로 치르치나다. 이 괴물에 맞서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저주술 수련.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나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진리와 자유. 그것을 추구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아름답고 숭고한 일인지 너는 감도 못 잡고 있겠지. 나의 저주술은 나날이 발전해간다. 세상을 모두 융합하고 하나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절대적인 그것.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진리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는 불쌍한 이 땅의 존재들이여! 그 무한한 아름다움을 어찌 인간은 스스로 저버렸을까.

 나 역시 여기에서 자유가 무엇인지, 진리가 무엇인지 처음 왔을 때는 몰랐다. 많은 방황을 했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던 순간, 기적적으로 스승을 만났다. 이 또한 나의 절대적인 자유와 진리를 향한 의지와 정신이 일으킨 저주술.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멀리 남아드라스 공화국에서 왔다는 것이다. 저주술은 이 세상에서 우리 마딜 공화국 외에는 모두 금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아라. 얼마나 놀라운 저주술이냐. 모든 인류는 저주술을 익힐 수 있다. 심지어는 저주술이 금지된 남아드라스 공화국 출신조차 말이다. 그저 눈만 뜬다면, 일곱 가지 꿈의 비밀만 깨닫는다면 그 누구나 저주술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내게 말했다. 남아드라스 공화국에는 전설적인 위대한 저주술사인 '페스테로스'라는 인물이 있다고. 진정한 자유와 진리를 깨우친 페스테로스에게 이 세상은 얼마나 어리석어 보였을까? 내 스승 디브는 말했다. 그의 저주술에 대적할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는 모든 진정한 자유와 진리 그 자체. 이 땅의 전설 키란보다도 더 우월한 저주술의 그 모든 것. 나의 위대한 스승에게 저주술을 가르쳐준 모든 것을 깨우친 자. 그가 깨달은 저주술이 어떤 것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언젠가 나는 그 저주술을 깨닫게 될 거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나의 의지, 나의 정신. 그리고 그것은 이 저주술에 약속된 결과이기 때문이지.

 나중에 에드자에 갈 일 있으면 한 번 찾아갈께. 진정한 자유와 진리의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지 보고 나면 너 역시 무의미한 학업을 그만두고 저주술 수련을 시작할 거다.

 잘 지내라.



 "뭐라고 써 있어?"


 라키사가 물어보았다. 이 내용을 뭐라고 이야기해야 하지? 이건 아무리 봐도 맛이 간 것 같다. 말로 이 기분을 다 표현할 수가 없다. 딱히 위험하거나 중요한 내용이 적혀 있는 편지는 아니니 라키사에게 보여줘도 별 일 없겠지. 라키사에게 편지를 건네주었다. 라키사가 변지를 받아서 읽기 시작했다. 편지를 읽어나가는 라키사의 표정이 밝지 않다. 어두워진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오랜만에 친구가 보낸 편지를 읽고 반가워하는 표정도 아니다. 이것이 대체 무슨 말인지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치르치나로 가기 전까지는 이 정도는 아니었다. 치르치나 가서 뭔가 상태가 더 안 좋아진 것 같다.


 "나도 봐도 돼?"

 "보세요."


 블랑쉬블르가 자기도 편지를 보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보라고 했다. 누가 보아도 그렇게 민감할 내용은 없으니까.


 '아닌가?'


 편지를 읽는 블랑쉬블르의 얼굴이 매우 어두워졌다. 두 눈에 힘을 주고 편지를 꼼꼼히 읽더니 이고에게 건네주었다.


 "뭔데?"

 "이거 읽어봐."


 이고가 못마땅하고 귀찮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편지를 받아들었다.


 '편지에 이상한 내용이 있나?'


 이고의 표정도 점점 어두워져갔다. 저기에 무슨 심각한 내용이 있나? 이고와 블랑쉬블르는 왜 저 편지를 보고 저렇게 표정이 굳어버렸지? 감비르가 내 예상보다 상태가 더 많이 안 좋은 건가? 이고가 아무 말 없이 편지를 내게 돌려주었다. 라키사도 이고와 블랑쉬블르가 왜 저런 표정을 짓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둘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블랑쉬블르는 이고를 바라보고 있고, 이고는 반대편 벽만 바라보고 있다. 이 편지 내용 중 무엇이 그렇게 심각한 내용이길래 저러지?


 "감비르 상태 많이 안 좋은 거 같아?"

 "응?"

 "왜 그렇게 심각해?"

 "아...별 거 아니야. 그냥 걔 좀 이상한 거 같아서."


 이고나 블랑쉬블르나 감비르와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는데 왜 이렇게 감비르를 걱정해주지? 참 희안한 일이다.



 서점 문 닫을 시간이 되었다. 역시나 오늘도 손님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이고는 아까부터 방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고 있다. 감비르가 보내온 편지를 읽은 후부터 기분이 계속 안 좋아보인다. 그 편지에 무슨 심각한 내용이 있었길래 그 편지를 읽은 후부터 계속 저렇게 기분이 안 좋은 상태지? 블랑쉬블르도 편지를 읽은 후에는 장난을 더 치지 않고 별 말 없이 책만 몇 권 들추어보다 돌아갔다. 그 편지 내용에 남아드라스 공화국 사람들에게는 민감한 내용이 있나? 나나 라키사나 감비르 이놈의 상태가 조금 안 좋은 것 같다고 느낀 것 말고는 별 것 없었다. 저렇게 기분이 갑자기 안 좋아질만한 것은 없었다. 그런데 이고와 블랑쉬블르가 안 좋은 반응을 보이는지 잘 모르겠다. 감비르가 저주술을 익혀서 둘을 공격할 거 같아서? 하지만 둘이 감비르에게 딱히 나쁜 짓을 한 것도 없잖아.


 서점 문을 닫으러 밖으로 나왔다. 그때 누군가 내 뒤에서 어깨를 손으로 탁 쳤다. 순간 놀라서 뒤돌아보았다.


 "타슈갈, 잘 지냈어?"

 "바하르! 이 시각에 왠 일이야?"


 밤 8시가 넘은 시각인데 바하르가 서점에는 무슨 일로 왔지? 바하르는 중앙학문연구소 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등에는 칼을 메고, 허리에는 몽둥이를 찼다. 어디 싸우러 가나? 칼과 몽둥이는 왜 몸에 지니고 이 야심한 시각에 나타난 거야?


 "우리 동원령 내려졌잖아. 지금 시간 돼?"

 "응. 서점 문 닫을 시간이니까."

 "담배 한 대 태우자."

 "그래."


 서점 문을 잠갔다. 바하르는 아무 말 없이 담배 한 대를 내게 건넸다. 담배를 받아 입에 물고 성냥을 꺼냈다.


 "뭐 성냥 쓰냐? 내가 불 붙여줄께."


 바하르가 담배에 불을 붙여주고는 자기도 입에 담배를 물었다.


 "너 어디 싸우러 가? 왜 몽둥이에 칼까지 차고 있어?"

 "망할 시위대 놈들. 왜 폭동은 일으켜가지고 사람 피곤하게 해?"

 "동원령이랑 그 몽둥이에 칼은 무슨 상관인데?"

 "순찰 돌잖아. 매일 12시간씩 이렇게 돌아야해."

 "매일? 쉬는 날 없이?"

 "응! 내가 그래서 동원령 내려지면 거지같다고 했잖아. 이러면서 돈 주는 것도 아니구."


 바하르가 담배 연기를 있는 힘껏 빨았다.


 "진짜 많이 힘들겠다."

 "응. 게다가 나는 야간조야. 뭐 할 수가 없어! 아침 8시에 근무 마치고 집에 돌아가서 자다 일어나면 다시 근무하러 갈 시간이야. 주간이면 근무중에 간간이 내 일이라도 볼텐데 이건 야간이라 그것도 안 돼."


 그건 미처 생각을 못 했다. 야간 근무는 주간 근무보다 더 힘들겠다. 밤 8시부터 아침 8시까지는 식당도 문 닫고 가게도 문 닫은 시간이니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을 거다. 근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서 자다 일어나면 또 가게들이 문 닫을 준비하는 시간일 거구. 왜 바하르가 저렇게 동원령을 싫어했는지 이제 조금 와닿는다. 생활이 생활이 아니겠네. 전에 그렇다고 해서 돈을 더 주는 것도 아니라고 했었다.


 "돈 따로 더 주는 거 없어?"

 "아예! 그딴 거 없어. 말 그대로 동원령이라니까? 진짜 이게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어. 망할 놈들...진짜 폭동만 아니었어도 이런 환장할 짓은 안해도 되는데."


 바하르는 담배를 뻑뻑 태워대었다. 바하르에게는 이것이 가장 피하고 싶은 상황이었겠지? 저 분노가 이해된다.


 "치롤라 소식 아는 거 있어?"

 "어? 치롤라?"

 "응. 걔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었잖아."

 "아..."

 "왜? 뭐 안 좋은 일 있어?"


 그러고보니 바하르가 치롤라 좋아하지? 치롤라가 지금 바하르 모습 보면 가만히 있을까? 이고 말 들어보면 지금 이렇게 순찰 돌고 있는 바하르 모습 보면 극도로 흥분하며 죽이려 달려들 수도 있을 텐데.


 "치롤라 입원했다가 퇴원했대."

 "입원? 그 폭동 일어났을 때도 가담했던 거야?"

 "아마 그랬던 것 같아. 충격이 엄청 컸나봐. 여기저기 얻어맞고 입원해 있었어."

 "어휴...그걸 왜 참가해!"


 이고와 루즈카도 나름대로 말렸다. 하지만 결국 치롤라는 루즈카와 싸우면서까지 시위에 참가했다. 그건 루즈카도 어쩔 수 없는 일인 거다. 치롤라와 아주 특별히까지 친하지 않았던 나와 라키사 또한 치롤라를 말려볼 방법이 실상 없었구. 오히려 치롤라가 우리를 시위로 끌고 가려고 했지. 자기가 좋아해서 참여한 일이고, 그 결과가 그것이었으니 그 과정 자체에 대해서는 딱히 어찌 말을 못 하겠다. 단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여자인 치롤라를 그렇게 두들겨팬 진압대가 끔찍할 뿐이지.


 "걔는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했잖아."

 "그래도 그런 상황에서는 눈치껏 빠져야지!"

 "몰라. 요즘은 일곱 가지 꿈의 비밀을 파헤치겠다고 한다던데?"

 "일곱 가지 꿈의 비밀? 왜 하필 그것을?"

 "많이 화났나봐."


 바하르가 손으로 얼굴을 비볐다. 엄청나게 답답할 거다. 일곱 가지 꿈의 비밀에 열중하는 사람 치고 폐인이 되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까. 그렇다고 그것을 말릴 수도 없다. 게다가 바하르가 지금 이 꼴로 치롤라 앞으로 간다면 치롤라가 참 좋아할 거다. 아마 바하르와 영원히 절교하겠다고 선언할 수도 있을 거다. 지금으로써는 치롤라가 스스로 답을 얻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없다. 어쨌든 앞으로 다시 천천히 어떤 방향으로든 좋아지겠지.


 "네가 좀 말려보면 안 돼? 나는 거기 갈 시간이 없어서..."

 "나중에 루즈카 집에 가게 되면 한 번 이야기는 해볼께."

 "고맙다. 내가 나중에 밥 한 번 살께!"

 "그런데 나도 루즈카 집에 언제 갈 지 몰라. 루즈카랑 치롤라 사이 지금 안 좋아서 갈 분위기가 아냐."

 "괜찮아. 나중에 가게 되면 좀 말려봐. 왜 하필 일곱 가지 꿈의 비밀이야? 그거 답도 없고 사람 폐인 되는 건데."

 "몰라. 그거 깨우치면 이 세상 다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나보지."

 "그럴 리가 없잖아? 그거 쫓는 것처럼 멍청한 놈이 어디 있다구."


 바하르가 한숨을 내쉬더니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발로 비벼서 불을 껐다.


 "나 이만 가볼께. 또 순찰 돌아야한다."

 "조심해."

 "조심할 거 뭐 있냐? 별 일이 뭐 있으려구."


 바하르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래, 이제 별 일 없을 거야. 시간이 조금 걸리기는 하겠지만 머지 않아 다시 예전과 같은 일상이 돌아오지 않을까? 이번 일에 대한 기억은 영원히 내 머리 속에 남겠지만, 내 일상 생활에서 이 흔적은 차차 사라져가지 않을까? 다 좋아질 거다. 아다비아와 감비르는 자기가 갈 길을 찾았다. 나도, 라키사도 언젠가는 가야 할 길을 찾게 될 거다. 그때까지 잘 버텨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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