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기적과 저주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2장 10화

좀좀이 2017. 9. 16.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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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2장 10화



 시위가 진압된 지 며칠 지났다. 모든 것이 조용하고 평온하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모두가 자기 할 것을 하며 산다. 나와 라키사, 이고도 바뀐 것이 없다. 학교에 내려진 폐교령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아침부터 서점에서 책을 읽고 공부하는 일상.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이라면 이 일상이 너무나 다르게 보이겠지. 그러나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우리들에게는 달라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오히려 주변이 어수선하지 않아서 좋다고 해야 할까? 모두가 시위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거리에는 경찰과 군인이 쫙 깔려 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거리에 치안 유지를 위한 병력이 깔려 있는 것과 날씨를 제외하면 바뀐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치롤라 병문안 갈 건데 너희도 갈래?"

 "치롤라요?"


 이고가 갑자기 병문안 가지 않겠냐고 이야기했다. 이고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치롤라가 왜 다친지 짐작할 수 있다. 보나마나 시위 진압 중 엄청 맞았겠지. 놀라운 것은 이고가 병문안을 가겠다고 말한 거다. 이고가 가면 오히려 치롤라가 더 분노할 것 같은데. 전에 서점에 와서 시위 나가자고 선동하려다 쫓겨났잖아. 쫓아낸 사람이 이고고. 치롤라 눈에 이고가 절대 곱게 보이지 않을 거다. 그런데 병문안을 가자니?


 "정말 가도 돼? 전에 네가 치롤라 쫓아냈잖아."

 "그건 그거고, 아픈 건 아픈 거고...딱히 가고 싶지는 않지만 루즈카가 오라고 해서..."

 "그래서 혼자 가기 그러니까 우리보고 같이 가자는 거야?"

 "가기 싫으면 말구. 나는 지금 나가야 하니까. 너네도 간다고 하면 서점 문 닫고 다녀오는 거구."


 라키사가 이고와 대화를 하고는 잠시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라키사도 고민이 조금 될 거다. 아예 척을 진 것은 아니다. 단지 치롤라의 생각을 따르지 않았을 뿐이지. 그렇지만 그것이 상당히 껄끄럽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지금 병문안을 간다고 해서 치롤라가 좋아할까? 오히려 우리들 보고 화만 엄청나게 많이 내지 않을까? 그래도 안 가는 것보다는 쫓겨나는 것이 차라리 나을 건가?


 "갈께. 타슈갈, 너도 갈 거니?"

 "나? 네가 가면..."

 "그러면 같이 가자. 안 가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라키사는 이고와 병문안을 같이 다녀오겠다고 했다. 라키사가 같이 간다면 그래도 덜 부담스럽다. 치롤라가 기분나빠하더라도 그것을 한 명이라도 더 나누어서 받고 당하면 그나마 나으니까. 라키사는 치롤라와 같은 여자니까 서로 어떻게 부드럽게 말을 잘 나누지 않을까? 나야 둘을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하면 될 거구. 그래도 아예 모르는 사람도 아닌데 병문안을 가는 게 맞다. 게다가 지금 라키사도 간다고 했으니 라키사에 묻어가는 것도 매우 괜찮은 선택이다.


 "그러면 어서 가자."

 "병원은 어디에 있어?"

 "내성 너머에 있어."

 "내성 너머? 북쪽?"

 "응. 여기서 머니까 마차 타고 갈 거야. 돌아올 때 구경하고 싶으면 같이 걸어오면서 천천히 구경해도 되구."



 서점 문을 닫고 이고를 따라나섰다. 이고는 마부와 흥정을 하더니 마차에 올라타라고 했다.


 "라키사, 셋이 낑겨 타야 하는데 괜찮겠어?"

 "상관없어."

 "그러면 네가 제일 마지막에 타. 내가 제일 먼저 타고, 그 다음 가운데에 타슈갈이 앉으면 되겠다."


 이고가 마차에 먼저 올라탔다. 그 다음 내가 타고, 마지막으로 라키사가 마차에 올라탔다. 셋이 낑겨타려니 자리가 매우 좁다. 셋이 찰싹 달라붙어 앉았다. 마차가 출발했다. 무슨 짐짝처럼 실려가는 기분이다. 여기 와서 마차를 두 번째 타본다. 처음 탔을 때는 아다비아와 내성으로 갈 때였지. 그때는 시험을 통과해서 정말 기뻤다. 아다비아와 마차 좌석에 편하게 앉아서 주변을 구경했다. 지금은 두 팔과 두 다리를 바짝 붙이고 웅크리듯 앉아 있다. 주변을 제대로 둘러볼 수도 없다. 왼쪽에는 이고, 오른쪽에는 라키사가 있으니까.


 이고를 바라보았다. 마차에 기대어 풍경을 보며 뭔가 생각에 잠긴 듯 하다. 라키사를 바라보았다. 라키사는 말없이 앞만 바라보고 있다. 밝은 기운이 하나도 안 느껴진다. 지금 마차에 비좁게 앉아 있는 상황 자체도 기분 좋은 일이 아니고, 기분 좋은 일 때문에 마차를 타고 가는 것도 아니니까 전혀 기분이 좋을 리 없겠지. 라키사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라키사는 어떻게 이렇게 잘 버티고 있을까? 그저 신기할 뿐이다. 학교가 폐교되었던 날, 길거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그리고 시위 진압하던 날 서점 안에서 오들오들 떨며 겁에 질렸었지. 그런데 지금은 아주 태연하다. 단지 겉으로 내색하지 않을 뿐, 속으로는 많이 힘들고 복잡하겠지? 얘는 인생 자체가 꼬인 걸까? 분명히 우리 전공에서 공부도 제일 잘 하고, 머리도 좋고, 노력도 많이 하고, 성격과 생각도 바르다. 그런데 얘는 아다비아와 달리 일이 참 안 풀리는 것 같다. 보통 이러면 잘 되어야 하는 것이 정상 아닌가? 아다비아가 운좋게 계속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불운도 피해갈 때, 라키사는 온갖 불운이란 불운은 다 겪고 위로 올라가지도 못하는 것 같다. 서점에서 일하는 것이 위로 올라간 거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



 "내성 쪽은 검문이 심하니 돌아갈께요."

 "예, 그렇게 하세요."


 마부가 마차 방향을 꺾었다.


 "요즘 검문 많이 심한가요?"

 "말도 못해요. 내성에 들어가려면 시간 엄청 오래 걸려요. 마차로 외성에서 내성으로는 아예 못 들어간다고 보시면 되요."

 "시위도 끝났는데 그러나보네요."

 "어휴, 시위 끝나고 더 심해졌어요. 저주술사가 시위에 많이 참여했잖아요. 그놈들이 무슨 짓 벌일지 모른다고 도처에 경찰과 군인이 쫙 깔렸어요.

 "빨리 좀 조용해졌으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말이에요. 요즘 손님이 하나도 없어요. 누가 지금 돌아다니려 하나, 다 눈치만 보고 있지."


 이고가 마부와 간단히 잡담을 나누었다. 그래도 시위가 끝났으니 이제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라키사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다. 표정 변화도 없다. 그냥 앞만 바라볼 뿐이다. 마차는 계속 달려간다. 방향을 다시 꺾었다. 확실히 내성 쪽으로 오니 건물도 화려하고 사람들 옷차림도 더 화려하다. 달콤한 냄새가 풍기는 과자 가게도 보이고, 고기 굽는 냄새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근사한 식당도 보인다. 시위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하긴, 시위가 진압된 지 며칠 되었으니 흔적이 있었다 하더라도 다 지웠겠지.


 마차가 방향을 다시 꺾었다. 여전히 화려하고 깔끔한 거리다. 내성 안에 들어온 것도 아니고 내성 바깥쪽으로 뱅 돌아가고 있는데도 이렇다. 에드자 남쪽과 북쪽이 이렇게 다르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곳곳에 외국어로 된 간판이 많이 보인다. 대륙공통어가 적힌 간판도 있고, 아드라스어가 적힌 간판도 있다. 같은 길인데도 북쪽으로 올라오니 길이 훨씬 더 넓고 시원한 것 같다. 도로도 울퉁불퉁하고 파인 곳이 별로 없다. 사람들이 웃으며 물건을 고르고 식당과 카페 안으로 들어간다. 여기는 아예 다른 세상 같다. 아다비아가 데려가서 구경한 내성보다는 덜하다. 그러나 여기도 서점 근처에 비하면 천지 차이다. 아예 공기 자체가, 흙 자체가 다르다. 그 어떤 장벽도 없는데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내성은 성벽이라도 있었지. 너무나 자연스럽게 전혀 다른 세계로 넘어와버린 것 같다.


 "너 북쪽 와본 적 있어?"

 "몇 번."


 라키사에게 에드자의 북쪽에 와본 적이 있냐고 물어보자 아주 짧게 대답했다. 이고가 내게 말을 걸었다.


 "왜? 신기해?"

 "아니. 그런데 우리가 머무르는 곳이랑 많이 다르다."

 "여기가 아무래도 더 많이 발전했지?"

 "특별한 이유가 있어?"

 "글쎄...그건 잘 모르겠다. 이쪽은 북쪽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많이 살아."

 "우리가 사는 곳은 남쪽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많이 살구?"

 "어. 맞아."


 강의실에서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 의무 교육을 놓고 싸우던 두 무리가 떠올랐다. 찬성파는 주로 북쪽 출신이었고, 반대파는 주로 남쪽 출신이었다. 이래서 북쪽 출신 애들이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을 꼭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 건가? 에드자 북쪽에서 살면서 학교를 다니던 애들은 학교로 오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뮈젤 같은 북부 도시들도 이런 모습일까? 왠지 그럴 것 같다. 그래서 저주술 따위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 건가? 지금 보이는 풍경대로 북쪽도 발전한 모습이라면 찬성파에 딱히 뭐라고 반박할 수도 없다. 훨씬 더 잘 살고 발전했잖아. 가게 같은 것은 그렇다 쳐도 이 깨끗하고 넓은 도로는 어떻게 이야기할 거야.


 라키사를 바라보았다. 라키사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앞만 바라보고 있다. 라키사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말을 걸어서는 안 될 것 같다. 라키사도 이런 동네에서 살고 싶겠지? 라키사가 어디에서 사는지 정확히 모른다. 그러나 이쪽에서 살지는 않을 거다. 여기에서 서점과 에드자 대학교는 거리가 많이 멀다. 여기에서 걸어서 서점과 학교까지 오기는 매우 힘들 거다. 아마 서점 근처 어딘가에서 살고 있겠지. 라키사라고 특별히 여기보다 훨씬 허름한 남쪽을 더 선호하지는 않을 거다.



 수레가 멈추어섰다. 마차에서 내렸다. 이고가 앞장서서 걸어갔다. 나와 라키사는 이고 뒤를 따라갔다. 얼마 걷지 않아 병원에 도착했다. 이고를 따라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병원 안에 들어오자마자 신음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린다. 병원 안에 환자가 꽤 많은 모양이다.


 "뭘 넋놓고 있어? 어서 따라와."


 이고가 나를 보며 이야기했다. 에드자는 병원도 크구나. 이고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가자 복도 양 옆으로 병실 여러 개가 마주보고 있었다. 병실 문은 모두 닫혀 있고, 문마다 환자 이름이 붙어 있었다. 환자의 신음 소리와 사람들의 울음소리, 떠드는 소리. 짜증내는 소리와 깔깔 웃는 소리. 약초 냄새와 술 냄새. 이고를 따라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라키사에게 계속 눈길이 간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다. 라키사는 지금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즐거운 일 때문에 온 것이 아니니 무표정한 얼굴이겠지만, 속으로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이고가 병실 문을 열었다. 침대에는 치롤라가 누워 있었다.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던 루즈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빠, 왔어요?"

 "응. 치롤라, 몸 괜찮아?"

 "예."


 치롤라는 왼팔에 부목을 대고 붕대를 감았다. 오른쪽 광대뼈는 시퍼렇게 멍이 들었고, 오른쪽 턱도 크게 부었다.


 "다행이야."

 "너는 지금 내 꼴이 우습지?"

 "아니야."

 "맞잖아!"

 "아니라구!"

 "비열한 거짓말쟁이. 반드시 일곱 가지 꿈을 꾸고 말겠어. 꼭 복수할 거야."


 라키사는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 치롤라에게 무슨 말을 걸어봐야 나에게 상처가 될 말만 돌아오겠지? 그래도 한 마디는 해야 한다.


 "얼른 낫기 바래."

 "응. 반드시 빨리 나아서 저주술 수련할 거야. 더 강해져야 복수하지. 내가 만들 빛나는 미래에 너희들은 지금처럼 기생하겠지만...괜찮아. 최소한 저놈들처럼 대놓고 피해를 주는 건 아니니까. 반드시 일곱 가지 꿈의 비밀을 밝혀내고 말 거야."

 "응. 꼭 빨리 나아."

 "당연하지. 마딜인의 정신을 짓밟은 찢어죽여 시원찮을 무리들에게 본때를 보여줄 거야. 저주술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온몸을 갈가리 찢어버려서 느끼게 해줄 거야. 내 부모, 내 가족, 내 친구, 내 조상을 욕보이다니...나는 절대 그들을 가만두지 않을 거야. 반드시 목을 자르고 배를 찢어버릴 거야. 일곱 가지 꿈을 깨달아 더러운 무리들이 숨쉬는 오염된 땅을 다 불태워버릴 거야. 아주 싹 불태워버려야지. 그 새끼들의 더러운 피가 이 땅을 더럽히는 건 참을 수 없어."


 치롤라가 나를 보며 독기를 내뱉었다. 그리고는 다시 이고를 바라보았다.


 "외국인 아저씨, 당신도 이 땅에서 꼭 쫓아낼 거야. 당신은 여기에서 숨쉬는 것만으로 이 땅을 더럽히는 거니까."

 "그래. 빨리 나아서 그 일곱 가지 꿈인지 뭔지 하는 것 좀 깨달아라."


 이고는 치롤라에게 손을 흔들고 병실에서 나갔다. 우리도 이고를 따라나갔다. 루즈카는 치롤라에게 잠시 혼자 쉬고 있으라고 이야기하고는 우리들을 뒤따라 나왔다.


 "치롤라 혼자 놔둬도 괜찮아?"

 "예. 괜찮아요."

 "다행이네."

 "예. 다행히 뼈가 부러지지는 않았대요."

 "그래도 여자라 봐주면서 때렸나보다."

 "맞아요. 여기저기 많이 맞기는 했는데 심하게 다친 곳은 없어요. 그렇지만 저렇게 맞아본 것이 처음이라 충격을 크게 받은 것 같아요. 어디서든 기대받고 예쁨받던 아이니까요."


 여자라 봐주면서 때렸다는 이고나 그 말에 대해 맞다고 하는 루즈카나 정상 맞아? 밤에 시위대를 두들겨패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치롤라가 누워 있는 모습을 보니 과격하게 진압했다는 생각이 확 들었다. 그런데 둘은 오히려 치롤라가 맞아야 될 매보다 덜 맞았다는 듯이 이야기를 했다. 어떻게 둘이 저런 대화를 나눌 수 있지? 저들은 정말로 무슨 지옥의 끝이라도 겪고 온 건가?


 "퇴원은 언제 해?"

 "일주일 정도 더 있어야할 것 같아요. 지금 퇴원해도 되기는 하지만 여기에서 쉬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응. 저 몸 끌고 나가서 또 복수하네 뭐하네 하면 그러니까."


 갑자기 루즈카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쟤 괜히 데리고 올라온 거 같아요."

 "아냐, 아냐. 이건 네가 잘못한 것 없잖아."

 "그래도요! 쟤 여기 안 데려왔으면 아무 일 없었을텐데!"

 "아니야. 어떤 식으로든 쟤가 겪을 일이었을 거야. 네 잘못 없어."

 "데려온 건 저잖아요! 고향에서 조용히 행복하게 살라고 했으면 되었을 건데!"

 "네가 안 데려왔으면 다른 누가 데리고 올라왔을 거야."


 루즈카가 눈물을 닦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눈물이 쉽게 멈추지 않는지 병원 천장을 잠시 바라보며 계속 심호흡을 하더니 진정이 되었는지 다시 이고를 바라보았다. 잠시 이고를 말없이 바라보다 나와 라키사를 번갈아 바라보며 당부했다.


 "타슈갈, 라키사. 너희들도 정신 바짝 차려. 알았지?"

 "예."

 "웃을 수 있을 때 많이 웃고. 너희들은 이제 아름다운 청춘이잖아."

 "예."


 이고가 루즈카를 안아주었다. 루즈카는 두 팔을 내린 채 이고의 품에 안겼다.


 "괜찮을 거야. 별 일 없을 거야. 다 흘러가는 거야."

 "하지만 흘러가는 동안 너무 아파요."

 "우리는 괜찮잖아."

 "예. 정말 다행이에요. 이번에 죽은 사람도 많다던데..."

 "그러니까."


 이고는 루즈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루즈카는 그제서야 이고를 껴안았다. 그렇게 잠시 둘이 말없이 안고 있다가 루즈카가 포옹을 풀었다. 루즈카가 포옹을 풀자 이고도 포옹을 풀었다.


 "오빠, 저 이만 들어가볼께요."

 "응. 쟤도 별 일 없겠지?"

 "그럴 거에요. 일곱 가지 꿈을 깨닫는다고 했으니...열심히 자겠죠."

 "다행이네. 그 일곱 가지 꿈 이야기에 사로잡혀서."

 "오빠, 절대 말하지 마요. 그 비밀."

 "응. 절대로."


 루즈카가 다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 밥이나 먹고 가자."

 "괜찮아."

 "아니야. 내가 살테니 부담갖지 말고 먹어. 어차피 밥 먹을 시간도 지났잖아."


 병원에서 나와 식당으로 갔다.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고가 종업원을 불렀다. 고기를 구운 것과 빵, 차를 주문했다. 라키사가 탁자 위에 있는 컵에 물을 따라 나와 이고, 그리고 자신 앞에 올려놓고는 이고를 바라보며 따지듯이 물었다.


 "이고, 치롤라가 일곱 가지 꿈 전설에 사로잡히면 위험한 거 아니야?"

 "그거?"

 "응. 그거 매우 위험한 거잖아."

 "설마 거기에 한없이 얽매여 있겠어? 그리고 쟤야 원래 저주술사니까 그래도 별 상관 없을 거야."

 "하지만 그거에 얽매이면 폐인 되잖아!"

 "치롤라는 폐인 절대 못 될 걸? 속에서 천불이 끓어오를텐데 어떻게 가만히 있겠어?"

 "그런 모르는 일이야."


 라키사와 이고가 치롤라가 일곱 가지 꿈에 사로집힌 것이 위험한지 아닌지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일반인이라면 위험할 수 있다. 그러나 치롤라는 저주술사다. 저주술사가 저주술을 탐구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물론 일곱 가지 꿈의 비밀을 밝혀내겠다고 한 사람들 모두 잠만 자다 폐인이 되어가곤 했지만.


 사실 일곱 가지 꿈이라는 것도 황당한 전설이다. 일곱 가지 꿈 전설은 저주술이 얼마나 미개한지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다. 어떤 꿈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그저 일곱 종류의 꿈을 꾸면 완벽한 저주술을 깨닫고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대체 무슨 꿈을 일곱 종류를 꾸어야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꿈 종류야 많지. 나도 꿈을 꿀 때마다 다른 꿈을 꾸니까. 지금까지 내가 꾼 꿈 종류가 아마 몇천 종류는 되지 않을까? 그렇게 일곱 종류가 아니라 몇천 종류가 되는 꿈을 꾸었는데도 저주술을 사용하지 못한다. 이게 무슨 말장난이야? 어떤 꿈을 꾸어야 한다는 말도 없고 무조건 일곱 가지 꿈을 꾸면 진정한 완벽한 저주술을 깨우칠 수 있다고만 한다. 그리고 이 일곱 가지 꿈을 꾼 가장 최근의 인물이 키란이라고 한다. 이게 전부다.


 많은 사람들이 일곱 가지 꿈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밝혀내지 못했고, 먹고 자고 먹고 자는 생활의 반복 뿐이었다. 내가 살던 동네에도 몇 명 있었다. 일곱 가지 꿈의 비밀을 탐구한다고 하지만 맨날 집안에서 먹고 자는 것만 반복할 뿐이었다. 이게 저주술인지 폐인 놀이를 하기 위한 핑계인지 분간이 가지 않더라. 아무리 봐도 영락없는 폐인이니까. 뭔가 새로 발견했다든가 깨달은 것이 있다든가 하는 소리도 못 들어보았다. 그저 그들은 계속 일곱 가지 꿈의 비밀을 밝히겠다고 말하며 먹고 자는 생활만 반복할 뿐. 아마 동네마다 한둘은 있을 거다. 사람들 말로는 일곱 가지 꿈의 비밀에 사로잡히기 이전까지는 괜찮은 저주술사였다고 하지만, 현실은 그냥 폐인이다. 자기들조차 일곱 가지 꿈과 관련해서 그 어떤 것도 이야기하지 못하는데.


 "치롤라가 정말 폐인이 된다면 나는 말해줄거야."

 "뭐를?"

 "너와 루즈카가 치롤라를 진정시키기 위해 일부러 일곱 가지 비밀을 언급했다는 거."

 "그러든가. 마딜인 중 일곱 가지 비밀 이야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냐? 자기가 그게 와닿았으니 그러겠다고 한 거지."


 음식이 나왔다. 거무스름한 소스가 구운 고기를 덮고 있다. 파릇파릇한 야채는 기름에 버무려져 있고, 절인 야채도 곁들여져 있다. 이고 오늘 돈 꽤 쓰는데?


 "어서 먹자. 다 식겠다."

 "잘 먹을께."

 "잘 먹을께."


 확실히 맛있다. 고기가 입에서 녹는다. 짭짤한 맛을 내는 검은 소스와 고기에서 흘러나오는 육즙이 혓바닥 위로 부드럽게 퍼져나간다. 학교가 폐교되기 전에 이런 식사를 맛보았다면 정말로 많이 신났을 거다. 치롤라의 독기 품은 모습까지 본 상태에서 먹는데도 이렇게 맛있다니 모든 것이 평화로웠을 때 먹었다면 얼마나 더 맛있었을까! 웃고 가볍게 떠들 기분은 아니지만 이 음식은 확실히 맛있다. 내가 매일 먹는 음식들과는 다른 세계 음식이다. 아다비아와 먹었던 그 고기보다는 맛이 없다. 그러니까 에드자에 와서 먹어본 음식 중 두 번째로 맛있다.



 식사를 마치고 나왔다.


 "어떻게 할래? 걸어갈까, 마차 타고 갈까?"

 "걸어가자. 소화도 시키고 여기 구경도 하구."


 이고가 어떻게 돌아갈 거냐고 물어보았다. 천천히 걸어가자고 대답했다. 여기 올 때 타고 온 마차 삯도 이고가 이고가 다 내었고, 밥 먹은 것도 이고가 다 내었다. 이고가 오늘 너무 무리한다. 점심 먹은 것도 돈 적게 나오지는 않았을텐데.


 "응. 걸어가."


 라키사도 걸어서 돌아가자고 했다. 이번에도 이고가 앞장을 섰다.


 "이제 폭동 끝났으니 좀 조용하네."

 "그러게. 진작에 폭도 놈의 새끼들 다 박살을 내었어야 했어."

 "그러니 맨날 그따위로 살지. 하여간 거지 새끼들은 매가 약이라니까."

 "이번에 폭도 놈들 몽둥이로 때려잡았으니 에드자가 좀 깨끗해졌겠다."

 "이번 진압 이야기 들었어? 저주술로 사람들 공격하려다 오히려 당했대!"

 "걔네들 수준이 그렇지, 뭐. 나도 들었어. 눈 뒤집고 멍하니 서있다가 오히려 공격당했다면서?"

 "진짜 걔네들은 마딜인 망신이야."

 "응. 정말로 부끄러워. 이러니 다른 나라들이 우리도 도매금으로 미개하다고 생각하지."

 "아예 다 모가지를 따버렸어야 했는데."

 "정부가 너무 물러터졌어. 그런 벌레 같은 놈들은 다 쓸어버려야 한다니까. 아주 일어나지 못하게 밟아버려야지."

 "하여간 놈들은 고마운 줄을 몰라. 이만큼이라도 먹고 살게 된 게 다 누구 때문인데."

 "남쪽 애들 너무 더럽고 무식하지 않니? 몇 번 이야기해보았는데 말이 안 통해!"

 "걔네들에게 뭘 바래. 걔네들은 평생 되도 않는 저주술 놀이나 하면서 살라고 해."

 "폭도 새끼들 많이 체포했대?"

 "꽤 잡았다더라구."

 "확 다 땅에 뭍어버리지."

 "북문 너머에서 몇몇은 처형되었다던데? 앞으로 계속 처형할 거래."

 "뭘 찔끔찔끔 죽여? 후딱 다 죽여버릴 것이지."

 "차라리 우르간 왕국이 다시 지배해줬으면 좋겠어."

 "응. 맞아, 맞아. 그렇게 발전한 나라가 우리나라를 지배해줘야 우리도 발전하지."

 "티타카스, 치르치나 새끼들은 왜 그 모양으로 사냐?"

 "거기는 아예 싹 다 밀어버리고 호수로 만들어버려야해. 치르치나에 까탈루훔 호수 있다잖아. 얼마나 답이 없었으면 다 거기다 처집어넣었겠냐?"

 "거기 새끼들 지금이라도 다 거기 빠져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맨날 자기들만 무슨 자유와 진리의 수호자인 척 하는 거 좀 그렇지 않니?"

 "맞아. 왜 자기들만 자유와 진리의 수호자야? 다른 나라는 다 자유와 진리 없대?"

 "미개하고 자기 동네가 전부인 애들은 정말 수준 떨어져."

 "맞아. 평생 자기 동네 벗어나본 적이나 있을까? 자기 동네가 세상의 전부겠지? 우리 동네는 안 그래! 이러면서."


 살벌한 대화. 한둘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저기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너무나도 당당하고 큰 소리로 이야기한다. 저런 말을 어떻게 저렇게 자유롭게 할 수 있지? 귀를 막고 싶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사방팔방에서 이야기해댄다. 그 소리가 귀로 다 들어온다. 머리와 마음을 마구 헤집어놓는다. 정말 괜히 걸어가자고 했다. 이런 동네일 줄 몰랐다.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 강제 교육 찬성파 애들이 저런 생각을 갖고 있었던 걸까? 치롤라가 뿜어내던 증오의 독기가 사방팔방에서 덮쳐온다. 시위에 참가했던 사람들을 보고 대놓고 폭도라고 하고, 시위 자체를 폭동이라고 한다. 저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랍다.


 정말 싫다. 어서 여기를 벗어나고 싶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잖아? 그 사람들도 나름대로 자기들이 옳은 일이라 생각하고 한 일이다. 그들의 생각에 동조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때려죽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렇게까지 미워하는 것은 아니잖아. 이것은 이것대로 또 잘못된 거잖아. 어쨌든 우리들은 마딜인이잖아. 지금 그렇게 말하는 너희들도 마딜인이잖아. 누가 뭐래도 우리 전통과 문화, 역사에서 저주술이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이잖아. 이것은 너희들도 부정하지 못하잖아. 그런데 어떻게 그것을 과하게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죽여버려야 한다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할 수 있어?


 '이건 아니야!'


 속으로 외쳤다. 찬성파와 반대파가 패싸움을 일으킨 건 잘못이다. 그놈들이 패싸움만 안 일으켰다면 그 뒤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다. 한 패거리가 시위를 일으켰고, 거기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뭔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이건 잘못된 거다. 그러나 그걸로 그쳐야 한다. 저주술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잖아. 어쨌든 저주술 때문에 독립한 것 맞잖아. 그래, 다른 나라의 학문, 마법이 더 좋고 더 강해. 아마 그러겠지. 그러면 좋은 것 받아들이면 되잖아. 저주술은 저주술대로 지키고 발전시켜가면서. 저주술은 어쨌든 우리의 뿌리잖아! 우리끼리 서로 죽여가며 싸워서는 안 되잖아! 더 잘 살고 싶대메? 마딜인 중 더 못 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어!


 "어서 가자."


 이고가 아드라스어로 이야기했다. 그러고보니 나나 이고는 아드라스인이라 여기 사람들이 신경도 안 쓰겠구나! 우리는 이 사람들에게 외국인이니까. 어쩌면 나와 이고에 대해 친근한 감정을 느낄 수도 있겠다. 저렇게 저주술을 싫어하고 외국 문물을 좋아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이고가 그래서 아드라스어로 어서 가자고 이야기했구나. 괜히 저기에 엮여봐야 좋을 것 하나 없으니까.


 주변에서 들리는 말을 듣고 알게 된 것 중 놀라운 것은 바로 처형 이야기. 폭력적으로 해산해서 끝난 일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체포된 사람도 많고 처형된 사람도 좀 있나 보다. 치롤라는 정말 운이 좋구나. 치롤라는 시위대에서 분명히 앞에 있었을 거다. 그래도 용케 잘 도망쳤네. 왜 그 병원에 있는지는 의문이다. 루즈카가 일부러 그 병원으로 데려간 것이겠지? 확실히 시설로 보나 규모로 보나 매우 좋아보이는 병원이기는 했다. 치롤라가 저기 있으면 더 위험하지 않을까? 저주술이 자유니 정의니 하는 말을 했다가는 바로 맞아죽을 수도 있겠는데. 치롤라도 바보는 아니니 분위기 파악하고 입조심할 건가?



 다시 풍경이 익숙해지기 시작한다. 이제 조금만 더 걸어가면 서점이다. 라키사는 고개를 푹 숙이고 바닥만 보며 걷고 있다. 이고는 걸음을 멈추고 담배를 물었다. 이고가 멈추어서자 나와 라키사도 멈추어섰다. 이고는 말없이 담배만 태운다. 라키사는 바닥만 쳐다보고 있다.


 "다 좋아지겠지?"


 어렵게 말을 꺼냈다. 둘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진짜 다 좋아지겠지?"


 이고가 입을 가볍게 힘주어 다물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짤막하게 말했다.


 "더 나빠지지는 않지 않을까?"

 "더 나빠질 것이나 있을까?"

 "이제 좋아질 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라키사가 고개를 들고 나와 이고를 번갈아보았다. 라키사의 표정에서 슬픔을 읽을 수 있었다. 눈물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눈. 무언가 말하고 싶은데 차마 말할 수 없어서 바르르 떨리는 두 입술.


 "이제 좋아져야 해. 더 싸울 것도 없잖아!"


 단호한 목소리. 그래, 이제 더 싸울 것도 없다. 시위는 끝났고, 그 뒷처리는 진행중인가 보다. 언제까지 서로 미워할지는 모르겠다. 아마 오랫동안 미워하겠지. 처형당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고, 진압 과정에서 두들겨맞아 부상입은 사람도 많으니까. 치롤라처럼 마음에 커다란 상처가 생긴 사람들도 있구. 그러나 이제 더 싸울 것 없잖아. 저주술이 우월한지 마법이 우월한지를 놓고 싸울 거야? 마딜인의 정신과 문화가 우월한지 다른 나라의 정신과 문화가 우월한지를 놓고 싸울 거야? 그래, 차라리 잘 되었어. 이렇게 한 번 호되게 당하는 것이 나아. 이제 저주술 옹호하는 사람들도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발전하려 하겠지. 그 쓰레기같은 책은 더 이상 내놓지 않을 거다.



 다시 서점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제 시위와 관련된 이야기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곳곳에 경찰과 군인이 서있는 것이 보인다. 길은 울퉁불퉁한 곳이 많다. 쓰레기도 여기저기 굴러다닌다. 말 없이 길을 걸었다. 군인 한 명이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어디 가시나요?"

 "서점요."


 군인이 이고에게 아드라스어로 질문했다. 이고는 아드라스어로 대답했다.


 "조심하세요. 아직 어디에 폭도들이 숨어있을지 몰라요. 저주술사들이 무슨 짓을 할 지 모르니까 항상 긴장하구요. 외국인을 노리고 뭔 짓을 할 지 몰라요. 그놈들은 여기에는 마딜인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놈들이니까요."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뭘요. 제 할 일 할 뿐인데요."

 "이걸로 간식이라도 사드세요."


 이고가 주머니에서 동전 몇 닢을 꺼내더니 군인과 악수를 했다. 군인은 활짝 웃으며 이고에게 인사를 했다.


 "어휴, 뭘 이렇게까지나! 역시 배우신 분들은 달라요!"

 "요즘 별 일 없죠?"

 "별 일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죠. 근무 서는 게 너무 피곤하네요. 진짜 폭동만 없었어도 적당히 퇴근 시간 되면 퇴근할 수 있는데 말이에요. 막사 분위기 살벌해요.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니까요."

 "힘드시겠어요."

 "정말 힘들어요. 진압 작전부터 시작해서 며칠째 집에도 못 들어가고 있어요."

 "예. 수고하세요."

 "살펴 가세요!"


 군인과 헤어져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고는 무슨 생각으로 군인에게 돈을 쥐어준 거지? 군인에게 꼭 돈을 쥐어줄 필요는 없었는데. 게다가 저 군인은 아까 북쪽에서 만난 사람들처럼 이야기한다. 상당히 기분나쁘다. 서점 돌아가서 군인에게 왜 돈을 쥐어주었는지 물어봐야겠다.



 서점으로 돌아왔다. 서점으로 돌아오자마자 이고에게 아까 군인에게 왜 돈을 쥐어주었냐고 물어보았다.


 "아까 왜 돈 줬어?"

 "그냥."

 "그런 게 어디 있어?"


 이고가 이런 멍청한 놈을 보았냐는 듯 한숨을 푹 내쉬더니 눈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지금 상황 어떤지 자세히 들으려고 준 거야. 혹시 아냐? 이 근처에서 일 터졌을 때 저 군인이 와줄지? 이렇게라도 해야 이쪽에 조금이라도 더 신경써줄 거 아냐?"

 "그래도 돈 쥐어주는 것은..."

 "내가 뭐 나쁜 짓 했냐? 고생하는데 고생한다고 몇 푼 쥐어준 건데."

 "그만 좀 해! 제발 좀 그만 다퉈!"


 라키사가 갑자기 소리쳤다.


 "제발, 제발! 이제 좀 그만 싸워!"

 "뭘 싸웠다고 그래?"

 "타슈갈, 그만 하라구! 잠시라도 조용히 있으면 안 돼?"


 라키사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방을 확 들어서 책을 쑥 꺼내들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책을 펼쳤다.


 "미안해."

 "뭐가?"

 "뭐...시끄럽게 해서."

 "아니야. 그 누구 잘못도 아니잖아. 그냥 조용히 있고 싶어. 나야말로 소리질러서 미안해."


 나도 자리에 앉아서 책을 펼쳤다. 이고도 자리에 앉아서 책을 펼쳤다. 모두가 말없이 책만 본다. 서로 나눌 이야기가 없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닐 거다. 라키사도, 이고도 마찬가지일 거다. 입을 열고 뱉은 말은 보나마나 이 끔찍한 상황에 대한 말이겠지. 그런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 모두 지금 적나라하게 느꼈고, 또 느끼고 있으니까. 책이라도 보면서 아주 잠시라도 이 상황을 안 보려고 한다. 어차피 눈 감는다고 안 보이는 것이 아니니까. 더 나빠질 것도 없어. 더 좋아질 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다 흘러갈 거야. 흘러가는 동안 아프지만 언젠가는 다 흘러갈 거다. 눈에 들어오지 않는 책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문장은 단어로 분해되고, 단어는 글자로 분해되고, 글자는 선과 점으로 분해된다. 책장 넘기는 소리만 들린다. 조용하고 평화롭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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