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기적과 저주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2장 06화

좀좀이 2017. 9. 8.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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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개학한지 일주일이다. 학교는 하루가 다르게 시끄러워져갔다. 개학한 다음날부터 학생들끼리 편을 갈라 언쟁을 하기 시작했고, 점점 양쪽에 가담하는 학생들이 늘어만 갔다. 책을 다 읽은 학생들이 늘어나서 이런 현상이 더욱 격해지는 것일 거다. 이제는 이 언쟁에 참여하지 않는 학생이 없을 지경이다. 내가 들어가는 강의실에서 그 언쟁에 참여하지 않는 학생은 오직 나와 라키사 뿐이다. 나도 그 언쟁에 가담하고 싶다. 하지만 개학한 다음날 서점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라키사의 말을 들은 후 아무 말 하지 않기로 했다. 라키사 말대로 어느 날 갑자기 상황이 바뀌면 어떻게 해?


 '오늘도 학교 가면 또 애들 언쟁하는 꼴 봐야겠네. 그나저나 라키사는 엄청 속상해하는 거 아냐?'


 나야 지난 학기 꼴등으로 시험을 통과했다. 그래서 다른 학생들이 나를 생각없는 학생으로 간주하는 그 태도와 눈빛이 딱히 어색하지 않다. 교수가 나를 유령 취급하던 그날부터 강의실에서 매일 겪던 일이니까. 그러나 라키사는 이런 대우가 적응하기 어려울 거다. 라키사가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것을 입 밖으로 내뱉지만 않을 뿐. 하지만 입 밖으로 자기 생각을 꺼내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라키사는 생각없는 애로 몰리고 있다. 그래서일까? 요즘 학교에서 라키사 표정이 항상 어둡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내게 빨리 서점으로 돌아가자고 옷소매를 잡아당긴다. 라키사는 학교에서 가만히 앉아 쉬는 것보다 차라리 땡볕 아래에서 책을 수거하러 다니는 것이 더 낫다고 여기는 것 같다. 아마 그럴 거다. 속으로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많이 답답하겠지. 나야 정말로 아드라스어와 대륙공통어를 못 해서 겪었던 일이니 납득되는 이유라도 있지, 얘는 아무 말 안 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시당하는 거잖아.


 '그래도 수업 시간 중에는 별 일 없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수업을 듣지 않고 뛰쳐나가거나 교수의 말을 가로막는 학생은 아직까지 없다. 수업 시간 전과 후에만 떠들어댈 뿐이다. 마치 개 한 마리가 짖기 시작하면 온 동네 개들이 다 짖어대는 것처럼 누군가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는 순간 다 떠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수업 중에 그러는 놈은 없다. 만약 수업시간에 그런다면 보나마나 교수는 강의실에서 쫓아내겠지. 그리고 낙제 확정. 모두가 낙제 받는 것은 두려워서 수업 시간 중에는 열심히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을 공부한다.


 사실 내 입장에서 인식론을 수업 시간에 배우는 것은 아주 좋다. 인식론 내용 자체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인식론 내용은 싫다. 내용 자체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인식론은 마딜어로 되어 있잖아. 한 시간은 그냥 날로 먹을 수 있다. 게다가 전공 수업이 한 시간 줄어들었기 때문에 진도도 매일 한 시간 분량씩 덜 나갈 수 밖에 없다. 방학때 이번 학기에 배울 분량을 다 보지 못했다. 내 밑천이 드러날 날이 그렇게 매일 한 시간씩 뒤로 밀려나는 중인 거다. 인식론 자체야 별도로 공부할 내용이 있는 것 같지는 않구. 인식론 시험을 쳐야 할 때 다시 한 번 읽어보는 것으로 족할 거다.



 학교로 가기 위해 서점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상쾌한 아침 냄새. 여기저기에서 아침 식사를 만드는 냄새가 난다. 찝찔하고 꾸릿꾸릿한 냄새와 비릿한 냄새가 물과 불 냄새에 섞여 거리로 스며나온다. 아침이라고 이제야 푹 삭힌 생선 집어넣고 수프를 끓이나보다. 저 수프에 밥을 말아먹든 빵을 찍어먹든 하겠지. 아마 아침이니까 밥보다는 빵을 먹겠지? 돌아다니며 빵을 파는 빵장수의 방울 소리는 내가 서 있는 이곳에서 점점 더 멀어져간다. 이제 학교 가서 목도해야할 그 광경과는 너무나 다른 평화로운 풍경. 지금 어디에선가는 속으로 씩씩거리며 학교를 향해 걸어가는 학생들이 있겠지.


 문을 닫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서점 벽 옆에 뭔가 시꺼먼 불에 그을린 자국이 보였다.


 "저거 뭐야?"


 어젯밤 누가 서점 옆에서 무슨 장난을 친 거야? 서점 벽 바로 옆에 있는 불에 그을린 자국 주변에 털이 북슬북슬한 작은 덩어리들이 있었다. 뭔가 예감이 좋지 않다. 하필 우리 서점 옆에 이런 것이 있다니. 순간 온몸에 닭살이 돋아났다. 저것은 정말로 안 좋은 거다. 아주 위험한 거야. 자세히 관찰하지 않아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그 불에 그을린 자리로 다가갔다.


 "아, 미친! 어떤 새끼야?"


 생각이 필요없었다. 바로 욕이 튀어나왔다. 이것은 고양이 시체였다. 검게 그을린 자국은 고양이 몸통이었다. 검게 그을린 자국 위에는 그 어떤 것도 없었다. 털도, 피도, 뼈도 없었다. 그저 까만 자국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 까만 자국 주변으로 고양이의 머리, 네 다리, 꼬리만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고양이 몸통을 중심으로 진짜 고양이의 몸처럼 머리, 네 다리, 꼬리가 놓여 있었다는 것이었다. 나 이것과 비슷한 것 본 적 있어! 그때는 쥐였다. 쥐가 이렇게 몸통은 뼈조차 안 남기고 다 타버려서 땅에 검게 그을린 자국만 남아 있었고, 그 그을린 자국 주변에 쥐의 머리, 네 다리, 꼬리만 남아 있었다. 이번에는 고양이다. 고양이가 그것과 똑같은 형태로 죽어 있었다. 고양이 머리를 살펴보았다. 고양이 표정이 참 평화로웠다. 고통스러워서 발버둥친 흔적이 없다. 오히려 행복해서 웃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이다. 이 모습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평화롭게 눈을 감고 입도 다물은 얼굴. 미쳤다.


 "이고! 빨리 나와봐!"


 서점 문으로 달려가 문을 활짝 열고 소리쳤다. 이고는 빗자루를 들고 서점 바닥을 쓸다 고개만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뭔데? 너 학교 안 가?"

 "빨리 나와봐!"

 "아, 뭔데?"

 "어서! 빨리! 우리 서점 옆에 진짜 이상한 거 있어!"


 이고가 빗자루를 손에 든 채 내 쪽으로 다가왔다. 이고를 데리고 서점 벽 옆에 있는 고양이 시체를 보여주었다. 이고의 표정이 굳었다.


 "아...이거 뭐야?"

 "몰라! 나도 학교 가려고 서점에서 나왔는데 있었어!"


 이고가 쭈그려 앉아 고양이 시체를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어떤 또라이 새끼가 서점 담벼락에 이따위 짓을 한 거야?"


 이고가 툴툴대며 고양이 목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고양이 목 절단면은 불로 지져놓은 모양이었다. 누군가 목을 먼저 자른 후 불로 태운 것이라면 목 주변 털에 피가 뭍어있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이 고양이는 목 주변에 피가 전혀 뭍어 있지 않다. 어떻게 이런 모양으로 고양이를 태울 수 있지? 그리고 고양이는 왜 반항을 하지 않았을까? 안에서부터 타들어간 건가? 그런데 불이 몸 안에서부터 타들어간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리고 안에서부터 타들어간 것이라 해도 고양이가 발버둥치지 않았다는 것은 여전히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거 혹시 저주술 아냐?"

 "글쎄...나도 저주술은 잘 몰라. 이거 치워야겠네. 아침부터 재수없게시리..."


 이고가 짜증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

 "어? 라키사! 네가 이 시각에 웬일이야?"


 이고와 고양이 시체를 관찰하고 있는데 누가 인사를 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라키사였다. 라키사는 이 아침에 서점에 웬일이지?


 "라키사, 이거 네가 한 거야?"

 "응? 뭔데?"


 이고는 라키사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고양이 시체를 가리키며 네가 한 짓이냐고 물어보았다. 라키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고 옆으로 다가갔다.


 "이거 뭐야?"

 "어떤 미친놈이 우리 서점 옆에서 이따위 짓을 해놨어."


 라키사도 고양이 시체를 보더니 깜짝 놀라서 아무 말 하지 못했다.


 "대체 어떤 미친 놈이 이런 짓을 해놓은 거야?"

 "이건 저주술 아닐까?"

 "저주술이고 나발이고 이걸 왜 우리 서점 옆에서 해? 어젯밤 딱히 별 것 없었는데."

 "이건 저주술 아니면 설명이 안 돼. 이고, 너 누구한테 원한 살 짓 했어?"

 "내가 무슨 원한 살 짓을 해? 책 수거하러 가서 멱살 잡고 두들겨 패고 하는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이고와 라키사가 고양이 시체를 관찰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아마 라키사 말이 맞을 거다. 이 고양이 시체는 분명히 저주술로 만든 거다. 그런데 이 고양이 시체를 왜 우리 서점 옆에 만들어놓은 거지? 더욱 이상한 것은 밤에 특별히 이상한 낌새를 느끼지 못했다는 거다. 내가 깊게 잠들어서 못 느꼈을 수도 있지만, 이렇게 될 지경이라면 고양이가 분명히 시끄럽게 울어대어야 정상이다. 이고도 밤에 딱히 이상한 것을 못 느꼈다고 하고, 라키사는 저주술을 사용할 줄 모르니 이런 짓을 할 수도 없겠지. 이 서점에 원한을 갖을 사람이 있나? 왜 서점 옆에서 이 짓을 해놓은 거야?


 "아침부터 재수없게 못볼 것 봤네. 빨리 치워버려야겠다."


 이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키사도 같이 일어났다.


 "그런데 너는 이 시각에 웬일이야? 너 학교 안 가?"

 "오늘은 타슈갈이랑 같이 학교가려구."

 "학교에 뭔 일 있어? 갑자기 왜 안 하던 짓을 해?"

 "그냥...요즘 학교 시끄러워서..."


 이고의 질문에 라키사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학교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이고도 대충 알고 있다. 밤에 나와 잡담하면서 내가 이고에게 학교에서의 일을 이야기해주었거든. 하지만 이고는 길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조심해서 다녀. 학교에서 쓸 데 없는 짓 하지 말구."

 "나는 타슈갈보다 훨씬 똑똑해. 걱정하지 마."



 라키사가 왜 아침부터 서점에 왔지? 서점이 안 보이게 되자 라키사에게 물어보았다.


 "너 왜 아침에 서점으로 왔어?"

 "그냥."

 "뭐가 그냥이야? 너 아침에 서점 들려서 학교 간 날 없잖아."

 "그게..."


 라키사는 잠시 아무 말 없이 땅만 바라보며 걸었다.


 "학교 가기 싫어서. 일찍 가봐야 애들 싸우는 모습만 봐야 하잖아."

 "아...그래서 일부러 먼 길 돌아가는 거야?"

 "응. 그래도 너랑 같이 강의실 들어가면 애들이 나를 덜 주목할테니까."


 라키사가 애들 때문에 정말 스트레스 많이 받나보다. 그럴 만도 할 거다. 어느 쪽을 지지한다고 말해버리면 편하기야 하겠지. 물론 라키사를 싫어하는 애들과 좋아하는 애들이 쫙 갈리겠지만. 그 대신 그 다음이 문제일 거다. 전에 라키사가 이야기해준 생각대로라면 말이다. 그래서 입을 다물고 있는 것 뿐인데, 입을 다물고 있으니 애들이 라키사가 생각없는 애라고 간주한다. 그것이 정말 싫겠지. 차라리 나랑 같이 다니면 혼자 그런 시선을 받는 것은 아니니 덜 괴로우려나?


 "너 아침 먹었어?"

 "아니."

 "이거 먹어."


 라키사가 가방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더니 쿠키를 하나 건네주었다. 구운 밀가루 맛과 속에 들어간 견과류 맛만 나는 단순한 쿠키. 라키사가 항상 챙겨다니는 쿠키다.


 "고마워."

 "제발 이 상황이 끝났으면 좋겠어."

 "그러게."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을 왜 배워야하는지도 짜증나지만 다른 애들이 더 짜증나. 꼭 자기가 잘났다고 싸워야만 해? 그리고 아무 말 안하고 있으면 생각이 없는 거야?"


 라키사가 짜증난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라키사 모습이 매우 귀여워보였다.


 "그래도 네가 잘나서 그런 거잖아."

 "내가 뭐가 잘났다고 그래?"

 "어쨌든 네가 우리 전공에서 공부를 특출나게 제일 잘 하는 건 사실이잖아. 게다가 이제 아다비아도 없으니 너와 경쟁할 상대도 없구. 그래서 애들이 더욱 너에게 주목하는 거 아닐까? 나를 봐. 아무도 나한테 신경 안 쓰잖아. 나한테는 그런 것 물어보지도 않는다구."

 "진짜 그렇게 생각해?"

 "응. 네가 너무 뛰어나서 겪는 비극이라고 생각하면 맞지 않을까?"

 "나를 그렇게 봐주다니 고마워."

 "뭘. 틀린 말도 아닌데."

 "너 은근히 말 잘한다! 아다비아는 맨날 너보고 답답하다고 툴툴대었는데."

 "아다비아가 말을 이상하게 하는 거겠지. 나도 아다비아가 뭘 말하고 싶어하는지 잘 모르겠던데."


 라키사가 인상을 펴고 밝은 표정을 지었다. 딱히 라키사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한 말은 아니다. 이게 사실인걸. 강의실에 있는 학생들 모두 라키사에게 생각없는 애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라키사에게 인식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라키사가 모르겠다고 대답해서다. 그리고 그 애들이 라키사에게 물어본 이유는 라키사가 우리 전공에서 공부를 유독 특출나게 잘하기 때문이고. 나는 우리 전공에서 공부를 유독 독보적으로 못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내게 그런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즉, 나는 있는 그대로를 말했을 뿐이다. 그런데 라키사는 나보고 은근히 말을 잘 한다고 이야기했다. 자기가 듣고 싶었던 말이 바로 그 말이어서 그렇게 이야기한 것이겠지?


 "우리는 왜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을 배워야할까?"

 "정부에서 명령한 거라잖아."

 "그러니까 왜 정부에서 그런 명령을 내린 것 같아?"

 "글쎄...이제 우리도 다른 나라들처럼 되어야한다고 생각한 것 아닐까?"

 "그게 꼭 좋은 걸까?"


 라키사의 질문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다른 나라들이 어떤지 잘 모른다. 마딜 공화국보다야 훨씬 발달했겠지. 하지만 그것은 책을 보고 판단한 내용일 뿐이다. 실제 다른 나라들이 어떤 모습인지 나도 잘 모른다. 내 고향인 인파사가 남아드라스 공화국에서 멀지 않은 곳이기는 하다. 그리고 내 부모님은 남아드라스 공화국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남아드라스 공화국을 자주 갔던 것은 아니다. 나도 남아드라스 공화국이 어떤 나라인지 잘 모른다. 셀베티아 왕국, 우르간 왕국이 어떤 나라인지는 더더욱 모르구.


 사실 나도 이것이 의문이다. 우리에게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을 반드시 배워야한다고 한 이유야 뻔하다. 다른 나라들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이겠지. 우리 마딜 공화국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고유의 문화, 전통을 버리고 다른 나라들의 문화와 전통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빨리 발전해야한다는 것일 거다. 그리고 마딜인 고유의 문화와 전통의 중심에는 저주술이 자리잡고 있으니 그 저주술을 정면으로 부정해야 한다는 것일 거구. 그런데 다른 나라들을 맹목적으로 따라간다는 것이 과연 좋은 것일까? 저주술은 정말로 미개하고 잘못된 것일까? 저주술이 무엇인지야 나도 안다. 뚜렷하게 무엇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 중 많은 것들이 저주술이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문화와 연관된 것들이니까.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저주술의 존재를 느끼고 있다. 이것이 전부 잘못된 것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을까? 마딜인들의 전통과 문화에는 다른 나라들의 문화와 전통보다 좋은 점이 단 하나도 없을까? 그냥 열등하고 미개한 존재일 뿐일까? 이것이 확실히 맞다면 아무리 감정적으로 싫어도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확실히 맞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을 강제로 배워야한다는 것 사실에 큰 거부감이 든다. 만약에 저주술이 4원소설, 마법 같은 것보다 더 뛰어난 것이면 나중에 어쩌려구? 그리고 저주술이 그것들보다 못하다는 확실한 증거도 없잖아.


 "그건 아닌 것 같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렇지? 나도 우리가 다른 나라들과 똑같아지는 것이 더 좋다는 생각은 아무리 해도 안 들어. 그리고 키란님께서 마법을 사용하셨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구!"


 라키사가 작은 목소리로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라키사의 말에 크게 공감했다. 위대하신 키란님께서 마법을 사용했다구?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모두가 키란님께서 저주술을 사용하셨다고 하는데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심지어는 키란님의 저주술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까지도 아직 많이 살아있을텐데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지껄여놓았는지 도저히 모르겠다. 라짐 마이슈프는 키란님의 저주술을 직접 보고 키란님께 저주술을 배워서 그런 말을 한 걸까? 아니라고 본다.



 "저거 뭐야?"


 학교로 가까워질 수록 경찰과 군인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강의실 건물 앞에 도착하자 학생들이 대치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건물 입구에는 대자보가 걸려 있었다.


 -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 교육을 중지하라!


 건물을 막아선 학생들은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 수업을 반대하는 무리였다. 다른 건물들도 다 그 무리들이 입구를 막고 있었다. 1층 창문은 나무 판자로 막아놓았다. 건물에 아예 못 들어가게 만들어놓았다. 그 무리들 앞에 있는 다른 무리들은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 교육을 찬성하는 무리였다. 이들은 벌써부터 말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양쪽 무리 모두 남학생, 여학생 할 것 없이 섞여 있었다.


 "우리 저기 갔다가 괜히 저기에 휩쓸리는 거 아니야?"

 "그래도 한 번 가보자. 쟤들 대체 무슨 말을 하며 싸우는지 궁금해."


 아무리 봐도 저 자리에 다가가는 것이 매우 안 좋을 것 같아서 멀찍이서 구경하려는데 라키사가 가까이 가서 보자고 나를 잡아당겼다. 가까이서 구경하는 것이 영 못마땅하지만 라키사가 가까이 가보자고 하니 일단 따라갔다.


 "이 쓰레기 같은 놈들아, 비켜! 수업시간 다 되었어!"

 "뭘 비키라는 거야? 이따위 엉터리 수업을 받도록 가만 있을 수 없어!"

 "뭐가 엉터리라는 거야? 그거야말로 맞는 말 아니야? 거지같이 저주술이나 빨아대면서 살아야 하냐?"

 "뭐가 거지같다는 거야? 저주술 아니었으면 우리 모두 지금도 우르간 대제국의 노예였어!"


 양쪽에서 거친 말이 오고 가고 있었다.


 "오늘 수업 못 하는 거 아니야?"

 "교수님이 와봐야 알 거 같아."


 아무리 보아도 오늘 수업은 없을 것 같다. 이렇게 양쪽 무리가 건물을 봉쇄하고 격하게 말싸움을 벌이고 있는데 교수가 과연 수업을 할까? 등교한 학생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기 생각에 맞는 무리로 빨려들어갔다. 대치하는 두 무리의 인원은 점점 더 많아져간다. 오늘 안에 끝날 싸움이 아닌 것 같다. 인식론 교육을 반대하는 무리가 창문에 판자까지 붙여버렸으니 저거 뜯어내는 데에도 시간이 꽤 걸릴 거다. 저것을 안 뜯어낸다면 어두컴컴해서 수업을 할 수 없을 테니까. 그것보다 건물을 막아서는 인원이나, 그 앞에서 건물 입구에서 비키라고 요구하는 인원이나 전혀 줄어들 생각을 안한다는 것이 문제다. 오히려 그 인원들이 더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순간 놀랐다. 건물로 오다 되돌아가는 교수. 교수는 웃고 있었다. 교수는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 가르치는 것이 정말 못마땅했나보다. 하긴, 그러니 그렇게 무성의하게 인식론을 가르쳤겠지. 자기가 한 번 읽고, 모든 학생들에게 소리내어서 한 번씩 읽게 시키는 정도였으니까. 딱히 무언가 설명하려는 의욕조차 보이지 않았다. 자기가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에 공감했다면 그따위로 가르치지 않았을 거다. 그리고 건물 앞을 막아서고 있는 학생들 중 매우 낯익은 여학생이 하나 보였다. 치롤라였다. 치롤라는 당연히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에 강력하게 반대하겠지. 치롤라가 저주술 전공이라고 했으니까. 자기 전공 자체를 무식하고 미개한 것이라 말하고 있으니 격분하는 것이 당연할 거다.


 "우리 가자. 이거 오늘 내에 안 끝날 거 같아."

 "그래도 조금 더 보고 가자."


 빨리 이 자리를 뜨고 싶다. 그런데 라키사는 조금 더 구경하자고 했다. 이런 자리는 무조건 빨리 떠야 한다. 이런 것을 겪어본 적은 없지만 직감이 내게 알려주고 있었다. 여기에 괜히 있다가는 이 무리에 휩쓸려버릴 수 있다. 이 싸움은 절대 곱게 끝날 싸움이 아니다. 빠져나갈 수 있을 때 빠져나가는 것이 상책이다. 눈치없이 구경하고 있다가는 나도 라키사도 이 싸움에 참여한 무리로 몰려버릴 수가 있다.


 "라키사, 빨리 가자. 이거 구경해서 뭐해?"

 "그래도 보고 싶어."

 "너 싸우는 거 구경 안 해봤어? 이거 곱게 끝날 거 같지 않다니까?"

 "그래도...어느 순간 자기들끼리 이성적으로 대화를 시작하지 않을까?"

 "뭔 바보 같은 소리야? 이게 이성적으로 대화할 것이 아니잖아!"


 라키사 손목을 꽉 움켜쥐고 잡아끌었다. 라키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지금은 내 직감을 믿어야할 때다. 얘가 싸우는 것을 본 적이 과연 있을까? 그 이전에 어디서 주먹질하고 싸워본 적도, 흠씬 두들겨패고 두들겨맞아본 적도 없겠지? 물론 나도 이렇게 무리지어 말싸움하는 것을 본 적은 없다. 그러나 이야기를 나누는 꼴을 보아하니 이것은 분명히...


 "이 거지새끼들아, 너네는 평생 니 애미랑 누나, 여동생 팔아먹을 거지?"

 "뭐야? 너네 지금 말 다 했냐?"

 "왜? 틀렸냐? 먹고 살려고 다리 벌리라고 할 거 아냐? 되도 않는 저주술 부여잡고 있으면 빵이 나오냐? 이 애미 팔아먹는 새끼들아!"

 "너, 지금 그 말 당장 사과해라. 안 그러면 뒤진다?"

 "뭘 뒤져? 맞는 말 하니까 찔리냐? 쪽팔려? 오늘도 집에 가서 다리 벌리라고 할 거지? 더러운 거지새끼들아."


 분명히...이제 곱게 끝나지 않는다.


 "손목 놔! 나 더 볼 거라니까!"

 "야, 빨리 가자니까!"


 라키사를 노려보며 버럭 소리쳤다. 순간 라키사가 움찔했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였다. 라키사를 강제로 끌고 건물에서 멀어질 즈음 여자들의 비명소리와 남자들의 고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교문을 빠져나왔을 때였다. 경찰과 군인 무리가 학교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서점 가자."

 "응."


 라키사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말없이 걸어갔다. 경찰과 군인 무리가 들어갔으니 금방 끝났겠지? 내일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수업을 할 수 있을까? 경찰과 군인은 패싸움을 진압한 후, 건물 입구에서 학생들을 모두 끌어낼 거다. 그리고 창문에 붙어 있는 판자를 모조리 뜯어내겠지. 내일 학교에 가보면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조용할 거다. 강의실에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들어올 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서점으로 돌아왔다. 라키사는 하루 종일 말이 없었다. 업무 시간이 끝나자 이고에게만 인사를 한 후 집으로 돌아갔다.


 "쟤 왜 저래? 너 라키사랑 싸웠냐?"

 "아니."

 "그런데 왜 저래? 무슨 일 있었어?"

 "별로...내일 학교 가야 하나?"

 "학교? 갑자기 왜?"


 이고가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오늘 학교에서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 찬성하는 애들이랑 반대하는 애들이랑 패싸움했어. 결국 경찰까지 출동하고 난리났어."

 "뭐? 진짜?"


 이고가 깜짝 놀랐다.


 "내일 별 일 없겠지?"

 "별로 느낌이 좋지 않은데..."


 이고의 표정이 매우 어두워졌다. 나도 내일 별 일 없겠다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느낌이 영 좋지 않다. 내일 반드시 무언가 생길 것 같다.



 다음날. 학교에 가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누가 서점 문을 두드렸다. 서점 문을 열었다. 라키사였다.


 "어? 오늘도 왔네?"

 "응. 학교 가자."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가방을 후다닥 챙겨서 서점 밖으로 나왔다. 라키사는 아무 말 없었다. 어제 일로 화가 많이 났나보다.


 "미안해."

 "뭐가?"

 "어제 너 확 잡아끌고 소리쳐서."

 "아니야. 괜찮아. 신경쓸 거 없어."


 라키사는 아무 말 없이 땅만 보며 걸어갔다. 나도 라키사에게 따로 말을 하지 않았다. 어제 손목 꽉 움켜쥐고 거칠게 잡아끌며 소리쳤으니 라키사 기분이 아주 안 좋았겠지. 그 상황에서 어쩔 수 없잖아. 딱 봐도 곧 서로 패싸움할 분위기였다. 라키사가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패싸움이 발생했다. 거기 있었다면 우리도 경찰들에게 두들겨맞았을 거다. 좋게 설득하는 것이 더 좋기는 했겠지만 나로써도 방법이 없었다. 곧 패싸움이 벌어질 것 같은데 뭘 어떻게 잘 이해를 시켜.


 "이거 먹어."

 "응?"

 "싫어?"

 "아니야! 고마워."


 라키사가 가방에서 주머니를 꺼내더니 쿠키 두 개를 꺼내서 내게 주었다. 어제와 똑같은 쿠키다.


 "오늘은 별 일 없었으면 좋겠어."

 "응. 그래도 어제 경찰이랑 군대가 패싸움 진압했을테니 별 일 없지 않을까?"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어."


 라키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마 어제 난리치던 애들은 어느 쪽이든 경찰과 군인들에게 개 처맞듯 두들겨 맞았을 거다. 여기 거지와 노숙자들이 얌전히 있는 이유는 경찰들이 진압할 때 무자비하게 때리기 때문이다. 그런 경찰이 얌전히 패싸움하는 학생들을 말렸을 리는 없겠지. 아마 그 거지와 노숙자들을 패던 것처럼 흠씬 두들겨패며 둘을 떼어놓았을 거다. 애들 경찰서 끌려갔으려나? 그보다 치롤라는 괜찮을까? 치롤라도 그 무리 속에 있었는데.



 "하...오늘도 여전하네."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양 측이 대치하고 있다. 어제보다 분위기가 더 살벌했다. 경찰서에 끌려간 애들은 없나보다. 머리와 팔에 붕대 감은 애들이 여럿 보인다.


 "오늘도 수업 없을 거 같은데?"

 "너무해."

 "오늘도 가까이 가서 볼래?"

 "아니, 싫어!"


 라키사에게 장난으로 어제처럼 가까이 다가가서 보겠냐고 물어보자 라키사가 단호하게 싫다고 대답했다. 어제 한 번 겪어보았으니 오늘 또 그런 일을 겪고 싶지는 않을 거다. 그래도 어제 경찰과 군대가 진압을 한 번 했으니 오늘은 패싸움까지 하지는 않으려나? 어제 가족에 대해 욕할 때 알아봤다. 이성적인 대화는 무슨. 저렇게 몰려 있으면 괜히 자기가 더 강하고 대단한 놈인줄 착각하기 마련이지. 이런 건 누가 가르쳐주어서 아는 것 아니잖아.


 "야, 비키라구! 우리 낙제 받으면 너네가 책임질 거야?"

 "낙제가 문제야? 이딴 것을 배워서 노예가 되게 생겼는데!"


 오늘도 역시나 양쪽이 싸우고 있다. 어제보다 상황이 더 안 좋아보인다. 양쪽 다 각목에 몽둥이를 들고 있다. 아예 패싸움할 것을 각오하고 저러고 있는 거야? 어제의 교훈인지 양쪽 다 여학생들은 뒤로 빠져 있다.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 교육 반대파는 여학생들이 문을 막고 있고, 그 앞에 남학생들이 나름대로 무장을 하고 서 있다. 찬성파는 반대로 맨 앞에 남학생들이 무장을 하고 서 있고, 여학생들이 뒤에서 소리쳐대고 있다. 정말 시끄럽다.


 "이 새끼들아, 비키라구!"

 "못 비켜, 이 노예 자식들아!"


 남자들은 남자들대로, 여자들은 여자들대로 소리를 쳐대고 있다. 대화가 될 리가 없다. 그저 각자가 각각 악에 받쳐 상대방 귀 떨어져나가라고 소리를 질러댈 뿐이다.


 "타슈갈, 저 연기 뭐야?"

 "응? 어디?"

 "저기! 2층!"


 라키사가 건물 2층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검은 연기가 조금씩 새어나오고 있었다.


 "도망가자!"


 이번에는 라키사가 내 손을 잡고 나를 잡아당겼다. 위험하다. 뭔가 있다. 뒤돌아서서 자리를 피하려는데 사방에서 폭음이 들렸다.


 "뭐야!"


 뒤돌아봤다. 모든 건물의 2층과 옥상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다. 건물 앞에 모여 있던 학생들이 정신없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와 라키사도 있는 힘껏 학교를 빠져나가기 위해 달렸다. 어떤 미친놈이야? 아냐, 이것은 한 명이 한 일일리가 없어. 어떤 돌아버린 놈들이 이 짓을 한 거야? 일단 빨리 교문에서 벗어나야 한다. 경찰과 군대가 또 들이닥칠 거다. 거기에 휩쓸리면 안 된다. 교문을 빠져나왔다. 멀리 경찰과 군인들이 달려오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들은 모두 오른손에 몽둥이를 꼭 쥐고 있다.


 '이건 꿈이겠지?'


 뺨을 때렸다. 얼얼하기만 할 뿐이다. 뒤돌아서서 학교쪽을 바라보았다. 검은 연기가 하늘 높이 치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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