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기적과 저주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2장 05화

좀좀이 2017. 9. 7.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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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5년 9월 1일. 드디어 개학날이다. 방학은 정말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다. 시험에서 합격한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개학이라니 시간은 전혀 균일하게 흐르지 않나 보다. 그래도 이렇게 개학을 맞이하고 등교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어디야? 만약 낙제를 했다면 이런 날을 맞이하지 못했겠지. 빨라야 내년 봄에나 '개학'이라는 것을 맞이했을 거다.


 '아다비아는 오늘 학교 올까?'


 아다비아는 뮈젤로 교육받으러 갔다. 아마 오늘 등교할 리가 없을 거다. 거기 연구원이 되었다는 것은 아예 거기 학생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중앙학문연구소를 다니면서 에드자 대학교도 다닐 수 있을까? 그것은 아마 불가능할 거다. 게다가 그 교육을 중앙학문연구소에서 받는 것도 아니고 뮈젤에서 받는다고 했으니 오늘 등교한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겠지. 교육을 안 받고 단순히 뮈젤까지 다녀오는 것이라 해도 오늘 오는 것은 아마 불가능하지 않을까? 그러고보니 이제 수업에 감비르도 없고 아다비아도 없겠구나. 강의실에서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라키사 밖에 없다니 허전하다. 그래도 라키사와는 서점에서 같이 일하며 많이 친해졌으니 강의실에서 나 혼자 멍하니 수업을 듣는 일은 그래도 없지 않을까?


 '진짜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을 가르칠까?'


 그런 책이 나온 것 자체는 이해할 수도 있다. 제대로 된 책은 전부 대륙공통어와 아드라스어로 되어 있다. 수업에서도 대륙공통어와 아드라스어를 많이 사용하구. 거리에서 대륙공통어, 아드라스어로 된 간판을 보는 것도 그렇게 어렵지 않다. 마딜어로 된 것 중 제대로 된 것은 무엇이 있나 싶을 지경이다. 그러니 생각이 너무 나가서 우리도 어서 다른 나라들에서 일반적인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을 할 수도 있을 거다. 당장 아다비아만 해도 키란의 업적에 대해 의심을 품을 지경인데. 물론 내 고향 인파사에서는 꿈도 못 꿀 이야기지만 여기는 에드자잖아. 외국인들이 아주 드문드문 보이는 곳도 아니구.


 그렇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과 그런 생각을 수업 시간에서 배워야한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솔직히 지난 학기 수업시간 내내, 그리고 서점에서 책을 볼 때마다 마딜 공화국이 한심하고 거지같다고 느꼈다. 대체 독립한 지가 몇 년인데 아직까지도 마딜어로 된 책이라고는 쓰레기만도 못한 저주술 책밖에 없어? 이고와 블랑쉬블르는 외국인이다. 이들을 볼 때 딱히 열등감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책을 볼 때마다 이들에게 열등감을 느낀다. 아주 많이 느낀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후진 마딜 공화국에 넘어와서 살고 있는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그 나라에서 학교를 다녔다고 하니 우리보다 배운 것도 훨씬 많고 아는 것도 훨씬 많을 거 아냐? 그래서 아다비아의 생각에 어느 정도 공감하기는 한다. 그렇지만 이거야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다. 내가 마딜 공화국을 자기들 말로 된 책 하나 똑바로 못 만들어내는 미개한 나라라고 욕을 하더라도 이것은 내 마음 속에서 혼자 하는 생각이지 다른 사람에게 알릴 생각은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대놓고 우리 마딜 공화국의 역사 자체를 부정하는 그런 사상을 강제로 배우라고 하지? 비록 남아드라스 공화국과 셀베티아 왕국의 참전이 크기는 했지만 우리도 스스로 열심히 싸웠잖아? 그렇게 배웠고, 모두가 그렇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바로 저주수리 있었다. 그런데 저주술은 틀린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 그거까지는 가능해. 하지만 이것을 왜 배워야하지? 라짐 마이슈프의 생각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이 마딜 공화국 내에 존재할 수야 있겠지만 그것을 왜 배워야 하지? 배운다는 것은 강제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잖아?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껏 알고 있던 역사는 다 틀린 것이라는 이야기를 왜 강제로 받아들여야 하지?


 '진짜로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을 가르치는 일은 없겠지?'


 이고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보면 진짜로 가르칠 것 같기는 하다. 어떻게 모든 인쇄소가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만 인쇄하고 있어?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다.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이 특이하기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에드자 사람들이 열광할 책은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그 책을 광장에 모아놓고 불싸지르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게다가 책은 저렴하지도 않다. 상당히 비싸다. 그런데 그런 책을 모든 인쇄소가 그것만 찍어내고 있다고? 상당히 불길한 현상이다. 이고가 내가 다음 학기에 배울 책이라고 했을 때는 그 말이 별로 와닿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인쇄소에서 그 책만 찍어내고 있다는 말을 듣자 진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확 들었다. 단 하루 그랬던 것도 아니다. 지금까지도 인쇄소에서는 오직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만 찍어내고 있다.


 그렇지만 그 말도 안 되는 내용을 정식으로 배워야할 이유는 없잖아?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이 내가 셀베티아어를 배우는 데에 대체 어떤 도움을 주는데? 중앙학문연구소에서 배운다면 모르겠지만, 내 전공인 셀베티아어를 배우는 것에 그 책 내용이 도움이 될 것은 하나도 없다. 그 책 내용과 셀베티아어 학습 간에는 그 어떤 관계도 없으니까. 차라리 라짐 마이슈프가 셀베티아 왕국의 높으신 분이라면 그 나라의 사상을 배운다고 이해라도 하지. 라짐 마이슈프는 보나마나 마딜인이다.



 "저거 뭐야?"


 고양이가 무언가를 열심히 뜯어먹고 있다. 입이 피칠갑이다. 얼굴을 아예 파뭍고 열심히 먹고 있다. 자기 몸만한 것을 먹어대고 있다. 쟤는 이 아침부터 뭐 자기 몸덩이만한 것을 뜯어먹고 있어? 갑자기 궁금하다. 대체 무엇을 먹고 있는데 저렇게 얼굴에 피를 듬뿍 발라지든 말든 신경 안 쓰고 먹어대는 거지? 고양이가 열심히 뜯어먹는 것은 회색 털뭉치였다. 토끼라도 잡았나? 그보다 자기 몸만한 것을 무슨 수로 잡은 거야? 고양이가 무엇을 저렇게 열심히 뜯어먹고 있는지 보러 다가갔다.


 "어? 이거 뭐야?"


 고양이는 내가 다가오든 말든 신경도 안 쓰고 열심히 뜯어먹고 있다. 고양이가 뜯어먹고 있는 것은 바로 고양이 시체였다. 죽은 고양이는 죽은지 얼마 안 되어 보인다. 오늘 새벽에 죽은 것 같다. 고양이가 죽을 수도 있지. 그런데 고양이가 원래 다른 고양이 시체를 뜯어먹나? 쥐들은 자기들끼리 잡아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았지만 고양이가 다른 고양이를 잡아먹는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은 정확히 배만 찢었다는 것이었다. 나머지 부분은 다 깨끗하다. 고양이는 고양이 시체에서 내장을 파먹고 있다. 위에서부터 차근차근 뜯어먹는 것도 아니고 배에 구멍을 내서 내장만 파먹고 있는 것이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무슨 일 일어나려고 이러나?'


 얼마 전 쥐의 시체가 떠올랐다. 쥐의 시체를 보면서 매우 희안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혹시 저주술사의 소행이 아닐까 추측해보기도 했다. 장난으로 일어나기에는 너무 기이한 일이었으니까. 그러데 이것은 대체 뭐지? 이 고양이의 정체가 뭘까? 어떻게 다른 고양이의 배를 찢고 머리를 박고 내장만 파먹고 있지? 배를 아주 쭉 잡아찢은 거라면 에드자의 고양이는 정말 사납다고 생각했을 거다. 그런데 그렇게 확 잡아찢은 것도 아니고 아주 작게 - 딱 자기 머리만 집어넣을 수 있을 정도만 찢고는 내장을 파먹고 있다. 고양이가 다른 고양이를 이렇게 제압하고 내장 파먹는 것이 가능한 동물이었나? 고양이가 자기 동족을 잡아먹는다는 소리는 들어보지도 못했고, 이렇게 잡아먹는다는 소리는 더더욱 못 들어봤다.


 '이건 진짜 조금 불길한데.'


 찜찜한 마음으로 학교에 도착했다. 강의실로 바로 갔다.



 '아...저것 과연 별 일 없을까?'


 교탁에 수북히 쌓여 있는 책.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 이고의 말이 맞았다. 교탁 위에 저렇게 책이 수북히 쌓여 있다는 것은 저 책을 이제부터 수업시간에 배워야한다는 의미겠지. 다른 학생들은 서로 방학 어떻게 지냈냐고 물어보며 잡담중이다. 간간이 교탁 위에 쌓여 있는 책이 무엇이냐는 이야기가 나오기는 하지만 아직 그 책이 어떤 책인지 많은 관심을 보이는 학생들은 없다.


 강의실 뒷편에 라키사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라키사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안녕."

 "안녕."

 "네 옆자리에 앉아도 돼?"

 "그래."


 라키사가 의자 위에 올려놓은 가방을 치워주었다. 라키사에게 방학을 어떻게 지냈냐고 물어볼 필요가 전혀 없다. 방학 내내 나와 같이 서점에서 일했으니까. 그리고 오늘도 수업이 끝나면 나와 같이 서점에서 일할 거다. 형식적으로조차 방학때 무엇을 하며 지냈냐고 물어볼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아침 먹고 왔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다. 무언가 안부 인사를 건네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이야기를 나눌 거리가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오늘 배울 것 다 읽었어?"

 "응. 이건 방학때 읽어서 알아."

 "잘 되었네. 그런데 너 저 책은 어떻게 할 거야?"


 라키사가 교탁 위의 책을 가리키며 물어보았다. 나 저 책 다 읽었어. 저 책이 대체 어떤 일을 일으킬지 궁금할 뿐이야. 생각해보니 라키사는 아직 저 책을 읽지 못했겠구나! 저 책은 시중에 풀리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블랑쉬블르가 책이 제대로 판매되기 전에 들고 왔기 때문에 미리 볼 수 있었다. 아직까지는 에드자에 저 책을 제대로 읽은 사람이 거의 없을 거다. 이 대학교에는 더더욱 그런 사람이 없겠지.


 "저것도 열심히 봐야지."

 "같이 볼래? 네가 원한다면..."

 "저거?"


 순간 망설여졌다. 저 책은 마딜어로 되어 있다. 굳이 라키사가 도와주지 않아도 나 혼자 볼 수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이미 혼자 저 책을 다 읽었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저 책의 내용이 문제인 것이다. 라키사는 저 책 내용을 보면 분명히 분노할 거다. 시간이 될 때마다 키란 동상에 참배를 간다는 애가 저주술 자체를 비하하고 부정하는 저 책을 보고 가만히 있을까?


 "싫으면 일부러 같이 안 봐도 돼."

 "아니야! 그게 아니라 너한테 방해될 거 같아서..."


 라키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나 혼자 보는 것보다 너와 같이 보는 것이 훨씬 덜 지루하고 재미있어."


 대충 둘러대기는 했지만 계속 걱정된다. 아침에 본 다른 고양이의 내장을 파먹고 있던 고양이도, 저 교탁 위에 쌓여 있는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도, 그리고 저 책 내용이 뭔지 모르고 나와 같이 보자고 하는 라키사도 신경쓰인다. 그러고보니 얼마전 쥐를 갖고 장난쳐 놓은 것을 보았었지? 그것도 고양이가 다른 고양이 내장을 파먹던 것과 관련 있는 것 아닐까? 설마...그것은 아니겠지.


 강의실 문이 열리고 교수가 들어왔다. 교수의 표정이 아주 어둡다. 교수는 교탁 앞에 서서 학생들에게 교탁 위의 책을 한 권씩 가져가라고 명령했다. 학생들 모두 앞으로 나가 책을 한 권씩 들고 자리로 돌아갔다. 나도 앞으로 나가 책을 한 권 집어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내가 읽은 그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과 똑같은 책이다. 그래도 에드자는 외국인도 많고 다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을테니 이 책을 읽는다고 큰 충격을 받지는 않겠지? 교탁을 바라봤다. 강의실에 빈 자리는 두 자리. 감비르와 아다비아 자리다. 그러나 책은 두 권이 남지 않고 강의실 인원에 딱 맞아떨어졌다.


 "이 책은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이다. 정부의 명령으로 이번 학기부터 매일 한 시간씩 이 책에 대해 학습하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 대한 내용에 대해 이번 학기에 두 번 시험을 치를 것이다. 이 시험에서 낙제할 경우, 이번 학기는 낙제다."


 이 책을 배울 거라고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놀랍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 내용으로 이번 학기에 시험을 두 번 보고, 탈락하면 바로 이번 학기 낙제라고? 우리의 전공인 셀베티아어 시험도 이번 학기에 학기말에 치르는 시험뿐인데? 게다가 교수의 말대로라면 이 책으로 치르는 시험이 전공 시험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거잖아? 대체 왜 이 책 내용이 전공 과목보다 더 우선해야 하는 거지? 당연히 학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너네들도 황당하겠지. 대체 이 책이 뭐길래 우리 전공인 셀베티아어보다 더 중요한 건지 궁금할 거다. 1학년 때는 '언어'라는 것에 대한 기초를 배우고 2학년부터 셀베티아어와 셀베티아 왕국에 대한 이러저러한 것들을 배운다고는 하지만 왜, 무슨 이유로 이 책이 원래 우리들의 교육과정보다 더 중요한지 이해가 안 될 거다.


 "조용히 해! 모두 오늘 받은 책 첫 장 펴!"


 교수가 짜증을 버럭 내며 학생들에게 인식론 책을 펼치라고 했다. 그렇게 이번 학기, 그리고 인식론 강의가 시작되었다.


 교수가 짜증을 내며 분위기를 잡았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인식론 첫 부분은 별 내용이 없고 지루한 내용이기 때문이었을까? 다행히 첫 날은 별 일 없었다. 교수의 인식론 강의는 정말 재미없었다. 교수도 인식론 내용을 완벽히 이해 못한 것 같다. 책 지문을 읽고, 학생들에게 따라 읽어보라고 하는 것이 실상 전부였다. 내용에 대한 설명은 거의 없었다. 그저 마딜어로 적힌 책을 교수와 학생들 모두 소리내어서 읽어댈 뿐이었다. 모두가 무슨 말인지 모르니 맹목적으로 일단 외우고 보자는 것인가?



 수업 끝나는 시간은 그대로였다. 단지 그 수업 시간 중 한 시간이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 강의가 되었을 뿐이다. 라키사와 강의실에서 나왔다. 지난 학기에 항상 그랬던 것처럼 벤치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라키사가 내 옆에 앉았다. 지난 학기 초에는 감비르가 내 옆에 앉아 있었지. 감비르가 옆에 앉아 있는 것보다야 당연히 라키사가 옆에 앉아 있는 것이 낫다. 라키사는 가방에서 물병을 꺼내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우리 이 책 왜 배워야하는지 알아?"

 "글쎄..."

 "나는 왜 정부에서 우리들에게 이 책을 배우라고 했는지 전혀 모르겠어."


 라키사가 못마땅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나도 왜 이 책을 배워야하는지 전혀 모르겠다. 이 책을 처음 읽어보았을 때 이것을 학교에서 배울 것이라는 이고의 말이 거짓이기를 바랬다. 물론 그것은 이고의 말이 아니었다. 블랑쉬블르가 이고에게 이야기해준 것이라고 했으니까. 설마 진짜 이것을 배우겠냐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진짜였다. 이 책을 왜 배워야하는지 나도 전혀 이해를 못하겠다. 솔직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이것 뿐이다. 가르치니까 배울 뿐이고, 교수 말대로 이것 시험을 통과 못하면 이번 학기 낙제니까 공부할 뿐이다.


 "아무래도 오늘 이 책 끝까지 다 읽어봐야겠어. 대체 이 책을 우리가 왜 배워야하나."


 라키사 표정이 매우 좋지 않다. 단순한 호기심에 책을 읽어보아야겠다는 표정이 아니다. 이 상황에 짜증은 났지만 어떤 책인지 아직 정확히 모르니 말을 않겠다는 것 같다. 책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지만 책에 대한 이야기 외에는 딱히 나눌 이야기가 없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서점으로 일하러 가야할 시간이다.


 같이 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때도, 서점에서 일할 때도 라키사와 별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라키사는 서점에서 틈이 날 때마다 인식론을 열심히 읽다 퇴근했다. 이 이야기에 대해 이고에게 딱히 말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고도 라키사가 인식론을 열심히 읽어대는 것을 보며 학교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대충 짐작하고 있을 거다. 내일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 건가? 모두가 별 일 없다는 듯 조용히 인식론 수업을 들을까?



 강의실에 도착해보니 가관이다. 학생들이 서로 편을 나누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따위 책을 우리가 왜 수업시간에 배워야 해?"

 "이런 미친놈의 말 같지도 않은 책은 당장 불질러버려야 해!"


 한 무리가 왜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 책을 배워야 하냐며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치고 있다.


 "이런 책이 이제야 나왔다니...이거 진짜 진리 아니냐?"

 "역시 라짐 마이슈프는 우리 마딜인들 중 가장 천재야!"


 다른 한 무리는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을 찬양하고 있다.


 "야, 이게 똑바로 쓴 책이냐? 이거 완전 엉터리잖아! 우리 마딜인의 모든 것을 열등하고 잘못된 것이라 하고 있는데!"

 "그러면 그게 사실이지, 거짓이야? 그렇게 우리 조상들이 잘 나서 남아드라스랑 셀베티아가 우리를 해방시켜줬냐?"

 "뭔 망언이야?"

 "맞잖아? 전세계에서 우리가 가장 거지 같이 사는 거 사실이잖아! 주둥이만 나불댈 것이 아니라 결과를 보여줘야지!"


 가장 격하게 충돌하는 애들은 남쪽에서 올라온 학생들과 북쪽에서 내려온 학생들이었다.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에 대해 남쪽에서 올라온 학생들은 극도로 부정적인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었고, 북쪽에서 내려온 학생들은 진리를 찾은 것처럼 찬양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기는 하다. 마딜 해방 전쟁에서 남쪽은 큰 피해를 입었다. 해방 전쟁에서 북부 지역 사람들은 우르간 대제국의 학문과 제도 등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남부 지역 사람들은 더욱 순수한 우리 것으로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마딜 공화국 전국을 다 돌아다녀본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에드자에 와서 여러 사람을 만나보고 거리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것이 아직도 큰 영향을 주고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정부가 아주 미쳐돌아가네. 우리 학교 이름도 원래 '키란 대학교'였는데 정부가 '에드자 대학교'로 이름 바꾸어버린 거잖아!"

 "그러면 '키란 대학교'가 좋은 이름이냐?"

 "지금 키란님을 욕하는 거야?"

 "틀린 말도 아니잖아? 우리 스스로 독립했냐? 키란이 에드자를 날리든 말든 어짜피 독립할 거였어!"

 "뭐 이런 미친 놈이 다 있어?"


 두 무리가 서로 언성을 높이며 소리친다. 저 언쟁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 강의실에서 라카사를 찾아보았다. 라키사는 강의실 제일 뒤쪽 구석에 혼자 앉아 있었다.


 "안녕."

 "응. 안녕."


 라키사 옆자리에 앉았다. 라키사의 표정이 매우 어둡다. 속에서 천불이 나는데 꾹 참고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려는 것이 얼굴에 역력히 드러나고 있다. 이 책 이야기를 하면 절대 안 되겠다. 가방에서 인식론과 전공 수업 교재를 꺼냈다. 라키사는 계속 아무 말이 없다. 라키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어떤 이야기를 꺼내도 결국 이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 이야기로 흘러갈 것 같다. 라키사는 입을 굳게 다물고 전공 서적만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다. 나도 전공 서적을 펼쳤다.


 "라키사! 너 어제 이 책 읽어봤어?"


 인식론이 엄청난 명저라고 소리쳐대던 학생이 라키사에게 물어보았다.


 "나? 응."

 "이 책 멋지지?"

 "인식론?"

 "어!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 굉장하지 않아?"


 라키사는 입을 다물었다. 이 머저리야, 라키사 표정만 봐도 모르겠냐? 라키사가 이 책을 좋게 볼 확률은 없다. 시간이 될 때마다 키란 동상에 참배하러 가는 애가 저주술을 무지몽매하고 잘못된 것이라 욕하는 이 책을 퍽이나 좋아하겠다.


 "라키사, 이거 쓰레기지? 라짐 마이슈프는 매국노 같은 놈 맞지?"


 인식론을 비난하며 라짐 마이슈프를 잡아다 공개참수해야 한다고 소리치던 학생이 물어보았다.


 "글쎄...모르겠어."

 "너 이 책 안 읽었어? 네가 이 책을 어제 안 읽었을 리가 없잖아!"

 "읽었어."

 "어때? 이거 완전 헛소리 아냐?"

 "무슨 말이야! 라키사, 이거 정말 대단하지?"


 두 학생이 라키사에게 대답을 강요했다. 라키사는 아무 말 없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두 학생은 계속 라키사에게 대답할 것을 종용했다.


 "몰라. 그냥 읽었어."

 "그냥 읽는다는 게 말이 돼? 너 생각이 있을 거 아니야?"

 "라키사, 솔직히 말해! 너 여기에서 공부 제일 잘 하잖아!"


 라키사는 잠시 아무 말 없이 그 둘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드디어 라키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와닿는 것도 있고 아닌 것 같은 것도 있고..."

 "그게 무슨 소리야?"

 "이 책 좋아, 싫어?"


 둘은 라키사에게 정확히 한쪽을 선택하라고 강요했다.


 "몰라. 거기에는 관심 없어."


 둘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기들끼리 언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둘의 얼굴을 보았을 때 느꼈다. 얘네들 라키사의 대답을 듣고 라키사에게 실망했구나. 실망을 넘어서서 한심하다고 여기겠지. 나 또한 라키사가 관심 없다는 말을 하는 순간 얘가 생각을 갖고 사는 애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점에서 같이 일하고 이야기하면서 라키사가 절대 그런 애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데도 말이다. 이 둘은 내게는 책을 읽어보았냐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나는 이 교실에서 성적이 가장 나쁘기 때문에 물어볼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나는 너희들이 어제 읽어보기 훨씬 전에 이미 인식론을 몇 번이나 읽어보았는데. 쓸 데 없이 입놀려서 피곤한 상황에 빠지기 싫어서 가만히 있었다.


 교수가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학생들은 교수가 들어오자 일단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말싸움을 벌이던 학생들은 얼굴이 시뻘겋게 상기되어 씩씩거리고 있다.


 "모두 조용히 해! 인식론 책 꺼내!"


 교수가 강의실에 들어오자마자 소리쳤다.


 "교수님! 이 책은 배울 가치가 없어요! 이런 엉터리 헛소리를 우리가 왜 배워야 하나요!"

 "불만이면 나가!"


 학생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치자 교수가 바로 불만이면 나가라고 소리쳤다. 교수의 호통에 학생은 궁시렁대며 자리에 앉았다.



 수업이 끝났다. 교수가 강의실에서 나가자 학생들은 다시 편을 갈라 언쟁을 하기 시작했다. 라키사가 내 옷을 잡아당겼다.


 "타슈갈, 어서 나가자. 피곤해."

 "응."


 자기들끼리 싸우라고 하고 강의실에서 나왔다. 라키사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다. 뭐에 대해서 이렇게 불만이 가득한 표정일까? 이 상황? 이 책? 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얼굴이 어둡지? 라키사는 내 옷자락을 잡아쥐고 건물 밖으로 나와 내가 항상 앉는 벤치로 갔다.


 "너 담배 태울 거지?"

 "응?"

 "어서 태워. 빨리 서점으로 돌아가자."

 "아니야. 오늘은 서점 가서 태우려고."

 "그러면 빨리 돌아가자."


 라키사와 학교에서 나와 서점을 향해 걸어갔다. 라키사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렇게 식당도 지나치고 서점에 거의 다 왔을 때였다. 라키사가 내게 물어보았다.


 "타슈갈, 너는 인식론 어떻게 생각해?"

 "인식론?"

 "응."


 솔직히 대답해야 하나? 아니면 거짓으로 대답해야 하나? 어떤 대답을 하더라도 라키사는 화를 낼 것 같다.


 "잘 모르겠어. 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아."

 "뭐가?"

 "그냥...라짐 마이슈프의 의견에 절대 동의하지를 못하겠어. 실제 역사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라키사가 한숨을 내쉬더니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이 상황 자체가 너무 싫어. 인식론을 대체 왜 배우고 외워야 해? 그리고 애들은 왜 내게 대답을 강요해?"

 "대답을 강요하다니 무슨 말이야?"

 "너 오기 전부터 애들이 계속 나한테 인식론에 대해서 물어봤어."

 "아...그거야 네가 우리 전공에서 공부 제일 잘 하니까 그런 거 아니야? 나한테는 아무도 안 물어보던데..."


 라키사는 제자리에 멈추어서서 가방끈을 꽉 쥐었다.


 "자기들은 쉽게 돈 벌고 편하게 학교 다니니까 그런 소리나 하지."

 "응? 뭐?"

 "나는 무조건 장학금 받아야 해. 인식론 정말 싫어. 하지만 장학금을 받으려면 반드시 인식론 시험을 통과해야 해. 저런 편가르기에 휩쓸릴 수 없다구. 자기들이야 가정교사 하고 좋은 일자리에서 일하면서 돈 쉽게 많이 버니까 저런 짓을 할 여유가 있지. 나는 이제야 간신히 돈 몇 푼 벌고 있어. 이 돈에 장학금까지 받아야 계속 에드자에서 생활할 수 있어."

 "그냥 잡담하는 건데 그렇게 생각하는 건 비약 아니야?"

 "비약? 너는 이게 비약이라고 생각해?"


 순간 잠시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라키사가 에드자 와서 일자리를 못 구해서 정말 고생 많이 했었지. 서점에 자리 나면 알려달라고 나에게 부탁했었고, 서점에서 일하게 되저 정말 기뻐했다. 한여름 피부가 까맣게 타고 옷이 땀에 절더라도 기뻐하며 열심히 일한다. 그 이유는 그나마 서점에서라도 일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라키사가 책 수거하러다니는 일 자체를 좋아할 리야 없을 거다. 그러나 항상 웃으며 열심히 하는 이유는 그거라도 할 수 있어서겠지.


 "미안해. 내가 말을 실수했어. 너 일자리 못 구해서 힘들어한 거 아는데..."

 "괜찮아."


 라키사의 표정이 여전히 좋지 않다.


 "그래도 이 정도라도 이해해주는 것은 너 밖에 없으니까."

 "아...하지만 너 기분 나쁘게 한 건 잘못했어."

 "아니야. 그 정도라도 이해해주어서 기뻐. 나는 여기에 정착하는 것이 목표야. 묄른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거기로 돌아가면 내 인생은 부모가 정해준 곳으로 시집가서, 애 낳고 평생 집안일만 하다 죽는 거거든. 저런 편가르기 놀이 따위에 참여할 여유는 없어. 너도 아까 봤지?"

 "뭐를?"

 "내가 관심없다고 하니까 생각없는 여자라고 바라보던 시선."

 "아...너 그거 느꼈어?"


 라키사가 손바닥으로 내 등짝을 때렸다. 라키사 손이 꽤 맵다.


 "아, 왜 때려?"

 "내가 장님이니? 바보로 보여? 당연히 느끼지! 그런데 그 자리에서 내가 뭐라고 해? 걔들은 배가 불러서 그러는 거고, 나는 어떻게든 여기에서 버텨야 하는데!"

 "애들끼리 하는 이야기인데 뭐 상관 없잖아?"

 "거기서 내가 한 이야기가 돌고 돌아서 다른 사람 귀에 들어가면 어떡할래? 그러다 교수에게 밑보이면? 갑자기 인식론이 나쁜 것으로 상황이 바뀌면 어떡하구? 자기들이 나한테 좋은 일자리나 가정교사 자리 소개해줄 것도 아니고..."


 라키사의 아까 그 태도가 조금 이해되었다. 아까 정말 곤란했겠구나.


 "타슈갈, 어서 가자."

 "어디?"

 "우리 점심은 먹고 서점 가야하잖아. 오늘 너랑 나 둘 다 책 수거 일 많은 날인데."


 라키사가 다시 한 번 내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라키사와 점심을 먹으러 식당을 향해 걸어가다 라키사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다비아였다면 아까 그 상황에서 어떻게 대답했을까? 아다비아는 자기 생각을 신나게 떠들어대었을까? 아니면 아다비아는 아다비아 나름의 이유로 라키사처럼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을까? 내일도 학교를 가면 강의실이 또 인식론 때문에 시끄러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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