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기적과 저주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2장 04화

좀좀이 2017. 9. 3. 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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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단 위에 한 여자가 있다. 나를 향해 손짓을 하며 내게 오라고 한다. 계단을 한 걸음 올라갔다. 여자는 한 걸음 뒷걸음질쳤다.


 "왜 뒤로 가?"

 "나는 너를 향해서 한 걸음 다가간 거야."

 "그래?"


 다시 계단을 한 걸음 걸어올라갔다. 이번에는 여자가 세 걸음 뒷걸음질치며 올라갔다.


 "너 왜 계단을 올라가?"

 "나는 지금 너한테 가고 있는 거야."

 "그게 뭐 나한테 오고 있는 거야?"

 "너한테 가고 있는 거라니까!"


 여자는 나에게서 멀어졌는데 오히려 나와 가까워졌다고 소리쳤다.


 "그러면 거기 가만히 있어! 내가 너를 향해서 달려갈께!"

 "응! 빨리 와!"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여자는 분명히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여자와의 거리가 전혀 좁혀지지 않는다. 나와 여자 사이의 계단 난간 수가 하나도 줄어들지 않는다. 어떻게 된 거지?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분명히 열심히 위로 올라가고 있는데? 왜 여자와 나의 거리는 전혀 좁혀지지 않고 계속 같은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여자가 짜증난 목소리로 나를 향해 소리쳤다.


 "너 대체 언제 여기까지 올 거니? 내가 너를 향해서 갈께!"


 이번에는 여자가 달리기 시작했다. 분명히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그렇지만 나와 여자 사이의 계단 난간 수는 더 많아지고 있다. 여자가 나를 향해 한 걸음 내려올 때마다 두 걸음씩 거리가 벌어진다. 여자자 있는 위치는 여자가 나를 향해 다가올 수록 점점 더 까마득해진다. 이건 아니야. 왜 쟤가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데 거리가 더 멀어지지? 내가 달려가야 하나? 나도 여자를 향해 달린다. 계단 난간 수는 더 빠르게 늘어난다. 우리가 서로를 향해 달려갈 수록 거리는 더욱 더 멀어진다. 뛰어가는 것이 의미가 없다. 아니, 서로가 서로를 향해 가서는 안 된다. 다가가려고 할 수록 더 멀어지니까.


 자리에 멈추어섰다. 여자도 자리에 멈추어섰다. 여자는 화가 난 것 같았다.


 "너는 왜 나한테서 멀어지니?"

 "아니야! 우리가 다가갈 수록 멀어지는 거야!"

 "그게 말이 돼? 너 나빠! 내가 그렇게 싫어?"

 "무슨 말이야? 나도 너를 향해 달려갔다구!"

 "거짓말하지 마! 너 정말 가만히 있어?"


 여자가 나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역시나 계속 멀어진다.


 "야! 멈춰!"


 어느새 여자는 계단 꼭대기에 올라가 있었다. 그 뒤는 까마득한 어둠. 아마 낭떠러지겠지. 한 걸음 더 가면 분명히 떨어진다. 더 올라가려고 하면 안 돼! 여자는 계단을 올라가려 하고 있다. 내가 갈께! 기다려! 너 거기서 더 가지 마!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어느 순간 계단은 빗면으로 변했다. 나는 아래로 한없이 미끄러져 내려가고, 여자는 날카로운 모서리에 위태위태하게 서 있다. 아주 멀리 있는 여자의 얼굴이 뚜렷하게 보였다. 너 나빠. 내가 그렇게 싫니. 네가 나를 거부할 수 없게 더 높이 올라갈 거야.


 "안 돼!"



 꿈이었다. 참 희안한 꿈이네.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 다가갈 수록 계단이 늘어나면서 더 멀어지는 해괴한 장면. 엉터리 꿈이겠지. 해몽을 찾아볼 필요도 없을 거다. 이것은 다 이고 때문일 거다. 밤에 잘 때 창문만 열고 자도 이런 꿈에 시달리지 않았을 텐데. 이건 방이 더워서 내가 잠을 제대로 청하지 못해서 꾼 것일 거다. 아침부터 이렇게 기분나쁜 꿈 때문에 잠에서 깨어나다니. 이왕 일어났으니 세수하고 정신차려야겠다.


 수건을 챙겨서 방에서 나왔다. 어서 세수하고 책을 봐야지. 이제 개학이 얼마 남지 않았잖아. 다음 학기 목표는 내 힘으로 꼴찌를 면하는 것이다. 매우 어려운 목표다. 나 스스로 셀베티아어 전공에서 꼴찌를 면하는 것이 가능할까 싶기도 하다. 어쨌든 시험에서 합격은 했잖아? 게다가 감비르가 아예 시험을 안 치르는 바람에 꼴찌도 아니다. 합격자 중에서는 내가 꼴찌이지만.


 아침 공기도 덥다. 이제 조금 있으면 9월이다. 그러나 더위는 좀처럼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에드자의 더위는 정말 지독하구나. 인파사의 더위보다 훨씬 더 뜨겁다. 에드자는 사람들이 많아서 더 더운 것일까? 어떤 이유에서건 고향인 인파사에서 겪었던 여름보다 훨씬 더 덥다. 습하지나 않으면 살 것 같을텐데 습하기까지 하다. 그렇다고 더위를 피할 만한 곳이 많지도 않다. 물론 더위를 피할 만한 곳이 있다고 해도 나야 일해야 하기 때문에 갈 수가 없지만.


 길 옆에 땅이 그을린 것이 보인다. 누가 밤새 불장난했나? 무엇을 태웠는지 궁금해졌다. 땅이 그을린 자리에 멈추어서서 쭈그려앉았다. 대체 누가 무엇을 태워서 땅을 그을려 놓은 거야? 불장난을 치고 싶으면 흔적을 남기지 말고 깔끔하게 치던가. 이렇게 건물이 많은 곳에서 불장난 잘못 했다가는 화재로 이어질 수도 있을 건데? 그래서 일부러 밤에몰래 불장난을 한 건가? 낮에 하다 어른들에게 걸리면 두들겨맞을테니까?


 "어떤 놈이 이따위 짓을 한 거야?"


 그을음 주변에 쥐의 머리, 네 다리, 쥐 꼬리가 있다. 그을음 모양을 보니 딱 쥐 몸통 모양이다. 신기한 것은 뼈는 하나도 없다는 점이었다. 누군가 불로 쥐를 태운 것이라면 분명히 뼈도 여기에서 굴러다니고 있어야 한다. 뼈를 찾아보았지만 뼈는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쥐 목 단면을 보니 칼로 잘라내서 그을음 위에 모양을 맞추어놓은 것 같지도 않다. 몸통이 타다가 쥐 목 근처에서 불이 꺼져버린 것 같았다.


 "이것도 저주술인가?"


 어떤 놈인지는 몰라도 이런 짓을 한 놈은 분명히 미친 놈이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히 평범한 불장난이 아니다. 쥐를 죽인 후에 몸에 불을 붙였다고 보기에는 쥐의 시체가 너무 이상하다. 일단 뼈가 안 보인다. 그리고 쥐의 머리와 네 다리, 꼬리의 위치가 몸통 모양의 그을린 자국 위치와 비교해보았을 때 너무 완벽하게 쥐의 모양을 만들고 있다. 게다가 그을음이 딱히 옆으로 번진 자국도 없다. 누가 불을 붙여서 생긴 그을음이라면 주변에 그을음이 번져서 살짝 탄 자국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다.


 "별 희안한 일 다 보겠네."


 우물가로 가서 세수를 했다. 아까 그 쥐가 탄 것도 저주술의 일종이라고 보아야 하나? 저주술 사용하는 것을 제대로 본 적은 없다. 저주술사들이야 몇 번 보았지만 그들이 내 앞에서 저주술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저주술사야 당장 루즈카도 있고, 바하르도 있고, 치롤라도 있다. 그러나 그들 모두 저주술이 무엇인지, 저주술을 사용하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보여주지 않는다. 이런 것도 저주술인가? 몸을 자연스럽게 까맣게 불태워버리는 것? 그런데 이렇게 뼈까지 전부 남지 않고 까맣게 타버릴 때까지 쥐는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었을까? 쥐를 죽이고 그 시체를 갖고 저주술 수련을 한 건가?


 찝찝한 마음은 세수를 해도 씻겨내려가지 않는다. 이상한 꿈 때문에 잠에서 깨어나고, 세수하러 나왔더니 희안하게 불타버린 쥐의 시체를 보았다. 무슨 재수없는 일이 벌어지려고 이러는 건가? 설마 이상한 일이 일어나겠어. 저주술 수련하는 것이야 마딜 공화국에서 놀라울 것도 없는 일이잖아. 감비르도 저주술 수련한답시고 치르치나로 떠나갔는데. 마딜 공화국 밖에서는 저주술 수련하면 사형이라고 하지만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은 마딜 공화국이다. 저주술 수련을 한다고 해서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저주술을 사용할 수 있으면 저렇게 쥐 몸통만 태울 수도 있는 건가? 하지만 전혀 강해보이지 않는다. 아다비아의 말이 맞아보인다.



 세수를 하고 돌아와보니 서점 문이 열려 있었다. 오늘은 이고가 서점 문을 일찍 열었다. 이고도 밤새 악몽에 시달린 것 아니야? 그래서 내가 창문 좀 열고 자자고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말을 안 들어. 이고는 하품을 하며 서점 안을 청소하고 있다. 방에 들어가서 수건을 걸어놓고 다시 서점으로 들어왔다. 청소 정도는 그래도 도와주는 것이 낫겠지? 빗자루를 잡았다.


 "야, 일하지 말고 들어가서 잠이나 더 자든가 해. 아침에 일하지 말라니까."

 "응? 그냥 도와주려는 건데?"

 "뭘 도와줘? 이거 청소 얼마나 된다구."


 이고가 다가와서 빗자루를 빼앗았다. 정 그렇게 내가 도와주는 것이 싫다면야 어쩔 수 없다. 책을 들고 찻집으로 갔다. 찻집은 이른 아침부터 문을 열었다. 제일 저렴한 차로 차 한 주전자를 주문한 후 길거리 쪽에 있는 자리에 앉았다. 꿈과 쥐 시체. 별 거 아닐 거야. 계속 둘이 신경쓰인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신경쓰는 것에 비해 정말 사소한 일들일 거다. 지금까지 이상한 꿈을 꾼 적이 이번 한 번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쥐가 그렇게 불타서 죽었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다. 전부 아무 것도 아닐 거다. 이런 것을 본 것은 처음이지만 말이다. 꿈도 그것보다 더 이상한 꿈을 꾼 적도 많으니 별 꿈 아닐 거다.


 "안녕."

 "라키사! 왜 벌써 왔어?"


 차가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아 라키사가 왔다. 얘는 왜 벌써 왔지? 얘도 근무 시간이 나랑 똑같은데? 라키사 집이 서점 바로 옆도 아닐 거구.


 "집에 있으면 공부가 잘 안 되어서 서점에 공부하러 왔어."

 "아, 이 아침부터 공부하러 온 거야?"

 "응."

 "여기 앉아. 어차피 지금 서점 들어가면 이고가 영 안 좋아할 거야."

 "왜?"

 "근무 시간 외에는 서점 안에 있는 것 자체를 싫어하더라구."


 라키사에게 앉으라고 의자를 내어주었다. 라키사가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너 아침 먹었어?"

 "아니. 아침 원래 안 먹어."


 라키사는 가방을 열더니 안에서 조그만 자루 하나를 꺼내었다. 자루 입구를 묶은 끈을 풀더니 쿠키를 하나 건네주었다.


 "어? 왠 쿠키야"

 "배고플 때 먹으려고 가져온 건데 나누어먹자."

 "진짜? 고마워!"


 갈색으로 구운 쿠키였다. 쿠키는 딱딱했다. 구워서 생긴 고소한 맛에 속에 들어 있는 견과류가 만들어내는 고소한 맛. 아주 단순한 맛이다. 그래도 맛있다. 일단 라키사가 준 쿠키잖아. 아침에 이런 쿠키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어디야? 쿠키 가루가 한 알 땅에 떨어지는 것조차 아깝다. 조금씩 아껴먹으려고 살살 갉아먹으려 했지만 순식간에 하나를 다 먹었다.


 "맛있어?"

 "응! 정말 맛있어!"

 "하나 더 먹어."

 "너 이따 배고플 때 먹어야 하잖아. 괜찮아."

 "쿠키 두 개 정도야."


 라키사가 하나 더 주었다. 내가 너무 맛있게 먹어서 신기했나? 사실 이 쿠키는 그렇게까지 맛있는 쿠키가 아니다. 냉정히 말하자면 가장 저렴한 쿠키까지는 아니지만 상당히 저렴한 쿠키다. 단맛을 내는 것이 아무 것도 안 들어갔거든. 그래서 더 맛있게 느껴지는 것일까? 라키사가 준 쿠키지만 아무 부담없이 받아먹을 수 있다. 만약 이 쿠키가 매우 화려한 맛을 자랑했다면 라키사가 하나 더 준다고 했을 때 꽤 부담스러웠을 거다.


 "너 책은 미리 많이 보았어? 이제 개학 얼마 안 남았잖아."

 "아니...아직 많이 못 보았어. 혼자 보려고 하니까 무지 어렵네."

 "그러면 오늘부터 나랑 같이 볼래?"

 "너랑? 너하고 나는 보는 진도가 아예 안 맞잖아."


 나와 라키사가 서점에서 근무하는 시간은 똑같다. 일 없을 때 자기 하고 싶은 것 하는 것에 대해 이고가 별 말 하지 않으니 라키사가 내 공부를 도와준다면 나야 정말 좋다. 아다비아 없이 혼자 공부하면서 계속 엄청나게 고생중이다. 아다비아 덕분에 혼자서 책을 볼 수 있게 되기는 했지만, 빨리 볼 수 있게 된 것은 아니다. 예전에는 사전을 뒤져가며 보아도 무슨 말인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는 정도였다면, 지금은 사전을 뒤져가며 보면 무슨 말인지 대충은 알 수 있는 정도다. 여전히 책을 보는 속도는 많이 느리다. 라키사가 도와준다면 개학 전에 책을 미리 많이 볼 수 있을 거다. 게다가 개학후에도 라키사는 계속 나와 서점에서 같이 일할테니 내게 도움이 많이 되겠지. 그렇지만 이것은 나한테만 좋고 라키사에게는 좋을 것이 전혀 없다. 오히려 라키사에게는 자기 공부 방해만 되는 것이겠지.


 "나도 다음 학기에 배울 내용 다시 한 번 복습하고 있으니까 같이 보면 덜 지루할 거야."

 "그래?"

 "응. 나도 다시 한 번 보아야하는데 혼자 보면 심심해서...네가 원하면 도와줄께."

 "고마워!"

 "고맙기는...너 덕분에 서점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잖아."


 역시 꿈 해몽은 반대로 해야 하는 건가? 나쁜 일이 생길 줄 알았는데 오히려 라키사가 내 공부를 도와주겠다고 했다. 라키사와 아다비아에게 딱히 잘 해 준 것이 없는데 둘 덕분에 낙제를 면했다. 내가 진짜 운이 좋은 건가? 한편으로는 라키사가 정말 서점에서 일하고 싶었나 보다. 내가 에드자 오자마자 일자리를 잡아서 잘 모르는 건가? 라키사는 자기도 일자리를 잡기 위해 노력했지만 여자에게는 좋은 일자리를 안 준다고 툴툴대었었다. 그것은 아직도 잘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더더욱 서점에서 일하게 된 것을 고마워하는 건가? 지금까지 일해보았으면 서점 일도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대충 알았을텐데? 책 수거하러 돌아다니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도 라키사는 서점에 올 때마다 웃으며 온다. 그리고 일을 아직까지도 계속 열심히 한다. 시험을 치른 날, 라키사는 내게 정말 절박한 마음으로 부탁했던 거였구나.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하고 간 줄 알았는데. 라키사의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점은 조금 미안하다. 물론 잊지 않고 라키사를 이고에게 추천해주었으니 이제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나 먼저 들어갈께!"

 "응. 이고가 쫓아내면 다시 여기로 와!"

 "알았어."


 라키사가 활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도 서점 같이 들어가지 않을래?"

 "싫어. 이고가 서점에서 자꾸 쫓아낸단 말이야. 차 다 마시면 들어갈께. 너부터 들어가."

 "어서 들어와! 같이 책 보자."


 라키사가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찻주전자 뚜껑을 열어보았다. 차가 한 잔 정도 남았다. 찻잔에 부어서 입안에 훌훌 털어넣었다. 라키사가 다시 서점에서 나오는지 가만히 살펴본다. 라키사가 밖으로 안 나온다. 나도 안에 들어가도 될 것 같다.



 "어이! 아침부터 뭐 해?"

 "어? 너야말로 이 아침에 뭔 일이야?"


 바하르였다. 바하르는 나보고 아침부터 뭐하냐고 물어보았지만, 그건 내가 물어보고 싶은 말이다. 나야 서점 바로 앞에 있는 찻집에 온 것이니 아침 일찍부터 이렇게 있어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다. 하지만 바하르는 이 동네 사는 것도 아니잖아. 자기야말로 이 아침에 뭣하러 여기까지 온 거야?


 "너랑 놀려고 왔지."

 "뭘 나하고 놀아?"

 "지금 근무시간이야?"

 "그건 아닌데...무슨 이 아침부터 나랑 놀려고 와?"

 "심심해서. 방학이잖아. 앉아도 되지?"

 "어. 앉아."


 바하르가 의자에 앉았다.


 "그런데 왜 찻집으로 바로 왔어?"

 "너 근무시간 아니라 혹시 찻집에서 놀고 있지 않을까 했지. 내 예상이 딱 맞았네."


 바하르가 웃으며 대답했다. 솔직히 너 말 틀렸거든? 원래는 서점 안에 있으려고 했어. 그런데 이고가 쫓아내서 갈 곳 없으니 여기 있는 것이지. 바하르를 보자 순간 아다비아가 한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야, 너네는 대체 뭘 배우냐?"

 "뭔 소리야? 뜬금없이..."

 "아...그냥 궁금해서..."

 "나야 저주술 전공이니까 저주술 수련하지. 더 뛰어난 저주술을 개발하기 위해 연구하구."


 내가 그걸 모르겠냐. 생각해보니 내가 질문을 바보같이 했구나. 나 같아도 바하르가 뜬금없이 나한테 '너네는 대체 뭘 배우냐?'라고 물어보면 황당해할 거다.


 "아...아다비아가 음식을 먹는 것과 사람을 잡아먹는 것이 같다는 말을 해서...혹시 너네 이런 거 배워?"

 "아, 그거? 나즈 레 연구원님께 배우는 애들이 꼭 그런 소리를 하더라."

 "나즈 레? 어떤 사람이야? 아다비아한테 저 말 듣고 엄청 놀랐거든."


 바하르가 인상을 가볍게 찌푸렸다. '나즈 레'라는 인물 자체가 영 못마땅한 모양이다.


 "듣기로는 나즈 레 연구원님은 아주 오래 전에 남아드라스 공화국에서 넘어왔다더라구. 한창 독립전쟁이 진행중일 때 넘어왔대. 그 사람 저주술 이론은 매우 독특하지만 아무도 그 방법을 잘 몰라."

 "그게 무슨 말이야? 전쟁중에 여기로 넘어와서 저주술을 연구했다고?"

 "응. 한창 전쟁이 진행중일 때 여기 와서 저주술 연구를 시작했대."


 정말 희안한 사람이다. 저주술 연구하러 여기로 오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도 놀라운 일인데, 하필이면 전쟁 때라니. 전쟁 때면 우르간 대제국군이 저주술사들 마구 잡아서 처형하던 시대잖아? 그때 저주술사로 몰려서 억울하게 처형당한 마딜인들이 정말 많다고 하던데. 그런데 그 살벌했다고 하는 시대에 마딜 땅에 넘어왔고, 여기에서 저주술을 연구하고 있다니 이해가 어렵다. 그것도 마딜인이 아니라 남아드라스 공화국 사람이라고 하니 더더욱 더 이해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니 그런 미친 소리를 할 수 있는 건가?


 "그 사람은 대체 무슨 저주술을 연구하길래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소리를 해?"

 "나도 잘 몰라. 그분께 배우고 있지 않아서. 아, 자에드랑 예라가 그분께 배우고 있다! 걔네한테 물어보면 뭘 배우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걔네한테 왜 그런 거 물어보냐? 걔네들하고 별로 친하지도 않은데."

 "나도 걔네들하고는 별로 안 친한데...걔네들 솔직히 너무 생각없어보이지 않냐? 뭐든 자기들 기준으로 생각하더라구."

 "어. 그래서 걔네들하고 이야기하는 거 솔직히 짜증나."


 뭐야? 바하르도 자에드와 예라 싫어했었어? 바하르는 그래도 같은 중앙학문연구소 다니고 둘을 보면 서로 인사를 잘 해서 친하게 지내는 사이인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구나. 적당히 싫은 티 안 내려고 인사나 나누는 것이었군.


 "그 사람 연구 분야가 4원소설과 저주술의 결합이래."

 "4원소설? 그거 마법 아니야?"

 "맞아. 한 마디로 마법과 저주술을 결합한다는 건데, 그게 될까 둘이 상당히 다른데."

 "그래? 아예 달라?"

 "응. 똑바로 걸어가는 것과 물구나무서기해서 가는 것만큼 달라. 나도 4원소설은 이론만 조금 알 뿐이야."

 "이론이 뭔데?"

 "그러니까 세상을 물, 불, 공기, 흙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는 거야. 이 넷은 실체이자 기운이래. 그래서 이 넷의 실체와 기운을 잘 조합하면 현실에서 힘이 된다고 해. 여기에서 더 나아간 것이 '입자론'이라고 하는 것이구. 입자론은 세상 모든 것이 작은 입자들의 집합이라고 보는 거야. 그래서 저주술과는 아예 달라."

 "저주술하고 어떤 점에서 그렇게 다른데?"


 바하르가 서점 문을 유심히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입을 굳게 다물었다.


 "4원소설은 실체와 기운의 조합이야. 그래서 이들을 어떤 조합으로 만들어내느냐가 중요해. 뭐 그렇대. 반면 저주술은 생각을 바로 힘으로 만드는 거야. 그래서 조합 같은 것보다는 정신력이 중요해. 저주술은 그렇게 된다고 믿는 것이 중요해. 그렇지만 마법에서는 그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구. 그래서 방법 자체가 다른 것으로 알고 있어. 우리는 이루어진다고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그 방법은 딱히 정해진 것이 없어. 그렇지만 4원소설은 그런 생각 같은 것은 최대한 배제하고 오직 조합을 만드는 것에만 집중해. 감정과 생각을 철저히 배제하고 완벽한 조합을 만들어내는 것에 몰두한다고 해야 하나? 그러니 우리랑 사용하는 방식이 아예 다르지."

 "마법은 생각이 없어야 하고 저주술은 생각이 있어야 한다는 거야?"

 "뭐 대충 그렇다고 할 수 있어."

 "그러면 둘을 합치는 것이 가능해?"


 바하르가 웃었다.


 "가능할 리가 있냐? 그건 절대 못 합쳐! 둘을 합치는 건 한 발은 뒤로 가고 한 발은 앞으로 가는 것 같은 거야. 세상에 그것을 합칠 수 있는 놈은 없어."

 "그러면 나즈 레는 뭐야?"

 "그 사람도 완벽히 합치지는 못했을 걸? 그러니 그 사람 이론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지. 어떻게 아이디어만 조금 차용한 수준이겠지."


 하나는 생각이 핵심이고, 하나는 생각을 배제하는 것이 핵심이라면 둘은 공존할 수가 없다. 바하르 말이 맞다. 나즈 레가 대체 무엇을 발견해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둘을 진짜 합친 것은 아니겠지. 그런데 그건 그렇고 대체 왜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말을 하게 하는 거야? 둘을 어떤 식으로 이어보려고 했길래 저런 헛소리를 아다비아가 진정한 진리를 깨달은 듯 황홀한 표증을 지으며 말하는 거지?


 "자에드와 예라가 그 사람에게 배우는데, 이번에 뮈젤로 무슨 교육 받으러 간다고 떠났어."

 "아다비아도 그거 간 거야?"

 "아다비아도 뮈젤 갔어?"

 "응."

 "그러면 그거 따라갔나보네. 거기서 뭐하려고...애는 똑똑하고 멀쩡한 것 같던데..."

 "너는 거기 왜 안 갔어?"

 "나도 나즈 레의 생각에 살짝 관심이 있어서 갈까 했는데...영 내키지 않더라구."


 그래서 아침부터 여기에 놀라온 거야? 그런데 어떻게 아다비아가 뮈젤 간 것을 모르지?


 "아다비아가 뮈젤 간 것도 그 훈련 따라간 거야?"

 "아마 그러지 않을까? 아다비아도 나즈 레 연구원님 아래에서 일하는 것 같던데."


 얘는 아다비아랑 같은 중앙학문연구소에서  아니었어? 아다비아한테 관심 있는 것 같더만 아다비아가 뮈젤에 가는 것도 몰랐어?


 "너 진짜 몰랐어? 같은 중앙학문연구소잖아. 서로 대화 안 해?"

 "야, 중앙학문연구소가 무슨 콩알만한 곳인 줄 아냐? 그나저나 너 아다비아 뮈젤 갔는데 안 아쉬워?"


 아다비아가 뮈젤 간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괜찮다. 많이 아쉽지만 괜찮다. 왜냐하면 아다비아가 나를 이성으로 좋아할 리가 없으니까.


 "걔야 가서도 잘 하지 않을까? 너야말로 안 아쉬워? 너랑 아다비아 잘 어울릴 거 같은데."

 "뭔 소리야? 나는 그런 애는 별로야."

 "그러면 어떤 애가 좋은데?"

 "글쎄..."

 "야, 아무한테도 안 말할테니까 그냥 말해."


 바하르는 쑥스러운 듯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조그맣게 이야기했다.


 "치롤라...그런 애가 좋아."

 "뭐? 너 아다비아 좋아하는 것 아니었어?"

 "뭘 아다비아를 좋아해? 나는 치롤라같이 자기 주장 강하면서도 소박한 애가 좋아."

 "치롤라가 그런 애였어?"

 "너 이거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죽는다?"

 "안 말해!"


 바하르가 치롤라 좋아하는 줄은 몰랐네. 그리고 치롤라가 자기 주장 강하면서도 소박한 애였다니. 전혀 몰랐다. 그냥 평범한 시골 처녀같은 애라고만 생각했는데. 바하르는 치롤라를 그렇게 보고 있었구나? 이거 치롤라가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치롤라에게 말할 리는 없겠지만 치롤라가 좋아할까? 갑자기 마구 궁금하다.


 "그나저나 아다비아가 너 많이 좋아하는 거 같던데 잘 해 봐. 아, 지금은 걔 뮈젤 갔지?"

 "뭘 잘 해봐? 걔가 설마 나를 좋아하겠냐? 좋아했으면 차라리 너를 좋아하겠지."

 "뭔 소리야? 걔 너 주려고 펜도 사던데?"

 "뭔 나를 주려고 펜을 사?"


 바하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다비아가 너한테 펜 안 줘?"

 "뭘 나한테 펜을 줘?"


 바하르는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나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 시험 끝난 날, 치롤라랑 아다비아가 나랑 같이 중앙학문연구소 갔잖아."

 "어."

 "그때 아다비아가 너 준다고 펜 샀는데 너한테 안 줬어?"

 "나한테 뭔 펜을 줘? 자기 것 사는데 괜히 부끄러우니까 내 핑계 이야기했나보네."

 "아닌데...진짜 너 준다고 두 자루 샀는데..."


 아다비아가 나한테 펜을 보여주기는 했지. 하지만 그건 나한테 주려는 것이 아니었다. 중앙학문연구소에서 자기가 구입한 펜이 얼마나 좋은 펜인지 자랑하려고 보여준 것이었지. 아다비아는 두 자루 구입하고 싶으면 그냥 두 자루 구입할 것이지, 왜 내 핑계는 대었대? 하여간 그러니 아다비아지. 그 펜 두 자루 산다고 해서 뭐라고 할 사람 하나도 없을텐데.


 "너는 아다비아 좋아해서 거기 데려가놓고 뭔 소리야?"

 "뭘 내가 아다비아 좋아해서 거기 데려가? 치롤라 데리고 가려고 아다비아도 데려간 거구만."

 "그래?"

 "야, 치롤라한테만 가자고 하면 걔가 가겠냐? 그래서 감비르랑 아다비아까지 데려간 거야."

 "감비르도 네가 치롤라 좋아하는 거 알아?"

 "아니. 걔도 내가 아다비아 좋아한다고 생각하더라구. 나는 치롤라랑 둘이서 이야기할 기회 만들려고 아다비아랑 이야기 좀 나눈 것 뿐인데."


 아다비아가 이 대화 들으면 어떻게 생각할까? 뭐 상관없으려나? 아다비아가 나한테 바하르를 좋아한다고 말한 것도 아니니까. 단지 나 혼자 아다비아와 바하르가 친하게 지내는 것 같아서 둘이 서로 좋아하는 것 아닌가 생각했던 거다.


 "아다비아하고 이야기하면 아다비아가 너에 대해 이것저것 많이 물어봐. 야, 나라면 아다비아같은 여자가 나 좋다고 하면 일단 바로 사귀고 보겠다."

 "그러면 네가 고백하고 사귀든가."

 "나는 치롤라 좋아한다니까. 그리고 아다비아가 나 좋아하지도 않고 나도 그런 스타일은 별로인데 왜 고백하냐?"

 "아다비아는...좀 별로야. 나랑 달라도 너무 달라서 분명히 안 좋게 끝날 게 뻔해."


 바하르가 웃었다.


 "뭐가 그렇게 다른데? 둘이 잘 어울리는 거 같은데. 뭐 보통은 남자가 리드하고 여자가 따라가지만 반대여도 나쁠 건 없잖아?"

 "그런 거 아니야. 진짜 걔하고 이야기하다보면 뭔가 벽 같은 것이 느껴진다니까? 걔하고 나는 전부 다 너무 달라."


 바하르는 계속 웃었다. 아이고, 내 걱정 말고 너나 치롤라한테 잘 해 보세요. 치롤라도 지금 보면 네가 자기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아다비아 좋아한다고 생각할 거다.



 바하르와 점심을 같이 먹은 후 서점으로 돌아왔다. 이고가 무슨 종이를 들고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이고, 뭐해?"

 "편지 읽어."

 "편지? 너한테 편지 보낼 사람이 있어?"

 "여동생."

 "뭐? 너한테 여동생?"


 정말 안 믿기는 말이다. 이고에게 여동생이 있었다고? 아니지, 여동생이 있어서 아무렇지 않게 라키사에게 일을 시킬 수 있는 건가? 이고에게 여동생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했다. 하긴, 애인이 루즈카인데 여동생 하나 있다고 이상할 것은 없지.


 "왜? 나한테 여동생 있는 것이 신기해?"

 "응."

 "별 게 다 신기하네."

 "아무리 그래도 여자친구가 루즈카에 여동생도 있다니...말도 안 돼."

 "뭐 말이 안 돼?"


 이고가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여동생은 남아드라스 공화국에서 살고 있어?"

 "아니. 뮈젤에서 살아."

 "뭐? 걔는 아드라스인 아니야?"

 "맞아. 아드라스인인데?"

 "그런데 왜 뮈젤에서 살아?"

 "자기가 거기서 살고 싶대."


 이고에게 진지한 대답을 바란 내가 바보지. 이고에게 물어봤자 이고가 할 대답은 뻔하다. 이번에도 역시나 내 예상과 단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건성으로 대답하는 것처럼 들리는 대답이 돌아왔다.


 "뭐래? 남아드라스 공화국에서 살다가 여기로 왔으면 엄청 고생할텐데."

 "이번에 아들 낳았다면서 나한테 이제 빨리 좀 결혼하랜다."

 "아, 말 잘 했네!"

 "뭔 말이야?"

 "틀린 말은 아니잖아? 그러다 루즈카 도망가면 어쩌려고 그래?"


 이고가 깔깔 웃었다.


 "야, 루즈카가 뭘 또 도망가? 너 루즈카한테 그 소리 했다가는 루즈카가 화나서 너 몸 터쳐버리는 수 있어."


 이고는 편지를 접어서 품에 집어넣었다.


 "나는 오후에 다녀올 곳 있으니까, 라키사, 너는 알아서 퇴근해. 타슈갈, 업무 시간 끝나면 너는 서점 문 닫고 책 수거하러 다녀오구."


 이고가 서점에서 나갔다.


 "야, 아무리 우리랑 허물없이 지내도 말이 심하지 않아?"

 "응? 뭐가?"

 "그래도 우리보다 나이도 많은데 말이 심하잖아."

 "어?"


 이고가 나가자 라키사가 나를 꾸짖었다. 지금까지 이고랑 이렇게 지내왔는데? 그러나 라키사를 보니 지금까지 그래오며 지냈다고 이야기해도 안 들어줄 것 같다. 이것은 라키사가 이고와 계속 같이 일하며 지내보면 알아서 깨닫겠지. 굳이 라키사와 불필요한 언쟁을 벌이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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