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기적과 저주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2장 02화

좀좀이 2017. 9. 1.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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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굴이 답답하다. 누가 기름을 얼굴에 덕지덕지 발라놓은 것 같다. 세수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 아직 밖이 어슴푸레한 것으로 보아 새벽이다. 깊게 잤다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오래 자지는 못했다. 이 더위 때문에 오랫동안 깊게 자는 것은 무리다. 잠을 깨든 말든 일단 세수를 하고 싶다. 얼굴이 답답해서 깔끔하게 세수를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수건을 챙겨서 밖으로 나왔다.


 "별로 더운 것 같지 않은데 왜 이렇게 얼굴이 답답하지?"


 선선한 새벽 공기가 온몸을 자극한다. 커튼이라도 활짝 걷고 잘 걸 그랬나? 방 안에 나와 이고가 있으니 어지간해서는 도둑이 들어올 것 같지 않은데. 도둑보다 모기 때문에 커튼을 치고 자기는 하지만, 창문을 닫고 자니 방이 푹푹 찐다. 모기 때문에 잠을 설치는 것이나 더위 때문에 잠을 설치는 것이나 별 반 차이가 없을 것 같다. 그렇지만 이고는 꼭 커튼을 치고 자라고 한다. 우리가 자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뭐가 좋냐고 하면서 말이다.


 "우리가 자는 모습을 누가 와서 구경해? 보라고 해도 안 보겠구만."


 이고 말을 듣기는 해야 하지만 제발 창문 좀 열고 잤으면 좋겠다. 커튼까지 확 걷고 새벽 공기가 방 안으로 가득 들어오게 말이다. 방에서 밖으로 나오기만 해도 이렇게 시원한데. 이 바람이 방 안으로 가득 들어왔다면 자다가 이렇게 얼굴이 개기름으로 덮혀서 잠자다 일어나 세수하러 가는 일 자체가 없었을 거다. 그까짓 모기가 사람 귀찮게 해봐야 이 더위만큼 사람 짜증나게 할까.



 우물가에 도착했다. 이른 새벽이라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다.


 "몸에 시원하게 물이나 끼얹고 가야겠다."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우물가에서 옷을 홀라당 벗고 물을 끼얹어도 상관없겠지. 이른 새벽에 일어나면 이 점이 매우 좋구나. 멀리 냇가를 가거나 돈 내고 목욕탕을 갈 필요가 없다. 우물가에서 물만 시원하게 끼얹는 것으로 충분하니까. 물을 끼얹으면 더위 좀 많이 식겠지. 우물물은 매우 차갑고 지금 이 새벽 공기도 매우 시원하다. 우물쭈물하다가 사람이 오면 곤란하다. 혹시나 경찰이라도 오면 골치아프다. 우물가에서 다 큰 어른이 알몸으로 몸에 물을 끼얹고 있는 장면을 좋게 볼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다시 한 번 주변을 살펴보았다. 사람이 확실히 없다. 어서 옷을 벗고 몸에 물을 끼얹어야겠다.


 "이거 뭐지?"


 옷을 벗어놓을 만한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뭔가 이상한 것이 보였다. 저 새빨간 액체. 분명히 피였다. 양이 적지 않다. 조심스럽게 피가 고인 곳으로 다가갔다.


 "어떤 미친놈이 우물가에서 이런 장난을 쳐놓은 거야?"


 피가 고인 주변에는 쥐의 머리, 발, 꼬리가 있었다. 쥐의 머리, 발, 꼬리는 정확히 쥐의 몸통을 중심으로 놓여 있었다. 희안한 것은 몸통이 있어야할 자리에 몸통은 없고 피만 고여 있다는 점이었다. 밤새 어떤 놈이 여기에서 이런 장난을 친 거야? 살아있는 쥐를 잡아서 손으로 꽉 누른 상태에서 예리한 칼로 머리, 발, 꼬리를 절단한 모양이다. 그렇게 절단하고 나서 몸통만 들고 갔나 보다. 몸통에서 피를 다 빼서 말이다. 몸통이 터진 것처럼 핏자국 역시 터져서 주변에 흩뿌려진 모양이기는 했지만 흩뿌려진 범위가 넓지 않았다. 어떤 놈인지는 몰라도 정말 고약한 장난을 치고 도망갔다.


 "왜 하필 우물가에서 이런 짓을 하고 간 거야?"


 뭔가 찜찜하다. 아무리 장난이라지만 기분 좋은 장면은 아니다. 우물가에서 몰래 목욕을 하고 가려는 나도 딱히 도덕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조금 심했다. 여기 물을 길어다 음식도 만들고 청소도 한다. 그런데 그렇게 우리 일상에서 사용하는 물을 길어가는 곳에 쥐를 이렇게 죽이고 피를 흩뿌려놓는 것은 혼 좀 나야할 일이다. 게다가 기분나쁘게 몸통은 왜 들고간 거야?


 "아침부터 더러운 것 봤네."


 옷을 홀라당 벗고 물을 끼얹었다. 물로 몸의 열기를 식히니 살 것 같다. 물을 몇 바가지 몸에 끼얹고 머리를 감고 세수를 했다. 시원한 아침이 되었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옷을 입었다. 이 쥐 시체는 어떻게 하지? 손으로 만지기는 싫은데. 우물에서 물을 길어서 쥐 시체와 피가 있는 곳에 뿌렸다. 쥐의 피는 물과 섞여 불그스름한 핏물이 되어 흘러내려갔다. 그렇게 몇 번 물을 끼얹자 고여 있던 피는 대충 사라진 것 같았다.


 서점으로 돌아와 방으로 들어갔다.


 "뭐하냐?"

 "세수하고 왔어. 우리 커튼 좀 걷자. 너무 더워!"

 "우리 자는 꼴 동네방네 구경시켜줄 일 있냐? 커튼은 놔둬."


 이고가 돌아누웠다. 진짜 커튼 좀 걷고 자자니까 끝까지 커튼은 못 걷게 하네. 바닥에 드러누웠다. 여전히 방 안은 바깥보다 훨씬 푹푹 찌지만 씻고 왔더니 그래도 한결 살 것 같다. 어떤 놈인지는 몰라도 우물가에서 그런 장난을 친 놈은 꼭 벌 좀 받아라. 그런 짓은 아마 아이가 한 것이겠지? 길 가다가 발 꼬여서 확 앞으로 넘어져버려라. 어디 감히 사람 먹는 물을 제공하는 우물에서 그런 못된 장난짓을 하는 거야?



 근무시간이 되었다. 가장 먼저 대출 카드와 대출 목록을 확인해봤다. 오늘은 책 수거가 없다.


 '오늘 날로 먹는 날이다!'


 오늘은 다행히 책 수거가 없다. 오늘 같은 날은 정말 축복받은 날이다. 이런 날도 여러 날 있어야지. 매일 반납 안 된 책을 수거하러 돌아다니는 것은 너무하잖아? 날이라도 선선하면 산책하는 겸해서 돌아다녀도 괜찮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싹싹 더운 날에 책 수거하러 다니면 정말로 힘들고 짜증난다. 이것은 나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이고도 좋아하고 라키사도 좋아한다. 라키사는 여기 일 시작하자마자 책 수거하러 다니며 고생했지. 이 여유가 더욱 행복하게 느껴질 거다. 라키사가 상상하던 서점 일은 아마 이런 장면이었을 거다. 대부분이 이런 날이라는 것은 사실이구.


 '사람들이 책을 알아서 잘 반납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블랑쉬블르가 연체한 책은 어지간해서는 이고가 다녀온다. 그 일만큼은 나나 라키사에게 잘 맡기지 않는다. 라키사야 일한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럴 수 있지만, 나는 여기에서 일한지 몇 개월인데도 내가 블랑쉬블르가 연체한 책을 찾으러 다녀온 적은 거의 없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있었나? 어째서 블랑쉬블르가 연체한 책을 받아오는 것만큼은 반드시 이고가 하는지 모르겠다. 둘 사이에 무슨 사정이라도 있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블랑쉬블르가 이고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이고도 블랑쉬블르에게 마음이 있는 거 아니야? 그래서 루즈카와 사귀고 있지만 아직까지 블랑쉬블르에게 미련이 있어서 결혼은 계속 미루고 있고? 이거 나름 그럴싸하다. 이렇게 보면 이고가 정말 나쁜 놈이다. 그런데 블랑쉬블르가 서점에 찾아올 때를 보면 이고가 블랑쉬블르를 정말 싫어하는 것 같단 말이야. 하여간 희안한 놈이다.


 라키사를 쳐다보았다. 라키사는 책을 읽고 있었다. 진짜 열심히 책을 읽는다. 쟤는 책 읽는 것 그 자체를 좋아하는 것이 분명해. 라키사는 볼 때마다 신기하면서 대단하다. 어떻게 모든 일을 다 열심히 할 수 있지? 나도 서점 일 처음 시작했을 때는 열심히 일하기는 했다. 그러나 라키사 정도로 열심히 하지는 않았다. 손님이 왔다 가면 바로 손님이 건든 책장으로 가서 책 정리를 깔끔하게 하고, 일과 시간에 주기적으로 서점을 청소한다. 그러면서 틈이 날 때마다 책을 읽는다. 그렇다고 이고가 라키사에게 책 수거를 안 시키는 것도 아니다. 책 수거 일은 나와 똑같이 나누어준다. 그런데 별 말 없이 책 수거를 잘 다녀온다. 서점에 있는 시간 내내 모든 일에 최선을 다 한다. 마치 여기에 목숨을 건 사람처럼 말야. 저렇게 열심히 하니까 공부도 우리 전공에서 가장 잘 하는 것이겠지?


 라키사가 서점에서 일을 열심히 하기 때문에 나 역시 일을 예전보다 훨씬 더 열심히 해야 한다. 라키사가 책장 정리를 하면 나도 같이 해야 하고, 라키사가 청소를 하면 나도 같이 청소를 해야 하니까. 그런데 신기하게 그것들이 전혀 귀찮거나 짜증나지 않는다. 오히려 라키사와 같이 무언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즐겁다. 이렇게 열심히 하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느낀다. 라키사가 하는 대로 따라하면 나도 정말 공부 잘 하게 되는 거 아니야?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라키사처럼 저주술 책을 읽지는 않을 거야. 아무리 마딜어로 된 것이 읽고 싶다 해도 저주술 책은 정말 아닌 것 같다. 봐도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이고도 책을 읽어?'


 웬일로 이고가 책을 읽고 있다. 이고가 책을 읽는 모습은 거의 보지 못했다. 항상 졸거나 멍하니 있거나 일하거나 - 이 셋 중 하나였다. 그런 이고가 책을 읽고 있다! 이것도 라키사의 영향인가? 이고가 무식한 것은 절대 아닌 것 같지만 책을 읽을 인간이 아닌데? 이고가 읽고 있는 책을 바라보았다. 어떤 책인지 대충 알 것 같다. 전에 루즈카가 가져온 키란 전기인 것 같다. 그렇게 미루고 미루더니 드디어 읽는구나. 설마 저 책 안 읽고 미루고 있던 것을 루즈카에게 걸려서 읽기 시작한 것 아니야? 어쨌든 이고조차도 책을 읽고 있다.


 나도 책을 읽어야할 분위기. 어떤 책을 읽지? 서점에 내가 읽을 만한 책은 거의 없다.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지만 아드라스어, 대륙공통어로 된 책을 술술 읽는 것은 무리니까. 마딜어로 된 책 없을까? 저주술 책 말고 다른 책. 순간 책 하나가 떠올랐다. 전에 블랑쉬블르가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을 갖다주었지? 방에 그 책이 분명히 있을 거다. 방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있었다. 책을 들고 나왔다. 그러고 보니 나도 이 책 읽는다고 하고서는 잊고 있었다. 블랑쉬블르가 이 사실을 알면 꽤 실망하겠지? 기껏 중요한 책이라고 갖다주었는데 나도 이고도 방구석에 던져놓고 까맣게 있고 있었으니까.


 '책 더럽게 재미없네.'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은 마딜어로 되어서 나도 쉽게 읽을 수 있다. 문제는 마딜어로 되어 있다는 점이 아니었다. 내용 자체가 정말 지루하다. 인간이 오감을 이용해 사물을 인지하고 판단한다는 내용이었다. 이걸 누가 모르나? 당연히 시각, 촉각, 후각, 미각, 청각으로 사물을 인지하지, 무슨 영적인 능력으로 사물을 인지해? 말은 참 어렵고 아름답게 써놓았지만 그 이상의 것은 보이지 않았다. 역시 이놈의 마딜 공화국 수준은 한심해. 내가 아무리 마딜 공화국 국민이라지만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 이고는 보나마나 이것 보고는 이 나라 사람들은 왜 이렇게 미개하냐고 생각했겠지? 블랑쉬블르는 이런 책을 갖고 왜 그 유난을 떨었던 걸까?



 책을 덮고 밖으로 나갔다.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런 책은 대체 왜 만든 거야? 처음이라 유독 재미없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당연한 것은 간단히 쓰고 넘어가도 되잖아? 이고가 블랑쉬블르 말에 의하면 인식론을 다음 학기부터 배울 거라고 했다. 이런 내용을 왜 수업 시간에 배워아하는지 모르겠다.


 '감비르 이 자식은 지금 살아있을까?'


 순간 아침에 본 쥐 시체가 떠올랐다. 감비르 이놈도 치르치나 가서 그딴 짓이나 하며 이것이 저주술이라고 외치고 다니는 거 아니야? 칼로 쥐 죽여놓고 무슨 저주를 걸어보겠다고 난리치는 것 아닐까? 그러다 그 동네 사람들에게 걸리면 조금 많이 얻어맞을텐데. 그나저나 치르치나는 어떤 곳이길래 루즈카와 치롤라가 그렇게까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걸까? 치르치나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어서 그쪽이 어떤 곳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치롤라는 티타카스에서 올라왔잖아? 루즈카도 치르치나는 가본 적이 있지만 진정한 자유와는 거리가 멀다는 투로 이야기했다. 이고에게 물어보면 괜찮은 대답 좀 해줄까? 아니야. 이고가 치르치나 가봤을 리도 없고, 설령 가봤다 하더라도 보나마나 내게 직접 가보라는 말이나 할 거다. 그래도 이따 치르치나가 어떤 곳인지 한 번 물어볼까?



 담배를 다 태우고 다시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책을 펼쳤다.


 '어? 이거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앞부분은 별 것 없었다. 그러나 앞부분을 넘어가자 달라졌다. 뻔한 이야기가 끝나고 나오는 내용을 보자 이건 위험하다는 생각이 확 들었다.


 오감을 통해 획득한 정보는 정확한 정보가 아니다. 이 부정확한 정보를 인간의 머리는 종합적으로 합쳐서 결과를 도출한다. 이것이 바로 인식. 즉, 인식 그 자체는 부정확한, 더 나아가 틀린 정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저주술은 인간의 상상을 현실 세계에 실재하는 힘으로 만드는 방법인데, 이것 자체가 허상이라는 것이다. 애초에 틀린 정보로 만들어진 착각이며, 이 착각에 대한 피시술자의 착각이 자기 최면을 거는 것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것은 저주술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저주술을 통해 만들었다고 하는 불덩이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불덩이이며, 집단 환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운좋게 집단적으로 같은 환상을 보았고, 그것을 감각으로 느낀 것이란 것이다. 흔적이 있고 증거가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원래 그랬던 것이며 단지 자신의 생각으로 만들어낸 착각을 보다 진실을 본 경우, 또는 그 반대의 경우라고 한다.


 "이거 어떻게 출판되었대?"


 깜짝 놀라서 나도 모르게 작게 소리쳤다. 그 말이 내 입에서 나오는 순간 깜짝 놀라서 이고와 라키사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둘은 독서에 열중하고 있어서 내 말을 못 들은 것 같다. 이것은 정말로 위험하다. 저주술 그 자체를 부정해버린다. 우리 마딜인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저주술을 제외하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건 내가 생각해도 불가능하다. 내가 아무리 감비르의 저주술 수련을 부정적으로 본다 해도 저주술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아다비아는 저주술 자체를 부정적으로 본다. 하지만 아다비아도 저주술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저주술이 전혀 체계화되어있지 않은 점에 대해 불만인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저주술 그 자체를 부정해버린다. 그러면 지금까지 존재했던 저주술, 그리고 지금도 존재하는 저주술은 대체 뭐라는 것이지? 집단환각? 모두가 환상을 보고 그것을 감각으로 낀다고 착각을 한다는 것인가? 저주술은 분명히 상상을 현실화하는 것이다. 상상을 현실에 존재하는 힘으로 만드는 것이 저주술이다.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알고 있다. 아마 모든 마딜인들, 마딜 공화국을 넘어 전세계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을 거다. 그런데 그것 모두가 엉터리라고 정면으로 반박해버리고 있다.


 뒷부분을 계속 읽어보았다. 내용이 더욱 가관이 되어갔다. '저주술'이라고 하는 것은 운좋게 '마법'이라는 것의 일부를 깨닫게 된 경우, 그리고 환상으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가끔 진짜 현실에서 물리적 힘으로 등장한 저주술은 '저주술'이 아니라 저주술사가 운좋게 '마법'이라는 거대한 체계 속 아주 작은 일부분을 깨우친 경우다. 하지만 '마법'이라는 거대한 체계에 대한 이해가 전무하기 때문에 제대로 구현할 수 없으며, 이는 '저주술의 불안정'이라는 문제의 근본 원인이라고 나와 있었다. 즉, 정신 상태에 크게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결여된 지식'이기 때문에 불안정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


 "이거 뭔 말이야?"


 두 눈을 비비고 문장을 몇 번이고 읽어보았다.


 - 키란은 마법을 이용해 우르간 대제국군을 상대했다.


 정확히 '키란은 마법을 이용해 우르간 대제국군을 상대했다'라고 적혀 있었다. 키란이 위대한 마법사였고, 마딜인 중 유일하게 '마법'이라는 위대한 체계를 깨우친 자라 설며하고 있었다.


 키란의 업적에 대한 평가마저도 충격적이다. 라짐 마이슈프는 인식론에서 키란의 업적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고 있다. 키란의 업적이야 사실이기도 하고, 그것 자체를 부정한다는 것은 마딜 공화국 해방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키란의 업적 자체는 인정하고 있지만 해석이 아예 다르다. 라짐 마이슈프는 책에서 키란이 저주술로 투쟁한 것이 아니라 마법으로 투쟁한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이 책, 라키사가 보면 경악하겠는데?'


 책을 덮고 방으로 들어가 책을 놓고 나왔다. 아무리 라키사가 여기 직원이라고 하지만 방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방은 나와 이고가 사는 공간이니까. 업무와 전혀 관련없는 공간이자 나와 이고의 사생활 공간이라 라키사가 들어가는 일이 없다. 설마 진짜 개학 후 학교에서 이 책을 공부하나? 이 책을 강제로 배우게 한다면 반발이 장난 아니게 거셀 텐데? 저주술 전공은 말할 필요도 없고, 다른 학생들도 난리가 날 거다. 당장 지금 나와 같이 도서관에 있는 라키사만 해도 키란이 마법사였다고 하면 무슨 헛소리냐고 화낼 거다.


 "너 무슨 책 읽었어?"

 "재미없는 책."


 다행히 라키사는 내가 읽은 책에 대해 그리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내가 방에 책을 갖다놓고 나온 것을 보고 무슨 책을 읽었냐고 한 번 물어보고는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블랑쉬블르가 장난으로 말한 거 아닐까? 이건 여기에서 도저히 받아들여질 내용이 아닌데? 그냥 거짓말이잖아!'


 블랑쉬블르가 장난 한 두 번 친 것도 아니구. 이것을 학교에서 수업 시간때 배운다고? 말도 안 돼. 이런 책이 하나쯤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기겁할 일인데 학생들에게 강제로 공부하게 할 것이라니 믿을 수 없다. 이것은 절대로 학교에서 배울 일이 없을 거다. 이 책을 읽고 맨정신으로 버틸 마딜인이 과연 세상에 있을까? 말도 안 되는 주장들인데? 멀쩡히 존재하는 저주술이 '마법'이라는 거대한 체계의 일부분 아니면 환각 같은 것이라니...라짐 마이슈프는 분명히 미쳤다. 이고가 그래서 라짐 마이슈프가 저술한 것이라면 조금 위험할 거라고 말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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