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기적과 저주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1장 11화

좀좀이 2017. 8. 6.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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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다비아는 오늘 일이 있어서 서점에 못 온다고 했다. 이고는 책을 읽고 있다. 손님들도 오지 않는다. 너무나 조용한 오후. 아다비아가 내 공부를 도와주겠다고 서점에 오기 전까지는 이것이 일상이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들. 창문을 넘어 서점으로 들어오는 햇살. 이렇게 오늘 하루가 지나간다는 느낌이 드는 시간. 나도 책을 펼치고 읽기 시작한다. 오늘 본 다음 부분을 본다. 그래도 이제 조금은 알아볼 수 있다. 이렇게 조금씩 좋아지다보면 언젠가는 나도 아드라스어와 대륙공통어를 잘 할 수 있겠지? 언제까지고 아다비아가 내 공부를 봐줄 리 없잖아. 지금은 혼자 이 책을 보는 것이 무리지만 영원히 무리일 리는 없겠지.


 "그래도 전보다 읽는 속도가 조금 빨라졌다?"


 이고가 나를 쳐다보다니 웃으며 말했다.


 "하도 보니까 이제 조금 읽을 수 있어."

 "아다비아가 매우 잘 가르쳐주나봐?"

 "응. 걔가 알려주어서 확실히 늘은 거 같아. 걔가 도와주기 전에는 막막했는데..."

 "그런데 너 아드라스어 잘 하게 되면 아다비아 안 오는 거 아냐?"

 "응?"

 "그렇잖아. 지금이야 네가 돌이니까 돌 깨러온다지만 네가 잘 하게 되면 올 이유가 없잖아."


 이고 말이 맞다. 내가 아드라스어와 대륙공통어를 잘 해서 혼자 공부할 수 있게 된다면 아다비아는 내 공부를 도와주러 올 이유가 없겠지. 그런데 그게 뭐? 아다비아가 나를 좋아해서 오는 것도 아닌데. 친구 없고 심심하니까 그러는 거겠지.


 "안 오면 안 오는 거지, 뭐..."

 "너 아다비아 안 오면 안 아쉽겠어?"


 아다비아가 서점에 더 이상 안 온다면? 그러면 오늘과 깉은 일상이 졸업할 때까지 반복되겠지. 서점에서 일하고, 지금처럼 한가할 때 자리에 앉아서 내 공부 하거나 이고와 무의미한 잡담이나 나누거나. 아마 이 오후가 무료하게 느껴지기는 할 거다.


 "조금 아쉽기야 하겠지만 곧 또 적응되지 않을까? 오늘도 아다비아 안 왔잖아."


 이고의 눈에 이거 재미있는 건수 하나 잡았다는 빛이 돈다.


 "그러지 말고 계속 못하는 거야! 그러면 아다비아가 계속 올 거 아냐? 너는 나랑 이렇게 있는 게 재미있냐?"

 "무슨 말이야! 당연히 빨리 나 혼자 책을 보도록 해야지."

 "오, 아다비아 보기 싫은가봐?"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왜? 맞잖아. 책을 혼자 볼 수 있어야 아다비아한테서 해방될 거 아냐?"

 "아, 그런 거 아냐!"

 "너는 나랑 이렇게 노는 게 참 좋은가 보네? 나라면 아다비아랑 놀겠다."


 이고가 낄낄댄다. 진짜 한 대 콱 쥐어박고 싶다. 하지만 이고가 나보다 나이가 훨씬 위이지. 이고 말은 무시하고 책이나 봐야겠다. 아다비아가 내 공부 봐준다고 서점 오니까 아다비아가 나를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하나? 내 걱정 할 시간에 루즈카랑 빨리 결혼할 생각이나 할 것이지.



 다시 말없이 책을 보려는데 서점 문이 열렸다.


 "감비르!"

 "안녕!"


 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정말 꾀죄죄하다. 얼굴은 햇볕에 그을려서 거무튀튀하다고 해도 될 정도다. 화덕에 빵 대신 자기가 들어가서 구워져 나왔나 싶을 정도다. 수염도 지저분하게 많이 자랐다. 면도를 대체 얼마나 안 한 거야? 저 정도면 일주일 면도 안 해서 자란 수염이 아닌데. 눈은 또 왜 저래? 상당히 기괴한 눈빛이다. 흐리멍텅하고 반쯤 풀려 보이는데 정신을 놓고 있는 것은 또 아니다. 사람을 홀려 정신을 놓게 만드는 것에 강렬하게 집중하는 눈이랄까? 즉 미친놈의 눈이다. 다행히도 옷은 매우 깨끗하다. 이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저 얼굴과 너무 안 어울린다. 옷도 지저분하다면 '이놈 폐인처럼 지내다 여기로 기어왔구만' 이라고 생각할 텐데 옷이 깨끗하니 대체 뭔 짓을 하다 온 건지 모르겠다. 감비르가 머리를 감고 깨끗한 옷을 입은 것이 더욱 기분나쁘게 만든다. 머리 감을 거면 면도도 같이 하든가. 감비르가 웃으며 인사하는 것이 내가 반가워서 그러는 건지 미쳐서 그러는 건지 모르겠다.


 "타슈갈, 쟤 너 친구냐?"

 "응..."

 "데리고 나가."

 "응..."


 감비르가 서점 들어오자마자 왜 데리고 나가라고 하냐고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나라도 내 친구만 아니었으면 바로 내쫓았을 거다. 돈이 있으니 책을 빌리러 왔다고 해도 끌어냈을 거다. 정상인 같지가 않은데 어떻게 책을 빌려줘? 서점을 휘젓고 다니다 책에 무슨 짓을 할 지도 모르고. 들어온 사람이 감비르라서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망설였을 뿐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감비르에게 다가갔다.


 "우리 앞에 있는 찻집 가자."

 "그래."


 다행이다. 감비르가 자기를 서점에서 쫓아내려 한다고 난리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순순히 동의했다. 감비르가 마음 바뀌기 전에 빨리 끌고 나가야지. 억지로 감비르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웃으며 감비르를 서점 밖으로 끌어냈다. 감비르 마음이 바뀌기 전에 빨리 찻집으로 데려갔다. 발광을 하더라도 서점에서 하지 말고 찻집에서 하라구. 찻집 주인에게는 미안하지만 서점에서 이 녀석이 발광하면 나 서점에서 쫓겨날 지도 몰라.



 "너 잘 지냈어?"


 지극히 형식적인 인사. 솔직히 이런 아주 부자연스러운 모습을 보며 잘 지내냐고 물어보는 것 자체가 웃긴 일이다. 잘 지냈다면 이런 꼴로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겠지.


 "잘 지냈어."

 "너 진짜 잘 지낸 거 맞아? 아닌 거 같은데..."

 "아니야, 잘 지냈어."


 감비르는 자기가 잘 지냈다고 대답했다. 전혀 믿음이 안 가는 대답이지만 자기가 잘 지냈다고 하니 그러려니 해야지. 하지만 이건 그러려니 할 정도가 아니다. 수염만 길렀으면 감비르가 수염을 기르기로 마음먹었다고 생각해보겠지만 저 눈은 어쩔 거야?


 "정말 별 일 없어?"

 "별 일 없어. 너무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어."

 "그러냐?"


 담배를 입에 물었다. 자기가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다고 하는데 계속 무슨 문제 있냐고 물어보기도 참 그렇다. 아무리 봐도 지금 감비르는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너 학교 계속 나가?"

 "응."

 "어때?"

 "강의실에서 유령 되었어. 아무도 아는 척 안 해."


 내 말에 감비르가 아무 반응을 하지 않았다. 내가 아니라 자기가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흘려듣는 것 같은 반응이다. 아무 반응 없음. 나와 상관없는 다른 세계 이야기. 딱 그런 반응이다.


 "너 어쩌려고 학교 안 나와?"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이런 천하태평을 보았나. 뭐가 어떻게든 된다는 거야? 지금 교수는 우리 진짜로 쫓아내려고 작정했는데. 감비르는 생각을 아예 안 하기로 작정한 건가?


 "야, 우리 저주술 연습하자."

 "저주술?"

 "응. 저주술."

 "뭔 저주술이야? 너 진짜로 저주술로 전공 바꾸게?"

 "지금 고민중이야."


 얘는 갑자기 찾아와서 무슨 헛소리야? 해괴한 꼴로 찾아온 것에서 감비르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은 바로 알아차렸지만 뜬금없이 저주술 수련을 같이 하자니 황당하다. 얘는 저주술이 아무나 쓸 수 있는 건 줄 아나? 그런 게 되었다면 이 세상 사람들 다 저주술 쓰고 있겠지. 감비르가 우리 서점에 있는 저주술 책을 안 봐서 이런 소리를 하나? 그 책 보면 절대 저주술 연습하겠다는 소리가 안 나올텐데.


 "너 저주술이 뭔지는 알아?"

 "그건...자유야."

 "뭐?"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감비르는 너무나 당당하게 모든 비밀을 깨달아버렸다는 투로 확신이 가득찬 목소리로 저주술이 자유라고 말했다. 상상력을 현실세계에서 실존하는 힘으로 만들어내니 자유라고 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생각만 한다고 다 되나?


 "저주술 공부 너무 재미있어! 생각해봐. 네 상상이 현실이 된다는 거. 얼마나 멋져!"

 "그게 틀린 말은 아닌데...네가 할 수 있어?"

 "지금 열심히 수련중이야.'

 "뭘로 수련하는데?"


 설마 그 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볼 수 없는 책? 듣자마자 멱살잡고 너 이거 무슨 말인지 알고 지껄이냐고 따지고 싶어지는 무의미한 단어의 배열?


 "동전을 실에 매달아놓고 뱅뱅 돈다고 계속 상상해."

 "뭐? 그게 저주술이랑 무슨 상관인데?"

 "그렇게 계속 상상하다보면 동전이 진짜로 뱅뱅 돌기 시작해."

 "네가 뱅뱅 돌리는 게 아니라?"

 "아니야. 내가 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매달아놓는다구. 굉장하지? 정신력으로 매달려 있는 동전을 돌게 만든다니까!"

 "네가 착각하는 거 아냐? 너 혼자 동전이 돈다고 보는 거 아냐?"

 "아니야! 진짜로 돌아!"


 감비르 말을 대체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나도 정말 이 망할 전공 때려치고 싶기는 한데 저주술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다. 저주술 수련을 할 생각 자체도 없지만, 그보다 저주술을 아무나 훈련 조금 한다고 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그렇게 흔해빠진 것이 저주술이라면 누구나 다 저주술 쓸 거 아니야? 그러면 누가 힘들게 몸 쓰면서 일해? 전부 상상만 하면서 저주술로 일하지.


 "저주술사들이 있으니 가능하기야 하겠다만...그거랑 우리가 아드라스어를 잘하게 되는 거랑 뭐가 더 가능성 있을 거 같냐?"

 "그건 모르지. 어차피 올해는 글러먹었으니 학교 안 나갈 거야. 혼자 외국어 공부하고 저주술만 연습할 거야."

 "야, 그래도 수업을 지금 한 번 들어놓는 것이 내년에 낫지 않겠냐?"

 "아니. 그 시간에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는 게 더 나아. 진정한 자유를 느끼는 것이 얼마나 짜릿한데!"


 진정한 자유는 또 뭐야? 조금 짜증나기도 하고 진심으로 걱정되기도 한다.


 "너 그러면 내년에는 어쩌려구? 내년에 또 교수한테 끌려가서 혼나게?"

 "나중에 네가 필기한 거 빌리면 되지 않을까?"

 "누가 빌려준대?"

 "친구인데 안 빌려줄 거야? 어차피 우리 수업 같이 들어야 돼. 우리 내년에 또 그 망할 교수한테 수업 들어야한다니까?"

 "아주 악담을 퍼부어라. 나는 절대 내년에 이 수업 또 안 들을 거야! 그 교수한테 내년에도 배우기야 하겠지만..."

 "그것이 너의 저주술이야."

 "뭐가 이게 저주술이야? 내가 공부 열심히 해서 어떻게든 안 쫓겨날 거라는데."

 "너의 의지. 너의 정신. 그것이 현실이 된다. 바로 저주술이지. 너는 그런 생각을 지금 한없이 자유롭게 하는 거구."


 진짜 갑갑하다. 이게 대화가 통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나와 감비르 사이에 투명한 벽이 있고 서로 거기에 공을 던지는 것 같다. 공이 자기에게 날아오는 것은 보이는데 벽을 맞고 돌아가.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반드시 이번에 안 쫓겨나겠다는 것과 저주술이 대체 무슨 상관인데? 그게 저주술이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저주술 쓰고 있다는 건가? 감비르 진짜 맛이 갔구나.


 더 이야기하기 짜증난다. 지금 사람 약올리려고 왔나. 아까는 이고가 나한테 아다비아랑 계속 만나려면 일부러 공부 못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약올리더니 이번에는 감비르가 와서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다. 아다비아가 무슨 수호천사쯤 되나? 아다비아가 안 오니 별 이상한 말을 계속 듣는다.


 "나 이제 일하러 돌아가야 해."

 "앞으로 서점 자주 놀러올께."

 "이왕이면 학교도 와. 나 혼자 없는 사람 취급당하면서 수업 들으려니 죽겠다."

 "학교는 안 가. 서점은 종종 찾아갈께."

 "그래."


 아무리 봐도 감비르가 미친 것 같다. 그래서 감비르가 마신 차 값까지 내가 내주었다. 감비르에게는 오랜만에 찾아왔으니 이번에는 내가 사겠다고 둘러대었다. 감비르는 고맙다면서 다음에는 자기가 차를 산다고 말했다. 아니, 안 사줘도 돼. 오늘처럼 사람 정신나가게 할 소리 할 거면 차라리 오지 마. 나 지금 공부하기도 바쁘단 말이야. 아다비아가 계속 도와주어서 이제 겨우 조금씩 공부를 해나가기 시작하는데 와서 방해하지 마.



 감비르와 헤어지고 난 후 바로 서점으로 돌아왔다.


 "걔 아무리 봐도 맛 간 거 같은데?"

 "글쎄...충격이 꽤 컸나?"


 나도 충격이 엄청나게 컸지. 솔직히 아다비아가 공부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나도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다. 이 땅을 탈출하는 것이 목표이니 저놈처럼 저주술 수련 같은 말도 안 되는 짓에 목을 매지야 않겠다만 학교는 아마 안 나갔겠지. 아다비아가 계속 서점에 와서 공부를 도와주어도 아침마다 교실에서 모두에게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할 생각을 하면 서점 안으로 도로 들어가 벌러덩 드러누워버리고 싶은데.


 "이고, 나 궁금한 것이 하나 있는데..."

 "뭐?"


 이고가 고개를 세우고 나를 쳐다보았다.


 "저주술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거야?"

 "너 그거 지금 나한테 물어보는 거야?"

 "왜? 이상한 질문이야?"

 "나 남아드라스 공화국에서 넘어왔잖아. 저주술을 내가 어떻게 알아?"

 "아...그렇지."


 이고가 남아드라스 공화국에서 넘어왔다는 사실을 순간 깜빡했다. 남아드라스 공화국에서 저주술 사용하면 사형이지? 이고가 그 나라에서 저주술을 접해봤을 리가 없겠지.


 "그런데 뭐 가능하지 않을까? 상상이야 누구나 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나는 잘 모르겠다. 맨날 블랑쉬블르가 제발 책 좀 잘 반납하라고 아무리 빌어도 걔는 꼭 연체를 하더라. 그것도 여러 권."


 이고의 말에 깔깔 웃었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 이고가 블랑쉬블르가 자꾸 연체해서 항상 고생하지. 게다가 블랑쉬블르한테 책을 받아오려고 가면 꼭 오래 걸려. 이고는 항상 블랑쉬블르가 제발 책 연체 좀 안 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라는데 그 소원이 이루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오늘도 이따 연체된 책 수거하러 가야 해?"

 "아니. 다행히 오늘은 없어. 대신 내일 많아."


 이고가 덤덤하게 말했다. 내일은 나도 책 수거하러 돌아다녀야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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