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기적과 저주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1장 09화

좀좀이 2017. 8. 4.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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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업 계속 들어가야 하나?"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한 모금 깊게 빨았다. 오늘도 역시 교수는 나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학생들 그 누구도 이제 여기에 신경쓰지 않는다. 교실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모두에게 없는 사람 취급을 받는다. 학교에 오기만 하면 보이지 않는 투명한 벽이 하늘에서 내 위로 쾅 떨어진다. 그 투명한 벽이 모든 것을 가로막는다. 나는 밖을 볼 수 있는데 밖에서는 나를 못 본다. 못 보는 건지, 안 보는 건지...정확히는 안 보이는 척이겠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존재. 나 분명 여기 있는데! 내가 나의 존재를 알리는 신호는 투명한 벽 안에서만 맴돌 뿐. 내가 대륙공통어와 아드라스어를 못 하는 것이 투명인간 취급 당해야할 정도로 큰 잘못인가?


 진심으로 수업 들어가기 싫다. 한두 번도 아니고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제 강의실에서 나의 존재는 아예 사라져버렸다. 나 스스로 내가 강의실에 없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니까. 이렇게 수업을 계속 들어가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교수가 나를 대하는 꼴을 보면 낙제는 확정이다. 낙제 정도가 아니지. 진지하게 다른 전공으로 옮기든가 학교를 그만두든가 고민해야 한다. 어떻게든 이 전공에 남아보려고 아둥바둥하고 있지만 교수는 계속 행동으로 대답하고 있다. 그건 무의미한 노력이야. 이제 그만둬. 나는 너를 절대 받아주지 않겠다.


 "학교 그만두면 뭐하냐?"


 담배 연기를 한 모금 또 깊게 들이마시며 마음을 다잡았다. 아직 포기해서는 안 돼. 여기서 그만둔다고 될 문제가 아니잖아. 다른 전공으로 바꾸든, 다시 새로 다른 대학교에 입학하든 이 문제는 또 똑같이 따라다닐 거다. 역사 전공으로 바꾼다면 조금 나아질까? 거기는 그래도 아드라스어와 대륙공통어 덜 쓰겠지? 아닌가? 거기도 외국 역사를 배울테니 마찬가지일건가? 그러면 저주술?


 "그건 진짜 아니다."


 저주술 전공. 떠올리자마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거 전공해서 어디다 써먹어? 그 이전에 나는 저주술 사용할 줄도 모르잖아. 저주술을 쓸 줄 알아야 저주술 전공을 고려해보지, 저주술을 쓸 줄도 모르는데 저주술 전공 들어가서 뭐 해? 거기 들어가면 아마 지금보다 몇만 배 끔찍할 거다. 아드라스어와 대륙공통어야 내가 공부하면 언젠가 희망이라도 보이지, 저주술은 노력한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 게다가 저주술은 마딜 공화국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 다른 나라에서는 저주술이 금지되어 있다고 한다. 저주술 전공을 선택하는 순간 평생 이 땅에 갇혀 살아야한다는 거다. 지금 전공은 이 나라를 떠나려고 선택한 거다. 설령 다른 전공으로 바꾼다 하더라도 그건 이 나라를 떠나기 위해서 선택하는 거구. 그런데 영원히 이 나라에 갇혀 있게 만드는 저주술 전공? 그건 절대 아니야. 그것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선택 안 한다.


 "감비르 이 녀석은 진짜로 학교 그만둘 건가?"


 올해는 포기한다 하더라도 이 전공 계속 들을 생각이라면 올해 조금이라도 들어놓는 것이 나을 건데. 강의실에서 매일 지독한 고독을 겪으면서도 내가 꾸역꾸역 나가는 이유는 이렇게라도 해야 내년에 희망이라도 있기 때문이다. 내년에 이 수업 또 들어야 할텐데 올해 한 번 들어놓아서 내용이라도 조금 알고 있으면 내년에는 올해보다 나을 테니까. 그런데 감비르는 그날 이후 단 하루도 학교에 나오지 않고 있다. 학교에 와서 다른 길로 새는 건지 학교 자체를 안 오는 건지 모르겠다. 강의실에서 들리는 말을 들어보면 학교 자체를 안 오는 것 같다. 정말로 포기했나? 아니면 깔끔하게 내년에 다시 듣기로 하고 올해는 하고 싶은 거나 실컷 해보자는 심산인가? 감비르라도 강의실에 있으면 둘이서 사이좋게 투명인간 취급받을테니 유령 두 마리서 찌그닥거리며 덜 외로울텐데. 감비르가 참 그립다. 얘가 어디 있는지나 알아야 수업 들어오라고 설득이라도 해보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슬슬 돌아가야 한다. 여기 있어봐야 할 것도 없고. 차라리 서점 가서 조금 쉬다가 일을 시작하는 것이 낫다.


 "타슈갈, 어디 가?"


 자리에서 일어나 교문을 빠져나가려는데 라키사가 나를 불렀다.


 "서점 가야지. 오늘 일하는 날이야."

 "같이 갈래? 나도 지금 서점 가려고 하는데."

 "서점? 책 반납 때문에? 나한테 줘. 내가 반납처리 해줄께."

 "아니, 괜찮아. 서점 가서 또 읽을 책 있나 보려구."

 "아, 그래? 그러면 같이 가자."


 햇볕이 참 좋다. 이렇게 좋은 하늘 아래에서 놀지는 못할 망정 강의실에서 투명인간이나 되다니! 날이 너무 좋으니 두 배로 억울하다. 라키사는 아무 말 없이 앞만 보며 옆에서 걷고 있다. 라키사는 내 심정을 전혀 이해 못하겠지? 절대 이해 못 할 거다. 어쩌면 나를 매우 한심하게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교수 말대로 왜 그렇게 여태까지 아드라스어와 대륙공통어 실력이 안 느나 답답해할 수도 있을테구.


 라키사와 같이 걸어가는데 아무 말도 없다. 나도 말하지 않고 라키사도 말하지 않는다. 지금 나와 라키사가 같이 걸어가는 건지 따로 걸어가는 건지조차 모르겠다. 라키사에게 딱히 말을 걸 만한 것이 없다. 라키사와 무언가 이야기를 하면서 서점까지 걸어가고 싶은데 말할 거리가 머리 속에 떠오르지 않는다.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이라고는 라키사가 아드라스어와 대륙공통어를 잘 해서 부럽다는 것 뿐이다. 대화를 할 만한 것이 없나 주변을 살펴보았다. 딱히 소재거리가 보이지 않는다. 아, 얘 지금 책 반납하러 간다고 했지!


 "너 그 책 다 읽었어?"

 "응."

 "어때? 재미있어?"

 "응. 흥미롭게 읽었어."

 "진짜?"

 "응."


 라키사가 빌려간 책은 저주술 관련 책이다. 그 책은 뭔가 다른 것이 적혀 있는 건가? 우리 서점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된 책인가?


 "네가 빌려간 책 볼 수 있어?"

 "응. 잠깐만."


 라키사가 걸음을 멈추고 가방을 열어서 책을 건네주었다. 책을 받아서 책장을 넘겨보았다. 일말의 기대를 한 내가 바보였던 것일까? 라키사를 너무 믿었던 것일까? 라키사가 빌렸던 책이라고 다를 것 없었다. 개연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문장들. 문장들간의 관계만 그러면 말을 안 해. 이건 단어들이 대체 무슨 관계인지 알 수가 없다. 촉촉하게 땅을 적시는 빨간 웃음소리?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감이 온다는 거야? 더 화가 나는 것은 책장 한 페이지에 이런 문장이 대여섯 개 있고 나머지는 전부 여백이라는 점이다. 이건 종이낭비다. 이 정도 여백이 많이 남았다면 이 여백에 이 문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설명이라도 적어주는 것이 독자에 대한 예의 아니야?


 "너 정말 이 책 흥미롭게 읽었어?"

 "응. 꽤 흥미롭던데?"

 "어디가?"

 "그냥 다 흥미로웠어."


 라키사가 거짓말하는 걸까? 자기도 읽고 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모른다고 하면 부끄러우니까 괜히 흥미로웠다고 하는 거 아닐까? '촉촉하게 땅을 적시는 빨간 웃음소리' 같은 것이 이해가 될 리가 없잖아? 이 소리가 이해된다면 이해되는 놈이 미친 거다. 이것이 도대체 저주술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건 장담컨데 글쓴이가 뭔지도 모르는 소리 적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어떤 점이 흥미로웠어? 이런 책 본 적은 있는데 정말 이해가 안 되어서 그래."

 "글쎄...말로 설명하기 어려워. 하지만 매우 흥미로운 건 사실이야."


 이 책은 답이 없기 때문에 읽은 소감도 답이 없다는 뜻인가. 더 물어봐야 서로 짜증만 날 거 같다.


 "그런데 너 평소에는 뭐 해?"

 "도서관 가서 공부해."

 "매일?"

 "응. 매일 가."


 라키사가 공부 열심히 하는 건 잘 알고 있다. 하도 열심히 해서 오히려 노력하는 것만 보일 정도니까. 그래도 매일 도서관에 들이박혀서 공부만 하면 머리 아프고 갑갑하지 않나? 매일 그렇게 노력하다니 나랑 확실히 다르기는 하구나. 나야 서점에서 일하니 도서관에 가서 공부할 시간도 없지만 설령 서점에서 일하지 않고 시간이 남아돌아도 매일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공부하지는 못할 거다.


 "매일 가면 갑갑하지 않아?"

 "조금."

 "너 정말 대단하다. 나 같으면 그렇게 매일 가지는 못할 거야."


 라키사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입을 다물고 여섯 걸음 걸어가더니 이야기했다.


 "나는 여기에서 돈을 벌 것이 없어. 그래서 꼭 장학금 타야만 해."

 "응?"

 "장학금 받아야만 해서 참고 하는 거야.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니?"


 라키사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네 걸음 걸어가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에서 돈을 벌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장학금 타는 것 뿐이라구. 너처럼 일하면서 돈 벌고 싶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번역 같은 거 하면 되잖아."

 "누가 대학교 1학년 학생에게 번역을 맡기겠니?"

 "가정교사는? 다른 애들은 가정교사로 돈 버는 것 같던데."

 "가정교사 자리는 내가 에드자 왔을 때 이미 다 끝났어. 그리고 가정교사 자리는 아는 사람에게 소개받는 경우가 많아서 나처럼 다른 지역에서 올라온 학생은 구하기 어려워."

 "뭐 식당 같은 것도 있잖아. 조금 힘들기야 하겠지만..."

 "그건 책 볼 수 있는 시간이 없잖아."

 "그래도 돈 벌고 싶으면 그거라도 하면 되잖아."

 "졸업하면 끝이니?"


 라키사 표정이 매우 안 좋다. 표정에 뚜렷하게 적혀 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쓸 데 없는 질문 계속 들어서 짜증나. 그 이야기는 이제 좀 그만해.' 얘가 왜 이런 표정을 짓는지 모르겠다. 돈을 벌고 싶으면 일을 찾아서 하면 되는 거고, 공부를 하고 싶으면 공부를 하면 되는 거지. 이것은 이래서 안 되고 저것은 저래서 안 된다고 하면 남는 것이 뭐가 있어? 라키사랑 이 이야기로 별로 싸우고 싶지 않다. 그냥 말을 안 해야지.


 "나도 일 안 알아본 거 아니야. 괜찮은 일은 오래 일할 사람 뽑는다고 남자만 뽑는다구."

 "그래?"

 "응!"


 진짜 그런가? 이건 나도 잘 모르겠다. 나야 에드자 도착해서 4일 만에 바로 일을 잡았으니까. 지금 서점 일에 만족하고 있어서 그 이후 일할 거리를 알아보지 않았다. 이고가 나를 쫓아내지 않는다면 그만둘 생각도 없다. 책 수거하러 돌아다니는 것이 조금 힘들기는 하지만 그것이 매일 많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 더 이야기해봐야 소용없을 것 같다. 이야기를 계속 해봐야 서로 감정만 상할 거다. 내가 일자리를 구하려고 많이 돌아다녀본 것도 아니구.


 라키사도 입을 꾹 다물었다. 라키사의 얼굴을 살짝 바라보았다. 다행히 막 화가 난 것 같지는 않다. 바로 전보다는 아주 미세하게 표정이 풀렸다. 내 반응에 만족스러워서 풀린 것이 아니라 자기 할 말 다 해서 시원하니까 아주 미세하게 풀린 느낌이다. 쓸 데 없는 문제 만들고 싶지 않다. 서로 말해봐야 말이 통할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지금 당장 내일 수업 들어갈 생각만 해도 끔찍한데 라키사하고 언쟁까지 벌이고 싶은 전혀 없다.



 서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블랑쉬블르가 와 있다. 이고와 블랑쉬블르는 뭔가 이야기를 나누다 서점 문이 열리자 고개를 돌려서 나와 라키사를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블랑쉬블르에게 허리를 굽혀 꾸벅 인사하자 블랑쉬블르도 허리를 가볍게 굽히며 인사를 했다. 이고와 블랑쉬블르가 같이 있는데 블랑쉬블르만 내게 허리를 가볍게 굽히며 인사하니 정말 어색하다. 이고랑 블랑쉬블르랑 같이 학교 다녔다고 했으니 나이차가 별로 안 날텐데.


 "블랑쉬블르, 말 놓고 편하게 대하세요."

 "왜요?"


 블랑쉬블르가 내 말에 조금 놀란 듯 왜 그러냐고 물어보았다.


 "저보다 나이 훨씬 많잖아요."

 "예? 뭐라구요? 제가 그렇게 늙어보여요?"


 블랑쉬블르는 눈을 가볍게 찡그리더니 이고를 노려보았다.


 "이고, 이거 다 너 때문이잖아! 네가 얼마나 내 말을 잘 안 들어주었으면 쟤가 나보고 늙었다고 말할 정도로 얼굴이 상했겠어!"

 "뭔 말이야? 지금도 네 말 잘 들어주고 있었잖아?"

 "뭘 잘 들어줘!"


 블랑쉬블르가 이고에게 짜증을 확 내었다. 이고는 얘가 갑자기 왜 엉뚱한 나한테 시비냐는 표정을 지었다. 라키사를 바라보았다. 라키사의 눈이 '너 참 멍청하구나'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라키사의 그 얼굴에 뭔가 납득이 된다는 느낌이 가득했다. 대체 뭐가 납득이 된다는 건데? 하여간 내가 블랑쉬블르에게 제대로 말실수를 한 것 같다. 사과를 하기는 해야겠다.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블랑쉬블르, 죄송해요. 제가 말을 잘못 했어요."

 "아니에요. 맞는 말인데요. 제가 그렇게 늙어보여요?"

 "아니에요. 매우 어려보여요. 그게 아니라 전에 이고랑 같이 학교 다녔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이고랑 나이 비슷할 줄 알았어요."


 갑자기 블랑쉬블르가 깔깔 웃었다.


 "장난이에요, 장난! 장난을 왜 이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여요? 저 이고랑 동갑이에요. 앞으로 말 편하게 할께."

 "예."

 "옆에는 여자친구?"

 "아니에요. 같은 전공 듣는 학생이에요."


 라키사가 단호하게 아니라고 대답했다.


 "아, 그래요?"

 "예."

 "미안해요. 쟤랑 같이 있어서 사귀는 줄 알았어요."

 "절대 아니에요."


 블랑쉬블르는 라키사의 말에 또 깔깔 웃었다.


 "진짜 싫어하나보다."

 "그건 아니지만...답답해요."

 "그거 진짜 공감해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짜고짜 나이 많다고 하는 건 뭐야."


 전혀 이해가 안 되는 대화. 그런데 둘은 깔깔 호호 신났다.


 "저는 '블랑쉬블르'라고 해요. 그쪽은 이름이 뭐에요?"

 "저는 '라키사'라고 해요. 말 편하게 놓으세요, 언니. 얘하고 동갑인 걸요."

 "응, 알았어.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예. 언니."


 둘이 뭔가 맞나? 아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고를 바라보니 이 상황에 대해 아예 생각이 없어보인다. 자리로 가서 라키사가 빌려갔던 책을 반납처리했다.


 "라키사, 아까 그 책 반납처리했어!"

 "응. 알았어."


 자리에 앉아서 책을 펼쳤다. 책을 펼친 지 얼마 되지 않아 블랑쉬블르는 서점에서 나갔고 라키사는 또 저주술 책을 빌려갔다. 서점이 다시 조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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