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기적과 저주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1장 08화

좀좀이 2017. 7. 30. 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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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인쇄소 다녀온다."

 "책 주문하게?"

 "어. 가서 이야기해봐야지. 지금 들고 올 수 있는 것은 바로 들고오구."


 이고는 수레와 지게 앞에서 곰곰히 생각에 빠졌다.


 "왜?"

 "수레를 끌고갈까, 지게를 짊어지고 갈까 고민중이다."

 "설마 오늘 책 많이 받아올까? 급한 거 있어?"

 "아니."

 "그러면 지게 짊어지고 가. 바로 나갈만한 책만 몇 권 가져오고 나머지는 나중에 한 번에 서점으로 보내달라고 하면 되잖아."

 "그럴까..."


 별 것도 아닌 것 가지고 고민하네. 나 같으면 무조건 지게 짊어지고 간다. 아직 서점에 책이 부족하지 않다. 사람들이 와서 찾는 책이 없는 경우도 별로 없고. 어떤 책이 새로 들어올 지는 잘 모르겠지만 급한 책은 거의 없을 거다. 최소한 내가 근무하고 있는 시간에 서점에 아예 없는 책을 찾는 사람은 없었다. 오늘 운좋게 인쇄소에 책이 있어서 들고 온다 해도 당장 내일 그 책이 대출될 일도 없을 거 같구. 설령 내일 대출된다고 해도 우리가 돈을 특별히 더 많이 받는 것은 아니잖아? 서점 주인이 돈을 더 받는 거지.


 "어차피 오늘 책 받아와서 내일 바로 대출된다고 해도 우리가 돈 더 받는 것도 아니잖아."

 "야, 그렇게 일하는 거 아니야!"


 이고가 내 말을 듣더니 바로 정색하며 말했다. 내 눈에는 이고가 필요 이상으로 일을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이 서점이 자기 것도 아니고 그렇게 열심히 한다고 해서 돈을 매우 많이 받는 것도 아닌데. 이고가 서점 일을 정말 열심히 하는 것만큼은 인정한다. 나한테도 그렇게 열심히 일하라고 강요하지는 않아서 별 일 없기는 하지만 말이다. 설마 이 서점과 이 일 자체를 사랑하는 건가? 여자친구도 있으면서 왜 이런 데에 저렇게 열심이지? 저렇게 일에만 매달려 있으면 루즈카가 안 싫어하나?


 "지게 짊어지고 가야겠다. 책 있는 거 얼마 없겠지."

 "그래, 지게 짊어지고 가서 적당히 중요한 것만 먼저 가져와."

 "야, 있으면 있는대로 다 들고 와야 한다구! 인쇄소에 책이 맨날 있냐? 그거 한 번 다 나가면 또 주문량 어느 정도 될 때까지 책 안 찍어내서 계속 가서 책 찍어달라고 졸라야한단 말이야. 그거 얼마나 서로 피곤하게 만드는 건지 알아?"



 이고가 지게를 짊어메고 서점을 나섰다. 자리에 앉았다. 이고 말을 곰곰히 생각해본다. 이고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인쇄소에 매일 책이 있다는 보장은 없다. 개인들이 사가는 경우도 있고, 다른 서점에서 사가는 경우도 있다. 서점에서 책을 딱 한 권만 찍을 리는 없겠지. 그거 조판하고 인쇄하는 것은 손 많이 가는 작업이니까. 책 내용 보면서 글자 하나씩 판에 끼워넣고 삽화판 끼워넣고 하는 것을 몇백 페이지 해야 한다. 그것을 딱 책 한 권 찍자고 할 리가 없다. 정말 인쇄 물량 없고 돈이 궁하지나 않으면 차일피일 미루면서 인쇄 주문양이 어느 정도 쌓이면 그제서야 인쇄한다고 할 거다. 이건 이고 말이 맞네. 진작에 이렇게 이유를 설명해주면 얼마나 좋아? 그랬다면 서점 문을 닫고서라도 인쇄소 따라갔을 거다.


 "내가 여기 일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떻게 다 알아?"


 그래도 아까 이고가 짜증을 버럭낸 것에 기분이 조금 나쁘기는 하다. 이고 입장에서야 내 말이 정말 바보같은 말처럼 들렸겠지. 그렇지만 나는 정말로 몰랐다구. 인쇄소 사정 같은 거야 짐작할 수 있지만, 이고가 책 인쇄해달라고 조르러 인쇄소 가곤 한다는 것은 잘 몰랐다. 인쇄소 간다고만 말할 뿐이었지. 왜 인쇄소 가냐고 물어보면 인쇄소 가서 책 받아오러 간다고만 대답했다. 솔직히 아까도 자기가 내 말에 짜증나서 한 마디 쏘아주려고 자기 딴에는 자세히 이야기해준 거다. 평소 같았으면 또 '그래도 책 받아올 수 있으면 받아와야지' 라고만 하고 나갔을 거다.


 게다가 일을 지나칠 정도로 열심히 하는 것은 사실이구. 항상 서점에만 붙어있잖아? 전에야 여기서 마땅히 할 것도 없어서 서점에만 있는 것 아닌가 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여자친구라는 루즈카가 치롤라를 데리고 올라왔다. 그러면 이제 루즈카랑 만나서 놀 수도 있잖아? 그렇지만 루즈카가 에드자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서점 안에서만 지낸다. 밖에 나가는 거라고는 인쇄소 가고, 책 수거하러 나갔다 오고, 밥 먹으러 갔다 오고, 그 외에는 담배 태우러 나가는 것 밖에 없다.


 '그나저나 치롤라는 학교에서 본 적이 없네?'


 나랑 같은 학교를 다니는데 학교에서 치롤라를 본 적이 없다. 키가 작고 참 귀엽게 생긴 애였는데. 조금 성질 있게 생기기는 했지만 말이야. 학교 안을 열심히 돌아다니지 못해서 못 본 건가? 저주술 전공은 수업을 어디서 듣더라? 아다비아는 치롤라랑 어울려서 놀 건가? 첫 날에 같이 도시 돌아다니자고 했는데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된 지 모르겠다. 아다비아한테 치롤라 잘 지내냐고 물어볼까?


 "물어봐서 뭐하냐. 지금 학교 잘리냐 마냐 걱정하고 있는 주제에."


 치롤라도 아마 그 전공에서 우등생이겠지? 중간에 입학할 정도라면 말이야. 우리 전공에서 라키사, 아다비아 정도 되는 거 아니야? 걔는 대체 얼마나 저주술을 잘 사용할 수 있으면 중간에 입학하지? 설마 저 우리 마딜인의 수치 같은 저주술 책을 보고 이해할 수 있는 건가? 막 저주술로 황금도 만들어내는 거 아니야? 저주술로 황금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돈 걱정은 없겠다.



 오늘은 아다비아가 일이 있어서 못 온다고 했다. 서점에 손님이 없다. 심심하다. 이고랑 있어도 심심하기는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 이고가 있으면 정말 재미없는 잡담 몇 마디라도 나눌 수 있는데. 책을 펼쳤다. 아다비아가 도와준 부분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감비르는 뭐 하고 지내고 있지? 정말로 학교 포기했나? 일단 나라도 살고 봐야 하니 책을 봐야겠다.


 '나는 진짜 외국어에 소질이 없나? 전공 바꾸어야 하는 거 아니야?'


 아무리 아드라스어 단어를 외우려고 해도 외워지지가 않는다. 분명히 외웠다고 생각하는데 한 시간만 지나도 기억이 거의 나지 않는다. 이건 내 두뇌가 아드라스어 자체를 거부하는 건가? 아드라스어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대륙공통어도, 셀베티아어도 단어가 정말로 안 외워진다. 아드라스어만 그런 것이 아니라 대륙공통어, 셀베티아어 모두 이러니 이런 쪽으로는 소질이 아예 없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책을 보고 있는데 서점 문이 열리고 손님이 들어왔다. 자에드와 예라였다.


 "안녕!"

 "안녕."

 "잘 지냈어?"

 "응. 너네는?"

 "우리야 항상 열심히 공부하느라 정신없지."


 자에드가 웃으며 인사를 했다. 나도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너 우리 안 보고 싶었어? 왜 그렇게 건성으로 인사해?"

 "나?"

 "응. 우리 오랜만에 왔잖아."

 "뭘 또 오랜만에 와? 별로 된 거 같지도 않은데."


 예라는 오랜만에 왔는데 왜 그렇게 반응이 시원찮냐고 말했다. 그러면 내가 막 두 팔 쫙 벌리고 문으로 달려오기를 원했던 거야? 손님들 올 때마다 그렇게 두 팔 벌리고 문으로 뛰쳐가면 이고가 바로 미친 짓 그만하라고 하겠지. 그러고 싶지도 않지만 말이야. 얘들은 나랑 별로 친하지도 않은 애들이 모처럼 와서 엄청 친한 것처럼 행동한다. 오자마자 진상짓 하는 것보다야 훨씬 낫기는 하지만 별로 친하지도 않은데 막 친한 척을 하니 그 장단에 맞추어주는 것도 참 힘들다. 얘들이 나를 친한 친구로 생각한다는 생각은 딱히 들지 않는데. 바하르 때문에 그러나? 감비르 친구인 바하르가 쟤네들하고도 친하게 지낸다고 했었다. 바하르는 나랑 그럭저럭 친하게 지내고 있고. 하여간 참 이상한 애들이란 말이야. 에드자 애들은 원래 저런가? 막 다 친구야?


 둘은 마딜어로 된 책이 꽂혀 있는 책장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거기 뭐 볼 거 없을 건데...'


 둘은 마딜어로 된 책을 꺼내서 페이지를 넘기며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서점이 조용해서 걔네들이 뭐라고 이야기하는지 어렴풋이 들을 수 있다.


 "여기도 마딜어로 된 책은 시원찮은데?"

 "마딜어로 된 책 중 괜찮은 것 자체가 없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한 권도 없을리가..."

 "이게 솔직히 책이야? 문장들 배열에 개연성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어."


 자에드의 '문장들 배열에 개연성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어'라는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나도 그게 의문이다. 저런 것도 책이랍시고 출판하는 이 나라 수준 말이야. 독립한지 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까지도 제대로 된 책이 하나도 없어? 책을 볼 때마다 이 나라가 독립을 한 건지 말은 건지 진심으로 격렬하게 햇갈린다. 우르간 대제국으로부터 해방된 지 15년째잖아! 그런데 아직도 우리말로 된 책이 제대로 하나 없어서 맨날 다른 나라 책을 봐야 해. 심지어는 그 악마 같았다는 우르간 대제국의 공용어인 대륙공통어로 된 책까지 말이다. 우르간 대제국의 책도 버젓이 서점에 있으니 말 다 했지. 심지어는 그 책이 대출도 잘 돼!


 "진짜 뮈젤이랑 너무 차이난다. 수도라고 해서 여기에서 공부하고 있지만 책은 내 고향인 뮈젤이 훨씬 더 좋아."


 쟤 뮈젤 출신이었어? 예라야 여자니까 당연히 에드자 출신일 거고, 자에드도 에드자 출신일 거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그런데 방금 저 말을 들어보니 자에드는 뮈젤 출신이었다. 뮈젤이면 저 북쪽 변방 - 그러니까 우르간 대제국 - 아니지, 지금은 대제국이 망하고 우르간 왕국이 되었지, 그 우르간 왕국 접경 지역이잖아? 거기는 마딜 공화국 같지 않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어봤다. 학교에서 선배들이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렇게 온통 외국 서적으로만 공부해야 하는 것이 정부에 뮈젤 출신들이 많아서랬다. 남아드라스 공화국, 셀베티아 왕국에 우르간 왕국까지 뮈젤 출신 사람들이 권력을 잡도록 후원해주고 있다는 말도 있구. 자에드의 저 말 한 마디에 이런 이야기들이 확 떠올랐다.


 "타슈갈, 여기에 다른 마딜어 책은 없니? 마딜어로 된 책 보고 싶은데..."

 "그게 전부야."

 "이게? 이것이 전부야?"

 "응."

 "마딜어로 된 책은 왜 이렇게 없어?"

 "내가 어떻게 알아? 이고가 책 주문할 때 마딜어로 된 책을 거의 주문 안 해서 그래."

 "아...그래?"


 예라가 왜 마딜어로 된 책이 없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사실만 말해주었다. 나도 그게 궁금하다. 왜 우리 나라는 아직도 그따위 책 밖에 못 만드는지 말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별로 친하지도 않은 자에드와 예라에게 해줄 필요는 없다. 외적으로 드러나는 사실만 말해주었다. 이고가 주문할 때 마딜어로 된 책은 주문을 안 해. 이 서점에 마딜어로 된 책이 없는 것은 전적으로 이고 때문이야. 더 궁금하면 이고에게 물어봐.


 "어? 너희들 와 있었어?"

 "안녕하세요. 이고, 여기에는 왜 이렇게 마딜어로 된 책이 별로 없어요?"

 "딱히 살만한 책이 없어서. 그래도 어느 정도 수준이 되는 책을 들여와야 서점 수준이 유지가 되지. 책 자체도 별로 없어."

 "그건 그렇네요."


 마침 이고가 인쇄소에서 돌아왔다. 예라는 이고에게 웃으며 인사를 하고 이고가 인사를 받았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바로 자기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이고는 간단명료하게 대답을 해주었다. 예라는 이고의 말에 납득이 되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고, 혹시 이 책 있나요?"


 자에드가 쪽지 하나를 이고에게 보여주었다. 이고는 쪽지를 받아서 읽었다. 뭐가 적혀 있나 옆에서 같이 봤다. 대륙공통어로 무언가 적혀 있었다.


 "이 책 이번에 주문 넣었어. 아마 다음주쯤 들어올 거야. 오늘 막 인쇄 준비 들어간다고 했으니까."

 "그러면 다음주에 오면 되죠?"

 "한 번 와봐. 책 들어오면 다음주 일주일 동안은 너네 위해서 따로 빼놓을께."

 "감사합니다."


 둘이 활짝 웃으며 서점에서 나갔다.



 "이고, 아까 그 책 무슨 책이야?"

 "그거? 너도 봤잖아."

 "보기는 봤는데 뭔지 잘 모르겠어서..."

 "그거 인간들의 사회를 연구한 책이야."


 인간들의 사회를 연구한 책? 흥미가 생긴다. 중앙 학문 연구소 다니는 애들이 보는 책이면 내용이 괜찮을 거 같은데?


 "그 책 읽어본 적 있어?"

 "읽어본 적이...있긴 있다. 남아드라스 공화국에 있었을 때."

 "내용 재미있어?"

 "볼 만 해. 보면서 졸리거나 심심하지는 않더라. 내용은 다 까먹었지만."

 "그래?"


 이고가 읽어본 적이 있다고 하니 더 호기심이 생긴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책은 블랑쉬블르가 이고가 읽은 적이 있는 책이라고 하지만 이고 본인은 읽은 적이 없다고 극구 부정하는 책이다. 항상 그랬다. 내가 책 읽어본 적 있냐고 물어보면 1초의 망설임 없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이 책은 읽어본 적이 있다고 한다. 얼마나 내용이 재미있으면 읽어본 적이 있다고 하는 거지?


 "그 책 마딜어로 번역된 것은 있어?"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아?"


 예상대로 이고는 너무나 당연한 것을 쓸 데 없이 물어본다는 반응을 보였다.


 "왜 아무도 마딜어로 번역할 생각을 안 해?"

 "돈이 안 되어서?"

 "돈이 안 되어서? 내용 괜찮으면 사람들이 많이 빌려보고 사서보고 할 거 아니야."

 "그거 번역된 거 누가 보겠냐? 그 책 읽고 이해할만한 사람들은 대륙공통어도 그만큼 할텐데 원서 보겠다고 하겠지."


 생각해보니 그렇네. 저렇게 중앙 학문 연구소 다니는 애들이 볼 만한 책을 보는 사람이라면 대륙공통어를 잘 하겠지. 그렇다면 굳이 마딜어로 된 책을 읽을 필요없이 원서를 보는 것이 나을 거다. 내 고향에 있는 대학교에서는 대체 수업을 어떻게 할까? 거기 애들 다 대륙공통어, 아드라스어, 셀베티아어 잘 못 하는데. 내가 고향에서는 그렇게 못하는 편이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그래도 나름 그럭저럭 괜찮게 한다는 편에 속했다. 걔들은 거의 다 외국 원서를 볼 실력이 안 될 텐데 수업은 어떻게 하지? 그 동네에 있는 대학교에서는 대체 뭘 배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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