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기적과 저주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1장 07화

좀좀이 2017. 7. 29.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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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고, 뭐해?"

 "일한다."

 "아까 하던 거 계속 하고 있어?"

 "어."


 그러고보니 아침에 학교 갈 때 이고가 '오늘은 머리아픈 날이네' 라고 중얼거렸었다.



 "무슨 일이길래 머리 아파?"

 "그동안 밀린 도서 구입 목록 쫙 작성하려구."

 "그거 일 많아?"

 "어. 한동안 새로 구입하지 않아서. 팔린 책도 꽤 있고 새로 나온 책도 많아서 그것들 참고하면서 정리 한 번 해야 해."


 아침에 이렇게 간단히 대화를 하고 학교에 갔다 돌아왔다. 이고는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종이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아침에 머리아픈 날이라고 하더니 진짜 머리가 많이 아픈가 보다. 이고 표정을 살펴보았다. 표정이 썩 밝지 않다. 책상 위에는 지금까지의 대출 목록, 판매 목록, 도서 카드가 쫙 펼쳐져 있다. 저거 지금 잘못 건드렸다가 뒤섞이면 이고가 진노하겠지?


 "내가 도와줄 거 없어?"

 "서점 책 좀 정리해주라. 청소 좀 하구."

 "아침에 문 열자마자부터 지금까지 계속 안 쉬고 하는 거야?"

 "응."


 대충 팔릴 만한 책 몇 권만 구입하면 될 것을 왜 저렇게 머리를 쥐어싸매가며 하고 있지? 이해가 안 된다. 내가 아직 이고가 맡아서 하는 일을 잘 몰라서 그러는 건가, 이고가 혼자 유난을 떠는 건가? 굳이 저렇게 골머리 싸매어가며 할 일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뭔가 이유가 있으니까 저렇게 머리를 쥐어싸고 고생하고 있는 것이겠지. 책 한 권 가격이 비싸기도 하구. 서점 주인이 책 구입한 목록과 대출 및 판매 목록 대조해보고 왜 이 책은 대출조차 한 번도 안 되어갔냐고 하면 이고도 곤란할테니까.


 어젯밤에 서점 청소를 하고 잤기 때문에 이고가 아침에 청소를 해놓지 않았다고 해도 별로 더러운 것은 없었다. 다행히 오늘 손님이 아직 하나도 안 왔나보다. 손님이 계속 왔다갔다 했으면 저렇게 대출 목록, 판매 목록, 도서 카드를 전부 늘어놓지도 못했겠지. 특히 도서 카드. 도서 카드 섞이면 정말 머리 아파. 이고가 항상 강조하는 것이 다른 건 몰라도 도서 카드 정리만큼은 확실히 해놓으라고 하는 이유가 있다. 저거 섞이면 며칠치 대출 목록 보면서 다 맞추어놓아야 한다.


 먼지를 털고 바닥을 쓸었다. 혹시 바닥에 떨어진 동전이 있나 기대했지만 그런 건 없었다. 하긴, 그런 것이 있었다면 어젯밤 청소할 때 발견했겠지. 에드자 사람들은 돈을 참 잘 지켜. 어떻게 1마르라 짜리 동전 한 닢을 안 떨어뜨리냐. 서점에 떨어뜨리고 가라는 것이 아니다. 여기 도착한 날부터 지금까지 동전을 주워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인파사에 있을 때에는 그래도 어쩌다 가끔 아주 재수좋게 1마르라 짜리 동전 한 닢 줍는 날도 있었는데 여기는 그런 운이 따라주는 날이 전혀 없다. 내가 여기 와서 운이 없는 건지, 아니면 에드자 사람들이 돈 간수를 인파사 사람들보다 훨씬 꼼꼼하게 잘 하는 건지 모르겠다. 어쩌면 둘 다 맞을 수도 있구. 이 서점에서 일하게 된 것으로 내 올해 전체의 운을 다 써버리는 바람에 운이 없어서 가뜩이나 돈 간수 잘하는 사람들이 모인 에드자에서 동전 주울 일이 더더욱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서점 청소를 마치고 책이 제대로 잘 꽂혀 있는지 확인까지 했다. 계산대 옆을 보니 손님이 아예 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책 몇 권이 반납되어 있었다.


 "이고, 이 책들 반납처리 다 끝난 거야?"

 "응. 그거 좀 치워주라."

 "알았어."


 반납된 책을 책장에 꽂았다. 이 일까지 끝내니 딱히 할 일이 없다. 이고 옆으로 갔다. 이고가 작성하고 있는 리스트를 보았다. 종이 위에 책 이름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거의 다 대륙공통어와 아드라스어, 셀베티아어다. 마딜어는 거의 없었다. 아예 없다고 해도 될 정도로 안 보였다. 이것들이 이번에 구입할 책 목록인가?


 "다음부터는 제때에 처리해야지."


 이고가 담배를 태우러 밖으로 나갔다. 이고가 자리를 비운 동안 책상 위에 있는 문서들을 하나씩 보았다. 몇몇 인쇄소에서 받아온 출판 목록도 있다. 출판 목록을 읽어보았다.


 "뭐야? 마딜어로 된 책들도 나오잖아?"


 그동안 이고가 항상 대륙공통어, 아드라스어, 셀베티아어로 된 책만 구입해와서 마딜어로 된 책은 아예 출판 자체가 거의 안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인쇄소에서 받아온 출판 목록을 보니 그건 아니었다. 마딜어로 된 책들도 여럿 있었다. 마딜어로 된 책은 이것 저것 출간되고 있는데 이고가 구입을 안 할 뿐이었다. 책 제목을 보니 대체로 저주술 관련 서적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구입 안 하고 있는 건가?


 "뭐하냐? 나와."

 "응."


 이고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고, 구입 목록에 마딜어로 된 책은 왜 이렇게 없어?"

 "그런 책이 나와야 구입하든 말든 하지."


 이고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마딜어로 된 책 있잖아. 인쇄소에서 받아온 출판 목록 보니 마딜어로 된 책도 많이 있더만. 이고가 남아드라스 공화국에서 넘어와서 일부러 마딜어로 된 책 구입 안 하는 거 아냐?


 "이고, 저 출판 목록 보니까 마딜어로 된 책들 있던데?"

 "그거? 그게 살 만한 책이어야 구입 목록에 올리든 말든 하지."

 "저주술 책이라서 안 사는 거야?"

 "저기 책장에 마딜어로 된 책들 보이지? 저거 거의 다 저주술 관련 책이거든? 직접 한 번 보고 말해라."


 이고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대체 어떻게 생긴 책이길래 살 만한 책이 아니라는 거야? 마딜어로 된 책은 어떻게 생겼나 책장으로 갔다. 거의 다 저주술 책이다. 저주술 책 하나를 꺼내 펼쳤다.


 - 손 끝에서 부서지는 산들바람. 악에 차서 개가 울부짖는 소리. 머리 위에서 방긋 웃는 햇볕.


 이고는 내가 마딜어로 된 책을 보고 있는 것을 보더니 소리쳤다.


 "타슈갈, 거기 뭐라고 적혀 있냐?"

 "손 끝에서 부서지는 산들바람. 악에 차서 개가 울부짖는 소리. 머리 위에서 방긋 웃는 햇볕..."

 "너 그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되냐?"

 "아니..."

 "책이 다 그 따위니까 구입 안 하는 거야. 보고 뭔 말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되는 대로, 떠오르는 대로 막 적어놓으면 그게 책이냐?"

 "그렇네..."


 저주술에 관심이 없어서 저주술 관련 책을 펼쳐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제 보니 솔직히 너무 심했다. 이것을 보고 대체 무엇을 알라는 거지? 이고가 남아드라스 공화국 사람이라 마딜인들의 문화를 잘 몰라서 그런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이건 내가 봐도 무슨 소리인지 감도 못 잡겠다. 대체 '손 끝에서 부서지는 산들바람'과 '악에 차서 개가 울부짖는 소리'와 '머리 위에서 방긋 웃는 햇볕'의 관계는 뭐야? 이것을 쓴 사람은 무엇을 말하고 알려주고 싶어서 이렇게 쓴 거야? 내가 봐도 대체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이고 눈에는 오죽할까.


 이고 옆으로 갔다. 이고가 일하는 것을 구경했다. 종이 위에는 이고가 적어놓은 책 이름이 수십 개 적혀 있었다. 책 이름 옆에는 가격과 숫자가 적혀 있었다.


 "이고, 숫자는 뭐야?"

 "구입할 양."


 이고는 책 이름을 하나씩 지워가며 숫자를 다른 데에 더해주었다. 또는 숫자를 지우고 다시 쓴 후 다른 책 옆에 적혀 있는 숫자에 수를 더해줬다.


 "원래 이렇게 하는 거야?"

 "꼭 그런 것은 아니야. 이건 내가 하는 방식이야."


 이고는 계속 책 이름을 지우고 숫자를 바꾸어가며 일을 했다.


 "어떻게 마딜어로 된 책은 살릴 게 하나도 없냐?"


 마치 내게 들으라는 듯이 크게 중얼거렸다. 할 말이 없다. 마딜어로 된 책 수준을 보니 이고가 왜 마딜어로 된 책을 구입하지 않는지 알겠다. 나라도 저런 책은 절대 구입하지 않을 거다. 정말로 종이가 아깝고 잉크가 아깝다. 저 책을 써서 인쇄한 사람은 죽어서 분명히 저 책의 몇 배를 갚아내어야 할 거야. 나무 수십 그루를 심고 가꾸어도 저렇게 종이 낭비한 것은 사죄가 되지 않을 거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


 "라키사!"

 "안녕."

 "응. 안녕. 여기 왠 일이야?"

 "그냥. 혹시 볼 만한 책 있나 보려구."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라키사였다. 라키사가 서점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 여기가 라키사가 살고 있는 곳과 가까운가? 키란 동상과는 거리가 조금 있는데? 그리고 이 동네 살고 있었다면 그래도 한 번은 마주치지 않았을까? 라키사는 이고에게 인사를 했다. 이고도 라키사에게 인사를 했다.


 "마딜어로 된 책은 어디 있어?"

 "저쪽 벽에."

 "알았어."


 라키사가 마딜어로 된 책이 있는 책장으로 갔다.


 "야, 쟤는 누구냐? 너 친구야?"

 "같은 전공이야."

 "아다비아 말고?"

 "응."

 "쟤 공부 잘 해? 마딜어로 된 책 보겠다고 하는 걸로 봐서 썩 잘 할 거 같지 않은데..."

 "쟤? 쟤가 우리 전공에서 공부 제일 잘 해."

 "너 공부 도와주는 아다비아보다 더?"

 "응. 그런데 쟤는 노력 정말 많이 해. 거의 매일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해."

 "아다비아는?"

 "걔도 매일 도서관에서 공부해. 그런데 쟤는 진짜 노력파야. 아다비아는 머리가 좋은 거 같구."

 "공부를 제일 잘 하면 잘 하는 거지 뭐가 또 노력파야? 노력 많이 하니까 머리가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너도 공부 좀 열심히 해라. 맨날 대륙공통어랑 아드라스어 보고 정신줄 놓지 말구."


 이고가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며 웃었다. 생각해보니 이고 말이 틀린 말도 아니다. 쟤가 머리가 나쁜데 노력으로 극복해내는 건 아니잖아? 머리도 좋은데 노력도 그만큼 하는 것이겠지. 실력은 확실히 아다비아보다 좋다. 그런데 평가는 라키사는 노력을 정말 많이 한다고 하는 편이고, 아다비아는 공부를 잘한다는 평이다. 노력을 하도 많이 해서 실력이 뛰어나고 머리가 좋은 것은 오히려 뭍히는 건가?


 "쟤 책 고르는 거나 가서 도와줘."


 라키사에게 다가갔다. 라키사는 책장에서 이 책 저 책 뽑아서 휘리릭 넘겨보고 있다. 마딜어로 된 책이니 저래도 다 볼 수 있겠지. 저건 나도 할 수 있다. 마딜어로 된 책이니까. 하지만 바로 조금 전의 충격이 떠오른다. 읽을 수는 있는데 대체 무슨 말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책. 이런 책을 왜 인쇄했나 존재 자체가 의문인 책. 마딜인으로써 마딜어로 된 책이 저런 책 밖에 없다는 것이 참 수치스럽다.


 "라키사, 책 찾는 거 도와줄까?"

 "응? 아니, 괜찮아."

 "마딜어로 된 책은 별로 없어. 제대로 된 책도 거의 없고. 딱 이 책장 하나가 전부야. 이쪽은 아드라스어로 된 책이고 저쪽은 대륙공통어로 된 책이고, 저기는 셀베티아어로 된 책이야."

 "고마워."


 라키사는 마딜어로 된 책을 계속 뽑아서 책장을 넘겨보고 다시 꽂는 것을 반복한다. 미안하다. 네가 아무리 그렇게 열심히 본다고 해도 바뀔 건 없어. 우리 서점에 있는 마딜어로 된 책 수준이 형편없거든. 이고가 고르고 골라서 가져온 책인데 그 모양이야. 그렇게 아무리 책을 꺼내서 책장을 넘겨봐도 네 수준에 어울릴만한 책은 절대 나타나지 않을 거야. 그런 책이 있었다면 이고가 진작에 내게 알려주었겠지. 이고가 알려주지 않더라도 내가 도서 카드를 정리하면서 짐작을 했을 거구.


 라키사는 마딜어로 된 책 한 권을 골라들었다.


 "이거 대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

 "그거 빌리게?"


 하필 내가 조금 전에 책장을 펼쳐보고 좌절했던 그 책이었다.


 "응. 이거 대출 불가능한 책이야?"

 "아니, 그건 아닌데...다른 좋은 책들도 많잖아."

 "그냥 이 책 빌리고 싶어."

 "저주술 공부하게?"

 "그건 아니야."


 라키사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얘는 대체 왜 하필 이 책을 빌려가려고 하는 거지?


 "이 책 빌려가려는 것이 신기해?"

 "응. 그 책 빌려가는 사람은 네가 처음일 거야. 진짜 저주술 공부하는 거 아냐? 이왕이면 공부해서 내 성적 좀 올려주라."

 "아니. 외국어로 된 책만 계속 보아서 스트레스 풀려고 마딜어로 된 책 보려는 거야. 그런데 책이 다 이런 것만 있어서 ... 내가 저주술은 무슨 저주술이니?"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우리 수업 교재는 전부 외국어로 되어 있으니까. 대학교 들어와서 마딜어로 된 책은 본 적이 없다. 매일 외국어로 된 책만 보았지. 라키사는 하루 종일 도서관에 틀이박혀서 공부만 하니 그 스트레스가 매우 심할 거다. 얼마나 마딜어로 된 글을 읽고 싶었으면 저런 내가 봐도 형편없는 책을 빌려서 가는 걸까?


 라키사를 신규 회원으로 등록하고 돈을 받고 안내 사항을 알려주었다.


 "너랑 같은 수업 들으니까 책 반납할 때 굳이 서점으로 올 필요는 없어. 학교에서 내게 책 주면 내가 반납 처리하면 돼."

 "고마워."


 라키사가 책을 들고 서점에서 나갔다.



 "아, 끝났다!"


 라키사가 서점에서 나간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고가 시원하게 소리쳤다.


 "드디어 끝났어?"

 "응. 그런데 쟤는 공부 얼마나 열심히 해? 외국어로 책 보는 스트레스 때문에 저런 책 빌려갈 정도면."

 "쟤 진짜 열심히 해. 우리 전공에서 공부 제일 잘 한다니까."

 "그래도 그렇지, 저런 책을 빌려가냐."


 이고와 같이 웃었다. 대체 뭘 얼마나 공부하면 저런 책조차 재미있게 보이는 걸까? 확실히 내가 노력을 많이 안 하고 있기는 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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