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기적과 저주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1장 04화

좀좀이 2017. 7. 15. 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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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자리에 앉는 것이 좋을까, 뒷자리에 앉는 것이 좋을까? 어제 수업 들어오지 말라고 했는데...맨 앞에 앉아서 교수가 나가라고 하면 빌어야할까, 뒤에서 아예 티나지 않게 숨어 있는 것이 나을까? 강의실로 걸어가며 계속 이것만 생각했다. 대체 어느 자리에 앉는 것이 좋을까? 그나저나 감비르는 왜 안 오지? 감비르랑 같이 앉는 것이 그래도 따로 앉는 것보다는 나을 거 같은데.


 '뒤에 앉자.'


 아무리 생각해도 교수가 빈말로 수업 들어오라고 한 것은 아닐 거다. 홧김에 내뱉은 말도 아니었다. 맨 앞에 앉았다가 학생들 앞에서 확인사살당하는 것보다는 맨 뒤에 조용히 숨어 있는 것이 낫겠다. 오늘 수업을 듣기 위해 진짜 노력했다. 어떻게든 몇 페이지라도 읽으려고 노력했다. 읽은 것은 마딜어로 정리까지 했다. 단어만 찾아놓으면 봐도 또 몰라서 정리한 것이기는 하지만, 수업 초반에는 버틸 수 있다. 사실 지금까지 수업 시간 중에 태도가 불량해서 문제였던 적은 아니었잖아? 수업은 항상 열심히 들었다. 이건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수업마저 안 들으면 이 수업을 따라갈 방법이 아예 없거든. 정말 집중해서 들었다. 단지 아드라스어와 대륙공통어를 몰라서 책을 못 읽고 과제를 엉망으로 해올 뿐이지.



 강의실 맨 뒤쪽 구석자리로 갔다. 앞자리에 앉다가 뒷자리에 앉으니 느낌이 살짝 다르다. 뒷자리에 앉으니 긴장이 조금 풀어진다. 그것 외에 딱히 다르다고 느껴진 것은 없었다. 항상 감비르와 강의실 제일 앞쪽에 앉기는 했지만, 교수가 뭐 질문하려고 주변을 둘러보면 그때마다 최대한 엎드리곤 했지. 오늘은 달라! 처음에는 당당히 가슴펴고 고개 빳빳하게 세우고 있어도 돼! 후반으로 가면 다시 교수가 눈을 돌릴 때마다 앞사람의 몸을 방패로 최대한 숨어야겠지만 말야.


 '내가 무려 '예습'이라는 것을 해온 사람이야!'


 자리에 앉아서 허리를 쫙 폈다. 목도 쭈욱 피고 가슴도 쫙 폈다. 자신감이 넘친다. 초반 30분. 30분 만큼은 나도 아다비아, 라키사 못지 않은 모범생이다! 다 물어봐! 내가 30분 만큼은 뭐든 대답한다. 대답이 맞는지 틀린지 장담은 못한다. 그러나 대답 만큼은 아주 힘이 넘치게 할 수 있다! 내가 특별히 밤을 새서 교재를 5페이지 넘게 읽어온 학생이야! 오늘 하루 30분만큼은 나도 우등생이다!


 진짜 오늘 초반 30분에 내 모든 것을 쏟아붓겠다. 교수야, 질문만 해봐라. 내가 손들고 대답 다 해주마. 오늘의 전략은 최대한 초반 30분에 대답을 많이, 장황하게 해서 이 30분 분량을 40분까지 끌고 가는 것. 만약 1시간까지 불려낸다면? 이건 기적이다. 하지만 이러려면 세심한 컨트롤이 필요하지. 교수랑 쓸 데 없이 논쟁이 붙으면 안 돼. 오늘의 목표는 '그래도 노력하는 학생'이라는 모습을 보여주고 교수의 진노를 푸는 것이니까. 그 다음에는 자연스럽게 숨는 거야. 이미 교수에게 찍혔는데 '봐온 것은 딱 거기까지입니다'라고 말해버리면 된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초반 30분. 이 30분에 모든 것이 결정된다.


 '그나저나 감비르 왜 안 오지? 조금 있으면 교수 들어올 건데?'


 교수가 들어왔다. 감비르가 강의실에 없다. 나머지는 다 왔다. 교수가 강의실을 쭉 둘러보았다.


 "오늘도 다 왔군. 수업 시작하지."

 '어? 감비르 안 왔는데?'


 학교에 잘 나오는 것이 성적에 반영되지는 않는다. 시험만 잘 보면 된다. 그래서 그 누구도 별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다. 이 강의실은 그렇게 큰 편이 아니다. 게다가 모두 다 오면 빈자리가 없다. 그런데 지금 빈자리가 하나 있다. 교수님이 잘못 보았나? 그럴 수가 없는데? 정말로 실수로 감비르가 안 온 것을 모르시는 건가? 교수는 수업을 시작했다.


 "이 부분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사람?"


 손을 들었다. 나 혼자 들었다. 그래, 이제부터 시작이다. 어떻게든 대답하고 책을 읽고 왔다는 것을 티내야해!


 "아무도 없군."


 분명히 교수는 나를 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없다고 하더니 설명을 시작했다. 학생들 분위기가 조금 이상해졌다. 그럴 수 밖에. 내가 손을 들었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놀라운 일인데, 교수는 그런 나를 대놓고 무시했다. 하지만 교수는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태도로 수업을 계속 진행해갔다. 감비르가 안 온 것을 알면서 일부러 다 왔다고 한 거고, 내가 손 든 것을 알면서 일부러 무시한 거다.



 수업은 그렇게 흘러갔다. 내 노력을 보여줄 기회는 전혀 없었다. 교수는 철저히 내가 강의실에 있는 것을 무시했다. 아무리 손을 들어도, 아무리 교수와 눈이 마주쳐도 돌아오는 것은 똑같았다. 보이지 않는 유령이 손을 든 것처럼 무시했다. 일말의 기대를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도 감비르처럼 오늘 수업에 나오지 말았어야 했나? 학생들은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대충 눈치를 챈 분위기였다. 학생들 사이에서도 그렇게 수업 속에서 차차 나는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수업이 끝나버렸다.



 "진짜 이제 어쩌지?"


 어제 교수의 말을 듣고 예견했던 일이라 그런가? 어제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보다 오히려 충격이 적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앞으로 수업을 계속 들어가야 하나? 선택지라고는 올해 남은 기간 내내 이런 취급을 당하며 수업을 듣고 내년에 이 수업을 또 듣는 것, 아니면 정말로 학교를 그만두고 다른 길을 찾아보는 것 뿐이다. 이러나 저러나 다 막막하기는 하다.


 벤치에 앉았다. 담배에 불을 붙였다. 돈도 없는데 이거 한 대로 안 될 거 같아. 이제 어떡하지? 진짜 학교 때려쳐야 하나? 그런데 지금 때려쳐봐야 답도 없잖아? 어차피 입학은 봄에 할 거고. 내년에 이 수업을 또 듣는 다른 학교로 가든 올해 한 해를 날리는 것은 차이가 없다. 전공을 바꾸려 해도 바꿀 전공도 없다. 진짜 저주술로 전공을 바꾸어야 하나? 거기는 마딜어만 사용하니 그래도 버틸 만 하겠지? 그런데 저주술 쓸 줄도 모르는데 거기 가서 또 뭐해? 그보다 저주술 전공이면 이 마딜땅에서 벗어날 방법이 아예 없어지잖아. 진짜 이제 어쩌지?


 담배 연기만 계속 빨아들였다. 답이 없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답이 아예 없다.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냥 없는 거다. 학교 그만두고 몸 쓰는 일을 알아봐야 하나? 고향 돌아가? 산에 가서 약초라도 캐와서 팔까? 어차피 이 땅을 벗어나는 것이 목표였으니 확 셀베티아 왕국으로 넘어가버려? 거기 가서는 뭐하지? 짐이라도 나를까? 공사장 있으면 거기서 목재라도 들고 날라?


 "타슈갈! 여기서 뭐하니?"

 "뭐하긴? 앉아 있잖아."


 심란해 죽겠는데 하필 아다비아다. 얘는 왜 이렇게 눈치가 없지? 강의실 일 보았으면 그냥 가도 되잖아? 지금 와서 또 무슨 속 뒤집는 말을 하려고 그래?


 "오늘 감비르 왜 안 왔어?"

 "몰라. 나도 서점에서 바로 왔는데."


 아다비아가 '아, 그렇네' 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뭘 당연한 것을 물어봐. 제발 그냥 좀 가라. 오늘은 진짜로 머리 복잡하다. 혼자서 좀 있고 싶다.


 "어제 교수님이 너희들 왜 불렀어?"

 "공부하라고."

 "아..."


 대충 대답했다. 담배를 한 대 다 태웠는데 또 태우고 싶다. 주머니에서 담배갑을 꺼내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담뱃불을 옮겨 붙였다.


 "내가 알려줄까? 나 오후에 도서관에 있으니까 찾아와. 오면 알려줄께."

 "뭔 소리야! 나 그때 일한다구! 오후에 서점 가서 일해야 한다니까? 도서관을 어떻게 가? 일 때려치란 거야?"


 아다비아 말에 갑자기 화가 났다. 아다비아가 움찔했다.


 "지금 약올리는 것도 아니구...나 오후에 서점에서 일한다고 몇 번을 말해?"

 "아...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담배 연기를 쭉 빨아들였다. 얘는 지금 나를 더 화나게 하려고 여기 온 거야? 기분이 많이 나쁘다.


 "나 가볼께."

 "어. 잘 가."


 아다비아가 급히 자리를 피했다. 하늘을 쳐다보았다. 새파랗다. 진짜 이제 어쩌냐. 한숨만 나온다. 모르겠다. 내일도 수업 들어가기는 해야겠지? 그런데 수업 들어가는 것이 맞기는 한 건가? 수업 안 들어가면 뭐하지? 방에서 뒹굴거리면서 쉬기? 다른 일 하나 더 찾아서 하기? 생각 좀 해봐야겠다. 그리고 수업은...앞으로 어떻게 할 지 결정되기 전까지는 들어가기는 하는 게 맞겠지? 만약 내년에 처음부터 다시 이 수업을 들을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내년에는 내 아드라스어와 대륙공통어 실력이 조금 더 나아질까? 이 책 한 권 다 보면 괜찮아질건가?



 서점으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아까 아다비아한테 괜히 소리쳤나? 조금 후회가 되기는 한다. 그런데 걔 말이 솔직히 심하기는 했잖아. 학교 끝나고 서점 가서 일해야된다고 몇 번을 말했는데! 얘는 뭐 나랑 감비르가 교수한테 혼나고 한숨쉴 때마다 와서 오후에 자기 찾아오래? 말이나 안 하면 밉지 않지. 감비르야 오후에 일 안 하니까 상관없겠다. 나는 일하는데...오늘은 감비르도 없었구만.


 책을 펼쳤다. 오늘도 내일 수업 예습을 할 거다. 이러다보면 조금씩 더 나아지지 않을까? 하루에 아드라스어 단어 하나, 대륙공통어 단어 하나씩 외우면 1년후 365개...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택도 없구나. 괜히 세어봤다. 계산해보니 의욕만 더 떨어진다. 그래도 해야지. 이 학교 그만둘 생각이 아니라면 어떻게든 버텨내야 한다. 이거 말고 지금 마땅히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서점 한 쪽에서 갈색 제복을 입은 남자와 여자가 뭔가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한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아드라스어 같다. 저것들은 딱 봐도 마딜인이구만 왜 아드라스어로 떠들어대? 몇 마디는 알아듣겠다. 무슨 수업 관련된 이야기 같다. 가만히 보니 둘 다 아는 애들이다. 남자는 자에드이고 여자는 예라일 거다. 감비르 친구인 바하르의 소개로 알게 된 애들이다. 그때 저 갈색 제복이 중앙 학문 연구소 소속 학생들이 입는 옷이라는 것을 알았지.


 자에드와 예라가 계산대로 왔다. 뭐라고 말한다. 아드라스어다.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아듣지 못하겠다. 내 미간이 점점 찌푸려진다. 얘들이 싫어서가 아니다. 기분나빠서도 아니다. 정말로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거리에서 모르는 사람과 대화하는 거라면 가볍게 '몰라요'라고 말하고 지나쳤을 거다.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얘들이 이 서점에 왜 왔는지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얘들이 일단 이 서점의 손님이라는 것.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어야만 한다. 알아들으려고 노력할 수록 내 미간과 눈은 점점 저 찌푸려져간다.


 "미안하지만 나 아드라스어 잘 몰라."

 "응? 너 아드라스인 아니야?"


 자에드는 무슨 말하는 거냐는 표정을 지었다.


 "너 지금 우리 발음 나쁘다고 놀리는 거지?"


 예라는 나를 가볍게 흘겨보았다. 


 "나 진짜로 아드라스어 잘 몰라. 나 마딜땅에서 태어났고 계속 마딜 공화국에서만 살았어."

 "그렇지만 너는 아드라스인이잖아."

 "아드라스어는 나도 학교 들어가서야 배웠어."

 "그래도 부모님 아드라스인이면 아드라스어 어느 정도 알지 않아? 부모님께 말 배우잖아."

 "나 집에서도 마딜어 썼어. 진짜 기초적인 거 몇 개 말고 나머지는 몰라. 뭐 식사, 빵, 엄마, 아빠 이런 것만 알아."

 "아...그럴 수도 있구나..."


 예라가 왜 아드라스인이 아드라스어를 모르냐고 따지듯이 물어보았다. 그런데 정말로 나는 모르는걸. 진짜로 아드라스어를 모른다고 대답하자 둘은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남아드라스 공화국과 셀베티아 왕국에서 출판된 책들 언제 들어와?"

 "새 책은 대체로 매달 1일에 들어와."

 "그러면 1일에 오면 새 책 볼 수 있어?"

 "꼭 그렇지는 않구...보고 싶은 책 있어?"

 "아니. 새 책이 언제 들어오는지 알고 싶어서. 그때마다 맞추어 올까 했어."


 자에드가 화제를 돌렸다. 서점에 새 책이 언제 들어오냐고 물어보았다. 서점에 새 책은 매달 1일에 들어온다. 물론 어디까지나 원칙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인쇄소에서 늦어질 때도 종종 있다.


 "아...알았어. 우리 가볼께!"


 자에드와 예라가 서점에서 나갔다. 오늘은 정말 무슨 날인가? 왜 다들 내게 시비를 못 걸어 안달이 난 것처럼 굴지? 그것도 전부 망할 아드라스어와 대륙공통어를 갖고 말이다. 내 피가 아드라스인의 피면 뭐해? 부모님도 마딜어로 이야기하셨는데. 부모님이야 당연히 아시겠지. 그런데 나는 정말로 모른다. 아버지, 어머니, 제게 왜 쓰잘 데 없는 마딜어를 가르쳐주셨나요? 어렸을 적부터 아드라스어를 가르쳐주셨다면 이런 일을 겪지 않잖아요.


 가뜩이나 눈에 안 들어오는 책이 더 눈에 안 들어온다. 내일은 대체 수업 어떻게 들어가지? 그리고 감비르는 오늘 수업 왜 안 들어왔지? 설마 진짜 학교 그만둘 생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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