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기적과 저주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1장 03화

좀좀이 2017. 7. 9. 0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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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자."

 "예!"


 살았다! 교수가 내 과제 제대로 안 봤다! 감사합니다. 기적이 있었군요. 이렇게 기적을 내려주시다니! 그거 걸릴까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데요. 오늘 무사히 넘어간다. 이렇게 신날 수가! 저 꼼꼼한 교수가 왠 일로 내 과제를 안 보았대? 큰 고비 하나 잘 넘겼어. 오늘은 과제도 없으니 마음 편하게 잘 수 있겠어. 감비르를 바라보았다. 감비르도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고 있다. 과제 표지에는 확인했다는 교수의 서명만 있을 뿐이다. 그래, 이런 날도 있어야지. 가끔은 이런 기적같은 날도 있어야 당연하잖아.


 "아, 그리고 타슈갈, 감비르! 너희들은 나 좀 따라와."


 망했어요. 꿈이 무너진다. 그래, 약 10초간 즐거웠다. 왜 따라오라고 했는지 당연히 알고 있다. 오늘은 뭘 얼마나 심각한 이야기를 하려고 따로 부르지? 불안하다. 지금까지는 항상 강의실 안에서 혼나고는 했다. 그런데 오늘은 따라나오라고 한다. 이것은 매우 좋지 않다. 설마 과제를 본 거야? 그것도 끝까지 다? 절대 그래서는 안 돼! 이것은 지금까지 해온 과제 중 최악의 과제란 말이야!



 교수가 문을 열고 나갔다. 감비르와 함께 가방을 챙겨 교수 뒤를 쫓아갔다. 교수는 아무 말 없이 자기 연구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분명히 화가 났다. 교수는 우리에게 뭔가 지독한 말을 퍼붓기로 작정했다. 교수의 걸음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감비르를 바라보았다. 감비르의 미간이 구겨졌다. 말하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알 수 있다. 우리 어쩌지? 뭐라고 이야기하며 빌어야할까? 화가 많이 난 거 같은데.



 교수가 문을 열고 연구실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도 따라서 들어갔다.


 "문 닫아."

 "예."


 문을 닫았다. 교수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더니 담배에 불을 붙였다. 화를 꾹 참기 위한 것처럼 담배을 연신 뻑뻑 들이켰다. 저 담배 한 모금에 내 수명도 한 모금 줄어드는 것 같다. 무슨 말을 들어도 좋아요. 그러니 제발 빨리 하고 끝내주세요. 저는 이미 마음의 준비가 되었어요. 이 침묵이 더 힘들어요. 하루 이틀 혼나는 것도 아닌데 이제 놀랄 것도 없어요. 일말의 희망을 갖고 있는 이 순간이 더 괴로워요. 그러니 희망을 절망으로 바꿀 거라면 차라리 빨리 바꾸어주세요.


 "야."

 "예, 교수님."

 "너네 과제 줘 봐."


 가방에서 과제를 꺼내 교수에게 건네드렸다.


 "이야, 내가 살다살다 이런 꼴통 놈들은 처음 본다. 너희들 공부는 하냐?"

 "예."

 "지금 이게 공부해서 작성한 과제야?"

 "노력은 열심히 했어요."

 "노력? 지금 장난해? 너네 지금 나한테 장난치냐?"


 드디어 시작되었다. 교수님의 푸닥거리. 말린 육포를 방망이로 두들겨패서 부드럽게 만들듯 이제부터 속사포로 꾸중이 튀어나오겠지. 나는 리듬을 타는 거야. 적당히 추임새도 넣으면서 말이야. 중요한 것은 바로 타이밍. 적절한 때에 '잘못했습니다', '열심히 할께요', '제발 한 번만 봐주세요' 라고 해야 한다. 정말 이러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 솔직히 왜 혼나는지 뻔히 아는 걸. 대륙공통어와 아드라스어 몰라서 과제 못 해온 걸 뭐라고 변명해. '예, 저는 대륙공통어와 아드라스어를 몰라서 교재를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너네 무슨 내용인지는 알고 썼냐?"

 "그게...죄송합니다! 읽으려고 노력했는데 도저히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어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교수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예상하고 있었지롱. 이쯤에서 고개 한 번 푹 떨구어주시고. 타이밍을 잘 맞추어야 해.


 "내가 진짜 너네 같은 놈은 여기에서 학생들 가르치면서 처음 봐! 너네 여기 어떻게 들어왔냐?"


 감비르도 아무 말 없다. 들어오기는 뭘 어떻게 들어와? 시험 쳐서 들어왔지. 여기 입학하겠다고 할 때 누가 여기는 책이 죄다 아드라스어와 대륙공통어로 되어 있다고 알려준 적이 있어? 나도 그거 몰라서 들어왔다. 그거 알았으면...알았어도 들어왔겠네. 누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수준을 요구할 줄 알았나? 이건 내가 배웠던 대륙공통어와 아드라스어 수준을 아늑히 뛰어넘는다구.


 "너네들 여기 그만두고 다른 학교로 진학하는 것이 어떻겠냐?"


 교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예?"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너희들 여기랑 너무 안 맞아. 진짜 꿈도 희망도 안 보여. 개선의 여지가 있어야 다음에 잘 해보라고 하지. 너희들처럼 열의도 없고 실력도 없는 애들은 진짜로 처음이야. 보통 이 정도까지 오면 책은 읽어. 그런데 너네는 아직도 책 하나 똑바로 못 읽잖아. 앞으로 어떡할래? 너희들 시험은 치를 수 있겠어? 시험 공부는 어떻게 할 거야? 그리고 시험지 답안은 어떻게 작성할래?"

 "열심히 할께요."

 "이건 열심의 문제가 아냐. 진지하게 생각해봐. 전공을 다른 것으로 바꾸든가."

 "정말 열심히 할께요."

 "아니야. 이건 그 수준을 벗어났어. 역사쪽이 그나마 아드라스어랑 대륙공통어 덜 쓰지, 아마?"

 "교수님, 어떻게든 시험 통과하도록 할께요."

 "되었어. 뭐 지금까지는 열심히 안 했겠니.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건 포기하는 게 좋아."

 "이번만 봐주세요. 저희가 다음에는 어떻게든 꼭 해낼께요!"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앞으로는 내 수업 안 들어와도 돼. 과제 낼 필요도 없구. 가 봐."

 "예?"

 "가보라구. 나가서 다른 전공 찾아보든가 새로 들어갈 학교 알아봐."

 "정말 잘못했어요! 꼭 다음 과제 잘 해올께요."

 "내일부터 수업 들어오지 마! 이제 나가!"

 "진짜로 앞으로 더 열심히 할께요! 어떻게든 이번 학기 끝나기 전까지 아드라스어랑 대륙공통어 다른 애들만큼 하도록 할께요! 제발 봐주세요!"

 "그럴 필요 없다니까! 빨리 안 나가?"


 교수가 빨리 나가라고 버럭 소리쳤다. 교수님께 꼭 열심히 하겠다고 말하며 허리를 90도 넘게 접으며 인사드리고 교수실에서 나왔다. 문을 닫았다. 눈앞이 깜깜하다. 오늘 것은 예전 것들과 차원이 다르다. 이건 거의 퇴학 선고다. 많이 위험하다. 다시 들어가서 무릎이라도 꿇고 빌어야 하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진짜로 다른 과 찾아봐야 하나? 다리가 후들거린다. 벽에 기대었다. 한숨이 나온다. 해도 안 되는 것을 어떻게 하라는 거야? 해도 안 되니까 빨리 그만두라는 거야? 그런데 그게 전공 문제가 아니라 대륙공통어와 아드라스어잖아? 전공 내용 자체를 몰라서 그런 거면 억울하지나 않지. 이건 전공과 아무 상관 없는 대륙공통어와 아드라스어 때문이다. 억울하다. 너무 억울해서 속이 터질 거 같다. 제대로 뭘 해보지도 못했는데 엉뚱한 잡것 말들 때문에 쫓겨나게 생겼다.



 감비르와 사이좋게 비틀거리며 건물 밖으로 나왔다. 오늘따라 햇볕이 너무 좋다. 내 눈물샘을 자극하려고 일부러 더 따갑게 내리쬐는 것 같다. 이런 날 비라도 내리면 빗물에 눈물을 감추기라도 할 텐데. 너무나 날이 좋아. 눈에 먼지나 확 들어가버려라! 아니야, 먼지는 너무 약해. 초파리 한 마리 정도 들어가면 울어도 그러려니 할 거야. 벌레가 눈에 들어가서 아파서 운다고 하면 다 그러려니 하겠지. 그런데 망할 초파리도 없다. 잡아서 일부러 눈에 집어넣고 싶을 지경이다.


 "우리 지금이라도 연구실로 돌아가서 무릎 꿇고 빌까?"

 "응?"


 감비르는 아예 넋이 나가 있었다. 제대로 충격받았나보다. 정신차리라고 등을 가볍게 탁 쳤다. 그러자 '어어어' 하면서 고개를 세게 흔들었다.


 "야, 우리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빌자. 우리 이거 실상 퇴학이야!"

 "그래서 될까?"

 "그러면 이대로 끝낼래? 우리 이대로 가면 최소한 올해 한 해는 끝장나는 거야. 내년에 수업 처음부터 다시 들어야해!"

 "어...그렇지?"


 미치겠네. 감비르는 아예 정신줄을 놓아버렸다. 나라도 혼자 연구실로 달려가서 교수님께 무릎 꿇고 싹싹 빌까? 차라리 그날 과제를 내지 말아야했나? 아니지, 아예 그날 학교를 가지 말아야 했어. 벽에 있는 힘껏 머리를 찧어서 혹이라도 하나 만들고 다음날 비틀거리며 교실로 들어가야 했을 거야. 교수가 뭔 일 있었냐고 하면 밤에 불량배들에게 습격당해서 정신을 잃었다고 변명하고 말이야. 조금 더 확실하게 이고한테 얼굴 좀 두들겨 패달라고 할 걸 그랬나?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말이 좋아 수업 안 들어와도 된다는 거지, 이건 수업 들어오지 말라는 소리인데! 아, 아예 내일부터 수업 들어오지 말라고 했지? 나도 충격을 크게 받아서 햇갈렸다.


 "지금 정신줄 놓을 때가 아니야! 당장 내일부터 우리 수업 어떻게 해!"

 "수업? 뭐 어떻게 되겠지?"

 "뭐가 또 어떻게 되겠지야? 그거 당장 내일부터 들어오지 말라는 소리인데!"

 "몰라. 그냥 들어가도 별 말 없을 걸?"

 "뭐가 별 말 없어?"

 "설마...쫓아내려구. 어떻게 되지 않을까?"

 "야, 뭐가 어떻게 돼? 지금 우리 당장 내년까지 학교 다니는 의미가 없어지게 생겼는데!"

 "몰라. 내일 생각하자. 나 먼저 갈께."


 감비르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걸어갔다. 한숨만 나왔다. 오늘 일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다. 평소에 혼내는 것으로는 말이 먹히지 않는다고 판단해서 조금 더 강하게 말한 정도가 아니라는 거다. 정확히 말했다. '내일부터 수업 들어오지 마!' 두뇌와 심장이 축으로 연결되어 뱅뱅 돈다. 쿵떡쿵떡 뱅뱅 돈다. 머리가 돌 때마다 심장이 돌고, 심장이 뛸 때마다 머리가 돈다. 이걸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정말 얼굴에 철판 깔고 수업에 들어가야 하나? 아니면 교수 말대로 이제부터 내년 봄이 올 때까지 수업 들어가지 말아야 하나? 교수 말의 진의는 뭘까? 진의야 뻔하지. 진짜 수업 들어오지 말고 다른 길을 알아보라는 것. 그게 진의다. 100만번 다르고 다르게 봐야 올해 1년은 아드라스어와 대륙공통어만 죽어라 공부해서 내년에 처음부터 다시 수업을 들으라는 소리다.


 하늘이 뱅뱅 돈다. 어디로 가야할까. 어디로 가는 것일까. 온몸이 습관에 의존해 서점을 향해 걸어간다. 그런데 나는 지금 어디로 가는 걸까.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걸까. 이제 어떡해야 할까. '내일부터 수업 들어오지 마', '이제 어떡해야 할까', 그리고 푸른 하늘이 머리 속에서 뱅뱅 돌며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이 소용돌이의 바닥은 절망. 절망의 소용돌이 안으로 내 내면 모든 것이 빨려들어간다.



 "야, 무슨 일이야? 왜 넋이 나갔어?"

 "어?"

 "뭔데 넋나간 표정으로 돌아와?"

 "내일부터 수업 나오지 말래."

 "왜?"

 "몰라. 교수가 내일부터 오지 말래."

 "에휴. 기운내. 설마 진짜 오지 말라는 소리겠냐."

 "응."


 내 말에 이고가 조금 놀랐는지 양 눈썹이 순간 위로 살짝 올라갔다.


 "너 뭐 잘못했는데? 교실 불싸지르기라도 했냐?"

 "아니...모르겠어. 내가 뭘 잘못했다구."

 "뭔 말이야? 뭘 그렇게 크게 잘못했길래 수업을 들어오지 말래?"

 "몰라. 진도 못 쫓아온다고 이제 나가래."


 이고가 혀를 차고 한숨을 내쉬었다.


 "기운 내. 내일은 예습이라도 잘 해서 가."

 "내가 봐서 뭐 알아야 책을 보든 말든 하지."

 "야, 그래도 한 글자라도 더 봐서 가. 진짜 퇴학 당하지 말고."

 "응."


 자리에 앉아서 책을 펼쳤다. 그래. 마음 잡고 책을 보자. 내일 배울 거 미리 봐서 가면 조금은 봐주시지 않을까?


 "나 방에 들어가서 조금 쉰다."

 "응. 가게 내가 보고 있을께."


 이고가 갑자기 방으로 급히 들어갔다. 왜 들어갔는지 안다. '그분'이 오는 것을 먼저 발견했나보다. 역시 내 짐작이 맞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블랑쉬블르였다. 우리 입장에서는 악질 중에서도 악질인 고객. 서점 주인 입장에서는 천사이자 천사인 고객. 항상 책을 많이 빌려가고, 꼭 연체를 하지. 그런데 정작 연체료 흥정은 하지 않는다. 연체료 내라고 하면 아무 말 없이 잘 낸다. 그래서 서점 주인은 돈 더 벌어 좋고, 우리들은 책 수거해와야 하니까 아주 싫다.


 "오늘은 혼자 가게 보고 있네요?"

 "예."

 "이고는요?"

 "일 있어서 나갔어요. 조금 늦게 들어오다고 하던데요."

 "그래요?"


 블랑쉬블르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체 이고랑 무슨 관계이기에 아쉬워하지? 이고는 블랑쉬블르 엄청 싫어하는 것 같던데. 블랑쉬블르가 서점에 찾아올 때마다 직접 어떤 관계냐고 물어보고 싶다. 분명히 블랑쉬블르는 이고에게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이 참 많아 보인다. 그러니 이고가 블랑쉬블르 집으로 책을 수거하러 갈 때마다 매우 늦게 돌아오는 거겠지. 그런데 이고는 어떻게든 블랑쉬블르와 안 마주치려고 노력한다.


 "무슨 책 봐요?"

 "교재요."

 "어떤 교재인데요?"

 "이렇게 생긴 교재요."


 책을 보여주었다. 블랑쉬블르는 페이지를 넘겨보았다. 블랑쉬블르에게는 술술 읽히겠지? 블랑쉬블르도 남아드라스 공화국에서 왔다고 했으니까. 설마 자기 모국어도 모르지는 않겠지.


 "이거 매우 재미있게 읽었었는데!"

 "그래요?"

 "이거 내용 진짜 흥미로워요."

 "아...그렇군요. 저는 아드라스어를 몰라서 무슨 내용인지 도통 모르겠어요."

 "이고에게 물어보면 되지 않아요? 이고도 이 책 공부했을텐데..."

 "예? 이고는 이 책 모르겠다고 하던데요?"

 "그래요?"


 블랑쉬블르의 얼굴에 어두운 표정이 살짝 스쳐지나갔다. 뭔가 있나?


 "잊어버렸나보죠. 하도 공부한지 오래되어서요."

 "그런가요?"

 "그럴 거에요. 공부했다고 다 기억하는 거 아니잖아요? 이고도 공부한지 오래되어서 잊어버렸을 거에요."

 "아...그러면 블랑쉬블르는 어떻게 이것을 기억해요?"

 "저야 이것 관련해서 지금도 공부하고 연구하니까요."


 블랑쉬블르가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이고가 이거 공부한 거 어떻게 아세요?"

 "같은 학교 다녔거든요."

 "진짜요? 이고가요? 이고 그때 어땠어요? 공부 잘 했어요?"

 "글쎄요? 그건 이고에게 직접 물어봐요."


 블랑쉬블르가 미소지으며 대답하고는 책을 고르기 위해 책장으로 갔다. 이고가 블랑쉬블르랑 같은 학교를 다녔다구? 희안한 일이다. 설마 이고는 학교에서 쫓겨난 후 흘러흘러 여기까지 들어온 건가? 그래도 그렇지, 왜 하필 이 후지고 미개한 마딜 공화국까지 흘러들어와? 학교 다닐 때 공부 어지간히 못했나? 설마 지금의 나보다 더 심했던 거 아니야?


 다시 책을 읽기 위해 노력했다. 어떻게든 내일 수업에서 공부한 티를 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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