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기적과 저주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1장 02화

좀좀이 2017. 7. 7. 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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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비르, 과제 다 했어?"

 "응. 너는?"

 "못했어."

 "야, 어쩌려고 그래?"


 뭘 어째? 망한 거지. 밤새도록 과제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다섯 장을 넘길 수가 없었다. 요약은 고사하고 사전 찾아가며 읽은 부분을 다시 읽기도 벅찼다. 나름 메모를 해가며 읽었지만 메모를 정리하려 하면 기억이 또 흐릿해졌다. 제대로 읽지 못 했다는 증거였다. 그래서 다시 읽으려고 하면 또 다시 처음부터 반복. 몇 번 그렇게 하다보니 도저히 짜증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창밖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릴 즈음, 눈을 잠깐 붙이고 다시 보기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잠깐 바닥에 드러누웠는데, 이고가 깨워줄 때까지 못 일어났다.


 "너 과제한 것 좀 빌려줄 수 있어?"

 "나도 엉망으로 했는데...내꺼 베끼면 바로 걸릴 걸?"


 그래. 너의 아드라스어 실력이나 내 아드라스어 실력이나 크게 차이나지는 않지. 감비르가 요약한 것도 아마 엉망일 거다. 나와 아드라스어 실력이 그렇게 크게 차이나지 않는데 과제를 해왔다는 것은 해석 안 되는 부분은 과감히 자기 스스로 내용을 지어내거나 건너뛰었다는 말이다. 감비르 것을 베꼈다가는 교수님께 엄청나게 혼날 거다. 종이가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냐는 말을 듣겠지. 지 귀에 종이가 우는 소리가 들리면 우리 같은 인간들을 위해 책 번역이나 해줄 것이지.


 "너 라키사랑 좀 친하지 않냐? 걔한테 빌려! 걔 공부 엄청 잘 하잖아."

 "라키사? 걔 지금 학교 왔어?"

 "글쎄? 걔는 수업 시간 딱 맞춰오지 않나?"

 "야,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뭐? 그럼 내꺼 베껴서 같이 죽자고?"


 하아...이놈하고 말을 말아야지. 아무리 친구라지만 속이 터진다. 지금 사람 데리고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라키사와 친하기는 하다. 라키사는 공부를 정말 잘 한다. 아마 우리 과에서 공부를 제일 잘 할 거다. 워낙 공부를 열심히 해서 오히려 공부 잘하는 것보다 성실하다는 것이 두드러지는 경우랄까? 성격이 조용하고 착해서 과제 빌려달라고 하면 아마 빌려주기는 할 거다. 문제는 얘가 학교 수업 시간에 칼같이 맞추어서 온다는 것. 얘가 학교에 와 있어야 과제를 빌리든가 말든가 하지, 학교에 오지도 않았는데 뭔 수로 얘가 한 과제를 빌려?


 "아...어쩌지?"

 "그러게...내가 책에 줄 쳐놓은 거라도 일단 베낄래?"

 "어?"

 "야, 교수가 설마 과제 해온 거 다 보겠냐? 대충 분량만 채워서 일단 내!"

 "그럴까? 야, 너 책 빨리 줘봐."


 감비르가 자기 책을 가방에서 꺼내서 주었다. 과제로 보아야할 페이지를 펼쳤다. 뭔가 줄이 참 잘 그어져 있다.


 "너 이거 줄 친 거는 읽은 거 맞지?"

 "노력은 했어."

 "아놔, 진짜!"


 어이없어서 허허 웃으며 감비르가 밑줄 친 부분을 그대로 베껴적기 시작했다. 이것은 마딜어로 적어서 제출해야 하는 과제다. 그렇지만 설마 학생들이 제출한 과제를 교수가 한가하게 다 읽고 앉았겠어? 대충 분량이나 확인하고 말겠지. 그래도 양심상 읽고 무슨 말인지 아는 문장은 마딜어로 써가면서 베꼈다. 교수가 아드라스어 그대로 베껴적은 것은 뭐냐고 물어보면 내용은 알 거 같은데 마딜어로 뭐라고 해야될 지 몰라서 그냥 베껴적었다고 해야지.


 "너 이거 뭐 알고 줄친 거 맞아?"

 "시간 없어! 빨리 베껴! 싫으면 책 주든가."

 "아냐."


 감비르가 책에 줄쳐놓은 것이 뭔가 이상하다. 줄쳐놓은 문장 중 몇 문장은 해석이 가능했는데, 엉뚱한 것에 줄을 쳐놓은 느낌이 확 들었다. 이놈 대충 중요한 것처럼 보이는 거에 줄 막 쳐놓은 거 아니야? 모르겠다. 일단 제출하는 것이 우선이다. 아무리 쓰레기처럼 해놓아도 일단 제출만 하면 기본 점수는 주겠지. 쪽지시험은 대충 헛소리 적어서 분량만 어떻게든 맞추어보려고 노력을 하구.


 "라키사! 여기야!"

 "안녕."

 "너 과제 했어?"

 "응."

 "내가 과제한 것 좀 봐줄래?"


 감비르가 책에 줄쳐놓은 것을 다 베끼고 담배에 불을 붙이려는데 라키사가 보였다. 수업 시작 10분 전에 맞추어서 등교를 했다. 라키사에게 내가 한 과제를 건네주었다. 첫 장을 보자마자 미간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감비르 이 새끼 과제를 대체 어떻게 한 거야?


 "너 진짜 이거 제출할 거야?"

 "응. 뭐 문제 있어?"

 "너 이거 제출하면 교수님 노발대발할텐데?"

 "그래도 일단 제출한 데에 의의를 두려고."

 "너 책 안 읽었지?"

 "응?"

 "네가 쓴 거, 책에서 정말 안 중요한 내용들 투성이야!"


 감비르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그래, 감비르, 같이 죽자. 길동무가 생겨서 너무나 행복하네.


 "너가 한 과제 좀 볼 수 있어?"

 "응."


 라키사가 가방에서 과제를 꺼내어서 건네주었다. 감비르와 라키사가 한 과제를 읽기 시작했다. 아, 교수가 읽어오라고 한 부분이 이런 내용이었구나! 내용이 쉽지는 않았지만 마딜어로 되어 있어서 읽고 이해할 수는 있었다.


 "이제 과제 돌려줄래? 곧 수업 시작하잖아."

 "응. 고마워. 이따 점심 우리가 살께."

 "아니, 괜찮아."


 강의실로 들어갔다. 라키사는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맨 앞에 앉았다. 나와 감비르는 라키사 바로 뒤에 앉았다. 라키사야 공부를 열심히 하기 때문에 수업 잘 들으려고 맨 앞에 앉는 것이지만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수업을 못 들으면 아예 수업을 못 쫓아가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듣기 위해 앞에 앉는 거다. 책을 펼쳤다. 이 망할 책은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나를 분노하게 만든다.



 수업이 끝났다. 라키사는 도서관에 가서 책을 찾아보아야 한다며 먼저 갔다. 감비르와 햇볕에 뜨뜻하게 데워진 벤치에 앉았다. 날이 참 좋구나. 내 마음도 이렇게 맑았으면 좋겠다. 감비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나도 기분이 참 엉망인데 이녀석도 마찬가지일 거다. 괜찮아. 그래도 혼자 망한 거 아니잖아. 교수에게 하루 이틀 혼나는 것도 아니구. 같이 혼나서 다행이야. 혼자 혼났다면 정말 끔찍했을 건데. 감비르가 한숨을 푹 쉬더니 입을 열었다.


 "진짜 다시 다른 과로 입학해야 하나?"

 "왜?"

 "너는 여기 맞냐? 나는 죽어도 못 하겠다."

 "다른 과 간다고 뭐 달라지겠냐."

 "저주술 다루는 학과로 가면 거긴 마딜어만 사용하지 않을까?"

 "거기는 거기대로 머리 빠개질걸."

 "망할 교수! 우리 괴롭힐 시간에 책이나 번역하라구!"


 감비르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쥔다. 머리를 있는 힘껏 벅벅 긁는다. 너나 나나 왜 이렇게 대륙공통어와 아드라스어를 지지리 못 하냐. 나름 노력한다고 하는데 이건 노력으로 될 일이 아니다. 오늘도 수업시간에 교수는 나와 감비르에게 일어나라고 했다. 그리고 제발 공부 좀 하라고 하면서 답안지가 이게 뭐냐고 소리쳤다. 예, 교수님. 저희 공부했어요. 공부하려 노력 많이 했어요. 그런데 대륙공통어, 아드라스어가 우리가 공부하는 것과 대체 무슨 상관인가요. 어제도 거의 밤새다시피하며 책을 봤어요. 하지만 아무리 사전 찾아가며 읽어도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어요. 이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 했지만 꾹 참았다.


 "너는 여기 왜 들어왔냐?"

 "나? 나야 이 나라 떠나려구. 너는?"

 "아...모르겠다."


 감비르가 내게 왜 이 학과를 들어왔냐고 물어보자 이 나라를 떠나기 위해 들어왔다고 대답했다. 왠지 이 학과에 입학하면 다른 나라로 떠날 길이 보일 것 같았다. 그런데 다른 나라로 떠나기는 고사하고 이 학과를 무사히 졸업이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농담이 아니라 너무나 진지하게. 교수가 수업은 마딜어로 해 주어서 수업 내용은 알겠다. 그런데 교재가 전부 대륙공통어와 아드라스어로 된 책들이다. 당연히 과제는 엉망. 과제를 통해 보는 쪽지시험도 엉망. 이 과목 시험을 제대로 칠 수 있을지나 의문이다. 책을 읽어야 시험을 치지.


 "라키사는 어떻게 그렇게 공부를 잘하지?"

 "걔 열심히 하잖아."

 "우리는 뭐 맨날 노냐?"

 "걔는 외국어로 된 책도 술술 보잖아."

 "걔는 어떻게 외국어를 그렇게 잘 하지?"

 "글쎄? 자기 말로는 외국에 가본 적도 없다고 하던데..."

 "여자라서 그런가? 여자들은 외국어 더 잘 배운다잖아."

 "글쎄다..."


 감비르 말 대로 라키사가 여자라서 외국어를 잘 하는 걸까? 그런데 꼭 그렇지는 않을 거다. 남학생이고 여학생이고 대륙공통어와 아드라스어를 참 잘 한다. 우리만 그 언어들에 심한 거부 반응이 있는 거지. 게다가 우리는 그 외국어들이 전공도 아니다.


 단발 머리에 긴 바지에 샌들을 신은 여학생이 우리쪽으로 다가온다. 아다비아였다.


 "너희들 여기서 뭐해?"

 "숨쉰다."

 "그럴 시간에 공부라도 좀 더 하는 것 어떠니?"


쟤는 꼭 말을 참 밉게 해. '너나 공부 많이 하세요' 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참았다. 아다비아가 라키사 다음으로 우리 과에서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이니까.


 "네가 도와주게?"

 "나? 너희들이 원한다면...그런데 나 3시까지는 내 공부 해야 해. 그 이후라면 도와줄께."

 "아...우리는 3시에 학교에 없어."

 "그러면 어쩔 수 없네. 나중에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봐. 나 갈께!"


 아다비아는 손을 흔들고 도서관으로 갔다. 감비르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야, 너 아다비아한테 도와달라고 해! 나야 그때 서점에서 일한다지만 너는 상관 없잖아?"

 "너 같으면 쟤한테 도움받고 싶겠냐?"

 "낙제 받는 거보다야 낫잖아!"

 "싫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낙제를 받고 말지."

 "학교 쫓겨나는 것보다 아다비아한테 도움받는 게 더 싫은 거냐?"

 "그걸 말이라고 하냐? 보나마나 알려줄 때 잘난 척 엄청 할텐데..."


 이놈은 아까는 자퇴할까 고민이라더만 정작 아다비아가 도와준다니까 자존심 세우네? 자퇴를 고민할 바에는 아다비아에게 공부 좀 도와달라고 하는 게 훨씬 나을 건데. 나야 아다비아가 된다고 하는 시간에는 일해야 해서 별 수 없지만. 감비르는 아다비아가 그렇게 싫은가? 아다비아가 말은 참 밉게 할 때가 종종 있지만 성격 자체가 나쁜 거 같지는 않은데.


 "나 간다."

 "점심 같이 먹고 가! 너 오늘 3시부터 일하잖아."

 "돌아가서 잠깐 눈 좀 붙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비르와 같이 햇볕 쬐며 앉아있어봐야 달라질 것도 없다. 어제 잠을 별로 못 잤으니 서점 돌아가서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고 일어나야겠다. 그게 더 생산적이니까.



 아무 생각 없이 멍한 상태로 걸어갔다. 햇볕이 참 따스하다. 공부고 일이고 다 던져버리고 햇볕 쬐며 하루 종일 잠이나 자고 싶다. 그래도 할 건 해야지. 서점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고가 깜짝 놀랐다.


 "어? 왜 벌써 와?"

 "잠깐 잠 좀 자려구."

 "그래. 어제 잠 못 자는 거 같던데."


 방으로 들어가 가방을 던지고 내 자리에 가서 벌러덩 드러누웠다. 라키사랑 아다비아는 열심히 공부중이겠지. 감비르 이 녀석은 공부 할 건가? 왠지 지금 엉뚱한 짓 하고 있을 거 같은데. 모르겠다. 걔들은 걔들이고, 나는 일단 눈을 조금 붙여야 한다. 제발 교수가 오늘 학생들이 제출한 과제 싹 다 잃어버려라. 그 정도의 기적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내가 제출한 과제물을 보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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