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복습의 시간 (2016)

복습의 시간 - 41 중국 쿠차 그랜드 모스크 库车大寺 Grand Mosque in Kucha

좀좀이 2016. 9. 27.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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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볼만하겠는데?"


库车大寺


밋밋한 흙빛 벽돌로 지은 거대한 입구. 이것은 들어가야 했어요. 아니, 들어가야만 했어요. 이 동네에서 볼 만한 것이 이것 외에 이제 더 이상 없을 거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어요. 왕궁은 60위안이라 못 들어갔어요. 이것마저 들어가지 않으면 여기에서 특별히 들어가서 본 것 자체가 없어요. 모스크야 여기도 여러 개 있을 거에요. 들어가서 잠시 쉴 겸 하며 모스크를 계속 들어가보기야 하겠지만, 정말 볼 만한 것 가운데 남은 것은 이제 하나 뿐이었어요.


문 옆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었어요.



중국어로는 库车大寺 라고 적혀 있었고, 위구르어로는 kucha xanqasi 라고 적혀 있었어요. xaniqa 는 큰 모스크를 말해요. 이 모스크는 이름 자체가 '쿠차 큰 모스크'였어요. 영어로는 그랜드 모스크. 무언가 다른 명칭이 더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았어요. 이렇게 이름이 새겨진 비석까지 세워져 있다면 분명히 들어가볼만한 모스크였어요. 사실 이렇게 이것저것 따져가면서 들어가서 볼만한지 안 볼만한지 계산해볼 필요가 없었어요. 눈에 보이는 것이 일단 다른 모스크보다 컸고, 특별히 들어가볼 만한 것이라고는 이것 밖에 없었으며, 지금 이 상황에서 쉴 만한 곳은 모스크 뿐이었거든요.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위구르인 아주머니가 들어가지 말라고 소리치더니 오라고 손짓했어요.


'여기 들어가면 안 되는 유적인가?'


아주머니가 오라고 했기 때문에 아주머니에게 갔어요.


"너희 입장료 내고 들어가야 해."

"입장료 얼마에요?"

"한 사람당 15위안."


친구 얼굴을 보니 표정이 굳어 있었어요. 저도 고민이 되었어요. 15위안. 3천원 조금 안 되는 돈. 일단 금액은 부담되는 금액이 아니었어요. 중요한 것은 모스크 보러 들어가는데 돈을 내야 한다는 것. 절, 성당, 모스크 구경하는 것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입장료가 없을 때 이야기. 돈 내고 절, 성당, 모스크 구경하는 것은 저도 썩 좋아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저는 유료로 돈 내고 들어가서 깊이 감상할 능력이 없거든요. 건축양식을 깊게 공부한 것도 아니고, 신앙 교리에 대해 깊이 잘 아는 것도 아니에요. 제 관람 수준은 그저 예전에 보아왔던 것들과 비교하면서 공통점과 차이점 찾아내기 수준. 그 이상 더 자세하고 깊이있게 보며 음미할 능력은 없어요.


'그래도 여기조차 안 들어가면 여기서 볼 만한 거 들어가보는 거 아무 것도 없잖아.'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안 들어갔을 거에요. 포도를 따먹지 못한 여우가 저건 시고 떫은 포도일 거라고 욕하고 떠나가듯 저거 어차피 15위안 내고 들어가봐야 볼 거 없을 거라고 자기합리화를 하려고 했을 거에요. 그런데 이번은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었어요. 진짜로 이게 마지막. 천산신비대협곡 버렸고, 쿠차왕궁도 버렸다. 이거까지 버리면 이제 뭘 더 포기해야 되지? 진지하게 생각해야만 했어요. 이것조차 안 들어가면 앞으로 여기에서 특별히 들어가서 구경할 만한 것이 그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었어요. 아무리 카슈가르에서 류위안까지 직통으로 가는 기차가 없어서 기차를 갈아타기 위해 하루 들리는 곳이라지만 이렇게 하루종일 길만 걷다가 떠나고 싶지는 않았어요. 좋게 말해서 하루 종일 길만 걷는 것이지, 실상 이 동네만 계속 뱅글뱅글 돌아야 했어요. 아무 버스나 잡아타고 멀리 갈 수도 없었어요. 짐이 온몸을 짓누르고 있었으니까요.


쿠차에서 뭐 하나라도 제대로 된 거 보고 갈 것인가, 하루 종일 동네만 뱅뱅 돌다가 떠날 것인가.


"너는 어떻할래?"

"나는 안 들어갈래."


친구가 단호히 안 들어가겠다고 대답했어요.


"그러면 나 혼자 들어갔다 나온다."

"꼭 들어가야 돼?"

"저거 안 보면 우리 여기서 뭐 보냐? 저거라도 봐야지."


친구는 아무 말이 없었어요. 친구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어요. 친구가 하고 싶어한 말은 바로 '그냥 빨리 가자' 였어요.


"너는 들어가기 싫으면 여기에서 쉬고 있어. 나 혼자 들어갔다 올께."

"응."


친구가 떨떠름하게 대답했어요. 친구의 반응은 그냥 깔끔하게 신경쓰지 않았어요. 여기서 친구의 반응에 신경쓰며 반응하다가는 소리치며 화낼 거 같았거든요. 친구가 원하는 '누워서 쉴 곳'은 아예 없었어요. 누워서 쉴 곳은 고사하고 앉아서 쉴 곳조차 마땅히 없어서 계속 걷고 있었어요.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고 다 싫고 그저 쉬는 게 좋으니 무턱대고 쉴 곳 찾아 빨리 가자고 쉬지 않고 계속 졸라대는 친구 때문에 짜증이 폭발할까 말까 하는 상황이었어요. 만약 쉴 만한 곳이 진짜 있다면 그렇게까지 짜증이 나지 않고 친구의 말이 타당한 의견이라고 생각했을 거에요. 그러나 진짜 쉴 만한 곳이 없었어요. 지금 가는 방향은 처음 버스 내린 방향쪽으로 돌아가는 방향이었어요. 이 길의 끝은 결국 버스에서 내린 그 정거장 근처. 그쪽에 돈 안 내고 쉴 만한 곳이 없었어요. 이것은 추측이 아니라 아까 오면서 본 것이에요. 친구 말대로 따라가다가는 결국 힘들고 지쳐서 쓰러져버릴 것이 뻔했고, 이런 친구를 끌고 최악의 결과를 피해가며 다니자니 친구가 옆에서 계속 찡찡거리며 쉬자고 떼써서 짜증이 폭발하려 하고 있었어요. 게다가 지금 친구가 요구하는 것은 그냥 앉아서 쉬는 곳도 아니고 누워서 쉬는 곳이었어요.


친구는 순전히 모스크 돈 내고 들어가기 싫다고 안 들어간 것이었지만, 이 선택이 지금 이 순간 가장 좋은 선택이었어요. 지금 친구에게 필요한 것은 일단 쉬는 것. 바닥에 주저앉아서라도 쉬어야 했어요. 친구가 악의를 갖고 제가 화나는 꼴을 보려고 계속 징징거리는 것은 아니었어요. 진짜로 힘드니까 힘들고 누워서 쉬고 싶다고 떼쓰는 것이었어요. 누워서 쉴 수는 없겠지만 일단 앉아서라도 쉬어야 했어요. 강제로 앉혀서라도 일단 쉬게 만들어야 하던 차에 참 잘 되었어요. 친구의 체력이 조금이라도 돌아오면 계속 대책없이 떼쓰는 짓은 덜 할 것이고, 그러면 저의 짜증도 가라앉을 거에요. 그리고 그동안 어떻게든 누워서 쉴 만한 곳을 찾아내면 되었어요.


"너 여기에서 앉아서 쉬고 있어. 그리고 나 여기에 가방 풀고 간다."

"어."


친구가 나무 그늘 아래로 들어가서 앉았어요. 저도 가방을 푸르니 조금 살 거 같았어요. 친구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무 아래에 앉아서 쉬기 시작하는 것을 보며 나무 옆 아주 작은 경비실 같은 곳에 앉아 있는 위구르인 아주머니에게 갔어요.


"안녕하세요."

"응."

"저는 한국인이고, 우즈베키스탄에서 우즈베크어와 우즈베키스탄 문화를 공부했어요. 제가 이쪽에 관심이 많아서 저 안에 들어가고 싶어요. 그런데 돈이 충분하지 않아요. 혹시 깎아주실 수 있으세요?"

"20위안."

"예?"


입장료가 1인당 15위안인데 아주머니께 입장료 깎아달라고 사정했더니 오히려 20위안으로 5위안 비싸졌어요.


이 아줌마, 무슨 벤저민 프랭클린 환생이야? 밴저민 프랭클린이 환생해서 지금 히잡 쓰고 위구르어 하면서 자기 시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거야?


벤저민 프랭클린이 서점 점원으로 일할 때 손님이 책값을 물어볼 때마다 자신의 독서하는 시간을 빼앗은 값까지 붙여서 더 높은 값을 불렀다는 일화가 떠오르는 순간이었어요. 왜 입장료를 조금 깎아달라고 사정했더니 오히려 가격이 5위안 더 비싸져? 아주머니께 가격을 다시 물어보았어요. 20위안이라고 했어요. 지금 한국에서 왔다고 5위안 더 내라는 거야? 15위안은 한족들이 내는 요금이고 20위안은 외국인들이 내는 요금이야? 그래서 왜 더 비싸졌냐고 물어보았어요. 그러자 아주머니께서 2명에 20위안이라고 대답했어요.


"아니에요. 쟤는 안 들어가요. 저 혼자 들어가요."

"10위안."


우즈베크어로 사정해 입장료 15위안 중 5위안을 깎아서 10위안만 내었어요. 여행 가기 전에 외국어 조금 공부하고 가면 돈이 나오냐고 하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이렇게 진짜 돈이 나올 때도 있어요.


10위안을 내고 모스크 안으로 들어갔어요. 안에 들어가자마자 모스크에 대한 설명이 있었어요. 이 모스크는 1559년에 건설되었고, 1668년에 확장 공사가 마무리되었으며, 이후 1726년 대대적인 보수 공사가 있었대요. 1925년 6월 화재로 큰 피해를 입어서 1928년에 재건축을 시작, 1932년에 완공되었대요. 1998년 리히터 규모 5.4의 강진이 발생해 모스크 전반에 피해가 발생했고, 2003년부터 2004년까지 200만 위안을 들여서 수리했다요. 이 모스크는 3000명이 예배를 드릴 수 있으며, 이드카 모스크 다음으로 큰 모스크라고 해요. 모스크 본당은 외부 홀과 내부 홀 - 이렇게 2중 구조인데 외부 홀에는 목조 기둥이 84개 있고, 내부 홀에는 목조 기둥이 4개 있대요. 그리고 위구르어로 정식 명칭은 Kucha xaniqa jamesi 였어요.


입구를 통과해 설명을 읽은 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포도 덩쿨이 만들어내는 그늘이었어요.


신장 위구르 지역 포도 덩쿨


6월달이었기 때문에 이제 포도알이 맺혀서 커가고 있었어요.



모스크 안에는 커다란 솥과 아궁이가 있었어요.



솥과 아궁이를 보고 모스크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았어요.


"여기 무슨 아프간이야?"


중국 위구르인 현실


이건 그냥 폐허였어요. 아프가니스탄은 언젠가 반드시 가보고 싶은 나라. 그래서 가끔 아프가니스탄 사진 및 뉴스를 검색해서 보곤 해요. 그때 본 황량하고 척박한 폐허가 된 아프가니스탄 풍경과 흡사했어요.


이것은 모스크 본당 건물 정면이에요.



이것은 이 모스크의 부속시설이에요.



내부는 이렇게 생겼어요.



이것이 바로 제가 통과한 쿠차 카느카 모스크의 입구에요.


중국 큰 모스크


측면에서 보면 쿠차 그랜드 모스크는 이런 건물이에요.


Grand Mosque in Kucha


"이제 들어가야지."


Hanika Mescit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어요.


중국 쿠차 그랜드 모스크


쿠차대사




외부 홀의 천장을 찍기 위해 바닥에 앉았어요.



못 일어나겠다.


바닥에 주저앉으니 다리가 풀려버렸어요. 밖은 불지옥이었지만 여기는 그늘져서 시원했어요. 바닥에 카펫이 깔려 있어서 드러눕고 싶었어요. 친구가 여기 따라들어왔다면 여기에서 그래도 조금 더 편하게 쉴 수 있었을 거에요. 그리고 저도 편히 쉴 수 있었을 거에요. 두 다리를 뻗고 앉아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어요. 밖에서 기다리는 친구를 생각해 어서 일어나야 하는데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어요. 온몸이 힘들어서 빠릿빠릿하게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어기적 어기적 일어나 내부 홀로 갔어요.



내부 홀 입구에는 무슬림들이 염주처럼 사용하는 종교 도구인 미스바하가 놓여 있었어요.


위구르 이슬람 미스바하



내부 홀 내부는 상당히 어두웠어요. 내부 홀은 이렇게 생겼어요.



사진 정면에 있는 아치형 문처럼 생긴 것이 예배 방향을 알려주는 미흐랍이고, 미흐랍 오른쪽에 있는 의자처럼 생긴 것이 민바르에요. 미흐랍 기준으로 양 옆으로 나무 기둥이 두 개 있어요.



사선에서 바라보면 이렇게 내부 홀에 나무 기둥이 4개 있는 것이 보여요. 사진에는 3개만 찍혔지만요.


내부 홀을 본 후 다시 외부 홀 사진을 찍으며 본당을 빠져나왔어요.



중국 쿠차 그랜드 모스크 库车大寺


이것들이 바로 외부 홀에 있는 나무 기둥 84개에 속하는 나무 기둥들이에요. 나무 기둥이 84개 있다는 것 외에는 그렇게 큰 의미가 없었어요.


본당에서 나와 신발을 다시 신고 안뜰을 돌아다녔어요.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 여행


위구르인 이슬람


중국 위구르인 종교 문화


입구 옆에는 침대가 두 개 있었어요.



"걔한테 여기 들어와서 나 구경하는 동안 여기 누워서 잠이나 자라고 할 걸 그랬나?"


만약 여기 이렇게 침대가 있다는 것을 들어오기 전에 알았다면 친구를 어떻게든 끌고 들어왔을 거에요. 그 다음에 친구한테 여기 앉든가 눕든가 알아서 쉬고 있으라고 하고 저는 모스크를 보다 훨씬 더 자세히 감상했을 거에요. 그랬다면 친구도 보다 편히 쉬고 저도 보다 느긋하게 모스크를 구경할 수 있었겠죠. 그러나 이제야 여기 침대 두 개가 굴러다니고 있다는 것을 알아버렸어요. 이제는 다 부질없는 이야기였어요.


"저 구석에 표지판 뭐야?"



진짜 보고서 어이없어서 입이 쩍 벌어졌어요. 위에 아랍 문자를 차용해 표기하는 위구르어를 읽을 필요가 없었어요. 중국 간체로 적힌 내용만 보아도 무슨 내용인지 이해할 수 있었거든요.


이건 해도해도 너무했어요. 모스크가 무슨 퇴폐의 장이야? 이게 무슨 음란물, 유해매체야? 살다살다 모스크가 18금인 건 또 처음보네. 이건 대체 뭐 어떻게 받아들이라는 거야? 여자가 여기에서 예배를 볼 수 없는 것은 그러려니 할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이슬람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뒤섞여서 예배드리지 못하게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남자용 기도공간과 여자용 기도공간이 분리되어 있는데, 아무래도 여성 인권이 현대 서구 사회만큼 많이 신장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여성 기도실은 볼품없는 편이고 본당은 남성 기도실인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또는 아예 남자용 모스크와 여자용 모스크를 따로 지어놓거나요. 하지만 이건 성인 남성 외에는 아무도 안된다는 것이었어요.


partiye ezaliri, dolet kadirliri, ayallar, qoramigha yetmigenler meschitke kirish, pa'aliyet elip berish qet'i men'i qilinidu.

당원, 국가 간부, 여성, 미성년자는 모스크 입장, 예배드리는 것이 강력히 금지되어 있다

党员,国家干部,妇女,未成年人不允许进淸真寺参与宗教活动

당원, 국가 간부, 여성, 미성년자는 모스크에 들어가 종교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불허한다


이것 뿐만이 아니었어요. 위구르어와 중국어가 말하는 내용이 뭔가 달라 보였어요. 중국어를 잘 모르지만 중국어에서 말하는 것은 '모스크에 들어가 종교활동에 참여하는 것'인 것 같은데, 위구르어를 보면 들어가는 것과 종교활동에 참가하는 것 둘 다 금지한다는 내용이었어요. 위의 라틴 문자로 적은 것은 위구르어를 라틴 문자로 적은 것이고, 아래는 중국어에요. 중국어를 잘 모르니 정확히 말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히 이상하기는 했어요.


이 구석에 처박혀 있는 입간판을 읽어본 후 출구로 나가려는데 혹시나가 역시나였어요.



저 거대한 슬로건 아래에는 비합법적인 종교 활동 26가지를 알리는 벽보가 붙어 있었어요.


중국 정부가 금지한 종교 활동 26개 표현


이제는 놀랍지도 않아.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들어온 것이 2016년 5월 30일. 그러므로 오늘은 2016년 6월 5일이니까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머무른지 정확히 일주일째 되는 날, 처음에는 저런 것을 보며 상당히 충격을 받았지만, 일주일간 쉴 새 없이 저런 것을 접하다보니 이제는 적응이 되어버렸어요. 너무 많이 봐서 사진으로 다 찍을 수도 없었어요. 처음에야 신기하고 놀라워서 열심히 사진을 찍었지만 나중에 가서는 그냥 '또 이런 것이 있구나' 하며 넘어갔어요. 방에서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찾는 것처럼 눈을 돌리기만 하면 이런 것이 곳곳에 있었어요. 하루에 한 개씩 발견했다면 이것을 보고 또 깜짝 놀랐겠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곳곳에서 계속 보아대다보니 너무 익숙해져버렸어요.


모스크에서 나왔어요.



고개를 옆으로 돌렸어요.



저 멀리 고층 빌딩이 바로 한족들이 사는 곳. 그리고 이 앞의 판자촌 같은 곳이 바로 위구르인들이 사는 곳.


모스크에서 나오자 아주머니와 어린 여자아이가 저를 불렀어요. 여자아이는 중국어로 무언가 이야기하면서 갑자기 종이를 들이밀었어요.


"너 위구르어 알아?"

"예."


저는 당연히 중국어를 잘 몰랐어요. 여자아이가 중국어로 말한 것을 당연히 알아들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위구르어 아냐고 물어보자 당연하다는 듯이 위구르어 안다고 대답했어요. 여자아이는 위구르어로 제게 무언가 쓰라고 했어요. 무엇을 쓰라고 하는 것인지 보니 모스크 안에 들어간 사람 명부에 제 이름과 전화번호 등을 적으라는 것이었어요. 아주머니와 옆에 있는 할아버지는 중국어를 못 했고, 여자아이는 중국어를 더듬더듬 할 수 있었어요. 제 이름과 국적 등을 명부에 적고, 저는 여행중이라 전화번호가 없다고 말하고 전화번호는 적지 않았어요. 진짜로 중국에서 심카드를 구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 전화번호가 없었어요.


"야, 가자."


친구에게 가서 가방을 짊어지며 말했어요. 친구는 입이 잔뜩 튀어나와 있었어요.


"너 무슨 모스크 보는데 30분이나 걸리냐?"

"뭐?"

"무슨 인터스텔라야? 너 안에서 무슨 일 생겼나 걱정했잖아."

"뭔 소리야? 내가 아까 들어가기 전에 너 여기서 쉬고 있으라고 했잖아!"


그러자 친구가 정말로 기분 확 상하게 만드는 말을 했어요.


"나 모스크 보기 싫어. 너는 어떨지 몰라도 내 눈에는 다 똑같단 말이야. 게다가 너는 보는데 오래 걸리잖아. 모스크 지겨워."


이놈 도대체 왜 이러냐?


10초간 진지하게 고민했어요. 친구가 지금 별 생각없이 느끼는 대로 솔직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알겠는데, 상황 봐가면서 말을 해야 했어요. 지금 이 상황은 모스크를 가자고 모스크로만 친구를 끌고 다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우루무치, 카슈가르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뭔가 딱 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해야 거기에 맞추어주든가 하는데, 이건 그냥 다 싫다고 했어요. 이러니 매일, 매 순간 일정을 고민할 때 어떻게 친구 의견을 반영시킬 방법이 없었어요. 하고 싶은 것이 있어야 계획을 짤 때 어떻게 반영을 하고 친구에게 맞추어주든가 하는데, 그냥 만사 다 싫다는 것이었거든요.


게다가 옆에서 계속 피곤하고 쉬고 싶다고 하도 떼써서 분명히 모스크 앞에서 쉬고 있으라고 말하고 들어갔어요. 제가 무슨 시진핑도 아니고 길거리에서 쉴 만한 자리를 즉석에서 만들어낼 능력은 없어요. 그나마 쉴 수 있는 자리가 모스크 뿐이었어요. 모스크 및 모스크 앞 나무 그늘 아래를 제외하고는 쉴 만한 곳이 진짜 아무 곳도 없었어요. 친구가 원하는 누워서 쉴 만한 곳은 고사하고 여기까지 오면서 앉아서 쉴 만한 곳조차 마땅히 없었던 것이 현실이었어요.


에휴. 그냥 참자.


악의를 가지고 말한 것은 아니니 그냥 넘어가기로 했어요. 한 마디 할까 하다가 지금 한 마디 하기 시작하면 한 마디로 절대 안 끝날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어요. 입을 열고 말을 시작하면 좋은 소리가 나올 수가 없었어요. 당연히 네가 계속 옆에서 힘들고 쉬고 싶다고 징징대는 거 진심으로 짜증난다는 말까지 갈 거고,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어디 한 번 네가 앞장서서 누울 자리 찾아보라고 소리칠 거였어요. 그 다음은? 당연히 파국적 결말. 친구가 같이 소리쳐서 말싸움하며 그나마 풀린 피로 다시 쫙쫙 기하급수적으로 쌓아가든가, 아니면 친구가 자기가 앞장서겠다고 하다가 하루 종일 이곳 안에서 뱅뱅 돌며 걷다 버스 타고 기차역 돌아가서 자정 넘어서까지 멍하니 시간만 죽이든가 할 것이었어요.


그래도 다행히 친구의 상태가 많이 좋아졌어요. 피곤하다, 쉬고 싶다는 말이 싹 사라졌어요. 저도 가방을 내려놓고 30분간 있었더니 피로가 많이 가셨어요. 모스크 들어가기 직전에는 짜증이 목까지 올라와 있었는데 이제 다시 정상적인 위치까지 뚝 떨어졌어요. 시간도 아주 적당히 잘 보내서 시장 가서 점심 먹기 적합한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어요. 시장 가서 밥 먹고 시장 구경 좀 하다가 그나마 누워서 잠을 청할 수 있을 만한 곳을 골라서 가면 이 막막한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최악의 상황 - 즉 이곳에 돗자리 깔고 드러누울 곳이 단 한 곳도 없다면 아예 여기에서 저녁을 안 먹어도 되도록 배가 터질 때까지 잔뜩 먹은 후 외뤽자를륵 공원이나 쿠차 기차역으로 가서 돗자리 깔고 드러누울 생각이었어요. 친구에게 특별히 강조해서 말하지는 않았지만 저도 반드시 드러누워서 쉬고 싶었거든요.


중국 쿠차 그랜드 모스크 库车大寺 Grand Mosque in Kucha


"야, 이거 봐라."

"뭔데? 빨리 가자."

"와서 한 번 봐봐."



친구는 충격을 받고 할 말을 잃어버렸어요.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어요. 길을 따라 쭉 걸어가다 하천이 나오면 거기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서 걸어가야 했어요. 그렇게 가면 시장이 나와요. 그 시장에서 점심을 먹을 계획이었어요.





주변을 계속 둘러보던 친구가 말했어요.


"진짜 이건 심하다."



친구의 말을 듣고 저도 한 마디 했어요.


"일제강점기때 우리나라가 이러지 않았을 건가? 일본인이랑 몇몇 친일파는 좋은 곳에서 살고, 조선인들은 쓰러져가는 초가집에서 살구."


그동안 신장 위구르 자치구를 돌아다니며 여기가 과거 소련 시절 우즈베크인들의 모습을 보는 것 아닌가 생각했어요. 그러다 문득 나는 왜 여기 위구르인들에게 동정심을 느끼고 한족에게 적개심을 느끼는지 궁금해졌어요. 분명히 좋은 한족들도 많을 거에요. 카슈가르 가는 기차에서 꼬장 부리려다 구석에 찌그러져 앉은 한족 상인 말고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 와서 한족들이 제게 특별히 기분 나쁘게 한 것은 없었어요. 오히려 한족들의 도움과 친절을 받기도 했어요. 단순히 우즈베키스탄에서 보았던 우즈베크인과 러시아인 때문에? 조금 더 생각해보면, 그때는 왜 우즈베크어를 못 하는 우즈베키스탄의 러시아인들을 싫어했지? 우즈베크어를 모르고 배울 생각도 안 하는 우즈베키스탄의 러시아인들, 그리고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한족이 싫은 이유는?


히키아게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일본은 자신들의 식민지로 일본인들을 이민시켰어요. 일본 내부 빈곤 문제 및 사회 문제도 해결하고, 식민 지배를 공고히 하려는 목적으로 보낸 이민이었어요. 이들의 출신은 본토에서 먹고 살기 힘들어서 식민지로 넘어온 사람들 및 제국주의에 동참하던 일본 대기업의 회사원과 가족들, 군인의 가족들이었어요. 당연히 이들은 식민지에서는 지배 계층으로 생활했어요. 그러다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고 식민지들이 독립하면서 이들은 실상 추방당했고, 이런 이유로 식민지에서 잘 살다 일본으로 다시 쫓겨난 사람들을 '히키아게샤'라고 해요.


당연히 우리나라도 해당되요. 우리나라로 넘어온 일본인들도 많으니까요. 일본인 교사, 일본인 순사, 일본인 지주 등을 다양한 경로로 상당히 많이 듣고 읽어서 알고 있어요. 미군정이 일괄송환시키지 않았다면 그들 중 꽤 많은 수가 대한민국에 정착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중상류층 가문을 구성하고 있었을 거에요. 딱 현재 동남아시아에서 화교들의 지위에 해당될 거에요.


만약 일제강점기때 서양인이 당시 조선을 여행했다고 해보자. 귀축영미 무찌르고 대동아공영권 구축하자고 부르짖던 태평양 전쟁 발발 이전에 말이야. 일본인들도 서양 백인에 대해서는 특히 더 굽실거리는 문화가 있으니 아마 엄청나게 깍듯이 대했을 거다. 그 서양인은 그런 일본인들 보면서 정말 착하고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겠지. 일본인들이 사는 마을은 상당히 현대적이고 깔끔하지만 조선인들이 사는 마을은 처참했을 거다. 그 서양인이 조선인들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일본인들 보다가 조선인 보면 무지몽매 미개하며 미신에 빠져 사는 인간들이라고 혀를 쯧쯧 찼겠지. 몇몇 친일파 만나면서 일본 점령 이전에는 더 처참했는데 일본이 점령한 후 그나마 이만큼이라도 제대로 된 인간 사는 세상으로 바뀐 것이라고 확신할 거다. 근대화되어가고 사회간접자본이 확충되고 각종 산업이 발달하고 신식 건물들이 세워지는 모습 보며 일본 덕분에 조선도 살 만한 땅이 되어간다고 굳게 믿게 될 거다. 고국으로 돌아가 자신의 지인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겠지? '조선은 아름다운 곳이었다. 일본인들은 정말 착하고 좋았다. 일본은 조선을 근대화시켜주고 있다. 일본인과 조선인들이 화목하게 잘 지내었으면 좋겠다. 아직 조선인들은 미개해서 조금 조심해야 한다' 라고 말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에서 살던 일본인들이 모두 나쁜 일본인은 아니었을 것이고, 조선땅에서 태어나 조선이 고향인 일본인들도 많았어요. 우리는 이미 알고 있어요. 일제강점기 조선땅에서 살던 일본인들 각각이 착하든 나쁘든을 떠나서 이들이 일본의 조선 식민 지배를 공고화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는 것이요. 그리고 아주 어렸을 적부터 '일제강점기'에 대해 너무나 많이 접해왔기 때문에 우리들 모두 이것을 잘 알고 있어요.


나는 지금 일제강점기 조선땅을 여행하고 있는 건가?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살고 있는 한족 중 착한 한족이든 나쁜 한족이든 결국 모든 한족이 중국 정부의 위구르인 땅 지배 강화의 첨병 역할을 하고 있어요. 중앙아시아에서는 소련이 러시아인들을 그런 목적으로 보냈고,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이 조선땅에 일본인들을 그런 목적으로 보냈어요. 국사(하) 교과서 일제강점기 1920년대 문화통치시기 속으로 뛰어들어간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발전하고 번영하는 한족 거주지. 그리고 판자촌 우범지역 같은 위구르인 거주지. 중국어의 보급 노력과 중국인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들.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한족 및 한족 거주지를 꼴도 보기 싫은 것은 이런 것들이 무의식 속에서 겹쳐보이기 때문 아닐까. 머리로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를 보고 있는데 마음으로는 일제강점기도 동시에 보고 있는 것 아닐까.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 여행기


하천에서는 아이들이 놀고 있었어요.



"쟤들 저렇게 더러운 데에서 그냥 노네."


친구는 아이들을 보며 안타까워했어요.


"우리 아래로 내려가볼래? 계단 있다."

"한 번 내려가보자."


친구에게 하천으로 내려가보자고 말하자 친구도 그러자고 했어요.



중국 서부 여행기



비가 내린지 아주 오래되지는 않았는지 진흙에 물기가 있었어요. 아직 물이 있는 것으로 보아 비가 내린지 아주 오래되어 보이지는 않았어요.


"올라가자."


친구가 이제 그만 시장 가서 점심을 먹자고 했어요. 이제 정오가 되어가고 있었어요. 진짜로 점심을 먹을 때가 되었어요.





동네는 조용했어요. 물에서 놀던 애들은 엄마가 올라오라고 소리치자 물가 밖으로 나왔어요. 엄마는 그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갔어요.


"쟤들 혼나는 거 아니야?"

"아까 엄마 목소리 화난 거 같던데 진짜 혼날 거 같다."


이런 저런 잡담을 하며 시장을 향해 걸어갔어요. 이제 진짜 더웠어요. 해가 머리 꼭대기를 향해 많이 올라가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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