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복습의 시간 (2016)

복습의 시간 - 03 인천공항에서 발견한 귀찮음이 준 축복

좀좀이 2016. 6. 28.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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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이 인천공항에 도착할 즈음 잠에서 깨어났어요. 더 자고 싶었지만 이제 공항철도에서 내려야 했기 때문에 대충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어요. 눈을 비비고 주변을 둘러보았어요. 역시나 공항철도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승객들이 있기는 있어서 드러누울 수는 없지만, 드러누워도 될 정도로 자리가 널널했어요. 의자 하나에 두 명이 앉아 있는 경우도 보이지 않았어요.


공항철도가 드디어 인천공항에 도착했어요.



블루스크린!


한때 모든 사람들의 친구였던 블루스크린. 열심히 작업하는데 파란 나라를 보았니, 꿈과 희망의 상징 파랑새가 띡 뜨면서 정신줄 놓아버리게 만드는 바로 그 파란 세상. 파란색을 좋아하는 사람들조차 '블루'라는 말만 들어도 순간 움찔하게 만들던 바로 그것. 윈도우가 좋아지기 전에는 길거리 스크린판에서 어렵잖게 목격할 수 있었던 그 멋진 세상이었지만 요즘들어 구경하기 어려워진 그것이 저를 맞이하고 있었어요.



공항철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위로 올라갔어요. 공항철도를 타고 공항에 가는 것 역시 한두 번 해본 것이 아니다보니 이제는 신기한 것이 딱히 없었어요.



공항철도 개찰구를 빠져나오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중국어 학원 광고. 제가 중국으로 간다는 것을 알고 저 광고를 달아놓은 것은 아닐 거에요. 비록 제 여행과 아무 상관이 없는 광고였지만 너무나 훌륭한 타이밍이었어요. 솔직히 이때 '평소에 중국어를 조금이라도 더 공부해놓을 걸' 하는 생각을 아주 약간 하고 있었어요. '메이요우', '부야오' 두 마디로 버텼던 게스트하우스 매니저 생활. 중국어를 공부해보려 하기는 했지만 정신적 여유가 없어서 거의 하지 못했어요. 게다가 궁하면 길이 보인다고, 영어를 모르는 중국인들을 상대하면서 중국어 몇 마디 어설프게 할 바에는 차라리 몸으로 때우는 것이 낫다는 것을 알아버렸어요. 영어를 아는 중국인에게 아는 중국어 몇 마디 했다가는 그때부터 무슨 일이 있더라도 계속 중국어로만 말하려고 해서 아예 처음부터 중국어를 한 마디도 안 하는 것보다 더 힘들어진다는 것도 깨달았구요.


'어차피 친구가 중국어 잘 하니 상관없겠지.'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들어가면 그때부터는 우즈베크어로 어찌 비벼볼 생각이었어요. 위구르 지역 외에는 그 어떤 관심도 없었어요. 그냥 위구르 지역으로 비행기 타고 가면 비싸니까 어쩔 수 없이 거쳐가는 곳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어요. 만약 다른 지역에 관심이 있었다면 가이드북도 구입하고 이것저것 자료도 모아보고 했겠지만,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배낭과 노트북 가방만 덜렁 들고 가는 길이었어요.


Incheon int'l airport


'동생이 중국 이제 많이 바뀌었다고 하던데 진짜일까?'


중국이 변했다는 말은 많이 들었어요. 인터넷에서 대륙 시리즈가 여전히 매일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데, 그만큼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중국이라고 나오는 중국 사진도 매일 볼 수 있었어요. 친한 동생은 중국, 타이완을 매우 좋아하고, 제게 항상 둘 다 좋은 나라라고 강조하려 들었어요. 타이완은 한 번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었기 때문에 저것이 빠돌이 소리 하는 건지 진짜를 말하는 건지 대충 분간하며 들을 수 있었지만, 중국은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럴 능력이 없었어요. 동생의 중국 이야기를 들어보면 분명히 저거 빠돌이짓 하는 거 같은데, 제가 직접 중국에 가본 적이 없으니 딱히 뭐라 할 수가 없었어요.


야밤의 인천 공항을 둘러볼 필요는 아예 없었어요. 처음 인천공항에 밤새러 왔을 때는 그 한가하고 고요한 모습이 너무 신기해서 열심히 돌아다녔어요. 그때의 그 신기함은 이제 느낄 수 없었어요. 오히려 이 밤새러 가는 길에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이 있다면 더 놀라웠을 거에요. 인천공항에서 밤새는 것이 세 번째가 되니, 이제는 어서 3층 출국장 가서 자리잡고 여행 기록 좀 쓰고 쉬어야겠다는 생각 뿐이었어요.


3층 출국장으로 갔어요. 메모리 카드 잘못 가져온 것 때문에 그 어떤 사진도 찍고 싶지 않았어요. 노트북도 들고 가기 때문에 메모리 카드 용량이 부족한 것 자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메모리 카드 용량이 부족할 즈음에 노트북 하드 디스크로 사진을 옮겨담으면 되니까요. 그러나 노트북 하드디스크를 한 번 날려먹은 경험이 있어서 메모리 카드에 있는 사진을 최대한 지우지 않는 쪽으로 하고 싶었어요. 벌써 두 번이나 찍었던 인천공항의 심야시간 모습을 또 찍을 필요는 없었어요.


비수기라 그런지 출국장 자리는 매우 널널했어요. 콘센트를 많이 사용할 수 있는 자리로 가서 앉았어요. 가방을 열고 가장 먼저 핸드폰 케이블을 꽂았어요. 충전이 전혀 되지 않았어요. 혹시 고장인지 확인해보기 위해 USB 케이블을 꽂아보았어요. 역시나 충전이 되지 않았어요. 아무래도 고장난 곳 같았어요. 밤에 전자제품들을 완충 상태로 만들어놓아야 했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가서 충전을 하기로 했어요.


"왜 안 되지?"


이번에도 핸드폰 케이블을 꽂았는데 충전이 되지 않았어요. 이제 인천공항 시설도 고장나기 시작하는구나. 공항 이용객도 많고 지어진지 10년이 넘은 공항이니 이런 일이 벌어지는구나. 다른 곳으로 더 이동하기 귀찮아서 일단 자리에 앉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노트북 전원 케이블을 연결해 보았어요. 노트북 배터리가 잘 충전되었어요. 인천공항 시설 고장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시설은 멀쩡했어요.


"진짜 이번 여행은 시작부터 운이 안 따르네."


방에 핸드폰 충전잭이 2개 있었어요. 둘 다 똑같이 생겼어요. 평소 충전을 USB 케이블을 이용해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핸드폰 충전 케이블은 사용하지 않고 있었어요. USB 케이블 충전잭을 들고 왔다면 멀쩡히 잘 이용할 수 있었겠지만, 이것이 고장나면 한국에 돌아왔을 때 아주 골치아파질 것이기 때문에 들고오지 않았어요. 핸드폰 충전잭이 고장나 있었을 거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했어요. 그리고 하나는 집에서 잘 사용하고 있었어요. 알든 모르든 1/2의 확률이었는데 나쁜 쪽으로 당첨되어버렸어요.


이쯤 되면 여권과 항공권을 제대로 챙겨온 것이 너무나 고마울 지경이었어요. 비자가 제때 잘 나온 것에 이것은 축복이라 느꼈어요. 원래 여행갈 때 완벽히 준비를 잘 하고 떠난 적은 거의 없었어요. '웬만한 것은 가서 해결하면 되겠지' 생각하고 떠나서가 아니에요. 그냥 원래 꼼꼼하게 잘 챙기는 성격이 아니라 사소한 것을 종종 잘 빼먹어요. 그래도 평소에는 한 개 정도 까먹고 여행을 떠났는데, 이번에는 진짜 여권, 항공권, 옷만 들고 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구멍의 연속이었어요. 카메라는 메모리 카드를 잘못 가져왔고, 지갑에 있는 불필요한 카드들을 빼놓고 오지도 않았고, 핸드폰은 충전기가 고장이었어요.


의자에 앉아 글을 쓰면서 시간을 보내는데 너무 졸렸어요. 공항에 올 때만 해도 의욕적으로 이번에는 기차에서 야간이동하는 시간이 엄청나게 많으니 그동안 여행기를 다 쓰기로 결심했어요. 2015년 이맘때 떠났던 동남아시아 여행기라도 제발 빨리 끝내야겠다는 필살의 집념을 불태우며 태국 가이드북도 챙겨왔어요. 중국으로 여행을 가는데 위구르 지역 가이드북은 없어서 구입도 안 했어요. 그 결과 중국 여행 가면서 태국 여행 가이드북을 들고 가는 우스운 상황이 발생했어요. 이 우스운 상황을 감동적인 상황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동남아시아 여행기 한 글자라도 써야 했어요. 묵직한 태국 여행 가이드북을 들고 가는 중국 여행을 지극정성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이때까지의 글을 빨리 쓰고 동남아시아 여행기 한 글자라도 써야 하는데 계속 잠이 밀려왔어요. 아무리 잠을 깨려고 노력해도 잠은 끊임없이 밀려올 뿐이었어요. 중국 CCTV 위구르어 방송을 들으며 잠을 깨어보려 했지만, 귀에 쉽게 들어오지 않았고 잠만 더 몰려왔어요.


'잠깐만 눈 붙였다가 다시 일어나야겠다.'


의자에 드러누웠는데 불편해서 도저히 잘 수 없었어요. 잠깐 누워있다가 다시 일어났어요. 친한 동생이 중국에 갈 때마다 꼭 위챗으로 채팅을 하자고 했어요. 이유는 네이버 Line는 중국에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어요. 집에서 vpn 어플을 깔아오기는 했는데, 이것은 실상 구글 접속용 어플이었지, 핸드폰 모든 어플에서 vpn을 사용하게 해주는 어플 같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다시 어떤 어플을 깔아야하는지 검색을 한 후, vpn 어플을 다시 설치했어요.


'이거 있으면 중국에서도 인터넷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겠지?'


동생이 중국 갈 때마다 라인은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위챗으로 채팅하자고 하는 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어요. 100% 거짓말은 아니고 사실에 기반한 약간의 거짓말이기는 했지만요. 약속을 어겨놓고 나중에 지킬 것이므로 아직 어긴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랄까요. 친한 동생은 대놓고 제가 중국에 가면 라인도 못 하고, 티스토리도 제대로 못 하며 위챗으로 채팅하자고 할 거라 했어요. 중국 정부가 강력히 인터넷 통제를 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든 뚫어내고 수많은 중국인들이 자유로이 인터넷을 즐기고 있는 것 또한 사실. 친한 동생이 무언가의 이유 - 아마 귀찮음 때문에 적당히 라인 안 된다고 하며 위챗 쓰자고 해대는 것이라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중국에 가본 적이 없었으므로 확실히 반박을 할 수도 없었어요.


친한 동생 및 같이 어울려 노는 사람들에게 중국에서 반드시 라인을 사용할 거라 당당히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친한 동생이 라인 절대 못 쓸 거라 호언장담해서 중국에서 과연 라인을 사용할 수 있을지 긴가민가했어요. 마음 같아서는 제가 중국에서 라인을 사용할 거라는 것에 초호화 뷔페 내기를 걸고 싶었지만, 중국에서 라인을 사용할 수 있다는 확실한 물증을 아직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참았어요.


VPN 어플까지 설치한 후,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음수대로 갔어요. 음료수를 사서 마시고 싶었지만 돈이 없었어요. 함부로 돈을 쓸 수 없었어요. 공항올 때 계획한대로 배고픔은 집에서 라면 4개 먹고 오는 것으로, 갈증은 음수대에서 물을 마시는 것으로 해결하고 있었어요. 중국 공항도 아니고 한국 공항인데 돈이 얼마 없어서 갈증을 오직 인천공항에 설치된 음수대에서 물을 마시는 것으로만 해결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어요. 음수대의 물을 할짝일 때마다 예전 근성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어요.


그러나 이런 근성이 살아나는 기분도 잠시. 몰려오는 잠은 이겨낼 수가 없었어요. 자리에 앉아있으며 잠을 이겨내는 것은 이제 한계였어요. 잠깐 누워서 쉬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한데, 출국장 의자는 드러눕기에는 매우 불편했어요. 잠도 깨고 바람도 쐴 겸 해서 짐을 다 짊어매고 1층 입국장으로 내려갔어요. 1층 입국장이 콘센트 이용하기에 더 좋다는 것은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 1층 입국장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고, 개중에는 누워 있는 사람도 있었어요. 1층 입국장 의자는 3층 출국장 의자와 다르게 등받이 없는 널찍한 의자가 통으로 놓여 있었어요.


'여기서 조금 누워있어야겠다.'


중국인들과 태국인들이 모여 앉아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노트북이 들어 있는 가방을 베고 누웠어요. 옷이 들은 백팩은 앞으로 메어서 이불로 삼았어요. 처음에는 그냥 누워있어야겠다가 허리가 안 아파지면 일어날 계획이었어요. 그런데 막상 드러누우니 잠이 계속 쏟아져왔어요. 아무리 잠을 안 자려 버텨보았지만 감기는 눈을 뜰 수가 없었어요. 잠깐 눈을 감았다 다시 뜨고, 다시 눈을 한참 감았다가 다시 뜨는 것을 반복했어요.


'도저히 안 되겠다. 조금만 자야지.'


결국 잠들어버렸어요. 잠을 자는데 태국인, 중국인들이 엄청 떠들어대었어요. 시계를 보니 새벽 3시 반이었어요. 저 사람들은 이 야심한 시각에 잠도 안 자고 왜 저리 많이 떠들어대나 싶었어요. 둘 다 성조가 있는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들이 옆에서 떠들어대니 엄청 시끄러웠어요. 하지만 조금이라도 자야 했어요. 비행시간이 짧아서 기내식 먹고 조금 있으면 착륙. 그 후 바로 친구와 만나서 여행 일정까지 짜야 했어요. 상하이에서 어떻게든 맨정신으로 있어야했기 때문에 5분이라도 더 자야만 했어요. 진심 격렬하고 필사적으로 잠을 잤어요. 우공이산의 자세로 조금 자다 깨어나면 다시 또 이어서 조금이라도 더 자기 위해 강력히 정신줄을 놓았어요. 주변에서 떠들건 짹짹대건 상관하지 않겠다는 자세로 의연희 잠을 계속 잤어요. 시끄러워도 어쨌든 누워서 편히 잘 수 있어서 좋았어요. 의자가 제 키보다 작고, 배낭을 이불 삼아 앞으로 매고 있었기 때문에 몸을 뒤척일 수 없어 불편하기는 했어요. 그러나 삐딱하게 누워 자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침대가 과학이듯 의자도 과학이라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어요.


"몇 시지?"


하도 시끄러워서 잠에서 깼어요. 단순히 주변에 있던 태국인, 중국인들이 떠들어대서 시끄러운 정도가 아니었어요. 무슨 시장통 바닥에 누워 있는 기분이었어요. 눈을 떠보니 입국장에는 사람들이 바글대고 있었어요. 시계를 보니 아침 6시 조금 넘은 시각이었어요. 다시 눈을 감았어요. 아직은 이른 아침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의자에 누워 있어도 그렇게 민폐까지는 아니었어요. 잠을 자려고 했지만 더 이상 잘 수가 없었어요. 시끄러워서가 아니었어요. 추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결국 6시 30분이 되어서 느긋하게 일어났어요.


음료수를 마시고 싶다.


목이 마를 때마다 음수대에서 맹물 맛을 음미해가며 물을 마시고 있었어요. 전날까지는 그렇게 잘 버티고 있었어요. 이런 근성이 자고 일어나니 싹 사라졌어요. 머리 속에서는 음료수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어요. 게다가 하필이면 편의점이 눈에 딱 들어왔어요. 3층 출국장에서는 편의점이 보이지 않아서 그냥 없으니 못 마신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1층 입국장에서는 편의점이 보이니 그렇게 자기세뇌를 시킬 수도 없었어요.


'결국 체크카드를 꺼내야 하나?'


지갑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했어요. 돌아와서 사용해야 할 생활비를 지금 앞당겨 사용해야 할까? 어쨌든 밤에 불필요한 지출은 줄였어. 만약 아무 준비도 하고 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햄버거를 사먹고 싶어졌을 거야. 다행히 배가 고프지는 않아. 그저 달콤한 음료수를 마시고 싶을 뿐이야. 음료수 하나만 마실 수 있다면 정말 좋겠어. 전날 먹은 라면이 아직도 뱃속에 있으니 비행기 기내식 받아먹을 때까지 배고픔은 느끼지 않을 거야. 그런데 이 근질거리는 혓바닥을 달랠 방법이 없어. 맹물을 아무리 들이켜도 입안의 공허함을 달랠 수는 없어. 오히려 맹물이 혀를 잘 씻어주어서 입안이 더욱 공허해질 뿐이야.


지금까지 잘 참아왔는데 여기에서 체크카드를 꺼내야하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마침 그때 딱 공항 환전소가 보였어요.


아, 나 말레이시아 링깃 있었지!


순간 제 지갑 속에 말레이시아 링깃이 있다는 것이 떠올랐어요. 언제부터인가 여행다니며 그 나라 지폐를 한두 장 빼서 지갑에 넣어서 다니기 시작했어요. 보통 최소액권 한 장 정도 남겨서 지갑에 넣어두곤 했어요. 그런데 올해 1월 말레이시아 여행에서는 실수로 말레이시아 링깃을 왕창 남겨버렸어요. 1,2 링깃 정도가 아니라 40링깃이 넘는 돈이었어요. 1링깃이 얼추 300원 조금 안 되는 돈이니 40링깃이면 우리나라 돈으로 1만원이 넘는 돈. 이 돈을 환전할까 했지만 항상 귀찮아서 지갑 속에 방치하고 있었어요. 심지어는 서울역에 갔을 때조차 옷 속에 있는 지갑 꺼내기 귀찮아서 환전을 하지 않았어요. 한국에 종종 오는 말레이시아인 친구에게 알리티를 사다달라고 하고 결제를 이 링깃으로 해결할까 하기도 했지만 이 역시 귀찮아서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항상 지갑속에 40링깃이 넘는 돈이 있었어요.


환전소에서 말레이시아 링깃을 한국돈으로 환전한다면?


지갑을 꺼내서 말레이시아 링깃이 얼마나 있나 확인해보았어요. 43링깃이 있었어요.


말레이시아 링깃


음료수를 사마시기 위해 43링깃 전체를 환전할 필요가 전혀 없었어요. 얼추 300원으로 계산해보면 20링깃만 환전해도 음료수를 세 번은 사마실 수 있었어요. 20링깃이면 아무리 인천공항 환전소가 날강도같은 환율을 보여준다 해도 환율 좋은 환전소에서 환전하는 것과 별 차이도 없었어요. 게다가 애초에 20링깃 자체가 그렇게 큰 돈도 아니었구요. 20링깃이 큰 돈이었다면 귀국하자마자 생활비에 보태쓰기 위해 다시 환전했을 거에요. 액수 자체가 귀찮음을 이겨낼 정도로 큰 액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지갑에 방치하고 있었던 것이었고, 제 아무리 환차손이 발생한다 해도 그냥 웃어넘길 수 있는 정도였어요.


신한은행 환전소로 달려갔어요.



20링깃을 환전하자 5천원짜리 지폐 한 장과 동전 몇 개가 손에 들어왔어요.


"음료수 사서 마실 수 있다!"


한국돈이 하나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갑자기 5천원이 생겼어요. 부지런해서 예전 서울역 갔을 때 링깃을 환전해 버렸다면 이 순간에도 입맛만 계속 쩝쩝 다시든가 체크카드를 꺼내 음료수를 사버렸을 거에요. 이랬다면 부지런함이 준 비극이었겠죠. 오히려 귀찮아서 지갑 속에 링깃 남은 것을 푹푹 묵혀놓았더니 이렇게 정말 딱 필요할 때 요긴하게 잘 써먹을 수 있었어요. 손에 들어온 5천원 짜리는 무슨 편의점 무제한 이용권 같았어요. 패배의 위기에서 극적인 역전골을 집어넣은 벅찬 감동이 밀려왔어요. 아르키메데스가 빙의되어 유레카를 외치고 싶었어요.


'이 5천원을 어떻게 써야 잘 썼다고 하지?'


편의점에 가서 음료수 가격을 보며 머리를 굴렸어요. 5천원에 동전 몇 개가 더 있었어요. 음료수 선택을 잘 하면 음료수를 세 번 구입할 수 있었어요. 일단 지금 한 번, 체크인 하고 한 번, 귀국해서 지하철 타기 전에 한 번. 눈에 불을 켜고 어떤 것을 골라야 음료수를 세 번 사서 마실 수 있는지 계산해 보았어요. 인천공항 편의점은 다른 곳 편의점보다 비쌌어요. 세 번 마실 수 있는 조합을 찾기 쉽지 않았어요.


그래, 이거야!



처음 보는 야구르트였어요. 이 야구르트를 마시고, 이따 수속절차 밟은 후 바나나 우유 한 번 마시면 귀국해서 한 번 더 음료수를 마실 돈이 남았어요. 음료수 칸을 꼼꼼히 살펴본 보람이 있었어요.


야구르트는 매우 걸쭉했어요. 그냥 입안의 허전함만 달랠 생각이었는데, 의외로 허기도 달랠 수 있었어요. 덕분에 무언가 먹고 싶다는 생각은 더더욱 없어졌어요. 게으름이 이렇게 축복을 제대로 내려주시다니 부지런한 게 언제나 능사는 아니라는 것을 깨우쳤어요. 물론 항상 게으름을 부리면 안 되지만요. 한쪽에 몰빵하는 것보다는 적당히 잘 섞어놓는 분산형 투자가 더 좋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어요.


음료수를 다 마신 후, 출국장으로 돌아갔어요. 아직 제가 타고 갈 아시아나 OZ363편은 수속창구가 나와 있지 않았어요. 이제 7시라 안 뜬 것이겠지?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다시 출국장에 자리를 잡고 노트북을 꺼내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노트북에 글자 하나하나 입력해갈수록 출국장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늘어나고 있었어요. 무언가 집중해서 열심히 쓰려고 했지만 집중이 잘 되지 않았어요. 태국 여행기는 결국 공항에서 단 한 글자도 쓰지 못했어요. 그래도 괜찮았어요. 아직 상하이에서 우루무치로 가는 기차 이동이 있었거든요. 그 외에도 야간 이동이 무수히 많았기 때문에 여행기 쓸 시간은 많이 남아 있었어요.


아침 8시. 이제쯤 슬슬 제가 타고 갈 비행기 수속창구가 떴을 것 같아서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여기는 왜 이렇게 사람이 많아?"


대한항공 전용 수속창구에 사람들이 바글거리고 있었어요. 대체 어느 나라 사람들이길래 이 이른 아침부터 공항에 몰려와 서로 엉켜 있나 확인해보려고 사람들 얼굴을 보았어요. 너무나 낯익은 얼굴 모습이었어요. 너무나 많이 보아서 딱 보자마자 어느 나라 사람인지 느낌이 오는 형상이었어요. 대한항공 전용 수속창구에 어디로 가는 비행기가 떠 있는지 보았어요.


타슈켄트!



대한항공 전용창구 앞은 타슈켄트 공항처럼 되었어요. 엄청난 짐을 갖고 대기하는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어요.



"저건 대체 어떻게 싣고 간대?"


타슈켄트 공항 수하물 찾는 곳에서 어마어마한 짐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본 적이 있어요. 그냥 캐리어가 많이 쏟아져 나오는 정도가 아니라 대형 TV등 비행기에 대체 어떻게 실었나 궁금해지는 것들이 쿵쿵 떨어져 나오는 것을 보았어요. 심지어는 우즈베키스탄 전통 빵인 '논'이 가득 담긴 마대 자루가 나오는 것도 보았구요. 이번에 본 것은 부피와 길이 면에서 지금껏 보았던 것들과 차원이 달랐어요. 저게 과연 수하물이 돌아다니는 컨베이어 벨트 위를 잘 돌아다닐지 의문이었어요.


아침 8시가 넘었는데도 제가 타고 갈 비행기의 수속창구가 뜨지 않았어요. 왠지 아시아나 전용 창구로 가면 시간과 관계없이 그냥 수속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안내판을 살펴보았어요. 아시아나 전용창구는 공항 왼편 가장 구석에 마련되어 있었어요. 일단 그쪽으로 갔어요.


"여기에서 지금 상하이 가는 비행기 수속할 수 있나요?"

"자동발권기로 하시면 되요."

"저는 수하물 있는데요."

"여기에서 발권하신 후, 창구로 가셔서 짐만 부치시면 되요."


안내에 따라 일단 자동발권기로 발권을 받은 후, 수속창구로 갔어요.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금방 짐을 부칠 수 있었어요. 백팩을 부치고 나니 어깨가 한결 가벼워졌어요.



"여기가 이랬구나!"


인천공항을 매해 한 번 이상 와보았지만, 출국장 가장 구석까지 가본 적은 없었어요. 항상 제 수속창구로 가서 짐 부치고 놀기 바빴지, 출국장 전체를 찬찬히 살펴볼 생각은 하지 못했어요. 이번에야 왼쪽 가장 끝쪽을 보게 되었어요. 이쪽은 제 기억상 와본 적이 없었어요. 매우 신기했어요. 인천공항에 이런 풍경도 있었다는 것에 놀랐어요. 저 블라인드를 다 걷어내면 엄청나게 밝고 눈이 부시겠지? 대신 아시아나 수속창구 직원들은 엄청나게 괴로울 거야. 벌써부터 외국 공항에 온 기분이었어요.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인천공항의 풍경을 보며 신기해하다가 1층 편의점으로 가서 바나나 우유를 하나 사서 마셨어요.


이제 출국 심사를 밟을 차례. 이번 여행부터는 드디어 전자여권으로 여행을 가게 되었어요. 2006년에 만든 여권이 유효기간이 만료되어서 여권을 다시 발급받았거든요. 새로운 여권으로 가는 첫 여행이 중국이라는 것이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어요. 그렇게 중국 여행은 안 가겠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여권 바꾸고 나서 처음 가는 여행지가 중국이었어요. 게다가 혼자 가는 것이라 30일짜리 중국 단수 비자 스티커가 딱 붙어 있었어요.


"도장 찍어주세요."


출국 심사대에서 출국 도장을 찍어달라고 부탁했어요. 10년 동안 이 여권 페이지가 부족해질 일은 절대 없을 거에요. 그렇게 외국을 수시로 들락날락 거리거나, 엄청나게 많은 나라를 방문할 일은 없을 테니까요. 그리고 언젠가 여행을 회상할 때 출국 도장을 보며 언제 떠났는지 정확히 알 수 있구요. 자동심사로 출국 심사대를 통과하면 편하다고 하기는 하지만, 출국 도장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불편함을 감수하고 일부러 출국 심사대로 가서 출국 심사를 받았어요.


"출국이다!"


마구 흥분되었어요. 드디어 출국이었어요. 면세점에서 특별히 구입할 것은 없었어요. 출국 심사를 일찍 받아서 시간 자체가 널널하게 남았는데, 아시아나 항공을 타고 가니 다른 탑승동으로 이동할 필요도 없었어요. 시간이 정말 많이 남았어요. 남은 시간동안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자리에 앉아 있거나 걷는 것 뿐이었어요. 그냥 공항 물가도 비싸지만, 면세 구역 물가는 더 비쌌고, 애초에 남아 있는 현금이 천원 조금 넘게 있어서 무언가 사먹을 수도 없었거든요.


인천공항 면세점


공항 면세점을 끝에서 끝까지 다 걸어보았어요. 아침인데다 비수기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지 않았어요. 공항 면세점을 다 걷고 나니 슬슬 탑승할 시각이 되었어요. 탑승구로 가서 줄을 섰어요. 아직까지는 놀라울 게 없었어요. 그냥 평범한 대한민국이었어요. 모두가 매우 질서정연했어요. 대한항공 전용창구에서 보았던 그 우즈베키스탄인들의 엄청난 줄 같은 장관은 없었어요. 하기사, 여기는 대한민국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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