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바람은 남서쪽으로 (2014)

바람은 남서쪽으로 - 07 베트남 후에 왕궁

좀좀이 2015. 1. 31.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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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중 비 내리는 것이 주는 장점은 딱 하나 있어요.


카메라 배터리 절약시켜줌.


택시를 타고 후에 시타델 가는 길에 창밖 풍경을 찍고 싶었지만 도저히 찍을 수가 없었어요. 창문에는 빗방울이 맺혀서 밖에 깔끔하게 보이지도 않았고, 택시는 빠르게 달리는데 밖이 밝지가 않아서 셔터 스피드가 나오지도 않았어요. 여행할 때 이동중 창밖이 잘 보이면 셔터를 난사하기 마련인데 이런 상황이니 셔터를 난사할 수가 없었어요. 덕분에 카메라 배터리는 아주 잘 절약할 수 있었어요. 이런 것은 전혀 절약하지 않아도 좋은데! 지금 보조 배터리도 빵빵하게 완충되어 있는데!


택시를 타고 후에 시타델에 도착했어요. 친구와는 연락이 되지 않았어요. 오토바이를 타고 오는 중이라 아직 오지 않은 것 같았어요. 비는 비록 부슬비였지만, 우산을 쓰는 것이 좋을 만큼 많이 내리고 있었어요.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 펼치고 주변을 잠깐 돌아보았어요. 한쪽에서는 보라색 아오자이를 입은 소녀들이 서 있었어요. 딱 보아도 무슨 특별한 일이 있어서 나온 것 같았어요. 그들도 추웠는지 위에는 점퍼를 걸치고 있었는데, 날씨 때문에 그런지 매우 축 쳐진 분위기였어요. 그리고 택시가 통과한 문 옆에는 대포가 전시되어 있었어요.



이 대포는 자롱 황제가 자신이 건설한 새로운 국가를 보호하겠다는 의지로 1803년에 만든 대포에요. 대포를 잘 살펴보니 한자가 적혀 있었어요.



한자를 보니 여기도 엄연한 동북아시아 문화권이라는 것이 느껴졌어요. 제가 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동아시아 문화권이라고 하면 한국, 중국, 일본이라고 배웠고, 동아시아 문화권의 공통점으로 한자, 유교, 불교가 있다고 배웠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동아시아 문화권에 베트남도 추가되었어요. 이것을 처음 접했을 때 베트남이 왜 우리와 비슷한 동아시아 문화권에 들어와 있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어요. 방송과 사진을 통해 본 베트남은 우리와는 달라도 너무나 다른 세계였거든요. 지리적 구분으로도 베트남은 엄연한 동남아시아였구요. 우리와 비슷한 문화가 많다는 글을 여러 개 읽었지만, 그런 글보다 사진이 주는 영향력이 훨씬 강력했어요. 사진 속 베트남은 정말로 제가 상상하던 동남아시아. 기와 지붕이 조금 보인다 해서 그것을 가지고 동아시아 문화권이라고 이해하기에는 무리였어요. 베트남에 발을 막 내딛었을 때까지만 해도 여기가 왜 동아시아 문화권이라고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한자를 보자 여기가 동아시아 문화권에 속하는 국가라는 것이 조금 와닿았어요.



대포 뒤는 풀밭이었어요. 얼핏 보면 풀이 짧은 것 같지만 실제로 들어가보면 풀이 꽤 긴 편이었어요.


길 건너편으로는 국기 게양대가 보였어요.



친구와 성 입구에서 만나기로 했기 때문에 성 입구 근처를 조금 돌아다니며 친구를 기다렸어요.




부슬비가 내리고 바람도 불고 있었어요. 우산 들고 사진 찍는 것 자체가 매우 불편한 일인데, 설상가상으로 카메라를 꺼내서 사진 좀 찍어보려고 하면 자꾸 렌즈에 빗방울이 떨어졌어요. 사진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꺼내는 것인지, 렌즈를 닦으려고 카메라를 꺼내는 것인지 분간이 안 가는 상황. 친구가 집에 놀러왔다가 두고 간 안경닦이 천을 혹시 몰라서 챙겨왔는데, 그게 그렇게 요긴할 줄은 몰랐어요. 만약 안경닦이 천을 챙겨오지 않았다면 결국 폰카에 의존해야 했을 거에요. 핸드폰 카메라 화질은 문제가 아니었어요. 제 눈은 예술가의 눈이 아니라서 세세한 것까지 신경쓰지는 않거든요. 문제는 핸드폰 카메라의 측광기능이 멍청해서 백주대낮에 사진을 찍으려고 하면 무조건 하늘에 밝기를 맞추어서 지상이 시커멓게 나와버린다는 것. 밝기 조절을 -2부터 +2까지 할 수 있는데, 아무리 +2로 해도 멍청한 건 어쩔 수가 없어서 시커멓게 나오는 것은 매한가지였어요. 측광 조절 기능이 멍청해서 이렇게 정작 찍어야 하는 피사체가 시커멓게 나와버리기 때문에 핸드폰 카메라에 의지해서 사진을 찍어야하는 사태가 발생했다면 정말 최악이었을 거에요. 정말 안경닦이 천은 카메라 들고 다니는 여행시 필수 준비물임을 깨달았어요.


가뜩이나 날이 꾸물꾸물해서 사진이 바로바로 찍히는 것도 아닌데 기껏 찍어서 확인해보면 그새 렌즈에 물방울이 묻어서 사진은 망쳐 있고, 안경닦이 천을 주머니에서 꺼내 렌즈 닦아서 다시 찍으면 그새 또 렌즈에 물방울이 떨어져서 사진이 망쳐 있으니 사진 찍을 맛이 전혀 나지 않았어요. 사진 하나 찍으려고 할 때마다 짜증만 두 배씩 늘어나는 기분이었어요. 그래서 사진 찍는 것은 일단 보류하고 대포 옆에 서서 친구를 기다렸어요. 대포 위에는 지붕이 있어서 비를 피할 수 있었거든요.


친구가 도착하자 후에 왕궁 안으로 들어갔어요.



국기 게양대 앞 광장을 지나 응오문으로 갔어요.



응오문 옆에는 해자가 있었어요.



응오문이 바로 왕궁 입구이자 매표소였어요. 오른쪽은 베트남인용 매표소였고, 왼쪽은 외국인용 매표소였어요. 당연히 요금도 크게 차이가 났어요.


"이렇게 날이 안 좋을 때 여기 오는 것은 처음이야."


친구가 이렇게 날 안 좋을 때 이 왕궁에 와 본 것은 처음이라고 했어요. 저라도 이렇게 날씨 안 좋은 날에는 이런 곳을 안 갈 거에요. 지금은 여행이라는 부득이한 상황이다보니 왔을 뿐이에요. 비가 내리고 시간도 먼 곳에 있는 곳을 보러 가기에는 애매해서 여기 외에는 갈 곳이 없었어요. 친구는 날씨가 이렇게 안 좋은 것을 매우 아쉬워하며 나중에 날씨가 좋아졌을 때 꼭 다시 와보라고 했어요.



디엔 타이 호아가 보였어요. 우리말로 하면 태화전인 건물이었어요.




태화전 입구에 있는 문 두 개에는 모두 한자로 네 글자씩 적혀 있었어요.




디엔 타이 호아 앞에는 해태 비슷하게 생긴 조각과 한자로 '종구품'이 적혀 있는 표지석.



이렇게 관직이 적혀 있는 표지석은 우리나라 경복궁에서도 볼 수 있지요. 한자도 같다는 점에서 여기도 동아시아 문화권이라는 느낌이 확 느껴졌어요.


"이 한자, 베트남어로 어떻게 읽어?"

"몰라."


친구는 베트남이 옛날에 한자, 그리고 한자를 개량해서 만든 '츠놈'이라는 고유 문자를 사용했지만 그것들을 학교에서 배우지는 않는다고 알려주었어요. 동아시아 문화권 국가 가운데 한국, 베트남은 한자를 사용하지 않고, 일본은 한자 혼용, 중국은 한자만 사용하지요. 우리나라도 예전 제가 어렸을 적만 해도 일본처럼 한자어는 죄다 한자로 적어놓았었지만 지금은 이렇게 쓰는 경우는 거의 없지요. 그러고보면 외국인들 생각에는 '한자=중국어'이고, 확실히 한자를 보는 시각이 우리와 많이 다르기는 해요. 한국인은 당연히 한자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외국인들도 꽤 많구요. 한자를 안다고 하면 중국어를 할 줄 안다고 생각하는 외국인들도 많아요. 별로 어려운 한자도 아니라 '종구품'을 읽어주자 친구는 매우 신기해했어요.


디엔 타이 호아는 자롱 황제가 1805년에 건설한 건물인데, 내부는 사진 촬영 금지였어요. 전체적으로 왠지 중국풍 건물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디엔 타이 호아 내부를 구경한 후 그 뒷편으로 갔어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어서 좋은 점이 또 하나 있었어요.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사진 찍기는 좋았다는 점이었어요. 그러면 뭐해? 렌즈에 계속 빗방울이 떨어져서 한 장 찍으려면 렌즈를 몇 번씩 안경닦이 천으로 닦아야만 했는데요.



옥새 모양의 조각. 우리나라와 달리 베트남은 중국의 공격을 꾸준히 막아내었기 때문에 용 모양 옥새였어요. 조선은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용 모양 옥새를 만들지 못했죠. 어떻게 보면 베트남인들이 왜 자존심이 높은지 보여주는 한 장면이라고 할 수도 있어요.



넓은 풀밭이 나왔어요. 여기는 원래 궁전 건물들이 있었던 곳이지만,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곳이었어요. 양 옆으로는 그래도 어느 정도 복원이 되어 있었어요.



만약 온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면 상당히 매력적인 모습이었을 거에요. 하지만 디엔 타이 호아 뒷부분은 대부분 파괴되어서 오랜 기간 방치되어서 건물이 있었다는 흔적도 별로 보이지 않았어요.







궁전 한 쪽에는 호수가 있었어요.




계속 걸어갔어요.



거대한 국기 게양대가 멀리서도 잘 보였어요. 여기가 예전에는 전부 궁궐 건물들로 꽉 들어차 있었을 건데 지금은 그냥 잔디 정원처럼 되어 있었어요.



딱!


카메라를 꺼내는데 렌즈캡처럼 항상 달아놓고 있는 x0.7 컨버터가 땅으로 떨어졌어요.


'설마 이거 깨진 거 아니야?'


소리가 진짜 무언가 떨어져 깨질 때 나는 소리였어요. 순간 '날은 구질구질한데 컨버터까지 깨먹네'라는 생각이 들며 재빨리 컨버터를 집어들었어요. 다행히 컨버터는 멀쩡했어요. 평소에는 쓸 일이 별로 없어서 렌즈캡처럼 쓰고 있지만 가끔 정말 쓸 일이 있기는 한 x0.7 컨버터. 깨졌다면 아마 상당히 기분이 울적해졌을 거에요. 가뜩이나 날씨는 엉망이고 날은 저물어가고 있어서 사진도 제대로 못 찍고 옛 궁궐터를 거닐어본다는 것 정도였거든요. 분명 구경할 만한 곳이기는 했지만, 계속 축 쳐지는 분위기였어요. 친구와의 대화도, 사진 찍는 것도, 구경도 전부 제대로 되지 않았어요.



드디어 왕궁의 북문인 호아빈몬 (평화문)에 도착했어요.



여기에서 서쪽으로 걸어갔어요.








"이제 관람 시간 거의 끝나서 나가야해."


그래서 동문으로 갔어요.



마침 한국인 단체 관광객이 여기를 통해 밖으로 나가고 있었어요. 가이드 아저씨의 설명을 귀동냥으로 들어보니 이 문은 원래 남자들만 지나다니는 문이라고 했어요.


성문을 빠져나왔어요.




성문을 나와서 왼쪽으로 조금 걸어올라가 보았어요. 거기에는 베트남 전쟁과 관련된 작은 박물관이 있었어요.



크게 볼 것은 없었기 때문에 밖에 전시되어 있던 무기들을 조금 구경하고, 다시 국기게양대가 있는 응안문으로 갔어요. 응안문은 바로 처음 택시 타고 여기 왔을 때 통과했던 그 문이었어요.


"나는 이만 가 볼께. 내일 또 보자."

"응. 내일 봐."


친구는 응안문 대포 뒤쪽에 세워둔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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