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기적과 저주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3장 17화

좀좀이 2018. 11. 14. 12:07
728x90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3장 17화


 날이 매일 조금씩 살짝살짝 더워지고 있다. 햇볕이 너무 좋다. 이제 곧 여름이구나. 오늘은 1116년 5월 19일. 작년 이맘때 나는 뭐 하고 있었더라? 지금과 너무 다른 과거라 불과 1년전 일인데 너무나 멀었던 과거 같다. 오늘부터 1년 전까지가 그 1년 전 오늘로부터 10년 전 오늘까지의 시간보다 훨씬 길게 느껴진다. 아다비아가 서점에 와서 나한테 공부를 알려주기 시작한 것이 작년 이 즈음이었을 거다. 그리고 감비르가 저주술 수련을 시작한 것도 작년 이 즈음일 거구. 작년 이 즈음과 비교해 지금 가장 많이 변한 건 아다비아와 감비르다. 아다비아야 그렇다 쳐. 뮈젤 가서 뭔가 당해서 그렇게 변한 거니까. 아다비아가 그렇게 되고 싶어서 그렇게 된 건 아니잖아. 아다비아 눈을 칼로 그어버리고 얼굴을 엉망으로 만든 건 루즈카다. 아다비아 스스로 뭔가 한 건 없어. 일이 지지리 나쁘게 풀리려고 하니 그걸 연달아 제대로 맞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된 거지.


 그렇지만 감비르는 자기가 스스로 원해서 그렇게 변했다. 아직도 여장하고 다니면서 자기가 남자이자 여자라고 주장하고 있겠지? 그 생각이 바뀌었을 리 없어. 어디선가 또 차별과 편견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1인 시위 벌이고 있는 거 아냐? 그러다 경찰한테 또 두들겨맞고 말이야. 감비르는 저주술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대단해. 하긴, 모든 사람이 정신 차리라고 하고 욕하고 비난해도 절대 자기 생각 안 굽히고 여장하면서 자기가 남자이자 여자라고 주장하니...그런 불굴의 의지와 신념을 갖고 있으니 저주술도 쓸 수 있는 거겠지. 그래도 어떻게 사람들에게 몰매 맞지 않고 잘 사는 것 같다. 그랬다면 라키사가 나한테 이야기해줬겠지. 감비르와 게첸에 대한 이야기를 나한테 먼저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라키사도 내가 감비르와 게첸을 무지 싫어하는 걸 아니까. 특히 게첸. 나도 라키사한테 둘의 안부를 물어보지 않는다. 물어보아 봐야 결국 나와 라키사 사이에 알 수 없는 장벽만 더 높아지니까. 딱히 궁금하지도 않구. 둘이 살든 죽든 내 눈에만 안 띄면 되는 거잖아. 나랑 엮이지만 않으면 나도 그 둘이 뭘 어쩌든 말든 알 바 아니다. 라키사와 얽혀 있으니 조금 신경이 쓰이기는 하지만 그거도 예전만큼 신경쓰이는 건 아니다. 라키사와 사귀는 걸 아예 단념해버렸으니까. 지금은 아다비아, 켈라자야와 사귀고 있잖아. 내 자의로 사귀게 된 게 아니라 하더라도 받아들였으니 책임져야지. 걔네 둘이 싫은데 억지로 사귀게 된 것도 아니구. 그런데 걔네 둘을 버리고 라키사와 사귀어? 그건 인간이 해서는 안 될 짓이야. 물론 아다비아, 켈라자야와 결혼하게 될 지, 아니면 둘 다 헤어지게 될 지는 몰라. 그렇지만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한 노력을 다 하고 계속 교제해가며 자연스럽게 맞이하게 될 결말이다. 억지로 라키사와 사귀기 위해 둘에게 헤어지자고 하는 건 절대 해서는 안 될 짓이야. 그런 짓을 해야 할 정도로 라키사를 뜨겁게 사랑하는 것도 아니잖아. 오히려 라키사에 대한 관심이 나날이 없어져서 이제는 예전만큼 호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시험 끝나고 아다비아와 같이 식사하고 차를 마셨던 때가 문득 떠올랐다. 그 당시에는 얼떨떨하고 얘가 왜 이러나 매우 이상했다.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너무나 소중하고 즐거운 추억이야. 만약 그때로 돌아가게 된다면 보다 그 상황에 빠져들어 즐길 거다. 결국 이렇게 아다비아와 사귀게 될 거였다면 그때 나도 적극적으로 행동했어도 되었잖아. 아닌가? 그때는 아다비아가 나를 그렇게까지 많이 좋아하지는 않았지 않았을까? 그때의 아다비아와 지금 아다비아는 너무 차이가 크지. 그때는 한없이 위로 올라가던 아다비아였고, 지금은 끝도 없는 구덩이에 처박혀 있는 아다비아니까. 내 주제에 그때 아다비아를 어떻게 좋아해? 지금이니까 마음 놓고 좋아할 수 있는 거지. 그때 아다비아였다면 걔가 설령 나를 좋아했다 하더라도 결국은 안 이어졌을 거다. 서로 어떻게 사귀게 되었다 하더라도 얼마 안 가 헤어졌겠지. 나날이 나와 아다비아의 격차가 더 벌어지고 있었는데. 나는 아래로, 아다비아는 위로. 만약 뮈젤만 안 갔다면 아다비아는 지금 더 뛰어나고 멋지고 높은 사람이 되었을 거야. 나야 그것과 상관없이 지금 여기 있을 거구. 학교가 문을 안 닫았다 해도 딱히 달라질 건 없지 않았을까?


 그러고 보니 켈라자야랑 둘이 식사하고 돌아다녔을 때도 별 거 없었다. 그때 켈라자야한테 반짝이는 작은 색유리가 촘촘히 박혀 있는 파란색 작은 나비 장식이 달려 있는 푸른색 머리끈을 사줬지. 켈라자야는 지금도 서점에 그 머리끈을 가끔 하고 온다. 그게 그렇게 좋은가. 생각해보니 켈라자야와도 '하늘의 정원' 찻집을 갔었구나. 내가 아는 좋은 찻집이 거기 밖에 없으니까. 그것도 아다비아가 데려가줘서 알게 된 거지.


 라키사를 한 번 쳐다보았다. 라키사는 두툼한 책을 읽고 있다. 저 책은 보나마나 이상한 소리가 잔뜩 적힌 책일 거다. 책이 다 좋은 건 아니야. 책도 잘 골라서 읽어야지, 저런 쓰레기 같은 책을 자꾸 읽어대다가는 사람이 미쳐버린다니까. 무슨 자유니 평등이니 차별이니 편견이니 진리니 떠들어대는 책은 몽땅 다 불싸질러버려야 해. 와히디야가 이 서점 보고 쓰레기라고 했는데 와히디야는 그런 독버섯 같은 책 불싸지르지 않고 뭐한대? 생각해보니 라키사와 내성으로 갔을 때는 엉망으로 끝났다. 그때는 떠올리기 싫어. 그 끔찍한 현장. 그때 그 새끼가 거기서 죽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와 라키사는 그 후 더 좋은 관계가 되었을까? 아마 조금은 더 좋아졌을 거다. 그래도 라키사가 그 모임에 나가는 건 못 막았을 테니...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겠네.



 라키사가 가방을 싸기 시작한다. 이제 라키사 퇴근할 시간이구나.


 "점심 먹고 가."

 "아니. 나는 집에 가서 먹을 거야."


 저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 내가 아다비아, 켈라자야와 사귀기 시작한 후, 라키사는 서점에서 점심을 먹지 않고 집으로 돌아간다. 왜 그러는지 알고 있다. 단순히 나와 켈라자야가 사귀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끼어서 같이 밥 먹기 불편해서 가는 게 아니야. 그것보다는 내가 여자 두 명과 동시에 사귀고 있다는 것이 정말 싫기 때문이겠지. 나를 피하고 싶어서 저러는 거야. 아무리 라키사 속마음을 내가 알 수 없다 해도 이 정도는 알 수 있어. 그래서 라키사에게 꼭 먹고 가라고 권하지 않는다. 억지로 밥 먹게 해봐야 서로 불편해서 얹히기나 좋지.


 괜찮아. 나야 돈 아끼는 거니까. 어차피 라키사와는 어떻게 해도 안 될 거였잖아? 아쉬워할 필요 없어. 원래 저런 애인줄 알았다면 라키사를 좋아하지도 않았을 거야. 라키사를 좋아했던 것은 라키사가 매우 열심히 노력하기 때문이었으니까. 밝은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기 위해 매일 분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니까. 지금 라키사가 나아가는 미래는 안 봐도 뻔해. 저건 잘못된 거야. 자유? 평등? 진리? 저주술? 다 꺼지라고 그래! 그딴 거 필요 없어. 그딴 거 추종하는 놈들 때문에 이 도시가 이렇게 엉망이 되고 학교는 실상 폐교되어 버린 거잖아. 그들이 주장하는 그 자유, 평등, 진리, 저주술이 대체 뭔데? 이렇게 모두를 공포에 질려서 살게 만들고, 누군가 끔찍하게 죽어나가는 현실이야? 라키사는 자신이 추구하는 게 그게 아니라 믿겠지. 하지만 결과는 결국 지금 이 현실이잖아. 저런 모습의 라키사는 나도 마음에 들지 않아. 지금 내가 라키사한테 계속 신경이 쓰이는 이유는 단 하나. 계속 그래왔기 때문에 습관처럼, 관성처럼 그러는 것 뿐이야. 언젠가는 라키사에 대한 이 관심과 걱정 모두 힘을 잃어버릴 거다.


 "아, 알았어. 그러면 나랑 켈라자야만 여기에서 점심 먹어야겠네."

 "응. 너희끼리 먹어."


 설령 이 혼란이 끝난다 해도 나와 라키사의 관계는 전혀 안 좋아지겠지? 내일 갑자기 모든 게 다 해결된다고 해도 내가 아다비아, 켈라자야와 동시에 사귀고 있다는 사실은 계속 이어질테니까. 내일 눈을 떴는데 1년 전 오늘로 돌아가 있을 리는 없잖아. 망할...나는 왜 계속 라키사 때문에 괴로워야 하지? 이미 다 끝났잖아. 라키사는 원래 그랬던 거야. 단지 그걸 밖으로 표출하고 있지 않았을 뿐이었지. 오히려 잘 된 거야. 라키사와 사귀고 나서 이 따위 일을 겪게 되었다면 어쩔 뻔 했어.


 매일 똑같이 겪는 이 상황. 겪을 때마다 기분이 착잡하다. 이 상황을 더 이상 겪지 않는 방법을 모르는 것도 아니야. 어차피 라키사는 여기에서 더 이상 점심을 안 먹잖아. 하루 이틀 그러는 것도 아니구. 그러니까 그냥 라키사한테 여기에서 점심 먹고 가라는 소리를 하지 않으면 돼. 그러면 그걸 단칼에 거절하는 라키사의 대답을 들을 일도 없어. 그렇지만 그걸 못 하겠어. 이건 라키사와의 관계 문제가 아니라 기본적인 예의 문제잖아. 아무리 매번 뻔한 대답을 들을 걸 알지만 물어볼 수 밖에 없어. 그렇다고 대놓고 '너 오늘도 점심 여기에서 안 먹을 거지?'라고 물어볼 수도 없구. 차라리 라키사가 시원하게 '앞으로는 그런 거 물어보지 마. 나는 너희와 점심 절대 같이 먹지 않을 거니까.'라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타슈갈, 나 내일 출근 안 해."

 "내일? 갑자기 왜?"

 "내일 약속 있거든."

 "무슨 약속?"

 "게첸씨와 함께 중앙학문연구소 가기로 했어."

 "아, 그래? 점심도 같이 먹겠네?"

 "응."


 게첸 그 새끼랑 만나든가 말든가. 나만 안 엮이면 되지. 그놈 서점에 면상 들이밀지 않아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여기 와서 자기 힘들다고 징징거리지 않으니까. 그 쓰레기 놈은 아직도 중앙학문연구소에서 일하고 있겠지? 그 새끼 맨날 자기가 착취당한다고 징징거리면서 죽어도 안 때려친단 말이야. 안 때려치는 이유야 뻔하지. 자기가 아무리 뭔 변명을 대도 결국은 거기가 돈 잘 주니까 눌러붙어 있는 거잖아. 착취는 얼어죽을 착취야. 그렇게 일하는 게 싫으면 때려치고 다른 일 찾으면 될 걸.


 "너 게첸이랑 꽤 자주 만나네?"

 "응. 같이 공부하니까."

 "너 게첸 그놈이랑 사귀게 되는 거 아냐?"

 "그분이 정말 좋은 분이기는 하지만 내 취향은 아니야."


 게첸 그 새끼는 라키사한테 수작부리려고 그러는 것일 건데 라키사는 괜찮을까? 둘이 마음이 통하고 있는 거 아니야?


 "너 진짜 게첸 별로인 거야?"

 "타슈갈, 네가 왜 그거에 신경쓰는데?"

 "너 요즘 게첸이랑 진짜 자주 만나는 거 같아서."

 "맞아. 서로 대화가 통하고 그분이 내 공부 많이 도와주거든."


 게첸은 라키사를 좋아한다. 그건 내가 독심술을 갖고 있어서 아는 게 아니다. 게첸이 나한테 직접 말했거든. 게첸이 라키사와 자주 만나는 건 누가 봐도 라키사한테 수작부리려고 하는 짓인 거 뻔한데 라키사는 그게 별 상관 없나? 그놈들 무리와 안 엮인지 꽤 되어서 그놈들이 게첸과 라키사 관계에 대해 뭐라고 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누가 봐도 게첸이 라키사 꼬셔보려고 수작부리는 건데? 알면서 무시하는 거야, 진짜 모르는 거야?


 "너 게첸이랑 만나서 밥 먹을 때 각자 돈 내?"

 "식사는 거의 항상 게첸씨가 사줘. 나는 식사 후 차를 사구. 그런데 그게 왜? 너랑 상관없잖아."

 "너 혹시 진짜 게첸 좋아하는 거 아냐?"

 "맞아."

 "뭐?"

 "친구로써 좋아한다구. 그분 좋은 분이야."


 라키사는 진짜 게첸과 사귀게 될 건가? 진짜 웃기네. 뭐 다 자기 짝이 있다고 하니 라키사의 짝은 게첸이었던 건가? 내가 라키사와 뭘 하든 다 꼬이고 엉망이 되기만 한 건 둘이 이어질 운명이어서 그랬던 거야? 헛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지금 이 순간 왜 이렇게 내 자신이 머저리같을까? 이 상황에 대해 어떻게 표현하려 해도 욕만 나올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자. 나와 라키사는 각자 어울리는 짝이 따로 있었던 거야. 지금 각자 운명의 상대와 이어지려고 하는 거구.


 "너 게첸이랑 사귀고 싶은 마음 있어?"

 "아니. 전혀."


 라키사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어? 뭐야? 저건 부끄러워서 그러는 것도 아니고 속마음을 숨기기 위해 저러는 것도 아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단호한 부정. 진짜로 그럴 생각은 없나 본데? 그러면 뭐야? 라키사는 지금 자기가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진짜 모르는 건가? 게첸이 자기와 사귀기 위해 발악중이라는 거 아예 눈치 못 채고 있는 거야? 아니면 설마 단물만 빨아먹고 걷어차려고? 이건 머리가 돌이야, 아니면 교활한 거야?


 "아무리 봐도 게첸은 너 많이 좋아하는 거 같은데?"

 "친구로써 좋아하는 게 이상한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게첸은 너랑 사귀고 싶어서 그러는 거 아니냐구."

 "나 정말 게첸씨와 사귈 마음 없어. 이건 어디까지나 친구 관계야. 너는 이걸 왜 신경써? 너는 이미 아다비아, 켈라자야와 사귀고 있잖아!"

 "야, 그래도 이건 아니지!"

 "뭐가? 네가 내가 게첸씨와 같이 공부하는 걸 왜 신경쓰는데? 또 내가 공부하는 건 다 엉터리라고 연설 늘어놓고 싶어서니?"


 아, 그게 아니라구! 왜 자꾸 내 말을 삐딱하게 듣는 건데? 심장이 쾅쾅 뛰며 피를 정수리로 쭉쭉 뿜어올린다. 지금 그 이야기하는 게 아니잖아. 길거리 사람들 잡고 물어봐. 지금 게첸이 순전히 너랑 공부하고 싶어서 밥 사주는 건지. 백이면 백 다 너한테 작업 걸려고 밥 사주는 거라 대답할 거다. 아니면 왜 이유 없이 너한테 밥을 사줘가면서 만나? 당연히 배우는 사람이 가르쳐주는 사람한테 돈 내야지.


 "게첸은 아무리 봐도 너 많이 좋아하는 거 같단 말이야."

 "친구로써 좋아하는 게 이상한 거야?"

 "그게 아니라구. 게첸은 지금 너랑 사귀고 싶어서 그러는 거잖아!"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네가 그러니까 게첸씨도 그럴 거라고 혼자 지레짐작하는 거잖아. 나는 게첸씨와 사귈 마음 전혀 없어. 이건 어디까지나 친구 관계야. 네가 왜 여기에 이렇게 신경쓰는지 정말 모르겠어. 너랑 나는 아무 관계 아니잖아?"

 "그게 아니잖아! 그러면 우리가 쌩판 남남이야? 우리는 친구 관계 아니야?"


 돌아버리겠네. 자기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정말 모르는 거야? 느낌이 매우 안 좋다. 이런 경우 좋게 끝나는 걸 거의 못 봤다. 그냥 친구 관계에 만족할 거라면 게첸이 미쳤다고 공부 도와주고 밥 사주겠냐? 가끔 사줄 수야 있지. 그렇지만 라키사 말만 들어도 안다. 게다가 게첸이 나한테 직접 이야기했었고. 인간 일이란 모르는 거니 정말 라키사 마음이 변해서 게첸과 사귀기로 결심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 정말 게첸과 사귈 마음이 아예 없다면 과연 게첸이 나중에 가만히 있을까? 라키사는 나를 계속 빤히 쳐다본다. 내 말을 또 이상하게 받아들이고 있겠지. 더 이야기해봐야 라키사는 내가 자신과 사귀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 생각할 거다. 단 한 번도 내 말이 제대로 전달된 적이 없으니까.


 "타슈갈, 이건 나와 게첸씨 사이의 일이야. 그러니 너는 이것에 대해 신경 안 써줬으면 좋겠어."

 "뭐?"

 "너는 당장 아다비아와 켈라자야 챙기기도 힘들지 않아? 네 두 애인한테나 충실히 잘 해. 나한테 신경쓰지 말구."

 "라키사, 그게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네 행동을 게첸이 네 생각 그대로 받아들일 거 같아? 게첸은 네가 자기 좋아한다고 생각할걸?"

 "그건 나와 게첸씨가 알아서 할 문제야. 나한테 신경써주는 것은 고맙지만 너한테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아."


 그래. 얘가 내 말을 똑바로 들을 리가 없지. 예전부터 그랬지만 지금은 더 하다. 라키사가 보고 있는 건 오직 내가 아다비아, 켈라자야와 동시에 사귀고 있다는 것 뿐. 내 말을 엉망으로 만드는 벽이 하나 더 생긴 거야. 나도 멍청이지. 얘한테 신경써야 할 이유가 전혀 없잖아? 그냥 신경 끄고 지내면 서로 피곤할 거 하나 없는데 왜 애써 신경써서 서로 피곤하게 만들어? 라키사가 잘 되든 잘못 되든 이제 내 알 바 아니잖아. 라키사가 거부하는데 왜 내가 라키사한테 신경써야해? 게첸 그 새끼랑 어찌 되든 말들 그건 나랑 단 하나도 관계없는 일이야. 라키사와 게첸이 사귀든 말든 나는 게첸 그 새끼가 여기 오면 바로 쫓아내버릴 거니까. 신경 끄라는데 신경 안 끄고 있는 내가 병신이다.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너한테 신경쓰는 내가 병신이지."

 "뭐 그런 것까지는 아니지만..."

 "아니, 그만 말하자. 어서 가. 나 켈라자야 깨워서 점심 먹어야 해."

 "그래. 알았어."


 라키사가 서점에서 나갔다. 마지막에 말이 심했나? 아니야. 그냥 앞으로 라키사한테 아예 신경 끄도록 노력하는 게 맞아. 내가 라키사한테 신경써야 할 이유가 없잖아. 본인이 싫다는데 내가 왜 억지로 신경을 써야해? 라키사와 아직도 사귀고 싶냐고? 전혀! 라키사보다 아다비아와 켈라자야가 천만배 더 낫다. 맨날 성질내고 발광한다 해도 라키사보다는 둘이 더 낫지. 둘은 어쨌든 말은 통하니까. 그래, 깔끔하게 신경 끄자. 앞으로 점심 먹을 거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다. 자기가 싫다는데 왜 그걸 멍청하게 맨날 물어봐대고 있어? 근무 교대 할 때 필요한 말만 하면 된다.



 서점 밖으로 나갔다.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연기를 깊이 빨아마셨다 뱉었다. 마지막에 말이 심했나? 아니야. 차라리 이렇게 깔끔하게 끊어버리는 게 나아. 나는 내 갈 길 가고, 걔는 걔 갈 길 가야지. 이렇게라도 정리해야 했어. 라키사 말에 너무 화가 나서 순간 튀어나와 버린 말. 주워담을 수 없다. 그렇지만 내가 잘못한 것도 없잖아. 미안하다고 할 일이 아냐. 미안하다고 해봐야 그 어떤 것도 달라질 거 없구. 이왕 이렇게 된 거, 앞으로 라키사에게는 그 어떤 것도 신경쓰지 않을 거다. 신경써야 할 이유가 없잖아. 잘 되었어. 내 인생에 전혀 도움되지 않는 골치아픈 일 하나 줄인 거야.


 담배 꽁초를 땅에 던지고 발로 비벼서 불을 껐다. 다시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켈라자야가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고 있다. 나와 라키사가 하는 대화 들었으려나? 그러고보니 켈라자야도 라키사와 요즘 말을 별로 안 하는 거 같던데. 들었든 안 들었든 뭐 상관없겠지. 내가 라키사한테 고백했다가 채인 것도 아니고 친구라면 당연히 해줘야 할 걱정을 해준 거 뿐이니까. 켈라자야와 눈이 마주쳤다. 나를 보며 활짝 미소짓는다. 나도 미소지어 보였다.


 맞아. 라키사보다 켈라자야가 훨씬 낫지. 켈라자야는 내 말을 있는 그대로 듣고 믿어주잖아. 요즘은 예전보다 훨씬 멀쩡해진 거 같구. 함부로 사람을 죽인다고 하지도 않고 와히디야가 시비걸어와도 꾹 참잖아. 처음 켈라자야 만났을 때를 떠올려보면 진짜 많이 좋아진 거다. 전에 와히디야가 켈라자야에게 시비걸었을 때, 예전 같았다면 켈라자야가 그 자리에서 와히디야를 바로 죽이려 들었겠지. 물론 그 자리에서 참고 나한테 성질냈지만, 그게 어디야.


 "점심 먹을 준비 하자."

 "응. 오늘도 호즈라 와?"

 "오지 않을까?"

 "그러면 세 명? 아니면 네 명?"

 "이고는 왠지 점심 먹고 올 거 같은데..."

 "알았어. 그러면 세 명."


 말린 고깃조각과 말린 과일, 곡물 가루, 그리고 물. 점심 준비라고 해봐야 별 거 없다. 언제나 이게 끝이지. 호즈라가 서점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

 "안녕."

 "호즈라, 빨리 와. 점심 먹자!"


 켈라자야가 호즈라에게 손짓하며 어서 오라고 재촉했다. 호즈라는 가방을 의자 위에 올려놓고 나와 켈라자야 쪽으로 와서 앉았다. 그릇에 곡물 가루를 퍼넣고 물을 부었다. 칼로 말린 고깃조각을 썰었다. 말린 과일이야 알아서 집어먹으면 되니 따로 손댈 게 없지. 그래도 말린 풀떼기가 아니라 말린 과일이라는 것에 감사하자. 이제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말린 과일이 아니라 진짜 과일을 먹을 수 있다. 그때가 되면 점심 먹기 전에 내가 가게 가서 과일 좀 사와야지. 제대로 된 아궁이 하나 없는 서점에서 사니 이게 안 좋아. 뭘 해먹을 수가 없잖아.



 점심을 먹고 정리를 끝마쳤다. 계산대 뒤에 앉아 대출카드를 정리하고 돈이 맞게 있는지 확인해 보았다. 틀린 건 없다. 서점에 온 사람이 없는데 책이 계속 대출되고 반납되고 있다. 아침에 사람들이 몰리는 건가? 아니면 이고가 혼자 다 하고 있는 건가? 내가 근무하는 시간에는 사람이 거의 오지 않는데...어쨌든 서점은 장사가 계속 되고 있기는 하구나. 다행이다. 서점이 파리 날리면 여기에서 자리 지키고 있는 것이 매우 눈치보이는데.


 호즈라는 바닥에 방석을 깔고 앉아 서류를 쭉 펼쳐놓고 서류를 보면서 뭔가 부지런히 적는다. 계산대에서 하면 저렇게 바닥에서 하는 것보다 편하겠지만 여기는 비켜줄 수 없다. 여기는 노는 자리가 아니라 일하는 자리니까. 많이 불편해 보이기는 하지만 방법이 없다. 이고와 돈을 모아서 탁자라도 하나 사다 놓을까? 탁자 하나 있으면 밥 먹을 때 바닥에 늘어놓고 먹지 않아도 되고, 식사 끝낸 후 호즈라는 거기에서 일하면 되니까.


 책을 펼쳤다. 진짜 한 글자도 보기 싫다. 이게 마딜어로 되어 있는 책이라면 그래도 억지로 몇 글자 볼 수 있겠지. 그러나 이건 내가 잘 모르는 아드라스어로 된 책이다. 이 책을 보기는 해야 해. 한 글자도 안 보고 아다비아 문병을 갔다가는 아다비아가 또 엄청나게 화내겠지. 그렇지만 봐도 잘 모르겠다. 이것을 열심히 본다고 뭔가 달라질 것이 있을까? 언젠가 학교가 다시 열리기는 하겠지. 학교 가서 수업 잘 듣고 졸업해서 일자리 구하면 아다비아와 켈라자야를 먹여살릴 수 있을까? 그래, 켈라자야야 자기 밥벌이야 어떻게든 할 수 있겠지. 밥벌이 이전에 최소한 내가 일에서 백까지 다 돌볼 필요까지는 없다. 하지만 아다비아는 앞이 안 보이니 그게 아니잖아. 자기 밥벌이 못 하는 건 둘째치고 일에서 백까지 내가 다 돌봐줘야 할 건데. 그 문제가 이 책을 본다고 바뀔까?


 차라리 진짜 저주술에 목 매다는 것이 답 아닐까? 어차피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잖아. 비참한 미래. 비참한 것도 정도껏 비참해야지. 그냥 저주술에 모든 것을 걸어버려? 잘 되면 비참한 미래에서 탈출하는 거고, 못 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잖아. 지금 내게 다가올 미래보다 더 나쁠 미래가 뭐가 있겠어? 저주술을 수련하면 다른 나라로 갈 수 없어. 그렇지만 지금 다른 나라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당장 다른 나라로 가면 뭘 할 건데? 외국인이라고 차별받겠지. 그 차별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서 속은 편할 거다. 그거까지는 좋은데 진짜 뭐 먹고 살아? 나 혼자 간다고 해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잖아. 공사판 가서 벽돌이라도 날라야 하나?


 나는 아드라스인인데 저주술을 쓸 수 있을까? 이고는 나와 자신이 아드라스인이기 때문에 저주술을 수련한다 한들 한계가 있다고 했다. 나는 그것을 극복해낼 수 있을까? 아드라스어는 모르고 마딜어만 아는 나는 마딜인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마딜 땅에서 태어나 여기에서 일하기 전까지 지금까지 쭉 마딜인들과만 어울리며 살았던 나는 마딜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내 몸뚱이 빼고 뭐가 마딜인들과 다른지 솔직히 모르겠다. 그러니 저주술이 육체적 특징을 요구하는 것만 아니라면 나도 저주술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저주술을 수련하는 것에 아무 제약이 없지 않을까?


 "호즈라, 다른 나라 사람들도 저주술을 쓸 수 있을까?"


 호즈라는 갑작스러운 내 질문에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호즈라는 뭐라고 대답할까? 쟤도 참 재미있는 애다. 저주술을 사용하지도 못하면서 저주술을 연구하고 있으니까. 대체 왜 저주술을 사용하지 못하면서 저주술을 연구하는지 모르겠다. 그게 어떤 의미를 갖는다구. 자신의 연구가 맞는지 틀린지 스스로 파악할 수 없다는 이야기잖아. 그래도 열심히 저주술을 연구하고 있으니...


 "아마 그러지 않을까?"


 호즈라는 내 눈을 말없이 빤히 쳐다보다 한참 뒤에야 천천히 대답했다. 나와 호즈라 사이에 앉아 있던 켈라자야는 나와 호즈라를 말없이 번갈아 바라보았다. 저주술 소리 들으니까 신경쓰이나? 켈라자야, 너는 저주술 쓸 수 있잖아. 그렇다고 저주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구. 그러니 너한테 물어보면 너야 당연히 가능하다고 이야기하겠지. 그러나 호즈라는 달라. 쟤는 저주술 사용하지 못하는데 저주술을 연구하는 애야.


 "왜 그렇게 생각해?"

 "다른 나라에서 저주술이 금지되어 있고, 저주술사라는 사실이 발각되면 바로 처형당하니까."

 "그게 왜?"


 호즈라는 담담한 목소리로 내 질문에 대답했다.


 "그런 게 존재한다는 것은 결국 그 세계에도 저주술사가 있다는 거잖아."

 "그게 아니라 마딜인 저주술사만을 겨냥한 것일 수도 있잖아."

 "옛날에 마딜인 중 몇 명이나 마딜땅을 벗어났다고 생각해?"

 "글쎄...그래도 몇 명 있지 않았을까?"


 호즈라는 살짝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네가 외국인인 거야."

 "응? 그게 왜?"

 "마딜 땅이 우르간 대제국으로부터 해방되기 전에 여기를 벗어난 마딜인은 없어."

 "설마...하나라도 있었겠지."

 "아니. 없어."

 "땅은 붙어 있잖아. 어쩌다 하나라도 넘어갈 수도 있잖아."

 "이유는 몰라. 하지만 없어."

 "왜 그렇게 생각해?"

 "그랬다고 하니까."


 마딜이 무슨 섬도 아닌데 여기가 우르간 대제국에서 해방되고 마딜 공화국이 수립되기 전에 여기를 벗어난 마딜인이 한 명도 없겠어? 이건 조금만 생각해봐도 거짓말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는 말이다. 마딜땅이 상당히 긴 기간 고립되어 있었기는 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모든 나라가 자국민이 마딜땅에 들어가는 것을 엄금하고 있었다. 그 약속을 처음 깨고 마딜땅을 무력으로 점령한 것이 우르간 대제국이다. 아무리 그랬다고 해도 한 명도 없었을까? 그리고 우르간 대제국이 마딜땅을 점령한 이후 다른 나라로 간 마딜인들은 당연히 있을 거 아니야.


 이게 왜 내가 외국인이라는 증거인지도 모르겠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정말 이상한 말인데 그걸 그대로 믿지 않아서 외국인이라는 거야? 설마 마딜인들은 그 말이 진짜라고 믿고 있는 건가? 그걸 진심으로 철저히 믿어야만 마딜인이라는 거야? 이해되지 않는다. 이런 것이 어째서 내가 호즈라한테 외국인이라는 소리를 들을 거리가 되는 거지? 이것을 맨정신으로 굳게 믿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 아니야?


 "그러니까 여기서 다른 나라로 간 저주술사는 없고, 다른 나라에서 저주술사는 사형이니까?"

 "응. 그것이 진짜라면 분명히 다른 나라에도 저주술사들이 있을 거야."

 "그 말은 마딜인이 아니라도 저주술을 쓸 수 있다는 거야?"

 "응. 그렇지 않다면 그런 건 존재할 수 없을 테니까. 누군가는 저주술사라는 이유로 사형당하고 있으니 모두가 잘 아는 거 아닐까?"


 내가 마딜땅에서 벗어난 마딜인이 없다는 것을 안 믿는다고 외국인이라고 하는 호즈라의 말이기는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호즈라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마딜인만 잡아서 처형한다는 소리는 아닐 거 아니야. 마딜인 말고도 저주술을 수련하는 인간들이 존재하니 문제인 거겠지. 왜 저주술을 그렇게 탄압하는지까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만약 마딜인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이 저주술을 사용한다면 어떤 저주술일까? 마딜인들이 사용하는 저주술과 같을까? 나나 아다비아, 켈라자야, 호즈라 모두 같은 인간이잖아. 다를 게 없어. 성별만 다를 뿐, 똑같은 인간이야. 결국은 인간이니까 사용하는 저주술도 다 비슷할까? 아니면 외국인이 사용하는 저주술은 뭔가 다른 것이 있을까? 문화 차이 때문에 뭔가 또 달라지려나?


 "아드라스인이 저주술을 사용한다면 그 저주술은 어떨 거 같아?"


 켈라자야가 나를 쳐다보았다. 아냐, 이건 내가 저주술을 수련하겠다는 소리가 절대 아니다. 내가 저주술을 수련하겠다는 말로 받아들이지 마. 이건 정말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 뿐이야. 호즈라는 잠시 말없이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그렇게 뜸을 한참 들이다 대답했다.


 "우리가 사용하는 저주술과 별반 다를 거 없지 않을까? 다 같은 사람이니까."

 "그렇겠지?"


 나나 너나 똑같은 인간이잖아. 아드라스인인 내가 마딜인들보다 키가 크기는 하다. 신체적 차이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 외에는 똑같은 사람이잖아. 그러니 저주술을 써도 다 거기서 거기겠지. 정말 아드라스인이 저주술을 쓸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쉽게 상상하지 못하는 저주술이 있을 수도 있어."

 "왜?"

 "인간이 상상하는 것은 자신이 속한 문화와 관계가 크니까."

 "예를 들면 어떤 거?"

 "그건 네가 더 잘 알 거 같은데? 나는 마딜인이라 아드라스인의 문화에 대해서는 잘 몰라."


 나도 잘 몰라. 내 육체는 아드라스인이지만 딱 그것 뿐이란 말이야.


 "타슈갈, 갑자기 왜 저주술에 관심 가져?"


 켈라자야가 나를 쳐다보며 물어보았다.


 "그냥 내 주변에 주주술사가 하도 득시글대는 거 같아서."

 "진짜 그거 뿐이야?"

 "응. 그거 뿐이야."


 켈라자야는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뭐? 내가 거짓말하는 거 같아? 내 주변에 대체 저주술사가 몇 명이야? 당장 너부터 저주술사고, 바하르, 케르무크도 저주술사고, 루즈카도 저주술사다. 와히디야도 저주술사고, 치롤라도 저주술사고, 자에드와 예라도 저주술사다. 심지어 감비르조차 이제 저주술사야. 왜 이렇게 내 주변에 저주술사가 많은지 모르겠다. 어쨌든 이렇게 저주술사들와 얽히다보니 저주술이 궁금한 건 사실이다. 비참한 미래를 피하기 위해 저주술을 수련해야 하나 싶은 이유 중 하나도 내 주변에 이렇게 저주술사가 득시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한테 뭔가 있어서 이렇게 주변에 저주술사가 득시글한 건 당연히 아니라는 것을 안다. 서점에서 일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엮이고 얽히는 것이긴 해. 그래도 감비르도 저주술을 쓸 수 있게 되었는데 나라고 못할까 싶은 생각이 들기는 한다. 저주술이 의외로 별 거 아니라 내 주변에 저주술사가 그렇게 넘쳐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구.


 "네가 원한다면 내가 저주술 알려줄 수 있어."

 "아니. 별로."

 "언제든 말해. 네가 원하면 내가 알려줄께!"


 켈라자야가 싱긋 웃었다.


 "켈라자야, 혹시 나한테 저주술 가르쳐줄 수 있어?"

 "싫어."


 호즈라가 켈라자야에게 자기에게 저주술을 가르쳐줄 수 있냐고 물어보자 켈라자야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히 거부했다. 호즈라 얼굴에 실망의 기색이 역력하다. 켈라자야, 나한테 저주술 가르쳐줄 생각 하지 말고 진짜 저주술을 원하는 호즈라한테 가르쳐줘. 그러나 이건 해서는 안 될 말이야. 켈라자야는 저주술 자체를 싫어하잖아. 나한테 내가 원하면 언제든 저주술을 가르쳐주겠다고 한 건 나를 좋아한다는 표현 그 이상의 것은 아닐 거다. 물론 내가 저주술을 수련한다고 하면 열심히 가르쳐주려고 하긴 하겠지. 그러나 그것을 나와 함께 한다는 것 때문에 즐거워하는 것이지, 저주술을 가르쳐준다는 것 자체로 즐거워하는 것은 절대 아닐 거다.


 "저주술을 익히는 과정은 끔찍해."


 야, 그게 끔찍한 거면 왜 나한테는 가르쳐주겠다는 거야?


 "다시는 상상하고 싶지 않아. 그렇지만 타슈갈은 내 애인이니까. 타슈갈이 진짜 원한다면 특별히 알려줄 수 있어."

 "아...그렇구나. 내가 네가 어떻게 저주술을 익혔는지 물어본다면 실례겠지?"

 "미안해. 하지만 그 질문 자체가 유쾌하지는 않아."


 켈라자야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호즈라는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말없이 책과 서류를 보기 시작했다. 호즈라는 아직 잘 모를 거야. 켈라자야는 호즈라를 싫어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안해. 하지만 그 질문 자체가 유쾌하지는 않아'라고 말한 거다. 만약 치롤라나 와히디야한테였다면? 성질 버럭버럭 내면서 질문 자체가 역겹다고 소리치지 않았을까?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 정리나 해야겠다. 책에 먼지가 쌓여 있으면 먼지 좀 털어내고 잘못 꽂혀 있거나 엉뚱한 곳에 꽂혀 있는 책은 제대로 꽂아놔야지. 대출 목록을 보니 책이 나갔다 들어왔다 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면 삐딱하게 꽂힌 책이라도 하나 있을 거다. 라키사가 오전 중 잘 해놨겠지만 나도 한 번 점검하기는 해야 한다. 이렇게라도 서점 일을 해야지.


 책장을 훑어보며 입구쪽을 향해 걸어갔다. 정리 참 잘 되어 있다. 라키사가 오전에 제대로 다 해놓고 갔구나. 이러면 내가 오늘 할 일이 진짜 없는데...남은 시간 동안 손님이 몇 명이나 올까? 잘 와야 세 명? 하나도 안 올 수도 있고. 마음 잡고 집중해서 보던 책이나 열심히 봐야겠다. 손님도 없는데 각잡고 앉아서 입구만 바라보고 있을 필요 없잖아. 책장을 다 둘러본 후 다시 자리로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입구가 열렸다. 몸을 문쪽으로 돌렸다. 손님이 없다 싶으니 손님이 오네.


 "야, 네가 여기 왜 와?"

 "내가 여기 오면 안 되는 이유가 있어?"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하필 와히디야였다. 저건 오늘은 또 여기 무슨 일이 있어서 온 거야? 또 켈라자야한테 시비걸려고 왔나? 와히디야는 나를 보며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며 인사한다. 저 인사가 하나도 반갑지 않다. '오늘도 켈라자야와 한 판 뜰 거니까 각오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게다가 그날 밤. 술 취한 것도 아니고 맨 정신으로...몰라. 와히디야가 난리피우면 어떻게든 잡아끌어내야지. 몸을 계산대 쪽으로 돌렸다.


 "켈라자야, 너 타슈갈 좋아해?"

 "응."


 켈라자야가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얼마나? 많이 좋아해?"

 "나는 타슈갈의 애인이야."

 "그래? 진짜?"


 와히디야를 쳐다보았다. 나를 향해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걸어오는 와히디야. 순식간에 벌어진 일.


 "야, 놔!"

 "싫어."

 "놓으라구!"

 "나는 좋은데?"


 이 미친년은 왜 또 나를 꽉 껴안는 거야? 와히디야를 떼어내려고 몸부림쳤다. 그러나 그럴 수록 와히디야가 더욱 세게 나를 끌어안는다. 의자가 뒤로 확 밀리는 소리. 켈라자야가 벌떡 일어났다. 이건 왜 켈라자야한테 시비 걸지 못해서 안달이야? 그리고 나는 왜 껴안아? 두 팔로 아무리 와히디야를 밀어도 와히디야는 절대 안 떨어진다. 좀 놔! 와히디야 두 팔을 잡아 뜯어내려 했지만 내 옷을 꽉 쥐고 놓지 않는다.


 "너 지금 뭐하는 거야?"

 "보면 몰라? 네 애인 껴안고 있잖아."

 "당장 떨어져!"

 "왜? 화났어?"


 이걸 어떻게 뜯어내지? 아주 찰싹 달라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와히디야는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본다. 활짝 웃어보인다. 뭐가 좋다고 지금 웃는 거야? 내가 이렇게 당황해하는 게 웃겨? 켈라자야가 머리 끝까지 화나서 신나? 진짜 이런 미친 짓 좀 그만해! 두 팔을 잡아뜯으려 해도 소용없고 어깨를 밀어도 소용없다. 아주 죽기살기로 나한테 매달린다. 좀 떨어지라구! 이게 제정신이 아니라도 여자니 때려서 뜯어낼 수도 없고 미치겠네! 내 품에 파뭍은 와히디야 얼굴을 손으로 밀쳐내었다.


 "켈라자야, 많이 부러워?"

 "내가 당장 떨어지라고 했지?"


 켈라자야의 부르르 떨리는 목소리. 켈라자야 지금 정말 머리 끝까지 화났다. 이건 내 잘못 아니야! 이게 갑자기 달려들어 나를 껴안는 거 너도 봤잖아!


 "우리 이러는 거 벌써 두 번째야."

 "너 진짜 죽을래?"

 "너는 타슈갈과 이렇게 뜨겁게 포옹해본 적 없지? 나는 벌써 두 번째인데. 두 번째 이렇게 껴안아도 너무 좋아!"


 와히디야를 떼어내려 애쓰며 켈라자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켈라자야는 나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다. 이게 내가 좋아서 그러는 거 같아? 그때도 이렇게 얘가 제멋대로 달려들어 나를 꽉 껴안은 거라구!


 "타슈갈, 당장 걔랑 안 떨어져?"

 "내가 지금 좋아하는 걸로 보여!"


 켈라자야가 나를 향해 당장 떨어지라고 소리쳤다. 나도 내가 지금 좋아하는 거 같아보이냐고 소리쳤다. 진짜 내가 지금 와히디야가 나를 껴안아서 행복해 보여? 기뻐 보여? 절대 아니라구! 이 미친년의 발작에 왜 내가 엮였는지 모르겠다. 하나도 안 즐거워! 지금 전력을 다해 와히디야를 뜯어내려고 발버둥치는 거 너도 뻔히 보고 있잖아!


 "켈라자야, 타슈갈 네 꺼지?"

 "그래!"

 "그러니까 더 갖고 싶잖아. 쓰레기라지만 빼앗고 싶어."


 호즈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뭐하시는 거에요?"

 "보면 몰라요? 타슈갈과 사랑을 나누고 있잖아요."

 "이 미친년아, 내가 너랑 무슨 사랑을 나눠! 좀 떨어져!"


 이게 얼굴에 뚫린 구멍이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막 쏟아내네? 좀 떨어져! 떨어지라구!


 "켈라자야, 이제 화나지 않아?"


 켈라자야를 쳐다보았다. 켈라자야 얼굴이 일그러지다 못해 무섭게 변했다. 온몸을 부들부들 떤다. 주먹을 꽉 쥐고 있다. 와히디야는 켈라자야 모습을 보더니 드디어 나를 놔주었다.


 "켈라자야, 이제 나와 저주술 대결하고 싶지 않아?"


 켈라자야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바보 멍청이라도 지금 켈라자야가 왜 아무 말도 못하는지 알 거다. 입을 여는 것만으로도 있는 힘껏 꾹 누르고 있는 분노가 폭발해버릴 것 같으니까. 켈라자야는 무섭게 와히디야를 노려본다.


 "이걸로는 많이 부족한가 보네? 다음번에는 네 앞에서 타슈갈과 뜨겁게 입맞춤해야겠어."

 "그만해!"


 켈라자야가 소리쳤다.


 "껴안는 것 정도로는 약한가 보네. 너희 진짜 사귀는 거 맞니?"

 "그만해!"

 "켈라자야, 기다려. 나는 네 것을 하나하나 다 빼앗아갈테니까. 그러면 네가 분노해서 나와 저주술 대결을 하려 들지 않을까?"


 켈라자야는 아무 말 하지 않는다. 누가 내 앞에서 켈라자야를 껴안고 이러고 있다면? 바로 뛰어가서 주먹을 날렸을 거다. 머리 속이 엄청나게 복잡하고, 한편으로는 아무 생각도 없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 그리고 이후에 일어날 일에 대한 걱정. 켈라자야의 분노. 와히디야는 켈라자야를 쳐다보다 나를 쳐다보았다.


 "이제부터 너는 내 꺼야. 쓰레기라도 갖고 싶은 쓰레기도 있으니까."

 "꺼져, 이 미친년아! 나는 켈라자야 애인이야! 너 따위를 좋아할 일 절대 없어!"

 "과연 그럴까? 나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어."


 와히디야는 빙긋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들고 서점 밖으로 나갔다. 와히디야가 서점에서 나가자 켈라자야를 바라보았다. 눈물을 글썽이고 입술을 꽉 깨물고 있다. 켈라자야가 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짝!


 "너 왜 안 떼어내었어!"


 따귀를 맞아 정신없는데 켈라자야는 두 손으로 멱살을 잡고 흔들어댄다.


 "내가 떼어내려고 하는 거 못 봤어? 못 봤냐고!"

 "그러면 먼저 피하든가 했어야 할 거 아냐!"

 "저게 저럴 줄 알았어?"

 "그러면 걷어차 버리든가!"


 따귀를 맞으니 화가 쫙 뻗쳐오른다. 내가 뭘 잘못했냐고. 가까이까지 걸어와서 갑자기 달려들어 껴안는 걸 뭔 수로 피해? 내가 안 떼어내려고 했어? 떼어내려고 했는데 와히디야 저 미친년이 거머리처럼 들러붙어서 죽을 힘 다해 안 놔준 거잖아! 내가 좋다고 헤헤거린 것도 아니고 싫어서 발버둥치고 있는 거 뻔히 보고서!


 "어떤 년이 사귀지도 않는데 뜬금없이 껴안아? 나라고 그럴 줄 알았어? 그게 정상적인 상황이었어?"

 "그러면 때려서라도 뜯어내야할 거 아냐!"

 "아무리 미친년이라도 여자인데 어떻게 때려!"

 "그래도 그럴 땐 패서 쫓아내야할 거 아냐!"

 "여자를 어떻게 패!"


 내가 너냐? 아무한테나 막 주먹 날리고 하게? 게다가 와히디야는 저주술사이기 이전에 여자라구! 걔가 나를 죽이려고 달려든 것도 아니고 그냥 매달린 건데 그걸 어떻게 때려서 잡아뜯어내?


 "저주술 써서 쫓아내면 되잖아!"

 "내가 뭔 저주술을 써? 그건 너나 쓸 줄 아는 거구!"


 켈라자야가 바닥에 주저앉아 큰 소리로 엉엉 울기 시작했다.


 '아...괜히 소리쳤다.'


 내가 왜 켈라자야한테 따귀를 맞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순간 화가 솟구쳤다. 내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으니까. 그래도 켈라자야한테 소리치면 안 되었어. 켈라자야가 엉엉 우는 소리를 듣자 이성이 돌아온다. 내가 따귀를 맞은 게 억울하기는 하지만, 켈라자야는 나름 많이 참았잖아. 그것도 내가 참고 함부로 싸우지 말라고 해서 참은 거잖아. 켈라자야를 달래야 한다. 지금 속상한 정도가 아닐 거 아냐. 켈라자야 앞에 쭈그려 앉았다.


 "소리쳐서 미안해."

 "꺼져! 이 나쁜 놈아!"


 켈라자야가 나를 확 밀쳤다. 하마터면 뒤로 자빠질 뻔했다. 그래도 켈라자야를 달래야 한다. 켈라자야를 가볍게 안았다. 켈라자야가 나를 또 밀쳐낸다. 그때 호즈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즈라는 말없이 서류와 책을 주섬주섬 챙겨 서점 밖으로 나갔다. 와히디야 이 망할 년은 왜 자꾸 켈라자야한테 시비걸지 못해서 안달이야? 그리고 왜 나는 곤란하게 만드는 거야!



 오늘은 1116년 5월 23일. 이제 슬슬 서점 문을 닫을 시간이다. 이고는 아침에 오늘 만약 자기가 서점 문 닫을 시각까지 서점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대신 책 수거 좀 갔다와달라고 부탁했다. 문 닫을 시간이 되었는데도 이고는 오지 않는다. 정말 모처럼 책 수거하러 갔다 와야겠다. 오늘 책 수거하러 가야 하는 곳은 딱 하나. 블랑쉬블르 집에 가야 한다. 이고가 오늘 진짜 무슨 일이 있기는 한가 보다. 아니면 블랑쉬블르 집으로 책 수거 가는 일을 나한테 맡길 리가 없지.


 "나 이만 갈께."

 "응."

 "너 다음번에 또 와히디야가 너 껴안게 가만히 있으면 안 돼?"

 "알았어. 다음에는 뭔 수를 써서라도 나를 못 껴안게 할께."

 "와히디야랑 놀아나기만 해봐. 아주 찢어죽일 테니까."

 "내가 그 미친년하고 왜 놀아나!"


 켈라자야가 나를 흘겨보고는 밖으로 나갔다. 와히디야가 켈라자야 앞에서 나를 꼭 껴안는 사건이 발생한 후, 켈라자야를 달래느라 엄청 고생했다. 간신히 울음을 멈추게 하기는 했다. 그래도 내가 그때 와히디야를 두들겨 패서 뜯어내지 못한 게 계속 속상한가보다. 남자가 여자를 때리면 안 된다는 것 자체를 이해 못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 와히디야를 떼어놓으려고 했다는 것을 이해시키기는 했지만 계속 왜 그때 와히디야를 안 때렸냐고 따진다. 그래도 많이 풀어져서 다행이다. 이건 솔직히 내가 풀어줘야할 것도 아니지. 나도 사고를 당한 피해자잖아. 에휴, 그래도 어쩌겠어. 정신이 멀쩡한 내가 켈라자야를 달래야지. 내가 켈라자야 입장이었어도 눈이 뒤집힐 상황이었으니까.



 대출 카드를 챙기고 밖으로 나왔다. 서점 문이 잘 잠긴 것을 확인하고 블랑쉬블르 집으로 걸어갔다. 거리에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이 길 어디에선가 쿠룬나스가 나를 노리고 있는 거 아니야? 지금 어느 골목에서는 또 미친 저주술사가 사람을 죽이고 있는 거 아닐까? 가로등 불빛이 흔들린다. 누가 저주술을 사용하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멀리 경찰 두 명이 보인다. 발걸음을 재촉한다. 경찰 두 명 근처에 있을 때는 그래도 괜찮겠지. 가로등 불빛이 흔들릴 때마다 괜히 신경이 곤두선다. 이유없이 이러는 게 아냐. 어디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어떻게 알아? 이제는 사람들이 살해당하는 것이 일상이니 그런 소식을 들어도 놀라지 않을 뿐이다. 이렇게 밤길을 혼자 걸을 때가 되면 계속 들었던 누군가 살해당했다는 이야기들이 하나 둘 떠오르며 이 도시가 지금 매우 위험하다는 사실을 피부에 솟아나는 닭살을 통해 눈으로 확인하게 된다.


 발걸음을 재촉했다. 밤공기를 오래 쐬는 건 좋을 게 하나도 없어. 미지근한 공기가 몸을 감싼다. 춥지는 않지만 팔짱을 끼고 걷는다.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이 발생할 지 모르니까. 정신 바짝 차려야 해. 켈라자야는 이 도시가 전혀 무섭지 않은 건가? 차라리 서점에서 같이 살아도 되지 않냐고 물어봐! 내가 구석에서 쪼그리고 자도 좋으니까. 걔야 정상이 아니니 이 도시가 하나도 안 무서운 거겠지. 그러고보니 나도 혹시 미친 거 아닐까? 지금은 공포 때문에 몸을 움츠리고 걷고 있지만 서점 안에서는 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잖아. 작년만 해도 누가 살해당했다는 소리를 들으면 경악하고 충격받았지. 그러나 지금은 그런 소식을 들어도 그냥 덤덤할 뿐이야. 뭐 그것이 일상이 되어버렸으니까. 하지만 그걸 일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것 아닐까? 아니야. 그런 것 하나하나에 다 반응하고 놀라고 무서워하다가는 진짜로 돌아버릴 거야.



 블랑쉬블르 집에 도착했다.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책 수거하러 왔어요."


 블랑쉬블르가 방문을 열어주었다. 블랑쉬블르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검은 원피스를 입고 있다. 검은색 정말 좋아하나 보다. 밖에서 만날 때에는 이렇게 검은색을 좋아하는 줄 전혀 몰랐다. 블랑쉬블르가 검은색 옷을 안 입는 것은 아니지만, 검은색 옷을 입은 블랑쉬블르를 본 적은 거의 없다. 단순히 검은색 옷 때문이 아니다. 블랑쉬블르 집 안은 온통 시커멓다. 벽도, 서재도, 탁자도, 의자도 전부 검은색이다. 여기에 지금 검은색 옷까지 입고 있다. 검은색이 뭐가 좋다고 온통 검은색으로 해 놓은 거야?


 "잠깐 들어왔다 가."

 "예."


 시꺼먼 방. 탁자와 벽에 걸려 있는 램프 속 불이 검은 방과 시꺼먼 블랑쉬블르의 옷을 비춘다. 그렇게 검은색이 좋으면 아예 불을 꺼버리면 되잖아. 그러면 방안이 시커매서 온통 검은색 투성이가 될 텐데. 탁자로 가서 의자에 앉았다. 블랑쉬블르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달그락거리는 소리. 물이 끓는 소리. 잠시후, 블랑쉬블르가 컵 두 개가 올라간 쟁반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내 앞에 컵 하나를 놓아주었다. 차 향기가 컵에서 살살 올라온다. 부드럽게 코를 자극하는 꽃향기. 장미향이다. 시꺼먼 방과 장미향. 미묘하게 잘 어울린다. 어둠을 빨아먹고 자란 장미인가?


 "너 저녁은 먹었어?"

 "아니요."

 "아, 그러면 잠깐 기다려."

 "아니에요, 괜찮아요."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 서점에 먹을 것도 없잖아. 식당 가서 음식 같지도 않은 거 주워먹지 말고 먹고 가."


 블랑쉬블르가 다시 주방 안으로 들어가더니 먹을 것을 갖고 나왔다. 하얀 빵, 그리고 고기와 야채가 듬뿍 들어간 수프.


 "나도 아직 안 먹었어. 같이 먹자."

 "누나, 잘 먹을께요."


 말 없이 수프와 빵을 먹는다. 블랑쉬블르도 딱히 말하지 않는다. 수프 국물이 달콤하고 고소하다. 국물 색이 맑고 위에 기름이 둥둥 떠 있다. 기름은 자신 위로 떨어진 불빛을 튕겨내서 보석이 빛나는 것처럼 여기저기 조그만 섬광을 쏘아댄다. 빵을 찢어 수프에 적셔 먹는다. 빵도 거칠지 않고 매우 부드럽다. 블랑쉬블르는 매일 이렇게 좋은 것을 먹을까? 남아드라스 공화국이 여기보다 잘 사는 나라니까 돈이 어느 정도 있기는 하겠지. 그래도 여기에서 돈을 많이 벌지 못한다면 이런 것을 매일 먹기는 어려울텐데?


 "누나는 매일 이렇게 좋은 거 먹어요?"

 "응. 왜?"

 "그냥요. 부러워서요."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잘 먹어야지."

 "그렇네요."


  틀린 말은 아니지.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니까. 하지만 잘 먹으면 돈이 있어야 하잖아. 내가 매일 지금 먹고 있는 것처럼 세 끼를 챙겨먹으면 모아놓은 돈도 홀라당 다 쓰고 거지가 되어버리겠지. 지금은 열심히 먹어야지. 또 언제 이런 걸 먹어볼 지 모르잖아. 당장 내일 점심은 또 곡물 가루에 말린 과일과 말린 고기인데.



 식사를 마치자 블랑쉬블르가 빈 그릇을 들고 다시 주방으로 갔다. 또 다시 물 끓는 소리가 들린다. 조금 후 블랑쉬블르가 컵과 주전자, 조그마한 상자가 올라가 있는 쟁반을 들고 주방에서 나왔다. 탁자에 쟁반을 내려놓고 상자를 열고 거기에서 차를 꺼내어 새 컵에 집어넣고 물을 따른다.


 "저 아직 차 남았어요."

 "그거 이제 맛 없을 거야. 이걸로 마셔."

 "괜찮아요."

 "괜찮기는. 그러면 어서 다 마시든가."

 "예."


 남은 차를 입에 털어넣었다. 블랑쉬블르가 내 앞에 있는 빈 컵을 쟁반 위에 올려놓고 뜨거운 차가 들은 컵을 내 앞에 놓았다. 이 차만 마시고 일어나야지. 블랑쉬블르와 이야기 나눌 것이 딱히 없다. 나한테 짓궂은 말장난을 걸지 않는 한 이 침묵은 계속 이어질 거야. 블랑쉬블르한테 어떻게 하면 누나처럼 돈 많이 벌 수 있냐고 물어볼 수도 없잖아. 그거 말고는 지금 딱히 블랑쉬블르와 나누고 싶은 화젯거리가 아예 없다. 내 일상은 똑같으니까. 아다비아와 켈라자야를 동시에 사귀는 것 때문에 발생하는 고민을 블랑쉬블르에게 하소연하고 해결책을 물어볼 것도 아니구.


 "타슈갈, 요즘 켈라자야는 어때?"

 "특별한 거 없어요."

 "특별한 것 없다니?"

 "항상 같아요. 밤에는 거리를 돌아다니고, 아침에는 서점 와서 자구요. 점심 때 일어나서 같이 밥 먹은 후에는 혼자 책 보기도 하고 낮잠 자기도 하고 그래요. 그러다 어두워지면 또 밖에 나가서 거리 돌아다니구요."

 "그래? 그거 말고 다른 거는 없니?"

 "예, 없어요."


 켈라자야의 일상도 똑같다. 같은 행동의 반복. 딱히 특이하다고 할 만한 것이 있었나?


 '와히디야 이야기는 해서 뭐해?'


 얼마 전, 와히디야가 켈라자야 앞에서 나를 끌어안으며 켈라자야를 도발했다. 그 이전에는 한밤중에 서점에 찾아와 나를 끌어안았었구. 켈라자야는 그때 정말로 엄청나게 분노했었다. 그렇지만 와히디야를 죽이기 위해 덤비지 않고 끝까지 참았다. 이건 켈라자야가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다는 증거이긴 해. 만약 나와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켈라자야였다면 바로 와히디야를 죽이려고 저주술을 썼겠지. 하지만 이번에는 와히디야가 그렇게 도발해도 꾹 참았잖아.


 이건 켈라자야가 예전보다 많이 좋아진 확실한 증거야. 그런데 이걸 블랑쉬블르한테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 켈라자야는 누나 걱정과 달리 나날이 좋아지고 있으니 안심하라고 말할까? 조금 고민된다. 블랑쉬블르가 켈라자야에 대해 왜 관심을 갖고 있는지 모른다. 어쨌든 이건 좋아진 거니 말해도 괜찮을 거 같다. 아닌가? 그래, 아니야. 블랑쉬블르가 와히디야에 대해서도 이상한 게 보이면 알려달라고 했잖아. 이거 이야기하면 와히디야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겠지. 쓸 데 없는 거 말해봐야 나만 귀찮아. 이건 말하지 말아야겠다.


 "와히디야는 어때? 뭔가 이상한 거 있었니?"

 "글쎄요. 걔는 서점에 잊을 만 하면 오는 애라서요. 잘 모르겠어요."

 "아...알았어."


 블랑쉬블르가 말이 없다. 오늘은 나한테 짓궂은 말장난 칠 생각이 별로 없나보다. 그렇다면 이제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도 되지 않을까? 블랑쉬블르와 말할 거리가 아무 것도 없잖아. 밤이 깊어갈 수록 거리는 더 위험해져. 블랑쉬블르도 내일 아침에 일어나야 할 거구. 책이나 받아서 얼른 서점으로 돌아가자. 블랑쉬블르는 탁자만 계속 바라본다. 이제 슬슬 돌아가겠다고 말할까?


 "마딜인들도 알고 보면 참 잔인해."

 "예?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이거 알아볼 수록 어쩜 이렇게 잔인할 수 있을까 싶네."

 "그 인체실험이요?"

 "응. 이거 내 예상보다 훨씬 잔인하고 심각했던 거 같아."

 "뭔데요?"


 블랑쉬블르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하기 시작했다.


 "룬 바사르의 인체 실험은 두 종류로 구성되어 있어. 그러니까 두 가지 실험 결과를 비교해서 결과를 도출하는 방식이었어."

 "예."

 "그 실험은 비르바스 실험과 비를레쉬 실험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거 둘 다 너무 끔찍해."

 "어떤 실험이었는데요? 막 고문하고 신체를 절단하고 하는 거였나요?"

 "어떻게 보면 그것보다 더 잔인하다고 해야 하나?"

 "뭔데요? 그냥 막 죽였어요?"

 "그렇다고 할 수도 있을 거야. 인격 자체를 파괴하는 거였으니까."


 무슨 실험이었기에 블랑쉬블르는 너무 끔찍하다고 하는 걸까? 진짜 인간을 병신으로 만들어놓고 어떻게 정신이 붕괴되어 가는지라도 연구한 건가?


 "비르바스 실험은 끝없는 학대를 가하는 실험이었어. 비를레쉬 실험은 끝없이 칭찬만 해주는 실험이었구. 이 실험을 통해 저주술의 극단이 어디인지 알아보려 했던 거야."

 "학대받는 쪽은 정말 끔찍했겠네요."

 "아무리 차별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하는 것 자체는 너무 심하잖아. 방법 자체가 너무 끔찍해. 피실험체들은 영원히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어."

 "칭찬만 받는 쪽은 행복한 거 아니에요? 뭘 해도 모두가 잘한다 잘한다 해줬을 텐데요."

 "너 정말 그럴 거라고 생각하니?"

 "예. 혼나는 것이 기분 좋을 리 없잖아요."


 칭찬만 받는 인생이라...그건 엄청나게 축복받은 거 아닌가? 학대만 당하는 쪽이야 비참하기 그지없겠지만 칭찬만 받는 인생이라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천국일 것 같은데. 혼나는 게 기쁠 리 없잖아.


 "칭찬만 받는 것도 아이의 인생을 제대로 망칠 수 있어."

 "그래도 본인이 행복하면 그만 아니에요?"

 "너는 끝없는 칭찬이 영원히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해?"

 "예?"

 "그 아이에게는 실험이 끝나는 순간 마주할 현실이 어떤 모습일 거 같니? 과연 그때도 천국일까? 아니면 죽음보다 못한 인생일까?"


 어차피 저주술의 극단을 알아보는 실험이라면 평생 칭찬해줄 거 아냐? 하루 이틀 칭찬하는 수준은 아니었을 거구. 저주술이라는 게 끝이 없는데 그것의 극단을 알아낼 실험이라면 피실험체가 죽을 때까지 계속 진행되겠지. 그나저나 블랑쉬블르는 그 실험의 피실험체가 켈라자야와 와히디야라고 생각하는 건가?


 "누나는 혹시 그 실험의 피실험체가 켈라자야와 와히디야라고 추측하고 있는 거에요?"

 "왠지 그럴 거 같아."

 "설마요."

 "아니야, 아마 맞을 거야."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요?"

 "그냥 감이랄까? 그런데 확실한 증거도 없고 걔네들한테 이걸 물어볼 수도 없어서 문제야."


 그래서 나한테 켈라자야와 와히디야에 대해 특이한 점 있으면 알려달라고 하는 거지. 아닐 거야. 만약 블랑쉬블르의 말이 맞다면 뻔하다. 켈라자야는 끝없는 학대만 가하는 실험인 비르바스 실험의 피실험체, 와히디야는 끝없는 칭찬만 가하는 실험인 비를레쉬 실험의 피실험체였겠지. 아니야. 켈라자야가 그런 끔찍한 과거를 갖고 있을 리 없어. 나를 보며 웃어주잖아. 나를 보며 밝은 표정 지어보이잖아. 그 얼굴 뒤에 생지옥이 숨어 있다고?


 "아무리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해도...이렇게 아이의 인성을 완전히 망쳐놓는 것은 죽이는 거나 마찬가지야. 아니, 더 잔인해. 죽이면 그걸로 고통이 끝나잖아. 이건 죽이는 것은 아니라서 영원히 피실험체는 고통을 끌어안고 살아야만 해."

 "이거 혹시 루즈카도 아나요?"

 "루즈카는 칭찬과 차별이 인간 정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실험 정도로만 아는 거 같아. 나한테 무언가 숨기는 것 같지는 않고...그냥 딱 그렇게만 아는 거 아닌가 싶어."

 "예..."


 만약 그 실험 대상이 진짜 블랑쉬블르 말대로 켈라자야와 와히디야라면 어떻게 되는 걸까? 둘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주기 위해 숨통을 끊어야하나? 아니야. 미쳤어?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게 낫잖아! 그리고 그 둘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실험의 피실험체였을 리도 없어. 만약 둘이 진짜 비르바스 실험과 비를레쉬 실험의 피실험체였다면 이렇게 여기를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지도 못했겠지. 끝없는 저주술의 극단을 알아내기 위한 실험이라면 피실험체의 평생을 관찰해야 할 텐데. 와히디야는 모르겠다. 하지만 켈라자야는 여기에서 혼자 자기 마음대로 잘 지내고 잘 돌아다니고 있잖아. 그 누구도 켈라자야를 감시하는 것 같지 않고. 그러니 아닐 거야.


 "만약 그 실험 대상이 켈라자야와 와히디야라면 어떻게 할 거에요?"

 "글쎄...우리는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무슨 방법요?"

 "둘을 정상인으로 만드는 방법. 그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잖아. 너 켈라자야와 사귀고 있잖아."

 "예."

 "너 진심으로 켈라자야 사랑해?"

 "예?"

 "괜찮아. 너 놀리려는 거 아니니까. 너 진심으로 켈라자야 사랑해?"

 "예."

 "그러니까."


 진심으로 켈라자야를 좋아해.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 자체가 불편하다. 블랑쉬블르 말이 왠지 맞을 것 같단 말이야. 켈라자야가 성질 죽이고 참고 있는 것 또한 켈라자야가 진짜 좋아져서가 아니라 '나한테 학대당하는 것이 무서워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게 되어버릴 것 같단 말이야. 아니야. 켈라자야는 진짜로 좋아지고 있는 거다. 내가 켈라자야한테 공격적이거나 위협적인 무언가를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잖아. 오히려 켈라자야가 나한테 그랬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일단 어떤 상태인지 그 대상자들을 직접 봐야 방법을 찾지."

 "저주술일까요?"

 "아니. 저주술은 해결책이 절대 아닐 거야. 그건 말이 안 되잖니. 피실험체는 분명히 저주술사일텐데 깨진 정신을 스스로 저주술로 회복시킨다니...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저주술은 답이 아닐 거야."

 "예."

 "그러니까 켈라자야와 와히디야 행동 중 이상하거나 특이한 거 있으면 나한테 바로 알려줘. 알았지?"

 "예."



 책과 연체료를 받아 서점으로 돌아왔다. 이고는 아직도 서점에 안 돌아왔다. 정리하고 방으로 들어가 내 자리로 가서 드러누웠다. 켈라자야는 지금 이 도시 안 어느 곳에 있을까? 비르바스 실험과 비를레쉬 실험. 켈라자야와 와히디야. 연관 없을 거야. 블랑쉬블르의 감이 틀린 거야. 켈라자야를 흔들어 깨웠더니 잘못했다고 싹싹 빌던 모습이 떠올랐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그런 거 아니야. 그냥 꿈을 이상한 것 꾸었던 것일 거야. 켈라자야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있어...죽음보다 무서운..."


 믿고 싶지 않아. 아니야! 그건 틀린 거야!


 "나 말이야, 빨간 비도 본 적 있다!"

 "응. 그래서말이야, 내가 너 죽여줄께."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장면들. 그럴 리 없어. 만약 블랑쉬블르 말이 맞다면...그건 블랑쉬블르가 알아낸 것, 블랑쉬블르가 추측하고 상상한 것보다 더 끔찍하고 비참하고 잔혹한 어둠이 켈라자야 내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소리다. 좋아진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변한 것 뿐이라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럴 리 없어. 켈라자야는 지금 좋아지고 있어. 아무리 자신의 과거를 나한테 계속 숨기고 왜 어둠 속을 돌아다니는지 안 말해줘도 그런 것 때문은 아니야. 아니어야 해.



 1116년 5월 27일. 오늘도 평상시와 같다. 라키사는 집으로 돌아갔고, 나와 켈라자야, 호즈라는 같이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 나는 계산대에 앉아서 책을 보고 있고, 켈라자야는 내 옆에서 책장을 넘기고 있고, 호즈라는 서류를 정리하고 책을 본다. 어제 아다비아를 보러 갔을 때 아다비아가 화를 덜 내었다. 책을 몇 자 보고 가니 그래도 화는 덜 내더라. 노력해야지. 걔가 화를 덜 내었다는 것만으로도 걔를 위해 뭔가 하긴 했다는 거잖아. 내가 아다비아 보러 아예 안 가면 안 왔다고 또 난리니까 가기는 해야 하고, 그러면 덜 화내게 하는 게 걔를 위한 길이다. 이고도 별 말 없고 켈라자야도 별 말 없고 루즈카도 별 말 없는 걸로 보아 아다비아도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게 분명해. 그러다보면 좋아지고 어떤 길이 보이겠지. 지금 아다비아도 여기 있으면 참 좋을텐데. 바랄 걸 바라자. 눈도 안 보이는 애가 여기 올 수 없잖아. 내가 걔를 항상 돌봐줄 수도 없구.


 "안녕하세요."


 서점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차라클라야다!


 "안녕하세요."


 호즈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차라클라야도 호즈라에게 인사했다.


 "어? 호즈라, 차라클라야 알아?"

 "응. 내가 자주 가던 식당에서 차라클라야가 일해서 알고 있어."

 "아...어디인데?"

 "에드자 대학교 근처야."


 켈라자야는 차라클라야를 유심히 쳐다본다. 차라클라야는 켈라자야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내쪽으로 돌렸다.


 "아, 책 보고 싶은 거 있으면 봐요."

 "고마워요!"


 차라클라야는 서점 안을 천천히 돌아다니며 어떤 책이 있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차라클라야 옆으로 다가갔다.


 "혹시 특별히 관심있는 분야 있어요?"

 "아니요. 어떤 책이 있나 보고 있어요."

 "찾는 책 있으면 부담없이 말해줘요."

 "고마워요."


 차라클라야가 수줍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서점 안을 돌아다니며 책을 둘러보던 차라클라야가 책 한 권을 뽑았다. 저기는 마딜어로 된 책은 없고 아드라스어와 셀베티아어, 대륙 공통어로 된 책만 있는 책장인데? 어떤 책을 뽑아서 펼쳤는지 보이지는 않지만 아드라스어, 셀베티아어, 대륙공통어 - 셋 중 하나로 된 책이다. 여기에서 마딜어로 된 책이라고는 저주술 책 빼고는 없으니까. 저주술 책이 꽂혀 있는 책장이 아니니 외국어로 된 책이다. 차라클라야가 책을 펼쳤다. 책장을 한 장 한 장 유심히 살펴보며 넘긴다.


 "대학교 가면 이런 것을 배우는구나."


 차라클라야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차라클라야 옆으로 다가갔다.


 "많이 어렵나요?"

 "제가 모르는 말이에요."


 차라클라야가 보고 있는 책이 어떤 책인지 보았다. 아드라스어로 된 책이다. 무슨 책이지? 읽기 어렵네. 대체 무슨 책을 뽑은 거야? 표지 좀 보자고 하면 매우 불쾌해하겠지? 이건 내가 아는 단어다. '사회', '구성'...이거 사회와 관련된 책 같은데? 정치야, 사회야? 내가 아는 단어들과 해석할 수 있는 문장들만 갖고는 뭔지 모르겠다. 어쨌든 사회 아니면 정치 관련 책 같은데...마딜어로 된 책이 있나? 책장에 꽂힌 책을 쭉 훑어보았다. 그런 게 있을 리 없지. 저주술 말고 마딜어로 된 책이 있었다면 내가 모를 리 없잖아. 신기해서라도 봤을 테니까.


 차라클라야는 책을 다시 책장에 꽂아넣었다. 다른 책을 뽑아서 다시 펼쳐든다. 이번에는 셀베티아어. 역시나 몇 장 넘기다 책을 덮고 책장에 책을 꽂았다. 다른 책을 뽑아서 펼쳐든다. 이번에는 대륙공통어. 역시나 몇 장 넘기다 바로 덮고 책을 책장에 꽂았다. 셀베티아어, 대륙공통어는 나도 아예 모른다고 해도 될 정도다. 셀베티아어 전공이기는 하지만 셀베티아어 수업은 거의 없어서 셀베티아어를 몇 마디 배우지도 못했다. 여기에 셀베티아인들이 보이지 않아서 진짜 살아있는 셀베티아어를 들어본 적도 없구. 셀베티아어는 마딜 공화국 동북쪽으로 가면 접할 수 있다고 하던데 나는 거기랑 아예 인연이 없으니까. 대륙공통어는 공부 안 한 지 대체 언제야? 그건 원래 아는 것도 별로 없었지만 그나마도 거의 다 까먹었다. 차라클라야가 셀베티아어, 대륙공통어를 알까? 아드라스어도 모르는데 그걸 알 리가...


 "원한다면 제가 알려줄 수 있어요."

 "아니에요. 제가 타슈갈 일하는데 방해하는 것 같아서 미안한 걸요."


 그때 켈라자야가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원한다면 제가 알려줄께요."

 "진짜요? 하지만 저 때문에 방해되잖아요. 일하셔야 하는데요."

 "아니요. 나는 여기에서 일하는 게 아니에요. 그냥 시간 보내는 중이에요. 그러니 상관 없어요."


 호즈라도 한 마디 했다.


 "차라클라야, 언제든 공부하고 싶으면 제게 도와달라고 해요. 제가 도와줄 수 있어요."

 "모두 정말 고마워요!"


 차라클라야가 활짝 웃었다. 진짜 예쁘다! 저런 예쁜 웃는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매력적이다. 내 주변에 꿈을 갖고 그 꿈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이 누가 있을까? 감비르 빼고. 없다. 다 현실에 찌들어 죽지 못해 사는 거잖아. 나도 그냥 살아 있으니까 사는 거고, 이고도 마찬가지고, 켈라자야, 아다비아라고 다를 거 없겠지. 루즈카, 블랑쉬블르도 마찬가지일 거구. 나아지기 위해 전력을 다해 노력하는 모습을 언제 마지막으로 봤지? 이 도시 사람들 전체가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려고 하지 않아.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한다는 사람들 다 그냥 하던 거니까 하고 있는 거 뿐일 거다. 심지어는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사람들을 마구 죽여대는 미치광이 저주술사조차도! 그런데 얘는 아니야. 차라클라야는 진심으로, 전력을 다해 진짜 자기의 꿈을 향해 나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어. 차라클라야가 그걸 말하지 않아도 알아. 몇 번 본 건 아니지만 확실히 느껴져. 생기와 역동성이 느껴져. 아주 강하게!



 차라클라야는 책을 몇 권 더 펼쳐보다 다음에 공부할 준비를 하고 오겠다고 말하고 나갔다. 다시 서점이 조용해졌다. 우리들 모두 다시 각자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내 할 일이라고는 멍하니 계산대 뒤에 앉아서 자리를 지키는 것. 이제 정신차리고 다시 책 봐야지. 아다비아가 도와줘서 본 내용이라도 제대로 복습해서 가자. 그것만 해도 아다비아가 화를 덜 내니까.


 "누가 나한테 저주술 알려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호즈라가 중얼거렸다. 저건 중얼거리는 소리치고 너무 크잖아? 켈라자야보고 들으라고 한 소리겠지? 아까 켈라자야가 차라클라야한테 자기가 공부 도와준다고 한 거 보고 그러나? 호즈라는 당연히 저주술 수련을 해봤겠지? 저주술 연구하면서 저주술을 쓸 줄 모른다는 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것인지는 자기도 잘 알 테니까. 그래도 안 되어서 저주술 못 쓰는 거겠지. 이상할 거 없어. 호즈라는 계속 켈라자야가 자기 연구 도와주기를 바랬으니까. 켈라자야는 그게 저주술 연구라 거절하는 거구. 켈라자야는 아무 소리 못 들은 척 한다. 당연하지. 켈라자야는 저주술 자체를 싫어하니까.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혐오하는 거 아닌가 싶어. 저주술을 혐오하는 저주술사라...이해가 안 되지만 이해가 될 거 같기도 해. 만약 블랑쉬블르 말이 맞다면...아니야. 그럴 리 없어. 그냥 쟤는 저주술에 천부적 재능이 있어서 어떻게 자연스럽게 저주술을 깨우친 거야. 그래서 그게 힘든 건지, 소중한 건지 모르고 오히려 그 능력이 싫은 것일 거야. 그렇게 믿을 거야.


 "내가 저주술만 알았어도 연구가 훨씬 빨리 잘 진행될 텐데..."


 역시나 켈라자야는 호즈라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무시한다. 호즈라가 지금 중얼거리는 건 혼잣말이 아냐. 혼잣말을 가장한 켈라자야한테 하는 말이지. 호즈라를 쳐다보았다. 저럴 줄 알았다. 켈라자야를 쳐다보고 있잖아. 켈라자야는 책만 쳐다본다. 못 들었을 리가 없어. 책에 아무리 몰두한다 해도 저 소리를 못 들을 수는 없거든. 아주 대놓고 들으라고 큰 소리로 중얼거리는 건데.


 "켈라자야, 나는 네가 정말 부러워."

 "저주술 때문에?"

 "응."


 켈라자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도 너처럼 저주술사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저주술은 모르는 게 오히려 행복한 거야."


 켈라자야가 호즈라를 쳐다보지 않고 시선을 계속 책에 고정한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렇지만 저것 또한 호즈라를 향해 들으라고 하는 혼잣말이지. 장면 웃기네. 둘 다 혼잣말인 척 하면서 이야기하고 있어. 그냥 서로 대화를 나눠도 상관없잖아. 뭐 거창한 내용에 서로 숨겨야할 속마음을 보여주는 척 다 들으라고 큰 소리로 중얼거리는 거야?


 "켈라자야, 나는 네가 정말 부러워. 너는 저주술을 쓸 수 있잖아."


 호즈라가 켈라자야에게 제대로 말을 걸었다. 켈라자야는 여전히 책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네가 나한테 저주술을 알려준다면 정말 기쁠텐데...내가 저주술을 쓸 수 있다면 이 연구도 보다 빠르고 잘 진행될테구..."


 켈라자야가 호즈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호즈라, 저주술은 모르는 것이 오히려 행복한 거야."


 호즈라는 켈라자야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알고 불행한 것이 모르고 행보한 것보다 낫지 않아?"

 "글쎄..."

 "나는 그렇게 생각해. 불행해지더라도 모르는 것보다는 아는 게 더 나아."


 켈라자야는 호즈라 말에 피식 웃었다.


 "호즈라, 나 너한테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응. 뭔데?"

 "너 맞아본 적 있니?"

 "뭐?"

 "내가 너를 때리겠다는 말이 아니야. 정말 궁금해. 너는 누군가한테 맞아본 적 있니?"

 "있어."

 "어떻게 맞아보았어?"

 "어렸을 적 잘못하면 어머니께서 회초리로 내 손바닥을 때리곤 하셨어."


 켈라자야는 다시 한 번 피식 웃었다. 가소롭다는 걸까, 정말 우습다는 걸까. 아니면 너도 그것보다 훨씬 더 심하게 맞아본 거 뻔히 아는데 왜 나를 속이려 드냐는 걸까. 호즈라는 계속 켈라자야를 응시한다. 켈라자야가 피식 웃어버린 것 때문에 기분이 조금 상했겠지? 그렇다고 호즈라한테 '켈라자야는 어머니께 회초리로 손바닥 맞는 정도보다 더 심하게 맞아봤어'라고 말할 수 없잖아. 솔직히 켈라자야가 나와 만나기 전까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나도 거의 모른다. 켈라자야가 심하게 맞아봤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고, 그때는 안 믿었지만 지금은 그게 진짜였을 수도 있겠다 싶은 거 뿐이다. 켈라자야는 나한테도 자기의 과거, 그리고 밤에 자기가 뭘 하면서 이 도시를 돌아다니는지 이야기해주지 않아. 이런 걸 떠나 그런 걸 켈라자야 대신 내가 말해주는 것 자체가 엄청 이상하잖아.


 "너, 그거보다 사람을 더 심하게 두들겨 팰 수 있는 거 알지 않아?"


 켈라자야가 한 말 속에 담긴 진심을 들었다. 너 정말 한심하구나. 고작 그거 가지고 지금 누군가한테 맞아봤다고 하는 거야?


 "그러면 너는 맞아본 적 있어?"


 이번에는 호즈라가 켈라자야에게 물어보았다. 켈라자야는 호즈라의 질문에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나도 너만큼..."


 호즈라도 피식 웃었다. 호즈라는 켈라자야도 결국 자기처럼 어렸을 적 어머니한테 회초리로 맞은 정도로만 맞아봤다고 짐작하겠지. 아니야. 예전에 켈라자야가 해줬던 말, 그리고 지금까지 옆에서 본 켈라자야의 모습으로 미루어 볼 때 호즈라가 어렸을 적 맞아본 경험과 켈라자야가 어렸을 적 맞아본 경험은 아예 달라. 켈라자야가 맞아본 건 회초리로 손바닥 몇 대 맞는 수준보다는 확실히 훨씬 더 심해. 차마 제대로 말하지 못할 뿐이지. 그걸 말하기 위해 떠올리는 것 자체가 너무 괴로워서 말을 못하는 것일 거야.


 켈라자야가 정말 좋아진다면 그때 되어서 내게 자기 과거 이야기를 해줄까? 밤에 왜 돌아다니는지, 돌아다니면서 뭘 하는지 내게 말해줄까? 지금 켈라자야는 계속 조금씩 더 좋아지는 것 맞겠지? 맞을 거야. 아다비아도 나날이 안정을 찾아가고 있고, 켈라자야도 조금씩 정상이 되어 가고 있어. 이상하게 생각할 것도, 의심할 필요도 없어. 이대로 천천히 조금씩 좋아져가면 되는 거야.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