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기적과 저주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3장 10화

좀좀이 2018. 3. 29.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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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3장 10화


 "또 시작인가? 이 미친놈들."


 척추가 뽑힌 할머니의 시체. 가죽만 남아버린 시체도 보았고, 온몸이 터져 죽는 사람도 봤다. 이제는 사람의 목과 척추를 뽑아버리는 저주술. 며칠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순간이 선명히 기억난다. 잊을 수가 없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너무나 어두운 밤이라 그 시체가 아주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낮에 봤다면 그 시뻘건 피와 하얀 뼈와 붉은 살이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았을 거다. 그랬다면 아마 꿈속에 그 할머니 시체가 등장했을 거다. 내 목을 뽑으려 들었을 수도 있다.


 누가 그렇게 할머니를 죽인 걸까? 케르무크 말대로 그 할머니는 우르간 대제국군의 팔을 잡고 마딜인 여자와 즐기는 거 어떠냐고 했을 거다. 그래도 그것이 그렇게 척추까지 뽑아 죽일 정도로 잘못된 것일까? 우르간 대제국군은 분명 나쁜놈들이다. 그런 놈들에게 마딜인 여자들이 몸을 팔도록 도와주는 건 분명히 쓰레기짓이야. 그렇지만 그건 그때 일이잖아. 그렇게 죽이고 싶었다면 여태까지 왜 살려둔 거야? 그리고 그 할머니는 먹고 살자고 한 일일 거다. 그 할머니가 없었다 한들 몸 파는 마딜인 여자들이 우르간 대제국군에게 몸을 안 팔았을까?


 '진짜 그만 좀 하라구. 제발!'


 이건 다 미친 거야. 누가 옳은지 그른지도 모르겠다. 저주술이 자유와 평등과 진리? 그래, 저주술사들에게는 마음껏 아무나 죽일 자유와 똑같이 죽어나가는 평등이고,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서 죽으니까 진리겠지. 그딴 짓 하려면 너희들끼리 모여서 해. 왜 나처럼 저주술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 저주술 때문에 항상 긴장과 공포를 느끼며 살아야 하는데? 이럴 바에는 저주술을 다 때려잡는 게 훨씬 낫다. 그러면 최소한 언제 어떤 사람이 어떻게 죽을지, 그리고 그 '어떤 사람'이 바로 내가 아닐까 하는 공포를 계속 느끼며 지낼 일은 없을 거다. 저주술이 어떻게 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다. 저주술사가 나를 위해 해준 게 도대체 뭔데? 내 인생에서 저주술사가 도움이 된 적이 솔직히 단 한 번이라도 있어? 바하르와 켈라자야가 저주술사이기는 해. 하지만 걔네들이 저주술로 내게 도움준 것은 아무 것도 없잖아. 켈라자야가 저주술로 담뱃불 붙여준 거? 그딴 건 내가 돈 몇 푼 내고 성냥 사서 붙여도 돼! 이 망할 저주술 때문에 일에서 백까지 다 엉망진창이 되었다. 이런 게 진리야? 모두의 삶을 다 엉망으로 만들고 모든 사람을 다 미치게 만드는 것이 진정한 진리라는 거야? 그딴 것이 진리라면 너네들끼리 실컷 진리를 알아. 나는 거짓을 알 테니까. 진리 따위 관심도 없고 너네끼리 실컷 싸우고 죽이면서 진리니 나발이니 떠들라고! 나는 이 나라 떠날 테니까!


 머리와 척추가 뽑힌 할머니 시체. 눈만 감으면 떠오른다. 한동안 조용하다 싶었더니만 그것은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이 서점으로 오다 추위에 얼어붙어 땅으로 툭 떨어져버린 거였나? 그나마 좋아지고 있다고 느꼈던 것은 단지 나의 착각이었을까? 아니면 추워서 다 집에 틀이박혀 있었던 거야? 날 풀리니까 다시 살육의 축제를 벌이러 다 기어나오는 거야? 제발 좀 그만하자. 진짜 이 미친 짓 좀 그만하자구! 저주술사들 다 잡아다 싸그리 어떤 곳에 가두어놓고 너희들끼리 실컷 싸우고 죽이라고 하고 싶다. 자유니 평등이니 진리니 헛소리 다 집어치우고 거기서 꼴깝떨며 하고 싶은 거 다 하다가 알아서 결론내라고 하고 싶다. 그러면 최소한 나 같은 저주술과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은 겁에 질려 살아야할 일이 없겠지.


 '그래도 전보다는 조용하네.'


 예전에는 어느 동네에서 누가 저주술사에게 죽임을 당하면 누가 어떻게 죽었다고 소문이 쫙 돌곤 했다. 이번에는 새로운 살해 방법이라 또 에드자 전체가 뒤집어지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조용하다. 서점과 그 주변만 돌아다니고 있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그 할머니에 대해 떠드는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이고도 새로운 미친놈이 등장했으니 조심하라고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이고가 그 사건 자체에 대해 아는지도 모르겠다. 이고에게 그날 밤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딱히 이야기해서 좋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단 간 곳 자체가 좋은 곳이 아니었구.


 '그 시위하던 새끼들 다 또 들고 일어나서 할머니 죽인 놈 잡아야하는 거 아냐?'


 정말 웃긴다. 자유니 진리니 떠들며 시위하던 새끼들이 이럴 때는 또 엄청 조용하다. 이거야말로 중요한 문제 아냐? 엄한 사람들 잡아다 죽이고 있는데. 정말 애초에 그 '자유와 진리'라는 것이 엄한 사람들 마구 죽이는 거 아니야? 진지하게 그렇게 믿어도 되지 않을까 싶다. 그 할머니가 우르간 대제국군 병사를 잡고 마딜 여자와 몸을 섞으라고 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사람들 잡고 여자 몸을 사라고 하는 짓 자체가 잘한 행동은 아니지. 그래도 그 할머니가 남에게 딱히 피해준 건 없잖아? 그 동네가 원래 그런 동네라 그런 목적 갖고 가는 거야 다 아는 사실이구. 무슨 다른 평범한 동네에서 그런 짓해서 동네 망신을 시킨 것도 아니고 원래 그런 동네에서 그런 짓을 한 거다. 악력이 세기는 셌어. 하지만 그 할머니를 죽인 놈은 분명 나쁜놈이잖아. 그 할머니만 죽이고 끝낼 거라는 보장도 없다. 그런 모두의 생존에 위협이 되는 놈을 잡아족쳐야 하는 거 아냐? 그렇게 자유와 진리가 중요하다면 말이다.


 '하여간 죽는 놈만 억울하다니까.'


 그래, 그 할머니 죽은 거에 누가 신경쓰겠냐? 백주대낮에 사람들 많은 곳에서 그런 식으로 죽임을 당했다면 그나마 신경쓰는 사람들이 조금 있었을 거다. 무섭기도 하고, 그 혐오스러운 장면이 기억에 남아 괴로워지기도 하니까. 하지만 한밤중이었다.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우리가 그 할머니를 지나친 후 몇 명이나 또 그 할머니 앞을 지나갔는지 모르겠지만 얼마 되지 않을 거다. 그러니 그 할머니 시체 때문에 괴로울 사람 자체가 별로 없다. 그 할머니가 그 동네에서 유명한 인물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그런 유명한 인물이라면 그 밤중에 지나가는 남자들 팔을 잡고 놀다 가라고 하지도 않았겠지. 그러니 아무도 신경 안 쓴다. 경찰들이나 조금 신경쓰겠지. 저주술사 중 몇 명 정도 신경을 쓸까? 그 할머니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실력 좋은 저주술사가 사람을 죽였다고 말이다. 그 할머니는 그날 밤 정말 재수없었던 거다. 개죽음 당한 거다. 누가 제대로 장례나 치루어주었을지 모르겠다. 들판에 내던져서 짐승들이 뜯어먹게 방치하지나 않았으면 다행일 거다. 그 할머니나 나나, 그리고 내 주변의 사람들이나 죽는 놈만 억울한 거다. 루즈카 정도는 조금 다를 건가? 루즈카는 저주술사들 사이에서 꽤 유명하다고 하는 거 같기도 하니까. 그 외에는 죽으면 그냥 끝이고, 땅에 뭍어주면 그걸로 고마운 거다.


 '진짜 제발 좀 좋아져라.'


 내가 그렇게 큰 것을 바라는 건가? 무슨 부자가 되고 싶고, 천하를 호령하고 싶다고 하는 것도 아니잖아. 아다비아가 눈을 다시 뜨는 기적까지도 바라지 않는다. 그냥 맨정신으로 평화롭게 지내는 것. 여기저기 먹을 게 널려 있고 모두가 하하호호 웃는 세상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딱 그 망할 폭도들의 시위 이전 시점처럼, 그 정도의 평화만 바랄 뿐이다. 교실에서 투명 인간 취급 받아도 좋으니까, 아무리 봐도 대체 알 수 없는 외국어로 된 책 잡고 밤새 머리털 쥐어뜯어도 좋으니까! 딱 그 정도만! 이게 그렇게 엄청난 욕심이야?


 '역시 인식론을 배워야 해.'


 정부가 강제로 배우게 한 인식론. 그게 시작이었지. 하지만 그걸 배웠어야 했어. 그게 답이었던 거야. 그거 안 배우겠다고 날뛰던 폭도놈들은 다 몽둥이로 피떡이 되도록 패야 했다. 아니, 그냥 피떡이 되도록 때려서 죽여야 했다. 결국 걔네들이 날뛰면서 이렇게 된 거니까. 저주술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단지 이 상황 자체가 저주술 때문이고, 이 상황은 매우 미개하고 잘못된 거라는 것만 알겠다. 그래, 다 착각이야. 느낌이니 뭐니 하는 것을 믿고 그에 충실해서 움직이니 지금 여기가 이 모양 이꼴이지. 저주술 자체는 존재한다. 그건 착각이 아니야. 그렇지만 그렇게 '마음 가는대로' 움직이는 것 자체를 옹호하는 것 자체는 아주 잘못된 거다. 골통을 부셔서라도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질서가 유지될 거다. 마음 가는대로 저주술사들이 행동하니까 힘없는 사람들만 죽어나가잖아.



 밖으로 나갔다. 아무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역시 죽은 놈만 병신이라니까."


 담배를 입에 물었다. 에드자에서 그 할머니가 죽었다고 달라진 건 없다. 나 혼자 그 할머니 시체를 보고 또 충격받았을 뿐. 순간 게첸이 떠올랐다. 그 돼지새끼가 죽으면 조금은 시끄러워지려나? 그 무리들 사이에서는 조금 시끄러워질 수도 있겠다. 막 진리를 위해 싸우다 살해당한 열사라고 자기들끼리 추앙하고 물고 빠는 거 아니야? 다시 그날 밤 게첸 집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그때 아주 허리도 탕탕 튕겨줄 걸 그랬나? 아니야. 그랬으면 분명히 말로 안 끝나고 주먹이 오갔을 거다. 2대 1로 싸워야 하니 내가 불리하다. 그러니까 진작에 자기들끼리 물고 빨고 상처를 어루어만져주네 이해를 해주네 꼴깝을 떨 것이지, 왜 자꾸 나한테 와서 신세 타령이야? 어쨌든 그날 정말 나는 잘 했다. 그 일 이후 게첸이 서점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으니까. 라키사를 통해 책을 빌려가는 일도 하지 않구. 그 할머니를 죽인 저주술사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 할머니를 죽일 게 아니라 게첸 같은 놈을 죽였어야 했어. 맨날 우는 소리 하는 놈, 주변 사방팔방 다 피곤하게 만들 건데 그런 놈 모가지와 척추를 뽑아버리면 세상이 더 조용해질 거 아냐? 진짜 내가 미쳐가는 건가? 에드자가 미쳐가니까 덩달아 나도 미쳐가는 건가.


 이고가 오늘 하루 종일 서점을 봐줄 수 있냐고 부탁했다. 루즈카가 아다비아 때문에 하루 종일 집에만 붙어있어야 해서 오늘은 이고가 아다비아를 돌봐주기로 했다고 했다. 라키사는 오늘도 무슨 모임에 간다고 일찍 퇴근했다. 켈라자야는 방 안에서 잘 자고 있다. 내 주변에서만 일이 안 터지면 돼. 누가 죽든 말든 내 알 바인가. 그렇게 생각하자. 모든 걸 다 생각했다가는 내 머리가 터져버릴 거다.



 "안녕하세요."


 누군가 아드라스어로 내게 말을 걸었다. 고개를 돌려 누가 말을 건 것인지 바라보았다. 아드라스인 남자였다. 마딜인보다는 큰 키이지만 아드라스인 기준으로는 그다지 큰 키가 아니었다. 길게 길러 묶은 머리카락은 그 끝이 허리까지 닿았다. 피부는 정말 하얬다. 여자들이 보고 부러워할 정도로, 얼굴에서 피를 쫙 빼버린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흰 피부에 입술은 유독 붉어서 하얀 밀가루 포대에 올려놓은 새빨간 앵두 같았다. 눈꼬리는 아래로 쳐져 있었고 눈이 매우 가늘었다. 눈이 별로 안 좋은지 안경을 쓰고 있었다. 몸에 살집이 조금 있었고, 어깨가 떡 벌어져 있었다. 몸이 근육으로 인해 매우 탄탄해보였다. 덩치가 별로 크지는 않지만 만만하게 보아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몸이었다.


 "안녕하세요."

 "여기에서 아드라스인을 만나서 정말 반가워요."

 "저 아드라스어 잘 몰라요."

 "그래요?"


 아드라스인 남자는 놀랐는지 눈을 크게 떴다. 이 반응이 전혀 놀랍지 않다. 고향에서 종종 겪었던 일이다. 고향에서 아드라스인들이 나를 보고 아드라스어로 말을 걸었다가 내가 아드라스어를 못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곤 했다. 그래도 지금은 그때보다 아드라스어 실력이 많이 좋아진 거다. 지금은 '저 아드라스어 잘 몰라요'라는 말이라도 아드라스어로 할 수 있으니까. 이 정도라도 하게 된 데에는 아다비아의 도움이 참 컸다. 지금 아다비아가 내 옆에 있다면 신나서 아드라스어로 막 말을 걸어보려고 했을 건가?


 "신기해요. 아드라스어를 모르는 아드라스인을 마딜 땅에서 볼 줄은 몰랐어요."

 "예. 저를 보고 그런 말 많이 하더라구요."


 아드라스인 남자는 머리를 긁으며 웃었다.


 "미안해요. 세상은 넓고 사람은 다양하니까요."

 "아니에요. 누구나 다 그러는데요."

 "그래도 그건 아니죠. 사람마다 다양하다는 것이야말로 당연한 건데요."

 "예."

 "그런데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예?"

 "왜 아드라스어를 못 하는지 물어봐도 되나요?"

 "저는 마딜 땅에서 태어나서 자랐거든요. 부모님은 아드라스인이지만, 제게 딱히 아드라스어를 알려주지 않으셨어요. 집에서도 마딜어로 대화했구요."

 "아...그렇군요. 멋진 부모님이신데요?"


 남자는 웃으며 대답했다. 신기한 사람이다. 내가 아드라스어를 못한다고 하면 반응이 썩 좋은 편이 아닌데 이 사람은 오히려 그게 좋은 거라는 반응이다.


 "서점 안에 들어가봐도 될까요?"

 "예. 들어오세요."


 남자와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서점 안에 들어오자마자 저주술 책이 꽂혀 있는 책장으로 가서 책을 하나씩 뽑아 책장을 한 장씩 넘겨보기 시작했다.


 "참 멋진 책들 많네요!"

 "예?"


 저 남자 제정신 맞아? 저주술 책이 멋지다고? 저건 쓰레기야. 마딜인의 수치! 저 책은 이 서점의 망신이다. 매 페이지마다 의미없고 쓸모없는 문장 하나만 덜렁 적혀 있다. '광기의 토끼가 피를 마신다' 라든지 '파랗게 부서지는 피의 노랫소리', '촉촉하게 땅을 적시는 빨간 웃음소리', '눈에서 흘러나온 소리없는 검은 함성' 같은 도대체 어떤 식으로 인간의 삶에 도움이 되는지 감도 못 잡을 헛소리만 적혀 있는 종이 낭비의 극치다. 그게 멋지다고? 저 사람도 정신이 조금 이상한 사람 아닌가?


 "문장들 하나하나 심오하고 멋져요."

 "그 문장들요? 그 문장들이 이해가 되세요?"

 "이런 건 이해하는 것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어요. 마음으로, 감각으로 느끼는 거죠."


 남자는 자신의 가슴에 오른손을 얹으며 두 눈을 감았다. 저 사람도 많이 이상한 사람인가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책들을 보고 멋지다는 소리를 할 수가 없지. 게다가 지금 저 자세는 대체 뭘 의미하는 거야? 설마 저 문장들을 음미해보려고? 음미한다고 뭐가 있나? 뭐가 느껴져? 느껴지는 것이라고는 마딜의 저주술사들은 참으로 무식하고 수준떨어진다는 것 뿐 아닐까?


 "참 아름다워요."

 "뭐가요?"

 "바람이 전해주는 잔인한 동화...너무 멋지지 않나요?"

 "어떻게 멋진데요?"

 "같이 느껴봐요. 악에 받쳐 싸우는 두 사람을 보는 아이. 그 아이의 뺨으로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 아이의 눈에 보이는 이 현실. 이것은 사실이자 동화에요. 꿈이 있고 희망이 있다는 거짓된 내용이 아니라 진실의 동화요. 봄바람을 맞으며 동화를 보는 아이는 현실을 깨닫는 거에요. 진정한 악인도, 진정한 선인도 없다는 것을요. 모두가 자기의 본능적 욕망에 충실할 뿐이라는 현실, 그리고 이긴 자가 결국 선인이 되고 영웅이 된다는 진리를 배우는 거죠. 바람이 전해주는 잔인한 동화를 통해서요."


 그 책에 적힌 문장을 저렇게 받아들이라는 건가? 지금까지 그 누구도 저주술 책에 적힌 문장을 해석하는 방법에 대해 제대로 알려준 적이 없다. 바하르는 문장을 보고 느끼라고만 했다. 치롤라는 그런 것은 아예 필요없는 것이라고 했다. 이 사람은 아드라스인이잖아. 그런데 오히려 그럴싸한 해석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다. 저 책이 왜 존재해야하는지에 대해 조금은 납득이 가게 해준다. 저런 의미들을 파악하면 한 문장 속에 거대한 의미가 압축되어 들어있다는 이야기니까. 그래도 저 해석이 어떻게 저주술 수련에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다.


 "그거 저주술 책이에요."

 "알아요."

 "그 해석이 어떻게 저주술과 관련이 있어요?"

 "그게 중요한가요?"

 "예."

 "왜죠?"

 "저주술 책이니까요. 그 내용이 저주술과 관련없다면 그 책의 존재 이유가 없잖아요."


 남자는 나를 보며 빙그레 웃어보였다.


 "이거 한 번에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하면 탈나는데..."

 "안 말해주셔도 괜찮아요."

 "이미 궁금해하는 거 같은데요?"

 "저주술에는 별 관심 없어요."

 "왜죠?"

 "저는 아드라스인이니까요."

 "그게 무슨 상관이죠?"

 "저주술은 마딜인들이나 쓸 수 있는 거잖아요."

 "누가 그래요?"


 남자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하늘로 던졌다. 그리고 그 손수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손수건이 화르르 불타올라 재조차 남기지 않고 허공에서 다 타버렸다.


 "어?"

 "누가 아드라스인은 저주술을 쓸 수 없다고 그래요?"

 "저주술사에요?"

 "저주술을 쓸 줄은 알아요. 마딜땅에 와서 배웠어요."


 남자는 책을 책장에 꽂고 나를 향해 다가왔다.


 "제 이름은 에베디나단이에요.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타슈갈이요."

 "우리 편하게 말 놓을까요?"

 "예."

 "타슈갈, 저주술에 관심 정말 없어?"

 "예...아니, 응. 정말 관심 없어."


 에베디나단은 나와 통성명을 하자마자 바로 저주술에 관심이 없냐고 물어보았다. 당연히 관심은 있지. 저주술을 사용하고 싶은 것 때문에는 아니다. 이 도시가 엉망이 된 것은 분명히 저주술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저주술에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거다. 저주술 없이는 이 도시가 엉망이 된 것에 대해 단 한 마디도 이야기할 수 없으니까.


 "나는 저주술에 관심이 많아."

 "아...너도 마딜 땅에서 태어났어?"

 "아니. 남아드라스 공화국 출신이야."

 "거기서는 저주술 사용하면 사형 아니야?"

 "맞아."

 "너 남아드라스 공화국 어떻게 돌아가려고 그래?"


 에베디나단이 남아드라스 공화국 출신이라는 것에 깜짝 놀랐다. 게다가 에베디나단은 남아드라스 공화국에서 저주술사를 처형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방금 저주술 사용했잖아? 남아드라스 공화국 어떻게 돌아가려고 저주술을 익힌 거야?


 "남아드라스 공화국에서 저주술을 사용하지 않으면 돼. 거기 꼭 돌아가야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구."

 "남아드라스 공화국 안 돌아가면? 여기에서 살게?"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여기는 자유롭잖아."

 "여기가?"

 "응. 매우 자유롭잖아. 얼마 전에는 여장하고 돌아다니는 남자도 봤어."


 아...감비르 말하는 건가? 그놈은 어디를 돌아다니든 눈에 참 잘 띌 거다. 여장하고 돌아다니는 남자는 에드자 전체를 뒤져봐도 걔 밖에 없을 거니까.


 "남아드라스 공화국에서는 그렇게 하고 못 돌아다녀. 그러고 다니면 바로 몰매 맞을걸?"


 역시 게첸 이 새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떠든 거였어. 뭐가 남아드라스 공화국이 여기보다 더 자유롭다는 거야? 이고도 에베디나단도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구만. 하여간 그놈은 제대로 된 것이 없다. 얼치기에 욕심만 많고 징징거릴 줄이나 알지. 그런 놈이 중앙학문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니 중앙학문연구소 수준도 형편없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 그놈은 딱 거지들과 같이 굴러다니며 본능에 충실하고 거짓말을 숨 쉬듯 해대고 허풍이나 떨면 딱일 놈인데.


 "여기는 정말 재미있고 즐거운 곳이야."

 "여기가? 설마...남아드라스 공화국이 훨씬 낫겠지."

 "어떤 점에서?"


 여기가 남아드라스 공화국보다 낫다고? 나 지금 잘못 들은 거지? 나도 남아드라스 공화국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여기보다 훨씬 잘 산다는 것만은 안다. 그건 직접 가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거니까. 이 도시에 있는 모든 것 중 뭐 하나 남아드라스 공화국에서 수입한 것보다 나은 게 있어야지. 책이고 사탕이고 뭐고 다 수입품 질이 마딜 공화국 것보다 훨씬 좋다.


 "여기에 제대로 된 것이 뭐가 있어? 책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무슨 사탕 쪼가리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데."

 "그거야 그렇지?"

 "뭐 하나 제대로 된 거 사려면 결국 외국 거 사야 하잖아."

 "그건 그래."

 "그거 봐. 남아드라스 공화국이 여기보다 훨씬 살기 좋은 곳이야."

 "물질이 풍족하다고 다 좋기만 한 건 아니잖아."

 "여기가 남아드라스 공화국보다 나은 점은 뭐가 있어?"


 진짜로 궁금하다. 여기가 남아드라스 공화국보다 좋은 점은 과연 뭐가 있을까? 과연 좋은 점이 단 하나라도 존재할까? 세상은 넓고 이것저것 많이 존재한다고 하지만 마딜 공화국이 남아드라스 공화국보다 나은 점이 과연 하나라도 있을까 의문이다.


 "자유가 있잖아."

 "무슨 자유?"

 "남자가 여장하고 돌아다녀도 되고, 저주술을 마음껏 수련해도 되구."

 "남자가 여장하고 돌아다니는 건 여기에서도 정상이 아니야."

 "남아드라스 공화국에서 그러고 돌아다니면 진짜 돌 맞는다니까?"

 "그게 오히려 좋은 거 아냐? 여장하고 돌아다니는 거 자체가 안 좋은 거 같은데..."

 "일단 하고 싶은 것은 할 수 있다는 거잖아."


 그런가? 감비르에게 여장을 못하게 하면 감비르는 어떻게 변할까? 물론 그렇게 하게 놔둔 것 자체가 잘못이다. 초기에 막았으면 지금 그 지경까지 되지는 않았겠지. 초기에 말리지 못한 것이 정말 큰 실수였다. 그래도 자기가 그렇게 하고 다니는 것에서 행복을 느끼고 있으니 감비르에게는 잘 된 상황이라고 해야 하나? 감비르에게만 잘 된 상황이다. 에베디나단 말대로 돌을 던지고 하지 말라고 하지 못하기 때문에 감비르는 자기 생각을 어떻게든 남에게 강요하고 주입하려 들고 있으니까. 그런데 에베디나단의 말을 들어보면 또 그럴싸하긴 하다. 일단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는 좋은 거니까. 감비르가 여장을 하고 여자 흉내를 내는 것에서 행복을 느낀다면 그것 자체는 좋은 거잖아. 물론 친구로써 감비르가 정신을 차린다면 정말 좋겠지만 말이다.


 "그거 뿐이야? 그거 뿐이라면 차라리 남아드라스 공화국 가서 살겠다."

 "여기는 저주술 수련해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해."

 "저주술? 아...그 미개한 거..."

 "미개해? 왜?"


 에베디나단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아, 에베디나단은 남아드라스 공화국에서 왔지! 여기 상황을 아마 잘 모를 거다.


 "아니야."

 "좀 더 이야기해줘! 저주술보고 미개하다는 사람은 여기 와서 처음 봐! 왜 미개한데?"


 에베디나단의 눈에서 빛이 났다. 나를 향해 고개를 들이밀며 계속 제발 말해달라고 애원하는 눈빛을 보낸다. 에베디나단은 저주술에 대한 환상이 가득하겠지. 방금 저주술 사용하는 것을 보았을 때 실력도 꽤 뛰어나다. 그런 사람에게 저주술은 미개하다고 했으니...게다가 마딜어만 아는 아드라스인이 그런 말을 했으니 더욱 그렇겠지. 신기한 것은 에베디나단의 기분이 전혀 언짢아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오히려 깊은 숲속에 숨어 있는 동굴을 찾아낸 어린이처럼, 길거리에 떨어진 금화를 발견한 어른처럼 눈이 반짝거리고 있다. 이런 건 아다비아가 설명해주는 것이 오히려 좋을 텐데. 아다비아라면 저주술이 왜 미개하고 이 땅에 도움이 하나도 안 되는지 아주 잘 설명할 거다.


 "아무 것도 없잖아. 저주술이란 상상이 현실이 된다는 것 뿐인데."

 "그게 왜?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줘."

 "그냥 모든 게 다 저주술이래. 정해진 것은 아무 것도 없어. 그저 상상이 현실이 되면 그게 저주술이래. 체계고 나발이고 없다구."

 "그건 오히려 장점 아니야?"

 "모든 걸 감정과 상상에 맡겨버리면 그 변화를 감당할 수 있을까?"

 "그게 딱히 단점일 거 같지는 않은데? 상상이 현실이 된다는 것은 그 한계가 없다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감정과 느낌이야말로 정말 솔직한 거구."

 "그게 일정하지 않잖아."

 "꼭 일정해야 할 필요가 있어?"

 "그래서 무수히 많은 저주술사들이 우르간 대제국군한테 살해당했지. 우리끼리 백날천날 이야기해봐야 역사적 사실은 변하지 않아."

 "아...그건 그래."


 에베디나단이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그런 단점 하나 없는 게 세상에 어디 있겠어? 4원소설을 토대로 한 마법도 나름의 단점이 있을 걸?"

 "그래도 저주술보다야 낫겠지. 마법사들이 저주술사들 다 때려잡고 다녔잖아. 지금도 여기 밖에서는 그러고 있을 거고."

 "'키란'이라는 저주술사는 오히려 반대로 마법사를 때려잡고 다녔다고 들었어."

 "죽었잖아. 게다가 그 사람 하나 뿐이고."

 "그래도. 저주술이 마법보다 더 우월한 것이라는 가능성은 존재하잖아. 내 생각에는 말이야, 마법은 저주술의 부분집합 아닐까 싶어."

 "마법이 저주술의 부분집합? 말도 안 돼."

 "저주술에서 특정한 방법을 정형화시킨 게 마법이라고 하면 말이 되지 않아?"


 어? 그렇네? 상상이 현실이 된다는 저주술. 방법은 무한대로 존재한다. 귀신을 부르는 것도 저주술이고, 뭔가를 직접 파괴하는 것도 저주술이다. 그냥 다 저주술이다. 그 중에서 어떤 특정 방법 하나를 정형화해서 발전시킨 것이 '마법'이라 한다면? 확실히 말이 된다. 아주 그럴싸하다. 그렇지만 어쨌든 마법은 마법이고, 저주술은 저주술이다. 마법을 뛰어넘는 저주술은 전설인지 진짜였는지 분간도 안 되는 키란 외에 없다고 봐도 될 거다. 이건 역사가 말해주고 있는 거니까. 키란을 제외하고는 대체 마딜인들이 우르간 대제국군에 대항해 독립운동을 할 때 제대로 싸워본 적이 없다. 맨날 전투에서 일방적으로 학살당하기만 했지. 엄청나게 많은 저주술사들이 우르간 대제국군에 의해 살해당하고 처형당했다.


 "나는 저주술의 가능성을 믿어. 혹시 알아? 눈 먼 사람의 눈을 저주술로 고쳐줄 수 있을지."

 "뭐? 말도 안 돼!"

 "왜 말도 안 돼? 상상이 현실이 되는 거잖아. 장님이 눈 뜨고, 앉은뱅이 다시 일어서는 상상이 현실이 되지 말란 법 있어? 그게 저주술인데?"

 "키란조차도 그런 일을 했다는 소리는 못 들어봤어."

 "모르지. 진짜 될 수도 있으니까. 갈망하면 이루어진다는 것이 저주술의 핵심 아냐?"


 켈라자야는 아다비아의 눈을 저주술로 고칠 수 없다고 했다. 루즈카도 그건 불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에베디나단은 된다고 한다.


 "아드라스인이 저주술을 쓸 수 있다는 거, 너 방금 봤잖아. 그런데 저주술로 장애를 고치는 게 왜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안 되는 거 아닐까?"

 "설마...그런 시도를 해본 마딜인이 설마 없을까?"

 "없을 수도 있어. 가슴 한 켠으로는 절대 안 될거라 생각하면 안 될 거니까."


 아니야. 될 리가 없어. 저주술로 장애를 고친다고?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게다가 내가 아는 저주술사들 모두 안 된다고 했잖아. 안 되는 거는 안 되는 거다. 아주 죽은 사람도 부활시킬 수 있다고 하지 그래?


 "아, 나 이제 가봐야겠다. 다음에 또 놀러와도 되지?"

 "응. 언제든."

 "다음에 또 올께!"


 에베디나단이 서점에서 나갔다. 미묘한 느낌이 온몸을 덮쳤다. 어떻게 된 것이 마딜인들보다 아드라스인인 에베디나단이 저주술에 대해 더 잘 아는 것 같다. 저주술 자체도 상당한 실력이다. 그 정도 저주술을 사용할 수 있는 마딜인 저주술사야 당연히 여럿 있을 거다. 켈라자야, 루즈카가 에베디나단보다 더 뛰어나겠지. 그렇지만 저주술 책을 읽는 법을 저 정도로 설명해준 마딜인은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없었다. 게다가 마법과 저주술의 관계에 대해 저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저주술을 찬양하는 마딜인은 많이 보았다. 그들 모두 한결같이 저주술에 대한 맹목적 찬양 뿐이었다. 그 누구도 그게 왜 자유와 진리인지에 대해 설명해주지 않았다. 설명할 능력이 없을 거다. 그냥 멋져보이니까 갖다 붙인 말이겠지. 과연 자유가 뭐고 평등이 뭐고 진리가 뭔지 생각이나 해본 적이 있을까 의문이다. 그저 상상은 무한하니 자유를 상징한다는 소리만 할 뿐이지. 누군가 에베디나단처럼 이야기해주었다면 저주술에 대해 조금은 더 긍정적으로 생각했을 거다. 정작 아드라스인인 에베디나단이 저주술에 대해 마딜인보다 더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해준다는 것이 얼마나 마딜인들에게 치욕적인 일인지 마딜인들은 알까? 저주술에 대해 자유니 평등이니 진리니 떠드는 마딜인 저주술사들은 그렇게 떠들 자격이 없어. 그게 뭔지도 모르고 하는 소리임이 분명하니까. 에베디나단이 그런 말을 하면 조금은 이해하겠다.



 서점 문을 닫을 때가 되어서야 이고가 돌아왔다. 이고가 돌아오자마자 서점 문을 닫고 같이 방으로 들어갔다.


 "아다비아는 괜찮아?"

 "응."

 "별 일 없었어?"

 "응. 걔하고 무슨 일이 있겠냐?"


 벽에 기대어 앉아 이고를 바라보았다. 이고는 자리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뭐 대화 몇 마디라도 했을 거 아냐."

 "걔하고 딱히 나눌 대화거리라고는...너 왜 병문안 안 오냐더라."

 "자기가 오지 말라고 해놓고서는..."

 "너 좀 정신없다고 이야기했어."

 "잘 했어. 자기가 오지 말라고 해놓고서는 뭘 왜 안 와?"

 "다시 꼭 오라는 말을 하긴 부끄러워서 그런 거 아냐?"

 "아니야! 막 화냈대니까."


 이고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네가 뭐 속 긁는 소리를 했나보지. 걔가 괜히 그랬겠어?"

 "아니야. 내가 뭘 걔 속 긁는 소리를 해?"

 "네가 엄청 한심한 소리 한다고 생각했나보지. 뭔 말을 했던 거야?"

 "그냥 앞으로 잘 살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이고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네가? 걔가 화낼만 했네."

 "뭐가?"

 "으휴...그러게 학교 다닐 때 공부 좀 열심히 하지 그랬냐."

 "뭔 소리야?"

 "사실이잖아."


 이고가 낄낄 웃었다. 이고에게 아다비아와 있었던 일을 차마 자세히 말해줄 수 없다. 다리를 벌리며 외친 절규에서부터 일곱가지 꿈의 비밀을 밝혀서 눈을 뜨게 해주겠다고 말한 것까지...모두 말 못하겠다. 아다비아의 절규는 평생 나와 아다비아만 알고 있어야할 일이다. 설령 최악의 미래가 아다비아에게 펼쳐져 아다비아가 아무 남자에게나 가랑이를 벌려야 하는 일이 벌어지더라도 말이다. 일곱 가지 꿈의 비밀을 밝혀서 눈을 뜨게 해주겠다는 말을 했다는 걸 이고가 알면 바로 정색하면서 미쳤냐고 할 거다. 내가 저주술 수련을 하겠다고 하는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안 봐도 뻔하다. 이고도 저주술을 썩 좋아하는 것 같지 않으니까. 게다가 내가 어떻게든 이 나라를 떠날 거라 항상 마음먹고 있다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구. 말하는 순간 이고의 일장연설이 시작되겠지. 저주술 수련 시작하는 순간 너는 네 진정한 꿈인 이 나라를 떠나는 꿈은 포기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구. 그런 미친 짓, 인생에 도움 하나도 안 되는 짓 때려치고 그 시간에 차라리 아드라스어 단어나 하나 더 외우라고.


 "아, 오늘 아드라스인 저주술사가 서점에 찾아왔어."

 "아드라스인 저주술사?"

 "응."

 "어디? 남아드라스 공화국? 아니면 북아드라스 왕국?"

 "남아드라스 공화국."

 "거기서 도망쳐온건가?"

 "아닌 거 같던데? 자기 말로는 여기에 와서 수련하기 시작했대."

 "뭐, 정상은 아닌 거 같다. 이름이 뭐래?"

 "에베디나단."

 "처음 듣는 이름이네. 왠지 머리에 나사 열 개는 빠진 놈일 거 같은데..."

 "그래도 마딜인들보다는 나은 거 같아."

 "왜?"

 "저주술 책 보더니 그나마 납득되게 읽는 법을 설명해줬어."

 "뭐라는데?"


 이고가 조금 흥미가 생겼는지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대어 앉았다.


 "그 문장 속에 담긴 뜻을 읽어야 한대. 단순히 그 문장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뭐야? 그런 소리 누가 못해?"

 "그래도 맨날 느끼라고만 하는 마딜인들 설명보다는 훨씬 낫더라."

 "그거나 그거나 비슷한 거 아냐?"

 "아니야. 확실히 달랐어."

 "뭐라고 했길래 확실히 달라?"

 "'바람이 전해주는 잔인한 동화'란 문장은 있잖아, 악에 받쳐 싸우는 두 사람을 보는 아이를 상상해보래. 아이는 거기서 모두가 본능적 욕망에 충실할 뿐이란 걸 배운대. 그리고 결국 이긴 자가 선한 영웅이라는 진리를 배우고. 그렇게 해석하는 거래."

 "뭐야? 별 거 아니잖아."


 이고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설마 그 설명을 듣고 저주술에 대해 깨우치기를 바랬던 거야? 그랬다면 내가 말로 설명하는 게 아니라 저주술을 직접 보여주었겠지.


 "그래도 그렇게까지 말하는 마딜인이 없었잖아."

 "그렇긴 하지."

 "마딜인보다 저주술에 대해 잘 아는 거 같아."

 "에이, 그게 가능할라구."

 "4원소설을 토대로 한 마법이 저주술의 일종일 수도 있다던데?"

 "말도 안 돼. 그러면 여기서 마법을 쓸 수 있는 놈이 왜 하나도 없냐?"

 "하여간 들어보면 뭔가 납득이 되더라구."

 "이상한 놈이네. 한 번 보고 싶기는 하다."

 "또 놀러온다고 했으니 한 번은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겠지."


 이고는 다시 바닥에 누웠다. 이고는 루즈카가 애인이라 그 정도로는 안 놀랄 수 밖에 없는 건가? 저주술에 대해 궁금하면 루즈카한테 물어보면 되니까. 애인이니 잘 알려주겠지. 이고도 당연히 루즈카에게 저주술이 대체 뭐냐고 한 번은 물어보지 않았을까?



 아침이다. 1116년 3월 26일. 확실히 해가 일찍 뜬다. 바람도 따스하다. 밤에 옷을 껴입고 자다 더워서 잠시 일어나 두꺼운 외투를 벗고 잤다. 그래도 조금 더웠다. 이제 진짜 봄이다. 겨울이 다시 오기까지 추워질 일은 없을 거다. 날 잡아서 겨울 옷을 다 빨아야겠다. 빨래를 하려면 우물 근처 빨래터까지 가야 한다. 겨울에 빨래를 거의 안 했으니 이번에 날 잡아서 싹 다 몰아서 해치워야지. 깨끗하게 빨아서 잘 말려야 겨울에 또 입지.


 켈라자야는 오늘도 내가 사준 반짝이는 작은 색유리가 촘촘히 박혀 있는 파란색 작은 나비 장식이 달려 있는 푸른색 머리끈을 하고 서점으로 왔다. 매일 저 머리끈을 하고 서점에 온다. 그게 그렇게 좋은가? 그때 다른 머리끈 하나 더 사줄 걸 그랬나? 저렇게 매일 하고 올 줄은 몰랐다. 만약 라키사랑 내성으로 놀러갔을 때 그 망할 놈이 자살만 안 했더라면 라키사도 내가 준 머리띠를 하고 서점에 왔을까? 매일은 아니더라도 몇 번은 하고 왔겠지. 라키사와는 정말...진짜 가까워지지 말라고 세상이 뜯어말리는 것일까?



 켈라자야가 방에 들어갔다. 라키사가 왔고, 이고가 수레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안에 들어가서 다시 잘까?'


 라키사와 같이 있지만 할 말이 없다. 무슨 말을 해도 서로 말이 안 통하니까. 말을 안 하면 오해가 생길 일이 없다. 그래서 라키사에게는 말 한 마디 하는 것도 매우 조심스럽다. 괜히 오해가 생기면 골치아파지고 거리만 멀어지니까. 그렇지만 그게 무서워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 것이 과연 잘 하는 짓일까? 종종 의문이 든다. 서로 대화를 피하기만 하는 것이 진짜 그나마 가까웠던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일까. 그저 멀어져 가는 속도를 늦추는 것 뿐 아닐까? 이렇게 라키사와 데면데면한 사이가 되어가다 나중에는 전혀 상관없는 '남'이 되어 버리는 것 아닐까?


 "어제 모임 잘 다녀왔어?"

 "응."

 "재미있었어?"

 "응."


 그냥 방에 들어갈까? 여기에서 무슨 말을 더 했다가는 또 라키사와 오해만 더 커질 것 같다. 아니, 분명히 오해가 커진다. 그러나 그게 무서워서 아무 말 하지 않고 지내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일까? 차라리 오해가 더 생기더라도 뭐라도 말을 주고 받는 것이 더 낫겠지? 라키사가 나가는 그 모임, 솔직히 걱정된다. 그 모임이 제대로 된 모임일 리 없으니까. 게첸 같은 놈과 감비르 같은 놈만 득시글거리겠지.


 "거기서 뭐했는데?"

 "이것저것 공부하고 토론했어."

 "무슨 공부?"


 라키사가 잠시 입을 다물고 바닥을 바라보았다. 라키사도 고민하나보다. 내 반응이 어떨지 뻔히 알 테니까. 그 모임에서 무엇을 공부했는지, 무엇에 대해 토론했는지 정확히 모른다. 그렇지만 그게 무엇이었든 엉터리일 거고 사람 정신에 해악만 끼치는 것이겠지. 그건 라키사의 말을 듣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다. 라키사가 자기는 여자이자 남자라고 하지만 않아도 다행일 거다.


 "불평등."

 "불평등?"

 "응. 불평등과 저주술의 관계."

 "불평등과 저주술의 관계?"

 "응. 키란님은 인간의 성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저주술을 완성하지 않았을까 해."

 "응?"


 이건 무슨 소리야? 키란이 인간의 성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저주술을 완성했다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키란이 감비르처럼 여장하고 자기가 남자이자 여자란 소리를 했다는 소리는 못 들어봤는데? 진짜 그랬다면 내가 감비르를 그렇게 이상하게 보는 일도 없었겠지. 키란 동상은 모두 여장을 하고 있었을 거구. 이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키란이 여장하고 다녔다고?"

 "아니. 그건 아니야."

 "그러면? 키란은 남자잖아."

 "외형적으로만. 키란님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셨기 때문에 진리를 깨우치신 걸거야."

 "응? 모든 것을 받아들이시다니?"

 "인간은 다양하고, 그 다양함 전체를 받아들이신 거랄까?"

 "다양함?"

 "응."


 순간 키란 전기가 떠올랐다. 이고가 빨간색으로 마구 칠해놓은 그 페이지들. 그렇지만 그 책 전체에 키란이 모든 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진리를 깨우쳤다는 말은 없었다. 그런 말 자체가 없었다. 얘가 말하는 다양함이란 보나마나 그 다양성이고, 감비르도 정상이라는 이야기일 건데...키란이 설마 그걸 정상으로 받아들였다고? 그래서 진리를 깨우쳤다고? 키란은 남자 맞는데?


 "다양함 전체를 받아들이다니 무슨 말이야?"

 "남자이자 여자, 그리고 남자도 여자도 아닌 것까지 다."

 "그게 말이 돼? 남자면 남자고, 여자면 여자지."

 "그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야."

 "아래에 물건이 달렸으면 남자고 안 달렸으면 여자지, 뭐가 또 있어?"

 "인간의 성은 육체적 말고 사회적, 정신적인 것도 있어."


 머리가 아파온다. 이고는 왜 라키사가 그런 모임에 가는 것을 안 뜯어말렸을까?


 "그러니까 키란이 어떻게 다양함을 다 받아들였다는 건데?"

 "여성적인 것도 다 받아들이셨다는 거야."

 "그러니까 어떤 거?"

 "비록 외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본인은 남자이자 여자이셨던 거야. 그 경지까지 올라가셨어."

 "뭔 말이야? 키란이 감비르랑 같다고?"

 "그분은 여성일 수도 있고, 남성일 수도 있기 때문에 남들이 못 보는 걸 보고, 더 높은 순수함에 가셨어. 감비르가 키란님처럼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어쨌든 그래."

 "그건 말도 안 돼."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모르겠다. 키란이 성별을 자유자재로 바꾸었다고? 아랫도리에 달린 물건을 마음대로 붙였다 떼었다 할 수 있었단 거야?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너는 이해 못 할 거야."

 "머리통을 붙였다 떼었다 할 수 있다면 믿겠어."

 "너는 믿고 싶지 않은 거야."

 "믿을 수가 없으니까 안 믿지. 뭔 수로 성별을 자기 마음대로 바꿔?"

 "육체적 말고! 그분은 여자의 삶과 남자의 삶을 동시에 사셨다는 말이야."

 "그러니까 자기가 밥 짓고 빨래하면 여자의 삶이라는 거야?"

 "그거 말고 더 많아. 여자만이 겪는 차별이라든지..."

 "그걸 키란이 다 겪고 이해했다고?"

 "응."


 모르겠다. 진짜 모르겠다. 얘가 무슨 말을 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감도 못 잡겠다.


 "그건 정말 아닌 거 같아. 키란이 그런 사람이라는 말은 단 한 번도 못 들어보았어."

 "그래서 지금 여기가 이 모양 이 꼴인 거 아닐까 해."

 "무슨 말이야? 저주술사들이 미쳐 날뛰는 거?"

 "전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려 하지 않잖아."


 그냥 방에 들어갈 걸 그랬다. 라키사의 말을 단 한 마디도 이해하지 못하겠다.


 "키란이 왜 그렇게 해석되는지 전혀 모르겠어. 잘못된 생각에 억지로 끼워넣는 거 아냐?"

 "아니야!"

 "말이 안 되잖아. 키란이 무슨 남자이고 여자란 거야? 그리고 그게 무슨 저주술과 상관이 있어?"

 "저주술은 자유이자 평등이니까. 차별과 억압에서 해방되어야만 진정한 저주술을 사용할 수 있어."

 "그러니까 어떻게? 남자가 물건을 떼어내면 된다는 거야? 여자가 물건을 달고?"

 "그런 게 아니야! 여자가 받는 차별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키란님은 그런 차별에 반대하고 여자를 위해 싸우셨어! 그 과정에서 진리를 깨달으셨고!"

 "뭔 소리야? 키란이 무슨 여성 차별을 위해 싸워? 없는 소리 자꾸 지어낼래?"

 "그만 이야기하자. 너랑은 말이 안 통해."


 라키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어떤 거? 대체 뭘 어쨌길래 키란이 남녀차별을 위해 싸웠다는 거야?"

 "여자에게 비르자를 주었다는 건 여자는 최고가 될 수 없는 세상에 저항한 행동이야."

 "아, 그 은빛 지팡이? 그게 그렇게 중요해?"

 "당연하지! 그건 키란의 유품이니까! 키란님은 결혼이 얼마나 여자에게 불공평한지 아시고 결혼도 안 하셨어!"

 "일찍 죽어서가 아니라?"

 "아니야!"

 "그러니까 비르자를 여자에게 줬고, 결혼을 안 했으니까 남녀차별을 위해 싸웠다는 거야?"

 "그뿐이 아니야. 그분께서는 여자들에게도 중요한 기회를 많이 주셨어. 여자아이들도 하고 싶은 것을 하며 놀아야 한다고 주장하셨어."

 "그게 다야? 더 특별한 거 없어?"

 "너는 들어도 이해 못 할 거야."

 "진짜 이상한 모임이야. 거기..."


 내가 나중에 루즈카 만나면 반드시 물어본다. 루즈카에게 물어보면 정확한 답을 얻을 수 있겠지. 저 헛소리가 진실인지, 아니면 정말로 헛소리인지...


 "너는 여전히 내 말을 안 들어."

 "내가?"

 "그래."


 지금 누가 누구의 말을 안 듣는 걸까? 라키사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내가 안 듣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무슨 소리인지 당최 이해가 될 소리를 해야 듣든가 말든가 하지. 라키사가 한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기는 할까? 그 모임 빼고 말이다.


 "네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니까 그러는 거잖아. 너야말로 내 말 아예 안 듣잖아!"

 "그만해.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미치겠네. 이럴 줄 알았다.


 "라키사, 내가 뭘 너 말을 안 듣는다는 거야? 너야말로 내 말 하나도 안 듣잖아! 너 지금까지 내 말 제대로 들은 적 있어?"


 라키사는 아무 말하지 않는다. 저게 더 화난다. 차라리 소리치고 하고 싶은 말 다 쏟아내라구! 뭐 실낱같은 단서라도 하나 던져줘야 이해를 해보려 하든 말든 할 거 아니야?


 "내가 감비르 미쳤다고 했는데 내 말 안 들었지? 그 결과가 어땠어?"

 "그건 내가 경솔했어. 하지만 감비르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정신병 아니야. 그건 받아줘야하는 거야. 너야말로 내 말 왜 안 들어?"

 "그걸 뭘 받아줘? 그게 미친 거지, 미치지 않았으면 뭔데? 차라리 여자 흉내내는 게 너무 좋다고 말하라구! 되도 않는 남자이자 여자란 소리 하지 말고!"

 "그거 자체가 편견이자 고정관념이야!"

 "그래, 게첸 그놈 진짜 못되먹은 놈인데 왜 그렇게 게첸 좋아해?"

 "너야말로 게첸씨를 왜 그렇게 미워해? 게첸씨는 그분 나름의 아픔이 있는 분이야!"

 "아무 여자나 못 품어서 안달난 돼지새끼겠지!"

 "나, 그 이야기 들었어. 너 솔직히 너무했더라? 어떻게 그렇게 무례하게 굴 수 있니?"

 "뭐가 무례해? 내가 틀린 말 했어? 아무 여자랑 맘껏 구르고 싶으면 자기 아내를 남이 데리고 굴러도 되어야 할 거 아냐?"

 "그분은 너와 동질감을 느껴서 다가간 건데 꼭 그렇게 무례하게 굴어야해?"

 "뭐가 동질감이야? 뭐? 착취? 그러면 때려치라고 해! 병신같이 나한테 와서 징징거리지 말구!"

 "너나 게첸씨나 돈 받고 노동력 파는 건 같잖아!"

 "그러면 이고가 우리 착취한다는 소리야? 억울하면 때려치든가! 나는 그따위로 생각 안 해!"


 라키사가 입을 꽉 다물었다. 나도 입을 다물었다. 이게 아닌데. 왜 이렇게 계속 꼬이기만 할까?


 "너,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그만해. 너랑 할 이야기 없어."

 "차라리 말을 해! 뱅뱅 돌려서 말하지만 말구! 내가 꼴도 보기 싫으면 꼴도 보기 싫다고 하든가!"


 라키사는 '하아' 소리를 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타슈갈, 너 정말 많이 변했어."

 "내가? 너야말로 정말 변했어."

 "알아. 나도 변했지만, 너도 변했어. 아주 폭력적으로! 정말 나쁘게!"


 폭력적? 내가? 정말 나쁘게?


 "나, 공부 정말 많이 해. 상처주는 말이라면 미안하지만...나, 너보다 공부 훨씬 잘 하거든? 책도 많이 읽었구! 네가 나보다 나은 게 뭐가 있어?"

 "그래서 뭐?"

 "그런데 너는 무조건 내가 틀렸다고 하잖아. 네가 나보다 나은 게 뭐가 있니? 네가 남자라는 것 빼고 하나라도 있어? 너는 그렇게 네가 남자라고 나를 무시하고 있는 거야! 키란님께서는 그러지 않으셨던 거구!"

 "내가 너를 여자라고 무시한다구?"

 "그래! 내 말이 틀렸니? 반박할 수 있으면 반박해봐! 네가 이런 문제에 대해 무슨 공부를 했니? 네가 공부한 걸 말해봐! 논리적으로 이야기해보라구! 무조건 감정적으로, 고정관념으로 틀렸다고만 외치지 말구!"

 "내가 너를 여자라는 이유로 무시하고 있다고? 내가? 감비르가 미친 걸 미쳤다고 이야기하고, 게첸이 나쁜놈이라는 걸 나쁘다고 이야기하는데 그게 그렇게 잘못된 거야?"

 "근거를 대 봐! 무턱대고 너 기분 나쁘니까 나쁘다고 하지 말고! 네 편견과 기분을 나한테 가르치려 들지 마! 나는 내가 보고 겪은 걸로 판단하니까! 감비르, 게첸이 나쁘다는 것도 결국 네가 그렇게 느꼈을 뿐이잖아! 네 기분과 생각은 옳고 나는 여자니까 틀렸다는 거야?"


 인내심이 끊어지려 한다.


 "너 요즘 정말 폭력적으로 바뀌었거든? 그렇게 변해가는 거 정말 싫어. 그래, 그렇게 자라왔으니 어쩔 수 없겠지. 그래도 예전의 너는 최소한 내 말을 들으려 했어. 지금은 아예 안 듣고. 아니, 오히려 나는 틀렸고 너만 맞다고 강요하고 있어!"

 "내가? 너야말로 변했어! 아다비아 죽을 뻔하게 만들고도 정신 못 차렸어?"

 "타슈갈, 우리 그만하자. 너랑 소모적인 말싸움하고 싶지 않아. 아니, 그냥 내가 한 말 다 잊어. 상처준 말 있다면 미안해. 너랑 더 말하고 싶지 않아."


 머리가 지끈거린다.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라키사와 싸우고 싶지 않다. 정말 잘 지내고 싶다. 하지만 아마 안 될 거 같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은 라키사 근무 시간이지. 방에 들어가서 좀 드러누워 있어야겠다.



 방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켈라자야가 벽에 기대어 앉아 있다.


 "너 안 자고 있었어?"

 "응."

 "왜?"

 "그냥."


 자리에 드러누웠다.


 "타슈갈."

 "응?"

 "너 안 변했어."

 "고마워."


 나 좋으라고 한 말이겠지? 마음 같아서는 '너 많이 좋아진 거 같아'라고 대답해주고 싶다.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해 정말 많이 정상인처럼 되었으니까. 그런데 그 말을 하면 처음 만났을 때는 미쳤다고 생각했다는 거잖아. 말하지 않는 게 낫겠다. 켈라자야의 머리카락을 보았다. 여전히 뒤로 묶여 있다.


 "너한테 머리끈 선물 잘 한 거 같아. 너랑 정말 잘 어울린다."

 "정말? 이거 예뻐서 매일 하고 있어!"

 "그렇게 좋아할 줄 몰랐어."

 "정말 예뻐. 너무 마음에 들어!"


 켈라자야의 말에 바로 조금 전 라키사에게 들었던 말이 싹 잊혀지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생생히 귓가에 울리고 있다. 너 요즘 정말 폭력적으로 바뀌었거든? 그렇게 변해가는 거 정말 싫어. 내가 대체 뭐가 바뀌었다는 거지? 내가 정말 폭력적으로 바뀌었나? 나는 항상 그래왔듯 그랬던 것 뿐인데? 이건 시험 답안을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가 아니잖아. 이상한 건 이상한 거고 미친 건 미친 거고 나쁜 건 나쁜 거잖아. 그래서 이상하고 미쳤고 나쁘다고 말한 것 뿐인데 그게 폭력적? 남자라서 여자인 라키사를 무시한다고? 대체 어째서? 자기는 아무 여자나 눈 맞으면 바로 뒹굴고 자기 아내는 안 된다고 하는 게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거야? 남자면 남자고 여자면 여자지 남자이자 여자란 말도 안 되는 소리보고 말도 안 된다고 하는 게 잘못되었다는 거야? 키란이 남녀차별에 대해 투쟁? 이건 또 무슨 듣도보도 못한 소리야. 그거에 대해 솔직하게 말한 게 폭력적이라는 건가?


 아무리 흥분했어도 라키사에게 소리친 건 잘못한 거야. 그 덕에 라키사도 흥분해서 시원하게 소리질러 라키사의 생각을 조금은 알게 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맞는지 틀리는지 따질 건 따지더라도 소리치지는 말았어야 했다. 아다비아 이야기는 꺼내지 말았어야 했고. 라키사도 그때 그 일로 꽤 충격 많이 받았을 건데 그걸 말해버렸다. 라키사가 아다비아 죽으라고 감비르에게 말했을 리는 없잖아. 내 말을 들었으면 감비르에게 말하지도 않았겠지만...그래, 라키사도 라키사 나름대로 생각이 있겠지. 그 모임에서 어떤 말들이 오고 가는지 뻔하고, 그 소리 모두 개소리라는 건 안다. 그렇지만 라키사가 알아서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아닌 건 거부할 거다.



 한숨 자고 일어났다. 켈라자야는 곤히 잘 자고 있다. 켈라자야는 나날이 좋아져가는 것 같은데 라키사는 왜 나날이 나빠지는 걸까? 다시 밖으로 나왔다. 라키사가 혼자 서점을 지키고 있다. 아까 소리친 건 미안하다고 해야지. 그건 잘못된 거니까.


 "라키사."

 "응."

 "아까 소리쳐서 미안해."

 "아니야."

 "내가 많이 흥분했어."

 "괜찮아. 너도 많이 힘들텐데..."


 의자에 앉았다. 더 이야기할 건 없다. 이렇게 어떻게 마무리지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지. 내가 어떻게 폭력적이냐고 물어보고 싶지만...그 답은 아까 라키사가 말한 그것이겠지. 그 상황에서 내가 뭐라고 했어야 폭력적이지 않았을까? 진짜 아닌 건 아닌 건데...키란 전기를 펼쳤다. 맨 마지막 장을 읽었다.



 1100년 3월 2일. 구름이 자욱하게 껴서 별빛조차 없는 깜깜한 밤이었다. 마딜인들의 해방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온 키란은 너무나 수척해져 있었다. 그는 에드자성을 향해 섰다. 그의 얼굴은 비장했다. 더러운 우르간 대제국군이 지배하고 있는 에드자. 수많은 순수한 마딜인들이 죽어가고 있는 곳. 그 순간에도 축생 우르간 대제국군은 순수한 마딜인들을 타락시키고 살육하고 있을 것이었다. 마딜인들의 모든 고통이 그의 심장을 꽉 움켜쥐었다. 차가운 바람이 그의 귀에 마딜인들의 비명 소리를 전해주었다. 그는 조용히 자리에 앉아 저주술을 이용해 마법 지팡이 하나를 만들었다. 그 지팡이는 비르자였다.

 "이것을 받으시오."

 "이것은 무엇인가요?"

 "이 순간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오."

 키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증오가 가득 담긴 눈으로 에드자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동안 암흑과 추위 속에 있었어. 그런데 따스하고 밝은 빛 한 줄기를 보았지. 이제 그 빛을 잡으로 갈 거야. 그 빛을 쬐면서 얼어붙은 나를 천천히 녹여야지."

  키란은 비르자를 곁에 있던 사람에게 건네준 후, 다시 자리에 앉아 두 눈을 감았다. 그렇게 밤새도록 그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다음날 아침, 사람들이 눈을 떴을 때, 키란은 편안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키란의 죽음을 확인했을 때, 에드자성을 공격한 병사들은 기적같은 장면을 목격했다. 에드자성 안에는 생명을 가진 존재가 하나도 없었다. 우르간 대제국군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건물들은 처참하게 파괴되었고, 사람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38일의 전투를 거쳐 1100년 3월 3일 에드자를 점령했다.



 빨간줄이 여럿 쳐져 있었다. 비르자를 건네주는 부분에도 빨간줄이 쳐져 있었다. 그렇지만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키란이 여자는 최고가 될 수 없는 세상에 저항한 행동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거지? 그런 건 아예 없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자기들끼리 억지로 끼워맞춘 이야기 같다. 만약 키란이 다시 살아나서 라키사의 이야기를 들으면 무슨 반응을 보일까? '나는 그런 적 없어!'라고 외치는 거 아니야? 감비르와 같은 놈 취급 받는 거 보고 기겁하겠지. 키란은 우리 마딜 공화국 사람들 모두의 영웅이라 저놈들이 어떻게든 자기들 주장에 키란을 끼워넣어보려고 하는 것일 거다. 없는 소리를 지어내고 있으니까. 라키사야말로 내가 아드라스인이라고 키란 이야기와 마딜인들에게 있어서의 저주술을 잘 모른다고 생각하고 가르치려 드는 거 아닐까?



 "오늘도 역시나 더러운 하루야."


 와히디야였다. 쟤는 또 뭘 들어오자마자 더러운 하루라는 거야?


 "진짜 에드자는 청소를 해도 수만 번 해야 할 거 같아."

 "오늘은 또 왜? 그렇게 더러우면 직접 청소하든가."

 "했어! 얼마 전에 했다구! 그런데도 더러워. 전혀 깨끗해지지 않아!"


 와히디야가 인상을 찌푸리며 툴툴거린다. 얼마나 대충 청소를 했길래 전혀 깨끗해지지 않아? 정 깨끗한 걸 원하면 몇 번이고 청소하면 되잖아.


 "그러면 또 해!"

 "또 할 거야! 아주 깨끗해질 때까지 박박 밀어버릴 거야. 더러운 건 다 뽑아버려야해!"

 "응. 꼭 좀 뽑아내."

 "이 책들! 이것도 다 더러워! 마딜인의 정신을 타락시키는 것!"

 "이건 네 꺼 아니니까 건들지 마. 정 불싸지르고 싶으면 네가 돈 내고 다 사가든가. 그래봐야 이고가 또 사와서 채워넣겠지만..."


 와히디야는 아주 못마땅하다는 듯 인상을 박박 쓴다.


 "어제는 또 새로운 오물 덩어리들을 봤어! 그런 것들이 이 땅을 더럽히고 있다니 참을 수 없어!"

 "뭔데?"


 라키사가 와히디야를 바라보았다. 와히디야는 라키사를 한 번 쳐다보더니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제 어떤 모임에 갔거든. 그 모임은 타락한 자들의 배부른 말장난이었어! 내 귀가 너무 더러워지는 거 있지? 그런 건 마딜인의 순수성에 퇴폐성을 불어넣는 거야!"

 "진짜? 어떤 모임이었는데?"

 "있어. 별 미친놈, 병신들 다 와. 라키사, 너는 거기 왜 왔어?"


 아! 만세! 와히디야 잘 한다! 싸워라! 싸워라! 와히디야 이겨라! 그래, 그거 정상이 아니라니까. 일어나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와히디야를 응원해주고 싶다.


 "유익하고 재미있잖아. 나는 그렇게 나쁘게 볼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유익하고 재미있어? 너 제정신이니? 그건 다 쓰레기야! 이 땅을 오염시키는 것들이라구!"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오히려 그런 다양한 생각이 뿌리를 내리고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해."

 "너 미쳤어? 아무 여자와 자도 된다고 하는 그 소리가 어떻게 마딜인들을 건강하게 만든다는 거야?"

 "결혼 때문에 여자들이 얼마나 피해를 보는지 너도 여자니까 잘 알잖아."

 "고작 그거 때문에? 그래서 아무하고나 마구 뒹굴자고? 나는 그런 거 절대 싫어!"


 처음 와히디야를 보았을 때 와히디야도 어지간히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을 놓고 보면 오히려 와히디야가 아주 정상이고 라키사가 미친 거 같다. 사실 라키사가 남자였다면 게첸에게 했던 소리를 그대로 했을 거다. 아니, 라키사는 여자니까 조건만 맞으면 아무한테나 일회성으로 다리 막 벌릴 수 있냐고 물어봐야겠지. 당연히 이런 소리는 죽어도 해서는 안 된다. 그건 너 창녀냐고 물어보는 거랑 똑같으니까.


 "나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 아니면 싫어. 하지만 좀 더 자유로운 것이 좋겠다는 생각 자체에는 동의해."

 "너 그 말 진심이야?"

 "응. 물론 나는 그러지 않겠지만...순간의 감정에 몸을 맡기는 사람들을 비난할 생각은 없어."


 와히디야가 입을 쩌억 벌리고 라키사를 쳐다보았다. 이거 완전 흥미진진하다. 너무 재미있다. 와히디야는 왜 이제서야 온 거야? 아까 내가 라키사와 말다툼할 때 왔었어야지! 그랬으면 내 편을 들어주었을 건데. 주제가 어쩌다가 이런 주제로 튀었는지는 모르겠다. 섣불리 내가 끼어들 주제는 절대 아니다. 괜찮다. 옆에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재미있으니까! 와히디야보다는 라키사와 훨씬 많이 친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와히디야가 말로 라키사를 아주 처발라버렸으면 좋겠다. 그래야 라키사가 정신을 차리지. 와히디야는 여자니까 라키사가 남성임을 앞세운 폭력이라고 하지도 못할 거다. 와히디야 이겨라! 꼭 이겨라!


 "너도 더럽게 타락해버렸구나."


 와히디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 돼, 와히디야! 조금 더 힘내!


 "그나저나 너 게첸인가? 그 키 작고 목도 없는 돼지새끼가 너 계속 힐끗힐끗 쳐다보는 거 봤어?"

 "게첸씨가? 나를?"

 "너 좋다고 아주 난리던데?"

 "그분은 좋은 분이야."

 "너 게첸이랑 사귈 수 있어?"

 "그건..."


 와히디야가 풉 소리를 내며 일그러진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주 경멸스럽다는 눈빛으로 라키사를 바라보았다.


 "역겨워. 대체 남아드라스 공화국은 얼마나 더럽고 타락한 거야? 아주 남아드라스 공화국 빨아대고 난리도 아니던데."


 이고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노발대발했겠네. 그때 루즈카와 블랑쉬블르가 들어왔다.


 "언니, 저 정말 괜찮아요!"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 너 힘든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곤란해하는 표정을 짓는 루즈카와 인상을 쓰고 있는 블랑쉬블르. 오늘도 이고가 하루 종일 아다비아를 간병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하러 왔나 보다.


 "안녕하세요."

 "응! 잘 지냈어?"

 "예."

 "오늘 이고가 루즈카 집 봐주느라 늦게 올 거야."

 "언니! 정말 이러지 않아도 되요!"

 "너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래? 오늘은 나랑 같이 기분 전환도 하고 놀자."

 "그러세요. 여기는 저 혼자 보고 있어도 되요."


 켈라자야가 방에서 나왔다. 방에서 나오자마자 블랑쉬블르와 루즈카를 보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블랑쉬블르가 켈라자야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잘 지냈냐고 물어보았다. 켈라자야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저 매우 잘 지냈어요. 언니, 이거 봐요!"


 켈라자야가 블랑쉬블르에게 머리띠를 보여주었다.


 "이거 뭐야? 너무 예쁘다!"

 "이거 타슈갈이 선물해줬어요!"

 "정말? 타슈갈, 이거 정말 네가 선물로 준 거야?"

 "예. 그때 내성 갔을 때요."

 "내가 그날 정말 잘 했네! 켈라자야, 내가 그날 정말 잘 했지?"

 "예!"


 블랑쉬블르와 켈라자야가 활짝 웃었다. 라키사는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이다. 와히디야는 블랑쉬블르와 루즈카를 쳐다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오물덩어리가 여기 또 있네."

 "오물덩어리? 누구? 나?"


 블랑쉬블르가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키며 와히디야에게 물어보았다.


 "예. 당신요."

 "내가? 왜?"

 "외국인이잖아요!"

 "그래? 재미있는 애네? 너 이름이 뭐야?"


 켈라자야가 와히디야를 노려보았다. 와히디야는 계속 블랑쉬블르를 쳐다보고 있으니 켈라자야가 자기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다는 것을 모를 거다.


 "와히디야요. 당신보다 훨씬 고결한 존재죠."

 "그래? 저주술사?"

 "예."

 "그런데 입은 참 더럽네? 실력이랄 것도 없을 거 같은데..."

 "죽어볼래요?"

 "해봐. 나 그런 거 정말 좋아해! 설마 입만 산 거 아니지?"


 와히디야가 블랑쉬블르의 멱살을 잡고 노려보았다.


 "뭐야? 이게 다야?"

 "야! 너 누가 그렇게 행동하라고 가르쳤어?"


 루즈카가 소리쳤다. 그러나 블랑쉬블르는 루즈카를 보며 미소지어보였다.


 "에이, 시시하다. 진짜 나 죽여도 괜찮은데. 어서 해봐! 여기 증인도 많잖아! 내가 나를 죽이라고 한 거야! 무섭니? 엄마 찾고 싶어?"


 블랑쉬블르가 환한 얼굴로 와히디야를 실실 약올렸다. 그러자 와히디야가 두 손으로 블랑쉬블르의 목을 움켜쥐었다.


 "재미없어."


 블랑쉬블르는 와히디야의 양쪽 귀를 움켜쥐더니 비틀며 들어올렸다.


 "아악!"

 "잘못했어요, 안했어요?"

 "놔!"

 "잘못했어요, 안했어요?"

 "놔!"


 와히디야가 비명을 질렀다. 블랑쉬블르는 와히디야의 귀를 잡고 몇 번 흔들더니 앞으로 휙 던졌다. 와히디야는 양쪽 귀를 잡고 고개를 숙였다. 블랑쉬블르는 와히디야를 껴안았다.


 "얼굴만큼 예쁘게 말해야 해요. 알았죠? 우리 와히디야, 착하지."

 "두고봐요!"

 "또 혼날래?"


 블랑쉬블르가 구둣발로 와히디야의 왼쪽 정강이를 세게 걷어찼다. 와히디야는 정강이를 움켜쥐고 외다리로 껑충껑충 뛰었다. 이번에는 오른발을 콱 밟아버렸다. 와히디야가 바닥에 쓰러졌다. 블랑쉬블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쭈그려 앉아 와히디야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와히디야, 착한 애 맞지? 앞으로 얼굴만큼 예쁜 생각만 하고 예쁜 말만 해. 언니랑 약속!"


 켈라자야는 이 장면을 보며 웃음을 억지로 참고 있다. 아주 쌤통인가 보다. 솔직히 웃기긴 하다. 블랑쉬블르가 눈 깜짝할 사이에 연타로 몇 대 때린 것도 아닌데 피하거나 막을 생각도 안 하고 그걸 다 맞고 있냐. 블랑쉬블르가 켈라자야한테는 저러지 않았는데. 하긴, 켈라자야는 블랑쉬블르 말을 잘 들었지. 와히디야가 블랑쉬블르를 너무 만만히 봤어.


 "언니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야. 너 얼굴 예쁜 거 믿고 말 함부로 하면 안 돼. 알았지? 내가 너보다 더 예쁘다고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해? 그냥 '언니 참 예뻐요' 하면 될 걸."


 블랑쉬블르는 와히디야를 일으켜세우고는 옷의 먼지를 손으로 탁탁 털어주었다. 와히디야는 블랑쉬블르를 계속 노려보았다. 블랑쉬블르는 전혀 개의치 않고 와히디야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준 후 꼬옥 안아주었다. 역시 블랑쉬블르도 제정신은 아니야.


 "언니 이름은 블랑쉬블르야. 오물덩어리가 아니라. 이제부터 언니 보면 '오물덩어리'가 아니라 최소한 '언니'라고 불러야 해?"

 "예."

 "언니는 오늘 마딜인 여동생이 하나 또 생겨서 너무 기뻐!"


 와히디야는 전혀 그런 거 같지 않은데? 블랑쉬블르는 진짜 뭐가 있나? 켈라자야에 이어 와히디야도 가볍게 제압해버리네. 와히디야는 무력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정도면...설마 루즈카한테도 저렇게 했던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그랬다면 블랑쉬블르가 아무리 여자라 해도 이고가 가만히 있지 않았겠지. 블랑쉬블르는 생긴 건 참 순하고 귀티나게 생겼는데 저런 짓은 또 어디에서 배웠대? 설마 어렸을 때 하도 부모님, 선생님 말 안 들어서 저렇게 맞고 자란 거 아냐?


 "루즈카, 키란 직접 만나본 적 있어요?"

 "나? 당연히 있지. 그런데 갑자기 왜?"

 "궁금한 거 있어서요."


 라키사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라키사 앞에서 직접 물어봐야겠다.


 "키란이 마지막에 비르자를 여자한테 주잖아요."

 "응."

 "그거 여자는 최고가 될 수 없는 세상에 저항한 행동이에요?"

 "뭐? 누가 그래?"


 라키사를 바라보았다. 라키사는 나를 노려보았다. 왜? 키란을 직접 만나본 사람한테 물어보면 정확하잖아!


 "그게...어제 모임에 갔는데, 거기에서 키란님께서 저주술을 깨닫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를 했었어요."

 "그런데?"

 "키란님께서는 차별에 반대하고 여성을 위해 싸우셨다고 했어요. 그 과정에서 진리를 깨달으셨구요."

 "라키사, 그 모임 정말 안 좋은 모임 같아. 내가 아는 한, 키란님은 그런 것과 전혀 관련 없으셔."

 "하지만 여러 자료들과 이야기들을 분석해보고 토론해보니까..."

 "틀렸어."

 "그렇지만 언니가 키란님의 모든 것을 다..."

 "아니. 절대 틀렸어. 라키사, 우기려 들지 마. 아닌 건 아닌 거야. 그분은 그런 것과는 아예 상관 없으셨어."


 라키사는 고개를 숙였다. 루즈카 표정이 아주 안 좋아보였다. 화날 만 하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으니까. 게다가 직접 본 사람이잖아.


 "라키사, 거기서 무슨 이야기하는지 나도 대충 들어서 알고 있어. 언니로써 말할께. 그 모임 제발 안 가면 안 되겠니? 그건 정말 아니야. 새로운 해석? 그건 새로운 해석이 아니야. 거짓말에 불과해. 너한테 지금 이 상황이 정말 힘든 거 알아. 그렇지만 언니는 직접 전쟁을 겪어보았어. 그리고 저주술사잖니. 그러니까, 그 모임은 가지 마."

 "생각해볼께요."



 루즈카와 블랑쉬블르가 나갔다. 루즈카는 나가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고, 블랑쉬블르는 그런 루즈카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와히디야는 한동안 말없이 의자에 앉아 있다가 밖으로 나갔다. 라키사도 퇴근했다. 서점에 켈라자야와 나만 남았다.


 "와히디야, 꼴 좋다."

 "그렇게 고소해?"

 "주제도 모르고 덤벼보기는."

 "블랑쉬블르가 은근히 한 성질 하나봐?"


 켈라자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한 성질?"

 "왜? 뭐 이상해? 맞잖아!"

 "아, 맞다! 아니야. 나는 블랑쉬블르 언니 참 좋아!"

 "루즈카는?"

 "루즈카 언니도 좋기는 하지만...블랑쉬블르 언니가 더 좋아!"


 얘 루즈카한테는 호되게 혼났었지? 그래서 블랑쉬블르가 더 좋다는 건가? 아까 와히디야가 루즈카에게 덤볐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전에 켈라자야 혼낼 때를 떠올려보면 그거보다 훨씬 무섭게 혼냈을 거 같은데. 라키사는 아마 계속 그 모임에 나갈 거다. 루즈카가 켈라자야를 혼내듯 혼내도 계속 가지 않을까? 루즈카가 그렇게 가지 말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한 걸 보고 꽤 놀랐다. 뜯어말리고 싶지만 그러면 사이만 더 나빠지고 오기로 더 가겠지. 지금은 그냥 옆에서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나? 설마 감비르 때의 실수가 반복되는 거 아냐? 말려야하는 게 맞기는 하지만, 아까 내가 폭력적으로 변해간다는 말이 자꾸 걸린다. 켈라자야는 나보고 안 변했다고 했지만...라키사와 나 사이에 있는 벽이 높아져가는 건 내가 라키사 말마따라 폭력적으로 변해가고 있기 때문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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