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기적과 저주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3장 09화

좀좀이 2018. 3. 24.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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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3장 09화


 이고는 왜 책에 그렇게 빨간 줄을 많이 그어놓은 걸까? 심지어 전체를 빨간 잉크로 마구 그어놓은 페이지도 여럿 있었다. 책이 조금만 구겨지는 것도 매우 싫어하는 이고가 이렇게 해놓은 것이 정말 놀라웠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이 그런 줄 알았다. 이고가 그럴 리는 절대 없으니까. 누가 빌려갔다가 그렇게 엉망으로 만들어서 반납한 거 아닌가 했다. 책이 하도 지저분해져서 차마 다른 사람들에게 대출해주지 못하고 방에 처박아놓은 거 아닌가 싶었다.


 "그거 내가 한 거야."

 "진짜? 왜?"

 "그냥 인상적인 부분들 표시해놓은 거야."

 "네가? 너 책장 조금만 구겨져도 엄청 싫어하잖아!"

 "그거야 이 서점 재산이 아니라 내 책이기도 하고...루즈카가 인상적인 부분은 줄 치면서 보라고 시켰어."

 "그래도...신기하네. 평소 너라면 절대 안 할 짓이잖아."

 "루즈카가 시킨 건데 해야지. 그 책 자체가 루즈카가 준 거잖아."


 이고에게 물어봤을 때가 떠올랐다. 너무나 당연한 걸 갖고 왜 그렇게 놀라냐는 반응이었다. 그 반응을 보고 솔직히 내가 더 놀랐다. 아무리 루즈카가 시켰다지만 이고가 썩 내켜하며 했을 거 같지는 않단 말이야. 그런데 빨간 잉크로 줄쳐놓은 것을 보면 너무나 열심히 줄을 쳐놓았다. 감정이 잔뜩 들어가서 격렬하게 줄을 친 부분도 꽤 많았다. 몇 번을 물어보았지만 이고는 계속 루즈카 시켜서 그런 거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결국 나중에는 왜 똑같은 걸 자꾸 물어보냐고 짜증내면서 그렇게 이상하면 루즈카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했다. 루즈카가 서점에 안 오고 있지만 네가 아다비아 병문안 때문에 어쨌든 한 번은 루즈카 집에 갈 거 아니냐면서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단 말이야. 루즈카가 이고에게 왜 그런 것을 시켰는지 모르겠다. 그거야 루즈카 나름의 생각이 있어서겠지. 게다가 루즈카는 돈 많잖아? 그깟 책 한 권 아쉬워하지는 않을 거다. 이상한 건 이고다. 마지못해 선을 그어놓은 것도 아니고, 아주 적극적으로 열심히 선을 그어놨다. 선을 긋다 못해 빨간 잉크로 마구 떡칠해놓은 페이지도 여럿이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조금 많이 이상하다. 이고는 왜 그렇게 열광적으로 그렇게 책에 빨간 잉크로 여기저기 표시해놓은 걸까?


 하도 이상해서 빨간 잉크로 줄을 그어놓은 곳만 골라 읽어보았다. 마딜어로 된 책이라 몇 번이고 쉽고 빠르게 다시 읽을 수 있었다. 몇 번을 읽어보니 빨갛게 칠해진 부분들이 대체로 키란이 우르간 대제국을 증오했다는 것과 관련있어보였다. 키란이 우르간 대제국을 증오한 것은 사실이잖아? 에드자 전투에서 에드자 성 안의 모든 사람을 몰살시킨 키란의 저주술이 키란이 얼마나 우르간 대제국을 증오했는지 아주 잘 알려주는 증거다. 나도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키란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어본 것 주 키란이 우르간 대제국을 좋아했다는 소리는 없었다. 한결같이 키란이 우르간 대제국을 뼛속 깊이 증오했다는 이야기 뿐이었다. 이상할 것도 없는데 왜 그런 걸까. 루즈카가 이고에게 뭔가 알려주기 위해 시킨 건가? 이고는 진짜 아드라스인이니까. 마딜인들이 아드라스인들에게 적대감을 보이지는 않지만, 그 '외국인과 외국 문화'에 기본적으로 얼마나 큰 적대감을 가고 있는지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하나씩 줄그어가며 보라고 시켰을까? 작년보다 상황이 좋아진 것 같기는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위험하다. 그리고 그 위험한 상황이 이어지는 근본적인 원인을 알려주기 위해서 시켰을 수도 있다. 이고는 생각 자체가 아드라스인이라 이 상황에 대한 이해가 마딜인들에 비해 많이 부족할 수 있다.


 이게 루즈카의 교육 방식이라면 상당히 희안한 방법이네. 좋은 방법일 수도 있다. 스스로 일단 찾아보게 해서 마딜인들의 외국인과 외국 문화에 대한 반감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는지 파악한 후, 아직 인식 못한 부분에 대해 알려주면 이고도 지루해하지 않고 잘 듣겠지. 그래도 뭔가 영 찜찜하다. 단순히 루즈카가 지금 이 상황에 대한 깊은 이해를 위해 그것을 시켰다? 지금 상황을 이해하면 좋기야 할 거다. 그렇지만 계속 내가 아주 큰 것을 못 보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계속 든다.


 '이고가 키란에 대해 얼마나 알까?'


 이고도 마딜 공화국에서 산 지 꽤 되었으니 키란에 대한 이야기를 이것저것 듣기는 했을 거다. 그렇지만 얼마나 키란에 대해 잘 알고 잘 이해할까? 외국인인데. 키란이 우리 마딜인들에게 갖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 이 땅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도 종종 진짜 마딜인들에게 있어서의 키란의 의미에 대해 완벽히는 모르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내 피는 아드라스인이니까. 그런데 나 정도도 아니고 나중에야 마딜 땅으로 넘어온 이고가 다른 마딜인들이 키란을 존경하고, 심지어는 숭배까지 하는 것을 보고 듣는 것 정도로 마딜인에게 있어서의 키란의 의미와 가치를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더 이상한 것이 있다. 이고는 우르간 대제국이 아니라 '외국인과 외국 문화'에 대한 키란의 분노를 이고가 아주 정확히 다 잘 표시해놓았다. 그것까지는 괜찮아. 외국인의 눈으로 보면 그런 것이 우리들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확 띌 수 있겠지. 그런데 단순히 그런 분노만이 아니라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것에도 빨갛게 줄을 쳐놓은 부분들이 꽤 있었다는 것이었다. 특히 '키란은 4원소설을 멀리 했다. 그는 4원소설의 습득을 끝까지 거부했다'는 문장. 외국 문화를 거부한 것이기는 한데, 이 문장에 그어진 빨간 줄은 영 찜찜하다. 저건 왜 줄을 그어놓은 것일까?


 정말 만약에, 그럴 일이 없겠지만 만약에 말이야, 빨간 줄이 틀린 부분을 표시해 놓은 거라면? 보통 빨간 줄은 틀린 것을 표시할 때 쓰는 색이잖아. 그럴 리야 없을 거다. 이고가 키란에 대해 알아봐야 얼마나 알겠어. 그렇지만 이 세상에는 정말 일어날 수 없는 일도 일어나곤 하니까...틀린 것을 표시하기 위해 만약 빨간 줄을 그어놓은 거라면, 키란이 4원소설을 멀리 했고, 끝까지 4원소설의 습득을 거부했다는 내용은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아니야. 그럴 리 없을 거야. 이고가 키란에 대해 뭘 안다고 키란 전기에서 틀린 부분을 빨간색으로 칠해놔? 말이 안 되잖아.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일어나 이고가 틀린 부분을 빨강색으로 칠했다고 쳐. 그러면 '키란은 4원소설을 멀리 했다. 그는 4원소설의 습득을 끝까지 거부했다'는 문장이 거짓이 되어버린다. 이거 사실이잖아. 이게 거짓이라면 키란은 4원소설을 가까이했고, 4원소설을 습득했다는 말이 되어버린다. 4원소설로 마법을 쓰는 키란? 말도 안 돼. 그랬다면 마딜인들이 키란을 존경하지 않았겠지. 그 이전에 키란이 마딜인들 편에 서지도 않았을 거다.


 '설마 알고 그었겠어.'


 그래, 알고 그었을 리가 없어. 그냥 막 그어댔겠지. 키란이 4원소설을 혐오했다는 내용에 줄을 친 것은 이고의 희망이 반영된 걸까? 자기 같은 외국인도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고 싶다는 외침? 그런데 그걸 굳이 루즈카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나? 루즈카와 애인 사이잖아.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나누어도 수없이 많이 이야기했을 거다. 더욱이 루즈카는 저주술사인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주 오랜만에 책 수거가 하나 있다. 그것도 이 밤중에 말이다. 이제 몇 시간 후면 1116년 3월 18일이다. 밤에는 절대 혼자 돌아다니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 이건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니까. 딱 한 권 있기 때문에 지게를 짊어메고 나갈 필요도 없다. 이건 귀찮음의 문제가 아니다. 밤거리는 충분히 많이 위험하다. 정말 극심할 때보다야 나아지기는 했다. 그래서 얼마 전 양측 군대가 드디어 철수하기도 했구. 그래도 여전히 밤에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이 밤에 죽어나가는 사람 모두가 저주술로 죽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그 죽은 사람들 중 일부는 분명히 저주술로 죽은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게첸 이 개새끼!"


 지난 번에 내가 하도 뭐라고 하니까 이제 서점에 오지 않는다. 그래서 아주 잘 되었다고 좋아했는데 이 새끼가 잔머리를 굴렸다. 바로 라키사를 통해 책을 빌리기. 요새 라키사가 무슨 학습 모임에 나간답시고 게첸과 매우 자주 만나는 것 같다. 거의 매일 밤 보는 것 같다. 학습 모임에 갈 거면 얌전히 거기만 갈 것이지, 게첸이 책을 대신 빌려다달라고 했다고 그걸 들어주냐. 들어준 것 까지는 괜찮다. 문제는 라키사가 게첸으로부터 책을 받아오지 않았다는 거다. 그 덕분에 게첸 집에 가서 책을 받아와야 한다. 그 새끼 꼴도 보기 싫은데 어쩔 수가 없다.


 "이게 라키사가 원하는 건가?"


 솔직히 많이 짜증난다. 내가 게첸 무지 싫어하는 거 뻔히 알면서 이래야 해? 게첸을 싫어하기는 하지만 그놈이랑 엮이지 않으면 아무 상관없다. 내가 중앙학문연구소로 쳐들어가서 '게첸 이 망할 새끼야, 제발 나한테 와서 투덜거리지 좀 마! 돈도 많이 받는 새끼가 뭐 불만이라고 나한테 와서 지랄이야?' 라고 소리치고 난리치는 것도 아니잖아. 그놈이랑 안 엮이면 서로 나빠지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니까? 그런데 이렇게 라키사가 나와 게첸을 또 엮어버렸다.


 '장담컨데 그 새끼 나랑 일 한 달만 바꾸면 바로 돌아가겠다고 한다.'


 지금이야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괴롭고 불쌍한 줄 알겠지. 내 일이 엄청 쉽고 널널하고 한없이 쉬워보일 거다. 그건 맞아. 요즘 책 빌려가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일이 참 쉽기는 해. 솔직히 이고가 나와 라키사를 서점에서 안 쫓아내는 것에 매일매일 감사하며 살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월급 받아봐라. 바로 땅을 치며 후회할걸? 맨날 맛대가리 없는 곡물 가루를 물에 개고 거기에 말린 과일 몇 조각, 말린 고기 조금 잘라 넣은 걸 후루룩 들이키며 한 끼 잘 때웠다 외쳐봐라. 장담컨데 그놈은 바로 나한테 찾아와 제발 다시 각자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자고 할 거다.


 '진짜 책만 받고 빨리 돌아와야지.'


 게첸하고는 말 한 마디도 섞기 싫다. 라키사는 자기가 빌려줬으면 자기가 책임지고 받아올 것이지, 그걸 결국 나한테 떠넘기고 있어. 물론 이런 불평을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게첸이 책을 빌려가서 서점은 돈을 벌었고, 연체를 해서 연체료를 또 벌었으니까. 요즘 장사도 안 되는 거 뻔히 아는데 그래도 그렇게라도 돈을 벌게 해주었으면 잘했다고 해야할 거다. 그래서 기분이 매우 안 좋지만 그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다. 오히려 이런 식으로라도 책을 사람들이 빌려가야 나와 라키사가 눈치가 덜 보이니까.



 밤공기가 부드럽다. 정말 많이 부드러워졌다. 날카롭고 투명한 칼날 수만개를 숨겨놓은 것 같던 시린 겨울 밤공기가 아니다. 아직 공기 속에 날카롭고 투명한 칼날이 숨어 있어 가끔 내 볼을 긁고 가기는 하지만 그때마다 부드러운 손결이 긁힌 자리를 따스하게 어루어만져준다. 진절머리나는 겨울도 이제 끝났구다. 이제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조금 나아지겠지? 과일이 나오고 야채가 나올 거다. 성밖에 주둔하던 군인들도 철수했으니 가격이 뛰지는 않겠지. 밤에 머리 끝까지 이불을 덮었다 답답해서 머리를 내놓았다가 다시 얼굴이 시려 머리를 다시 이불 속에 집어넣는 짓의 반복도 곧 끝날 거다. 봄이다.


 "여기 어디랬는데..."


 주소를 보며 게첸 집을 찾아 걸어갔다. 서점에서 중앙학문연구소를 향해 쭉 걸어올라가야 했다. 우물을 지나 계속 중앙학문연구소를 향해 걸어갔다. 냇가가 나왔다. 다리를 건넜다. 냇가를 지나서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했는데? 주소를 보며 게첸의 집을 찾아 돌아다녔다.


 "이놈 꽤 괜찮은 곳에서 사는데?"


 주소를 보고 찾아간 집은 무려 마당이 있는 집이었다. 에드자 성 안에서 마당 있는 집에서 살려면 돈을 얼마나 모아야 하는 거야? 돈 많은 루즈카가 사는 집에도, 역시나 돈 많아 보이는 블랑쉬블르가 사는 집에도 마당은 없었다. 게다가 위치도 둘의 집에 비해 내성과 훨씬 가까운 거리다. 게첸이 더 싫어진다. 이렇게 좋은 곳에서 사는 놈이 맨날 힘들다고 서점 와서 나한테 징징거리고 있는 거야? 담장을 살펴보았다. 내 어깨만한 높이였다. 담장 위에는 날카로운 가시와 뾰족한 나뭇가지, 깨진 항아리 조각이 박혀 있었다. 그 담장 너머에는 나무로 만든 2층 건물이 있었다.


 "대문을 발로 확 차버릴까보다."


 이렇게 잘 사니 내가 가격을 아주 엉터리로 불러도 별 말 없이 돈 다 줬지. 이제는 내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가격을 불렀는지 알았을 거다. 라키사는 아주 정직하게 가격을 불렀으니까. 지금까지 자기한테 왜 돈을 그렇게 많이 뜯어갔냐고 따질 거야? 따지라지! 누가 빌려가래? 이고도 말만 하지 않았을 뿐, 게첸을 매우 싫어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내가 가격을 엉터리로 부르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그냥 놔두고 있었다.


 대문을 두드렸다. 집 안에서 두 명이 대문을 향해 걸어와 문을 열어주었다. 아...진짜 엎친 데 덮친 격이네. 게첸과 같이 나온 사람은 감비르였다.


 "연체한 책 받으러 왔어요."

 "아, 제가 연체했죠?"

 "예."

 "들어와서 차라도 한 잔 하고 가요."

 "책과 연체료 주세요."

 "당연히 드려야죠. 그렇지만 들어와서 차 한 잔 해요.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을텐데요."


 야, 네가 그러는 게 나를 더 피곤하게 만드는 거야. 너는 네 불만 털어놓을 사람 찾아왔다고 좋아하겠지. 나는 이게 일하는 시간이야. 이 깜깜한 밤에 다시 홀로 서점에 돌아가야 하고, 네가 그렇게 굴 수록 나의 잠자는 시간만 줄어들어. 이놈은 나름 예의를 차린다고 이러는 건가? 내 입장에서 단 한 번만이라도 생각을 해 봤다면 연체할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을 거다.


 "저 지금 일하는 시간이에요. 한가하게 차 마실 시간 없어요."

 "타슈갈, 차 한 잔 하고 가. 어려운 일 아니잖니?"


 감비르가 한 쪽 눈만 감으며 말했다. 속터진다.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일부러 담배 연기를 게첸 얼굴을 향해 뿜었다. 너, 지금 이 상황이 나한테 얼마나 더러운지 알아? 이 상황에 맞닥뜨리기까지 내가 한 건 단 하나도 없다. 책을 빌려준 건 엄연히 라키사다. 원래는 라키사가 책을 받아오는 일도 해야 하는데 얘는 오전 근무만 하기 때문에 그 일이 나한테 넘어왔어. 그리고 지금 어쩔 수 없이 게첸 집 안에 들어가서 차를 마셔야 한다. 왜? 감비르가 어째서 나한테 윙크를 날렸는지 모르겠지만 그게 아다비아와 관련되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저놈은 아다비아가 쿠룬나스였다는 사실을 안다. 저놈이 동네방네 그 사실을 떠들고다니면 아다비아는 끝장난다. 아다비아를 다시 눈뜨고 좋아지게 할 방법은 몰라. 아마 없을 거야. 하지만 최소한 죽지 않게 하려면 감비르 말을 들어주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정말 싫은데 아다비아 때문에 말이다.



 담배를 입에 문 채 게첸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러면 사실 엄청난 무례지. 그래서 일부러 그랬다. 제발 나한테 정나미 좀 떨어져서 나 좀 그만 찾으라고 말이다. 게첸과 감비르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게첸도 설마 '진짜'인가? 담배 꽁초를 화로에 던져넣었다. 탁자 앞에 앉아 집안을 둘러보았다. 벽 한 쪽에는 그림 두 점이 걸려 있었다. 한 점은 별이 가득한 검푸른 밤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독수리와 두 눈을 감고 두 발로 뛰어 같이 비상하는 하얀 옷을 입은 여자가 그려진 그림이었다. 다른 한 점은 남자와 여자가 두 손을 맞대고 서로를 바라보는 그림이었다. 두 손을 맞대고 살짝 미소지으며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남녀 뒤로 많은 사람들이 손에 손을 잡고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너무나 맑은 하늘과 열을 지어 날아가는 다양한 새가 배경이었다. 두 그림 다 멋있었다. 저거 설마 게첸이 그린 건 아니겠지? 한 사람이 그렸다고 보기에는 화풍이 너무 달랐다.


 벽에 걸린 그림 두 점 옆에는 책장이 하나 있었다. 책장에는 책이 꽤 많이 꽂혀 있었다. 어떤 책인지 궁금했다. 이놈은 어떤 책을 읽길래 맨날 징징거리기만 할까? 문득 게첸이 지난해 연말에 서점에 와서 이고 앞에서 헛소리를 늘어놓던 것이 떠올랐다. 자기가 남아드라스 공화국으로 한 달 출장 다녀왔다고 하면서 여장하고 자기가 남자이자 여자라고 주장하는 감비르보다 훨씬 더한 것도 남아드라스 공화국에서 정상으로 취급받는다고 떠들었었다.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 어이없고 진짜 웃긴 장면이다. 나처럼 피만 아드라스인이 아니라 진짜 남아드라스인 공화국 사람인 이고한테 남아드라스 공화국에 대해 아는 척이라니. 그것도 무슨 몇 년 살고 아는 척도 아니고 꼴랑 한 달 출장으로 다녀온 것 가지고서. 그렇지만 책을 직접 살펴보지도 책에 대해 물어보지도 않을 거다. 책에 관심을 보이는 순간 엄청 피곤해질 것이 뻔하니까.


 그림 두 점과 책이 가득한 책장 하나를 제외하면 평범한 가정집과 비슷했다.


 "차 드세요."


 게첸이 내 앞에 찻잔을 놓고 차를 따라주었다. 차에서 진한 향기가 코로 들어왔다. 봄날의 꽃향기, 여름의 풀내음, 가을의 곡식 냄새, 겨울의 매캐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어머, 게첸님, 이 차 향기 너무 좋아요! 어쩜 이렇게 차 향기가 사랑스러울 수 있죠? 타슈갈, 너는 이 향기 안 느껴지니?"

 "이 차는 셀베티아 왕국과 남아드라스에서 수입한 차를 제가 섞어서 만든 차에요. 향기 괜찮나요? 사계절을 이 안에 다 담아보려고 했어요."

 "너무 좋아요! 아, 취할 것 같아!"


 감비르가 찻잔을 들어 코 근처로 가져와 두 눈을 감고 계속 차 향기를 맡았다. 냄새가 좋기는 하다.


 "이거 꽤 비싼 차인가 봐요?"

 "괜찮아요. 제 자신을 치료하기 위해 들이는 비용이니까요. 이렇게 차 향기로도 이상향을 구현해낼 수 있죠."


 감비르가 찻잔을 내려놓고 나를 쳐다보았다.


 "타슈갈, 너 감비르님 너무 미워하는 거 아니니? 네가 조금 불쾌하게 느낄 수도 있다고 생각해. 게첸님이 너보다 많은 돈을 버는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고작 얼마를 버느냐로 편을 가르는 건 너무 생각이 짧은 거 아냐? 너나 게첸님이나 똑같이 착취당하는 사람이잖니. 착취당하는 사람끼리 '내 족쇄는 납 족쇄, 네 족쇄는 나무 족쇄, 그러니 나무 족쇄는 적이야' 하는 건 잘못된 거야. 우리는 족쇄 그 자체에 집중해야 해.

 "감비르님, 너무 그러지 마요. 저분도 아프고 힘들기 때문에 그러는 거잖아요."

 "역시 게첸님께서는 속이 너무 넓으셔요. 게다가 학식도 풍부하고 교양도 있으시구요. 너무 멋져요!"


 착취? 지금 나를 착취하고 있는 게 누구라고 생각해? 너네 때문에 지금도 계속 일하고 있는 거 안 보여? 내가 서점에서 일하는 건 나쁜 착취고, 너네가 내 일이 끝나지 못하게 나를 계속 잡고 있는 건 착한 착취냐? 아니지, 아예 착취라는 생각 자체를 못 하고 있으니 착한 선행이라 해야 하나. 나는 지금 쉬지도 못하고 일하는 시간이 계속 끝없이 연장되고 있는데. 게다가 점점 더 사람들이 없어져 위험해지는 밤길을 걸어가야 하는데.


 "저는 라키사님이 참 매력적인 거 같아요."

 "라키사요? 왜요?"

 "확실히 뭔가 달라요. 좀 더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고랄까요? 게다가 매우 유식하기도 하구요. 보통 그 나이에 그러기 참 어려운데 말이에요."

 "방금 '그 나이'라는 건 조금 모든 사람을 획일화한 것 같은 발언이에요."

 "아, 그렇군요! 미안해요."


 게첸이 웃었다. 감비르도 따라 웃었다. 둘이 아주 깨가 쏟아지네.


 "사실 요즘 여자들이 너무 돈을 밝혀요. 진정한 사랑을 찾으려 하지 않아요. 남자를 볼 때 이 남자의 재산, 미래 가치 같은 것부터 따져요. 그 다음에 접근하곤 해요. 그리고 외모! 아무 것도 아닌 그 껍데기에만 집중해요. 진실된 사랑은 보려 하지 않아요. 아니, 있어도 안 보려 외면해요. 하지만 라키사는 달라요."

 "앗! 그건 너무 단순 획일화에 성차별적 발언이에요! 어떻게 모든 여자들을 그렇게 싸잡아 이야기할 수 있죠?"

 "아, 정말 미안해요! 저는 정말 구제불능인가봐요."

 "게첸님도 더욱 분발하셔야 해요!"


 감비르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게첸을 살짝 흘겨보았다. 게첸은 멋쩍게 웃으며 감비르의 시선을 피했다. 뭔가 감비르를 피하고 싶어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게첸님 말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못하겠어요. 안 그런 여자들도 많지만, 그런 여자들도 많으니까요."

 "그렇죠! 모두가 사랑에 몸을 맡기는 그런 세상이야말로 이상적이지 않나요? 라키사님은 그런 이상향에 너무나 잘 맞는 여성 같아요. 아, 실수! 잘 맞는 분요. 어려서 생각이 유연한 걸까요?"


 모두가 사랑에 몸을 맡기는 그런 세상?


 "그러면 바람피우는 것도 된다는 거에요?"

 "바람피우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 - 그 자체가 잘못된 거에요."

 "예?"


 이건 뭔 소리야? 바람피우는 것이 잘못된 거라니?


 "'결혼 제도' 자체가 잘못된 거에요. 그것은 그저 개인간 소유욕과 경제적 이익을 위한 결합에 불과해요. 거기에서 우리에 대한 착취가 시작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거랑 바람피우는 게 무슨 상관이에요?"

 "'결혼'을 통해 상대를 소유하지 않는다면 바람피운다는 개념도 없지 않니?"

 "아, 그러면 아무나 눈 맞으면 그 자리에서 뒹굴자구요?"

 "어쩌면 그것이 바로 전인류의 이상향일 수 있어요. 쓸 데 없는 제도로부터의 해방! 구속으로부터의 탈출! 자유!"


 설마 게첸도 진짜인가?


 "그러면 내가 당신 아내랑 당신 앞에서 열라 사랑을 나눠도 되요?"


 순간 게첸 얼굴이 굳었다. 억지로 미소를 지으려 하는 게 너무 티가 났다. 내가 게첸의 양쪽 입꼬리에 바윗덩어리를 매달아놓았는데 게첸은 억지로 힘으로 입꼬리를 들어올리고 있다. 하지만 저 굳어가는 표정.


 "하루에 막 몇 번씩 해도 되요? 당신 아내랑?"

 "저 역시 당신 아내와 그러겠죠?"

 "아뇨? 왜요? 나는 그 생각에 동의할 생각 전혀 없는데요? 당신이야 아내가 어떤 놈과 뒹굴든 상관없다고 했으니까 그런거구요. 저는 동의 안 했으니까 당신이 내 아내한테 껄떡대면 죽여패죠. 당연한 거 아니에요? 아낌없이 아내를 주는 남편 현실화인가요!"


 일부러 박수를 두 번 치며 입으로 '따악! 따악!' 소리를 냈다. 게첸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아...아무래도 나는 역시 완벽한 진리로 가기에는 역부족이에요."

 "아뇨! 꼭 가세요! 당신 아내랑 따악! 따악!"

 "모두가 모두를 공유해야죠."

 "저는 싫다니까요? 주는 거야 받아먹겠지만, 줄 생각은 없어요. 미쳤어요? 내 아내한테 껄떡대는 놈을 가만 놔두게요?"

 "만약에 내 아내가 라키사님이 된다면 그때도 그런 말을 할까요?"

 "라키사가 미쳤어요? 당신하고 결혼하게?"


 그때 감비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타슈갈, 나가!"

 "응, 나도 돌아가서 잠 좀 자고 싶다. 근데 게첸이 나한테 책과 연체료를 안 주네?"


 게첸이 자리에서 일어나 책과 돈을 들고 내 앞으로 왔다.


 "당신은 정말 답이 없군요."

 "그래서요? 제가 당신 싫어하는 걸 여태 몰랐던 거에요?"

 "저는 라키사님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라키사님은 돈만 바라보는 머저리들과 다른 여자에요. 제가 라키사님과 결혼할 때 당신이 과연 오늘 한 그 소리를 또 할 수 있는지 볼 겁니다. 그 전에 오늘 일은 영원히 잊지 않을 거에요. 또한! 라키사님께 오늘 일에 대해 꼭 이야기할 겁니다! 당신이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인지, 라키사님과 얼마나 안 어울리는 격 떨어지는 인간인지요! 물론 나와 라키사님은 당신을 구제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기는 할 거에요. 만약 답이 없다고 결론이 나면 그때 처단할 거구요."

 "좋을 대로 하세요. 하지만 진짜 저 좀 그만 귀찮게 하세요. 나 당신 진짜 짜증나고 싫다구요! 서로 보지 좀 말자구요! 라키사가 말 잘 들어주면 라키사한테 하소연하든가!"



 문을 확 열어젖히고 밖으로 나왔다. 게첸 이 새끼 진짜 화났구만. 연체료라고 잡히는 대로 나한테 줬다. 돈을 세어보니 연체료로 내야할 돈보다 훨씬 많은 돈을 줬다. 거스름돈은 없다. 남은 돈은 오늘 나를 추가근무시킨 대가다. 이고에게 말하기는 해야 한다. 거스름돈 내가 일단 갖고 있어도 되냐고 물어봐야 한다. 된다고 하면 게첸이 돌려달라고 하지 않는 한 안 돌려줄 거다. 라키사를 통해서 거스름돈 받으려고 들 건가? 그러든가 말든가.


 다리를 건넜다.


 "푸하하하! 따악! 따악!"


 웃음이 터져나왔다. 진짜 게첸 그 새끼 표정 너무 웃겼다. 나도 미쳤지. 진짜 미쳤어. 게첸이 진짜 싫기는 하지만 어떻게 그 순간 그 말을 할 생각을 해버렸지? 배를 잡고 깔깔 웃으며 걸었다. 따악! 따악! 그래, 이 맛이야. 케르무크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알겠다. 이 맛에 중독된 거다. 게첸과 감비르의 그 반응. 어디서 되도 않는 소리를 하고 있어. 결국은 자기는 동네방네 사방팔방 자기 마음에 드는 여자 마음껏 건드리지만 자기 여자는 건드리지 말라는 거 아냐. 그게 그놈이 진심으로 원하는 자유와 평등. 이게 사람 새끼냐?


 "아, 진짜 웃겨 죽겠네!"


 감비르도 병신인가? 그래, 감비르는 아마 진짜일 수도 있다. 진짜로 그쪽으로 미쳐버렸을 수 있어. 정신나간 것 같은 케르무크도 감비르는 인정했잖아. 이제 둘이 무슨 이야기를 나눌지 궁금하다. 감비르는 게첸 엄청 좋아하던데. 감비르는 옆에서 게첸한테 그것도 극복해 진정한 자유와 진리로 나아가자고 할 건가? 그러면 게첸 더 열받을 건데? 진짜 미친놈 둘과 같이 있으니 나까지 미쳐버린 건가. 그렇지만 이 상황이 너무 웃겨서 참을 수가 없다. 이러다 나도 케르무크처럼 되어버리는 거 아냐? 안 돼. 정신 차려야 해. 미치면 안 돼. 끝까지 정신차리고 있다가 이 망할 마딜 땅을 떠야 하니까. 그래도 그렇지, 어디서 되도 않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어. 이제는 내 앞에 나타나서 헛소리 못 하겠지. 감비르는 모르겠다. 하지만 게첸은 나한테 못 올 거다.


 "미친 새끼. 라키사? 라키사가 눈 삐었냐?"


 라키사와 결혼해? 진짜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어리니까 생각이 유연하다고? 그러니까 라키사가 어리니까 만만해보인다는 거야? 웃기다. 진짜로. 불가능하지야 않겠지. 가끔 이변이라는 게 존재하니까. 하지만 게첸이 저런 쓰레기라는 것을 알면 라키사가 과연 가만히 있을까? 지금까지 내가 겪어본 라키사는 절대 안 받아준다. 그렇게 타락하고 퇴폐적인 것과는 정말로 멀다. 게첸이 라키사를 함부로 건드리지는 못 하겠지? 감비르가 멀쩡하다면 게첸이 뭔 헛짓거리를 하려 해도 감비르가 라키사를 지켜줄 거라 안도가 될 거다. 하지만 문제는 감비르가 정상이 아니라는 거지. 오히려 옆에서 아무하고나 마구 구르는 동물의 왕국이 진정한 진리라고 하며 마구 강요하는 거 아냐? 진짜 그러지나 않으면 다행 아닐까?


 "자기가 알아서 잘 하겠지."


 라키사, 게첸과 잘 지내라고? 감비르하고 잘 지내라고? 너 진짜 오늘 아까 그 장면을 직접 봤었어야 했어. 게첸이 네 앞에서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 앞에서 보여주는 진짜 모습을 네가 봐야 해. 솔직히 답답하다. 왜 그걸 못 보지? 너무나 뻔히 보이는 건데. 솔직히 오늘 있었던 일을 라키사에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게첸 정말 조심하라고.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나쁜 놈이라고. 그런데 이야기해줘봐야 내 말을 안 듣겠지. 어떻게 이상하게 해석할까? 차라리 말을 안 하면 더 나빠질 것은 없으니 놔두어야 할까? 너 믿고 싶은 것만 믿으라고. 그래, 될 대로 되라. 내 말은 듣지도 않는데. 말해줘봐야 서로의 관계가 더 꼬이고 나빠지기만 하는데. 라키사가 알아서 잘 하겠지. 그게 라키사가 원하는 것일 거다.



 게첸 집으로 책 수거를 다녀온지 이틀이 지났다. 어제 라키사가 또 학습 모임에 간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나를 보고 별 말 하지 않았다. 게첸 그 새끼, 라키사한테 그저께 일 이야기 안 했나? 하긴, 자기도 쪽팔려서 이야기 못 할 거다. 아침에 라키사와 나눈 이야기는 오늘 게첸을 위해 책을 빌려가냐고 물어본 것 뿐이었다. 라키사는 게첸이 책을 대출해달라는 부탁을 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거기서 대화가 끝났다. 나와 대화를 나눌 수록 우리 관계가 더 엉망이 되어 간다는 것을 라키사도 느끼고 있겠지? 우리는 계속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걸까? 정말 내 생각대로 라키사 역시 나와 대화할 때마다 나와의 관계가 엉망이 되기 때문에 그게 무서워서 대화를 피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영원히 서로 '대화'라는 것을 하지 말아야하는 건가?


 아침에 루즈카 집에 갔던 이고가 서점으로 돌아왔다.


 "이고, 나 아다비아 문병 다녀올께."

 "다녀와."


 이고에게 아다비아 병문안을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서점에서 나왔다. 얼마만에 가는 병문안이지? 2월 마지막날 간 것이 마지막이었으니 보름도 넘었다. 감비르가 서점으로 찾아온 후, 내가 아다비아 곁에 있는 것이 아다비아에게 좋은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감비르가 자꾸 나한테 저주술 수련을 같이 하자고 하는지 모르겠다. 이제 그것을 위해 아다비아의 비밀을 들먹이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아다비아와 멀어지면 감비르도 내 앞에서 아다비아를 입에 올리는 일이 없어지지 않을까 예상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게첸 집에 다녀온 날, 아다비아에게 찾아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감비르 핑계로 아다비아와 멀어지려고 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미래가 무서워서. 그 순간 내 자신이 미워졌다.


 "켈라자야는 왜 아다비아 병문안을 잘 가지?"


 켈라자야랑 아다비아는 서로 잘 모를텐데...그런데 켈라자야는 아다비아 병문안을 자주 간다. 어디 다른 곳을 가기 위해 핑계대는 것이 아니라 진짜 병문안을 간다. 둘이 뭐 통하는 것이 있나? 서로 잘 지내면 좋지. 어떻게 잘 지내는지 정말 궁금하기는 하다. 그러나 물어보지 않는 것이 좋을 거 같다. 괜히 물어봤다가 새로운 문제 만들어버리면 어떻게 해? 둘이 서로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잘 지낸다면 그걸로 되었다.


 루즈카 집에 도착했다. 문을 두드리자 루즈카가 문을 열어주었다. 진짜 어떻게 저런 여자가 이고랑 사귀지? 아무리 봐도 이해가 안 된단 말이야. 예쁘지, 돈도 많은 거 같지, 능력도 있지...이고와 어떻게 사귀게 되었는지 볼 때마다 신기하다. 오늘도 목부터 허리 너머까지 온갖 색실로 화려하게 수놓아진 품이 좁은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있다. 양 팔에는 온갖 보석이 박힌 은빛 팔찌를 차고 있고, 머리에는 목 뒤로 넘어가는 천이 달려 있고 주변에 금실로 자수가 놓여 있는 둥근 원통형 초록색 모자를 쓰고 있다. 탁자를 보았다. 서류가 수북히 쌓여 있다.


 "일 도와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내 일인걸. 아다비아 보러 왔지?"

 "예."

 "올라가봐. 너 매우 기다렸어. 그동안 왜 안 왔어?"

 "아...이것저것 알아보고 할 것들이 있어서요."

 "뭐? 너 설마 저주술 수련할 생각이야?"

 "아뇨. 저는 그쪽에는 관심 없어요."


 계단을 올라가며 루즈카를 보았다. 루즈카는 탁자에 앉아 다시 서류를 하나씩 꼼꼼히 읽어보고 있다. 무슨 서류일까? 글자가 잘 보이지 않는다. 일과 관련된 거겠지. 저주술과 관련있는 서류일까? 인상을 찌푸리며 읽는 모습은 확실히 보인다. 어서 아다비아나 보러 가자. 계단을 걸어올라갔다. 아다비아가 있는 방문 앞에 섰다. 문고리를 잡았다. 지지난번에 왔을 때보다는 지난번에 왔을 때, 그리고 지난번에 왔을 때보다는 지금이 부담도 고민도 조금 가볍다.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는데 말이다. 눈이 먼 아다비아를 받아들이기 시작해서인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다비아는 오늘도 누워있다.


 "누구세요?"

 "나야."

 "왜 왔어? 한참동안 참 잘도 안 오더니."

 "그러면 가?"

 "야!"


 순간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얼마만에 보는 아다비아다운 모습이야? 아다비아가 누워 있는 침대 옆으로 가서 앉았다. 내가 자기 옆에 앉은 것을 느꼈는지 아다비아가 이불을 두 손으로 걷고 앉았다.


 "어? 너 이제 양손 풀렸네?"

 "이거 꽤 되었거든?"


 아다비아는 내쪽으로 고개를 돌려 말했다. 저 눈도 저렇게 좋아지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건 정말 가망없는 일이다.


 "머리 쓰다듬어줘."


 아다비아가 내쪽으로 돌아앉아 머리를 들이대었다.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나 안 보는 동안 매우 신났지? 기뻤지?"

 "아니야."

 "거짓말하지 마. 다 알고 있어."

 "무슨 거짓말이야?"

 "왜? 켈라자야랑 아주 꽁냥꽁냥 잘 놀고 있잖아!"

 "무슨 소리야? 라키사가 와서 그런 소리해?"

 "모두 다! 둘이 아주 좋아 죽으려고 한다면서? 걔는 예쁘니까 좋아? 나는 그렇게 미워했으면서?"


 아다비아가 팔짱을 끼고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야. 무슨 켈라자야랑 서로 좋아 죽으려고 해?"

 "손 치워. 너 지금 내 머리 쓰다듬으면서 켈라자야 생각하지?"


 아다비아는 내 손을 탁 쳤다. 내가 무슨 켈라자야랑 서로 좋아 죽으려고 해? 켈라자야가 친구라 좋다고 나한테 자꾸 들러붙는 거지. 그러는 것이 솔직히 좋았다. 하지만 걔를 내가 어떻게 감당해? 걔는 아다비아 눈만큼 정신에 문제가 있는 애인데.


 "너는 정말 나빠."

 "왜 또?"

 "나를 항상 미워했잖아!"

 "내가 언제 너를 미워했어?"

 "너, 내가 네 공부 도와주냐고 물어볼 때 막 화냈잖아!"

 "언제?"

 "그때!"

 "그러니까 언제?"

 "교수님이 너 무시하던 날!"


 아, 그때? 그건 네가 사람 열받을만한 소리를 해서 화낸 거잖아. 학교 끝나고 서점 가서 일해야 하는데 오후 3시 이후에 도서관 오면 공부 도와주겠다고 하는게 약올리는 거지, 뭐야? 아다비아가 서점에 찾아와서 공부를 알려주기 시작하면서야 그게 나를 약올리려고 한 소리가 아니라 진짜 진심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그렇지, 물어보려면 오후 3시에 어떻게 시간을 내볼 수 있냐고 물어보든가, 뻔히 그 시각에 일하는 거 알면서 3시 넘어서 도서관 오면 공부 도와주겠다고 말하냐?


 "아...그때는 네가 나한테 장난치는 줄 알았지. 나 서점에서 일하는 거 뻔히 알면서..."

 "네가 그렇게 오후 내내 일하는 줄 몰랐단 말이야!"

 "미안..."

 "너 정말 나빠. 맨날 나 미워하기만 하구. 너 솔직히 말해봐. 그때 그 사탕, 네가 산 거 아니지?"

 "어?"

 "내가 모를 줄 알아? 그거 네가 산 거 아니잖아! 너 그 사탕 어디서 파는지 알아? 내가 대체 왜 그렇게 못마땅해?"

 "아니야! 그건 진짜 오해야. 사탕은 이고가 사다준 거 맞지만...너 못마땅해 한 적 없어!"

 "뭐가 없다는 거야? 그러면 그때 나한테 화는 왜 냈는데?"

 "그때는 진짜 네가 나 약올리는 줄 알았다니까."

 "변명하지 마."


 아다비아는 다시 침대에 눕더니 벽을 향해 휙 돌아눕고는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썼다. 봄날이 되니 가슴에 봄바람이라도 들어갔나? 의자에 앉아서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쓰고 누워 있는 아다비아를 바라보았다. 제발 아다비아 눈이 원래대로 돌아오기를. 얼굴까지 원래대로 돌아오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정말 아다비아가 다시 앞을 볼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7가지 꿈을 꾸고 하얀 언덕 위 새까만 꽃을 따서 아다비아에게 주는 말도 안 되는 전설에 기대어보는 것 뿐이다. 그것도 나 스스로 해결해내는 것이 아니라 케르무크의 도움을 받아서.



 갑자기 아다비아가 이불을 확 걷고 나를 향해 앉았다.


 "야! 너 진짜 왜 왔어?"

 "너 보러."

 "왜 안 달래는데? 지금 나 구경해? 재미있어 죽겠니?"

 "아니야!"

 "그러면 나 달래줘!"


 켈라자야가 자주 문병온다고 했다. 얘도 켈라자야처럼 정신이 이상해진 건가? 뭘 달래달라는 거야? 아다비아를 바라보았다. 아다비아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 뭘 어쩌라는 거야?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아다비아가 갑자기 나를 와락 껴안았다.


 "야, 뭐하는 거야?"

 "싫어?"

 "어? 그건 아닌데..."

 "내가 그렇게 싫어? 정말 꼴도 보기 싫어?"

 "아니라니까."

 "그런데 왜 그래?"


 이미 아다비아 품에 안겨버렸다. 왼팔로 아다비아를 감싸안고 오른손으로 아다비아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켈라자야가 너 많이 좋아한대."

 "너한테 직접 말해?"

 "응."

 "그래서?"

 "나도 너 좋아한다고 말했어."

 "뭐? 그러니까 걔가 뭐래?"

 "괜찮대."

 "너는?"

 "나도 괜찮다고 했어."

 "뭐가 괜찮아?"

 "너 반토막 내서 둘이 나눠갖지, 뭐."

 "야!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따로 있지!"


 내 말에 아다비아가 깔깔 웃었다.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아다비아의 웃음 소리. 지금 이 아다비아의 웃음이 아다비아 가슴에 봄바람이 몰아닥쳐 그런 거라도 좋다. 비록 눈이 멀었지만 여전히 웃을 수 있잖아. 이것만으로도 아다비아가 정말 많이 좋아진 거다. 루즈카에게 생포되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도 아다비아는 웃지 않았다. 오히려 뭔가 큰 죄를 지은 것처럼 서점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밖에 눈을 맞아가며 쭈그려 앉아 있었다.


 "나, 진짜로 너 좋아해."

 "응..."

 "앞으로도 계속 너 좋아할 거야."

 "응..."

 "너, 나 버릴 거지?"

 "뭐?"

 "알아. 언젠가 네가 나 버릴 거라는 거. 눈도 멀고 얼굴도 못생긴 여자를 누가 좋아하겠어?"

 "아니야."

 "그러면? 나 안 버리고 어떡할 건데?"

 "응?"

 "나 안 버리고 어떻게 할 거냐구. 나도 알아. 나 이제 영원히 앞을 못 봐. 얼굴은 보나마나 매우 흉측할 거야. 이런 나를 안 버리고 어떻게 할 건데?"

 "아...그게..."

 "그거 봐. 너는 분명히 나를 버릴 거야. 그러니까..."


 아다비아는 말을 끊고 입을 꽉 다물었다.


 "아다비아, 나 진짜 노력해볼께. 나도 알아. 7가지 꿈을 꾸고 하얀 언덕 위 새까만 꽃을 따는 전설을 믿는 거 엄청 멍청한 거. 그래도 그 전설이 진짜라고 믿을 거야. 어떻게든 그 꽃을 따서 너 눈 뜨게 해줄께."

 "야! 미쳤어?"


 아다비아가 나를 밀쳐냈다.


 "그딴 멍청한 짓 하지 마! 너 머리 없니? 바보야? 생각 좀 해! 그따위 허황된 전설을 왜 믿어! 제발 좀 제대로 된 생각 하면 안 돼? 너는 내가 더 비참해져야 속이 시원해? 이걸로도 부족하니? 응? 대체 왜 그러는데? 내가 너한테 대체 뭘 그렇게 크게 잘못했는데! 차라리 그걸 말해줘!"


 아다비아가 소리치며 울기 시작했다. 얘는 갑자기 왜 소리치고 우는 거야? 너 눈 뜨게 할 거야. 알아. 그거 엄청 바보같은 짓이라는 거. 성공할 리 없어. 그렇지만 이거라도 안 믿어보면 어떻게 할 건데? 설마 내가 일곱 가지 꿈 전설에 사로잡힌 사람들처럼 잠만 자며 폐인이 되어갈 거라 상상하는 거 아니야?


 "너 안 미워한다니까! 나도 너 좋아해! 우리 진짜 친한 친구였잖아. 그런데 뭘 미워해? 그 잠만 자는 병신짓 하겠다는 거 아냐. 저주술사 친구에게 내 꿈 이야기를 계속 해주고 뭐가 일곱 가지 꿈인지 이야기해볼 뿐이라구!"

 "그딴 짓도 제발 좀 하지 마. 제대로 된 생각을 하란 말이야! 아니, 그냥 내가 밉다고 말해. 정말 찢어죽이고 싶을 만큼 싫다고 해!


 아다비아를 꽉 껴안았다.


 "너 대체 왜 이래? 너를 위해 뭐라도 해보겠다는데 왜 화내? 내가 뭘 어쨌으면 좋겠어? 너야말로 말 좀 해!"

 "멍청한 짓 하지 말고 제대로 된 걸 하란 말이야! 진짜 나를 위하고 싶으면!"

 "그러니까 그게 뭔데? 네가 원하는 게 뭐냐구!"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네가 찾아본다고 했잖아! 고작 찾아온 게 그 일곱가지 꿈이야? 제발 그딴 짓 좀 그만해!"


 아다비아는 나를 밀쳐내고 다시 드러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꺼져! 다시는 오지 마! 너 하나도 안 보고 싶어!"


 아다비아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엉엉 운다. 진짜 너는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차라리 속 시원하게 말해달라구! 나, 솔직히 네가 왜 이러는지 하나도 이해 안 돼. 또 머리가 복잡하다. 그간 줄어들었던 부담감 같은 것이 몇 배가 되어, 봄하늘에 가득한 먹구름처럼 나를 향해 떨어진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간다."

 "가! 오지 마! 나도 너 싫어! 미워!"


 방에서 나왔다. 진짜 모르겠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계단을 내려왔다.



 "타슈갈, 너 정말 일곱 가지 꿈의 비밀을 찾아낼 생각이야?"

 "진짜 그런 거 아니에요. 제가 잠만 자면서 하겠다는 거 아니라구요. 저는 제 저주술사 친구에게 제 꿈 이야기만 해주기로 했어요. 그 다음에 그게 일곱 가지 꿈 중 하나인지 이야기하구요. 딱 거기까지만 하기로 했어요. 진짜 그 일곱 가지 꿈의 비밀 찾겠다고 폐인되는 짓 안 한다니까요?"

 "알았어. 타슈갈, 정말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말이야...일곱 가지 꿈의 비밀을 스스로 찾으려 하지 마. 그건 찾을 수 없는 거야."

 "알아요. 진짜 잘 알고 있다구요."

 "혹시나 누가 아무리 네게 일곱 가지 꿈의 비밀을 찾기 위해 저주술 수련하자고 유혹해도 넘어가면 안 돼."

 "안 넘어가요. 저는 진짜 진심으로 이 나라 말고 다른 나라 가서 살고 싶다구요!"


 루즈카 집에서 나왔다. 서점으로 돌아오자마자 방으로 들어가서 드러누웠다. 이고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뭐 안 좋은 일 있었어?"

 "아니."

 "그런데 왜 그래?"

 "그냥 피곤해서."

 "한숨 자. 너 휴일도 없이 계속 일했잖아."

 "응. 저녁은 너 혼자 먹어. 진짜 힘 하나도 없어. 푹 자고 싶다."

 "알았어."



  "제발 아기만은 살려주세요!"

 울부짖으며 매달리는 여인.

 "시끄러!"

 칼로 여인을 찔렀다. 은혜도 모르는 것들. 절대 살려주어서는 안 돼. 지난 번, 동료가 아이라고 살려주었는데 뒤돌아서는 순간 아이가 칼로 동료의 발목을 베었다. 아기가 운다.

 "뭐 해? 빨리 죽여!"

 그런데 이건 아니야. 자기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아기다. 이런 아기까지 죽여야 하나?

 "빨리 죽여, 이 병신아! 그 애새끼는 나중에 네 모가지를 칠 거다."

 시린은 눈을 번쩍 떴다. 그가 수십 번, 수백 번을 꾸었던 꿈. 또 똑같은 꿈이었다. 머리를 부여줘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에게 끝없이 반복되는 이 지옥 같은 악몽. 그가 아무리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혀지지 않는 그날의 기억. 콜목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탁자로 달려갔다. 술병을 들었다. 술병에서 술이 단 한 방울도 그의 입 안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술 끊어야 하는데..."

 시린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그는 시선을 술병으로 돌렸다. 술병을 쥔 손이 벌벌 떨렸다. 그에게 새로운 공포가 찾아왔다. 이대로 가다가는 폐인이 되는 것이 시간문제라는 사실. 도대체 어디로 도망쳐야하는 걸까? 그는 눈을 감아도 지옥, 눈을 떠도 지옥. 그에게 도망갈 곳은 없었다. 그저 술에 취해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는 사실만이 그에게 약간의 안도를 허락할 뿐. 그러나 그럴 수록 실존하는 지옥은 나날이 더 끔찍해져간다는 것을 그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하나의 지옥에서라도 벗어나기 위해서는 술을 끊어야 해. 그런데 자꾸 아기 울음 소리가 들려. 아무리 귀를 막아도 머리 속에서 메아리치는 아기 울음 소리를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시린은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창문으로 어둠이 방 안으로 쏟아들어오고 있었다. 술 사러 나가기엔 너무 늦었다. 만다르는 다시 한 번 천장을 바라보았다.

 '오늘 밤은 잠 다 잤구나. 이게 다 그 망할 아기 울음 때문이야.'

 시린은 탁자 앞에 앉았다. 양초에 불을 붙였다. 침침한 불빛이 흔들렸다. 멍하니 흔들리는 촛불을 바라보았다. 그의 모든 생각이 저 촛불에 새까맣게 타버리기를 간절히 빌었다.

 '아예 내 머리에 불을 붙일까? 이 망할 아기 소리 좀 그만 듣고 싶어.'

 시린은 허리를 숙여 촛불을 향해 고개를 가까이 대었다. 따스한 온기 속에서 바늘 같은 촛불 불빛이 그의 눈 속을 찌르며 들어왔다. 나도 멀쩡한 인간으로 살겠다는 의지를 버리고 약을 할까? 아니야. 거기까지 가면 안 돼. 하지만 언제까지 이 따위로 살아야 하지? 그는 언제부터 똑같은 악몽에 시달렸는지 세어보기 시작했다. 어제도, 그저께도, 그그저께도, 한달 전도, 두달 전도 그 꿈은 항상 반복되었다. 제발 하루라도 그 악몽에서 벗어나고 싶어. 아기 울음 소리 없는 하루를 보내보고 싶어. 이건 사람 사는 것이 아니야. 왜 이런 망할 악몽은 내게만 끝나지 않는 거야? 사베 마을에 들어가기 전날 고향의 가족과 친구들이 내게 손을 흔드는 꿈을 꾸었다. 그때 알아차렸어야 했어. 시린의 마음 속에 후회가 밀려왔다. 그를 더 괴롭게 만드는 것은 그 선택을 자기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정신 차리자!"

 그는 있는 힘껏 두 손으로 양 볼을 때렸다. 얼얼함이 그의 뺨 안으로 스며들었다. 얼얼할 뿐. 망할 사베 마을. 그 애새끼는 악마의 새끼야! 그 애새끼가 내 머리를 움켜쥐고 있어!

 "술!"

 시린의 가슴 속에서 심장이 폭발한 것처럼 무거운 무언가가 목을 찢고 튀어나왔다. 사베 마을의 애새끼. 그 애새끼를 뱉어낼 방법이 없었다. 술을 먹고 있는 힘껏 토하고 싶어졌다. 분노를 토해내고 악마같은 애새끼를 토해내고 싶었다. 하지만 술병에는 술이 한 방울도 없었다.

 "끄아아!"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콜목은 가슴을 움켜쥐고 탁자 위에 쓰러졌다. 그의 숨이 가빨라졌다. 숨을 쉬기 위해 시원하게 가슴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주먹으로 가슴을 쾅쾅 내리쳐도 답답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끄으으."

 시린의 입에서 절규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는 간신히 힘을 내어 숨을 쉬며 생각했다.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이 따위로 살고 싶지 않은데...이 찢어 죽일 아기 울음 소리! 좀 살려줘!'


 너는 시린이 누구인지 아니? 그는 왜 갑자기 등장했을까? 이 사람은 왜 아기 소리에 시달리고 있는지 알고 있어? 시린을 괴롭히는 아기 소리의 정체는 무엇일까? 왜 시린은 아기 소리 때문에 괴로워할까? 타슈갈과 시린, 그리고 아기 울음 소리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너는 아마 타슈갈과 시린의 관계에 대해 이미 짐작하고 있는 거 아니야?


 창가에서 새 소리가 들렸다. 평화로운 아침. 사람들의 소리. 시린은 눈을 떴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아침이구나.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그의 얼굴 위에 내려앉고 있었다. 콜목이 바닥에서 일어났을 때, 넘어진 의자와 탁자 위에 널부러진 술병 파편들이 보였다. 어제 어떻게 잠들었지? 궁금해하지 말자. 촛불은 밤새 다 타서 꺼져 있었다. 시린은 세수를 하기 위해 물통을 향해 걸어갔다.

 "오늘은 일이 없었지."

 그에게 찾아온 2주만의 휴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에게 전혀 즐겁지 않은 일이었다. 그에게는 차라리 일하는 것이 나았다. 일하는 동안은 일만 생각하면 되니까. 그는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가져와 탁자 위의 깨진 술병 조각들을 치웠다.

 "오늘도 참자."

 매일 아침 하는 다짐. 오늘은 술을 마시지 말고 버티자. 하지만 해질녘까지 그 결심이 이어진 건 언제더라...어제는 집에 술이 있는 줄 알아서 술을 사오지 않았다. 그래서 어제는 안 마셨고 그 전에 술 안 마시고 보낸 날이 언제였더라? 시린은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기억이 없었다.

 '오늘은 절대 술 안 마셔야지. 언제까지 술에 의지할 수는 없어.'


 시린은 엄청난 술 중독인가봐. 아예 술 없으면 못 사나 본데? 지난밤 발작을 보면 과연 술 없이 하루를 무사히 보낼 수 있을까? 왠지 전혀 그러지 못하고 또 술에 의존하는 밤을 보낼 거 같지 않아? 나중에 타슈갈도 일 못 구하고 저렇게 되는 거 아닌지 몰라. 너는 타슈갈이 나중에 이렇게 되지 않고 잘 되어서 행복하게 잘 살 거라 생각해? 그렇게 밝은 미래가 타슈갈한테 있을 거 같아?


 시린은 집에서 잠시 쉬다 밖으로 나왔다. 길거리의 열기는 그를 익혀 죽이려 작정한 것처럼 그를 괴롭혔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더위에 지쳐버렸다. 그래, 가던 곳이나 가자. 시린은 평소 가던 찻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자네, 왠일로 이렇게 아침부터 왔는가?"

 "차 주세요."

 "쫓겨났어? 아니면 이 시각에 올 수가 없잖나."

 "오늘 쉬는 날이에요. 어서 차나 한 주전자 갖다 주세요."

 "왠일로 술을 안 마시고?"

 "술 끊을 거에요."

 주인 아저씨는 풉 하고 웃더니 주방을 향해 차 한 주전자 가져오라고 소리쳤다. 주방에서 어떤 할 일 없는 놈이 아침부터 차 마시러 오냐고 궁시렁대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 아저씨는 시린 앞에 앉아 그를 쳐다보았다.

 "자네 원래 차 안 마시지 않았잖아. 차 마실 줄이나 아나?"

 "예전에는 마셨어요."

 시린은 주인 아저씨의 참견이 귀찮았다. 그가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고개를 밖으로 돌리자 주인 아저씨가 말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주문한지 얼마 되지 않아 차가 나왔다.

 "가루 설탕 드릴까요, 각설탕 드릴까요?"

 "사탕 없어요?"

 "있어요."

 "그럼 사탕 주세요."

 아주머니가 각설탕 단지와 사탕 네 알을 가져와 탁자에 올려놓았다.

 "차 맛도 모르는 것들이 꼭 설탕을 차에 잔뜩 집어넣지."

 주인 아저씨가 궁시렁대었다.

 '알아서 떠들어라.'

 시린은 주인 아저씨께 제발 조용해달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가 싫어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주인 아저씨는 가끔 만다르에게 공짜로 술도 주시곤 했다.

 "불 있으세요?"

 "이걸로 붙여."

 주인 아저씨가 자기가 피우던 파이프를 시린에게 건네주었다. 시린은 셔츠 앞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파이프로 불을 붙였다.

 "차 안 마셔?"

 "제가 차 마시는 게 신기해요?"

 "당연하지! 자네가 차를 제대로 마실 수 있나 너무 궁금하거든."

 시린은 주인 아저씨와 차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내가 차를 마시는 것을 보여줘야 이 아저씨가 입을 다물겠지.'

 시린은 주인 아저씨를 조용히 하게 하기 위해 찻주전자를 잡아 들었다. 손목이 저렸다. 주전자 주둥이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래도 찻잔에 차를 못 따를 지경은 아니었다. 시린은 차에 입술을 대 보았다. 뜨거웠다.

 '그냥 마시기엔 힘들겠군.'

 시린은 차를 찻잔 받침에 부었다.

 "이봐, 내 진심으로 충고하는데 술 끊게."

 "그러면 이 집 매상은 누가 올려주나요?"

 "자네 아니아도 여기서 술 먹는 사람 많아."

 "농담하지 마세요."

 시린은 담뱃재를 재털이에 털고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다.

 '이제 마실 수 있을만큼 식었겠지?'

 시린은 찻잔 받침에 부어서 식힌 차를 다시 찻잔에 부었다. 사탕 한 알을 집어들어 앞니로 물고 천천히 차를 입 안으로 빨아들였다. 입에 차를 물고 혀로 사탕을 돌렸다. 이 떫은 맛과 단 맛! 그에게 있어 사탕과 차가 합쳐져 만든 불협화음 같은 이 조화는 정말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것이었다.

 "자네 참 희안하게 차를 마시는군. 누구한테 배운 거야?"

 "배우긴 누구한테 배워요? 그냥 마시는 거지."

 주인 아저씨가 시린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시린은 별 말 없이 차를 홀짝였다. 그가 살던 동네에서는 차를 이렇게 마셨다.

 '떫기만 한 차를 향이 어쩌네 신 맛이 어쩌네 하면서 온갖 폼 잡으면 우리 동네에서는 멍청이라고 손가락질 해.'

 그러나 시린은 그런 것을 다 말하기 귀찮았다. 한 마디 하면 주인 아저씨가 그것을 꼬투리잡아 일장연설을 해댈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 제일 독한 술 한 병!"

 시린이 계속 원래 그가 살던 동네에서 마시던 방법대로 차를 마시는데 누군가 들어와서 가장 독한 술을 주문했다.

 "카악...퉤! 빨리 가져와!"

 시린은 방금 들어온 손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온몸이 먼지투성이였다. 머리는 박박 밀어버린 머리가 자라나서 밤송이가 되어 있었다. 얼굴의 절반은 수염이었다. 검게 탄 얼굴 위에 땀, 먼지가 범벅이 되어 있어서 눈만 보였다. 그리고 왼팔. 왼팔이 없었다.

 "너 시린 맞지?"

 "예...그런데요."

 "이야... 오랜만이다!"

 "예?"

 "나 콜목이야!"

  외팔이가 시린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오른팔로 시린을 꽉 껴안았다.

 "너 살아있었구나!"

 "내가 왜 죽냐? 병신이 되었을 뿐이지. 아저씨, 여기 빨리 술 좀 가져다 줘요!"

 콜목은 시린 옆 의자에 앉았다.

 "이 자식 진짜 오랜만이네. 그동안 어떻게 살았냐?"

 "어떻게 살긴...병신이 병신 같이 살지. 여기 술 빨리 줘요. 나 돈 있어!"

 콜목이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냥 이거 태워."

 시린은 담배 한 대를 입에 물려주었다. 콜목은 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

 "너는 언제 돌아왔냐?"

 "반란 진압 다 끝내고 돌아왔지."

 시린이 반란 진압을 끝내고 돌아왔다고 말하자 콜목은 자세를 고쳐앉았다. 콜목의 눈빛은 저 멀리 거리 끝 너머 하늘의 끝 너머를 바라보던 흐리멍텅한 눈이 아니었다.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그러면 사베 마을 학살 때도 있었겠네? 치료소에서 그 이야기 들었는데...굉장했다면서?"

 "그 이야기는 하지 말자."

 "뭘 하지 말아? 내 친구 셋이나 사베 마을 학살 후에 자살했는데..."

 "셋이나? 누구?"

 시린에게 있어서 여기 와서 그때 동료를 만난 것은 콜목이 처음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모두 잘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모두 멀쩡했다. 그때 시린이 속한 부대의 지휘관이었던 수쿠트 장군은 그 사건 덕분에 3계급 특진을 했다.

 "나도 들은 이야기야."

 "헛소문일거야."

 술이 나왔다. 콜목은 시린의 잔에 술을 부으려 했다.

 "내 잔에는 따르지 마."

 "너 술 안 마셔?"

 "안 마시기는 뭘 안 마셔? 매일 술에 절어 지내는 녀석인데."

 주인 아저씨가 한 마디 툭 던졌다.

 "야, 너 왜 안 마셔?"

 "사람 꼬라지는 하면서 살려구."

 "지랄한다. 먹지 마! 술 아까워."

 콜목은 병째 들이키기 시작했다.

 "여기는 그런데 무슨 일이야?"

 "수쿠트 장군님 만나려고. 그분이 나중에 평생 편히 살도록 책임져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잖아. 기억 안 나?"

 "뭐?"

 시린은 콜목의 말에 이 도시에 수쿠트 장군이 산다는 말은 들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나 시린이 이 도시에서 수쿠트 장군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수쿠트 장군이 평생 편히 살도록 책임지겠다고 약속했었나?'

 시린은 수쿠트 장군을 보았던 때를 하나하나 다시 떠올려보았다. 그의 기억 속 그 어떤 장면에서도 수쿠트 장군이 그런 말을 했던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내가 슐로낙 고개에서 장군님께 날아가는 칼을 몸을 던져 이렇게 된 거 아니냐. 그러니까 장군님께서 진정 조국을 사랑하는 사나이라고 평생을 풍요롭게 살 수 있게 보장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거든."

 "그랬나?"

 시린은 콜목이 외팔이가 된 사건 자체에 대해서는 어렴풋 기억해내었다. 그때 시린은 팔이 잘리는 것을 직접 보지 못했다. 그런 장면을 구경할만큼 한가하고 평화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그때 시린이 속한 부대는 큰 피해를 입었고, 복수하기 위해 사베 마을로 향했다.

 "그런데 그거 지나가는 말로 한 소리 아닐까?"

 "무슨 소리야!"

 콜목이 소리치며 술병을 탁자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지금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되었는데? 그때 내가 몸을 날리지 않았으면 내 팔 대신 수쿠트 장군 목이 잘렸어! 그분은 내게 죽을 때까지 고마워해도 부족해. 누구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계신건데? 그리고 그분은 훌륭한 분이셔!"

 시린은 입을 다물었다. 콜목에게 어떤 말을 해도 콜목의 생각은 하나도 바뀌지 않을 것이었다. 시린은 말없이 찻잔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훌륭하신 분이 내 머리 속에 아기 울음이나 우겨넣냐? 왜 피는 우리 손에 뭍고 금은 자기 손에 바르는데?'

 "그분 덕분에 우리가 당당히 이긴 거 아냐. 나는 이 나라의 구세주를 구한 거고."

 콜목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외팔이 된 후 뭐 할 수 있는 게 없더라."

 콜목은 술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시린은 말없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시린은 지금껏 자기만 정상이 아닌 것 아닐까 생각해왔다. 그러나 그의 앞에 나타난 콜목을 보니 그 생각에서 아주 약간, 깃털이 입김에 한 번 날려 날아간 만큼 멀어졌다. 시린은 몇 번이고 콜목의 숨소리를 신경써서 들었다. 그의 거친 숨소리가 시린에게 그도 정상은 아니라고 계속 외치고 있었다.

 "팔 하나 없어진 순간부터 살아서 죽음보다 못한 지옥만 보고 있어. 이게 사람 사는 꼴이냐? 이제 이따위 짓거리는 끝낼 거야."

 "그게 수쿠트 장군을 만나는 거야?"

 "그래. 만나서 내게 약속한 몫을 달라고 해야지."


 시린과 외팔이 콜목은 원래 아는 사이인가봐. 게다가 콜목은 수쿠트 장군을 구해주고 팔 하나를 잃어버렸대. 이제 상을 받는 걸까? 아니면 새로운 모험이 펼쳐질까? 그런데 한 팔을 잃어버린 콜목과 술 없이는 하루도 못 살 거 같은 시린...누가 더 한심해? 그래도 가만히 보면 시린이 조금 더 정상 같기도 하구. 둘은 대체 어쩌다 저렇게 되었을까? 저들도 어렸을 적에는 전쟁터에 끌려가면 멋진 전쟁 영웅이 되고 예쁜 미녀와 결혼해 평생 행복하게 사는 꿈을 꾸었겠지? 너도 그렇게 생각해? 설마 시린과 콜목이 타슈갈과 감비르의 미래 아니야? 그러면 수쿠트 장군은 누가 되어야 하지?


 시린은 아무 말 없이 담배를 태웠다. 콜목은 술을 계속 마셨다. 침묵이 흘렀다. 시린은 다시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우리가 한 일은 과연 옳은 일이었을까? 그 아이는 정말 자라서 내 목을 베기 위해 나타났을까?

 "비켜!"

 익숙한 목소리가 시린과 콜목의 귀로 찾아와 고막을 두드렸다. 그들에게 아기를 죽이라고 명령했던 목소리. 시린은 들었다. 아주 작게 울려퍼지는 아기 울음 소리. 잔잔한 물통에 물방울이 똑똑 떨어져 파동을 만들듯 아기 울음 소리가 시린의 머리를 조금씩 흔들기 시작했다.

 "수쿠트 장군님이다!"

 콜목이 술병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났다. 시린은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콜목의 팔을 움켜잡았다.

 "콜목, 한 가지만 물어보자."

 "뭐? 빨리 말해! 밖에 수쿠트 장군님께서 지나가고 계시단 말야!"

 "우리가 한 일...옳은 일이었지?"

 시린의 질문에 콜목은 어이없다는 듯 시린을를 쳐다보더니 바닥에 가래를 뱉고 팔을 뿌리쳤다.

 "당연한 것을 왜 물어!"

 콜목은 수쿠트 장군 앞으로 뛰어나가 그의 길을 가로막고 섰다.

 "수쿠트 장군님!"

 "뭐냐?"

 경호병 네 명이 수쿠트 장군을 호위하고 있었다. 콜목은 수쿠트 장군의 팔을 잡으려 했지만 경호병들이 먼저 콜목을 제지했다. 콜목은 경호병들에게 제압당해 땅바닥에 눕혀 졌다. 콜목은 경호병들에게 '내가 누군지 알아!'라고 소리치며 수쿠트 장군을 불렀다.

 "수쿠트 장군님, 저 콜목입니다. 기억하시죠? 장군님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장군님께서 약속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저를 죽을 때까지 보살펴주시겠다구요."

 "콜목, 그만해!"

 수쿠트 장군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시린은 수쿠트 장군의 눈을 힘없이 축 늘어진 눈으로 올려보았다.

 '수쿠트 장군이 콜목을 기억할 리 없지. 콜목을 기억했다면 콜목이 저 지경이 되도록 놔두지도 않았어.'

 시린이 속으로 고개를 저으며 수쿠트 장군을 바라보았다. 수쿠트 장군은 콜목을 깔아보며 말했다.

 "참전군인이냐?"

 "예. 장군님 아래에서 있었습니다. 슐로낙 고개에서 장군님을 향해 던진 칼을 지금은 없는 이 팔로 막아내지 않았습니까."

 콜목은 머리를 돌려 이제는 없는 자신의 팔을 눈빛으로 가리켰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참전군인이라니 이 돈으로 술이나 한 병 사먹거라."

 수쿠트 장군은 주머니에서 철로 된 동전 한 닢을 콜목 얼굴을 향해 던졌다.

 "장군님, 저 콜목입니다! 슐로낙 고개에서 장군님을 구한 콜목이라구요! 약속을 벌써 잊으셨습니까?"

 "내가 슐로낙 고개에서 전투를 치룬 것은 맞지만 너 같은 병사는 기억하지 못한다. 나를 구했다고 하는데 나는 그 누구에게도 내 생명에 대한 빚을 진 적이 없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풀어줘라. 가자."

 수쿠트 장군은 못 볼 것을 봤다는 표정을 지으며 뒤돌아섰다. 경호병들은 콜목을 뒤로 던지다시피 밀어내며 수쿠트 장군을 에워쌌다.

 "이 찢어죽일 놈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콜목은 품에서 단도를 꺼내 수쿠트 장군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콜목보다 경호병이 더 빨랐다. 콜목이 품에서 단도를 꺼내자마자 경호병이 허리에 찬 칼을 뽑아 콜목의 가슴을 찔렀다.

 "개...새...끼."

 경호병은 콜목의 배를 발로 걷어차며 칼을 뽑았다. 피가 튀었다.

 "잘 했다. 오늘 일에 대해서는 저녁에 상을 주도록 하겠다."

 "감사합니다, 장군!"


 수쿠트 장군이 쓰레기인 걸까, 콜목이 한몫 잡아보려고 하다 완전 망한 걸까? 어쨌든 콜목은 죽어버렸네? 잘 된 건가? 너는 콜목이 죽은 게 콜목을 위해 잘 된 거라고 생각해? 아니면 그저 콜목이 매우 불쌍해? 그나저나 시린은 저렇게 될 거 뻔히 짐작하고 있었던 거 같은데 안 말래고 뭐했대? 사실 애초에 줄 상이었다면 진작에 줬지, 여태 안 주고 있었겠어?


 "콜목! 정신 차려!"

 콜목은 대답이 없었다. 몸이 차가웠다. 수쿠트 장군은 자리를 떠난지 오래였다. 시린의 두 손에 피가 뭍었다. 그의 옷에도 콜목의 피가 뭍었다. 콜목이 숨을 쉬지 않았다. 시린이 아무리 흔들어도 몸을 움직이지 않는다.

 "콜목...정신 차려! 제발 눈 뜨란 말이야!"

 시린은 예전에 자신이 죽어가는 동료들을 보며 했던 일을 떠올렸다. 그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뼈에 새겨진 기억처럼 몸과 하나되어 반응했다. 지압을 해야 해. 출혈이 더 심해지면 죽을 수 있어. 응급조치만 잘 하면 살릴 수도 있다. 침착해야 해. 많이 하던 거야. 붕대...붕대는 어디 있지? 맥박을 짚어 보자. 안 뛰는군. 하지만 안 뛰는 것이 아니라 내 손이 둔해져서 못 느끼는 것일 거다. 너무나 미약하지만 분명 뛰고 있을 거야. 눈을 확인하자. 동공이 풀렸다. 그러나 아직 포기하기에는 일러!

 "이봐요, 그 사람 죽었어요."

 "안 죽었어!"

 으아앙 으아앙

 시린은 쩌렁쩌렁 울려퍼지는 아이 울음 소리를 들었다.

 '어디서 들리는 거지?'

 시린은 콜목의 상처를 한 손으로 일단 누르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 어디에도 아기는 없었다. 이 찢어죽일 아기. 그래, 여기서 다시 한 번 죽여주마! 드디어 내 머리 속에서 기어나왔구나. 콜목이 죽은 것을 보니 아주 쌤통인가 보지? 그래, 오늘 끝장을 내자. 시린은 주변을 노려보며 그의 몸 속 모든 것을 토해내듯 있는 힘껏 소리쳤다.

 "어디 있어! 이 아기 새끼야! 내가 씨발 너를 찢어죽이겠다!"

 시린은 분노에 가득찬 눈동자로 주변을 계속 둘러보며 아기를 찾았다. 이 아기 새끼는 어디 있는 거야? 어디에서 이 장면을 보며 실실 쪼개고 있는 거야? 콜목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허공을 향한 눈동자. 헤 벌린 입.

 "여기 있었구나, 이 악마 새끼!"

 콜목의 얼굴인줄 알았는데 아기 얼굴이었다. 시린은 활짝 웃었다. 그렇게 매일밤 그를 괴롭히던 아기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의 머리 속에서 튀어나와 지금 시린의 눈 앞에 있었다. 그래. 드디어 모습을 나타냈구나! 두 손으로 악마 새끼의 목을 조른다. 아무리 힘을 주어도 얼굴이 일그러지지 않는 아기. 계속 웃는다. 입으로는 우는 소리를 내면서.

 "이 사람 뭐야!"

 뒤에서 여러 손이 내 몸에 달라붙어 시린를 뒤로 끌고 갔다.

 "안 돼! 저기 있는 것은 악마란 말이야! 나는 저 악마를 찢어죽여야 한다구! 너희가 내 악몽을 알아? 매일밤 찾아오는 끔찍한 악몽! 단 하루라도 편히 자고 싶다구. 저 악마 새끼의 울음 소리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어!"

 "이봐요, 정신차려요!"

 "이 사람, 미친 거 아냐?"

 사람들이 시린의 겨드랑이에 팔을 끼워넣고 콜목의 시체에서 떼어내어 질질 끌고갔다. 시린은 계속 있는 힘껏 발버둥쳤다.

 "이 악마 새끼!"

 시린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저 새끼를 죽여야 하는데...찢어 죽여버려야 하는데 악마의 손들이 나를 뒤로 끌고 간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억센 손들이 놔주지 않는다. 두 손도, 두 다리도 모두 악마들의 손에 끌려간다. 아무리 저항하려 해도 할 수가 없다. 악마가 웃는다. 입으로는 울면서...시린은 계속 달려가 아기의 목을 졸라 죽이려 했지만, 사람들은 완강하게 시린의 팔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시린 앞에 나타났던 것은 콜목이었을까, 아니면 그 아기였을까? 당연히 콜목이었겠지? 너는 아기가 콜목의 형상을 하고 나타났다고 생각해? 설마? 진짜? 만약에 말이야, 진짜 시린이 타슈갈이라면 말이야, 아기는 누구일까? 아다비아? 라키사? 켈라자야? 아니면 그 외의 인물? 그나저나 타슈갈이 자기를 놓고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을 알면 기겁하겠지? 자기가 왜 술에 의존해 간신히 버티는 폐인이 되어 있냐고 말이야. 뭐 어때? 설마 타슈갈이 이걸 자기 이야기라고 생각하겠어?


 "헉!"

 시린이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지독한 어둠이었다.

 '악몽이었구나. 지독한 악몽이었어.'

 어두컴컴한 방. 촛불에 불을 붙였다. 시린의 두 손과 옷이 피투성이였다.

 "고향의 부모님, 고향의 친구들, 나를 믿고 오늘도 촛불을 끈다. 신이시여 우리를 보호하소서. 버려진 우리를 보호하소서."

 그가 오랜만에 불러보는 행군할 때 부르던 노래. 뜨거운 것이 두 눈에서 뺨으로 흘러내렸다. 가자. 악마를 찾아내야겠다. 악마를 찾아내 찢어죽일 거다. 이 끔찍한 악몽으로부터 벗어날 거다. 그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힘껏 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노래를 계속했다.

 "발 아래 구르는 해골 바가지. 전우의 해골이 내게 말하네. 너라도 살아서 내 고향에 이 한 몸 당신 위해 몸을 바쳤다. 이 한 마디 고향에 전해달라고."


 너 이 이야기의 정체가 뭔지 알겠어? 타슈갈은 어디에 있는 걸까? 분명히 타슈갈은 시린이 아니야. 타슈갈은 전쟁을 제대로 겪어본 적조차 없잖아. 왜냐하면 마딜 해방은 1100년 일이고, 타슈갈은 지금 1097년에 태어났거든. 그 갓난 아기때 기억이 제대로 있기나 하려나? 게다가 타슈갈은 마딜인도 아니고 아드라스인이잖아. 부모가 남아드라스 공화국에서 마딜로 건너왔거든. 너는 이 이야기에서 타슈갈이 어디 있는지 알아? 그리고 이 이야기는 대체 뭘까?



 눈을 떴다. 방 안이 깜깜하다. 한밤중이구나. 꿈 속에서 나는 어디 있었던 걸까? 시린도 콜목도 내가 아니었다. 그들과 나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그 누구에게도 동화되지 않았고, 그 누구의 시선으로 바라보지도 않았다. 시린의 마음 속 이야기들이 소리로 직접 들렸다. 나는 그 꿈 밖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꿈 밖의 내게 말을 걸어온 그 목소리는 뭘까? 시린과 콜목의 이야기를 보는 꿈 속에서 누가 내게 계속 말을 걸려고 했을까? 참 해괴한 꿈이다.



 밤새 몇 번 잠에서 깨어나고 다시 잠들었다. 눈을 떠보니 방 안이 훤했다. 내 옆에 앉아 있는 켈라자야가 보였다.


 "안 자?"

 "점심때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수를 하기 위해 물을 떠서 방에서 나왔다. 이고가 계산대에 앉아 있고 라키사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엄청 오래 잤구나.


 "잘 잤어?"

 "응."

 "너 진짜 밤새 죽은 것처럼 자더라?"

 "진짜?"

 "무슨 시체 치워야하는 거 아닌가 했다."

 "설마."


 세수를 한 후 방으로 돌아왔다. 시계를 보았다. 벌써 1시가 넘었구나. 벽에 기대어 앉았다. 꿈 때문에 머리가 복잡하다. 뭐야, 그 꿈. 이건 케르무크한테 이야기해줘야겠다. 종이 쪽지에 꿈 내용을 최대한 꼼꼼히 적었다. 켈라자야는 내 옆에서 내가 무엇을 적는지 바라본다. 봐도 상관없겠지. 그냥 꿈꾼 거 이야기인데.


 "이고, 비를레쉬의 유일한 생존자가 에드자에 왔다던데?"

 "비를레쉬? 그게 뭐 사람 죽을 게 있는 거야?"

 "몰라. 오늘 들었어. 룬 바사르가 불렀다고 하던데? 너 혹시 루즈카한테 들은 거 없어?"

 "딱히...그나저나 유일한 생존자라니 웃기네. 그거 사람 죽을 실험도 아니잖아."


 블랑쉬블르 목소리다. 블랑쉬블르는 언제 왔지? 방문을 열고 나갔다.


 "누나, 안녕하세요."

 "어? 너 안에 있었어?"


 켈라자야도 따라나왔다.


 "언니, 안녕하세요."

 "응. 너희들 점심 먹었어?"

 "아직요."

 "뭐? 아직도 점심 안 먹었다구? 어서 나가서 먹고 와!"


 블랑쉬블르가 나와 켈라자야 팔을 잡고 서점 밖으로 끌고 나갔다.


 "야, 이렇게 날씨도 좋은데 서점에만 있을 거야? 둘이 내성 가서 구경도 하고 놀기도 해!"

 "내성은 무슨 내성이에요?"

 "이렇게 좋은 날에 둘이 방구석에 처박혀 있는 게 정상이야? 너네 둘 다 좀 놀기도 해야해. 맨날 그게 뭐니? 젊음이 아깝지도 않아?"

 "뭐가 아까워요? 나가봐야 위험하기만 한데요."

 "아니야. 너희 둘은 인생을 좀 즐겨야 해. 아저씨! 얘네 둘 내성이요!"


 블랑쉬블르가 마부를 불렀다.


 "누나, 대체 왜 이래요?"

 "왜 이러기는? 너희 둘이 너무 한심해서 그렇지. 잔말 말고 어서 타! 누나 말 안 들을 거야? 너 자꾸 그러면 누나가 너한테 청혼한다?"

 "예?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블랑쉬블르의 농담에 켈라자야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켈라자야, 타슈갈 내가 가질까? 너 그렇게 타슈갈하고 둘이 방에만 처박혀 있으면 이 언니가 타슈갈 확 가져간다?"

 "안 되요!"

 "그러면 둘이 내성 가서 놀다 와. 어서 마차 타! 언니가 돈 내줄 테니까."


 블랑쉬블르는 내 손에 억지로 돈을 쥐어주고 마차로 밀었다. 내가 먼저 타고 켈라자야가 뒤따라 탔다.



 마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나도 내성은 잘 모르는데...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 켈라자야다. 켈라자야랑 내성 가서 뭐하냐? 오늘도 재수없는 일 벌어지는 거 아니야? 아다비아와 내성으로 놀러갔을 때는 아다비아가 이유없이 삐졌다. 라키사와 갔을 때는 내성 도착해서 얼마 되지도 않아서 사람이 자살했지. 내성은 갈 때마다 재수없는 일이 터진 곳이다. 거기를 하필 켈라자야와 가야 하다니...마차는 잘 달린다. 켈라자야는 바깥 풍경만 바라보고 있다. 뭐 어떻게 되겠지. 적당히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밥 먹고 차 마시고 돌아오면 되지 않을 건가?


 마차가 내성 남문에 도착했다. 경찰들이 문을 지키고 있다. 문을 통과했다. 가게와 좌판이 보인다. 그래, 그때 저쪽에서 사람이 '진정한 자유 만세!'라고 외치며 터져 죽었다. 진정한 자유 만세? 그놈은 자유를 찾았을 건가? 그놈은 자유를 찾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대신 나는 지옥을 찾았다. 라키사와 나 모두 끔찍한 기억을 하나씩 안게 되었다. 아직도 그 장면은 생생해. 켈라자야가 갑자기 나와 팔짱을 꼈다.


 "야, 너 갑자기 왜 이래?"

 "여기 사람들 다 이렇게 하고 돌아다니잖아."

 "그거야 연인들이니까 그런 거고."

 "연인?"

 "사랑하는 사이!"

 "우리는 그러면 안 돼?"

 "우리는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잖아."

 "하지만 서로 좋아하잖아."


 너무나 태연하게 물어보는 켈라자야를 보니 하지 말라는 소리를 차마 못 하겠다. 그래, 팔짱 끼고 돌아다니자. 내가 얘 아니면 언제 이런 걸 경험해보겠어. 라키사와 왔을 때 라키사에게 머리띠를 사주었던 가게가 보였다. 할 것도 없는데 가게나 구경하자. 밥만 먹고 돌아가면 분명히 블랑쉬블르가 아주 짓궂게 장난을 칠 거다. 어차피 여기서 할 것도 없는데 가게나 구경하며 시간 때워야지. 리본과 머리끈, 머리띠를 파는 가게로 갔다. 켈라자야는 하나씩 천천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마음에 드는 거 있어?"

 "글쎄...다 마음에 들어. 모두 너무 예뻐!"


 켈라자야와 어울리는 건 뭐가 있을까? 블랑쉬블르에게 등떠밀려서 나오기는 했지만 너무 건성으로 돌아다니는 건 많이 아니다. 게다가 얘와 지금 팔짱도 끼고 있구. 이게 은근히 신경 참 많이 쓰이면서 기분이 좋다. 얘가 정신만 멀쩡하다면 참 좋을텐데. 그랬다면 아다비아가 켈라자야와 친해지지도 못하지 않았을까? 켈라자야는 나중에 어떻게 될까? 설마 할머니 되어서까지 계속 이른 아침 서점에 잠을 자러 오는 건 아니겠지? 켈라자야 얼굴을 한 번 쳐다보았다. 얘한테는 뭐가 잘 어울릴까? 라키사에게 사주었던 하얀 머리띠와 똑같은 머리띠가 있다. 저것만은 절대 안 살 거다. 평소에 이런 것을 잘 보고 돌아다녔던 것도 아니지만 갑자기 뭔가 고르려니 무엇을 골라야할지 모르겠다. 이거면 괜찮을까? 반짝이는 작은 색유리가 촘촘히 박혀 있는 파란색 작은 나비 장식이 달려 있는 푸른색 머리끈이 보였다.


 "이거 주세요."

 "어머, 어떻게 애인한테 딱 어울리는 걸 고르셨어요?"


 직원에게 돈을 내고 파란 머리끈을 켈라자야에게 주었다.


 "너한테 얼마 주면 돼?"

 "아냐. 선물."

 "선물?"

 "응. 받아. 너 주는 거야."

 "진짜?"

 "진짜."

 "고마워!"


 켈라자야가 아주 활짝 웃으며 머리끈을 받았다. 그 자리에서 바로 원래 머리끈을 풀고 내가 준 머리끈으로 머리를 다시 묶었다. 진짜 잘 어울린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또 어떤 쓰레기 같은 놈이 자살하거나 하는 거 아니겠지? 다행히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지 않다. 확실히 내성은 뭔가 다르구나. 여기저기 경찰이 쫙 깔려 있다. 켈라자야는 머리끈을 하고 활짝 웃으며 거울로 얼굴을 바라본다. 그렇게 보면 머리끈이 자기한테 잘 어울리는지 안 어울리는지 아나. 머리끈은 뒤통수에 있는데 얼굴을 보고 있다.


 "우리 이제 점심 먹으러 가자."

 "어디로?"

 "식당 괜찮은 곳 있으면."



 식당을 찾아 돌아다녔다. 벽돌로 지은 식당이 보였다. 입구에는 '촉촉한 고기의 노래'라고 적혀 있었다.


 "우리 여기서 먹자."

 "응!"


 켈라자야가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정말 기쁜가보다. 나한테 따귀 날리던 애와 같은 애 맞아? 아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보인다.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기도 또 그 피 뚝뚝 떨어지는 고기를 주는 거 아니겠지? 음식을 주문하면서 고기를 속까지 아주 잘 익혀달라고 주문했다. 활짝 웃고 있는 켈라자야를 보며 밥 먹고 뭐해야 하나 고민한다. 하루 종일 거리만 돌아다녀? 그건 좀 아닌 거 같다. 찻집? 얘하고 딱히 찻집까지 가서 할 이야기가 있나? 예전에 아다비아와 갔던 '하늘의 정원' 찻집 참 좋았는데. 하늘의 정원 찻집을 간다면 켈라자야도 좋아할 거다. 그렇지만 보나마나 아다비아 문병 갔을 때 내가 하늘의 정원 찻집 데려갔다고 자랑할 거다. 그러면 아다비아는 분노하겠지. 하늘의 정원 찻집 말고 다른 걸 생각해내야해. 설령 돌아다니면서 아무 괜찮아 보이는 찻집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그 찻집 이름이 '하늘의 정원'이어서는 안 된다. 아다비아까지 라키사와의 관계처럼 오해에 오해가 쌓이는 관계로 만들어버리고 싶지는 않다. 켈라자야와 연인처럼 놀려고 온 건 아니잖아. 블랑쉬블르가 억지로 여기로 보내서 연인처럼 놀고 있는 거지. 순간 웃음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와, 나 진짜 켈라자야한테는 최악의 남자친구 노릇 하고 있는 거 아니야? 이건 연인으로써가 아니라 친구로써도 조금 심각한 거겠지? 어떻게 남은 시간을 보낼까 고민하다보니 시간이 휙 자나가 음식이 나왔다. 이번에도 켈라자야는 맨손으로 집어먹을 건가? 그러면 내가 잘라줘야지. 하지만 켈라자야는 맨손으로 고기를 잡고 뜯어먹지 않았다. 일반적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칼로 고기를 자른 후 포크로 찍어먹었다.


 "맛있어?"

 "너무 맛있어! 지금까지 가본 곳에서 가장 맛있어!"


 켈라자야가 해맑게 웃었다. 켈라자야의 갈색 머리카락 몇 가닥이 유독 빛나보였다.


 "우리 정말 이렇게 즐겁게 놀아도 돼?"

 "안될 것도 없잖아."

 "나는 이게 꿈같아."

 "왜?"

 "신기해서."

 "뭐가 신기한데?"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어. 너한테 선물도 받고 이런 것도 먹구. 영원히 이 순간이 끝없이 반복되었으면 좋겠어!"

 "나도."

 "정말?"

 "응!"

 "왜 저주술은 이런 건 못 하는 거야? 멍청한 저주술."


 저주술사가 '멍청한 저주술'이라고 말하니 너무 웃겼다. 억지로 웃음을 참았다. 이 순간이 영원히 끝없이 반복되면 정말 행복할 거다. 지금 켈라자야는 멀쩡하잖아. 게다가 연인처럼 놀고 있다. 서로 먹여주는 것은 안 하지만 이렇게 둘이 웃으며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이 어디야. 아다비아와 내성으로 놀러왔을 때는 피 뚝뚝 떨어지는 고기에 경악했고, 라키사와 왔을 때는 밥을 아예 먹지 못했다. 이 순간이 영원히 끝없이 반복된다면 갑자기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공포에서도 해방될 거고, 아다비아 문제로 인한 두통도 신경쓸 필요가 없을 거다. 그저 눈 앞의 켈라자야와 이 순간을 최대한 즐겁게 보내기만 하면 된다. 진짜 나는 쓰레기인가? 아다비아 생각하면 지금 고기가 넘어가지 않고 이 순간이 하나도 안 즐거워야 정상인데. 나도 쓰레기가 맞는 걸까.


 "네가 찾아내면 되잖아."

 "그건 불가능해."

 "왜?"

 "나 혼자 세상을 어떻게 이겨!"

 "꼭 세상을 이겨야만 가능한 거야?"

 "응."

 "왜?"

 "갈망의 문제니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지금은 더 물어보고 싶지 않다. 즐거운 시간에서 무슨 저주술이야? 희안하게 만나기는 했지만 지금은 나의 소중한 친구다. 아다비아 상태를 호전시켜주기도 했구.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거리를 구경하며 찻집을 찾아 돌아다녔다. 여기저기에서 웃음 소리가 들린다. 모두가 공포에 질려 있던 때가 불과 몇 개월 전이다. 지금 이 순간만 보면 그렇게 모두가 공포에 질렸던 일 자체가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모두가 행복해한다. 여기저기 연인들이 팔짱을 끼고 돌아다닌다. 봄이라 그런건가? 이제 다 좋아지는 일만 남은 건가? 정말, 진짜 진짜 진짜로 지난 겨울에 바닥을 친 거야? 이보다 더 나빠질 수 없는 상황까지 갔던 거야? 내성의 분위기만 보면 분명히 그렇다.


 "우리 저 찻집 가자!"

 "저기?"


 하늘의 정원. 아다비아와 갔던 그 찻집이다. 얘는 어떻게 하필 딱 하늘의 정원 찻집을 찾아내냐?


 "다른 곳 가면 안 될까?"

 "나 저기 정말 가보고 싶어. 뭔가 마음에 들어. 이름이 너무 예쁘잖아."


 켈라자야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이거 켈라자야가 아다비아한테 자랑하면 분명히 아다비아가 나한테 뭐라고 한소리하면서 또 엉엉 울 거다. 그렇지만 다른 곳을 찾아서 돌아다니자니 켈라자야가 이 찻집에 너무 가고 싶어 한다. 그래, 가자. 켈라자야가 가고 싶어하잖아. 찻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랑 하나도 안 변했네.'


 내부 벽은 꽃무늬를 조각한 나무 타일이 촘촘하게 붙어 있다. 아다비아와 왔을 때와 똑같다. 심지어 좌석 배치와 탁자, 의자마저도 똑같다. 여기만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하나도 없구나. 반갑다. 설령 시위부터 사람들이 죽어나가던 시기까지가 한 순간의 태풍이라 해도 그 상처가 너무 커서 시위 이전을 다시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할 줄 알았다. 과거를 뛰어넘어 전설이 되어버리는 거 아닌가 했다. 그런데 이렇게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곳이 있다. 연인들이 나란히 앉아 케이크를 하나 주문해서 서로에게 떠먹여주는 모습까지도 똑같다.


 꽃차 두 잔과 케이크 두 조각을 주문했다.


 "우리는 왜 두 조각 주문해?"

 "한 조각 나누어먹는 것은 연인들끼리 하는 거야. 우리는 진짜 연인은 아니잖아."

 "나도 저런 거 해보고 싶은데."


 아다비아와 케이크 한 조각 주문해서 나누어먹었었다. 그때 아다비아가 대체 왜 그러나 싶었다. 아다비아는 그때 데이트 기분을 느꼈을까? 지금처럼 나락으로 굴러떨어지기 전에 그런 추억이 하나 있다는 것이 아다비아에게는 다행으로 느껴질까? 그때를 떠올려보면 켈라자야와도 케이크를 한 조각만 주문해서 나누어먹는 것을 못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것만은 왠지 해서는 안 될 거 같다.


 차와 케이크가 나왔다. 켈라자야 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우리가 서점에서 끓여마시거나 서점 앞 찻집에서 절대 마실 수 없는 차. 게첸이 준 차보다는 훨씬 못하다. 그건 그놈이 엄청 비싼 차를 구해서 자기 딴에 만족스럽게 섞었기 때문이다. 여기 차도 꽤 괜찮고 좋은 차다. 가격도 절대 싸지 않다. 켈라자야가 차 향기를 맡아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이건 우리가 평소에 마시던 차와 향기 자체가 엄청나게 다르니 몰라도 좋은 차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나 너 옆에 앉아도 돼?"

 "옆에?"

 "그것도 안 돼?"

 "아니. 괜찮아."


 켈라자야가 내 옆자리로 건너왔다.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이런 건 당연한 거야?"

 "뭐가?"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돼?"

 "응."

 "연인이 되면 더 행복해질 수 있어?"

 "글쎄...나도 여자친구를 사귀어본 적이 없어서..."

 "너는 안 궁금해?"

 "궁금하다고 사귈 수는 없잖아. 진짜 사랑해야 사귀는 거지."

 "다른 사람들한테도 이렇게 행복한 것이 당연한 거야?"

 "응."

 "그렇구나."


 고개를 살짝 돌려 켈라자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켈라자야는 두 눈을 감고 있다. 내가 처음으로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하는 상대가 켈라자야구나. 비록 연인은 아니지만 말이다. 오늘 이 순간이 켈라자야에게 영원히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억될까?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내가 살아남아야 한다. 나도 사람이니 언젠가 죽겠지. 그래도 켈라자야가 이 순간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려면 정말 곱게 죽어야 한다. 터져 죽는다든가 쿠룬나스에게 잡아먹히든가 하면 안 된다.



 찻집에서 조용히 있다 나와서 내성을 조금 구경하다 다시 마차를 타고 서점으로 돌아왔다.


 "왜 벌써 돌아왔어?"

 "둘이 싸웠어?"

 "뭘 싸워요? 잘 놀고 왔는데요."

 "이왕 데이트하는 거 좀 더 많이 놀다 오지 그랬어?"

 "아주 많이 놀다 왔어요."


 이고와 블랑쉬블르가 나와 켈라자야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우리 안 싸웠어요. 맛있는 것도 마시고 찻집에서 좋은 차도 마시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구경도 했어요.


 "오늘 너무 행복했어요! 타슈갈이 이거 선물해줬어요!"


 켈라자야가 뒤돌아서며 머리끈을 이고와 블랑쉬블르에게 보여주었다.


 "어머, 너무 예쁘다! 이고, 너도 나한테 저런 것 좀 선물해줘봐!"

 "야, 내가 네 애인이냐? 저런 걸 선물해주게?"

 "생일 선물로 해줄 수도 있잖아! 생일 선물이라고는 맨날 과자만 주면서..."

 "나 애인 있어. 루즈카가 내 애인인 거 몰라?"

 "생일 선물 정도는 괜찮잖아!"


 블랑쉬블르가 이고를 흘겨보았다. 이고는 말없이 표정으로 '뭘 어쩌라는 거야?'라고 말하고 있었다.



 밤이 되었다. 켈라자야는 또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오늘은 그래도 웃으며 사라졌다. 오늘도 켈라자야에게 여느때와 다름없이 아무 일 없었으면 좋겠다. 서점 문을 닫을 즈음 바하르와 케르무크가 서점으로 찾아왔다.


 "타슈갈, 일 끝났어?"

 "이제 조금 있으면 끝나."

 "오늘 탐험 해야지!"

 "어디?"

 "재미있는 곳."


 이고에게 친구들과 놀다 오겠다고 말한 후 밖으로 나왔다. 부드러운 밤공기가 오늘 잘 놀고 또 노냐고 볼을 쓰다듬으며 속삭인다. 낮에 켈라자야와 내성에서 놀고와서 꽤 피곤하다. 그렇지만 기운내서 이번에는 바하르, 케르무크와 돌아다녀야 한다. 아다비아가 다시 눈을 뜰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이루어져야 하니까. 이루어질 것 같지는 않지만 그거조차 없으면 아다비아는 영원히 아무 답이 없잖아.


 "이거, 내가 며칠 전에 꾼 꿈이야."


 주머니에서 꿈 속의 꿈을 보았던 꿈 내용을 적은 쪽지를 꺼내 케르무크에게 건네주었다. 케르무크는 종이를 받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오늘 어디 가?"

 "재미있는 곳 간다니까."

 "그러니까 어디?"

 "나만 따라와. 진짜 재미있을 거야."

 "그러니까 그게 어디인데?"


 나와 바하르가 어디 가냐고 물어보았지만 케르무크는 낄낄 웃기만 했다. 이상한 곳 가는 것은 아니겠지? 저주술사가 두 명이나 있으니 별 일이 있지는 않겠지. 바하르는 어디 갈 줄 알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바하르도 모른다. 진짜 이상한 곳 가는 거 아니야? 케르무크도 내가 봤을 때 제정상이 아닌 거 같은데. 제대로 된 곳을 갈 리 없을 거다. 제대로 된 곳을 가서 구할 수 있는 답이었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일곱 가지 꿈의 비밀을 밝혀냈을테니까.


 가로등이 켜진 밤길을 계속 걸었다.


 "너 여자친구랑 잘 되어가?"

 "당연하지! 그저께 내성으로 놀러갔다 왔어."

 "내성? 어디?"

 "우리 학교도 데려가고, 하늘의 불꽃 찻집도 가구."

 "하늘의 불꽃? 거기 괜찮아?"

 "거기 좋아. 의자도 푹신하고 분위기도 연인들끼리 시간 보내기 딱이야. 벽에 색유리로 여러 형상을 만들어 붙여놔서 꽤 황홀해."

 "그런 데도 있구나."

 "너도 가보게? 아다비아랑?"

 "뭔 아다비아랑 거기를 가?"

 "그러면? 누구 데려갈 애 있어? 라키사?"

 "아니야! 내가 여자랑 거기를 왜 가냐?"

 "아이고, 어서 하나 잡아라. 그러다 다 도망간다."


 바하르는 치롤라와 아주 잘 사귀고 있구나. 솔직히 부럽다. 안 부러우면 인간이 아니지. 감비르 빼고 여자친구가 없는 모든 남자가 다 부러워할 거다. 치롤라가 이상한 짓만 안 하면 둘이 잘 사귀겠지. 얘네 둘 첫 만남도 엄청 웃겼는데. 저주술 수련 방법 놓고 언쟁 붙었었잖아. 둘 다 저주술사라 뭔가 특별하게 통하는 것이 있는 건가? 아닐거야. 아무리 바하르라 해도 켈라자야와는 말이 잘 안 통할 거야. 오히려 둘이 막 싸우는 거 아냐? 둘이 싸우면 누가 이길 건가? 바하르에게는 미안하지만 왠지 켈라자야가 아주 가볍게 이길 거 같다. 치롤라 제압하는 것을 봤으니까. 루즈카가 데려온 애라고 했지만 켈라자야한테는 아무 것도 아니더만.


 "바하르, 너는 언제 결혼할 거야?"

 "봐서."

 "야, 그냥 빨리 해버려! 서로 좋아 죽을 때 결혼까지 바로 달려버리는 거야!"

 "그게 마음대로 되냐?"

 "왜 안 돼? 네가 부족한 게 뭐 있는데? 돈도 있지, 직장도 있지."

 "아직 학생이잖아."

 "동원령 100년 이어지면?"

 "야, 아주 악담을 퍼부어라. 이제 동원령 끝날 거 같아보이는데 아주 초치려고 들고 있어."


 케르무크가 바하르를 실실 약올렸다. 동원령 100년 이어지면 어쩔 거냐는 말에 바하르가 바로 발끈했다. 동원령도 얼마 가지 않아서 풀리지 않을까? 성 외곽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도 다 철수했잖아. 그건 에드자가 이제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는 뜻이니까 언제까지고 동원령을 유지하지는 않겠지. 중앙학문연구소 학생들은 순찰 돌라고 뽑는 것이 아니니까.


 "야, 너 진짜 우리 이상한 곳 데려가는 거 아니지?"

 "좋은 곳 데려간다니까."

 "좋은 곳 어디?"

 "있어. 그냥 따라와."


 바하르가 케르무크에게 어디 데려가는 거냐고 다시 물어보았지만 케르무크는 알려주지 않고 그저 좋은 곳이라고만 대답했다.


 "나야 아다비아 때문이라지만 너는 왜 따라나왔어?"

 "궁금하잖아."

 "뭐가? 케르무크가?"

 "아니. 일곱 가지 꿈의 비밀. 그거야말로 저주술사들의 꿈인데 혹시 알아? 이놈은 뭔가 이상한 놈이니 남들이 생각 못한 방법으로 찾아낼지..."


 바하르의 말에 케르무크가 바하르 얼굴에 자기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말했다.


 "못 찾아내면?"

 "너 머리에 못을 박아버릴 거다."

 "오, 살벌해라! 그런데 나는 이 방법으로 찾을 수 있다는 말은 안 했다? 해보자고만 했지."

 "어서 그 좋은 곳으로 안내나 해."

 "벌써 흥분되나 보네."

 "빨리 그 썩은 면상이나 치우고 길이나 안내해!"

 "안 그래도 치울 생각이었거든? 내 면상이 썩었으면 네 면상은 곰팡이 폈어."

 "아이고, 여자친구나 만들고 그 소리 하세요."

 "아, 짜증나! 내가 졌다."


 케르무크가 어깨를 축 내리고 허리를 푹 숙였다. 그 상태로 팔을 땅을 향해 쭉 내리고 휘청휘청 걷기 시작했다.


 "이 병신은 또 뭐해?"

 "너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여자친구가 '자기야, 힘내!'라고 안 하면 곧 쓰러져버릴 거 같아요."

 "아우, 진짜 엉덩이 확 걷어차버릴라!"

 "앗, 너 설마 그쪽? 감비르처럼 진짜야?"

 "진짜 찬다?"

 "이놈은 장난도 못 치게 해. 치롤라가 이랬으면 '우리 자기, 내가 번쩍 들고 이 세상 끝까지 달려가겠소' 했을 거면서."

 "저 진짜 맞는다?"


 내가 바하르를 보며 한 마디 했다.


 "찔린가보네."


 나와 케르무크가 깔깔 웃었다. 바하르가 '아, 짜증나!'하고 작게 소리쳤다. 우리는 바하르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렇게 계속 밤길을 걸어갔다. 냇가가 나오자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너 설마 그 동네 가냐?"

 "어? 어떻게 알았어?"

 "야, 나 거기 가면 안 돼!"

 "왜?"

 "그 동네 간 거 치롤라가 알면 난리난단 말이야!"

 "우리가 지금 거기서 하고 오자는 거냐? 그 동네 탐험을 해보자는 거지."


 아...그 동네! 가본 적은 없다. 그러나 들어는 봤다. 참 안 좋은 동네. 게첸의 이상향에 가까운 곳. 거기가 일곱 가지 꿈의 비밀과 무슨 상관이라는 거야?


 "거기 그거 아냐?"

 "맞아."

 "거기랑 일곱 가지 꿈의 비밀과 무슨 상관이야?"

 "본능에 충실한 곳을 보자구. 혹시 알아? 오늘 바로 끝날지."


 바하르에게 물어보았다.


 "케르무크 말이 일리가 있기는 해?"

 "몰라."

 "네가 모르면 어떻게 해? 너 저주술사잖아!"

 "나라고 다 알아? 그래도...뭐 본능에 충실하니까..."

 "본능에 충실하니까 뭐?"

 "가능할 수도 있겠지. 아주 미개하고 혐오스러운 방법이기는 하지만."

 "싫으면 너도 감비르처럼 여장하고 '어머 그건 편견에 가득찬 차별!' 이렇게 외쳐보든가. 혹시 아냐?"

 "아, 이거 계속 나 놀리네?"

 "야, 장난이야, 장난! 좀 웃자구. 너 조금 희생해서 셋 다 웃으면 완전 이득 아냐?"

 "하여간 말은 참 밉게 잘 해요."



 냇가를 따라 계속 걸어갔다. 멀리 할머니 한 명이 보였다.


 "야, 시작되었다."

 "어?"

 "소지품 조심해라. 저분들 최소 20년 숙성된 악력이다."


 이놈 너무 잘 아는데? 여기 자주 와서 게첸식 사랑을 나누고 가는 거 아냐? 게첸은 돈 낼 생각은 안 하니 유사 게첸식 사랑이라고 해야 하나?


 "너 여기 얼마나 자주 와?"

 "여기? 나 한 번도 안 해봤어!"

 "너 너무 잘 아는 거 같은데?"

 "그야 학교 때려치고 일할 때 많이 주워들었지."

 "일곱 가지 비밀이 일곱 가지 경험담 아냐?"

 "아냐! 진짜로 나 실제 해본 적은 한 번도 없어! 넌 있어?"

 "없어."


 할머니가 우리들을 발견했다. 우리쪽으로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저 할머니 피해가야 하는 거 아냐?"

 "뭘 피해가? 당연히 정면 돌파지!"


 할머니는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는 할머니쪽을 향해 걸어간다. 드디어 한 팔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거리가 되었다. 할머니가 내 옷자락을 잡았다.


 "총각, 놀다 가."

 "아니요. 괜찮아요."


 뭐야? 뭐 이렇게 꽉 잡았어? 할머니의 손을 뿌리치려 팔을 휘둘렀다. 그러나 할머니의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할머니, 옷 놓으세요."

 "그리지 말고 놀다 가. 우리 아가씨 많이 예뻐."


 다시 팔을 휘둘렀다. 할머니의 쥐는 힘이 더 강해졌다. 뭐 이런 게 다 있어? 내가 팔을 휘저을 때마다 할머니의 쥐는 힘은 더 강해졌다. 이러다 옷 찢어지는 거 아니야?


 "진짜 안 한다구요."

 "그러지 마. 싸게 해줄께. 얼마까지 알아보고 왔어? 참한 아가씨로 붙여줄께."


 이 할머니 대체 뭐야? 빠져나가려 할 수록 오히려 더 세게 잡힌다. 그때 케르무크가 내 옷을 잡고 있는 할머니의 손을 쥐며 부드럽게 말했다.


 "할머니, 저희 이미 하고 왔어요."

 "에잉, 뭘 하고 와? 내가 저 멀리서 오는 거 다 봤는데."

 "길이 무슨 저기만 있나. 이 동네 할머니 혼자 다 먹었어요? 진짜 하고 왔어요."


 할머니는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손에서 힘을 살짝 빼었다. 그래도 여전히 내 옷소매를 아주 꽉 쥐고 있었다.


 "그러면 한 번 더 하고 가. 진짜 싸게 잘 해준다니까? 오늘 같은 기회 다신 없다? 너네 내일 분명 후회해!"

 "이미 하고 왔는데 뭘 더 해요?"

 "그 나이때는 세 번이고 네 번이고 해야지!"

 "방금 하고 왔어요. 이건 3천명이 달려들어도 못해요!"

 "젊은 것들이 왜 이렇게 약한 척이야?"

 "진짜라니까요? 나중에 오게 되면 꼭 할머니한테 갈께요. 진짜! 맹세! 오늘 진짜 안 되요. 이미 하고 왔는데 뭔 수로 또 해요?"

 "에잉...어여 가봐. 다음에는 꼭 나한테 와야해?"

 "당연하죠! 싸게 예쁜 아가씨랑 하게 해준다고 했는데요. 제가 할머니 얼굴 딱 기억했어요! 할머니야말로 나중에 말 바꾸면 안 되요? 막 '나는 그런 거 몰라' 이러면 안 되요?"


 할머니가 내 옷소매를 놓아주었다. 할머니와 조금 멀어지자 작은 목소리로 케르무크에게 물어보았다.


 "너 진짜 한 번도 안 해본 거 맞아?"

 "진짜야!"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아주 꾼이더만. 누가 보면 여기서 사는 줄 알겠어. 완전 동네 주민이야!"

 "야! 이런 건 꼭 해봐야 아는 거냐? 알 사람 다 아는 빠져나오는 방법인데."


 바하르가 말했다.


 "거짓말을 하려면 입에 침이나 바르고 해라. 아주 한두 번 흥정하고 빠져나온 솜씨가 아니더만."

 "진짜 아니야! 이 근처 온 적은 몇 번 있다. 내가 살던 집이 이쪽이라서. 하지만 진짜로 해본 적 한 번도 없어!"

 "그걸 믿으라고 하는 소리냐?"

 "아, 미치겠네. 이걸 어떻게 증명해야 하냐?"


 이게 일곱 가지 꿈의 비밀과 대체 무슨 상관이야? 하나 배우기는 했다. 이 동네에서 하고 왔다고 하면 그 엄청난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구나.


 "야, 저 할머니 우습게 보면 안 돼. 저 악력이 몇십 년 숙성된 악력이라니까? 힘으로는 절대 못 풀어."

 "진짜 장난 아니더라."

 "우르간 대제국 병사들도 다 잡아본 악력일걸? 살아있는 역사 그 자체야."


 할머니니까 진짜 그럴 수도 있겠다. 농담이 아니라 사실 같다. 좀 더 안으로 들어가자 거리에 여자들이 나와서 잡아댄다. 케르무크가 알려준대로 하자 쉽게 풀어주었다. 여자라고, 늙었다고 만만히 볼 손아귀 힘이 아니었다. 저분들은 하루에도 몇 명씩 잡아대니 쥐는 힘이 강할 수밖에 없겠구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켈라자야가 밤마다 여기 와서 일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밤마다 어둠 속으로 사라져서 이른 아침에 돌아온다. 이런 곳에서 일하고 쉬다 돌아온다고 하면 그럴 수도 있겠지. 아니야. 아닐 거야. 켈라자야가 뭐가 아쉬워서 밤에 이런 일을 하고 있겠어? 밤새 돌아다니면서 담뱃불 붙여주고 푼돈 모으고 있겠지. 예전에 켈라자야가 자기 돈을 보여준 적이 있다. 다 가치가 낮은 동전들이었다. 이런 데에서 일한다면 그렇게 가치가 낮은 동전을 수북히 들고 다닐 리가 없을 거다. 아다비아를 그냥 놔두면 여기로 흘러들어오는 걸까? 안 돼. 다시 그날 그 순간이 떠오른다. 그런 일만큼은 벌어져서는 안 돼. 이게 맞는 건지 틀린 건지 모르겠다. 이 몸 파는 여자들을 보며 무슨 일곱 가지 꿈의 비밀을 풀어낸다는 거야? 그렇지만 이렇게라도 해서 그 비밀을 밝혀내야만 한다. 안 그러면 아다비아는 결국 여기로 흘러들어오겠지. 그리고 이 길 어딘가에 쭈그려 앉아 싼 맛에 하고 가라고 할 거다. 그런 끔찍한 미래. 그것만큼은 어떻게든 막고 싶다. 아니, 막아야 한다.



 "가자."

 "응."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몸 파는 여자들이 득시글거리는 길에서 벗어나 아까 할머니를 만난 장소로 돌아왔다.


 "야..."

 "아...망할..."


 아까 그 할머니가 땅에 누워 있었다. 머리가 없다. 피가 흥건하다. 할머니의 몸 옆에는 할머니의 머리가 있었다. 머리 아래로 척추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누가 머리를 잡아 척추까지 쑥 뽑아버린 것 같은 모양이었다. 이게 가능해? 목을 잡아당겨도 저렇게 척추까지 쭉 뽑히는 일이 있나? 케르무크는 쭈그려 앉아 할머니의 목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케르무크는 할머니의 몸통을 뒤집어보았다.


 "깔끔하네. 이거 아무리 봐도 저주술사 짓인데?"


 고개를 돌려버렸다. 저런 미친짓을 하는 저주술사가 아직도 돌아다니는구나. 저 할머니의 유언은 '에잉...어여 가봐. 다음에는 꼭 나한테 와야해?'인가. 속이 메슥거렸다. 억지로 참았다. 좋아진 게 아니었어. 그냥 내가 몰랐던 걸거야. 그동안 너무 추워서 눈과 귀가 얼어있었던 것 뿐이다. 이제 봄이 되었고, 얼음이 녹으면서 다시 보이기 시작하는 거다.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이게 꿈이기를. 아까 켈라자야와 데이트할 때만 해도 행복했는데. 켈라자야만 행복한 것이 아니라 나도 행복했는데...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야. 망할 저주술! 망할 저주술사!


 "너네들 여기 가만히 있어. 내가 경찰 불러올께. 제기랄...이런 게 왜 하필 여기 있냐."


 바하르가 경찰을 부르러 달려갔다.


 "실력 무지 좋네. 이건 나도 죽겠다."


 케르무크가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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