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기적과 저주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3장 07화

좀좀이 2018. 3. 5.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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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3장 07화


 눈을 떠보니 방 안이 깜깜하다. 다시 자야겠다.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는다. 아직 동이 트려면 먼 거 같다. 지금 일어나봐야 할 것도 없겠지. 이 어둠 속에 우물로 가서 세수하고 물을 길어오는 건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야. 그렇지만 잠이 안 온다. 이유없이 싱숭생숭하다. 딱히 생각나는 건 없는데 머리 속이 복잡한 느낌이 든다. 뭔지 모를 엉망진창이 머리 속에 있어서 이것을 어디에서부터 손대야할지는 고사하고 이것이 대체 무엇인지 파악조차 안 되는 느낌. 잠이 깬 것도 아니고 들은 것도 아닌 애매한 느낌. 담배나 한 대 태우고 올까? 몸을 일으켰다.


 '이고 왜 안 자고 저러고 있어?'


 어둠 속에서 보인 것은 벽에 기대어 앉아 있는 이고였다. 시간이 몇 시인데 아직도 안 자고 저러고 있는 거야? 내일도 아침 일찍 수레 끌고 시장 갈 거면서. 지금 안 자놓으면 내일 하루종일 피곤하지 않을 건가?


 "개새끼들...바다나 보러 갈까?"


 이고가 갑자기 한숨을 쉬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바다? 마딜 공화국에는 바다 없는데...


 "무슨 일 있어?"

 "어? 너 안 자?"

 "자다가 깨었어."

 "아...그러면 다시 자."

 "뭔데 그렇게 있어?"

 "뭐 없어. 그냥 있는 거야."


 방금 바다 보러 갈까 하지 않았나? 마딜 공화국은 내륙국이라 바다가 없다. 이고도 이제 마딜 공화국에 오만 정이 다 떨어져버렸나? 그래서 남아드라스 공화국으로 돌아갈까 고민하는 거야?


 "남아드라스로 돌아가게?"

 "응? 아니야. 갑자기 왜?"

 "'바다 보러 갈까'라고 했잖아."

 "그거? 그냥."

 "뭐가 그냥이야? 우리나라에 바다가 어디 있다구."

 "바다 보려면 셀베티아로 가지, 왜 남아드라스로 가냐?"

 "그러면 셀베티아 가게?"

 "아니라니까. 그냥 해본 말이야. 여기 떠나서 어디로 가?"


 무슨 말 못할 고민이라도 있나? 어떤 고민인지 모르겠지만 이고도 속이 편할 리가 없겠지. 아다비아 일에 루즈카가 얽혀 있으니까. 루즈카가 아다비아를 흉측한 장님으로 만들어버렸고, 지금은 아다비아를 돌봐주고 있다. 이고는 루즈카 애인이니 루즈카가 아다비아에게 얽힌 것이 남의 일이 아닐 거다. 그러니 매일 아침 장 봐서 루즈카네 집으로 가는 거구. 아다비아가 다시 눈을 뜰 리는 없을테니 아주 오랫동안 루즈카가 아다비아를 책임져야할 테고, 그거 생각하면 이고도 갑갑하긴 할 거다. 참 지랄맞은 상황이다. 모두가 한덩어리가 되어 엉망이 되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이고도 이곳에 정나미 떨어지겠지. 죄다 병신같이 굴고 있으니 말이야. 그렇다고 남아드라스보다 좋았던 곳도 아닐테구. 원래 뭐 하나 제대로 되어 있는 게 없었잖아? 그러니 일에서 백까지 괜찮은 건 다 남아드라스나 셀베티아에서 수입해온 거지.


 "셀베티아나 한 번 가볼까?"

 "셀베티아 왕국? 거기 여기서 멀지 않아? 마딜 아예 떠나게?"

 "아니. 그냥 한 번 가보고 싶어서. 셀베티아 왕국은 가본 적 없단 말이야."

 "내가 너라면 진작 여기 떠났겠다. 이 병신 같은 곳이 뭐가 좋다구..."

 "응, 여기 참 병신 거지같아. 그 맛에 여기에서 지내고 있지만..."


 이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담배 한 대 태우러."

 "같이 가. 나도 한 대 태우게."


 같이 자리에서 일어나 서점 밖으로 나왔다. 이고가 성냥으로 담배에 불을 붙인 후, 불 붙은 담배를 내게 건네었다. 이고의 담배를 받아서 내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이고에게 다시 담배를 돌려주었다.


 "아다비아 잘 챙겨줘."


 이고가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며 내게 말했다. 진짜 그 소리 좀 모두가 그만하면 안 되나? 그래, 나 아다비아한테 커다란 빚이 있어. 그거 항상 안 잊어버리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나한테 어떻게든 아다비아를 떠넘기려고 하지 말라구. 나도 내 한 몸 챙기기 힘들어. 매일 매시각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하나 진지하게 고민이다. 학교는 언제 문을 열지도 모르고, 설령 문을 열어도 졸업은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진지하게 앞으로 뭐 해 먹고 살아야할지 모르겠다. 어제까지 무사히 잘 살아남았다는 생각이 들면 이제부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할까 고민이 찾아온다. 나날이 더더욱 징그럽고 끔찍한 모습이 되어서 말이다. 나 챙기기도 암울한 상황에서 아다비아까지 무슨 수로 챙기라는 거야? 노력은 할 거다. 아다비아에게 빚진 것을 갚기는 해야겠지. 그렇지만 평생을 흉측한 장님인 아다비아를 어떻게 책임지라는 거야. 상황이 좋아도 방법이 보일까 말까한 것을 이렇게 미친 또라이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방법을 찾으라는 거야?


 "왜 모두가 나한테 아다비아를 책임지라고 하는 거야?"

 "응?"

 "이거 솔직히 짐 떠넘기기 아냐?"

 "짐 떠넘기기라니?"

 "그렇잖아. 까놓고 말해서 나라고 뭐 특별한 게 있어? 내가 뭔 수로 아다비아를 챙겨줘? 루즈카처럼 무슨 끗발 날리는 저주술사도 아냐, 그렇다고 게첸처럼 돈 잘 버는 일자리를 갖고 있는 것도 아냐, 너처럼 돌아갈 고향이 있는 것도 아니야...나 살기도 힘든데 뭔 수로 아다비아를 책임지라는 거야?"

 "뭐 그런 건 아닌데...그래도 네가 많이 친했으니 아다비아 옆에 있어주는 게 좋지 않을까?"

 "옆에 있어주면 다 해결돼? 없는 돈이 막 생기고 없는 능력도 막 생겨?"

 "평생을 책임지라는 소리 아니잖아. 걔 정신차릴 때까지 좀 도와주라는 거지."


 모두가 나한테 아다비아 책임지라는 소리 안 해도 아다비아 옆에 있어줄 거다. 아다비아가 나 낙제하지 않게 도와준 거 하나도 안 잊어버리고 있다구. 나도 인간인 이상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한다는 건 안다. 그렇지만 책임지라고 하는 소리는 평생 아다비아를 돌봐주라는 소리로 밖에 안 들린다. 무슨 수로 아다비아를 평생 돌봐줘? 내가 돈이 많아서 사람들 여럿 사서 부릴 수 있는 것도 아니구. 옆에 있어주는 것이 영원히 책임지라는 소리고 변하는 것 아닌가 걱정이 안 된다면 그게 이상한 거 아닌가? 담배를 다 태운 후 방으로 들어가 다시 드러누웠다. 아다비아, 이 멍청한 건 대체 뭘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야? 진짜 뮈젤 간다고 할 때 뜯어말렸어야 했나? 아니야, 그래봐야 소용없었을 거다. 오히려 그랬다면 아다비아와 서먹해지기만 했겠지. 걔는 어떻게든 위로 올라가려고 노력하고 있었잖아. 내 말을 전혀 안 들었을 거다. 오히려 나를 엄청 한심한 인간으로 쳐다보았겠지.



 이고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아, 루즈카 집 가?"

 "응. 다녀올께."


 이고가 방에서 나갔다. 기지개를 켰다. 아직도 많이 춥다. 달력을 보았다. 2월 22일. 이제 2월도 거의 끝나간다. 그런데 날씨는 여전히 춥다. 진짜 추위 좀 끝나라. 진절머리날 지경이다. 에드자가 원래 이렇게 많이 춥고 눈도 많이 내리는 곳이었나? 돈 있는 놈들은 좋겠다. 돈만 많으면 방 공기를 따스하게 데우고 두껍고 따뜻한 옷 껴입고 행복한 겨울을 보낼 거 아니야. 자리에서 일어나 솥에 있는 따뜻한 물을 떠서 찬물에 섞은 후 화장실로 갔다. 그래도 좋게 생각하자. 이렇게 따스한 물로 세수를 할 수 있다는 게 어디야. 차갑기는 하지만 머리에 닿는 순간 머리가 두토막날 것 같은 고통이 느껴지는 찬물은 아니잖아. 머리도 대충 감았다. 잘 되겠지. 잘 될 리는 없지만 어떻게 조금이라도 나아는 지겠지. 밖으로 연결되는 문을 열고 세수한 물을 밖으로 끼얹었다.


 방에 물통을 갖다놓고 방에서 나와 화로에 불을 붙였다. 이제 슬슬 켈라자야 올 때가 되어간다. 라키사가 오늘은 오겠지? 오늘 나오겠다고 했으니까 아마 올 거다. 불을 쬐고 있으니 살짝 노곤해진다. 어제 잠시 잠을 깬 것 때문에 그러나? 아무 생각도 하기 싫다. 그냥 이렇게 멍하니 있고 싶다. 생각하려고 하면 나쁜 것만 잔뜩 떠오르니까. 아예 눈 감고 귀 막고 멍하니 있는 것이 뭐라도 하나 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켈라자야가 서점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늘은 무표정한 얼굴이다. 밤새 별 일 없으면 되었지, 뭐. 켈라자야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영원히 밤에 돌아다니고 낮에는 서점 와서 잠을 잘까? 켈라자야야 어떻게든 살아갈 방법이 있을 거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람들한테 담뱃불 붙여주고 돈 받으면 많이는 못 벌더라도 굶어죽지는 않을 테니까. 진짜 내가 문제네. 저 정신 이상한 켈라자야도 어떻게 먹고 살 방법이 있는데 말이다. 켈라자야는 말없이 내 옆에 와서 앉았다. 차가운 기운이 확 느껴진다. 밤새 꽁꽁 얼어붙었구만. 저렇게 밤새 돌아다니고도 감기 한 번 걸리지 않는 것이 신기하다. 감기도 켈라자야의 정신 상태에 겁먹고 도망다니는 건가?


 켈라자야라면 뭔가 방법을 알 수도 있지 않을까? 모두가 아다비아가 원래대로 돌아오는 방법은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 '모두'는 어디까지나 정상인이잖아. 정신이 이상한 켈라자야라면 뭔가 다르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이 정상인들과는 다르니까 일반인들이 모르는 무언가를 떠올릴 수도 있잖아. 설마 매일 아침 웃으며 잠에서 깨어나면 기적이 일어난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웃긴 대답을 할 정도로 미치지는 않았을 거야.


 "켈라자야, 너 저주술 잘 알지?"

 "저주술? 갑자기 왜?"


 켈라자야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다비아를 저주술로 되돌릴 수 있을까? 저주술은 상상한 것을 현실로 만드는 거잖아."

 "없어."


 켈라자야는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아주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짧고 명료하게 대답했다.


 "왜 없어?"

 "저주술로 그런 것을 하는 것은 불가능해."

 "왜?"

 "불가능하니까."


 불가능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할 말이 없다. 불가능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는데 뭐라고 더 말해. 차라리 매일 아침 웃으며 잠에서 깨어나 아다비아가 멀쩡해져 있기를 빌면 가능할 수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고 대답해주었다면 나을텐데 이건 그런 일말의 여지도 남기지 않는다. 그런데 저주술이라는 것이 원래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것 아니었어? 나와 아다비아가 간절히 원한다면 현실로 될 수도 있는 거 아니야?


 "'저주술'이라는 것은 뭐야?"


 켈라자야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내 두 눈동자를 응시했다. 아무 말 없었다. 그저 내 눈만 바라볼 뿐이었다.


 "저주술은 정말 뭐야?"

 "저주술은 저주술이야."


 켈라자야는 이번에도 아주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 저주술은 저주술. 어떻게 반박할 수 없는 말. 저주술은 저주술이기 때문에 저주술인 거다. 그걸 누가 몰라?


 "그거 말고 다른 거 없어?"

 "그러면 뭐가 있어야 하는데?"


 정상적인 대답을 원했던 내가 바보인가? 켈라자야에게 저주술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을 때 내가 원하는 대답이 나올 리가 없을 거라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 황당한 대답이 나올 줄은 몰랐다. 그래도 저주술에 대해 뭔가 설명해주려는 모습이 개미의 눈깔만큼이라도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런 건 없었다. 저주술은 저주술. 그거 말고 없다. 끝. 그러니까 그 저주술이라는 게 대체 뭐냐고 물어보고 있는 거잖아.


 "자유라든가 정의라든가..."

 "그딴 거 없어."

 "아니면 뭐 진리라든가 마딜인의 정신이라든가..."

 "그딴 거 아예 없어."

 "그러면 저주술은 뭐야? 너는 저주술사니까 저주술이 뭔지 알 거 아냐."

 "저주술은 저주술이야."


 켈라자야는 내가 무엇을 물어보고, 왜 그런 질문을 던지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게 오히려 정상인 걸까? 저주술이 자유라니 정의라니 진리라니 마딜인의 정신이라니 하는 소리를 지껄이는 새끼들이 진짜 돌아버린 놈들이고 켈라자야야말로 진짜 정상인 거 아냐? 마딜인의 정신이라고 하는 소리까지는 예전부터 간간이 들어보기는 했다. 마딜 공화국 밖에서는 저주술을 사용하면 사형이라고 했다. 그래서 저주술을 사용할 수 있는 자유는 마딜 공화국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는 했다. 그렇지만 저주술이 자유, 정의, 진리의 상징이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내 피가 아드라스인의 피라 그 소리만 못 듣는 장애를 갖고 있어서가 아니다. 진짜로 그런 말은 없었다. 작년 인식론 수업에 대한 폭도들의 난리가 시작될 즈음부터 들어본 말이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켈라자야는 작년 그 폭도들의 난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게 옳은 일이었다고 생각할까?


 "진짜 아무 의미 없어?"

 "없어.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아."

 "그러면 아무나 다 저주술 쓸 수 있어?"

 "그럴껄?"

 "나도?"

 "원한다면."

 "말도 안 돼. 내가 무슨 저주술을 쓸 수 있어?"

 "알려줘?"

 "아니. 절대 싫어."

 "왜?"


 저주술을 알려주기는 뭘 알려줘? 저주술 때문에 미쳐버린 놈들이 벌써 둘이다. 감비르는 여장하고 남자이자 여자라는 되도 않는 소리를 떠들고 있고, 치롤라는 일곱 가지 꿈을 꾸어서 세상을 바꾸겠다고 난리다. 나까지 거기에 휩쓸려 미쳐버리기는 싫다. 게다가 나한테는 반드시 이루어야 할 꿈이 있단 말이야.


 "나는 이 나라 떠날 거야."

 "그래?"

 "지긋지긋해. 이 나라의 모든 것들. 꼭 셀베티아 왕국으로 갈 거야."

 "나는 저주술사인데?"

 "나랑 같이 가겠다고?"

 "나 버리고 갈 거야?"


 뭘 또 자기를 버리고 간다는 거야? 그런 건 아예 생각해본 적이 없다. 애초에 누구와 같이 이 나라를 탈출하겠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무조건 이 땅을 떠나서 살 거라고만 생각했을 뿐이다. 켈라자야도, 아다비아도, 라키사도 그 꿈 안에 있지 않았다. 감비르도, 바하르도 내가 이 나라를 떠나는 길을 같이 갈 거라 생각해보지 않았다. 딱히 나 혼자 떠나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누구와 함께 떠나겠다고 생각한 것도 아니다. 오직 이 땅을 떠나겠다고만 생각했다.


 "그런 건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나도 따라가도 돼?"

 "너 저주술사잖아."

 "저주술 안 쓰면 돼."


 그냥 웃었다. 얘가 뭘 생각하고 말할 리가 없잖아. 모르겠다. 진짜 이 나라를 떠나는 날까지 얘하고 이렇게 잘 지내고 있을지, 그리고 그때 켈라자야가 같이 떠나겠다고 진짜 행동으로 나설지 하나도 알 수가 없다. 셀베티아 왕국으로 간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깊게 생각해본 적이 얘에게 있을 리가 없지. 별 생각 없이 한 말일 거다. 그래서 진심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아까 저주술 말이야, 예를 들면 죽음에는 모든 것의 끝이라든가 모든 것의 상실이라는 상징과 의미가 있잖아. 그런 식으로 저주술에는 상징과 의미 없어?"

 "죽으면 죽는 거지,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어?"


 켈라자야는 내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다시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 질문을 설명해주고 이해시켜야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있겠다.


 "너는 왜 살아?"

 "살아있으니까."


 짧고 명확한 대답이 돌아왔다.


 "너는 죽는 것 안 무서워?"

 "조금."

 "조금밖에 안 무서워?"

 "응. 조금."

 "너 그러면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도 있어?"


 켈라자야가 오른손으로 내 옷깃을 잡고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어? 켈라자야의 반응을 보니 얘에게는 죽음보다 무서운 것이 분명히 있다.


 "뭔데?"


 켈라자야는 갑자기 왼손으로 내 입을 가로막았다.


 "그만해!"


 켈라자야가 고개를 살짝 들어 나를 노려보았다. 켈라자야의 굳게 다문 입술이 바르르 떨린다. 켈라자야에게는 죽음보다 더 끔찍한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말해주기 싫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끔찍한 것일까? 그만 물어봐야겠다. 켈라자야가 이렇게 나오는 것은 정말로 화났다는 거다. 대체 어떤 일을 겪었길래 이러는 걸까? 별 거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려 해도 이런 켈라자야의 행동을 보면 절대 별 거 없는 과거가 아니라는 확신이 든다. 오히려 끔찍한 일을 겪어왔을 거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단지 그것이 내 상상으로 짐작할 수 없는 정말로 끔찍한 일들이기 때문에 내가 감도 못 잡는 것이겠지.



 그때 라키사가 서점으로 들어왔다. 옆에 있는 저 뚱뚱하고 키 작은 남자는 게첸이잖아? 라키사는 게첸과 웃으며 이야기를 하며 서점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한 손으로 내 소매를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 내 입을 막고 있는 켈라자야를 보더니 얼굴이 굳어버렸다. 라키사, 오해야! 진짜 켈라자야는 일부러 노리고 이러는 건가? 켈라자야는 라키사를 보자 내 입에서 손을 치우고 옷소매를 놓아주었다. 라키사도 표정을 바꾸어 밝은 표정을 지으며 게첸을 바라보았다.


 '게첸 저 새끼는 이 아침부터 일하러 안 가고 왜 여기 왔어?'


 라키사를 보는 순간 반가웠다. 자기가 말한대로 드디어 월요일이 되자 서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 좋은 기분은 아주 찰나에 그쳤다. 라키사가 들어오고 그 뒤를 따라 들어오는 게첸을 보는 순간 기분을 완전히 잡쳤다. 저 새끼는 오늘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여기 온 거야? 저 새끼의 말도 안 되는 푸념을 들어주기 정말 싫다. 물을 한 바가지 떠와서 확 끼얹으며 당장 꺼지라고 하고 싶다. 저 새끼는 눈치가 없나? 오지 말라고 직접 말하지만 않았지, 오지 말라는 뜻을 올 때마다 전달했다. 그런데 대체 왜 자꾸 여기에 기어오는지 모르겠다.


 "안녕하세요."

 "예."


 게첸이 인사하자 '안녕하세요'라고 대답하지 않고 '예'라고 대답했다. 이 새끼야, 나 지금 참 심란하거든? 제발 안 와주면 안 돼? 네 푸념 들으면 내 속이 뒤집힐 거 같아.


 "오늘은 웬일로 이 시각에 오셨어요?"

 "오늘은 쉬는 날이라 놀러왔어요."


 이놈은 왜 서점에 놀러올까? 내가 잘 들어주는 것도 아닌데 꼭 여기 와서 푸념을 늘어놓는다. 그게 자기에게는 노는 것이겠지. 나에게는 고통이다. 네놈 푸념 잘 들어주고 이해해주는 곳 가서 놀라구. 이 새끼는 내가 자기 푸념 듣고 짜증내는 모습에 재미를 느끼는 걸까? 내가 자기 푸념 듣고 괴로워하는 모습에 쾌감을 느끼고 온갖 스트레스가 다 풀리는 거야? 켈라자야를 살짝 바라보았다. 켈라자야는 말없이 게첸을 노려보고 있다. 켈라자야도 게첸을 매우 싫어한다. 켈라자야도 게첸의 푸념 들으면 엄청 짜증나겠지. 끔찍한 과거를 겪었으니 나보다 더할 거다.


 "요즘 너무 바빠서 못 왔어요. 매일 밤늦게까지 일해서 너무 힘드네요. 중앙학문연구소에서 일하기 너무 괴로워요."


 힘들면 집에서 잠이나 처잘 것이지 왜 서점에 놀러와? 덜 힘들었으니 여기까지 기어왔지. 확 말하고 싶지만 참는다.


 "힘들면 때려치세요."

 "타슈갈, 말이 너무 심하지 않아?"


 라키사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왜 내가 저 인간의 푸념을 들어주어야하는지 네가 이해시켜줄래? 그냥 말을 말자. 이 아침부터 라키사, 게첸과 언쟁 벌이기 싫다.


 "나는 지금 일하는 중앙학문연구소가 정말 싫어요. 그렇지만 이 일을 사랑하고 있어요. 그리고 앞으로 좋아질 희망이 있구요. 그렇기 때문에 계속 참고 일하고 있는 거에요."

 "아, 감비르가 하는 그 정신병 놀이요?"

 "감비르씨에 대해 말이 심하군요. 그렇지만 맞아요. 감비르님도 있고, 그 외에 여러 좋은 분들이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어요. 언젠가는 그렇게 바뀔 거구요."

 "짐승 새끼도 그런 짓은 안 해요. 암캐가 수캐 위에 올라타는 건 못 봤네요."


 라키사가 계속 나를 노려본다. 내 말이 틀렸어? 감비르의 병신같은 믿음도, 그리고 그걸 이용해 자기가 좋아지기를 바라는 게첸도 욕 먹어야 싸다. 미친놈, 바꾸고 싶으면 자기가 스스로 중앙학문연구소에 불싸지르든가. 그건 또 거기 저주술사가 많아서 할 용기가 안 나려나? 그 이전에 그랬다가는 거기서 쫓겨날테니 그게 무서워서 그런 짓은 차마 할 엄두가 안 나겠지. 그래서 감비르에게 그런 짓 해달라고 사정하는 건가?


 "대체 뭔 일이길래 그렇게 사랑하세요?"

 "나는 저주술사들을 뒤에서 지원하는 역할에 큰 보람을 느껴요."

 "사랑하면 그냥 하세요. 여기 와서 힘들다고 징징거리지 말구요."


 게첸은 라키사를 한 번 쳐다보았다. 라키사는 나를 노려보고 있다. 뭐, 어쩌라구? 그러면 게첸한테 힘내라고 할 줄 알았냐?


 "일이 좋으면 그냥 하면 되는 거지, 뭘 맨날 투정이에요? 돈도 많이 받으면서요."

 "나는 퇴근 시간 넘어서 늦게까지 일해요. 그리고 집에 돌아와 또 일해요."

 "그래서 뭐 어쩌라구요? 어쨌든 나보다 훨씬 많이 받잖아요. 그러라고 돈 많이 주는 거 아니에요?"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그렇게 고생하니까 돈을 많이 주는 거지. 이 새끼는 내가 맨날 여기에서 가만히 앉아서 놀기만 하는 줄 아나? 요즘 일이 별로 없는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게첸에 비해 돈을 상당히 적게 받는 것도 사실이다. 정확히 게첸이 돈을 얼마나 받는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저 머리에 바른 기름, 향수 냄새, 그리고 옷차림과 장신구를 보았을 때 나와는 비교도 안 되게 큰 돈을 받는 것은 확실하다. 그 돈을 포기하지 못해서 거기에 있는 거 내가 모를 줄 아나.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일에 매몰되어 자아가 없어져간다구요."


 게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그렇게 자아가 소중하면 자아 지키고 돈을 포기하세요. '돈이 자아'라는 말은 차마 못 하겠죠? 이 쓰레기 새끼야.


 "나는 지금 현재의 중앙학문연구소에 내 모든 것을 바치기 싫어요. 나에게는 고유한 나만의 영역이 있다구요."


 이 새끼 진짜 짜증나네. 그래서 나보고 뭐 어쩌라구? 나는 지금 네가 지껄이는 소리 듣고 싶어서 듣는 줄 알아? 네가 손님이랍시고 와서 이렇게 헛소리 늘어놓고 있으니 점원이라는 이유로 다 들어주고 있는 거 아니야. 내 일에 원래 네놈의 배부른 투정 들어주라는 일은 없었어.


 "그래서 그런 소리 하러 여기 온 거에요?"

 "그래요."

 "타슈갈, 너 게첸씨에게 말이 너무 심하지 않아?"


 라키사가 성질을 버럭 내었다. 얘는 또 뭘 잘못 먹고 와서 이러는 거야? 내가 지금 게첸의 배부른 투정 들어주라고 여기 있는 줄 알아?


 "그러면 내가 왜 저 배부른 인간 투정을 받아주고 있어야 하는데?"

 "뭐?"

 "내 일은 여기 점원이지, 저 인간의 되도 않는 떼쓰기 받아주는 게 아니잖아. 남의 업무 시간에 와서 진상짓하는 걸 왜 헤헤거리며 받아줘야 하는데?"


 라키사에게 따지자 게첸이 나와 라키사를 번갈아보았다.


 "저는 이만 가볼께요. 나중에 시간 되면 감비르씨와 다같이 모여서 식사 한 번 했으면 좋겠네요."


 게첸은 책도 안 빌리고 서점에서 나갔다. 만세! 저 새끼 책 안 빌려갔다! 진짜 저 새끼도 눈치가 있으면 이제 다시는 서점에 나타나지 않겠지? 아까 라키사와 서로 밝은 표정 짓고 이야기하며 들어오던데 설마 라키사 보러 또 올 건가? 어쨌든 책 안 빌려갔고 자기 입으로 요즘 바쁘다고 했으니 한동안 서점에 안 나타나겠지.


 "타슈갈, 너 대체 왜 그렇게 게첸 싫어해?"

 "정말 싫으니까."

 "그러니까 왜? 아무리 싫어도 그렇지, 그렇게 무례하게 대하는 건 정말 아니라고 생각해."

 "그러면 게첸이 나한테 푸념 늘어놓는 건 안 무례해? 내 시간 다 잡아먹으면서? 나는 그러라고 허락해준 적 단 한 번도 없는데?"

 "게첸은 너를 편하다고 여기는 것일 거야."

 "편한 게 아니라 만만해 보이는 거겠지."


 라키사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다물었다.


 "타슈갈, 왜 그렇게 게첸을 삐딱하게 봐? 네가 게첸을 삐딱하게 보는 이유 중 단 하나라도 나한테 이해시켜줄 수 있어?"

 "저 새끼는 이미 자기가 싫어하는 것과 한 덩어리잖아. 그러면 거기 만족하면서 살라구. 몸은 만족하면서 입으로는 욕하는 건 뭔데? 그런다고 탈출 의지라도 있어? 그렇게 싫었다면 향수를 사는 데 돈 쓰는 게 아니라 그 돈을 모았겠지."

 "사람들마다 순수한 영역이 있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야."

 "저 새끼가 더 잘 알 걸? 그리 싫어하는 중앙학문연구소에 몸도 마음도 다 준 거."

 "그렇지 않아. 그건 잘못된 생각이야. 모든 인간에게는 각자 고유한 영역이 존재해. 모든 인간을 네 마음대로 재단하려 하는 건 잘못된 거야."


 또 그 소리야? 모든 사람은 다 다양하다는 소리. 지긋지긋하다. 그래, 다 다르다 치자. 내가 게첸에게 나와 같다고 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어? 내가 죽어도 그놈과 같은 생각은 못 하겠다고 몇 번을 이야기해? 그러면 나에 대해서 '너는 그렇구나' 하며 넘어가면 될 거 아냐. 대체 누가 더 모든 사람은 다 다르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게첸 싫다구. 그러니까 내 앞에 나타나지 말아줬으면 좋겠고! 왜 이 생각은 죽어도 틀렸다는 건데? 네 말마따라 나는 게첸과 다르다니까?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를 거 같다. 그러나 참자. 얼마 전에 라키사에게 '살인자 새끼'라고 했었다. 그 말 때문에 충격받아서 그렇게 앓아누웠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계속 든다. 게다가 오랫동안 서점에 안 나오다가 이제야 나왔다. 좋은 일은 없더라도 최소한 서로 싸우고 싶지는 않다.


 "고유한 영역이 남아 있다는 자기 기만을 벗어던지면 저 새끼에게 뭐가 남아 있을까? 참 궁금해."


 켈라자야가 말하면서 내 옷자락을 잡아끌고 내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라키사가 나와 켈라자야를 번갈아보더니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타슈갈, 지금 너를 보면 뭐가 오해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그 말이 끝나자마자 켈라자야가 가슴을 움켜쥐며 크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순간 라키사가 깜짝 놀랐다.


 "나는 너희들에게 이상한 뜻으로 말한 거 아니야! 오해했다면 미안해."

 "응? 아냐, 아냐! 너 때문에 아니야. 그냥 답답해서 그래."


 라키사의 말에 켈라자야도 같이 깜짝 놀라며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 내 말은 게첸에게는 게첸 나름의 사정이 있을 건데 타슈갈이 너무 무례하게 굴어서..."

 "너희들 때문 아니야. 그냥 순간적으로 가슴이 답답했어. 이제 괜찮아."


 켈라자야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으로 들어갔다. 게첸과 켈라자야 덕분에 라키사와 더 엉망이 되어버렸다. 라키사는 나와 거리를 두고 앉았다.


 "몸 이제 괜찮아?"

 "응."


 라키사는 가방에서 책을 꺼내 펼쳤다. 나도 책을 펼쳤다. 며칠째 같은 페이지를 펼치는 걸까? 어느 순간부터 책장이 단 한 페이지도 넘어가지 않고 있다. 매일 책을 펼치지만 책장을 한 장 넘긴 일이 없다. 습관적으로 책을 펼칠 뿐이다. 책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지만 책을 전혀 바라보고 있지 않다. 그저 멍하니 책장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고민만 한다. 확 다 때려치고 지금까지 모은 돈 들고 셀베티아 왕국으로 가버릴까 고민해보기도 하고, 아다비아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해보기도 하고, 켈라자야는 앞으로 정신을 차릴 수 있을까 고민해보기도 하고, 라키사와 어떻게든 관계를 다시 좋게 만들어 더욱 가까워지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가뜩이나 외국어로 된 책인데 머리 속이 복잡하니 눈에 들어올 수가 없다.


 "너 그새 켈라자야와 더 많이 친해졌구나."


 라키사의 말에 라키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라키사는 책만 바라본다.


 "라키사, 그때 말했잖아. 나랑 켈라자야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 아니라니까!"


 라키사가 책을 탁 소리를 내며 세게 덮더니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좋아. 하지만 켈라자야도 과연 그렇게 생각할까? 너도 게첸과 마찬가지 아니야?"


 게첸? 뭐가 게첸과 마찬가지라는 거야? 이건 진짜 오해라니까? 그리고 왜 하필 게첸인데? 그 새끼가 어떤 새끼인지 알고 말하는 거야?


 "뭐가 게첸과 마찬가지라는 건데?"

 "너희 둘은 안 사귀어. 그렇지만 행동만 보면 이미 연인 사이야. 똑같지 않니?"

 "하아..."


 그거 다 켈라자야가 일방적으로 그러는 거야! 내가 켈라자야 좋아서 켈라자야 옆에 찰싹 붙어 앉고 서로 꽁냥꽁냥 장난치는 거 아니라니까? 켈라자야도 내가 친구라 좋다고 그러는 거 뿐이고. 그때 켈라자야도 친구라 좋아하는 거라고 말했잖아. 뭘 더 어떻게 해야 말을 믿을 건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따지고 싶지만 참았다. 방 안에 켈라자야가 있기 때문이다. 켈라자야가 오해하고 상처받으면 그건 그거대로 또 머리 깨질 일을 만들 거니까. 그래서 이만 꽉 다물었다.


 "나 두 개만 물어봐도 돼?"

 "뭐?"


 라키사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입을 다물고 침을 삼키며 나를 계속 바라보았다. 뭘 물어보겠다는 거야? 뭘 물어봐도 좋다. 내 대답을 믿어주기만 하면, 내 마음이 똑바로 전달되기만 하면 된다.


 "너 켈라자야가 저러는 거 싫은데 불쌍해서 받아주는 거야?"

 "친구라 받아주는 거라 했잖아!"

 "알았어. 너 아다비아는 어떡할 거야?"

 "그건 무슨 소리야?"

 "아다비아도 책임져야하잖아."


 또 그 소리! 왜 사람들 모두 내 가슴에 바윗덩어리 하나씩 얹지 못해 환장한 거지? 아다비아를 살려야한다는 것이 그렇게 잘못된 거야? 인간으로써 당연한 말을 한 게 왜 이런 식으로 돌아오는데?


 "대체 왜 다들 나한테 아다비아를 책임지라는 건데? 아다비아를 내가 책임져야 하는 이유가 도대체 뭐야? 너도 아다비아 친구잖아!"


 라키사를 향해 소리쳤다. 라키사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나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아다비아는 너 많이 좋아해!"


 지금 그 말을 나한테 믿으라는 거야? 걔가 나를 뭘 많이 좋아한다는 거야? 걔가 나를 왜 좋아해? 항상 위로 올라가기 위해 발버둥치던 애가 밑바닥에 있던 나를 퍽이나 좋아하겠다. 내가 그것도 모를 줄 알았어? 걔랑 책 본 거 말고 그 어떤 이야기도 나누지 않은 줄 알아?


 "아다비아가 뭘 나를 많이 좋아한다는 거야? 걔가 나 따위를 왜 좋아하냐? 너야말로 아다비아와 절친 아니었어?"

 "너는 도망치고 싶어서 그런 거야, 아니면 자기기만하는 거야?"


 자기 기만? 뭐가 자기 기만인데? 아다비아가 나와 사귀고 싶다고 말한 적 한 번도 없다. 없는 일을 없다고 하는 게 자기 기만이야? 아다비아는 성공하고 싶다고 나한테 여러 번 말했다. 위로 올라가고 싶어서 꾸준히 노력했구. 이 모든 게 다 나의 자기 기만이라는 소리야? 걔는 단지 친구가 없었기 때문에 나와 노는 것이 즐거웠던 것 뿐이다.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구!


 "걔처럼 잘난 애가 나를 왜 좋아하냐구! 자꾸 억지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쓰지 마!"

 "이제 아다비아가 바닥으로 떨어졌으니 마음껏 좋아해줘도 되겠네."

 "너 대체 나한테 왜 그래? 내가 그렇게 싫어?"

 "그만 이야기하자. 너도 내 말 이해하려 안 하잖아."


 너의 말 무엇을 이해하려 안 했다는 거야? 라키사의 반응을 전혀 이해 못하겠다. 라키사가 왜 나와 켈라자야의 관계를 사귀는 관계라 생각하고, 아다비아는 왜 나를 많이 좋아한다고 생각할까? 그거 아니라고 대답했다. 진짜 아니니까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그에 대해 돌아온 말이 내가 라키사의 말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라키사가 듣고 싶었던 대답은 대체 무엇일까? 내가 켈라자야와 사귀고 아다비아도 책임지겠다는 소리? 그거야말로 완벽히 무책임하고 있지도 않은 걸 꾸며낸 소리다. 라키사는 왜 내 말을 안 들을까? 내가 말한 그대로 듣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진짜 그때 시험지에 완벽한 대화란 가능하지 않다고 적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일까? 그래, 그때 아다비아가 알려준 대로 완벽한 대화가 가능할 거라고 적었어야 했다. 어떤 말을 듣든, 결국 해석은 자의적이다. 내가 라키사에게 무슨 말을 해도 라키사는 그 말을 그대로 들으려 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비틀고 꼬아버린다. 만약 아다비아가 알려준 대로 완벽한 대화가 가능할 거라 적었다면 무언가 큰 흐름이 바뀌어서 내 말을 라키사가 아무 오해 없이 그대로 받아들고 있지 않았을까? 중요한 건 지금 라키사에게 무슨 말을 하든 라키사는 내 말을 자기 마음대로 비틀고 꼬아서 받아들이기 때문에 차라리 말을 안 하는 게 더 낫다는 거다. 정확히는 더 나빠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라키사와 별 말 없이 일주일을 보냈다. 이제 2월의 마지막날인 2월 29일이다. 라키사와 말을 별로 나누지 않으니 서로의 오해가 더 깊어질 일도 없었다. 이것이 좋은 것인지 모르겠다. 일단 오해가 더 깊어지지 않으니 사이가 더 틀어질 일도 없기는 하다. 그렇지만 딱 거기까지. 더 가까워지고 싶지만 가까워질 수가 없다. 결국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라키사와 뭐든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 그렇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든 오해만 깊어지니 차라리 이렇게 현상 유지라도 하는 게 낫겠지? 답답하기는 하지만 방법이 이것 말고는 없다.


 간밤에 눈이 또 내렸다. 이번에는 다른 날과 조금 달랐다. 눈과 굵은 빗방울이 같이 떨어졌고, 천둥도 쳤다. 구름도 에드자 위에 도착했더니 이 도시의 미친 기운에 취해서 눈과 비를 같이 쏟아붓는 것으로도 모자라 천둥까지 쩌렁쩌렁 울려퍼지게 한 걸까. 진짜 하늘도 이제 미쳐버렸나 보다. 이고도 신기하다는 듯 하늘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매해 겨울에 눈이 내렸지만 이렇게 천둥이 치고 씨알 굵은 빗방울과 아기 주먹만한 함박눈이 같이 내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봄이 오면 또 얼마나 정신나간 일들이 벌어지려고 날씨가 이 모양인 거야?


 이고가 루즈카 집에 갔다가 돌아오자 아다비아 병문안을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서점에서 나왔다. 켈라자야와 라키사에게 같이 가겠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걔네들과 같이 가고 싶지 않다. 켈라자야가 그저께, 라키사가 어제 아다비아 문병을 다녀왔기 때문이 아니다. 아다비아 문병만큼은 나 혼자 가야할 것 같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아다비아와의 일련의 일들. 그 일들을 떠올려보면 나 혼자 가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야 한다. 어째서인지는 모른다. 왜 아다비아가 끝없이 추락할 때 아다비아가 떨어진 바닥을 매번 내가 보고 만 걸까? 아다비아가 내게 보여주고 싶어서 그런 것도, 내가 그것을 찾아다니며 보려고 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그래서 더더욱 켈라자야, 라키사와 같이 가지 못하겠다. 그런 비참한 광경이 모두가 있을 때 벌어지면 더 끔찍하니까.


 라키사, 켈라자야 모두 아다비아 문병을 가서 위로하고 힘내라고 말해주고 돌아왔다고 이야기해주었다. 어떤 식으로 위로를 해주었는지는 모르겠다. 둘 다 그렇게까지 자세히 이야기해주지는 않았다. 이고가 루즈카 집에 다녀와서 내게 별 말 안 하는 것으로 보아 둘이 문병을 갔을 때에는 별 일 없었나보다. 여자들이라 서로 말이 잘 통해서 그런 건가 싶기도 하고. 아다비아는 어떻게든 힘내보겠다고 이야기했다고 했다.


 '아다비아가 기운차리고 있었으면 좋겠다.'


 이고, 라키사, 블랑쉬블르 모두 내게 아다비아 문병 안 가냐고 툭하면 물어보았다. 그때마다 나중에 가겠다고만 이야기했다. 안 가는 진짜 이유를 말하지 못했다. 진짜 이유를 말하면 일만 더 커질 것 같았다. 오늘은 문병을 다녀올까, 오늘은 문병을 다녀올까...매일 아침 고민했다. 그러나 겁이 났다. 주변 사람들 모두 내게 아다비아를 책임지라는 것이 무서운 것이 아니다. 아다비아가 자꾸 끝없이 아래로 추락하는 것을 보는 것이 무섭기 때문이다. 전에 여기까지 떨어졌으니 더 나빠질 것이 없다 싶으면 이번에는 거기에서 더 나빠진다. 그것도 내가 상상도 못했던 모습으로 말이다.


 '왜 나만 아다비아의 추락을 계속 보는 걸까?'


 점점 짧아지고 무미건조해져간 편지. 서점에 들어오지 못하고 문 앞에서 쭈그려 앉아 있던 모습. 쿠룬나스가 되어 생포된 모습. 감비르가 죽이려 하던 장면. 거기에 나를 향해 가랑이를 벌리던 순간. 내가 아다비아 앞에서 사라져야 아다비아가 그나마 조금이라도 위로 올라오는 것 아닐까. 내가 아다비아 앞에 나타날 때마다 더 안 좋아지니 말이다. 나는 아다비아에게 다가가서는 절대 안 되는 인간 아닐까?


 솔직히 오늘도 가서 아다비아에게 뭐라고 말해야할지 모르겠다. 단순히 모른다고 하는 것은 라키사가 내게 말했던 자기 기만에 해당하는 거겠지? 나도 안다. 어떤 말 한 마디가 잘못되어 또 무슨 일을 야기할지 모른다는 공포. 단지 살려줘야한다는 말 한 마디로 모두가 내게 아다비아를 책임지라고 하는 상황을 겪고 있으니 더더욱 말을 할 수가 없다. 게다가 지난 번 그 일. 아다비아가 아무리 흉측한 장님으로 전락했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나락으로 굴러떨어진 상태일 줄 몰랐다. 막연히 잘 되겠지. 그것은 나 자신을 속이던 말이었다. 아다비아가 다리를 벌리는 순간 두려움이 몰려왔다. 감비르가 아다비아를 죽이게 놔두는 것이 맞았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다비아의 두 다리 사이에 존재하던 것은 시꺼멓고 끔찍한 미래였다. 어떤 상상을 하더라도 그보다 훨씬 나쁜 답만이 존재하는 암울한 먼 훗날. 그 미래로 빨려들어가는 문이 열려 있었던 거다. 그것이 무서워서 이불을 급히 덮어주었다. 그것을 보지 않기 위해서.


 그런 일이 있었다고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딱히 큰 소동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아다비아가 말하지 않았다면 나와 아다비아 외에는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를 거다. 왜 아다비아 문병을 안 가냐고? 내 진짜 대답은 이거다. 그런 일을 겪었는데 어떻게 다시 아다비아 앞에 서라는 거야? 아다비아가 나를 진심으로 좋아해서 그런 일을 벌인 것인지, 홧김에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벌인 일인지 모른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그 일로 인해 아다비아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더 모르게 된 것만은 사실이다. 아다비아의 그런 행동 자체가 큰 충격이었다.



 루즈카 집에 도착했다. 루즈카에게 인사를 했다. 루즈카는 아다비아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고 이야기해주었다. 그리고 내게 아다비아에 대해 너무 부담갖지 말라고 했다. 루즈카의 말이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아다비아를 보고 오늘은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설마 지난 번보다 더 나쁜 일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겠지? 이 고민 때문에 루즈카의 말을 잘 들을 수 없었다. 아다비아가 있는 방문 앞에 섰다. 문고리를 잡았다. 이 문고리를 잡아당기면 문이 열리고 아다비아가 보일 거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오늘은 또 어떤 지옥이 이 문 너머에 존재하고 있을까. 이 문을 연 순간, 멀쩡한 아다비아가 활짝 웃고 있으면 좋겠다. 나를 보며 모든 건 연극이었다고, 그 연극에 넘어가 당황해하는 내 모습 보며 웃음 참느라 죽는 줄 알았다고 이야기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기적 따위가 내게 찾아올 리 절대 없다는 것 잘 안다. 그렇지만 제발 그 기적이 이 문 너머에 존재해라. 모든 것이 거짓이었고, 다 나를 속이기 위한 장난이었기를.


 "아다비아, 잘 지냈어?"

 "왜 왔어?"

 "너 괜찮나 보려구."

 "꺼져."


 그런 기적이 일어날 리 없었다. 아다비아의 목소리가 독을 바른 칼이 되어 진심으로 나를 쫓아내려 한다. 아다비아는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몸을 벽쪽으로 휙 틀어 돌아누웠다. 말없이 아다비아가 누워 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의자에 앉아 아다비아를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떤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으니까. 말없이 아다비아를 계속 바라보았다. 그래, 너한테도, 라키사한테도 아무 말 하지 않는 게 그나마 나은 선택이다.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으면 최소한 더 나빠질 것은 없으니까.


 그렇게 가만히 말없이 앉아있었다. 아무 생각없이 아다비아를 바라보기만 했다.


 "뭐해?"

 "앉아 있어."

 "너, 나 비웃고 있지?"

 "아니야."

 "왜 안 꺼지는데?"

 "그냥."

 "이런 꼴 구경하니 재미있어?"

 "아니라니까."


 아다비아가 나를 향해 돌아누웠다.


 "너, 나 매우 역겹지?"

 "아니야."

 "그걸 지금 믿으라는 거야?"

 "진짜라니까."

 "거짓말하지 마. 지난 번 일 내가 잊었을 거 같아?"


 그 일이 나와 아다비아 사이에서 조용히 넘어갈 리가 없지. 없었던 일처럼 여겨지기를 바랬지만 그럴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결국 우리 둘 다 그날 일로 상처받았다. 그래도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가랑이를 벌린 아다비아를 덮치지 않은 것은 매우 잘한 일이야. 그때 안 덮쳤기 때문에 둘 다 큰 상처를 받았지만, 만약 그날 내가 아다비아를 덮쳤다면? 그때는 둘 다 영원히 최악의 구렁텅이로 떨어졌을 거다. 이건 내가 아다비아에게 미안하다고 할 일도 아니다.


 "왜? 생각이 바뀌었어? 공짜로 대준다는데 못 받아먹어서 막 아쉽니?"

 "아니라니까!"

 "그거 봐. 너는 나를 매우 역겨워하고 있어. 더러워서 차마 못 건드리겠지? 너도 더러워질 거 같으니까!"

 "아다비아, 진짜 그런 거 아니야. 어떻게 해야 내 말 알아들을래?"

 "뭘 알아들으란 거야? 네가 나를 덮치지 못한 건 사실 아니야?"

 "내가 너를 어떻게 덮쳐. 우리가 결혼이라도 했냐?"

 "그러니까 우리가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못 덮쳤다는 소리니?"

 "그래."


 틀린 말은 아니잖아. 완벽한 진실이라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것은 전혀 거짓말이 아니다. 단지 중요한 내용이 빠진 진실일 뿐.


 "그럼 우리 결혼해. 당장!"

 "좀 그만해! 우리가 무슨 결혼이야?"

 "그거 봐. 너 지금 나한테 거짓말하고 있는 거잖아!"

 "야, 결혼이 무슨 장난이냐?"

 "변명하지 마!"


 아다비아가 몸을 벽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있는 힘껏 벽에 머리를 찧었다.


 "야! 하지 마!"


 다시 한 번 아다비아가 벽에 머리를 찧으려는 순간, 손으로 아다비아 머리를 막았다. 아다비아는 계속 벽에 있는 힘껏 머리를 찧으려 했다.


 "제발 이러지 좀 마!"

 "왜! 네가 무슨 상관이야!"


 아다비아가 소리쳤다.


 "우리 친구잖아!"

 "거짓말하지 마!"

 "무슨 거짓말이라는 거야! 친구가 아니면 내가 여기 왜 와?"

 "네가 나 역겨운 년으로 보는 거 모를 거 같아?"

 "아니라구! 진짜 아니야! 내 말 좀 들어!"


 아다비아는 씩씩거리며 다시 벽에 머리를 찧으려 했다. 그러나 아다비아 머리를 두 손으로 꽉 잡고 버텼다.


 "차라리 죽게 놔줘!"

 "뭘 죽게 놔주란 거야? 네가 왜 죽어!"

 "그러면 나보고 어쩌란 거야?"

 "나도 알아보고 있다구!"

 "뭘 알아봐? 알아보면 답이 나오니? 내가 멍청해보여? 죽는 것만도 못한 미래를 내가 모를 거 같냐구!"

 "누가 그딴 소리 해!"


 아다비아 몸에서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다비아는 벽을 향해 누운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머리를 놓아주었다. 안아서 달래주고 싶다. 안아주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그거면 내가 아다비아를 더럽고 역겨운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아다비아도 느낄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두 손이 허공에 묶여 있는 것 같다. 움직이지 않는다. 못 안아주겠어. 더러워서가 아니다. 아다비아와 연인 관계도 아니잖아. 그런데 어떻게 안아줘. 진짜 나는 아다비아한테 이래저래 민폐만 끼치는구나. 오늘 오지 않았다면 아다비아가 지금 이렇게 울 리도 없을텐데. 아무리 용기를 내서 아다비아를 안아주고 달래려 해도 손이 안 움직인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꽁꽁 묶여 있다.


 "너 대체 나를 얼마나 비참하게 만들어야 속이 풀릴 거야!"


 아다비아가 소리쳤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너야말로 나를 얼마나 비참하게 만들어야 속이 풀릴 거야? 나도 너한테 받은 거 다 갚고 싶다구. 그런데 내가 능력이 없는 것을 어떻게 해? 나도 최악의 미래만큼은 어떻게 막아보고 싶다. 네가 아무 남자한테 다리 벌리고 화대 받아 하루하루 근근히 살아가는 그 미래만큼은 어떻게든 막고 싶다구! 나라고 네가 지금 이러는 거 낄낄거리고 있을 거 같아?


 "진짜 좋아질 거야. 내가 진짜 뭔 수라도 알아볼께. 그러니 제발 그만해!"

 "뭘 알아본다는 거야? 무슨 방법이 있다는 거야! 차라리 네가 나를 품어버리면 그게 덜 비참해!"

 "좀 그만해! 나 좀 믿어보라구! 나는 너 믿었는데 너는 왜 나를 안 믿어?"

 "네가 뭘 나를 믿었다는 거야!"

 "너 말 듣고 시험치러 들어갔잖아!"


 아다비아가 울음을 멈추었다. 아다비아가 아니었다면 내가 과연 시험을 치러 갔을까? 안 갔다.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절대 가지 않았을 거다. 아다비아가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말라고 하고 끝까지 내 공부를 도와줬기 때문에 시험을 치러 들어간 거다. 나 스스로 내가 합격할 거라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도 아다비아 말을 믿고 따랐다. 그래서 시험을 통과했다. 여기에는 그 어떤 거짓도 없다.


 "그거랑 이게 같아? 이 눈 어떻게 할 건데? 노력하면 이 눈이 보이게 돼?"


 그건 불가능하다. 아무리 내가 될 거라 믿는다 해도 방법이 없다. 모두가 안 된다잖아. 심지어 정신나간 켈라자야조차 그것만큼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래도 지금보다 낫겠지! 네가 아무한테다 다리 벌리는 거 싫어. 그딴 거야말로 끔찍하고 역겹단 말이야!"

 "그래서 너한테 벌렸잖아!"

 "나한테도 함부로 벌리지 마! 너 그러는 거 정말 싫단 말이야. 그건 진짜 너가 아니잖아!"

 "진짜 나? 내가 진짜 내가 아니면 가짜라는 거야? 가짜면 죽어버리면 되겠네."

 "제발 좀!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내 원래 모습이 뭔데? 지금은 가짜란 소리잖아! 이게 가짜야? 내가 가짜라구?"


 머리가 아프다. 아다비아의 원래 모습. 뭔가 사람 속을 긁는 것이 있는 말과 위로 올라가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던 것. 자신감에 차 있고 자기 말 들어주면 그렇게 기뻐할 수 없던 모습. 이것이 아다비아의 원래 모습이긴 한데...그렇다면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가짜 아다비아인가? 그건 아니다. 내 앞에 있는 흉측한 장님에 자기 스스로를 포기해버린 여자도 아다비아다. 이 여자도 진짜 아다비아다. 이제 뭐가 진짜이고 뭐가 가짜인지도 모르겠다. 다 진짜인데. 내가 내 환상에 빠져 있는 걸까?


 "그러게 그냥 죽게 놔두지 왜 말렸어!"


 아다비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다비아, 진짜 그만하자. 솔직히 뭐가 왜 잘못된 건지 하다도 모르겠어. 내가 너를 살린 것이 그렇게 잘못한 거야? 블랑쉬블르가 물어보았을 때 너를 죽이라고 대답해야 했어? 감비르가 너를 죽이려고 저주술을 쓸 때 뒤에서 감비르를 응원해야 했던 거야? 너한테 옳다고 생각해서 선택한 모든 것들이 다 원래는 고르지 말아야 했던 답이었던 건가 싶기까지 하다. 너는 지금 내 손으로 죽여달라고 애원하는 거야? 그냥 확 아다비아 소원을 들어줄까? 품에 있는 칼을 쥐었다.


 아니다. 정신차리자. 나까지 미쳐버려서는 안 돼. 누가 뭐래도 아다비아는 살아야 한다. 비참한 인생이 아니라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희망이 있는 모습으로 말이다. 정신 바짝 차리고 침착해야 한다.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상황이지만 한 가닥 가느다란 정신줄을 잡고 버텨야만 한다.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잖아.


 "아다비아."

 "왜? 내 말이 틀렸어? 네가 이 끔찍한 고통을 알아?"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를 꽉 다물고 힘을 내었다. 오른손을 꽉 묶어매고 있던 보이지 않는 끈이 끊어졌다. 아다비아 머리 근처에서 손이 다시 멈추었다. 이 정도는 괜찮아. 아다비아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아다비아가 당황한 듯 가만히 있었다.


 "너 안 더러워. 지금도 예뻐."

 "거짓말하지 마."


 아까보다 말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너 진짜 안 더럽고 안 역겨워. 좀 믿어달라구. 그리고 내게도 시간을 좀 줘. 네가 겪는 시간의 고통보다야 훨씬 가볍겠지. 그렇긴 해도 나도 지금 괴로워. 네가 좋아지는 방법을 알고 있는데 일부러 숨기고 있는 거 아니야. 나도 나름대로 여러가지 생각해보고 있어. 하지만 이것이 그렇게 쉬운 문제였다면 세상 그 누가 실명하는 것을 무서워하겠어?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눈을 감을 때까지 끊임없이 모든 것이 꼬여 있고 엉망이 되어서 대체 어디부터 손대야할지 감도 못 잡겠다는 느낌에 휩싸여 지내고 있다. 그나마 그 중 하나가 네 문제라는 거 잘 알고 있어서 그 문제 어떻게 풀어볼까 계속 고민하고 있다. 하지만 그 문제를 풀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는다구. 좀 기다려줘. 나라고 손놓고 멍하니만 있는 거 아니란 말이야.


 "진짜야. 그러니 좀 기다려줘."

 "나 매우 미워하면서..."

 "안 미워해. 내가 너를 왜 미워해?"

 "너는 나 안 좋아하잖아. 손 치워."

 "안 좋아하면 왜 친구야? 진짜 나 좀 믿어줘. 너야말로 내가 그렇게 싫어? 정말 꼴도 보기 싫어?"


 아다비아는 말이 없어졌다. 많이 진정된 것 같다.


 "너 정말 나빠. 멍청하고 말도 못 알아듣구!"

 "뭘 새삼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갈께."

 "가."

 "시간 되는대로 또 올께."

 "그러든가 말든가."



 밖으로 나왔다. 오늘은 눈이 안 내린다. 이제 겨울도 끝나간다. 나와 아다비아의 관계가 지난번보다 더 나빠지지 않은 것 같다. 다행이다. 안 나빠진 게 어디야.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인 후 연기를 깊이 빨아들였다. 억지로 연기를 뿜어내지 않았다. 숨과 함께 연기가 자연스럽게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어떻게 될 리가 없지. 뭐라도 해봐야 한다. 그 시도들이 결과가 좋다면 그것 또한 기적이겠지만, 보이지 않는 완벽한 답을 찾겠다고 계속 머리만 쥐어싸매고 있는 것 또한 답이 아닐 거다.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으면 아다비아는 계속 시간의 고통 속으로 더 깊이 빨려들어갈테니까.


 "너 이 시각에 무슨 일이야?"


 바하르였다. 바하르 옆에는 내 또래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먼지를 뒤집어써서 회색인 건지 원래 회색인 건지 분간이 안 되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솜을 잔뜩 누빈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아...일이 있어서 잠깐 나왔어. 너는?"

 "얘 때문에 술 한 잔 하려구. 너 아다비아 문병간 거야?"

 "어?"

 "치롤라한테 들었어. 사고 당해서 눈 멀었다면서? 힘내."

 "아...응."


 바하르가 어깨를 툭툭 치며 격려해줬다. 치롤라는 그걸 또 바하르한테 말했구나. 바하르 옆에 있던 남자가 말했다.


 "누가 눈 멀었어?"

 "얘를 좋아하던 여자애."

 "뭘 나를 좋아해? 아다비아가 나를 좋아할 리가 없잖아. 그냥 친구지."

 "아닌 거 같던데...뭐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아, 얘는 내 친구 케르무크야. 좀 또라이같은 놈이지."

 "뭐가 또라이라는 거야?"

 "그러면 네가 정상이냐?"

 "나 정상이라니까? 너처럼 멍청하게 거기에 남아 있지 않았을 뿐이지."


 케르무크가 손을 내밀었다. 케르무크와 악수했다.


 "나는 타슈갈이야. 지금 서점에서 일해."

 "나는 케르무크야."

 "너는 뭐해?"

 "학교 때려치고 여행 좀 갔다가 얼마 전에 막 에드자로 돌아왔어."

 "학교를 때려쳐?"


 그때 바하르가 말했다.


 "얘 원래 중앙학문연구소 학생이었어. 그런데 한 학기 다니더만 학교 왜 이렇게 쓰레기같냐고 바로 때려쳤지."

 "감비르 같은 놈 아냐?"

 "얘는 그런 계열 아니야. 조금 이상한 놈이기는 하지만 재미있어."


 케르무크가 웃으며 내게 물어보았다.


 "너는 하루 종일 서점에서 일해?"

 "지금은."

 "지금이라니? 전에는 어땠는데?"

 "학교 갔지."

 "학교? 중앙학문연구소?"

 "아니...에드자 대학교."

 "아, 학교 망해서 서점에 있구나!"


 바하르가 이상한 걸까, 케르무크가 이상한 걸까? 중앙학문연구소 사람들은 다 정신에 뭔가 하자가 있는 거 같다. 자에드, 예라, 게첸에 케르무크까지...그러고보니 아다비아도 중앙학문연구소 들어가서 뮈젤로 무슨 교육받으러 갔다가 저꼴이 되어버렸지. 거기는 그냥 저주받은 곳 아니야?


 "나중에 너네 서점 놀러갈께! 여기서 할 거 없었는데 잘 되었다!"

 "시간 되면 놀러와."



 바하르, 케르무크와 헤어져 서점으로 돌아왔다. 모두에게 딱히 할 말이 없다.


 "점심 먹었어?"

 "응."

 "그러면 나 혼자 먹는다."

 "응."


 이고, 라키사, 켈라자야 모두 점심을 먹었다고 했다. 나만 먹으면 되겠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릇에 곡물 가루와 말린 과일, 말린 고기를 집어넣고 뜨거운 물을 부은 후 휘휘 저었다. 식당 가서 국수나 사먹고 올까? 아니야. 거기 국수 이제 쓰레기잖아. 그거 먹고 돈 아까워할 바에는 이렇게 한 끼 때우고 말지. 배만 채우면 된다. 한 그릇 후딱 먹어치웠다. 방에서 나와 화로 옆으로 갔다.


 "아다비아랑 무슨 이야기했어?"


 라키사가 물어보았다.


 "기운내라구."

 "응."


 길게 이야기할 필요 없다. 라키사와 아다비아, 켈라자야와 아다비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겪었던 일 같은 건 없었겠지. 괜히 오해받기 싫다. 그나저나 켈라자야가 아다비아 문병을 가는 건 신기하다. 몇 번 보지도 않았는데 친구라고 하고 문병을 가다니...켈라자야는 문병 가서 아다비아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위로해주고 힘내라고 했다고만 말했는데, 진짜 그거만 말했을까? 어쨌든 아다비아에게 큰 상처가 되는 말을 하지는 않은 것 같다.


 "여기가 타슈갈이 일하는 서점인가요?"


 한 여자가 서점 문을 열고 들어왔다. 누구야? 전혀 모르는 여자다.


 "제가 타슈갈인데요?"

 "감비르 이야기 듣고 와보았어요."

 "감비르요?"


 저 여자도 미친년이겠네. 감비르 소개로 왔다고 하면 생각할 필요도 없다. 자기 동족같은 놈을 보냈겠지. 개새끼, 저 여자는 여기 왜 보낸 거야? 여자는 서점을 돌아다니며 책을 천천히 살펴보고는 내 앞으로 왔다.


 "아주 역겨운 서점이네요."

 "역겹다니요?"

 "우리를 타락하게 만드는 책이 득시글하니까요."

 "무슨 책이요?"

 "외국에서 들여온 책들요. 몰라서 물어보는 거에요?"


 역시나 맛이 간 여자였다. 감비르 이야기를 듣고 와볼 여자가 정상일 리가 없지. 켈라자야와 라키사는 멀뚱멀뚱 여자를 쳐다보았다. 이고는 뭘 새삼스럽게 놀라냐는 듯 여자를 힐끗 한 번 쳐다보더니 하고 있던 장부 정리를 계속 했다.


 "저는 와히디야에요. 감비르가 여기에 아드라스어 못하는 재미있는 아드라스인 친구가 있다고 해서 와봤어요."

 "예, 그게 저에요. 그런데 그게 뭐 어째서요?"

 "그냥 호기심이 생겨서요. 아, 우리 말 놓죠? 저랑 당신이랑 동갑인데요."

 "그러든가요."


 여자는 켈라자야와 라키사를 번갈아보더니 라키사를 향해 물어보았다.


 "당신이 라키사에요?"

 "예."

 "반가워요. 감비르한테 이야기 들었어요."

 "뭐라구요?"

 "머리도 똑똑하고 노력도 많이 하는 천재라구요. 생각도 트여있구요."

 "감비르가 그렇게 이야기해요?"

 "예. 말 편하게 해요. 동갑인데요. 저는 고향이 치르치나에요."


 와히디야의 치르치나 출신이라는 말에 켈라자야가 눈에 힘을 살짝 주며 와히디야를 바라보았다. 와히디야는 켈라자야를 쳐다보더니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손님도 계산대에 앉아 있다니 꽤 개방적인 서점인가 봐요?"

 "손님은 아니고 제 친구에요."

 "어, 그래요?"


 와히디야는 다시 켈라자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름이 어떻게 되요?"

 "켈라자야."

 "우리도 말 편하게 할까요?"

 "싫어요."


 어? 켈라자야는 와히디야가 말을 편하게 하자는 제의에 단호하게 거절했다. 뭔가 이상하다. 켈라자야는 자기 소개할 때 줄줄 읊는 말이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확히 자기 이름만 말했다. 얼굴도 뭔가 상당히 못마땅한 것 같은 표정이다. 감비르한테 말을 듣고 왔다는 말에 저러는 걸까? 그렇지만 이건 반응이 너무 과한데? 켈라자야는 계속 와히디야의 얼굴을 응시한다. 와히디야도 켈라자야의 얼굴을 가만히 주시한다. 그렇게 잠시 침묵이 유지되었다.


 "싫다면 어쩔 수 없죠. 앞으로 잘 부탁해요."


 와히디야가 서점에서 나갔다. 감비르 이 자식, 이 서점을 자기 패거리들 거점으로 사용하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그랬다가는 나와 이고, 켈라자야가 가만 있지 않을 거다. 나와, 이고, 켈라자야가 서점에서 감비르 패거리를 쫓아내려고 하면 라키사가 반대할 건가? 라키사에게 미안하기는 하겠지만 그것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 와히디야는 어떤 정신나간 생각을 갖고 있을까? 절대 알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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