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기적과 저주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2장 15화

좀좀이 2017. 10. 14.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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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2장 15화


 평화롭게 하루가 흘러갔다. 서점 문을 닫은 후 저녁을 먹으며 곰곰히 생각했다. 같이 서점에서 숨죽이며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던 날. 라키사는 아다비아와 내가 데이트를 했다고 시샘했다. 그건 분명히 데이트가 아니었는데...오해를 풀려면 라키사에게도 밥을 한 번 사줘야겠지? 라키사에게 그것이 오해였다고 백 번 말하는 것보다 밥을 한 번 사주는 것이 차라리 나을 거다. 라키사는 이것을 데이트 신청으로 받아들일까? 그래도 그렇게 나쁠 것 같지는 않은데.


 "나 내일 라키사랑 일 쉬어도 돼?"

 "내일? 왜? 라키사는 아까 아무 말 없던데."

 "내일 라키사랑 밥 같이 먹고 올까 해서."

 "오! 드디어 라키사한테 데이트 신청이야?"

 "아니야, 그런 거."


 이고가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며 나를 바라본다. 그런 거 아니라구! 라키사가 싫은 것은 아니지만 데이트 같은 거 아니라구.


 "드디어 고백하는 거야? 이제 둘이 사귀어서 여기서 사랑놀이할 거냐?"

 "아니라니까! 라키사한테는 전에 도와준 거 고맙다고 밥 안 사줬단 말이야."

 "그러지말고 확 고백해! 둘이 사이 좋아보이던데. 라키사도 네가 고백하면 받아주지 않을까?"

 "그런 거 아니라구!"


 얼굴이 화끈거린다. 라키사든 아다비아든 나와 사귀게 된다면 나야 정말 감사하지. 둘 다 매우 예쁘고 머리도 좋은 애들이니까. 착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애들이기도 하구. 그렇지만 그런 애들이 나랑 사귈 리가 없잖아. 운이 좋아서 사귀게 된다고 해도 그 관계를 계속 유지할 능력이 나한테 없구. 더욱 문제는 둘 중 누구를 내가 좋아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딱히 그 둘과 사귀고 싶다고까지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말이다.


 "우물쭈물하다 다 도망간다? 그냥 확 고백해버려!"

 "뭘 고백하란 거야?"

 "어쨌든 내일 잘 해봐. 우리 저녁 사먹는 싸구려 식당 같은 곳 데려가지 말구."

 "그런 곳 안 데려가. 내성에 있는 식당으로 갈 거야."

 "내성 어디? 좋은 곳 알아?"

 "전에 아다비아가 데려간 곳으로 가려구."


 이고가 깜짝 놀라서 손을 내뻗어 흔들며 소리쳤다.


 "야, 무슨 소리야? 내성에 멋진 식당이랑 찻집 얼마나 많은데? 너 라키사가 여기 아다비아랑 왔던 곳 아니냐고 물어보면 어쩌려고 그래?"

 "그게 뭐 중요한가..."

 "야, 그래도 그렇지! 전에 내가 데려갔던 식당 근처에 괜찮은 식당 많으니까 그쪽으로 가."

 "그쪽 어디?"

 "그냥 괜찮아보이는 곳 골라서 들어가. 그래도 그렇지, 아다비아가 데려간 곳을 데려가려고 하냐? 내일 잘 해봐!"


 이고가 활짝 웃었다. 이고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라키사에게 전에 내 공부 도와준 거 고맙다고 밥 사주겠다고 하는 건데.



 아침 서점 문을 열 때가 되어서 라키사가 왔다.


 "라키사, 오늘 나랑 점심 같이 먹을래?"

 "오늘? 응. 괜찮아."

 "그러면 우리 내성으로 가자."

 "내성? 일은 어쩌구?"

 "이고한테 말해놨어. 오늘 하루 쉬어도 된대."

 "뭐? 이고한테 나까지 쉰다고 네가 말한 거야?"

 "응. 오늘은 내가 밥 살께."


 라키사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고가 방에서 나왔다.


 "다녀와. 너네들 마음 고생 심했을텐데 오늘은 재미있게 놀면서 좀 쉬어."

 "예?"

 "어차피 오늘 일 별로 없으니까 다녀와. 놀 수 있을 때 놀아야지."


 이고가 나와 라키사를 서점에서 쫓아내듯 몰아내었다.



 "마차 타러 가자."

 "마차? 그냥 걸어가도 되잖아."

 "내성까지 오래 걸리잖아. 편하게 마차 타고 가자."


 라키사는 못마땅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너, 내가 전에 아다비아만 밥 사줬다고 해서 이러는 거야?"

 "아니야. 그냥 너도 밥 한 번 사줘야했는데 계속 잊어버리고 있었어."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정말 그때 너무 고마워서 그래. 그러니까 부담 갖지 마."

 "그렇다면 좋아. 가자!"


 라키사가 인상을 풀고 밝게 미소지었다. 아다비아만 밥 사줘서 삐졌던 것은 사실이잖아? 아니었으면 그때 그거 이야기하면서 울었을 리도 없지. 그래도 그거 꼬치꼬치 캐묻고 누가 옳냐고 싸울 건 아니다. 나 같아도 대놓고 누구만 밥 사줘서 기분나쁘다고 말하기는 참 그럴 거다.


 "그런데 너 어느 식당이 좋은지 알아?"

 "글쎄...내성 돌아다니다보면 좋은 식당 보이지 않을까?"

 "너 설마 아다비아가 데려갔던 식당 데려갈 건 아니지?"

 "아니야! 내성에 좋은 식당 하나 없겠어?"

 "나도 내성은 잘 모르는데...같이 돌아다녀보자!"


 라키사가 앞장서서 마차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꽤 신났나보다. 그래, 오늘은 라키사랑 내성 돌아다니면서 즐겁게 시간을 보내야지. 그동안 안 좋은 일이 너무 많았다. 이 얼마만에 누리는 평화야? 앞으로도 계속 평화롭겠지만, 그 대신 일이 점점 더 바빠지겠지. 이고 말이 맞아. 놀 수 있을 때 놀아야 해. 그동안 참 힘들었으니 기분좋게 놀아야겠다. 학교야 언젠가 휴교령이 풀릴 거고, 다 원래대로 돌아갈 거다.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가 신나게 달린다. 여기 와서 마차를 타는 것은 이번이 정확히 세 번째다. 라키사는 아무 말이 없지만 표정이 매우 밝다. 라키사도 신난 것 같다. 라키사도 지금까지 마음이 매우 힘들었을테니까. 하지만 시간이 걸리기는 하겠지만 다 좋아질 거잖아? 비관적으로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비관적으로 생각한다고 해서 바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니까. 시간은 계속 흘러갈 거고, 조금씩 다시 좋아질 거다. 괜히 스스로 비관적으로 생각하며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


 거리 풍경을 바라보고 있던 라키사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너 정말 아다비아랑 사귀는 거 아니야?"

 "아니야! 걔하고 내가 왜 사귀어?"


 얘는 갑자기 왜 또 나한테 아다비아랑 사귀는 것 아니냐고 물어봐? 진짜 걔하고는 아무 사이 아니라니까. 아다비아는 나랑 밥 먹은 후 라키사에게 무엇을 이야기한거야?


 "왜? 너 아다비아랑 매우 친하게 지냈잖아. 아다비아가 너 정말 많이 좋아하는 것 같던데?"

 "설마 그게 진짜 좋아하는 거겠어? 친구 없으니까 같이 놀자고 하는 거겠지."

 "그래?"

 "걔하고 그런 사이 아니야! 걔가 알아서 서점으로 찾아와서 내 공부 봐준 거라구. 내가 서점에서 매일 만나자고 한 것이 아니라."

 "진짜?"

 "응!"


 아다비아가 라키사에게 어떤 이야기를 한 걸까? 왜 얘는 나와 아다비아가 사귀는 거 아닌지 자꾸 의심하지? 진짜 아다비아와는 아무 일 없었다. 내가 아다비아에게 사귀자고 고백한 적도 없고, 아다비아가 내게 좋아한다고 고백한 적도 없다. 걔가 거의 매일 서점에 놀러와서 내 공부 봐준 것 뿐이다. 내가 걔한테 서점으로 놀러오라고 말한 적조차 없다. 나와 밥 먹으러 내성으로 갔던 날, 아다비아가 혼자 신나서 내 손을 잡은 것 뿐이구. 진짜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런데 왜 라키사는 자꾸 나와 아다비아가 사귀는 거 아니냐고 의심을 하는 거야? 진짜 내가 아다비아를 이성으로 많이 좋아하기나 했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그렇게 생각한 적조차 없다. 아다비아는 많이 친한 친구였을 뿐이다. 그건 아다비아 입장에서의 나도 마찬가지였을 거구.



 내성 입구에서 마차가 멈추어섰다. 라키사가 먼저 마차에서 내린 후, 마부에게 돈을 내고 마차에서 내렸다. 내성에 와본 것은 마차를 타본 횟수와 똑같다. 내성 입구에 군인 두 명이 서 있다. 내성 입구를 지키고 있지만 사람들을 검사하거나 제지하지는 않는다. 딱 봐도 근무시간이 피곤하고 지루해서 어서 근무 교대가 이루어지기만을 바라고 있다. 둘 다 번갈아가며 늘어지게 하품을 한다. 그래, 이것이 정상이야. 평화로워서 축 늘어지는 일상. 특별할 것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이 시간.


 "어서 들어가자!"


 라키사가 내 옷깃을 잡아당겼다. 내성 안으로 들어갔다. 고작 벽 하나, 문 하나 차이인데 어떻게 이렇게 풍경이 달라질 수 있을까? 문을 통과하는 순간 밖과 달리 3층, 4층으로 지어진 건물들이 나타났다. 길거리는 매우 깔끔하다. 그 흔한 쓰레기, 오물 하나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의 옷도 매우 깔끔하고 화려하다. 이런 풍경 뿐만 아니라 공기의 냄새도 다르다. 사람들이 몸에 향수를 뿌리고 다니는지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향기가 콧속을 간지럽힌다. 눈 감고 돌아다니면 여기부터 봄이 시작되는 줄 알겠다.


 "우리 어디 가?"

 "글쎄...내성 구경부터 할까? 아직 점심시간까지 시간 좀 많이 남았잖아."

 "너 아무 것도 모르고 하루 종일 걷게만 하는 거 아니야?"

 "에이, 설마 그러겠어?"


 라키사의 말에 뜨끔했다. 솔직히 나도 내성이 어떻게 생긴 곳인지 잘 모른다. 여기 딱 세 번 와봤고, 작정하고 내성 안을 다 돌아다녀본 것도 아닌걸.


 "어디, 네가 앞장서봐. 나는 너 따라다닐께."


 라키사가 가볍게 웃으며 내 등을 툭 쳤다. 어디로 가지? 일단 큰 길만 따라서 쭉 가볼까? 어떻게든 되겠지? 일단 라키사를 데리고 도시 구경부터 해야겠다. 적당히 괜찮아보이는 곳 나오면 들어가야지.


 "우리도 나중에 이런 곳에서 일할 수 있겠지?"


 라키사가 거리를 둘러보며 말했다.


 "너하고 나?"

 "응. 같이 출근하고 퇴근하면 좋을 거 같지 않아? 만나서 같이 식사도 하구."

 "아...그러면 정말 좋겠다."


 라키사와 내성으로 같이 출근하고 퇴근한다구?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렇게 되려면 공부를 정말로 열심히 해야 할 거다. 물론 여기에서 영원히 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반드시 이 나라를 떠나고야 말테다. 하지만 이 나라를 벗어나려면 돈이 있어야지. 다른 나라들은 여기보다 물가가 훨씬 비싸니까. 다른 나라 가서 거지로 살 수는 없잖아. 여기에서 이랗며 돈 많이 벌어서 다른 나라로 훌쩍 떠날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거다. 그런데 내가 과연 내성 안에서 일할 수 있을까? 라키사랑 같이 출근과 퇴근하고, 식사도 같이 한다면 참 좋기는 할텐데.


 "타슈갈, 저기 저것 좀 봐! 이 머리띠 색 너무 곱지 않아?"


 라키사가 나를 잡아끌고 리본과 머리끈, 머리띠를 파는 가게로 끌고 갔다. 서점 쪽에서 파는 것과는 달리 색이 매우 곱고 선명했다. 진짜 물건 질 자체가 너무 다르구나. 이것은 다른 나라에서 수입해온 걸까? 라키사가 리본을 자기 머리에 대어보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하나 사줄까? 이까짓 리본 가격 얼마 하지도 않을 거 같은데.


 "이거 나랑 잘 어울려?"

 "응! 진짜 잘 어울려!"


 라키사가 고른 머리띠는 분홍색 커다란 리본 장식이 오른쪽 아랫부분에 달려 있는 노란 머리띠였다. 라키사는 리본이 정말 마음에 드나 보다. 머리카락를 손으로 잡고 머리띠를 계속 대어보고 거울을 보며 미소를 짓는다. 그렇게 머리띠를 머리에 대어보며 좋아하다 좌판에 다시 내려놓았다.


 "이거 얼마에요?"

 "2주므아에요."

 "여기요."


 주머니에서 2주므아를 꺼내 상인에게 주고 라키사가 머리에 대어보던 그 머리띠를 사서 라키사에게 건네주었다. 라키사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이걸 네가 왜 사서 줘?"

 "선물. 받아."

 "그러니까 네가 나한테 왜 선물을 줘?"

 "이래저래 너한테 고마워서."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그냥 받아. 진짜 너한테 도움 많이 받아서 그런 거니까."

 "이럴 필요 없다니까!"


 그때 상인 아주머니가 라키사를 보며 말했다.


 "어서 받아요. 아까 그거 머리에 대볼 때 너무 잘 어울리던데. 그거 하는 순간 요정으로 변신하는 줄 알았다니까! 그런 건 남자가 줄 때 바로 받아야해요. 쟤 마음 바뀔라."

 "아니에요! 그래도..."

 "이리 와요. 내가 머리에 예쁘게 씌워줄테니까."


 상인 아주머니가 라키사 머리에 머리띄를 씌워준 후, 머리를 예쁘게 정리해주었다. 라키사의 다문 입술이 실룩실룩거린다. 아주머니가 라키사에게 거울을 보여주자 라키사 얼굴이 붉어졌다. 못마땅하지는 않은가 보다. 머리띠가 라키사와 정말 잘 어울린다. 라키사에게 봄날이 찾아온 것 같다. 노란색 머리끈 위에 분홍빛 행운이 내려앉았다. 행운이 갑자기 머리를 쓰다듬어주어서 라키사가 부끄러운가보다.


 "고마워."

 "뭘..."


 그때였다.


 "진정한 자유 만세!"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우리를 향해 덮쳐온 남자의 외침. 모두가 그 남자를 쳐다보았다. 단정하게 옷을 입고 깔끔하게 머리를 손질한 그 남자. 이를 꽉 악물고 있다. 허공을 노려보고 있다.


 짜악!


 "뭐야!"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억세게 잡아찢는 듯한 소리와 땅으로 딱딱한 것이 쏟아져내리며 나는 소리. 사방팔방으로 튄 핏자국, 그리고 땅에 굴러다니는 사람의 뼈. 다행히 우리와는 거리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 피가 여기까지 튀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이건 뭐야? 장난이지? 사람이 안 보인다. 오직 피와 뼈만 보일 뿐이다. 소리도 없다. 모두가 넋이 나가 조금 전 소리친 사람이 있던 자리만 바라본다. 피와 뼈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단지 이것이 진짜라고 소리없이 말할 뿐이다.


 라키사를 바라보았다. 라키사도 넋이 나간 표정이다. 두 눈을 둥글게 뜨고 그 자리만 계속 바라보고 있다. 이것 다 거짓말이지? 환상이지? 누가 장난치는 거 아니야? 멀쩡하던 사람이 왜 갑자기 터져? 믿고 싶지 않다. 나 이것과 비슷한 것 전에 한 번 봤어. 서점 맞은편 카페. 켈라자야가 서점 앞에서 담뱃불 붙여주던 그때, 개가 피를 쏟아내며 죽었지. 그때는 가죽과 피만 남아 있었다. 이번에는 피와 뼈만 남아 있다. 저건 자살일까? 저 사람 스스로 저렇게 죽기로 작정한 것이었을까?


 이건 무슨 일이지. 라키사가 옷을 잡아당겼다.


 "우리 가자."

 "응?"

 "서점. 돌아가자."

 "아...어, 돌아가자."


 하필이면 사고가 난 자리를 지나가야 했다. 그쪽이 나와 라키사가 걸어온 길이니까. 사람들이 사고가 발생한 자리로 모여든다. 피를 뒤집어쓴 사람들은 계속 얼굴을 뒤덮은 피를 닦아내고 있다. 모두가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른다. 알 수가 없다. 사람이 갑자기 팍 터져 죽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런 이야기는 들어본 일이 없다. 왜 이따위 일이 발생한 거지? 이제 평화가 찾아온 거 아니야?


 계속 걸었다. 이것이 꿈이기를. 그래, 내가 라키사에게 머리띠를 사줄 리가 없잖아? 라키사를 이성으로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왜 내가 라키사에게 선물을 해줘? 이건 꿈이야. 일어날 수 없는 일이야. 지독하게 깊은 꿈이라 깨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이야. 아까 라키사에게 선물로 머리띠를 사주었을 때 그 감정도, 멀쩡한 백주대낮 평화로운 거리에서 사람이 터져죽은 것도 다 꿈이야. 잠시 후 눈을 뜨면 나는 방 안에 누워 있을 거고, 여느때 아침처럼 조용한 길거리에 새가 지저귀고 있겠지. 이고가 창문을 열면 상쾌한 아침 공기를 타고 여기저기에서 아침 식사 준비하는 냄새가 흘러들어올 거야. 그래, 이건 꿈이야.


 망할 새끼! 왜 하필 오늘 딱 그때 터져 죽은 거야? 조금 이따가 터져 죽었어도 되었잖아! 꼭 모처럼 내가 라키사와 기분전환하러 시간 내서 내성에 들어왔을 때 그딴 식으로 뒈졌어야 했어? 죽으려면 혼자 방에서 곱게 죽든가! 거리에서 그게 뭐하는 짓이야? 그렇게 하면 뭐 네놈이 원하는 대로 될 줄 알아? 그래, 사람들 기분은 더러워졌다. 그거 말고 변한 게 뭔데? 그리고 왜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데?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그런 봉변을 당해야 하는 거야!


 "나 오늘은 먼저 집에 갈께."

 "응."

 "잘 가."

 "별 일 아닐 거야."


 라키사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이 개같은 상황. 이거 진짜 꿈이지? 악몽이지? 이래저래 계속 신경 곤두서는 일이 있어서 꿈자리 사나운 것 뿐이지? 왜 멀쩡한 사람이 터져 죽어? 진정한 자유 만세? 너나 잘하세요. 네놈이 뒈질 자유는 자유고, 내가 정말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자유는 자유 아니야? 내가 왜 그 꼴을 당해야 하는데? 나는 봤다. 뚜렷히 봤다. 그 사람이 몸이 터지는 그 장면. 사방팔방으로 피가 터져나오던 그 모습. 나는 왜 그 순간을 보기 싫은데도 보고 이렇게 기억해야 하는데! 라키사는 그것을 왜 봐야 하는데!



 서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고가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 왜 벌써 와? 라키사랑 싸웠어?"

 "아니...그게..."

 "그게 뭐? 왜 그렇게 표정이 어두워?"

 "사람이 터져 죽었어."


 이고의 두 눈이 호두알만큼 커졌다.


 "사람이 터져 죽다니 무슨 소리야?"

 "내성에 갔는데...갑자기 사람이 터져 죽었어! 갑자기 막 피가 튀고 뼈가 땅으로 떨어졌다구!"

 "그게 말이 돼? 뭔 소리야?"

 "진짜라구! 내가 너한테 거짓말을 해도 이따위로 거짓말하겠어? 진짜로 사람이 갑자기 터져죽었다구!"

 "야, 좀 잘 말해봐! 갑자기 사람이 터져 죽었다니 무슨 말이야?"


 어떻게 설명해야하지? 장면은 선명하게 떠오른다. 이를 꽉 깨물고 허공을 노려보던 그 얼굴. '진정한 자유 만세!'라는 그 외침도 뚜렷히 들린다. 그런데 그 어떤 것도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눈과 귀에서는 그 사건이 계속 선명하게 반복되는데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 사건을 어떻게 말로 표현해야할지 모르겠다. 어떤 언어로, 어떤 단어로 그것을 설명해야할까. 그 기억을 그대로 끄집어내고 싶다. 왜냐하면 어떤 식으로도 말로 변해 내 입에서 나오지를 않으니까. 속이 터질 것 같이 답답하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이 터져죽었다는 말 외에 그 사건과 관련해 그 어떤 말도 나오지 않는다.


 "진짜 사람이 터져죽었어! 나랑 라키사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사방팔방 막 피가 튀고!"


 아, 모르겠다. 방 안으로 들어갔다. 켈라자야가 이고 자리에서 드러누워 자고 있다. 얘라면 그 장면을 보고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내 알 바냐. 내 자리에 가서 드러누웠다.



 "야, 너 친구 왔다!"


 이고가 흔들어서 깨웠다. 얼마나 잤을까? 방안이 어둡다. 친구가 왔다니, 바하르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 일은 떠올리기도 싫다. 그러나 계속 떠오른다.


 "야, 너 뭐 벌써 자고 있어?"

 "아...아까 일 좀 있어서."

 "나 갈까? 너 피곤하면 더 자."

 "아니야. 잠 다 깨었어."


 서점 밖으로 나갔다. 이 녀석과 갈 곳이라고는 없다. 서점 앞 찻집도 문을 닫았고, 식당에서 죽치고 앉아서 이야기하기에는 눈치가 보인다. 오늘도 서점 담벼락에 쭈그려 앉든가 동네를 돌아다니든가 하며 이야기를 나누어야겠지.


 "너 뭔 일을 그렇게 해대었길래 그 시각에 골아떨어져 있어?"

 "라키사랑 내성으로 놀러갔는데..."

 "오! 라키사랑 뜨거운 데이트 한 거야?"

 "뜨겁기는 개뿔...사람이 갑자기 터져서 죽었어."

 "뭐? 너 그 현장에 있었어?"

 "어. 아, 재수 드럽게 없지, 하필 왜 그게 내가 있는 근처에서 터지냐."

 "그거 어땠어? 지금 그거 때문에 우리 발칵 뒤집혔어! 백주대낮에 갑자기 사람이 터져죽었다고. 그것도 내성에서!"


 그러고보니 얘는 이미 소식 들었겠구나. 그게 참 황당한 사건이었으니 자기들 사이에서 말이 다 퍼졌겠지.


 "몰라. 어떤 새끼가 갑자기 '진정한 자유 만세!'라고 외치더니 몸이 터져버렸어."

 "뭐? 그게 끝이야?"

 "응. 그게 끝이야."

 "골때리네...저주술로 그런 것도 가능하다는 말은 못 들어봤는데..."


 바하르가 인상을 찌푸리며 바닥을 바라보았다.


 "저주술은 상상하는 것이 현실의 힘이 되는 거래메? 그러면 충분히 가능한 거 아냐?"

 "야, 상상으로 될 게 있고, 안 될 게 있지. 육체 없는 정신이 존재할 리가 없잖아. 그런데 분명 그건 자살일 거고..."

 "그러면 저주술로 자살은 못 해?"

 "할 수야 있겠지.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못 해. 몸이 터질 때까지 정신이 온전히 남아 있어야 한단 거잖아. 그래야 정신력으로 몸을 터치지. 그런데 그게 되겠어? 몸이 터질 정도면 그 이전에 정신을 잃어버릴텐데."

 "그러고보니 그렇네."


 분명히 그 사람은 자살한 것이 맞다. 그 장면은 내가 잊을 수가 없다. 지금도 아주 뚜렷하게 느끼고 있으니까. 말없이 터져죽은 것도 아니고 분명히 자기 입으로 '진정한 저주 만세!'라고 외쳤다. 아무리 봐도 그건 자살이다. 그 새끼는 대체 뭔 짓을 한 거야? 진짜 일곱 가지 꿈이라도 꾼 거야? 그런데 설령 전설로만 존재하는 일곱 가지 꿈을 꾸었다고 해도 바하르가 지적한 것에서 자유로워질 수는 없잖아. 몸이 터지기 이전에 정신을 잃어버렸을텐데.


 "너는 일 좀 어때? 동원령 언제 끝난대?"

 "그 미친 새끼 때문에 망했어! 동원령 계속 유지될 거 같아. 그거 어떻게든 해결되지 않으면..."


 진짜 그놈은 여기저기 민폐만 제대로 끼쳤다. 증오와 분노를 키우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제대로 성공한 거다.


 "진짜 죽겠어. 이 거지 같은 동네는 왜 이렇게 밤에 여자를 많이 패대냐?"

 "여자를 패다니?"

 "야, 집에서 여자 패는 남자 뜯어말리는 게 일이야. 이 밤중에 경찰이 출동하면 그거 다 그런 쓰레기 같은 놈들 때문이라니까? 야, 나도 진짜 이 땅에서 여자 패는 남자가 그렇게 많은 줄 처음 알았다. 진짜 졸라 패! 뭔 밤마다 그런 거 뜯어말리는 게 일인데, 진짜 죽겠어. 진짜 쿠루시 출신인 것이 무슨 죄도 아니고, 거기 출신이라고 제일 쓰레기같은 이런 동네에 처박아놓냐."


 바하르의 말에 깜짝 놀랐다. 마딜인들도 남자가 여자를 때리는 일이 많았다구? 설마 그래서 치롤라가 시위 진압 과정에서 두들겨맞은 것에 대해 이고, 루즈카, 블랑쉬블르가 아무 일도 아니라는 것 같은 반응을 보인 건가? 내가 살던 동네나 여기서 밤에 돌아다닐 때나 남자가 여자를 때리는 것은 거의 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것이 에드자에서 흔한 일이었다니...그렇게 여기가 원래 험악한 곳이었던 거야?


 "야 얼마나 그런 일이 많이 일어나는데?"

 "얼마나 정도가 아냐! 이 동네가 그나마 괜찮은 거고, 성벽 쪽으로 가면 진짜 장난 아냐. 진짜 잘 사는 동네가 일도 편하다니까. 아, 진짜 거긴 쓰레기 동네야. 미치겠다니까. 문 졸라 부수고 들어가서 남자 개 패듯 처 패고 끌고 나가야 하는데, 그럼 또 뒤집어져. 놔두면 놔뒀다고 지랄이고, 끌어내면 끌어낸다고 지랄이야. 그럴 때는 나도 그 새끼들 다 잡아족쳐버리고 싶다니까? 대체 뭘 어쩌라는 거야? 진짜 밤마다 너댓 집은 꼭 그래. 아주 돌아가면서 그런다니까. 돌아버리겠어."


 바하르는 갑갑한지 입에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연기를 깊이 쭉 들이마시더니 고개를 뒤로 젖히고 하늘을 향해 연기를 내뿜었다.


 "아, 그리고 요즘 '쿠룬나스'가 에드자에 돌아다닌다더라. 너 조심해. 밤에 혼자 쓸 데 없이 나오지 말구."

 "쿠룬나스? 그 사람 속만 파먹는다는 괴물?"

 "어. 성 밖에 그거 때문에 뒤집어졌어. 진짜로 사람이 가죽 껍데기만 남은 채 발견되었대. 아주 미치겠다니까. 별 이상한 것들이 다 일어나."

 "쿠룬나스가 진짜 있는 거야?"

 "그렇대. 뭐 베어낸 흔적도 없이 속만 홀라당 빼갔다고 하니까."


 쿠룬나스는 전설로나 존재하던 거 아니었어? 어렸을 적, 말을 안 들으면 어른들이 밤에 쿠룬나스에게 제물로 바치기 위해 집에서 내쫓아버릴 거라고 겁을 주곤 했다. 쿠룬나스는 사람 속을 빼먹는 괴물이다. 사람처럼 생겼다고 한다. 쿠룬나스는 사람을 가죽만 남기고 그 속을 홀라당 빼먹기 때문에 쿠룬나스에게 당한 사람은 가죽만 남는다고 했다. 그런데 그건 다 전설이잖아. 실제 존재하지 않는 것 아니었어? 사람의 살과 뼈를 가죽을 자르지 않고 다 빼간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잖아.


 "그런 게 진짜 존재하려구..."

 "모르지. 어떤 미친 저주술사가 그런 기술을 개발해냈을지도..."

 "그건 저주술로 가능하긴 해?"

 "어쩌면? 그런데 그런 짓을 할 필요가 없잖아? 죽일 거면 그냥 죽이면 되지. 그거 사람을 홀라당 태워죽이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거야! 어떤 식으로 상상을 해야 사람 속이 다 사라지는지 상상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 상대가 한가하게 그것을 당해줄 리도 없구."


 그러니까 쿠룬나스가 전설이지. 사람을 가죽만 온전히 남기고 속을 싹 없앤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된다. 정말로 무슨 이유 때문에 가죽만 분리하고 싶다면 죽인 후에 가죽을 벗기면 될 일이다. 태워죽이는 것도 아니고 속만 깔끔히 없애는 것이 절대 쉬운 일도 아닐 거구. 바하르 말대로 상대의 저항도 심할 거고, 살과 피, 뼈를 다 분해해 허공으로 날려버리는 것을 상상해내는 것도 힘들 거다. 당장 나조차도 그게 어떤 장면으로 나타나야하는지 감도 안 오는걸. 게다가 쿠룬나스는 원래 마딜인들 전설도 아니다. 쿠룬나스는 남아드라스 공화국 전설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이건 부모님이 알려준 것이니 확실할 거다. 그러면 이 망할 잡것 귀신이 마딜땅으로 기어넘어왔다는 거야? 아주 별 것이 다 여기로 넘어오네.


 "너 진짜 힘들겠다."

 "진짜 다 때려치고 싶을 지경이야. 그런데 이 상황에 감비르는 완전 미쳐서 나타났으니...진심 돌아버리겠다."

 "감비르?"

 "어! 걔 에드자 돌아왔어. 그런데 완전 미쳤어."

 "완전 미치다니?"


 감비르가 에드자로 돌아온 것은 몰랐다. 그리고 완전히 미쳤다니? 전에 감비르가 보낸 편지에 대해 서로 이야기할 때 바하르가 감비르에 대해 안 좋게 이야기하기는 했었다. 그런데 완전 미쳤다니 진짜 감비르 상태 이상해져서 돌아왔나?


 "아, 진짜 미쳤어! 뭐 적당히 맛이 간 게 아니라 완전 돌아버렸던데? 너한테 안 갔어?"

 "나한테는 안 왔어. 대체 어떤데?"

 "야, 진짜 그건 직접 봐야 해. 이건 뭐...너도 걔랑 친하니까 걔가 알아서 찾아가겠지. 진짜 그건 직접 보지 않으면 몰라. 치르치나 가서 뭔 사고를 당했길래 애가 그 따위로 변하지?"

 "그러니까 더 궁금하잖아."

 "걔가 찾아가면 그때 직접 봐. 이건 어떻게 말로 설명할 문제가 아냐."


 바하르와 헤어졌다. 바하르는 투덜거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감비르는 또 어떻게 변했길래 바하르가 저렇게 이야기하지? 에드자에 돌아왔다면 조만간 나를 보러 서점에 한 번 오지 않을까? 서점으로 돌아갔다. 이고가 보이지 않는다. 무슨 일 있어서 나갔나? 자리로 가서 드러누웠다. 내일 라키사는 서점에 오겠지?



 아침이 되었다. 서점 문을 열었다. 라키사는 아직까지 오지 않았다.


 "어제 진짜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사람이 터져 죽었다구."


 매일 아침에 오던 라키사가 오지 않으니 이고도 어제 무슨 일이 있었다고 확실히 와닿나보다.


 "대체 어떻게 터져 죽었길래?"

 "'진정한 자유 만세!'라고 외치더니 터져 죽었어."

 "그게 끝이야?"

 "응."

 "별 일 다 있네...라키사가 진짜 많이 놀라기는 했겠다."


 이고가 한숨을 내쉬며 맞은편 벽을 바라보았다. 이제 조금 있으면 켈라자야가 잠 좀 자도 되냐고 서점에 오겠구나. 켈라자야는 그런 저주술을 사용할 수 있을까? 전에 개가 피를 쏟으며 죽었을 때 자기가 한 짓이 아니라고 절규했지. 이거 물어봤다가 켈라자야 괜히 흥분해서 또 난리피우는 거 아냐? 켈라자야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하면 뭔가 조금 더 자세한 분석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아예 말하지 않는 것이 낫겠다. 걔는 제정신이 아니니 무슨 반응을 보일지 예측이 안 되잖아.


 서점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 새끼 때문에 평범한 날이 아주 특별한 날이 되어버렸네."


 입에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켈라자야가 있었으면 성냥 안 쓰고 담배에 불 붙일 수 있었을 건데. 켈라자야는 밤에 뭐할까? 어디서 무엇을 하길래 아침마다 서점에 와서 잠 좀 자면 안 되겠냐고 물어볼까? 밤새 도시를 배회하는 걸까? 켈라자야야 어찌 해도 상관 없으려나? 걔는 저주술 실력이 확실히 엄청난 것 같으니 어지간한 것들이 덤벼도 다 자기가 알아서 해치우겠지. 오히려 뭣도 모르고 켈라자야에게 덤벼드는 놈들을 걱정해야 하는 거 아냐? 개의 시체를 저주술로 불태워 없애버리는 것 보면 인간에게도 그런 저주술을 쓸 수 있을텐데 말이야.


 "야, 너 아직도 담배 태우니?"

 "어?"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저거 뭐야? 산발 머리에 무슨 분칠을 얼굴에 떡칠을 해놓았는지 새하얗다 못해 시허연 얼굴. 입술은 쥐를 잡아먹었는지 시뻘겋다. 그리고 흙빛 블라우스와 보라색 짧은 치마. 여자들도 잘 신지 않는 굽 높은 구두. 하지만 영락없는 남자. 저 미친놈은 또 뭐야? 너 나 알아? 나는 너처럼 정신 이상자는 모르는데? 누군지 얼굴을 뚫어져라 보았다. 솔직히 절대 보고 싶지 않았다. 보고 있을 수록 눈이 문드러지고 정신이 곪는 것 같으니까. 하지만 나를 불렀으니 누군지 확인은 해야지.


 "감비르!"

 "오랜만이야. 잘 지냈니?"


 감비르였다. 내쪽으로 오자 향수 냄새가 확 풍겼다. 향수는 또 몸에 얼마나 떡칠을 했길래 코가 매울 정도로 독하게 냄새가 나는 거야? 아...이래서 바하르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고 했구나.


 "너 옷이 왜 그래?"

 "이거? 나, 진정한 진리와 자유를 깨달아버렸지, 뭐야."


 이놈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네가 괴악하게 여장을 하고 있는 거랑 진정한 진리와 자유가 대체 무슨 상관인데?


 "왜? 많이 이상하니?"

 "응. 대체 그건 뭐야?"

 "말했잖니. 진정한 진리와 자유를 깨달았다구."


 네가 그 말을 한 것을 내가 몰라서 물어? 그러니까 네가 보는 사람 눈이 썩을 것 같은 여장을 한 것과 진정한 진리와 자유의 상관관계가 대체 뭐냐고 물어보고 있는 거잖아. 그리고 말투는 대체 왜 이래? 이건 뭐 여자 말투도 아니고 남자 말투도 아니고 억지로 여자 우스꽝스럽게 흉내내려는 말투랄까? 그런데 그걸 얼굴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말하고 있다. 아니, 아주 자연스럽게, 원래 그랬던 것처럼 구사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게 왜 진정한 진리와 자유랑 관련이 있는 거냐구."

 "몰라서 물어보니?"

 "알면 물어보겠냐?"


 감비르는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세상의 모든 한계를 극복해내는 것이 바로 진정한 진리와 자유란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입기로 결심했어. 어때? 예뻐? 잘 어울려?"

 "그러니까 모든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랑 그런 모습이랑 무슨 관계가 있는데?"


 감비르는 오른손을 입에 살짝 가져다대며 고개를 살짝 틀더니 나를 가볍게 흘겨보았다. 아...나는 왜 아침부터 보고 싶은 라키사는 못 보고 이런 꼴을 봐야 하지? 켈라자야도 어지간히 미쳤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어떻게 말로 표현도 못할 정도로 미쳤다. 바하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겠다. 지금 내게 보이고 있는 이 태도! 이것도 마찬가지다. 남자가 억지로 여자를 흉내내려고 하는 모습. 그런데 너무 자연스러워. 너무 당당해. 이건 의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야!


 "남자와 여자는 어디까지나 인간 사회가 만든 구분일 뿐이야. 그 구분을 뛰어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진리와 자유로 가는 길이란다."

 "남자와 여자가 사회가 만든 구분이라고?"

 "응. 그게 얼마나 갑갑한 건지 아니? 단순히 구분이 아니야. 너무나 많은 차별이 존재한다구!"


 감비르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두 눈을 가볍게 찡그렸다. 야, 제발 그 이상한 짓 좀 그만하면 안 돼? 지금 네가 말한 남자와 여자가 사회가 만든 구분이라는 것도 뭔 말인지 이해가 안 되는데 그 태도 때문에 진짜로 심란하고 속이 울렁거려!


 "그건 아니지. 남자랑 여자가 몸이 다른데 어떻게 그게 사회가 만든 구분이야?"

 "아니, 그건 사회가 만든 장벽일 뿐! 그거 때문에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 차별을 당하는지 모르니?"

 "아니, 그러니까 남자랑 여자가 육체가 다른데 그게 사회랑 무슨 상관이야?"

 "남자의 신체적 특징과 여자의 신체적 특징을 모두 갖고 있는 사람도 있어. 그 사람은 남자니, 여자니?"

 "뭔 소리야?"

 "진짜 있어. 그런 사람들은 남자라고 해야 해, 여자라고 해야 해? 이상하지 않니?"

 "남자면 남자고 여자면 여자지, 뭔 소리야?"

 "그것이 바로 차별이야."

 "뭐?"


 이 말을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남자를 남자라고 하고, 여자를 여자라고 하는 것이 차별이라구? 뒤통수를 망치로 맞은 기분이 아니라 면상을 망치로 맞은 기분이다.


 "여자라고 반드시 여자답게 살아야할 이유는 없어. 그리고 남자라고 반드시 남자답게 살아아할 이유는 없어."

 "그래. 그런데 그거랑 저주술이 무슨 상관이야?"


 그래, 남자가 여자가 하는 일을 하고 여자가 남자가 하는 일을 하는 것이야 그러려니 할 수 있다. 결혼하지 않고 살면 남자가 하는 일이니 여자가 하는 일이니 구분할 것 없이 다 해야 하니까. 그런 이야기라면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지금 감비르가 하고 있는 이야기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신체적인 구분조차 사회가 만든 장벽이라고 한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잖아. 아랫도리가 묵직하면 남자고 아니면 여자지, 뭐가 그런 것까지 사회가 만든 장벽이라는 거야? 그리고 그게 대체 저주술과 무슨 상관이라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어머, 왜 그렇게 생각을 하려고 안 하니? 저주술은 당하는 것과 동화가 되어야 하잖아. 그러니까 중요한 문제란다. 너 이런 것도 몰랐니? 어머, 어떡해?"

 "야, 그래, 너 그러면 동물은? 너 말대로 동물한테 걸 거면 동물이랑 하나가 되어야 해?"

 "당연한 것을 왜 물어보니?"

 "그니까 그 하나가 된다는 것이 뭔데?"

 "진짜 동물과 같아지는 거."

 "진짜 동물과? 그니까 동물을 보고도 흥분해야 한다구?"

 "응!"

 "그게 말이 돼? 그건 그냥 종이 다른 거야!"

 "어멋! 너 지금 그 발언, 편견에 가득찬 차별!"

 "뭐가 또 편견에 가득찬 차별이라는 거야?"

 "수간에 대한 편견이 가득찬 차별! 그런 자세 정말 안 좋아."

 "뭐!"


 나 지금 잘못 들은 거지? 이건 남자와 여자의 육체에 대한 문제 정도가 아니다. 이걸 친구라고 해야 하나? 아니, 그 이전에 내가 똑바로 들은 거 맞지? 그러니까 종을 뛰어넘어서 육체적 사랑을? 그것을 이상하다고 하는 것이 편견이 가득찬 차별이라구? 이런 미친 병신을 봤나. 이건 어떻게 말로 설명할 문제가 아니다. 이건 정신병이야. 그런데 이놈은 어떻게 너무나 떳떳하게 이런 말을 뱉어? 그리고 그게 무슨 편견이 가득찬 차별이라는 거야? 그건 인간이 넘어서는 안 되는, 아니지, 넘을 수 없는 당연한 거잖아!


 그리고 왜 자꾸 편견, 차별 타령이야? 그게 무슨 편견이고 차별이라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왜 편견과 차별을 강조하는지 전혀 모르겠다. 어제 그 새끼의 저주 아냐? 감비르는 어제 그 망할 놈의 저주에 걸린 거야. 안 그러면 이런 말을 할 수가 없지. 저 태도, 저 말투도 상당히 짜증나고 토하고 싶게 만드는데 그 내용 앞에서 이제 이놈의 외관 따위는 정말 하찮은 거다. 어제 사람이 터져 죽은 사건도 이놈의 지금 이 짓거리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고 느껴질 지경이다.


 "야...아, 그래. 그런데 너 왜 자꾸 편견과 차별을 강조하는 거야?"

 "그것을 뛰어넘는 것이 바로 궁극의 저주술로 가는 길이야. 어쩌면 좋니, 너 벌써 너무 많은 걸 깨우쳐버렸어!"


 진심으로 '이 미친 새끼야, 역겨운 짓 그만하고 똑바로 말해!'라고 외치며 발로 배를 걷어차버리고 싶다. 치르치나에는 미친놈이 되는 공기가 잔뜩 깔려있나? 치르치나 어디선가 그런 공기가 마구 뿜어져나오는 거야? 켈라자야는 정신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이 감비르 앞에서는 켈라자야는 너무나 멀쩡한 인간이다. 얘는 어쩌다가 이렇게 돌아버렸지?


 "너도 나랑 같이 저주술 수련하는 것은 어떻니? 너는 이미 진리를 깨달아버렸잖아."

 "뭔 진리?"

 "편견과 차별을 뛰어넘는 것이 저주술의 핵심이라는 것 말이야."

 "미쳤냐? 내가 왜 저주술을 수련해?"


 감비르는 오른손으로 입을 가리고 까르르 웃었다. 누가 이 미친 놈 좀 어떻게 해 봐! 왜 이럴 때 켈라자야는 서점에 안 오는 거야?


 "나, 너한테 저주술 보여줄래. 내 손 잘 봐!"


 감비르가 왼손을 펼쳐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게 하더니 입을 굳게 다물고 자기 손바닥 위를 노려보았다. 감비르 얼굴이 시뻘개졌고 이마에 핏줄이 섰다.


 "어? 진짜 저주술이잖아!"


 감비르 손바닥 위에 엄지손톱만한 불덩어리가 생겼다. 이거 그냥 미친 줄 알았더니 이제 진짜 저주술 쓰기는 쓰네?


 "나 있지, 이거보다 더 큰 불덩어리도 만들 수 있다! 나 멋지지?"


 놀랍긴 하다. 하지만 전혀 안 멋있다. 저주술 수련하면 이렇게 미치는 거야? 그게 그렇게 위험한 거였어?


 "너도 꼭 편견과 차별에 저항해야 해! 알았지?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서 편견과 차별을 파괴하면 세상이 아름다워질 거야."

 "그니까 그 편견과 차별이...그래, 나 이제 일해야돼."

 "나, 나중에 또 올께! 우리 꼭 같이 투쟁하자!"


 감비르는 신난 듯 팔짝팔짝 뛰며 어디론가 가기 시작했다. 서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대체 뭐가 일어난 거지? 나는 무슨 대화를 나눈 걸까? 진짜 미치겠네. 분명히 감비르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정확히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모르겠다. 이래서 바하르가 감비르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고 이야기했었구나!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이 충격. 어떤 순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고사하고 무슨 말을 하고 들었는지조차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다. 이것을 기억하면 나는 미쳐버릴 거라는 생각에 나 스스로 그 기억을 지워버린 것 같달까.


 "야, 너 왜 그렇게 넋이 나간 표정이야?"

 "치르치나 진짜 어떤 곳이야?"

 "거기? 거기가...좀 그래. 그런데 왜?"

 "거기 어떤 곳이냐구! 왜 아무도 이야기를 안 해줘!"


 있는 힘껏 소리쳤다. 치르치나는 대체 어떤 곳이길래 켈라자야는 미쳤고, 감비르는 더 미친 거야? 왜 아무도 치르치나가 어떤 곳인지 제대로 이야기를 안 해줘? 거기는 뭔가 숨겨진 것이 있는 곳이야?


 "야, 뭔 일인데 소리쳐!"

 "진짜 치르치나 어떤 곳이냐구! 왜 다 미친놈이야?"

 "아, 치르치나 거기는...진짜 답답한 동네야."

 "뭐가 어떻게 답답한데?"

 "키란을 미친듯이 숭배해. 무조건 자기들의 믿음이 옳다고 하는 동네야. 거기는 진짜 좀 그래. 그런데 뭔 일 있었는데?"

 "아, 미쳤어! 치르치나!"


 이고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래, 어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단지 그것이 말로 변해서 입으로 기어나오지 않았을 뿐. 오늘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여장남자, 억지로 여자 흉내내는 말투, 그리고...편견, 차별, 동물...미치겠네.


 자리에 앉아서 책을 펼쳤다. 글자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사람은 터지고 편견, 차별, 동물. 라키사, 오늘 서점에 안 오기 정말 잘 했어. 평화가 온 거 아니었어? 앞으로 좋아질 일만 남았던 거였잖아? 그런데 어제, 오늘 대체 왜 이래? 멀쩡한 사람이 터져 죽는 방법으로 자살하지를 않나, 감비르는 뭔 이상한 짓거리를 하지 않나...아직도 더 나빠질 것이 남아있었던 거야? 밑바닥이 아니었어?


 서점 문 닫을 때까지 라키사와 켈라자야는 서점에 오지 않았다. 아침에 감비르를 만난 일을 제외하고는 다행히 별 일 없었다.



 이른 아침. 누가 서점 문을 두드린다. 이 이른 시각에 누구야? 서점 문을 열었다. 라키사였다.


 "라키사! 괜찮아?"

 "응. 미안해. 어제 아무 말 없이 안 나와서."

 "아니야! 안정 찾는 것이 먼저지."


 어제 안 오기를 정말 잘 한 거야. 너 어제 왔다가 감비르의 말을 들었다면 장담컨데 너 오늘부터 며칠간 정신을 놓아버렸을 거야. 나도 어제 반나절 정신을 놓고 있었다. 감비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이야기했어도 그렇게 충격받았을까? 조금 덜하기는 했겠지만 분명히 충격받았을 거다. 그 말을 듣고 충격을 안 받는 것이 비정상이지. 충격을 안 받는다면 그게 미쳤다는 증거다.


 "너희들 뭐해?"

 "켈라자야! 너 어제 왜 안 왔어?"

 "나? 어제...빨래! 옷이 안 말라서 못 왔어."


 그래, 네가 정상인이다. 켈라자야는 조그만 손가방에서 뭔가 꺼내더니 나와 라키사에게 손을 내밀어보라고 했다. 나와 라키사가 손을 내밀자 손에 작고 동그란 사탕을 하나씩 쥐어주었다.


 "이거 너무 맛있어서 너희들 것까지 가져왔어. 나 잘했지?"

 "응! 정말 잘했어!"

 "진짜?"

 "응!"

 "앞으로도 종종 너희들 먹을 것 챙겨와야겠다."


 켈라자야가 웃으며 서점 안으로 들어오더니 책장 사이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너 안 자?"

 "나 오늘은 책 읽을래. 책 너무 좋아."


 그래라. 저주술로 책을 파손하지만 않는다면 읽어도 별 상관 없을 거다. 문제가 있다면 이고가 뭐라고 하겠지. 켈라자야는 두께가 새끼 손가락만한 책을 빼내었다. 그 책은 대륙공통어로 적힌 책인데? 진짜 읽을 수 있을까? 뭐 알아서 하겠지. 그렇게 하루가 시작되었다. 점심은 처음으로 넷이 근처 식당에 가서 먹었다. 점심을 먹은 후 다시 서점으로 돌아와 평온한 일상을 보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서점 문을 닫을 시간이 되었다.


 "나 지금 루즈카 집에 가는데 너희 치롤라 문병 갈래?"

 "치롤라요?"

 "응. 그때 병원 이후에 본 적 없잖아."

 "예. 갈께요. 타슈갈, 너는?"

 "나? 갈께."


 이고는 켈라자야를 바라보았다.


 "켈라자야, 너도 같이 가자."

 "어디를요?"

 "내 여자친구 집. 여자친구에게 너 소개해야지."

 "예. 갈께요."


 날이 많이 어두워졌다. 이고가 앞장서서 걸었다. 루즈카 집은 가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거기는 갈 일이 아예 없었으니까. 이번이 나도 처음 가보는 거다. 치롤라는 괜찮겠지? 일곱 가지 꿈의 비밀을 풀겠다고 했는데 답없는 폐인으로 전락한 거 아니야? 바하르도 찾아와서 같이 데려갈 걸 그랬나? 아니야. 바하르가 동원령 때문에 경찰로 근무중이라고 하면 치롤라가 노발대발하겠지.


 "여기가 루즈카 집이야?"

 "응."


 이고가 데려간 집은 2층 건물이었다. 블랑쉬블르도 2층 건물을 혼자 사용하는 것 같았는데 루즈카도 이 건물을 혼자 다 사용하는 건가?


 "이 건물 전체가 루즈카 집이야?"

 "응."

 "루즈카 엄청 부자구나!"

 "그건 모르겠다. 돈이 떨어질 일이야 없지만."


 이고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루즈카 집 안에서는 절대 담배 못 태우니까 여기서 한 대 태우고 들어가자. 너네 치롤라랑 이야기나누려면 시간 좀 걸릴 거 아니야."

 "오빠, 제가 불 붙여줄께요! 타슈갈, 너도 내가 담배에 불 붙여줄께."


 켈라자야가 말을 마치자마자 입에 물고 있는 담베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공짜로 붙여주기 시작하면서 손가락으로 담배를 톡 건드리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손가락으로 담배를 건드리던 행동은 저주술과 별 상관없는 행동이었나보다. 그런데 이렇게 그 어떤 사전 움직임 없이 저주술을 사용한다면 당하는 사람은 어떻게 그것을 막을 수 있을까? 이건 상대가 저주술을 사용하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잖아. 켈라자야는 나와 이고의 담배를 잠시 바라보기만 했을 뿐이다. 어제 감비르처럼 얼굴 시뻘개지고 이마에 핏줄이 선다면 그것 보고 눈치챌 수 있겠지만 켈라자야는 그런 낌새가 전혀 없다.


 담배를 다 태우고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가 너무 밝다. 천장에는 매우 많은 초가 꽂힌 등이 매달려 있다. 벽이 하얀색이라 더욱 밝아보인다. 벽 한쪽은 색색의 작은 유리 조각과 빛나는 돌멩이들을 붙여서 장식해놓았다. 1층에는 책장이 여러 개 있고, 책장에 책이 꽉 차 있다. 루즈카는 돈이 진짜 많구나. 블랑쉬블르보다 돈 더 많은 거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루즈카가 이고와 왜 사귀어주는지 모르겠다. 둘은 아예 급이 다른 인간인데.


 "안녕하세요."

 "안녕. 잘 지냈어?"


 '예'라고 대답해야 한다. 그러나 '예'라고 하는 것이 옳을까? 이것은 참 거짓 문제가 아니다. 진짜로 '예'라는 대답이 안 나오려고 한다. 이틀간 일어난 일들. 그것을 겪으면서 잘 지냈다고 대답할 수 있을까? 이건 솔직히 맨정신으로 버티기 어렵다. 억지로 '예'라는 대답을 토해냈다. 하지만 목구멍 속에 남아 있는 소리는 여전히 '아니요'다. 그 소리를 밖으로 꺼내고 싶다.


 "치롤라! 친구들 왔어!"


 루즈카가 2층을 향해 소리쳤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발걸음이 이쪽을 향해서 아주 천천히 한 발자국씩 가까워진다.


 "켈라자야, 인사드려. 얘가 내 애인인 루즈카야."

  "내 이름은 켈라자야. 18살. 치르치나 출신."


 켈라자야는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반말로 자기 이름과 나이, 출신을 쭉 읊었다. 마치 혓바닥에 이 말이 새겨져 있는 것처럼. 루즈카는 켈라자야를 미소짓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나는 루즈카야. 너 이야기 이고한테서 들었어."

 "이름은 들어보았어요, 언니. 언니가 블랑쉬블르보다 더 강한가요?"

 "응? 나? 글쎄...나는 언니랑 크게 다툰 적 없는데?"


 역시 켈라자야는 정상이 아니구나. 루즈카는 오늘 처음 보는 것일텐데 다짜고짜 블랑쉬블르와 누가 더 강하냐고 물어보나디...루즈카는 전혀 놀라지 않은 것 같다. 이고한테 이야기를 들었다니 이런 애라고 예상을 하고 있었나보다. 그래도 이런 반응에 저렇게 태연하게 반응하다니 신기하다. 켈라자야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루즈카가 들고 있는 커다란 은빛 지팡이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안녕. 나 일곱 가지 꿈의 비밀을 풀 거야. 그거, 죽어야만 깨달을 수 있대."

 "야! 너 뭐해!"


 치롤라가 칼로 자신의 왼쪽 손목을 그었다. 칼이 손목을 베고 지나간 자리에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치롤라는 웃고 있다.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다. 저것도 미쳤어. 다 미쳤어! 피가 손바닥을 지나 땅으로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치롤라는 칼을 꼭 쥔 채 우리를 보며 미소짓고 있다. 그때였다. 루즈카의 커다란 은빛 지팡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켈라자야가 치롤라를 바라보더니 환한 표정을 지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우와! 손목 그으면 죽는 줄 아는 바보가 여기도 있네?"

 "뭐라구!"


 치롤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켈라자야, 지금은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니야! 진짜 죽으려고 손목을 그었다구.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지금 달려가서 칼을 빼았고 지혈해줘야 해! 치롤라는 두 눈에 힘을 잔뜩 주며 켈라자야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칼로 손목 그어도 안 죽어. 그거 너 손 잘리도록 그어야해."

 "나 진짜 죽을 거야. 일곱 가지 꿈의 비밀 밝혀내서 세상에 복수할 거야!"

 "진짜?"


 켈라자야의 말에 치롤라가 분노에 휩싸여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어머, 살짝 베었네! 주먹 잘 쥐잖아!"

 "네 눈에는 이 피가 가짜같니?"


 치롤라의 말에 켈라자야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진짜야."

 "너 다행이 눈은 멀쩡하구나."

 "응. 그래서말이야, 내가 너 죽여줄께."

 "뭐?"

 "너 죽고 싶잖아. 무서워서 못 죽는 거 아니야?"

 "아니! 진짜 죽으려고 하는 거야!"


 치롤라가 켈라자야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상처에서 계속 피가 흘러나오고 있다. 어서 칼을 빼앗고 지혈하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은데? 그나저나 켈라자야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자살하려고 손목을 그은 치롤라에게 할 말이 있고, 안할 말이 있는데 켈라자야는 해서는 안 될 말만 골라서 하고 있다. 켈라자야가 자살하려고 손목을 그은 치롤라에게 시비를 걸고 있어서 치롤라를 제압하지도 못하겠다.


 "진짜 죽으려면 가슴을 찔러야지."

 "너 진짜 어이없다. 이래도 죽거든?"

 "아니, 절대로. 내가 너 죽여줄께!"


 켈라자야의 말이 끝나자마자 치롤라는 갑자기 '윽!' 소리를 내며 털썩 주저앉았다. 치롤라의 손에서 떨어진 칼이 바닥에 떨어졌다. 치롤라는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렇게 치롤라가 바닥에 쓰러지는 동안 켈라자야는 계단을 뛰어올라가 치롤라가 떨어뜨린 칼을 집어들고 치롤라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저거 진짜 죽인다! 쟤는 지금 겁주려는 게 아니야! 쟤는 일반인처럼 행동할 거라 생각하면 안 되는 애야! 켈라자야가 진짜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본 적은 없지만 죽이려면 분명히 죽이고도 남을 애라구!


 "야!"


 계단을 뛰어올라가려는 순간이었다. 칼날의 끝이 치롤라의 목에 닿자마자 켈라자야는 칼을 놓치고 오른손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손이 저린지 손을 계속 털어댄다.


 "너니?"

 "아니야!"


 켈라자야가 나를 노려보며 물어보았다. 내가 뭘 했다고 그래? 나 아직 계단 절반도 못 올라갔다구. 계단을 올라가서 둘을 말려야 하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켈라자야는 치롤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치롤라는 여전히 가슴을 쥐어잡고 신음만 하고 있다. 켈라자야는 여전히 치롤라의 머리채를 움켜쥔 왼손으로 치롤라의 머리를 바닥에 쾅 내리찍어버렸다.


 "괜찮아. 죽어."


 날카로운 비명소리. 치롤라의 비명소리가 실내를 가득 채우고 있다. 저거 말려야 하는데! 그런데 겁난다. 아까 그 눈빛. 단순히 미친 것이 아니다. 켈라자야는 내게 방해하면 진짜로 누구든 죽여버리겠다고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다가갈 수가 없다. 그렇다고 지금 켈라자야를 가만히 놔두면 분명히 치롤라를 죽일 거다. 저건 겁주는 것이 아니다. 진짜로 죽이려는 거다.


 파지직!


 켈라자야 몸으로 작은 번개가 떨어졌다. 켈라자야는 치롤라 위로 힘없이 쓰러졌다. 저 번개는 분명히 저주술이다. 이 상황에서 저주술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딱 하나. 루즈카다. 켈라자야는 간신히 상체를 세우더니 루즈카를 노려보았다.


 "죽고싶다잖아. 왜 착한 일 하는데 방해해?"

 "아니. 걔는 죽고싶어하지 않아."

 "죽겠다고 손목 그었잖아. 진짜 죽겠대."

 "치롤라한테 직접 물어봐."


 켈라자야는 치롤라의 머리채를 움켜잡아 들더니 귓가에 고개를 대고 이야기했다.


 "너 죽고 싶지?"

 "잘못했어. 살려줘. 제발!"


 치롤라는 울고 있다. 저렇게 엉엉 울다니 정말로 무서웠나보다. 아니, 무서웠지. 켈라자야가 진짜로 자기를 죽이려 들었으니까. 루즈카가 손쓰지 않았다면 치롤라는 분명히 켈라자야 손에 죽었다. 이것은 확신할 수 있다. 그러니 치롤라가 지금 마구 울면서 살려달라고 빌고 있지.


 "죽어. 죽고 싶댔잖아."

 

 켈라자야는 치롤라의 머리를 다시 땅에 힘껏 내리찍었다. 그때 루즈카가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너 정말 언니 말 안 들을래?"


 다시 한 번 켈라자야 몸 위에서 번개가 쳤다. 아까 것보다 보다 선명하고 가지가 더 많았다. 켈라자야의 몸이 굳어버렸다. 아까처럼 쓰러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미동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루즈카가 계단을 올라가 켈라자야 옆에 쭈그려앉았다.


 "켈라자야, 언니 말 잘 들을 거지? 너 착한 아이잖아. 오빠 말만 듣고 내 말은 안 들을 거야?"

 "말 잘 들을께요."


 켈라자야가 힘겹게 대답했다. 루즈카는 켈라자야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켈라자야도 눈물을 흘린다. 왜 흘리는지는 모르겠다. 자기보다 강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에 분해서 흘리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느낀 것일까? 켈라자야가 눈물을 흘리자 루즈카는 켈라자야를 따스하게 안아주었다.


 "여기는 그런 곳 아니야. 알았지?"

 "예."


 루즈카는 포옹을 풀고 일어나 1층으로 내려왔다. 켈라자야도 루즈카를 따라 내려왔다.


 "모두 미안해. 오늘은 분위기가 엉망이 되어버렸어...미안하지만 지금 돌아가줄 수 있니? 치롤라 상처 치료하고 진정시켜야 해서."

 "예."


 루즈카 집에서 나왔다. 이고가 말없이 입에 담배를 물고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켈라자야는 계속 훌쩍거리고 있다.


 "돌아가자. 켈라자야, 너는 어떻게 할래? 오늘 놀랐을텐데 서점에서 자고 가든가."

 "아니에요. 저 먼저 가볼께요."


 라키사를 바라봤다. 정신이 반쯤 나간 것 같다. 켈라자야도, 라키사도 오늘 제정상이 아니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얘네 둘보다는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있다.


 "켈라자야, 라키사, 너희 둘 다 오늘은 그냥 서점에서 자고 가."

 "그래. 타슈갈 말대로 하자. 너희는 방에서 자고 나랑 타슈갈은 밖에서 자면 되니까."


 둘은 짧게 '예'라고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날이 흐려서 그런지 별이 잘 보이지 않는다. 굴뚝 여기저기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밤공기가 정말로 차갑다. 겨울의 날카로운 손길이 느껴진다. 오늘밤은 이불을 몸에 두르며 덜덜 떨며 자야겠구나. 그래도 둘이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로 무슨 사고 당하는 것보다는 내가 추위에 시달리며 잠을 청하는 것이 낫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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