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기적과 저주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2장 03화

좀좀이 2017. 9. 2.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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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8월 15일이구나. 방학이 이제 보름 정도 남았다. 예습을 많이 하지 못했는데 시간은 계속 빠르게 흘러간다. 날씨만 보면 아직 개학이 멀고도 먼 것 같지만 날짜는 하루하루 계속 흘러간다. 이고는 점심 먹고 인쇄소를 돌아보고 와야겠다며 지게를 짊어지고 나갔다. 라키사는 반납하지 않은 책을 수거하러 나갔다. 서점에는 나 혼자.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이 계속 머리 속에서 맴돈다. 그 책을 정말 수업 시간때 배울까? 날이 더운 만큼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 아직 라키사는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을 읽지 않았다. 그 책이 서점 안에 있는 것조차 모르겠지. 당연한 거다. 나도, 이고도 라키사에게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 그리고 키란 연구소에서 출간한 키란 전기가 서점에 있다고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나중에 정식 출판되면 서점에도 들어올 거다. 그때가 되면 라키사도 읽어보겠지. 라키사가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을 읽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가만히 있을 것 같지 않은데. 예전 키란 동상에 참배를 드리던 라키사의 모습이 계속 떠오른다. 라짐 마이슈프는 아무리 봐도 미친놈 같다.



 "타슈갈, 뭐 해?"

 "아다비아!"

 "나 안 보고 싶었어?"

 "아니야! 정말 많이 보고 싶었어!"


 갑자기 서점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아다비아였다. 아다비아는 검은 재킷과 하얀 민무늬 블라우스에 발목에서 한뼘 위까지 올라간 통이 좁은 검은 스커트를 입었다. 진짜 나와 다른 세계 사람이구나. 같이 학교 다닐 때에는 저 정도까지 다른 세계 사람이라고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아다비아를 보니 나와 완벽히 다른 세계 사람이라는 것이 확 느껴진다. 옷에서부터 '나는 높은 세계에서 사는 사람'이라는 말이 들린다. 아름답고 예쁘기는 하지만 절대 잡을 수 없는 꽃. 아니, 절대 잡아서는 안 되는 꽃. 잡으면 내가 분명히 견뎌내지 못하고 파멸해버릴 것이라는 느낌을 주는 꽃. 아다비아는 지금 자기를 보며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지? 아다비아는 내가 웃으며 정말 많이 보고 싶다고 대답하자 활짝 웃었다.


 "너 정말 나 많이 보고 싶었던 것 맞아? 어떻게 집까지 알려줬는데 한 번도 안 찾아오니?"


 아다비아가 여전히 밝은 표정을 유지하며 가볍게 톡 쏘아붙였다.


 "미안해. 네가 사는 동네에 놀러갈 짬이 안 났어."

 "거짓말! 방학인데 서점이 뭐가 바빠? 애들 다 놀고 있을텐데."

 "이래저래 일이 많았어."

 "그러면 서점 끝나고 놀러오면 되잖아!"

 "서점 끝나면 한밤중인데 어떻게 놀러가? 게다가 너는 일하러 가잖아."

 "나 위하는 척 하기는."


 아다비아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표정이 계속 밝다. 놀러올 것이면 자기가 놀러올 것이지, 왜 내가 놀러가? 남자가 여자 집에 가서 놀자고 부르는 것은 애들이나 하는 짓이라구. 아니면 정말 연인들이나 하거나. 누가 보면 나와 아다비아가 진짜로 사귀는 줄 알겠네. 얘는 진짜로 친구가 없나? 왜 연인도 아닌 나한테 연인들이나 하는 짓을 안 했다고 뭐라고 하는 거야? 뭐, 이런 모습이 아다비아답기는 하다.


 "아, 더워! 여기까지 오는 동안 피부 새까맣게 타버리는 줄 알았어!"

 "그러게. 더위가 당최 가실 줄을 모르네."


 아다비아는 재킷을 벗고 가방에서 부채를 꺼내어 펼쳤다. 이 더운 날에 재킷까지 걸치고 돌아다니다니 참 대단하다. 아마 실내에서만 일하니 저렇게 입을 수 있는 것이겠지?


 "대륙공통어랑 아드라스어 공부는 잘 되어가?"

 "아니. 전혀...역시 너 없으니까 정말 어려워. 혼자 될 거 같은데 막상 하려고 하면 하나도 안 돼."

 "그거 봐! 내가 있을 때 잘 했어야지. 책 펼칠 때마다 나 많이 생각났어?"

 "응. 네가 알려줄 때가 정말 그립더라."


 내 대답을 들은 아다비아가 아주 활짝 미소를 지었다.


 "라키사는? 라키사도 이제 여기에서 일한다면서? 라키사가 공부 안 도와줘?"

 "라키사는 내가 물어보면 알려주는데 너처럼 먼저 알려주거나 하지는 않아."

 "그것 봐. 진작에 나한테 고마워했어야지."

 "너한테 고마워했어! 뭘 안 고마워했다고 그래?"

 "당연히 더 많이 고마워했었어야지! 쌤통이다!"


 얘는 오랜만에 와서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사람 약올리고 있네. 확 '라키사도 잘 도와줘. 먼저 알려주지만 않을 뿐이야'라고 이야기해버릴까 보다.


 "그런데 연구보조원으로 일하는 것은 어때?"

 "조금 짜증나."


 아다비아가 얼굴을 찡그렸다. 뭔가 불만이 참 많아보인다. 중앙학문연구소면 아다비아가 그렇게 꿈꾸던 곳이잖아. 거기에서 막상 일해보니 마음에 안 드는 것 투성이인가? 설마 연구보조원에게는 쿠폰 안 주나?


 "왜 짜증나는데? 너 중앙학문연구소 정말 들어가고 싶어했잖아."


 아다비아는 내 말을 듣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연구실에서 남자들은 뭘 입든 별 말 없거든? 반바지를 입고 오든 슬리퍼를 끌고 오든 아무 말 안해. 그런데 꼭 여자들한테만 항상 단정한 복장 강조하는 거 있지? 맨날 이렇게 흰 블라우스에 검은 스커트 입고 굽 낮은 검은 구두 신으래! 대체 일하는 거랑 이렇게 답답한 복장을 차려입는 것이랑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어. 이렇게 입는다고 일을 잘하게 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게다가 꼭 여자들한테만 이런 복장을 강요해! 너 이해돼?"

 "응?"

 "왜 여자들만 이렇게 항상 답답한 복장을 하고 있어야 하냐구!"

 "아...조금 그렇네?"

 "그렇지? 복장이 그렇게 중요하면 남자들도 똑같이 입혀야지, 왜 여자들만 이렇게 입으라고 강요하는지 모르겠어!"


 솔직히 잘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그래도 직감적으로 이해한다는 시늉이라도 하지 않으면 아다비아가 격분할 거라는 것을 알았다. 그게 불만이라는 것이었어? 그것이 그렇게 큰 불만거리라는 것이 전혀 와닿지 않는다. 얘 라키사 보면 기겁하는 거 아니야? 라키사 지금 책 수거하러 나가서 이 뙤약볕 아래에서 열심히 돌아다니고 있는데.


 "그 복장이 그렇게 싫어?"

 "맨날 여자들만 이렇게 입으라고 하니까 문제지! 왜 여자들만 항상 이렇게 입어야 하는데?"

 "아...그게 그렇게 불만이었던 거야?"

 "이거 뿐만일 리가 없잖아!"

 "또 뭐 있어?"


 아다비아는 물 만난 고기마냥 또 다른 불만을 쏟아내었다.


 "맨날 손님 오면 여자 연구보조원들에게만 차 심부름 시켜! 게다가 비품 정리는 맨날 여자들 몫이야!"

 "네가 막내여서 그런 거 아니야?"

 "나 뿐만이 아니라구! 여자 연구원과 남자 연구보조원이 있어도 여자 연구원한테 차 심부름 시키고 비품 정리 시켜. 이거 완전 여자들은 가정부 역할까지 다 떠맡아야 해!"

 "아무나 하면 어때?"


 갑자기 아다비아 표정이 아주 밝아졌다. 10년 만에 만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두 눈을 크게 뜨고 탄성을 터뜨렸다.


 "그렇지? 그러니까 내 말이! 그거 아무나 하면 어때? 그런데 꼭 여자들한테만 시킨다니까? 완전 재수없어!"


 마침 그때 라키사가 책을 한 아름 낑낑거리며 들고 서점으로 들어왔다.


 "라키사! 잘 지냈어?"

 "응. 아다비아, 오랜만이야. 너는?"

 "나는 지금 타슈갈한테 내가 있는 곳이 얼마나 짜증나는 곳인지 이야기하던 중이었어. 그런데 너 무슨 책을 그렇게 많이 빌려갔었던 거야?"

 "내가 빌려간 것 아니야. 반납 안 된 책 수거해 온 거야."

 "아, 그렇지! 너 여기에서 일한다고 들었는데 진짜였구나! 너 여기에서 언제부터 일하기 시작했어?"

 "이번달부터."


 라키사는 수거해 온 책을 계산대 위에 올려놓고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서 세어보기 시작했다. 라키사 매우 고생했을 텐데 물이나 한 컵 떠다줘야겠다. 아무리 나와 일을 비슷하게 해야 같은 돈을 준다고 해서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라지만 이런 날에 책 수거하러 다니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라키사의 얼굴과 아다비아의 얼굴이 비교되었다. 아다비아 얼굴은 매우 하얬다. 반면 라키사 얼굴은 햇볕에 그을려서 검게 탔다. 안에 들어가서 물 한 컵을 떠서 나왔다.


 "라키사, 우리는 여자들한테 막 복장도 강요하고 맨날 차 심부름에 비품정리 시켜. 이고도 그래?"

 "이고는 그런 건 안 해."


 아다비아의 질문에 라키사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대신 나랑 똑같이 막 굴려. 쟤 책 수거해 온 거 봐."


 라키사의 대답에 한 마디 거들어주었다. 아다비아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계산대 위의 책을 말없이 가만히 쳐다보았다.


 "아...힘들겠다. 하지만 나처럼 짜증나는 기분은 안 들지?"

 "대신 너는 이 싹싹 더운 날에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책 수거하러 다니지는 않잖아."


 아다비아의 질문에 라키사가 바로 응수했다. 라키사는 아다비아의 질문에 딱히 기분이 상해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기분이 상한 것은 아다비아 같다. 아까 나와 대화할 때와 달리 라키사의 반응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 라키사가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잖아? 당장 둘의 피부색 차이가 모든 것을 이야기해주고 있는데. 게다가 자기도 라키사가 땀 뻘뻘 흘리며 책 들고 서점에 들어오는 것을 봤구.


 "라키사, 이거 마시면서 좀 쉬어."

 "고마워."


 라키사에게 컵을 건네주었다. 라키사는 물 몇 모금을 마시고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땀범벅이 된 얼굴을 닦았다. 라키사가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는 동안 아다비아를 바라보았다. 아다비아 표정이 아까와 달리 전혀 밝지 않다. 라키사가 자기 말에 썩 동조하는 모습이 아니라 기분이 안 좋아진 건가?


 "아다비아, 거기에서 배우는 것 많아?"

 "응! 정말 많은 것 배우고 있어. 우리가 수업에서 배우는 것들보다 훨씬 굉장한 것들 배워!"


 라키사가 아다비아에게 중앙학문연구소에서 배우는 것 많냐고 물어보자 아다비아는 에드자 대학교에서 배우는 것보다 훨씬 대단한 것을 배운다고 으스대었다.


 "어떤 것을 배우는데 우리가 수업에서 배우는 것보다 훨씬 굉장한 거라는 거야?"


 라키사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아다비아를 바라보았다.


 "거기에서는 진리를 배워."

 "진리? 어떤 진리?"

 "4원소를 이용한 아그라도 연구하고 인간 사회의 진리도 배워."

 "그래?"


 라키사는 아다비아의 대답에 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4원소를 이용한 아그라 연구면 마법 말하는 건가? 라키사는 저주술 책도 볼 만 하다고 했으니 아그라 연구에는 별 관심이 없을 수도 있겠다. 그리고 인간 사회의 진리는 또 뭐야? 아다비아는 라키사의 반응에 답답하지만 친절히 설명해주겠다는 투로 위로 올라가려는 목소리를 억지로 보통 높이로 유지하는 것을 팍팍 티내며 말했다.


 "응. 이거 진짜 대단한 거야! 아그라를 이용하면 정신력의 영향을 안 받아. 이건 확실히 정해진 공식이야. 어느 상황에서든 어떤 상태에서든 이 배열만 만들면 딱 된다니까."

 "그럴 수도 있겠어."


 라키사는 여전히 별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다비아는 '어떻게 이것에 놀라지 않을 수 있어?'라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신난 건지 열받은 건지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인간 사회의 진리도 정말 재미있어. 예를 들면 우리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건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하잖아? 그런데 알고 보면 우리는 매일 사람을 잡아먹고 있는 거야!"

 "뭐?"

 "뭐라구?"


 아다비아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우리가 매일 사람을 잡아먹고 있다고? 이건 무슨 미친 소리야?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사람을 잡아먹어본 적이 없다. 아니, 그 이전에 인간인 이상 어떻게 다른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거야?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누가 들어도 바로 미친 헛소리한다고 할 말이다. 그런데 아다비아는 아무 거리낌 없이 '우리는 매일 사람을 잡아먹고 있다'고 말했다.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대체 무슨 논리로 그런 말이 나오니? 나는 사람을 잡아먹은 적 단 한 번도 없어!"


 라키사도 아다비아의 말에 엄청나게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잠시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아다비아를 바라보더니 정신을 차리고는 아다비아에게 따지듯 물어보았다. 아다비아는 눈꺼풀에 힘을 주고 라키사를 가소롭고 어리석다는 듯 바라보았다.


 "우리 매일 음식 먹지?"

 "응."


 나는 대답했지만 라키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다비아만 바라볼 뿐이었다. 아다비아는 내가 대답하자 씨익 웃으며 말을 계속 이어갔다.


 "음식을 너희가 일일이 직접 만드니? 식재료는 어디에선가 사오겠지? 그 식재료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그것들은 모두 인간의 노동으로 만들어진 거잖아. 즉 우리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을 인간의 노동을 먹는 거라고 볼 수 있어. 여기까지 이해돼?"

 "응. 그럴 수도 있겠네."


 역시나 나만 대답하고 라키사는 아무 말이 없다. 라키사의 눈이 점점 날카로워진다. 처음에는 아다비아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눈빛이었지만 지금은 노려본다고 인식해도 될 정도다. 아다비아의 말과 태도를 보면 라키사가 저렇게 속으로 화가 날 만 하다. 대놓고 멀쩡한 사람에게 네가 매일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말을 듣고 기분 좋을 사람은 없을 거다. 그런데 그 말을 '너희들은 무식해'라는 투로 말하고 있으니 제대로 화가 나겠지. 아무리 아다비아라지만 이것은 나도 당황스럽다. 솔직히 더 말을 들어야하나 진지하게 고민된다. 당장 '너 말은 무조건 틀렸어!'라고 외치고 싶다. 하지만 아다비아니까. 아다비아니까 그런 말을 해도 일단 들어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당장 입 닥치라고 했겠지. 일단 인간의 노동을 먹는다는 것은 나름 이해가 되기는 한다. 그런 식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거다. 나야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지만.


 "인간의 노동은 인간 육체에 내재된 힘이 외부로 표출된 결과야. 즉 우리는 인간의 힘을 먹는다는 것인데, 인간의 힘이란 인간의 생명 그 자체이기도 해.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다고 볼 수 있어."


 뭔가 조금 허탈하기는 하다. 결국 노동의 결과를 먹기 때문에 인간을 먹는다는 이야기였어? 하지만 인간을 먹는 것과 인간의 노동의 결과를 먹는 것은 엄연히 다른 거잖아? 대체 누가 저따위로 알려주는 거야? 중앙학문연구소가 저런 궤변이나 연구하는 한심한 집단이었나? 거기는 전국에서 가장 뛰어난 수재들이 입학하는 곳 아니야? 그런 곳에서 고작 연구하고 배운다는 것이 저런 말 같지도 않은 궤변이라구? 얼핏 들으면 그럴싸하지만 단 한 번만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을 바로 알아챌 수 있는 소리를?


 "그러면 인간이 인간을 직접 죽여서 먹는 거랑 인간이 농부가 재배한 야채를 먹는 게 똑같다는 거니? 아무 차이가 없다는 거야?"


 라키사가 아다비아를 노려보며 따졌다.


 "응. 바로 그거야. 너는 역시 바로 이해하는구나."


 아다비아는 너무나 태연하게 라키사의 말에 대꾸했다. 아다비아 대체 왜 이러지? 이건 농담의 차원을 넘어섰다. 지금 당장 갑자기 활짝 웃으면서 '라키사, 농담이었어. 뭘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여?'라고 무마하려고 해도 될 일이 아니다. 이것은 솔직히 선을 넘었다. 그런데 아다비아는 그런 식으로 적당히 무마할 생각이 전혀 없어보인다. 오히려 이 논리야말로 진리라고 확실히 믿고 있는 모습이다.


 "그건 논리가 아니야. 역겨워."

 "이것이 바로 인간 사회의 진리야. 얼마나 단순하면서 명확하고 아름답니!"


 라키사는 아다비아의 말이 말 같지도 않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아다비아는 오히려 라키사를 낮은 사람 바라보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좋아. 네 말이 맞다면 말이야, 내가 재배한 야채를 내가 먹는다는 것은 내가 나를 잡아먹는다는 거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내가 나를 잡아먹으면 대체 남는 건 뭐니? 그건 혐오스러운 말장난일 뿐이야!"


 라키사가 소리쳤다. '네 말이 맞다면 말이야'라고 말하며 억지로 화를 참고 아다비아를 이해해보려 했지만 말을 이어가다보니 분통이 터져버렸나 보다.


 "그래서 학교에서 배운 것과 연구소에서 배우는 것에는 차이가 너무나 크다는 거야. 네가 아무리 역겹다 해도 어쩌겠어, 이것이 이 세상의 법칙인걸. 오히려 깔끔하고 아릅답잖아? 그 어떤 논리적 모순도 없어. 완벽하고 단순해."


 아다비아 진짜 미쳤어! 아다비아는 진정한 진리를 깨닫고 그것을 지금 무식한 사람들에게 정확히 그 진리를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 황홀하고 무한한 기쁨을 누리고 있다는 듯 살짝 얼굴이 상기되고 눈의 초점도 살짝 나간 채 옅은 눈웃음을 짓고 있다. 진짜 미치겠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말을 어떻게 저런 표정을 지으며 말할 수 있지? 그냥 잡아먹는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또 자기 딴에 논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구조에 맞추어 설명까지 하고 있어. 이건 정말 미친 거야. 정말로 미쳐버린 거야. 그거 외에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이 상황을 그렇게 설명하지 않는 한 받아들일 수가 없다. 아다비아가 말로 표현하는 것이 조금 서투르고 오해를 많이 사기는 했지만 저런 말을 할 애는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저렇게 변한 것이지?


 "그래, 좋아. 네 말이 높고 공부 많이 하신 분들이 진리라고 내놓은 것이라고 해. 그러면 너는 직접 인간을 죽여서 잡아먹을 수 있니?"


 라키사가 아다비아를 무섭게 노려보며 소리쳤다. 아다비아는 라키사의 분노가 가득찬 말에 움찔하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만하자. 우리 모처럼 모인 거잖아. 이런 것으로 논쟁 벌이며 얼굴 붉히지 말자."


 아다비아와 라키사를 이대로 놔두었다가는 서로 절교하겠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제 사람이 사람 잡아먹는다는 말도 안 되는 논쟁은 그만두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화제를 돌려야 한다. 가만히 놔두었다가는 서로 으르렁거리며 또 새로 싸울 주제를 찾겠지.


 "아다비아, 오늘 어쩐 일로 서점에 놀러왔어? 지금까지 계속 안 왔잖아."

 "나 한 달 만에 연구원으로 직책 올라갔어. 다음주에 본격적으로 연구원 연수랑 교육 받으러 뮈젤로 떠나. 그래서 너한테 인사하러 왔어. 종종 편지 보낼께."

 "정말? 연구원 된 거 축하해! 나도 편지 받으면 답장 보낼께!"


 아다비아는 오직 나만 바라보며 말했다. 라키사에게는 전혀 눈길을 주지 않았다. 라키사도 아다비아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지금은 아다비아에게 조금 아쉽다. 라키사가 단순히 화가 나서 축하한다는 말을 안 하는 것이 아닐 거다.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다는 말을 하게 만든 중앙학문연구소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연구원으로 직급이 올라갔다니 더 갑갑하다는 생각이 들 거다. 솔직히 나도 겉으로는 축하한다고 이야기해주었지만 속으로는 전혀 축하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아다비아가 중앙학문연구소를 그만두고 이 서점에 일하러 오겠다고 하다면 진심으로 축하해주었을 거다.


 "라키사, 조금 전 논쟁은 우리 잊자. 우리 친한 사이잖아."


 아다비아는 라키사를 향해 몸을 돌린 후 한참 아무 말 없이 있다가 갑자기 라키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알았어. 교육 잘 받기 바래."


 라키사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아다비아 또 자기 행동에 후회하는구만.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심했어. 이것은 라키사가 아다비아 나름의 화해의 제스쳐를 받아주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둘이 화해를 한다고 해서 아다비아가 자기 생각을 바꾼다는 것은 아니잖아? 단지 더 이상 그 문제로 충돌하지 말자며 서로 그 주제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을 뿐이다. 아까 아다비아의 그 황홀해하던 그 표정. 라키사와 절교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생각을 바꿀 것 같지는 않다. 그럴 거라면 이렇게 이 문제를 대충 덮어놓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다.


 "나 갈께. 돌아와서 우리 셋 다시 모이자! 그때는 더 재미있고 흥미로운 이야기 들려줄께!"


 아다비아가 손을 흔들고 서점에서 나갔다. 아다비아의 표정이 어두웠다. 자기가 생각했던 것과 너무나 다른 형태의 인사가 되어 기분이 많이 안 좋은 모양이다. 그렇지만 아다비아, 네가 말한 것은...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그나마 나와 라키사라서 그 정도로 적당히 덮고 갈 수 있는 것일 거다. 그런 말을 듣고 어이없어 하고 화내지 않을 사람이 세상에 과연 존재할까? 이건 아무리 온통 장난치고 가볍게 인생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는 블랑쉬블르라도 못 견딜 거다.



 아다비아가 서점에서 나간 후, 라키사는 컵에 있는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컵에 있는 물을 전부 들이킨 후 컵을 계산대에 내리치듯 세게 내려놓았다.


 "쟤 위험해. 미쳤어."

 "뭐?"


 라키사가 중얼거렸다. 정확히 잘 듣지 못했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한 것이냐고 되물어보았다. 라키사가 갑자기 내게 화를 내었다.


 "너는 쟤 저렇게되도록 뭐했니? 너희 사귀는 사이 아니야?"

 "나랑 아다비아가 뭘 사귀어? 그냥 친구일 뿐이라구!"

 "하아..."


 나와 아다비아가 무슨 연인 사이라는 거야? 자기 혼자 저러고 노는 거지. 나와 아다비아는 사귀기로 한 적이 아예 없다. 아다비아에게 물어봐도 나와 사귄다고는 절대 말하지 않을 거다. 아다비아도 보나마나 나와는 그저 친한 친구일 뿐이라고 대답하겠지. 라키사는 대체 어디를 보아서 나와 아다비아가 사귄다고 생각하는 거야? 나와 아다비아는 절대 그런 사이가 아닌데. 라키사는 나의 단호한 부정에 한숨만 푹 내쉬었다.



 라키사가 퇴근하기 직전에야 이고가 서점에 돌아왔다. 분명히 점심 먹고 서점에서 나갈 때 책을 받으러 인쇄소 돌아다니고 서점 주인 뵙고 온다고 했다. 그런데 지게에 책이 하나도 없다. 인쇄소는 아예 돌아보지 않고 온 건가?


 "라키사, 오늘 책 수거 힘들지 않았어?"

 "내 할 일 한 거 뿐야."

 "몸 안 좋을 때는 말해. 괜히 참지 말구."

 "걱정해주어서 고마워. 못 견디게 아프면 말할께."


 라키사는 이고와 내게 인사를 하고 퇴근했다.


 "이고, 왜 책이 한 권도 없어?"

 "몰라. 미쳐돌아가려나 봐."


 이고는 왜 책이 없는지 설명해주지 않았다.


 "무슨 말이야?"

 "몰라. 어떻게 인쇄소마다 책이 하나도 없냐?"

 "응? 인쇄소마다 책이 하나도 없어?"

 "하나도 없는 것은 아닌데...미친 놈들이 다 인식론만 찍어대고 있더라. 그거 진짜로 너네 강제로 배워야 할건가봐."


 이고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 인쇄소마다 전부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만 찍어내고 있다고? 그 미친놈이 쓴 것 같은 책을?


 "진짜야?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 그거 완전 또라이 개소리던데? 모든 인쇄소가 다 그 책만 찍어내고 있다니 말이 돼?"

 "아, 그러니까 내가 미쳐돌아가려나 보다고 이야기했잖아!"


 이고가 짜증을 내며 대출 카드를 챙기기 시작했다. 오늘은 하필 블랑쉬블르에게서 책을 받아올 것이 있는 날이다. 이고에게는 그다지 기분좋지 않은 날일 거다.


 "이고, 그런데 말이야."

 "응? 뭐?"

 "아...그게..."

 "뭐? 불렀으면 말을 해. 책 수거하러 나가는 사람 잡아놓고 왜 말을 안 해?"


 이고가 불렀으면 말을 하라고 다그쳤다.


 "인간이 음식을 먹는 것과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 것이 같다는 말 어떻게 생각해?"

 "누가 그딴 미친 소리를 해? 요즘 죄다 정신병 걸려가나."


 내 말에 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 너도 이 말이 황당하지? 이고에게 물어본 이유는 이고가 마딜인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마딜 땅에서는 저런 말을 들어볼 일이 전혀 없다. 하지만 혹시나 남아드라스 공화국에서 살 때 들어본 적이 있는지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그런데 이고는 살다살다 별 헛소리 다 듣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까 아다비아가 그게 요즘 학계에서 내린 정의라고 이야기했어."

 "아다비아가?"

 "응."

 "야, 네가 뭐 잘못 들은 거 아니야? 걔처럼 똑똑하고 공부 잘 하는 애가 뭔 그딴 헛소리를 해?"

 "아니야. 진짜로 아다비아가 그게 학계에서 내린 정의라고 하더라구."

 "에이, 설마. 걔가 뭐 잘못 들었겠지."


 이고는 지게를 짊어지고 밖으로 나갔다. 그래.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다? 그것은 마딜 공화국 뿐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미친 소리야. 대체 아다비아는 어쩌다 저렇게 된 걸까? 연구원 교육 받으러 뮈젤로 간다는데 별 일 없겠지? 별 일 없을 거야. 무슨 말을 듣고 저렇게 이상한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금방 원래대로 돌아올 거다. 그리고 웃으며 서점에 찾아올 거다. 차마 직설적으로 미안하다는 말은 못 하고 자기만의 표현으로 미안하다고 이야기할 거다.


 그나저나 모든 인쇄소에서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만 인쇄하고 있다구? 이건 확실히 불안하다. 느낌이 매우 안 좋다. 단순한 직감이 아니다. 그 책을 읽어보았기 때문이다. 그 책은 마딜 공화국에서 도저히 받아들여질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살다살다 키란보고 마법사라고 하는 책은 처음 보았다. 그 책대로라면 저주술은 없어져야 한다. 정확히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법을 받아들이고 '저주술'이라는 것은 진리를 모르는 미개한 자들의 우연한 발견들로 취급될 거다. 그렇게 우연히 발견한 것들이 이 땅 밖에서는 훨씬 발전한 하나의 거대한 체계인 '마법'의 아주 조그마한 파편들이었구. 이게 과연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나도 이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내 모든 것이 부정당하는 느낌이다. 비록 저주술사는 아니지만, 저주술을 사용할 줄도 모르고 저주술 책을 보며 욕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모든 인쇄소에서 라짐 마이슈프의 인식론을 인쇄하고 있다니 블랑쉬블르가 했다는 말대로 정말 개학한 후에 강제로 그 책을 배워야 하는 것 아니야? 그렇게 되면 과연 교수들과 학생들이 가만히 있을까? 예감이 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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