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기적과 저주

[자작 판타지 소설] 기적과 저주 - 1장 20화 (1장 종료)

좀좀이 2017. 8. 27.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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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력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1115년 7월 20일. 시간 정말 잘 가는구나. 방학이 되니 시간이 학교 다닐 때보다 훨씬 더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서 혼자 책 몇 줄 보다보면 벌써 점심먹을 때가 되고, 점심 먹고 잠시 멍때리며 쉬다보면 일해야 할 시간이 된다. 그 다음부터는 평상시와 같은 시간의 흐름. 일이 끝나면 학기중과 달리 마음놓고 푹 잔다. 그리고 개운하게 아침을 맞이하지. 방학이 시작된지 벌써 보름도 넘게 지나갔구나. 책 좀 열심히 봐야겠다. 이러다가 진짜로 책 얼마 보지도 못했는데 내일이 개학이라고 우는 일과 목도하겠다.



 누군가 서점 문을 거칠게 열었다. 이 아침부터 누구야? 이고 옆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문 여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서점에 어떤 놈이 이렇게 문을 부서지라고 세게 여는 거야? 이고도 깜짝 놀란 눈치였다. 둘 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열은 사람이 누구인지 쳐다보았다. 아주 익숙한 여자였다. 블랑쉬블르. 또 너냐? 오늘은 또 무슨 장난을 치려고 문을 그렇게 세게 열어젖히고 들어오는 거야?


 "이고, 큰일날 거 같아!"

 "뭐가?"


 블랑쉬블르는 서점에 들어오자마자 이고에게 큰일날 것 같다고 외쳤다. 하지만 나도, 이고도 절대 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블랑쉬블르가 우리한테 장난치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구. 또 사람 잔뜩 긴장시켜놓고 나와 이고가 긴장하면 '어머, 거기에 또 속니? 너희는 정말 생각이 없구나!' 라고 말하며 깔깔거릴 것이 뻔하다. 하지만 오늘은 안 속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문을 쓸 데 없이 세게 열어서 순간 놀라기는 했지만 지금은 짜증이 난다.


 블랑쉬블르는 계산대 앞으로 달려왔다. 누나, 연기 좀 좀 그만하세요. 그런 연기로는 속일 수 없어요. 이왕 큰일날 거 같다고 하려면 차라리 문 앞에서 털썩 쓰러지라구요. 누군가에게 공격받고 간신히 서점으로 도망쳐온 것 처럼요. 오늘은 연기 정말 못 하시네요. 이런 연기는 낙제에요. 제 학기초 아드라스어, 대륙공통어보다 형편없다구요. 아무리 표정 연기에 섬세하게 신경쓴다고 해도 처음부터 틀렸어요.


 "이고, 이거 봐!"


 블랑쉬블르가 이고 앞에 책 한 권을 내려놓았다. 이고는 심드렁하게 책을 쳐다보았다.


 "뭔데?"

 "이거 내용 좀 보지 않을래?"

 "이따 볼께."


 이고는 책 표지를 대충 한 번 보더니 역시나 귀찮다는 듯 이야기했다. 이고의 말투에는 '지금 너 무지 귀찮고 나 쉬고 싶으니까 좀 이따 와라'라는 느낌이 아주 묵직하게 실려 있었다. 손을 내젓지만 않을 뿐, 말 속에 이고의 밖으로 나가라고 휘휘 젓는 손이 들어있었다. 진짜 이 둘은 볼 때마다 이상하고 웃기단 말이야. 블랑쉬블르는 이고를 골탕 못 먹여서 안달이 난 거 같고, 이고는 그걸 또 매우 귀찮아하면서 칼같이 하지 말라고 하는 일은 거의 없다. 더 놀라운 것은 루즈카가 이 사실을 알면서 놔두고 있다는 것이구.


 "이건 많이 심각한 거야! 나 지금만은 너한테 장난치려고 온 거 아니야. 그러니까 이거 진지하게 좀 봐줘."


 블랑쉬블르가 이고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저건 연기인가? 그런데 연기 치고는 너무 사실같다. 저 굳은 얼굴과 미세하게 떨리는 눈썹과 입술. 말투도 뭔가 조금 다른 것 같다.


 "진짜야?"

 "진짜야! 이건 많이 심각해!"

 "장난 아니지?"

 "아니야! 정말로!"

 "장난이면 앞으로 절대 너 장난 안 받아준다?"

 "진짜야! 진짜라구! 그러니까 좀 봐!"


 블랑쉬블르가 크게 소리쳤다. 이고가 그런 블랑쉬블르의 모습에 조금 움찔했다. 나도 순간 놀랐다. 맨날 장난이나 치고 깔깔 웃어대는 블랑쉬블르 맞아? 오늘따라 진짜 왜 저러지? 정말로 블랑쉬블르 목소리에 장난기가 하나도 없다. 연기라면 라키사, 아다비아가 받은 점수 따위를 내가 받은 점수로 만들어버릴 훌륭한 연기. 그러나 연기같지가 않다. 블랑쉬블르가 이고에게 제발 봐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이다.


 둘이 아드라스어로 대화하고 있지만 이제 이런 간단한 말은 알아들을 수 있다. 예전이라면 이런 간단한 대화도 제대로 못 알아들었겠지. 확실히 내 아드라스어 실력이 많이 늘기는 늘었구나. 그나저나 블랑쉬블르는 오늘 왜 저래? 저 책이 대체 뭐 얼마나 중요한 책이라고 저 난리야?


 블랑쉬블르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아드라스어로 이고에게 무언가 열심히 이야기한다. 이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조용히 듣는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거지? 귀를 세워서 듣지만 잘 알아듣지 못하겠다. 심각한 만큼 어려운 이야기다. 그래서 못 알아듣겠다. 게다가 블랑쉬블르는 흥분해서 말을 정신없이 달리다 자빠졌다 다시 정신 못차리고 일어나서 또 달리는 것처럼 말한다. 빠르게 다다다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말을 끊고 답답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이를 악다물고 천장을 바라보다 다시 말을 다다다 쏟아낸다. 이고는 저 말을 자기가 남아드라스 공화국 출신이니 알아듣는 것이겠지? 이고도 뭔가 이야기한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내가 책에서 배운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방언으로 이야기하는 것 같다. 블랑쉬블르 말은 그래도 몇 마디 알아들을 수 있는데 이고 말은 진짜 못 알아듣겠다.


 "알았어. 읽어볼께."

 "너 꼭 읽어봐야 해?"

 "알았어."

 "진짜지? 진짜야? 약속했어?"

 "알았다니까! 꼭 읽을께!"


 블랑쉬블르가 이고와 내게 아주 간단히 '안녕'이라고 인사하고는 서점에서 휙 나가버렸다.


 "이고, 무슨 일이야? 블랑쉬블르 오늘 평소랑 너무 달라보이던데..."

 "몰라. 나는 신경도 안 쓰고 있는데 혼자 흥분해서 난리야."


 이고는 블랑쉬블르가 놓고 간 책을 내게 건네주었다.


 "야, 네가 그렇게 원하던 마딜어로 된 책 나왔다."

 "어? 진짜? 그거 저주술 책 아니지?"

 "아니야. 그런 책이면 블랑쉬블르가 아무리 떠들어봐야 내가 들고가라고 했겠지."


 이고가 건네준 책을 받아들었다.


 "그런데 블랑쉬블르가 너보고 꼭 읽어보라고 하지 않았어?"

 "누가 안 읽는대? 너부터 읽으라구. 그거 다음 학기에 네가 배울 내용이란다."

 "이걸 내가 배워?"

 "그렇대. 블랑쉬블르가 방금 그렇게 말하고 갔어."


 이거 방학때 다 보고 가면 나 갑자기 우등생 되는 거 아니야? 다른 애들 이 책 내용 공부할 때 내가 전공 공부를 더 할 수 있잖아. 방학때 진짜 열심히 하면 꼴찌 탈출이 아니라 라키사, 아다비아와 선두권 다툼을 하게 되는 거 아니야? 이거 진짜 열심히 읽어야겠다. 그런데 이것을 왜 다음 학기에 내가 배우지? 셀베티아 왕국이랑 관련있는 내용인가? 다음 학기에 이런 책을 배울 거라는 말은 없었다. 게다가 다음 학기에는 이번 학기에 본 책을 계속 볼 예정이다. 만약 이 책을 본다면 언제 본다는 거야? 일단 다음 학기에 배울 책이라고 하는데다 마딜어로 되어 있다니 방학중 정독을 여러 번 해야겠다. 먼저 책표지를 보았다.


 인식론 - 라짐 마이슈프


 "이고!"

 "왜? 그거 마딜어잖아. 나한테 뭐 물어볼 것이 있다고 불러?"

 "혹시 라짐 마이슈프 알아?"

 "라짐 마이슈프? 알기는 하지. 내가 직접 아는 건 아니구 듣기야 여러 번 들었는데 갑자기 왜?"

 "이 책 라짐 마이슈프가 썼다고 해서."


 이고가 눈을 살짝 치켜떴다.


 "그래? 블랑쉬블르가 호들갑떨 만하기는 했구나. 라짐 마이슈프가 썼으면 좀 위험할 건데...아까 이야기할 때 그거부터 이야기해줄 것이지."

 "어떤 사람인데 좀 위험해?"

 "뭐 있어."

 "뭔데 뭐가 있어?"

 "그 책 읽어봐. 나한테 다 물어보지 말고. 어디서 날로 먹으려고 들고 있어?"


 이고가 핀잔을 주었다. 시계를 보니 이제 슬슬 점심 시간이었다. 책을 방 안에 갖다놓고 나왔다.



 점심을 먹고 서점으로 돌아와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야, 너 저 책 안 보냐?"

 "일단 좀 쉬구."

 "퍽이나 이따 책 보겠다."

 "이따 볼 거야! 밥 먹자마자 책 보면 졸리단 말이야."


 이고의 잔소리를 흘려들으며 의자에 기대어 앉아 쉬려는 찰나에 문이 또 열렸다.


 "루즈카! 네가 이 시각에 웬일이야?"

 "안녕하세요!"

 "안녕. 오빠, 할 이야기가 있어요."

 "할 이야기?"


 아침에는 블랑쉬블르가 와서 진지하고 심각하게 이야기를 하고 갔다. 점심을 먹고 쉬려니 이번에는 루즈카가 찾아왔다. 루즈카 얼굴도 굳어 있었다. 그러나 블랑쉬블르처럼 흥분해서 계산대로 달려오지는 않았다.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또각또각 소리를 규칙적으로 내며 계산대로 천천히 걸어왔다. 루즈카는 이고 앞에 서자 한쪽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에서 책을 한 권 꺼냈다.


 "오빠, 이번에 키란 연구소에서 키란 전기가 출판되었어요."

 "드디어 완성되었어?"

 "응. 그런데 이거 좀 봐줄래요?"


 루즈카가 이고에게 책을 건네주었다. 이고는 책을 여기저기 돌려보며 살펴보았다.


 "꽤 고급으로 만들어내었네?"

 "예."


 루즈카 표정이 이상하다. 뭔가 상당히 떨떠름해 보인다. 불만이 많은 듯 눈을 살짝 찡그리며 이고를 바라보고 있다. 이고는 책 표지를 여기저기 살펴보더니 루즈카에게 건네주었다. 하지만 루즈카는 그 책을 받지 않았다.


 "이 책 마딜어로 되어 있어요?"

 "응. 당연히 마딜어로 되어 있어."

 "이 책 만드시느라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아니. 내가 한 것은 없어."


 루즈카의 딱딱하게 움직이는 표정은 내 말에 전혀 바뀌지 않았다.


 "책 집필에 참여 못하셔서 떨떠름한 거야?"


 이고가 물어보았다.


 "그게 아니라, 책을 읽어보았는데 뭔가 이상한 부분들이 조금 있어서 그래요."

 "뭐가 이상한데?"

 "뭔가 이상한 것 같은데 저도 잘 모르겠어요. 혹시 봐줄 수 있어요?"

 "알았어."


 이고는 책을 펼쳤다. 맨 앞부터 보는 것이 아니라 맨 뒷장부터 거꾸로 읽기 시작했다.


 "이고, 왜 책을 거꾸로 읽어?"

 "맨 뒤에 쓸 때 지쳐서 이상하게 써놓은 거 없나 보려구."


 이고는 블랑쉬블르가 책에 대해 이야기할 때와 달리 책을 꼼꼼히 거꾸로 읽어나갔다. 눈살이 살짝 찌푸려지는 것이 보였다. 불만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 책을 꼼꼼히 보다보니 신경이 쓰여서 그런 건지 분간이 잘 가지는 않았다. 어쨌든 이고의 미간에 주름이 조금 잡혔고, 눈에는 힘이 들어갔고,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렇게 계속 천천히 책장을 넘기며 책을 앞을 향해 넘겨가며 여러 장 읽었다.


 "너무 신경쓰지 마. 별 거 아니야."


 이고가 미소를 지으며 루즈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정말 별 거 아니에요?"

 "응. 별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거짓말 아니죠?"

 "아니야. 진짜 별 거 아니야."


 이고가 루즈카를 안심시켰다. 루즈카는 이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점에서 나갔다.



 "야, 이거도 네가 읽어라. 오늘 웬 일로 네가 그렇게 보고 싶어하던 마딜어로 된 책이 두 권이나 들어왔냐?"

 "이것도 안 봐?"

 "누가 안 본대? 너부터 읽으라구."


 이고는 루즈카가 서점에서 나가고나서 조금 지난 후 루즈카가 건네주고 간 책도 내게 먼저 읽으라고 건네주었다. 나야 마딜어로 된 책, 그것도 아직 시중에 판매되지도 않은 책을 두 권이나 보게 되어서 좋기는 하다. 그런데 왜 블랑쉬블르와 루즈카 둘 다 책을 들고 심각한 표정으로 서점에 찾아왔지? 진짜 뭔가 있는 책인가? 이고에게 물어봐야 이고는 나한테 '네가 읽고 알아서 좀 판단해라'라고 말할 것이 뻔하다. 이거야 마딜어로 된 책이니 이고 도움 없이도 혼자 읽을 수 있다. 남은 방학기간에 천천히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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